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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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바람결에 꽃잎들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맺어질 날 아득하게 멀어만 가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그대와 는 한마음을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부질없이 동심초 만 맺고 있다네
이 시의 원 제목은 춘망사(春望詞)
이며 총 4수의 오언절구로 된 시인데
김소월의 스승 김억(안서) 선생이
번역하면서 한 수만 "동심초(同心草)"로하여 우리에게 노래로 많이 알려진 곡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 설도 (薛濤)에 관하여 -
우리나라에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가 있다면
중국에는 당나라 때에 기녀로서 여류시인 설도(薛濤 7790 - 832)가 있었다.
설도의 자는 공도(洪度) 어렸을 적 부터 시,문에 재능이 뛰어났었다. 설도는 실연한 사연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 도교의 사제로 불리웠다.
그녀는 명문가의 후예였는데 선조는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의 유명한 명장으로서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薛仁貴)라고 전해 온다.
그녀의 생몰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두보가 죽은 해에 그녀의 나이는 서 너 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樂妓-기예(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녀에 얽힌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그 당시 사천절도사 위고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이라는 직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며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은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라고 전해온다.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한다.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천감찰어사로서 성도에 오게 되었는데,
설도는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었던 원진(元鎭)은
설도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난 후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설도는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