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행복을 찾아가는 시인의 행로
-정철수시집 『신독(愼獨)』
김명옥(시인)
정철수시인이 시집 『신독(愼獨)』의 시평을 부탁해왔다. 난 정시인의 부탁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가 첫 시집 『지지 않는 달』을 발간한지도 10여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만 아니라, 동인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작품도 부지런히 쓰는데 두 번째 시집 발간소식이 없어 몹시 궁금하던 차에 그의 전화는 나를 몹시 반갑고 고맙고 행복하게 했다.
내가 정철수시인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그는 성남일화천마프로축구단의 사무국장이었다. 그를 만나 후 체육인은 거칠고 우락부락할 것이라는 내 편견은 사라졌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 따뜻한 말투, 세심한 배려, 절제된 언행은 마치 조선시대 선비 같았다. 첫 만남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신념에 찬 목소리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활화산처럼 분출하던 그는 그 후, 성남탄천문학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문예운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2번이나 강산이 변했는데도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선비다.
성남일화천마프로축구단이 성남 FC로 바뀌었고, 그도 충청남도체육회사무처장으로, 에코비전21편집위원으로, 지금은 대학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교수로 바뀌었지만 스포츠와 문학을 사랑하고 아끼는 스포츠전문가이자 스포츠문학가, 즉 시인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첫 시집 『지지 않는 달』이 그리움에 대한 시를 담고 있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꿈이라는 주제가 중심으로 자리한 시”라고 했다. 특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 외롭고 지친 이들, 삶 앞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들, 꿈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읽혀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제 정철수시인의 꿈과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 동행해보고자 한다.
1. 사랑이 만든 여백의 아름다움
시는 깊은 울림을 주는 시적장치가 있어야 하고 철학적인 사색과 미감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의 시집 제목 『신독(愼獨)』은 그의 삶의 철학을 직접 표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고,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보다 항상 자신을 다스리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적 대상을 관찰하여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직설적로 드러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시적 대상에 숨겨진 의미와 사상을 제시한다.
무심히 걷는 발걸음
네 그림자 따라 걷는다.
너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좋다
-「너를 향하여」전문
「너를 향하여」는 2연 4행의 짧은 시다. 그리고 특별한 시적 장치나 철학적 사유도 없다. 시적 대상은 ‘너’이며, 행위는 ‘너를 향하여’ 이며, 너를 향하여 가는 방법은 ‘따라 걷기’라고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나 욕심, 욕망이 없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걷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생각과 견해에 집착하는 인간관계에서는 무심보다는 사심이 늘 앞서기 때문이다. 그도 “무심히 걷는 발걸음”이라 했지만 결코 무심할 수 없었음을 “너와 함께 있다는 것/그것만으로 좋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다음은 침묵이다. 침묵의 힘은 뇌성벽력보다 강하다. 침묵을 깨우는 것은 소리다. ‘네 그림자’와 ‘발걸음’은 침묵이며 침묵을 깨우는 소리다. 나의 존재의미를 “너와 함께 있다는 것”에서 찾고 있는 「너를 향하여」는 특별한 비유나 상징이 없는 묘사만으로 언어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이제 침묵이 주는 여백의 공간을 채워 넣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너’의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육친이든 초월적인 존재든 상관없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2연 4행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들풀이면 어떠랴
누구도 찾는 이 없으면 어떠랴
햇살 비추고
바람 불어
밤하늘별과
사랑 속삭일 수 있으면
-「행복」전문
그가 ‘너를 향하여’ 가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지면 그 즉시 아무 증거도 없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의 대상이 ‘들풀’이라도 상관없고, 찾는 이 없어도 관계없다. ‘햇살’ ‘바람’ ‘밤하늘별’과 “사랑을 속살일 수 있으면” 그것이 삶의 의미이고 행복이다.
사랑의 대상은 ‘너’에서 ‘들풀’과 같은 자연물로 확장된다. ‘들풀’대신 비, 구름, 바람, 꽃, 새 나무 등 어떤 자연물로 환치시켜도 상관이 없다. 확장된 자연물은 그와 병치되면서 배경으로 물러난다.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자연이 주는 행복은 무위자연의 행복이다. 그는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일상의 소소하고 평범한 것에서 행복을 찾고 행복을 확대 재생산해 나간다.
현대도시사회는 다양함이 공존하고 용인되는 시대다. 공존과 소통부재의 이율배반적인 시대에 자연은 도시생활을 하는 그가 몸과 마음과 정신을 치유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으로 자리한다. 따라서 그는 ‘따라 걷기’와 ‘느리게 걷기’를 통해 물리적, 객관적 시간의식에서 벗어나 심리적, 개인적인 시간을 향유하게 된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네가 더욱 그리워진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리
보고 싶은 건
너와 함께 한
시간
빗방울마다
머금어
그런가보다.
사는 날
그리움 있어 좋다.
-「비오는 날이면」전문
물은 아래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물은 어떤 상황과 부딪쳐도 그것에 순응한다. 물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순환한다. 물은 용해 변용되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무한한 창조를 낳는다. 그래서 노자는 물을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비도 물이다.
시에는 일정한 이미지의 전달수단이 있다. 그는 빗방울을 가슴으로 끌어들이는 변용과정을 거친다. 세월은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인데 그리움은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보고 싶은’ 그리움을 ‘비오는 날’ 때문이라고 넌지시 비에다 핑계를 대고 있다. 물은 생명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빗방울이 머금고 있는 세월과 시간만큼 무한한 상상력과 무한한 창조를 낳는다면 그리움도 무한한 상상력과 무한한 창조를 낳는다. ‘그리움’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주제이지만 시적대상인 ‘비’에 감춰진 특별한 경험이나 감각, 사유 등이 투영되면 특별하게 변용된다. ‘비오는 날이면’ 그리울 ‘너’, 그는 비오는 날을 몇 번 만났을까. 또 몇 번 만날까. 비오는 날이면 “그리움 있어 좋다”고 고백한 그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비가 물이듯 비와 빗방울도 둘이 아닌 하나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빗방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생사(生死)와 사는 날은 둘이 아니다. 생사가 없다면 사는 날이 없고, 사는 날이 없다면 생사도 없다. 사는 날을 비오는 날로 이미지의 전달수단으로 삼은 것은 그가 지천명 나이에 자신의 공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고 물과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하심(下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가을이 참 예쁘다.
흘러가는 구름도
황금 들녘도
앞선 여인의 뒷모습도
두 손 맞잡은 노부부의 모습도
예쁘다.
떨어져 내리는 낙엽도
스치는 바람결도
성근 별들도
그지없이 예쁘다.
나 오늘,
가을이고 싶다.
-「가을」의 전문
흔히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 자연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듯 인간에게도 생로병사가 있다. 봄을 유년기, 여름을 청년기, 가을을 중년기, 겨울을 노년기에 비유했을 때, “가을이고/싶다”고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예쁘다’이다. 모든 법칙은 인연이 화합해서 이루어진다. 가을이 예쁜 건 구름, 들녘. 낙엽, 바람결, 성근별, 여인, 노부부 모두 서로 인연이 화합해서 연기되었기 때문에 예쁘다. 그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에 “가을이고 싶다”고 한 것도 봄의 성장통과 여름의 좌충우돌을 견뎌냈기에 풍성한 수학으로 충만한 “가을이고 싶다”고 소망한다.
물리적인 사계절은 지구의 자전과 태양의 경로를 통해 생기는 계절의 변화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만 있는 게 아니다. 다가올 겨울의 숙살지기에 대비해야 한다. 현재가 있어야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의 기준은 현재다. 그리고 현재의 주인은 나다. 현재는 오늘이다. 오늘은 가을이다. 가을은 중년기다. 인고의 시간은 용기를, 뜨거운 입김은 풍부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집중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어제도 내일도 아닌 “나 오늘/가을이고 싶다”고 소망했다.
첨단과학이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지만 지나친 과학의 발달은 인간 삶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도 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길을 걷는 중에도 깊은 잠에 취한 중에도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지치고 힘겨움에 몸서릴 칠 때에도 환희에 젖어 포효할 때에도 그렇게 시는 나와 함께했다.”고 했다.
나이는 생의 굴곡을 뒤돌아보게 하는 함량과 비례한다. 사랑의 함량도 삶의 함량과 비례한다. 그의 작품에 유독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것도 나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가 사랑을 통해 왜곡된 삶을 치유 받고 생의 굴곡을 뒤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면 심폐소생술의 묘약은 사랑이다.
2. 둘이 아닌 하나 되기
정철수시인은 자신을 스포츠문학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포츠문학이란 운동경기를 다루거나 체육사상을 고취한 문학이다. 스포츠는 우리의 꿈이기도 하고 웃음을 주기도 한다. 스포츠는 재미와 싫증을 동시에 유발한다. 한때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는 남자들의 군대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군대에서 비 맞으며 축구한 이야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 월드컵 축구경기를 통해 축구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노자는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긴다 (弱之勝强,柔之勝剛)고 했다. 그는 스포츠전문가이며 이학박사다. 그의 프로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스포츠현장에 있었다. 성남일화천마프로축구단사무국장, 충청남도체육회사무처장, 국제축구아카데미대표이사, 국제스포츠교육센터원장, 한국프로축구연맹실무위원회회장, 스포츠산업경영학회이사 등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축구구단의 운영과 마케팅을 담당한 스포츠전문가다. 스포츠전문가는 냉철한 이성과 예리한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예리하고 섬세하다. 그가 성남일화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성남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K-리그 개막전 오프닝행사로 시낭송을 시도했을-「여기, 와서, 보라」(시:김명옥, 낭송:박영애)- 정도로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축구경기와 시낭송의 조합,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는 그의 독창성과 예리하고 섬세한 판단력이 만든 결과물, 신의 한수였다. 스포츠전문가로서의 정철수와 시인으로서의 정철수는 뫼비우스 띠의 안팎처럼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안과 밖이 따로 없는 하나의 공간이 형성되듯 스포츠전문가정철수와 시인정철수는 하나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햇살 내리쬐는 시간에도 잠 못 드는 깊은 밤에도 새벽이슬에 눈물이 촉촉이 젖을 때에도 첫눈 오는 날 환호성을 칠 때에도 한시도 시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삶의 순간순간마다 시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발끝에서 발끝으로
쉼 없이
그라운드를 내달리고 있다.
멈춰선 듯
나는 듯
때론 함성을 움켜쥐고
때론 절망을 부여잡고
끝없이 내달려도
바르르 떨리는
채울 수 없는
목마름
-「갈증」전문
시인의 작품에는 시인의 삶이 투영된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축구구단에 몸담고 선수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산증인이다. “발끝에서 발끝으로/쉼 없이/그라운드를 내달리”는 축구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세계다. 각종전술과 철학의 집합체인 축구경기는 최고의 경기와 최고의 승부로 답한다. 별을 잡기 위해 선수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온힘을 다해 달린다. 데뷔골, 역전골, 극장골… 골이 골문을 향한 골인의 집념은 짜릿하다 못해 처절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서는 안 된다. “멈춰선 듯/나는 듯” 달릴 때와 멈출 때를 알고 달려야 한다.
철학적 사유는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관통해서 깨달은 모든 경험이 바로 철학적 사유다. ‘함성’과 ‘절망’이 교차하는 공간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선수들은 끝없이 내달려도 늘 “채울 수 없는/목마름”을 경험한다. 그도 꿈을 향해 끊임없이 질주했지만 지천명에 이르러서야 꿈은 영원한 갈증이었음을 고백한다. 체험과 상상력에 더해진 높은 안목은 시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그의 시의 품격을 만든다.
뺏고 뺏기고
넘어지고
쉼 없이 내 달리고
잠시잠깐
쉼.
어둠이 드는 날엔 불 밝히고
해 드는 날엔 그림자 위로
이기고 진다는 것은
그라운드위에 펼쳐진
생(生)의 날들
-「90분 동안」전문
축구선수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90분이다. 그라운드위에 펼쳐진 90분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냉정한 시간이다. 그라운드위의 선수들은 쉼도 잠시잠깐, 밤낮도 따로 없다. 오직 “뺏고 뺏기고/넘어지고/쉼 없이 내달리는” 치열한 생존경쟁만 존재하는 전쟁터다. 일진일퇴의 전쟁도 90분이 지나면 끝이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모든 경기는 승자와 패자에 열광하고 좌절한다. 한 번 승자는 영원한 승자가 아니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운동경기다. 그래서 운동경기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세계다.
그는 「90분 동안」을 인생에 비유했다. 경기에 시작과 끝이 있듯 우리도 생사(生死)가 있다. 선수가 경기에 집중하듯 우리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잘났든 못났든 가난하든 부자든 삶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소중하다. 단지 빈부귀천, 부귀영화라는 선입관, 승자는 성공한 삶으로 패자는 실패한 삶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우리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뺏고 뺏기고 넘어질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환하게 웃으며 경쟁하고 손뼉 치며 서로를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기고 진다는 것은” 삶의 행로에 펼쳐진 생의 날들일 뿐이다.
탁구결승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빙의 승부
4번에 걸친 듀스
끝내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메달의 색깔이 달라지는 순간
승리자의 함성
안타까움의 탄성
함성과 탄성 속에 자리한 눈물
결코 그들의 눈물은
다른 색일 수 없다.
-「두 개의 눈물」전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우열을 가리고 서열을 정하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 우열과 서열을 매기는 것은 당연시한다. 그래서 운동경기에서 선수나 관중은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즉 어떻게 얼마나 노력했는가보다 금·은·동메달로 선수를 평가한다. 모든 선수가 금메달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경기는 없다. “누군가는 이기고/누군가는” 지는 게 현실이다. 메달 색깔에 따라 선수는 선수대로 관중은 관중대로 “함성과 탄성 속에 자리한 눈물”이지만 “그들의 눈물은/다른 색일 수 없다.” 눈물의 성분은 98.5%가 물이고 그밖에 나트륨, 칼륨 등의 염류와 소량의 단백질이 함유되어 있다. 평상시에 나오는 눈물의 양은 하루에 0.6cc로 1년간 모은다면 샴페인 한 잔 정도의 양이라고 한다. 정상적으로 나오는 눈물, 강한 빛이나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나오는 눈물, 기쁨 슬픔 통증을 느낄 때 나오는 눈물은 모두 다른 색일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왜 「두 개의 눈물」이라고 했을까. 우리는 경험적으로 승자의 눈물과 패자의 눈물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승자는 성공한 사람, 패자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왜곡된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개의 눈물 중에서 선택하라면 어떤 눈물을 선택할까.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라고 한다. 불만은 목표지향적인 행동이 내적인 원인이나 외적인 원인에 의하여 방해된 상태이며 그 때에 경험하는 정서상태다. 이 내외적인 원인만 제거한다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골라낸다는 것도 장점과 단점으로 분리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은 불이(不二), 둘이 아닌 하나다.
그는 지금 스포츠현장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스포츠현장의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 많다. 경험을 시로 펼쳐내는데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는 시인의 말처럼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둘이 아닌 하나였기 때문이다.
3.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정신
경쟁과 소유욕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욕구다. 특히 경제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바로 경쟁과 소유욕이다. 그러나 과도한 경쟁과 소유욕은 인간을 사회적 괴물로 만들고 인간성상실과 인간성파괴의 극한상황으로까지 내몬다. 함께 사는 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인간성회복을 염원하는 화해의 시선이며 실천의지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매일 꿈을 꿨다. 언젠가 내 집을 지으면 하얀 집을 짓겠다 생각했다. 벌집처럼 촘촘히 얽혀있는 아파트가 아닌 별과 달님, 새와 벌들이 찾아들고, 바람과 구름이 쉬어가며, 지나던 길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있는 정감어린 집,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저마다 꿈을 꾸는 집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공존의 논리는 나만이 아니라 나 밖의 다른 존재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다. 자연의 아픈 소리를 들을 줄 알고 그 아픔에 동참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점심을 먹고
명륜당 뜨락을 거닐다
은행나무아래 앉았다.
수북이 쌓인 낙엽마다
가을 깊었음을
전하고 있다.
여여로이 바라보는
눈 속으로
가득한 햇살 내리고
오백년 조선의 역사가
들어선다.
예를 갖춰 맞으니
한 무리 비둘기 떼
날개 짓이다.
아득한 성자
정성되라 일러준다.
-「산책」전문
삶은 기억이다. 삶의 시간은 기억으로 채워진다. 기억이 없는 시간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기억은 미화된다. 그가 에코비전21편집위원으로 활동할 때, 그의 사무실은 명륜동에 있었고 명륜동에는 조선시대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명륜당이 있다. 그는 ‘명륜당 뜨락’, ‘은행나무’, ‘가을이면 수북하게 쌓인 낙엽’, ‘가득한 햇살’, 이 모든 것들이 기억하는 ‘오백년 조선역사’를 예를 갖춰 맞이한다. 그림을 그리려면 대상과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 현대도시생활은 바쁘다. 그는 휴식이 필요하면 명륜당에서 산책을 한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조하고 대상을 기억하고 대상을 통해 자신을 성찰한 후 삶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한 사람의 삶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아득한 성자/정성되라 일러주는” 내면의 소리와 대면한다. 그의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가슴 깊은 근원에서 울려오는 내면의 소리와 일체화를 꿈꾸는 청정한 노래다. 그의 의식은 항상 열려 있고 또 감각기관을 항상 열어놓아 생명의 호흡소리까지 감지하고 공감하고 공유한다.
출근길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의 반짝임
단지 물방울이었던 이슬이
진주처럼 고아질 수 있음을
새벽엔 미처 몰랐다.
햇살과 이슬
누가 먼저 찾아왔건
누가 먼저 기다렸건
만남은 서로를 빛나게 했고
영롱한 빛으로
서로를
-「만남」 전문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필연이든 우연이든 만남과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관계란 서로 다른 둘이 만나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유일한 존재의 만남은 모두 소중하다. 새로운 존재와 만남은 두려운 일인 동시에 설레는 일이다.
그는 출근길에서 반짝이는 ‘이슬방울’을 만난다. ‘햇살과 이슬’의 만남은 “누가 먼저 찾아왔건/누가 먼저 기다렸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비록 햇살과 이슬의 짧은 만남이 두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이슬’이 ‘진주’처럼 고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출근길에서 그와 이슬의 만남은 자연과 인간의 평범한 만남이다. 그런데 여기에 햇살이 더해지면서 특별한 만남으로 반전한다. 이슬은 더 이상 이슬이 아니라 진주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또한 마찬가지다. “만남은 서로를 빛나게 했고/영롱한 빛으로/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평범한 만남이 특별한 만남이 되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비록 만남이 이별이라 할지라도 그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한다.
하루를 컴퓨터 안에 담고 있는 시간
격랑 속을 내달려온 날들이
함께 담긴다.
언제든 펼쳐볼 그 시간의 흔적
때론 좌절과 절망으로
어느 땐 환희와 기쁨으로
거친 숨결이 오는가 하면
그지없이 평화로움이 내리기도 했다
첫사랑이 그리워 몸서릴 치는 날엔
온 밤을 꼬박 끌어안았고
누군가 미워지는 날엔
무릎이 닳도록 절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빚고
겹겹이 쌓인 날들이
지금의 나다.
내일의 나의 모습은
오직 나의 선택
생의 노정,
잘 빚고 싶다.
-「생의 노정(路程)」 전문
‘일체유심조’라 했다. 일체가 다 마음이고, 일체가 다 마음이 지어낸 것이기에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은 꿈속에 나오는 엑스트라다. 모든 것은 내가 중심이기에 천지창조도 세상만물도 다 내 마음이 주관한다.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생의 노정에서 소중한 나는 이 세상을 허투루 살 수 없다. 그래서 “내일의 나의 모습은/오직 나의 선택/생의 노정/잘 빚고 싶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좌절과 절망’, ‘환희와 기쁨’, ‘그리움과 미움’ 등등이 쌓인 날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나이듯 내일의 더 나은 내 모습을 빚겠다는 다짐은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는 그의 꿈이며 희망의 매시지다
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사회다. 공동체사회의 일원으로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미워지는 날엔/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는 반성과 자비정신을 바탕으로 ‘신독(愼獨)’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 발밑만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 말했던 스티븐 호킹도 아무리 우주라 하더라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면, 우주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정신을 공유하고 있기에 미래를 꿈꾸고 행복을 추구한다.
정철수 시인의 시심은 느긋하나 단호하다. 시인의 작품 속에는 시인의 삶이 투영되기 때문에 시는 자기고백의 형태를 벗어날 수 없다. 상징과 비유로 은근히 감춘다 하더라도 시의 내면에서 우리는 시인의 삶과 대면하게 된다. 꿈과 행복을 찾아가는 시인의 행로는 순수하고 솔직담백하고 도덕적인 선비의 삶이었다.
시인의 말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 외롭고 지친 이들, 삶 앞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들, 꿈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읽혀지길” 바라면서 지금까지 쓴 시의 양과 질보다 더 많고 더 좋은 시를 계속하여 쓰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편들 속에서 자신이 삶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담은 시를 소개한다.
잘 산다는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성심(誠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일어나 이불을 개고,
양치질을 하고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것으로부터
책상을 정리하는 것
친구와 가벼이 인사를 나누고
동료와 차 한 잔 마시고
집에 들 때
아이스크림 하나 손에 들고
파란 신호등을 기다리고
가까이 있는 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
햇살과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를
느끼는 것
그런 소소한 일상이
의미 있고 가치로운 삶이다.
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현재 그리고 지금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미래는 없는 까닭이다.
-「잘 산다는 것」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