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을 surf하다가 범박골 지명에 관한 자료가 있어 친구들과 같이 읽어 보고자
퍼 옮겼다. (LEVELUPIN 역곡 cafe에서 퍼옴)
옛날이 바로 어제와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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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부천의 지명유래
5. 노고산(할미산:범박동, 계수등, 옥길동, 괴안동) 일대
1950년대말 박태선 장로교의 신앙촌이 들어오면서 더욱 유명해진 산이다. 이 산에 오만 제단이 있다
큰 내가 '한내' 큰 밭이 '한밭'이 되듯이 큰 뫼는 '한메'가 된다. 이것이 '할매', '할미'로 발음되어 '할미
산'이 되고. 이를 한자로 老姑山 이 된 것이다. 즉 한 메 > 한미산 > 할미산 > 노고산으로 바뀐 것이다.
노고산(일명 老女區山으로 표기하여 토박이말로 할미산이라고 한다)은 표고 153m의 잔구로 이곳을
중심하여 범박동. 괴안동. 계수동 소사동 등이 주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산의 명칭은 신앙촌이 들어서
면서 露求山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경우로 사실과 부합하지는 않는다. 청주 한
씨 대동보에는 이 산을 '청주 한씨 가 터를 잡은 산이다' 해서 韓基山이라 하였는데 이 명칭 보다 더 빠
른명칭도 있을 것이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노고산을 중심으로 하여 작은 산들이 있는데 이들을 중심
으로 한 자연 마을 (범박 동, 계수동, 옥길동, 괴안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범박동
1957년밀 신앙촌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범박골로 알려진 마을이다. 범박골은 범씨와죽 산 박씨가 정작하
여 붙여진 명칭이라 하나 신빙성이 약하고 마을 형태 때문에 호랑이 (범)와 관련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즉 노고산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삼태기 모양을 하여 마치 호랑이 앞 발자국 형태와 같아 붙여진 명칭
이다.
범과 박씨가 연결되어 있 는 밤박동의 박씨는 부천에 정착한 죽산 박씨 박철정의 손자인 박문필로 그는
인제현 감을 지내고 정3품 통정대부에 을랐다. 그리고 법박동 산 28번지 공숫 골에는 문필의 조카로 인
근 중림역의 찰방(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외직. 종6품)을 지낸 박기남 (통훈부대)의 묘가 있다.
그리고 계수동 뒷 산을 咸朴山(산 28번지와 29지)이라 한데 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범박동은 부평
군 때에 옥산면에 속해 발전해 오다 1914년 부천군 탄생과 함께 계남면 에 속한 후 계남면이 소사면·소
사읍으로 바뀜에 따라 소속명을 달리했다.
1973년부천 시가 되자 범박리가 되었는데 이 때 신앙촌은 인구가 시승격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83년 2 15일 계수동 일부와 옥길동 일부가 편입되자 행정동명이 되었다. 범박동에는 죽산 박씨 이외
에도 파평 윤씨와 여홍 민씨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파평 윤 씨의 선산은 현 범박파출소 뒷산이었으나
신앙촌 유입으로 인해 시흥시 미산동으로 옮 겼다. 파출소 뒷산을 '신두비' 라 부르는데 아마 신비도가
있지 않았나 한다. 계수동이 포함된 행정동으로서의 범박동은 2.29㎢, 3,185가구에 9,253명 이 살고 있 다.
(1) 안산(案山): 범박동 130 - 137번지 일대로 노고산(할미산) 동쪽에 있는 산을 말한 다.
(2) 공세동산(貢稅洞 山):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
(3) 숙공산(肅公山): 범박동 산 62-3번지 일대로 숫골과 공숫골의 합성어 일명 숙 골 로 느티나무 뒤에
있는 산과 묘가 있는 공숫골을 말한다.
(4) 삼태봉: 범박동파출소 옆산을 일컬는다. 파출소를 중심으로 뒷산과 옆산 그리 고 박태선 장로가 살
았던 모리타라는 왜인집 뒤의 세봉우리를 합쳐서 부른 명칭 이 아닌가 한다.
(5) 망현(望峴): 숫골 옆 고개로 외지인의 출입을 감시하였기 때문에 부른 이름이다
(6) 불당고개(佛堂峴): 범박초등학교에서 범박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7) 양지마을: 범박동 59번지 4통지역으로 이 지역 일조량이 10시간되는 볕이 잘 드 는 따뜻한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8) 나사렛마을: 범박동 50번지 일대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가 때어난 마을에서 유래하여 신앙촌이 들어
서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9) 배못탱이와 암우들: 동네 앞 느티나무가 있는 곳을 배못탱이라 하며 이 주위 에 있는 논을 뜰이라 하
였다. 지금은 범박골 앞뜰이라 부른다. 을축년 대흥수 때 서을시 항도에서부터 이곳에 바닷물이 역류하
여 배를 이 느티 나무에 맺다고 한다. 시흥시 괴림동 숯두르지에서 보면 물이 많이 찬 동네임 을 알 수
있었다 한다. 망현 느티나무가 만나는 곳에 공동우물(100번지)이 있다.
2) 계수동
계수동은 고강동과 함께 부천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청주 한씨의 정착 시기는 고강동 보다 50여 년이 늦
은 500여년 전인 세조 때이다. 이곳은 백제시대 미추홀에 속했다가 고구려 때 매소홀현에 속했으며 통일
신라시대에 는 소성현에 속했다.
이후 1914년 부천군 소래면이 되기 전까지는 인천부의 동면으로 발전해오다 동면이 황 등천면으로 바뀌
고 1914년 부천군이 탄생하면서 부천군 소래면 계수리가 되었다가 1973년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가 될
때 시홍군 소래면으로 갔다가 1983년 옥길리 일 부와 함께 계수리 일부가 부천시에 편입되어 범박동에
속하였다.
계수동 청주 한씨의 묘역이 있는 곳을 咸朴山(함박산)이라 하며 이곳에는 한명회의동 생인 이양공 한명
진의 아들 청평군 한언과 후손인 청천군 한준의 신도비가 남아 있 다. 이 신도비들은 부천시 향토유적으
로 지정 보호될 것이다. 계수동은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 작은 땅이름의
유래들 이 많이 남아 있다.
(1) 웃계일: 범박동 13통.14통.I5통 지역으로 자연마을이었을 때 위에 위치하고 있었 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시흥시 계수동에는 아래와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고해서 붙여진 아랫계일과 구석계일이 있
다. 이외에도 시흥시 쪽에는 덕석골. 안골. 건진말. 구미 등이 지금도 불리고 있다. 계수동은 자연마을인
'계일'(이 지명은 한언과 관계있다. 한언이 중국 사신으로 가 서 그곳에서 병사하였으므로 제일가는 신
하다하여 제일이 라고 하였다가 이것이 다시 계일이 되었다고 한다)과 '수로동'이 합쳐진 명칭이다.
(2) 계수리고개: 신앙촌에서 넘어오는 고개를 계수리고개라 하는데 이 곳 오른쪽에 있 는 정원연립에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요무형문화재 58호 줄타기 기능보유자였던 김영 철이 살다가 1988년 타계하였다.
(3) 계일고개(또는 길고개): 계수동에서 옥길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길고개와 장승백 이고개가 잇달아
있다.
3) 옥길동
옥길동은 일제 때 '옥련리'와 '두길리'가 합쳐져 생긴 명칭으로 이곳 에는 이외에도 함박리와 식골리 등
의 자연마을이 있다. 이 네 마을이 합쳐 옥길동이 된 것이다. 옥련동은 경기화학에서 서울시 구로구 항
동과 연접하여 있는 동네로 경기화학 부근 의 옥돌무지와 연꽃 방죽이 있는 마을이여서 옥련동이라 하
였다. 이곳에는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가 먼저 들어오고 이어서 세조 때 선약장군을 지낸 또 다른 전주
이씨가 들 린왔으며 250여년 전에 의령 남씨 창명공파가 정착하였다.행정동으로는 역곡3동에 속 한다.
(1) 옥련동: 마을 좌측에 앞굴과 건지산(큰 건지산, 작은 건지산이 있다. 이 산에 옥 녀봉이 있다)이 있
고, 건너편에는 원래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몰락한 망굴이 있다. 옥 길동이 역곡3동에 속한 것은 교통편
의와 교육여건에 의해서이며 계수동과 같은 과정 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함박리: 옥길동의 또 하나의 마을인 함박은 광명시에 있는 두길리 에서 옮겨 산진 수 하씨와 성산 여
씨 등이 범박동 11통 지역에 속해 63호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의뒤 즉 계수등 뒷산이 함박산이어서 함박
이라 한것 같다. 이 지역은 옥길리 108-1번지 일 대 이다. 한편 마을의 형태 가 함처럼 생겨서 이렇게 불
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사태말(沙汰말): 함박리 지역에 있는 자연마을 명칭으로 옥길동 685번지 일대이 다. 사태말의 유래
는 사태가 빈번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한다. 어느 해 가뭄이 몹시 들 어 이곳에 우물을 팠는데 스물 다섯
자 가량을 파니 그 안에서 사기 그릇 조각이 나왔 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마을 형성이 오래 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바가지 우물에 돌맹이를 놓고 물을 떴다고 한다.
(4) 장승백이 고개: 계수동에서 오는 우측에 마을을 알리고 마을사람 의 안녕을 빈 장승이 있어서 이 고
개를 장승백이 고개라고 불렀고, 함박리 와 사태말 사이를 장승백이골이라고 불렀다.
(5) 장고개: 소래면 당시 面도로로, 오류동으로 장을 보러 갈 때 넘어야 하는 고개 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6) 원남터: 고을 원님이 낳은 터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7) 계리월: 경기화학 부근으로 닭이 아름다운 달을 보고 울어서 붙여 졌다 한다.
(8) 호랑바위 산: 경기화학 뒤산을 이른다. 그러나 지금은 파 헤쳐졌다.
(9) 터진목: 함박리에서 옥련리로 가는 지역은 범박동 신앙촌에서 물이 내러 오면 쉽게 터졌다해서 터진
목이라 불린다고 한다.
(10)우골(부굴골): 장승백이 고개와 함박리 사이의 골짜기를 이른다.
4)괴안동
괴안동은 구로구 오류동과 접해 있는 부평군 때에는 옥산면 괴안리 지역으로 300여년 을 독자적인 행정
마을로 발전해 왔다. 1914년 부천군이 탄생하면서 계남면 괴안리라 하였고 계남면이 소사면, 소사읍으
로 바뀜 에 따라 소속명이 바뀌었다. 1973년 10월 1 일 경인철도를 중심으로 역곡동과 괴안동으로 분리
되었다. 괴안동은 1989년 다시 괴안 동과 역곡동으로 분동되었다(역곡1동 주민들의 주민등록등본, 등기
부 등본 등의 지번 은 괴안동으로 나옴). 괴안동은 1.02㎢, 8,108가구에 26,304명이 살고 있다.
(1) 고얀리: 괴안동은 속칭 고얀리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약 300여년 전 충청도 맹산골 에서 목민관을 지
낸 안동 권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래 고얀리는부천동 여중 동편 고갯길 너머에 있었는
데 웃 고얀리와 가운데 고얀리, 고리고 아랫 고얀리 로 나눈다. 웃 고얀리(100번지 일대)는 현재 우성아
파트, 청암아파트, 명물빌라 일원으로 남원씨 가 주성을 이루고 살았던 마을이며, 가운에 고얀리 (45-46
번지 일대)는 행정동상 역곡 3동 지역으로 현대아파트, 대현아파 트, 화원연립 일원인데 파평 윤씨가 많
이 살았 고, 아랫 고얀리(26-28번 지 일대) 역시 역곡3동 지역_으로 효창아파트, 삼성아파트, 공무원아
파트 일원인데 전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주성을 이루고 살았다. 괴안동에는 해묵은 느티나무가 괴안동
97-24에 자라고 있었으나 부천시 도시계획 구 획정리사업시 성토작업으로 인해 발육이 되지 않아 말라
죽고 말았다. 이 이전 아랫 고얀리(가운더 마을)에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고 하취홍씨 집 뒤에
있었으나 70여년 전에 일본 사람에게 팔았다 한다. 면적은 약 30여평 정도로 작업일수만도 100여일 걸
렸다 한다) 해 마다 봄이면 이곳에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고사를 지냈다. 즉 '느티
나무(槐木:괴목)에 안녕을 빌었기때문 에' 괴안리라 하였다. 이 괴목은 구한말 대원군이 섭정할 때 잘려
져 대포 바퀴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고 한 다. 또한 산 3번지 웃 고얀리 가운데 고얀리 사이에 있는 느티
나무에서 는 5월 단오에 그 네뛰기를 하며 놀았다고 하는데 수령은 500년 정도되 었다고 한다. 해방 후
에는 느티나무에 산고사를 지내지 않고 괴안동 90-1 현 삼오 유치원 뒤에 있 던 소나무에 음력 10월 초
하루에 지냈으며 고사 며칠 전 에는 71-13에 있던 고사우물 을 깨끗이 소지하였다고 한다. 이 산고사도
태풍으로 인해 소나무가 부러짐에 따라 중 단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2) 괴안국: 괴안과 관련지어 유명한 고사가 있는데 南柯一夢(남가일몽)이 그것이다. 즉 당나라 이공좌
가 지은 <<이문집>> 이란 책에 전하고 있는 이야기다. 당나라 덕종 때 순우분 집 남쪽에는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 수십평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는 데 여름 철에는 이곳에 친구들을 불러 놓고 정담을 나
누곤 하였다. 어느 날 느티나무 아래 있을 때 곰을 꾸었는데 그가 꿈 속에서 본 괴안국은 화려하고 대평
성세의 국가 로 그려져 있다. 그 괴안국은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개미의 나라를 말 하는데 생시와 다름
없는 생생한 꿈을 굴 때 남가일몽이라 한다.
(3) 연화봉산(蓮花峰山): 괴안동 산 4-1, 구 괴안동사무소 뒷편 지역 으로 비가 오면 가루가 흘러 냇가
에 쌓여 연화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4) 일신(圓山, 일명 와우산): 산 29-1지역으로 마을 앞 멀리 보이는 산, 일명 멀미산 으로 예전에 이곳에
서 항동 사람들과 불놀이를 하곤 했다 한다.
(5) 청어 계곡(일명 고랠, 또는 망골): 임진왜란 때 파묻은 말무덤이 있었다고 전한 다. 괴안동 아랫골에
서 항동 일대 벌판 지역까지 이른다.
(6) 청등뜰: 마을 앞 뜰.
(7) 가곡현(佳谷峴. 일명 가골고개 또는 갓골): 청송아파트 고갯길을 이른다.
(8) 재너머: 현 괴안동파출소 앞 고갯길.
(9) 그개골: 현 조공2차아파트 일원.
(10) 샛골: 현 삼익 세라믹아파트 일원.
(11) 새장터: 현 괴안동 11통 지역으로 이곳에 있던 대장간에서 소와 말의 편좌를 만 들어 현 동부제강에
있던 역원에 공급했다 한다.
(12) 바우백이: 현 대진아파트와 거산아파트 부근을 일컫는다.
(13)삼자골: 윗괴안 남쪽에 있던 골짜기를 이른다.
첫댓글 주상우 안녕. 좋은재료 고맙다.
너무 수고가 많다.
못본지 반백년이 지났구나. 반갑다. 세흥아, 구질구질하다고 불평하던 옛시절도 이젠 다시 돌아가보고픈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으로 마구 몰아치는구나. 다시 만날때 까지 몸과 마음 건강히 살자.
아 옛날이여 그때 그친구들 이거 다어디갔어?
좋은 소식들이 오고갔으면 상우성 옛생각에 한층 젊어어졌네.ㅋㅋㅋ
그 파란물 눈에보이네/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은 다 우얼하는지 보고파라 보고파~~ 이가사가 절로 떠오르는거~~~
경주마 눈가리고 앞만보고 달리듯 달려왔것만. 이제 백발이 무성한 나이에 자네글을 보니 주마등처럼...
세월이 많이 흘렀고 산천은 변했어도 옛 친구들 마음에서 "그 잔잔한 고향바다"를 찾을수 있으니 우린 무척 행복한 거야.
그렇구나..
새삼 안것도 있구... 귀한 자료 얻어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