02월 상순(10수)
하루시조032
02 01
나도 이럴망정
무명씨(無名氏) 지음
나도 이럴망정 옥분(玉盆)에 매화(梅花)로서
바람비 눈서리는 맞을대로 맞을망정
박적이 나비인 체한들 앉힐 줄이 있으랴
박적 – 박각시 나방
여인의 절개랄까, 고집 같은 걸 노래한 작품입니다.
초장은 자부심(自負心)이 드러났고, 중장은 현재의 딱한 형편을 말하고, 종장은 그렇다고 하여 아무나와 벗할(짝할) 수는 없노라 의지를 표현하였습니다.
초장의 ‘나도 이럴망정’이라는 것의 형편 비유가 곧 ‘옥분에 담긴 매화’라는 것인데, 예전에는 우리 한반도의 기후가 훨씬 추워서 매화 등속은 분에 담아 실내에서 키우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바람비 눈서리를 처음부터 피할 수 있는 입장이었죠. 맞을대로 맞는다뇨.
한편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요. 나는 안에 들어 앉은 분매이건만 바깥의 노지 매화를 보면서 ‘너는 꼭 진짜 나비를 앉히거라’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3
02 02
꿈아 꿈아 어리칙칙한 꿈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꿈아 꿈아 어리칙칙한 꿈아 왔는 임도 보내는가
왔는 임 보내나니 잠든 나를 깨울랐다
이후에 님이 오셔드란 잡고 나를 깨워라
어리칙칙하다 - 능청스레 어리석은 체하는 태도가 있다.
꿈에서 개어나 꿈을 탓한 내용을 읊은 작품입니다.
어리칙칙하다는 단어는 국어사전의 표제어로 올라 있군요. 능청스레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칙칙 이라는 어미가 새롭습니다.
꿈 자체를 의인화해서 꿈이 일부러 능청 떨었던 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탓도 하고, 앞으로는 이리저리 하라 당부도 합니다. 꿈아 이 녀석아, 다음 번에는 님이 오시거든 일단 잡아두고서 나를 깨워주려므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 ‘꼼짝 말고 손 들어.’라는 말은 ‘손 들고 꼼짝 마.’로 바뀌어야 한다는 우스개가 생각납니다. 님을 잡기를 먼저 하고 난 후에 날 개워라. 그 순서에 입각한 행동을 강조해 두는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4
02 03
꼭대기 오르다 하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꼭대기 오르다 하고 낮은 데를 웃지 마라
네 앞에 있는 것은 내려가는 일 뿐이니
평지(平地)에 오를 일 있는 우리 아니 더 크랴
입지(立地)의 상대적 의미를 견준 내용입니다. 지금 높이 있는 사람에게 지금 낮은 데 있는 사람이 전하고 싶은 말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건 소위 출세한 사람의 우쭐거림을 경계한 말이기도 합니다. 교만(驕慢)해 하지 말라. 잘난 체할 교에 게으를 만. 글자 속의 말 마(馬)가 드러납니다.
종장 첫구 ‘평지에’ 다음에 ‘있어’를 넣어 읽으면 의미 전달이 더욱 쉬울 것입니다. 지금 낮은 데 있을지언정 높이 오를 수 있다는 의지와 희망이 자신을 ‘당당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5
02 04
깃 지는 학일런가
무명씨(無名氏) 지음
깃 지는 학(鶴)일런가 털 치는 사슴인지
젓칼치 형상(形狀)이요 멀기는 무슨일고
어디서 술 없는 밥을 먹고 누를 보러 왔는고
젓칼치 – 젓갈 담그는 갈치.
형상(形狀) - 모양새.
옛 풍습에 어두운 현대인의 입장에서 이 작품의 해석이 대략 난감합니다. 어떤 낯선 인물에게 ‘그대 어디서, 누구를 만나러 이 먼 곳까지 왔느뇨?’ 이런 질문을 던지는군요. 물론 질문자는 이 마을 사는 사람이겠고요. 상대를 보면서 그려내기를, 학(鶴)인지 사슴인지 출신 성분이 애매한데 당장은 꼬락서니가 젓갈 담그는 칼치 모습이니 멀리서 온 나그네가 분명하구나,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깃{우(羽)}은 ‘지다’라고 하고 털[모(毛)]은 ‘치다’라고 했군요. 예전에는 갈치가 아니라 칼치였군요.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종장의 ‘술 없는 밥’이 주는 비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에는 술과 밥이 함께 다녔던가요. 선주후반(先酒後飯)이라 하여 술 먼저 밥 나중이라고 배우자 부모님 만나러 가면 지켜야 하는 예법이기도 했고요, 반주(飯酒)라는 말처럼 끼니 때 곁들이는 한 두 잔의 술을 지칭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런 밥이 아닌 ‘맨밥’을 먹고 멀리서 온 나그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6
02 05
내 본시 남만 못하여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본시(本是) 남만 못하여 해온 일이 바이 없네
활쏘아 한 일 없고 글읽어 인 일 없네
차라리 강산(江山)에 돌아와서 밭갈기나 하리라
본시(本是) - 본디. 처음부터 또는 근본부터.
바 – 의존명사로 앞에서 말한 내용 그 자체나 일 따위를 나타내는 말. 한자 소(所)를 훈독할 때 ‘바 소’라고 한다. ‘바이 없다’는 ‘그런 일이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전에는 자주 쓰였으나 이제는 옛말이 되어버렸다.
일다 - 일구다. 이루다.
강산(江山) - 강과 산. 여기서는 전원(田園).
지나간 인생살이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남은 생애는 귀전원(歸田園)이 소망이라는 내용입니다. 환로(宦路)를 희망하고 노력했으나, 활쏘아 무관이 되지도 못했고 책읽어 문관이 되지도 못했으니 밭갈아 농군으로 살아가리라 희망하는 것입니다.
활쏘기, 책읽기, 밭갈기 세 가지 일을 각각 하나씩의 단어로 여겨 아예 붙여 쓰기를 했습니다.
요즘에는 농업이 가장 어렵답니다. 첨단 과학이 농업을 불루오션으로 발전시켜 최고의 품질과 최선의 이익을 창출한다네요. 젊어서 시작하지 않으면 아예 엄두도 못낼 것인 바, 이 작품의 작자가 귀전원하는 건 요즘 말로는 ‘귀촌(歸村)’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7
02 06
내라 내라하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라 내라하니 내라하니 내 뉘런고
내 내면 낸 줄을 내 모르랴
내라서 낸 줄을 내 모르니 낸동만동 하여라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을 말장난처럼 노래했습니다. 흔히들 ‘개똥철학’이라 놀리기도 합니다만, 각자 자신에게 맞춘 ‘존재론(存在論)’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지요.
초장은 앞말을 뒷말이 반복해서 덮는 서술이 재미있습니다. ‘내라’를 반복하고, ‘내라 하니’를 또 반복했습니다. 그런 다음 설의법으로 수사하니 운치가 더 있습니다.
작품 속에 ‘나’를 뜻하는 ‘내’가 12회나 등장합니다. 기본 45글자 중에 12 글자라니, 언어(言語)유희(遊戲)가 난만(爛漫)합니다.
종장에서는 내가 누구인 줄 모르는 까닭조차 ‘내라서’라고 짚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낸동만동’하다며 자신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한자(漢字)로 된 말이 한 자도 없으니 우선 반갑습니다. 우리말 어휘로만 만들어본 작품의 경험상 그 또한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짧은 평시조일망정 완성이 되니 뿌듯하고, 읊어볼수록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도 자주 입에 올리면 ‘낸동만동’의 의미조차 쉽게 풀릴 것만 같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8
02 07
내 눈의 고운님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눈의 고운님이 멀리 아니 있건마는
노래라 불러 오며 해금(奚琴)이라 펴낼소냐
이 내 몸 송골매 되어 차고 올까 하노라
해금(奚琴) - 향악기에 속하는 찰현 악기의 하나. 고려 예종 때에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속이 빈 둥근 나무의 한쪽에 오동나무 복판을 붙이고 긴 나무를 꽂아 줄을 활 모양으로 건 악기이다.
펴내다 – 여기서는 퍼내다(담겨 있거나 고여 있는 것을 길어 내거나 떠내다.)의 오기(誤記)인 듯.
송골매 - 맷과의 새. 편 날개의 길이는 30cm, 부리의 길이는 2.7cm 정도로 독수리보다 작으며 등은 회색, 배는 누런 백색이다. 부리와 발톱은 갈고리 모양이며, 작은 새를 잡아먹고 사냥용으로 사육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해안이나 섬 절벽에 서식한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이다. 송골(松鶻).
님을 탈취(奪取)해 오고 싶은 욕망을 노래했습니다. 초장에서 그 님은 가까이에 보입니다. 중장에서는 그 님은 불러올 수는 없다고, 꼬여서 올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진단하였고, 종장에서는 차고 와야겠노라 자신이 송골매가 되겠노라 다짐합니다.
용자(勇者)만이 미녀(美女)를 취(取)할 수 있다는 서양 속담이 생각나기는 합니다만, 평화주의자로서 마뜩치는 않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39
02 08
내 나를 풀쳐 내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나를 풀쳐 내어 열다섯만 하였고자
센 털 검겨 내어 아이 양자 맹글고자
이 벼슬 다 드릴망정 도련님이 되고자
풀치다 - 맺혔던 생각을 돌려 너그럽게 용서하다. 여기서는 풀어헤치다 (속마음을 거침없이 털어놓다.)로 보아야 할 듯.
검기다 - '검게 만들다' 정도로 풀이됩니다.
양자(樣姿) - 겉으로 나타난 모양이나 모습.
도련님 – 도령(총각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 한자를 빌려 ‘道令’으로 적기도 한다.)의 높임말.
늙은이가 소년이 되고 싶은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초장의 열다섯 살, 중장의 아이 양자, 종장의 도련님 등이 똑같은 목표입니다. 나이듦에 대한 무력감(無力感)과 무망(無望)하지만 젊어지기를 소망하는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100세 시대를 맞았다고 하는 근래 우리네 사정에서는 무조건 젊어지기를 바라기보다는 ‘노망(老妄)들지 않고’라든지, ‘제 발로 걸을 수 있기’ 등의 조건부 장수 소망이 회자(膾炙)되고,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도 유행(流行)되고 있지요.
아무튼 이 작품의 각 장마다 ‘~고자’로 운율을 만들었는데, 소망의 극진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0
02 09
내 그려 꿈을 꾼가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그려 꿈을 꾼가 님이 그려 꿈에 뵌가
어여쁜 얼굴이 번듯이 뵈노매라
꿈이야 꿈이건마는 자로자로 뵈아라
자로자로 – 자주자주
꿈으로나마 자주 보기 바란다는 작품은 꽤나 많이 있습니다만, 초장에서 꿈에 뵌 님의 원인이 내가 님을 그리워함이냐 아니면 님이 나를 그리워해서 꿈에 나타난 것이냐 물어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물론 쌍방이 모두 그리워해서 꿈에 서로 뵈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겟지요. 그래서 물어보기만 해 놓고서 꿈일지언정 자주 만나길 바란다는 소망으로 직설(直說)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도 한자어가 섞이지 않은 순 우리말 어휘로 되어 있군요. 그리고 초 중 종장의 끝이 모두 ‘뵈다’의 활용형인 점도 의미상 각운(脚韻)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1
02 10
내가 죽어 잊어야 옳으냐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가 죽어 잊어야 옳으냐 네가 살아 평생에 그리워야 옳다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거니와 살아 생이별 더욱 섧다
차라리 내 먼저 죽어 돌아갈께 네 날 그리워라
연모(戀慕)의 정을 자문자답(自問自答)한 작품입니다. 생이별을 앞둔 연인 사이에서 ‘차라리 죽자꾸나’ 비장한 각오를 노래로 엮은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음수율은 애당초 무시되고 있습니다.
작품을 뜯어보니, 초장은 질문(質問)이고, 중장은 답변(答辯)이며, 종장은 선택(選擇)입니다.
종장의 선택을 살펴보니, ‘고통(苦痛)의 전가(轉嫁)’를 택하고 죽겠다는군요. 전가 – 구를 전, 떠넘길 가. 잘못이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씌움.
차라리 님이 남아 날 그리워하시게나, 안타까움이 배가(倍加)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시조는 우리 민족이 누려온 대표적 정형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