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추수감사절
말씀 / 시편 23:1-6절
요절 / 시편 23: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갑니다. 그런 와중에 절반 이상이 극한 추위와 질병으로 죽습니다. 다음 해 3월, 이들을 불쌍히 여긴 인디언이 옥수수와 먹을 것을 주며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농사 짓고 추수하여 생존한 그 해,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3일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그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다민족국가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큽니다. 처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이 백인들의 나라가 아니며, 목숨을 빚지고 시작한 나라임을 말합니다. 인종 장벽을 넘어 약한 자, 불쌍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나눔의 손을 내밀어야 하는 감사 축제임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수확기는 추석과 비슷하니, 한가위를 추수감사절로 전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지부는 추석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한국의 추수감사절 유래를 생각하면, 좀 더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은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 교회 서경조 장로가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일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을 제안함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선교사의 입국은 절대 희망을 의미했습니다. 열강에 치여 망해가는 땅, 미신과 오래된 구습에 쩔어 영적으로 죽어있는 땅, 그러한 절망의 땅에 손을 내밀은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한국의 추수감사절은 절망중에도 희망을 보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희망의 하나님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23편 말씀을 추수감사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들은 오래토록 상처로 남아 가시처럼 내 영혼을 찌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그런 상처가 없었기에 오늘의 고백을 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편, 22편에서 다윗은 스스로를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거리가 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의 사건인지, 아니면 아들의 반역으로 피난 행렬에 오른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은 갖가지 비방과 고통을 맛본 사람입니다. 다윗의 시편은 그런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만들어지고 드려진 고백입니다. 다윗의 찬송시를 통해 우리 또한 하나님을 향해 합당한 감사의 단을 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같이 암송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 때로는 왕과 백성,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목자와 양으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다윗 시대 사람들처럼 짐승 양을 쳐보았다면, 1절의 고백이 지금보다 더 깊이 와닿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목자와 양은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단지 생명의 관계라는 의미를 말하고자 했다면, “여호와는 나의 아빠이시니, 나의 엄마이시니” 그렇게도 표현해도 되었습니다. 양과 목자라는 표현은 지극히 하찮은 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관계입니다.
10여년 전 시골 어머니 집에 내려갔을 때, 못 보던 개, 예쁜이가 있었습니다. 본래는 시골에 버려진 유기견이었습니다. 작은형은 근무처인 시골 농협 근처에 버려진 것을 발견하고 농협의 공터 한구석에 집을 만들어주고 사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가운데 개를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한쪽 눈이 터져 실명해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어머니 집으로 데려왔고, 어머니는 그를 예쁜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쁜이가 저를 처음 보고 낯설어 짖었는데, 그러자 형이 무척 기뻐하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예쁜이 잘 짖네, 나는 예쁜이가 성대수술하여 못짖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집으로 데려와서 한두 달 있더니 짖더라구, 그동안 두려워서 못짖었던거야, 여기가 집이다 생각하니 짖는 것 같아’, 목자와 양의 그림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쁜이가 다윗처럼 시를 쓸 수 있었다면, 작은 형을 향해 고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람의 먹고 남은 밥을 먹고 마당 한구석 허름한 곳에서 잠을 잤는데도 말입니다. 버려지고 상처입고 죽음으로 끌려가는 하찮은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현대인들은 불안과 두려움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팬테믹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었습니다. 기후위기, 환경오염, 자원고갈, 전쟁과 탈세계화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은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이나 질병으로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 불완전한 모습을 가진 자아 인식에서 오는 불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2030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날마다 40명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절대빈곤의 시대를 벗어났는데도 상대적 빈곤감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상대적 빈곤감에서 벗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삶의 현장에서 매번 느끼는 것은, 그런 것이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험이 많아진다고, 나이를 먹는다고 불안과 두려움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사 죄사함을 주시기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죽음의 세력이 가득한 세상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때마다 말씀을 주시고 은혜의 손길로 함께 하사 허무와 심판으로 끝날 인생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믿음으로 살도록 동행하십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두려운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마다 공급해줍니다. 연단이 필요하면 연단을 주시고 축복이 필요하면 축복을 주십니다. 그를 통해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까지 인도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에 따라 울고 웃지만,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과 쉴만한 물가는 양들에게 생존의 문제입니다. 말라비틀어진 풀과 오염된 물을 먹으면서 건강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푸른 풀밭?’하면, 저는 어릴 적 국민가수였던 남진씨의 히트곡이 떠오릅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네...”, 넓은 잔디마당에 현대식 한옥으로 지어진 집에 커피향 가득히 채우고 살아가면 안식과 평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집에 살아도 여전히 스트레스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줄 알지만..., 많은 이들이 좋은 집을 푸른 풀밭으로 생각합니다. 한때 어떤 이들은 코인시장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생각했습니다. 코인으로 대박을 터뜨리면 힘든 직장생활 굿바이하고 마음껏 여행하고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푸른 풀밭, 블루오션인 줄 알았는데 말라비틀어진 레드오션, 쉴만한 물가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병들이는 오염된 물가인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근본 속성은 평화보다 싸움, 건강보다 상처를 안겨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참된 풍요와 건강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다 보면 편안한 날이 있고 힘든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편한 날이어야 풍성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푹푹 찌는 여름의 무더위처럼 답답하고 힘든 시간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칼로 에이는 것 같은 겨울의 추위를 통해 자기발견하고 이 땅에 매인 마음을 깨우고 하늘을 향하여 눈을 돌리게 합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망하는 줄 알았는데,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은혜로운 하루 하루를 보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는 모든 날들을 통해 우리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며 모든 일에 배부르며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도록 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3)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 욕망을 따라갑니다. 사람에게 좋은 욕망도 있지만, 위험한 욕망, 어그러진 욕망도 있습니다. 바른 길, 마땅한 길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어그러진 길을 고집합니다. 때로는 반발심으로, 때로는 유혹을 좇아 그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말씀으로, 성령의 손길로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사건을 통해 깨우치기도 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있는 영을 갖도록 소생시킵니다. 자기를 의지하던 자가 겸손히 말씀을 의지하고, 자기 생각을 앞세우던 자가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앞세우기 시작할 때, 건강한 영혼, 살아있는 영혼, 의로운 영혼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문제의식에 자주 몰입합니다. 아마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을 맞이하면서부터 인 것 같습니다. 이전에 몰랐던 자기발견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내가 교만하고 둔한 사람이었구나!’, 어릴 적부터 인정과 칭찬을 많이 받아서인지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내면 깊숙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수록 영적 센스가 둔하고 사람을 돕는 일에 게으르고 위기앞에 연약한 나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자기발견을 할수록 자책을 많이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은혜로 사는 자임을 또한 발견합니다. 이전에 가볍게 보았던 은혜가 크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동역하며 격려하며 함께 배우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푸른 풀밭이요 쉴만한 물가였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배우며 닮고자 애쓰는 그 길이 진정 빛나고 영광스러운 의의 길을 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풍성하고 의로운 길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양들은 산 위의 초장에서 풀을 먹고 나면 다른 산에 있는 초장으로 가기 위해 골짜기로 내려가야 합니다. 골짜기의 어두컴컴한 그늘에는 늑대나 이리같은 맹수들이 있습니다. 양들이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그와 같이 인생 여정중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통의 문제에서 열외시켜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큰 고통가운데 노출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길을 걸었던 것처럼, 다윗이 광야에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던 것처럼, 제자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시기들은 심각한 데미지를 남깁니다.
다윗의 감사제목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그런 위기가 있음에도 해(damage)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며, ‘안위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긴 나무로 주로 양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막대기는 작고 짧은 단단한 곤봉같은 것으로써 맹수에게 던져 쫓아보내는 도구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환난가운데 있는 자들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으로 길을 내십니다. 기도시간을 통해 내면을 위로하시고 새 힘과 용기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시편을 보면,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는 다윗의 기도들이 많습니다. 다윗은 부르짖으면서 한편으로 음성을 듣습니다. 그를 통해 치유받고 회복되고 다시 용기를 냅니다. 환난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견디는 법을 배웁니다. 믿음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신비한 비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고백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도살당한 어린 양처럼 취급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올 한해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건지신 하나님께 감사 고백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부터는 시의 이미지가 목자에서 집주인으로 바뀝니다. 양들을 돌보는 수고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목자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정치인 다윗의 주위에는 다윗이 무너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원수들이 많았습니다. 다윗은 젊은 날부터 끊임없이 원수를 만났습니다. 골리앗, 사울은 다윗의 대표적인 원수입니다. 인생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이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원수가 나를 미워하고 파괴하려고 할 때, 원수의 미움과 어둠이 내게로 전염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원수를 따라 ‘흑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았습니다. 원수를 보기보다 원수 너머에 있는,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잔을 채워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힘들게 광야를 떠돌 때, 기름부음 받은 자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사울 집안 출신 시므이가 달려와서 다윗을 조롱했습니다.(삼하16:5-14)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꺼져라! 너는 사울왕을 죽인 죄값을 지금 받고 있는거야!’ 그러자 다윗의 부하들이 분노합니다. ‘왕이여, 아무리 급해도 저 놈만큼은 죽여야 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지금 원통하게 조롱을 당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게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환난당한 자, 원통한 자,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사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원수가 주는 고통보다 하나님의 보상에 더욱 주목했습니다.
저는 지난 해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고통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이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축복의 손길을 보여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믿음의 가정들을 세워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 모임이 죽어버린 모임, 문제 많은 모임이 아니요 여전히 하나님의 함께 하는 모임인 것을 드러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올해 경민 효진 목자에게 기름을 부으사 믿음의 가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잔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 말씀은 또한 최후의 승리, 최후에 주어질 상급을 생각게 합니다. 아담이 사탄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범죄한 이후, 세상은 죄와 죽음아래로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원수 사탄이 달려와서 고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 인간,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저 인간이 엉터리로 목자로 산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 마귀가 보는 가운데 ‘최베드로에게 영생을 주노라’, 엄숙히 선언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 최베드로, 이제 예수와 함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기를 허락하노라’, 원수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가장 위대한 상급입니다. 그때 택함받은 모든 자들이 소리 높여 외칠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선하심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좋았더라’가 ‘토브’입니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룻기를 보면 룻이 나오미와 동행하고, 나오미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보아스 침실에 들어갔을 때, 그것을 ‘헤세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불쌍한 자를 돕고자 온전히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란 택하신 자들을 좋게 봐주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좋게 보듯이,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좋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택하신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한 날, 좋은 날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착하지 않은 날, 상태가 안좋은 날에도 그렇게 보십니다. ‘따른다’는 말씀은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첩보영화를 보면, 추적기를 붙여 놓으면, 그가 어디에 숨든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서 찾아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게 선하심과 인지하심의 추적기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신 자들이 어디에 있든지, 좋게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부끄러운 자리로 숨어들어가도 따라가고 회복을 시키시고 사람들속으로 숨어도 있어도 따라가서 주 앞에 서도록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만 세상을 헤쳐나가고 경건하게 순전하게 살아야 한다면, 무거운 세상의 십자가 위에 더 무거운 신앙의 십자가를 얹져 놓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회개케 하시는 것이요, 내가 결단하는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결단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안에 영원토록 거할 수 있습니다.
“모래위의 두 발자국”이란 예화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보이지 않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제일 힘들었던 그 때, 진짜 함께 해주기를 원했던 그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와 같이 나 홀로 세상에 던져진 것처럼 생각되는 시기들이 있습니다. 진짜 열심히 노력했는데 더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시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시간을 견디지 못해 뜨거웠던 열정을 꺼버리고 냉소와 불신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내가 너를 안고 가고 있었다”, 누군가 지금 믿음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위기의 때마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좋은 것을 주시려는 주님의 손길 때문입니다. 여전히 좋아하고 여전히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손길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힘든 날이 올수록 힘든 것만 보지 말고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있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를 믿음으로 말씀 한마디 가슴에 담고자 귀를 열어야 하고 성령의 음성이 들리기까지 기도의 손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 속 어둠이 물러가고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나올 때까지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러한 추수감사절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