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김창용 외
길일 / 김창용
결전의 날이다. 새벽 4시부터 깼다 잠들었다 반복하다 7시 알람에 간신히 일어나 커피가 든 텀블러를 들고 차에 올라탔다. 뷔페 오픈 시간은 11시지만 시식이 있으니 10시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혈관을 타고 흐른 카페인이 서서히 퍼지며 머릿속 가득한 안개가 걷힐 무렵 회사에 도착했다. 이미 주방 직원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뷔페 입구 쪽 음식 진열대에 단호박 샐러드와 토마토 카프리제 같은 콜 메뉴는 세팅을 마쳤다. 전체 메뉴 90여 가지, 주중에 만들어서 냉장한 콜 메뉴 외에도 한식 메뉴 중 냉장고에서 꺼낸 맑고 붉은 김치, 갓 삶은 노란 소면과 갈색 메밀국수 그리고 양념 및 소스도 세팅 완료. 그 옆으로 한식 담당인 튀김 더미의 높이를 보니 오늘 하객 수가 대략 감이 온다. 일식 담당 3명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다양한 초밥 피를 바트 가득한 밥알 뭉치에 얹고 있다. 곧이어 주방장이 담당하는 핫 메뉴들도 속속들이 나올 준비를 한다. 손이 빠른 최 부장은 일찍 출근한 알바생 둘을 데리고 테이블 세팅을 마무리하고 있다. 오늘은 올가을 시즌 최고 길일이라 바짝 당겨야 할 날이다. 일이 많은 만큼 음식이 남아서 버리거나 혹은 부족해서 클레임이 세게 걸리는 리스크가 생길 수도 있다. 오늘 새벽은 인원 펑크나 정전 같은 급한 전화가 없었으니 이 정도면 별문제 없이 시작할 것이다.
호흡을 고르며 창밖을 바라본다.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뿌옇다. 멀리 부산항 컨테이너 위로 쌓인 바다는 간신히 무채색의 숨을 내뱉고 있다. 부산항이라 불리는 북항은 사실 북쪽에 없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서 당연히 북쪽에 바다가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회사에서 바라보는 북항 바다는 동향이다. 뷔페에는 정오까지 눈 부신 햇살이 들다가 오후 초입부터 일찌감치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를 마칠 무렵이면 바다에 퍼지는 노곤함이 할머니의 밍크 담요처럼 따스하게 스며들 것이다.
우리 회사는 부산역 근처 대로변 빌딩에 세입자로 계약되어 있다. 요즘 트렌드인 천장고가 5미터 이상인 대형 웨딩홀과는 달리 일반 사무실 정도의 낮은 웨딩홀이 5층에 있고 뷔페 연회장은 꼭대기인 8층에 있다. 작년 가을부터 임시 지배인으로 들어온 최 부장과 나는 200석 남짓한 뷔페 홀 카운터에서 자판기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업무를 확인한다.
- 사장님. 오늘 시식 몇 팀입니까?
- 웨딩 다섯팀이요. 행사 시식도 한팀 있어요. 어제 늦게 마쳐서 피곤하죠?
- 늘 하던 일인데요. 괜찮습니다. K 사장님과 원래 친구였다면서요?
- 아……. 그냥 사회 친구예요.
대화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예비 신랑신부로 인해 끊어진다. 홀을 돌며 메뉴와 연회장을 설명하고 정해진 자리에 안내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시식이 있을 때는 늘 초조하고 긴장된다. 시식하고 취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적어도 결혼준비 카페나 SNS에 ‘여기 뷔페 엉망인데 어떡해요ㅠㅠ’라는 의사 표현은 자유롭게 하는 편이다. 뷔페는 오픈할 때 음식 컨디션이 최상이다. 더구나 클래식이 들리는 차분한 분위기가 살아 있기에, 시식은 늘 정식 오픈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시작한다. 결혼이 처음인 신랑신부처럼, 준비하는 우리도 나갈 때 돌려받는 후기 용지에 하트를 받을 때까지는 조마조마하다.
10시 10분, 예정된 시식 팀들이 다 도착해서 모든 메뉴 세팅과 오픈을 완료하고 드디어 식사 시작이다.
뷔페 입구에서 억지 미소를 짓던 나는 오른쪽 통로 끝 기물 창고 안에 있는 1.5평 남짓한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자담배에 전원이 들어오자 연이어 두 모금을 빨아들인다. 잠을 설친 탓일까? 머릿속이 연기로 탁해진다.
K는 뷔페에 내가 보이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 이런저런 말을 걸곤 했다. 내가 합류한 직후부터 그랬다.
-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 그냥 이것저것요.
나의 간단한 대답 뒤에 대화가 멈춘다. 한참 뒤에 K가 말했다.
- 혹시 갱년기 온 건 아니죠? 요새 내가 예전처럼 열심히 일하기도 싫고 그렇네요. 짜증도 자주 나고. 여기 내 정수리 머리숱은 좀 어때요? 같이 모발 이식하러 갈래요?
K 이야기는 장르를 넘나들며 이어졌다.
-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뭔지 알아요? 돈 받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결제 안 좋은 업체 하다가 웨딩홀에 뷔페까지 인수했잖아요. 송 사장은 운이 좋은 거 같아요.
K의 멘트가 하품 날 때도 있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떡이며 들어주는 편이었다. K의 말 중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떠올렸다. 내가 과연 운이 과연 좋은 걸까? 동업 다음 해에 코로나가 터져 쫄딱 망할 뻔했는데.
우리 같은 웨딩홀은 평일이면 느긋하다. 월화는 휴무에, 수요일 식자재 입고, 목요일 결제. 여기까지는 그냥 창밖을 보는 시간이 많고, 주말은 본격적인 전쟁이다. 웨딩이나 행사를 잘 치르면 덕담과 깔끔한 계산으로 끝난다. 하지만 음식이 늦게 나와 진열대가 텅 비거나 하객이 한꺼번에 몰려 앉을 자리가 없는 ‘사고’가 생기면 계산 담당자는 긴장감에 창백해진다. 대부분 답례품 몇 개로 끝나지만 ‘진상’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계산서 금액에서 ‘네고’가 들어간다.
10명이 앉을 수 있는 1600 라운드 테이블 25개와 6인용 사각 테이블 20개, 테이블을 덮는 각종 크로스 그리고 여기저기 알바 유니폼과 앞치마가 쌓여있는 창고 내실이 나의 아지트이자 사무실이다. 꼭대기 층에다 창문은 있지만 텁텁한 전자담배 냄새와 커피 향이 마르지 않아서인지 묘하게 서글픈 냄새를 풍긴다. 작년에 영화 <쇼생크탈출>을 떠올리며 당근마켓에서 구한 풀업머신을 한쪽 구석에 놓았다. 창가 옆에 세팅했는데 나름 그럴듯하다. 사실 속마음은 풀업머신 자리에 있었던 K 전용 의자를 치우고 싶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K가 늘 반갑지도 않고 대화도 즐겁지 않았다. 내 공간이지만 오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의자를 치우면 방문횟수는 못 줄여도 방문시간은 줄일 수 있겠다 싶었다.
마시던 커피를 마무리하며 뷔페로 가려는 순간, 오늘도 여지없이 K가 사무실로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온다.
- 지난주 알바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요? 이성현 이 사람은 시급도 만원이 넘네.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한참 있다가 대답한다.
- 주방에 펑크 나서 홀에서 사람 불러 메꿨다고 했는데. K사장님 친구들 알바오는 거 나는 아무 말 안 하잖아요.
- 무슨 소리예요? 줄 거 다 주고 어떻게 장사해요? 아무튼 코스트 신경 써야 해요.
대화가 단절된 것 같아 답답하다. 하……아.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말한다.
- 앞으로 알바 스케쥴 직접 짜고 직접 돈 주던지요. 오늘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 뭐요?
K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자리에서 일어선다. 뷔페 홀로 가려다 방향을 바꿔 화장실로 간다. 제일 안쪽 소변기 앞에 몸을 비틀어서 최대한 가리고 선다. 시원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하나, 두울, 세에엣. 천천히 숨을 골라본다. 세면대 레버를 올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본다. 손바닥에 세차게 떨어지는 물살처럼, 이렇게 거침없이 쏟아내고 싶다. 세면대 안에 하얀 송사리 떼가 가득 찼다. 그것은 절대 잡히지 않고 휩쓸려 사라진다. 거울을 보며 ‘나의 아저씨’의 이선균처럼 중얼거린다.
-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훗. 이제 다시 일하러 가자.
막 뷔페 카운터에 앉아 오늘 계약서를 체크 하는데, 무언가 불길한 그림자가 계약서를 가린다. 연이어 날카롭지만 익숙한 통증의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다.
- 지금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속사포의 주인공은 K다. 잠시 망설이다 나도 조용하지만 연습한 대로 단호하게 대응한다.
-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가 잘못해놓고.
- 이게, 확! 확!
- 확? 뭐? 뭐!
K의 뒤로 멀리 6인용 라운드 테이블에 앉은 시식 고객들이 보인다. 이쪽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다. 찰나의 순간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쥐어짜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따라 나와!
갑자기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멘트에 자부심을 느끼며 오른쪽으로 꺾어 내 사무실 앞으로 간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서 방향을 잃을 뻔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다. 일단 홈그라운드로 가야 유리하다. 사무실 문을 등지고 돌아선다.
익숙하지 않은 몸짓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통증은 없다. 분명 내가 이긴 것 같은데. 비루한 신체 탓인지 가냘픈 허벅지는 간신히 K의 저항을 받아내는 데 급급해 견디다 못해 부서지기 직전이다. 혹시나 상대가 얼굴에 주먹을 날릴까 겁내며 바둥거리다, 고작 멱살을 잡고 비비며 좀 봐 주라고 하소연하는 꼴이다.
- 사장님들 왜 이러세요? 안됩니다. 그만 하세요. 큰일 납니다.
시답잖은 몸싸움이 지루했을까? 최 부장은 어설픈 댄스에 구세주가 되어 나타난다. 최 부장은 호칭과는 다르게 알바생과 정직원의 중간의 형태로 행사 있을 때만 나오는 프리랜서다. 주방 쪽에서 달려온 최 부장은 살짝 짜증 섞인 얼굴이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박 수 조절에 실패한 우리는 듀엣으로 목청을 높인다.
- 점마 저거, 누구 때문에 밥 먹고 사는데. 어디 가서 밥도 못 얻어먹을 새끼가!!!
밀리지 말자,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다. K에게 받아친다.
- 니 안 되겠다. 내 방으로 들어와!
- 저어어어 새끼! 저저저번에 지 방에서 사시미로 나, 나를 찌를라 했어!!! 저거.
사시미를 내뱉는 K의 목소리는 갑자기 빨라지더니 인간이 낼 수 없는 고음이 되어 울려 퍼진다.
최 부장이 온몸으로 우리 둘을 양쪽으로 떼어 놓자 나는 뒷걸음치면서 사무실로 들어간다. K 역시 씩씩거리면서 반대쪽으로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처음은 아니다. 그래서 용기가 났던 걸까, 그건 그렇고 K가 사무실에 왜 칼을 두냐고, 누구 찌르려 하냐고 물어봐서 혹시 모르죠 대답했던 걸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던 걸까? 웬 사시미?
첫 싸움은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동업을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던 4년 전이다.
우리 회사 뒤에는 규모가 비슷한 다른 웨딩홀이 영업 중이라 주말이면 주차난으로 이 일대가 소란스럽다. 게다가 건물주가 고용해서인지, 뻣뻣한 주차장 직원들은 하객들과 자주 말싸움을 한다. 웨딩홀에 하객으로 가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간직하겠지만 막상 운영하면 만만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뷔페는 뷔페대로 음식이 떨어지거나 앉을 자리가 없어 하객들이 피같은 식권 돌려 달라고 난리고 웨딩홀은 웨딩홀 대로 한참 중요한 순간, 특수조명이 고장 나거나 에어컨이 뻗어서 사장 나오라고 고함친다. 이 와중에 주차타워 기계 고장으로 비행기 놓친 신혼부부에, 본식 촬영작가가 아예 잠수 타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주차문제는 아주 작고도 작은 일이다.
이날도 주차장용 무전기를 사야겠다고 K가 지나가듯 말하길래 흘려들었다. 웹 문자로 무전기 결제 금액 20만 원을 확인하고 망설이다 경리담당 박 주임을 사무실로 불렀다. 회사 모든 은행 업무와 현금을 받는 일은 박 주임이 하고 있다. 동업하는 회사는 사장들이 돈에 손대면 무너진다는 K의 말대로, 회사에서 유일하게 돈을 만지는 사람은 박 주임이다. 10년 넘게 K가 데리고 있는 유일한 직원이라 가끔 K의 분신이 아닐까 여기고 있었다.
- 이거 무전기 누가 결재했어요?
-K 사장님이….
-나는 결재한 적 없는데요.
-K 사장님이 급하다고 하셔서….
- K만 사장님이에요? 그럼 나는 뭔데?
짜증이 확 올라서 더 쏘아붙이려다 이쯤 하자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 취소하겠습니다.
무표정한 박 주임이 사라졌다.
하아. 무언가 잘못된 거야. 이게 뭐지?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감에 모든 게 귀찮다. 한참 눈을 감았다가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참 저 금전수는 왜 이렇게 시들었지? 지난주에 물 줬어야 했나?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 무렵 K가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 왜 취소했어요? 지난주에도 주차장에 양쪽으로 차 막혀서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라요?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 없어 나도 반격에 나섰다.
- 5만 원 이상은 지출결의서 하자고 하길래…….
- 내가 언제 그랬어요?
- 저번에……. 이번에는 알겠어요.
그때가 시작이었다. 더는 K의 그림자처럼 살기 싫었다. 한 배에 선장이 두 명일 필요 없다. 직원들도 사장들 사이가 벌어지면 눈치를 보다 센 놈한테 줄을 선다. K는 직원들과 거래처를 다루는 방법에 능했다. 그들에게 속지 않는 K는 지나치게 냉정할 정도로 그들과 힘겨루기에서 승리했고 나는 관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시비를 걸고 싶었다. 사무실 컴퓨터로 ‘동업’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모든 내용이 부정적이다. 계약서를 정확히 써야 한다는 내용이 와닿았다. 우리가 제대로 된 계약서를 썼던가? 계약금과 잔금을 언제까지 입금하는 내용만 있었던 거 같은데……. 불안감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목에서 뇌로 가는 동맥이 막힌 느낌이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봤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단 증거가 있어야 한다. 옥션에서 USB 메모리처럼 생긴 작은 녹음기를 주문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K를 알게 된 건 벌써 10여 년 전이다. 웨딩 업계에서 알게 된 타지 사람 모임에서였다. K는 반갑게도 나와 옆 중학교에 다녔었고 어렴풋이 고향 친구들을 공유할 수 있었다. 말을 서로 놓다 존대하다 하기도 했는데 당시 K는 제법 큰 식자재 업체 부장이었고 나는 거래하는 웨딩홀의 낙하산 관리자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웨딩과 뷔페는 업무가 달라서 직접적인 연관을 없지만 그래도 K와 나는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K는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늘 미래를 생각했고 생각을 실천하는 스타일이라, 머릿속에 늘 고민을 넣고 사는 나는 속으로 그를 동경했었다.
- 송 부장님은 갑인데 술을 사네요?
- 뭐, 그게 중요한 가요, 그냥 함께 좋으면 되지.
타지에 와서 혼자 숙소 생활을 오래 한 탓인지 나의 마음은 지쳐있었고 기댈 곳이 필요했다. K는 지역의 특징과 업계의 속성에 대해 간간이 핵심을 전달해주어 어느 순간 거래처 관계라는 느낌이 희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둘만의 술자리에서 K는 뜬금없는 말을 툭 던졌다.
- 돈 많이 모아놓아요. 직장은 영원하지 않아.
몇 년 뒤 지인이 K가 부산의 어느 웨딩홀을 인수해서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거래처 직원에서 웨딩홀 사장이 된다는 건 업계에서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이니 대단한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구나 하며 무심코 지나쳤다. 그 무렵 나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오픈한 지 10년 넘게 여름 비수기에 단 한 번도 월급이 문제 된 적이 없었다. 요즘 분위기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웨딩 업계는 7월 8월이 비수기라 무급 1~2개월은 관례였다. 미혼 직원들은 해외로 놀러 가기도 하지만 나 같은 유부남들은 아르바이트를 찾으러 다른 도시로 떠나기도 했다. 그런 안정적인 우리 회사, 업계의 대기업이라고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M 웨딩홀에 이상한 소문이 났다. 사장님이 해외 사업 중 부도가 나서 도피 중이고 임대료도 미납 중이라고. 소문은 현실이 되어 결국 건물주의 계약해지로 문을 닫게 되었다. 40대 초반 졸지에 백수가 될 처지에 놓인 나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만 했다. 당시 여윳돈으로 시작했던 바이오 주식이 원금의 더블이 되자 아내 몰래 신용대출과 보험대출까지 실행하는 모험 수를 두고 있었다.
- 운이 좋은 거 같아요.
몇 년 만에 만난, 이제는 사장이 된 K는 나의 주식 무용담에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 이제 독립할 때 되지 않았어요?
- 사실 회사가 명도 소송 중이라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어요. 뭐 좋은 거 있을까요?
초시계를 재고 있는 회사수명에 조바심하던 나는 별안간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느낌을 받았다.
- 송 부장님은 진지한 얘기 하면 안경 벗네요. 습관이에요?
습관이 된 건지, 소주 서너 잔이 들어가면 붉어진 얼굴빛에 안경알이 달궈진 마냥 안경을 벗고 뿌연 시야에 기대어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무언가 잘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지만 심박수는 여전히 빠르게 뛰어, 어떻게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가볍게 물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낯설었다.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황급히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로 얼굴을 가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언제까지 주식을 할 거야, 동생도 코인 하다 잠적하였는데…….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내가 결정해야 했다.
며칠 뒤 K의 전화에, 그가 운영하는 웨딩홀에 방문했다. 이른 오후였지만 어두웠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지만, 종이컵 바닥이 살짝 보이는 옅은 커피처럼, 감미롭지만 처량한 분위기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뷔페 유리창은 촘촘히 쪼개진 1000*1500 사이즈의 작은 창문이 30미터가량 이어졌다. 하지만 부산항을 보여주기는 충분했다. 가을빛이 떨어지는 바다는 답답한 지하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나를 설레게 했다. 이렇게 한가롭게 창밖을 내다본 것이 얼마 만인가?
- 같이 해볼 생각 있어요? 내가 다 맞춰줄게요.
한참 상념에 빠져 있을 때 K의 목소리가 들렸다.
- 돈은 되는데 내가 몸이 조금 힘들어서 그래요. 내가 힘들면 도와줄 거잖아요?
K의 제안은 사업의 계약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을 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 백수 생활 이후 한 회사에만 10년 넘게 다닌 나는 계약이나 사업이라는 단어가 좀 어색했다. 아내와 18평짜리 신혼집을 샀을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이사 전에 잔금을 보냈다가 아내한테 그해 내내 혼났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계약서를 쓰긴 하겠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말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걸 다 나한테 맞춰준다는 K의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저물어가는 부산항의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
- 그래요.
최대한 떨림을 감추고 담담한 척 내뱉은 나의 대답에 우리는 운명의 배를 함께 타게 되었다. K의 지분 절반을 내가 사서 공동대표가 되기로 한 것이다. 고무줄 같은 지분의 권리금을 단 한 푼도 깎지 않은 건 그가 내 사람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K는 매일 전화해서 계약금 송금 문제와 앞으로 법인으로 전환할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직원 마인드가 아니라 오너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여러 번 타이르듯 당부했다.
그해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내가 퇴직하자 K는 바로 합류해서 일을 시작하자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복되는 업무가 지루했고 새로운 직장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생겼던 시기였다. 그래서일까 왕복 3시간 거리의 통근도 힘들지 않았다.
혼자 오래 일한 탓일까? K는 늘 바빴고 수시로 회의를 가장한 훈시를 했다. 회의 때면 K는 늘 그렇듯이 뷔페 홀 창문을 등지고 앉는다. 나름대로 알 없는 안경과 눈썹 문신으로 방어했으나 매서운 눈매를 가릴 수 없다. 정수리의 듬성듬성함과 목 옆의 흉터가 새롭게 눈에 띈다. 마치 리니지 ‘집행검’을 가진 절대자의 모습으로 그의 온몸이 북항 바다에 부서진 석양의 조각들을 뿜어내고 있다. 나는 순간 다소곳이 무릎을 모으고 앉으려다 정면을 피해 맞은편 제일 구석에 앉는다. 조금이라고 그 기운을 피하고 싶은 심산이었다.
- 웨딩홀은 내가 맡을 테니 뷔페는 앞으로 송 사장이 맡으세요.
송 사장이라…. 처음 불리는 사장이라는 단어. 송사리는 알아도 송 사장이라.
- 뷔페는 내가 잘 모르는데….
- 다른 건 뭐 잘 알아요? 하하 농담이에요. 그냥 ‘관리’만 잘하면 돼요.
K의 말투는 갑자기 톤이 낮아지며 은밀해졌다.
- 예전처럼 거래처와 친하게 지내면 안 돼요. 저번 주방장도 횟집에다 돈 달라고 해서 횟집 사장이 찾아왔어요. 다 도둑놈이야. 그리고 시간 있을 때 요리 좀 배워요. 오늘 생일이죠? 내가 칼 하나 선물할게.
직원과 회의 할 때와 둘이 있을 때 K의 말투는 뉘앙스가 너무 달라서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이해가 잘 안 되곤 했다. 듣기만 한 회의를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와서 K와 나도 거래처였다가 동업 관계가 되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까 얘기할 걸, 아쉬웠지만 할 수 없다. 책상 구석에는 50센티 정도의 날씬하고 검은 상자가 놓여 있다. 박스를 열어 칼을 꺼내는데 엄지손가락만 한 스티커가 툭 떨어진다. 인쇄된 글자는 ‘비매품’이다.
뷔페도 요식업이라 가장 중요한 지출은 임대료 식자재 인건비. 이 세 가지를 합친 ‘코스트’가 관리의 핵심이다. 임대료는 고정이니 식자재와 인건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문제인데 주말 장사를 하는 웨딩 뷔페의 경우 식자재 코스트가 영업 이익을 좌우한다. 아무래도 한꺼번에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웨딩 뷔페의 특성상, 공산 즉 만들어진 식자재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단가와 제품 퀄리티를 꼼꼼히 살피게 된다. 인건비는 최대한 고정비를 줄여야 해서 주방에 정직원 3명에 부족한 인원은 모두 알바로 채운다. 뷔페 주방장은 식자재 코스트 관리와 알바를 알맞게 구하는 게 요리 실력보다 중요하다. 정해진 코스트를 달성 못 한 주방장은 한 시즌 지나면 바뀌기도 한다.
K의 지시에 따라 뷔페 관리를 시작했다. 요리학원을 등록하고 출근길에 식자재 업체를 방문했다. 식자재 업체 중 비중이 큰 공산 냉동 수산 육류 업체는 신경을 써야 했다. 내가 들어와서 새로 거래하는 곳도 있고 K가 혼자 운영했을 때 거래하던 곳도 있었지만, 별생각 없이 만나기로 했다. 새벽부터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과일 경매사의 호창 소리를 신기해서 한참 듣다, 시장 옆 공산품 거래업체 P사 사장을 만났다.
- 중앙동에 있는 모 업체도 부도나서 미수가 제법 됩니다. 웨딩 쪽은 결제가 안 좋아서…….
그의 말은 이어졌다.
- 그래도 K 사장이 대단하네요. 지분도 잘 정리하고. 아무튼, 결제 잘 부탁합니다. 언제 골프나 같이 치시죠.
P사 사장의 일방적인 부탁인지 명령인지,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누가 갑인지 을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휴대폰 문자 메시지 진동음이 울렸다.
‘00은행 계좌 1백만 원 자동이체 출금. 자동차 리스’
같이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은행에서 회사 계좌에 문자 알림 서비스를 등록했다. K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동업한다고 고향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뭐든지 똑같이 하라는 충고했다. 이에 용기를 내서 K에게 몇 번이나 은행 가자고 얘기해서 성사되었다. 이제야 나도 회사 통장의 입출금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회사에 자동차 리스가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년 겨울, 전 직장에 있을 때 K가 전화로 몇몇 가지 얘기했던 것 중에 자동차가 있었던 것 같았다. K는 문자나 카톡으로 그런 내용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대충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해 겨울 끝자락 어느 날이었다. 주말이면 예식고객과 행사고객이 북적거릴 뷔페 홀인데 이날은 K와 단둘이 앉아서 침묵을 이어 가고 있다. 회의는 늘 K가 소집하지만, 오늘은 나의 요청으로 성사되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라운드 테이블에 앉았다. 약속 시각보다 10분이 지나 도착한 K가 앉으면서 말했다.
- 내 자가용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뭐 사람 말을 그렇게 안 듣고…….
‘동업의 원칙. 5만 원 이상 구매 시 지출결의서에 사장 두 명 싸인 후 경리가 집행한다.’
동업으로 시작하는 K의 멘트가 K의 입이 아닌 내 손바닥의 작은 물체에서 흘러나왔다.
‘동업의 원칙, 5만 원 이상……’
- 이게 뭐예요? 그동안 녹음하고 있었어요?
K는 잠시 말을 멈추다 이어간다.
- 이게 무슨 짓이요? 그렇게 못 믿으면 어떻게 같이 일해요?
K의 목소리는 홀 전체로 퍼져 부산항으로 날아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휴대폰으로 K의 카톡 폭탄이 날아왔다. 보지 않았다. 하나하나 읽으면 온몸의 핏줄이 터질 것 같아 전원을 껐다. 오늘도 불면증은 계속될 것이다. 아내가 평소보다 화가 많아진 내게 조용히 병원 상담을 권했다. 지난주만 해도 K가 위암 전 단계인 장상피화생 치료 중이라고 하소연하길래 나도 지방간과 식도염을 달고 있다며 우울한 중년을 공감했는데.
동업이라면 같은 일을 하는 것인데 그와 나는 다른 일을 한다. K는 회사가 유지되는 방법을 찾고 나는 이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K의 화법은 난해하다. 긴장을 풀게 했다가 자기 할 말을 슬그머니 집어넣는다.
- 날 좋으면 골프 치러 가요. 이제 골프 배울 나이도 됐어요. 가족끼리 식사도 한번 하고.
참 내 차 리스 연장 좀 할게요…….
늪에 빠진 것처럼 도저히 이불에 깔려서 일어날 수 없다. 허리와 어깨가 뭉쳐오고 요도 끝에 거치적거리는 느낌이다. 약간의 뒤척임에도 숨이 답답하다. 쇼츠를 보다, 주식 단톡방을 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인다. 며칠째 소화불량으로 아침을 거르고 있다. 그 불편함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럴 때는 언제나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K가 부럽다. K에게 진심으로 부러운 건 놀라울 정도로 빠른 판단력이다. 코로나로 휴업했을 때, 내가 폐업인 줄 알고 절망의 공포에 빠졌을 때 건물주와 담판을 지어 임대료를 무려 기존보다 70%나 깎은 것이다. 건물주가 몇 년 뒤 재건축을 할 때, 명도에 무조건 협조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고 회사는 기사회생했다. 그때는 그랬다.
길일의 한가운데, K와 나는 각자 위치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한다. 오늘은 뷔페 입구에서부터 내가 신경 써야 한다. 식권 받는 알바생이 똘똘한 편이지만, 식권 한 장 못 받으면 너 일당 절반 날아가는 거라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잔소리한다. 낯선 공간에서 헤매는 하객들의 동선이 꼬이지 않게 입구에서 빈자리를 안내하는 건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우인들이 한꺼번에 올라오거나 신랑신부가 늦게 뷔페에 오면, 하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아 곧잘 만석이다. 이렇게 남은 좌석 수가 간당간당할 때는 자켓을 벗고 공간을 찾아 테이블을 더 깔아야 한다. 모두가 자기 일로 바빠서 나만이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데 이럴 때는 셔츠가 구겨지고 바지에 테이블 먼지가 묻어도 뿌듯하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최 부장의 부탁으로 쌀국수에 쓸 숙주 2봉지와 처치용 밴드를 사러 건물 밖을 나간다. 뒤편 주차장은 아직 북새통이다. 주차타워 2호기 앞에서 주차장 직원과 말싸움을 하는 K를 피해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때마침 화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방 막내가 음식물 쓰레기통 2개를 끌고 오다 눈인사를 한다.
길었던 하루가 지나간다. 몇 번째 싸움이었나 기억하기 싫은 상처들이 나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다. 홀에 가득 찼던 사람들에게 가렸던 뷔페 유리창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마지막 팀 식사가 끝나면 올해 시즌 마지막 길일인 이 하루도 정리가 될 것이다. 가운데 유리창 앞에 서서 창밖을 응시한다. 잿빛 하늘과 바다는 하나가 되어 구분되지 않는다. 오늘이 현실인지 꿈인지 멍하다.
사무실로 들어와 풀업머신에 걸린 녹색 밴드를 무릎에 대고 매달린다. ‘하나, 둘, 셋…….’ 열 개쯤 되었나 바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박 주임이 사무실에 들어온다.
- 이제는 결재 좀 해 주세요.
- 이게 뭐지? 오늘 결재하는 날이 아닌데?
박 주임이 내민 까만 결재판 안에 P 사의 미수 금액이 보인다.
- 미수 건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던.
반응이 없자 박 주임이 덧붙인다.
- K 사장님께서 P 업체 다음 주부터 납품 안 한다고 했다고 전하랍니다. 어제 내용증명 받았는데 송 사장님도 계약할 때 연대보증 섰다고 하시네요.
- …….
볼펜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K가 혼자 운영했을 때 거래했던 식자재 업체의 미수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업체를 동업하면서 계속 거래하는 건 찜찜하다. K가 나를 학생처럼 앉혀 놓고 텅 빈 뷔페 홀에서 여러 번 교육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거래처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동업회사 사장들은 돈을 만지면 안 된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박 주임에게 건조하게 얘기한다.
- 10분 뒤에 다시 와요.
늪에 빠지면 이런 느낌일까, 몸이 잠기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잘 짜여진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묶여 점점 가라앉고 있다. 이럴 때는 어디로든 벗어나야 한다. 옥상으로 간다. 지쳐버린 태양의 숨이 끊어질 듯하다. 괜찮다. 호흡하자, 호흡. 하나, 두울, 세에엣. K와의 시간이 타임랩스 장면처럼 스쳐 간다. 안경을 벗고 얼굴을 감싼다. 저녁노을은 커피빛 인지 핏빛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절정으로 치닫는다. 눈동자가 무르익어 터질 지경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이윽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결재 OK’
한참을 서성이다 무거운 공기로 빈 세수를 하고 사무실로 내려온다. 책상 위에 놓인 은갈치처럼 반짝이는 ‘비매품’을 꺼내 들고 그 자태에 빠져든다. 문득 바라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흠칫 놀란다.
이곳은 과연 어디고 너희들은 누구인가.
아하! 모멘트 / 박용식
친구가 자살을 했습니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어요. 어떻게 하면 죄책감을 이겨내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하는 나는 자꾸만 코끝이 찡해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무대 위쪽의 대형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k-챗의 프롬프트가 띄워져 있었다. 모니터 아래쪽에는 ‘즉문즉해’로 유명한 정각스님과 k-챗에 질문을 입력하는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상담 배틀 아하! 모멘트 : k-챗 vs 정각스님-9인의 특집’, 하고 적혀있는 방송 프로그램의 큐카드를 쥔 나의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정각스님과 프롬프트 엔지니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재빠르게 앞에 놓인 노트북으로 k-챗에 나의 질문을 입력하고 있었고, 그 옆의 정각스님은 빙긋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은 유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방송에서 해야 할 질문을 정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창문을 때리는 듯한 빗소리가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아내는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레 거실로 나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4시 43분이었다. 저녁에 있을 생방송을 촬영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야 했다. 요즘 가파르게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의 특집 편성이었다. 예전 같으면 잠을 푹 자고 일어나 기대와 긴장감이 섞인 기분으로 준비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수월치 않았다. 오늘이 바로 현의 기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모든 일에 의욕이 떨어졌다. 더구나 근래 상담 배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자꾸만 되살아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처지였다. 현이 죽은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내 가슴속에는 무언가 풀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현과 민우,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디를 가나 늘 붙어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다른 대학, 다른 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고교시절부터 넘치는 끼를 주체 못하던 현은 의외로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자칭 예술병에 걸렸다던 민우는 회화과에, 셋 중 가장 평범하고 성적도 나빴던 나는 추가 합격으로 간신히 철학과에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다른 대학에 다녔지만 모두 서울에 있는 학교였기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현은 우리 중 가장 외향적인 친구였다. 리더십도 있고 공부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하는,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장점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현이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자살이라니.
나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갔다. 쉽사리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전원을 켰다. 유튜브를 띄워 정각스님의 ‘즉문즉해’ 영상을 검색하자 해당 동영상들이 올라왔다. 자주 본 영상들이지만 그 중에 짧은 것 몇 편을 다시 돌려보았다. 정각스님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때론 맥을 짚어가며 따끔하게 전하는 이야기들이 언제 봐도 인상적이었다. 왜 ‘즉문즉해’ 영상들이 널리 인기를 얻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영상들을 보고 있자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오늘 촬영을 마치고 나면 지금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상담 배틀 아하! 모멘트’는 박피디가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프로그램이 런칭되기 전, 박피디로부터 인간과 인공지능의 심리상담 배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박피디에게 인공지능이 인간과 상담 배틀을 할 정도의 수준이 될까? A.I.는 지식이나 논리적인 사고에 특화된 거 아냐? 하고 의구심을 표했었다. 그러자 박피디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껏 인공지능 기술의 진화는 눈부시게 진행되어 왔고, 이제는 인간을 넘어서는 공감능력을 갖고 있는 인공지능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자신의 생각에 이성과 감성은 동전의 양면같이 서로를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건강하게만 작동되면 상호보완적인 효과가 있을 거라고. 나는 그의 말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개발자는 그걸 논리적인 감정이라고도 하더라고요, 하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곤 눈을 반짝이며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 듯 말했다.
“인공지능을 상대로 정각스님이 출연한다면 흥미로울 것 같지 않아요?”
박피디의 이 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각스님이라니! 게다가 논리적인 감정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모순 같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리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논리가 배제된 맹목적인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그 점에 있어 얼마나 취약한지 이해되는 바가 있었다. 한편으론 사회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었기에 외면하기만 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박피디와의 대화가 끝날 때쯤, 만약 프로그램이 런칭된다면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런칭된 프로그램은 시청률 고공행진을 벌이며 벌써 오십 회를 맞이했고, 드디어 오늘 일주년 특집 생방송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한동안 정각스님의 유튜브 영상들을 들여다 본 나는 요즘 인기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에 접속했다. 역시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우리 프로그램의 K-챗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K-챗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에 집중하여 답변을 작성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K-챗은 주로 질문자의 정서적인 안정에 도움을 주는, 심리상담에 특화된 인공지능 서비스였다. 어쨌든 나는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를 통해 그동안 내가 했던 질문들의 목록을 살펴봤다. 얼큰한 고추장찌개 만드는 법부터 시작해 컴퓨터 부팅문제 해결 방법과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 목록 그리고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소설의 줄거리 요약과 방송 프로그램의 타임테이블 작성 등등.
사실 오늘 일주년 방송은 평소와 달랐다. 나 역시 질문자 중 한 명으로 참가해 직접 질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방송의 피날레를 조금 더 인상적으로 끌고 가보자는 박피디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아직도 질문을 정하지 못한 거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작성하는 란인 프롬프트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문구를 작성해 넣었다. ‘자살하겠다고 결심한 친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러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나서 엔터키를 눌렀다.
A.I.가 순식간에 답변을 써내려갔다. 자신은 전문상담가가 아니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뒤, 몇 가지 상식적인 대답을 나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친구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는 문장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글로 적혀 있기에 그 속뜻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빠르게 서비스를 종료시켰다. 곧이어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손으로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렇듯 당혹스러워하는 이유가 뭔지,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고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래야만 오늘 방송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현과 민우 그리고 나, 우리 셋의 인생이 각자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하고부터였다. 회화과를 나온 민우는 자신만의 작업실을 열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분주했고, 경제학 전공이었던 현은 졸업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대기업 화재보험사에 들어갔다. 대학시절 내내 한쪽 귀에 귀고리를 하고 다닐 정도로 개성 넘치던 현이었는데, 결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보험회사였다. 물론 귀고리는 그대로 한 채. 그 시절, 녀석들은 그렇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과 다르게 대학시절 내내 전공에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철학과였기에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반면에 어려서부터 유달리 방송에 관심이 많아 한때 방송을 만드는 프로듀서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교시절부터의 성적을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차선책으로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고, 몇 번의 불합격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한 방송국에 신입 아나운서로 취업할 수 있었다.
역시 현과 민우는 나의 합격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우리는 민우의 작업실로 가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그날도 자칭 예술가답게 술자리 시작부터 쉬지 않고 마시던 민우가 먼저 곯아떨어졌고, 어느덧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현은 빗줄기를 보며 맥주를 더 마셨다. 그런데 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너희들이 부럽다고. 나는 귀고리 하고 회사 다니는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현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와 살고 있는 현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여동생의 학비를 대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어 현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달리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다행히 현은 내 말에 얼굴 표정을 바꾸고 킥킥대며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현과 나는 창밖의 내리는 비를 보며 맥주를 밤새도록 들이켰다.
그날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현의 표정을 떠올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직은 현의 죽음을 직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있던 나는 겨우 생각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출근준비를 하다보면 마음이 다독여질 거라고.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말없이 출근해도, 아내는 생방송 있는 날이라 또 예민해졌구나, 하고 생각할 거였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밤새 창문을 세차게 내리치던 빗줄기는 어느새 약해져 있었다. 나는 차를 몰고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가 비 내리는 거리로 들어섰다. 그런데 주유소가 있는 사거리를 통과할 때쯤, 달달한 라떼가 생각났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달달한 라떼를 즐겨 마시곤 했다. 현과 민우는 그런 나를 보고 아직 어려서 그렇다며 놀렸었다. 녀석들은 그 당시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 때 이미 흔히 말하는 ‘얼죽아’파였던 것이다. 나는 문득 민우가 아직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있을지 궁금했다. 민우를 만나지 못한 지도 벌써 오년이 넘었다. 현이 죽은 뒤, 민우와의 연락도 점차 뜸해지다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운전을 하며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민우의 휴대폰 번호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처구니없게도 현의 기일이기에 혹시 민우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 탓에 나는 기연미연 거치대에 걸려있는 휴대폰을 쳐다봤다. 액정에는 대출 스팸 신고표시와 함께 모르는 번호가 떠있었다. 알아서 꺼지겠지, 하는 생각에 일부러 손을 들어 휴대폰을 끄지는 않았다. 계속 울리는 벨소리가 집요하게 귓속을 파고들어 지겨워질 때쯤, 현이 죽기 삼 년 전 나에게 걸어왔던 전화내용을 떠올렸다.
그즈음, 나는 방송국 지사를 전전하며, 꿈꿔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하찮아 보이는 업무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날도 라디오 시보 방송을 하고 짜증 섞인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당직을 서는 날이라 데스크를 정리하고 당직실로 이동하려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액정에 뜬 현의 번호를 보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에 나누는 친구와의 통화에 일이 마음에 안 든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자 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말을 끊으며 지난번에 말했던 자동차 보험은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맥락 없는 현의 질문에 어, 너희 회사로 옮겨야지, 하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자 현은 다짜고짜 내 주민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주민번호를 확인한 뒤,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는 말을 남기고 휴대폰을 끊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나는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바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은 그때부터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휴대폰 벨소리는 멈췄고, 씁쓸한 기억 탓인지 달달한 라떼가 더욱 간절하게 생각났다. 지체 없이 자동차 내비게이션으로 근처 커피전문점을 검색해 그곳으로 차를 이동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드라이브 스루에 도착하자 이른 시간임에도 줄 서 있는 차 몇 대가 보였다. 나는 차를 몰고 진입로로 들어가 대기 줄 끝에 세웠다. 주문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이 길어지자 현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동차 보험을 현의 회사로 바꾸고, 현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한참 뒤인 명절 연휴였다. 현은 간만에 뭉쳐야지,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술자리에서 다시 만난 현은 여전히 한쪽 귀에 귀고리를 한, 개성 있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전과 달랐다. 모두 약간씩 술기운이 오르자 현이 뜬금없이 자신이 읽었던 책이야기를 꺼냈다. 감명 깊었던 문구가 있다면서. 현은 그 문구를 인용해 가며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렇기에 자신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며 최선을 다할 거라고. 현은 나와 민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너희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이전 통화에서 나의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현에게 하소연했던 게 기억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머쓱하게 앉아 있는데, 민우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그래, 파이팅 해야지! 하며 잔을 들었다. 우리는 건배하며 서로에게 예전과는 다른 의미가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잔을 비웠다. 술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현에게 분명히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현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각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자는 이야기가 왠지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졌다. 기껏해야 방송국 지사를 전전하며 시보나 하고 변두리 여관의 쪽방 같은 당직실에서 고단한 하루를 마감해야 하는 삶, 더구나 아무런 기약도 없이 똑같은 매일을 꾸역꾸역 견디며 살아내야 하는 삶은 나의 계획엔 없었다. 그런데 현재의 내 삶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이라고? 그런 결론에 이르자 나는 현조차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떠들어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비 내리던 밤, 민우의 작업실에서 봤던 현의 어색한 미소까지 떠오르자 그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휴가 내내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내다 다시 방송국으로 복귀했고, 그 뒤로도 한동안 자괴감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얼핏 현 역시 나와 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부장의 호출을 받아 간 자리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부장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짐을 싸라고 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파일들을 훑어보며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던진 말이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혹시 근태 문제로 인한 문책일까? 아니면 경영악화로 인한 감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업무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고 해도 퇴사는 또 다른 문제였다. 잠깐 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부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곤 무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뭘 그리 놀라? 내일부터 여기로 안 나와도 된다고. 아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부장은 파일들로 다시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 다음 주부터 본사로 출근해.
본사 생활은 한결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터진 미국 발 금융위기도 오히려 나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방송국이 예능 프로그램에 자사 아나운서들을 쓰기 시작했던 거였다. 사실 아나운서들은 방송국에 소속된 직원으로 이미 월급을 받고 있어 방송국이 그들에게 지불해야 할 출연료는 미미했다. 게다가 다들 나름의 끼도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활용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가성비 좋은 자원들이었다.
나에게도 예기치 않은 기회가 주어졌다. 프라임 타임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방송에 임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지사를 옮겨 다니는 끔찍한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예능에 출연한 나는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했고, 그런 모습이 대중의 관심을 받아 ‘열정 아나? 열정 하나!’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차츰 인기를 쌓아 나갔다. 나는 그렇게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의 바람을 타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은 점점 사정이 나빠졌다. 집안의 경제력이 탄탄했던 민우는 그럭저럭 버텼지만 현은 그렇지 못했다. 금융위기가 닥친 뒤, 현이 다니던 보험회사는 감원을 시작해 어중간한 나이대인 현의 기수가 제일 먼저 그 대상이 되었다. 실적이 나쁘지 않았던 현 역시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현은 대기업 보험회사를 나온 뒤 소규모 금융회사에 일 년 계약직으로 재입사했다. 일 년만 참고 다니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학교 선배의 약속을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 년 뒤에도 정규직 전환은 없었고, 오히려 그 선배와 함께 그곳에서마저 밀려나게 되었다. 그 뒤, 현으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은 선배와 보험사 영업소를 차리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거였다. 그 소식을 끝으로 현에게서 한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현과의 인연도 저물어 간다고 생각했었다.
당시의 착잡했던 기분이 되살아날 때쯤, 차가 계산대에 도착했다. 나는 차창을 열어 계산하고 카페라떼 한 컵을 건네받았다. 한 모금 급하게 마셨다.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한 모금 더 마시고 컵홀더에 끼운 뒤, 드라이브 스루를 빠져나가 방송국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뒤 방송국에 도착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카페라떼를 쳐다보았다. 굳이 스태프들 눈치 보이게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컵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더 마신 뒤,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라떼의 맛과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 향을 느끼고 있자니 방송국 근처 카페에서 현과 만났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현에게서 갑작스런 연락이 온 건 서로의 인연이 끝났다 추측하고 육 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점심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 그렇다고 저녁을 먹기엔 약간 이른 시간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날도 창문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앞에 놓인 카페라떼 잔을 집어 들며 현의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힐끗 봤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잔 표면에는 어느새 얼음이 녹아 물방울들이 잔뜩 맺혀 있었다. 라떼 한 모금을 마시고 고개를 들어 현의 얼굴을 살펴봤다. 조금 수척해졌을 뿐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단지 현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귀고리가 없어 허전해 보이는 귓불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은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빛엔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여윳돈이 없어서 투자하기 힘들 것 같네. 흔들리던 현의 눈빛이 순간 멈췄다. 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나도 아직 월급쟁이야.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별 거 없다고. 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투자 말고 빌려주는 건 어때?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히자 현은 이자까지 꼼꼼히 쳐서 꼭 갚을게, 하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하듯 말했다. 진짜 돈이 없다니까. 투자든 빌려주든 뭐가 있어야지. 현은 지금 네가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게 잘 나가면서, 하고 핀잔 섞인 말투로 내 말을 받았다. 나는 그런 현의 모습이 낯설어 말없이 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귀고리 없는 현의 귓불이 왠지 현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나는 그와 동시에 밀려드는 주변인들의 경제적 도움 요청에 신물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현의 태도에 안쓰러움보다는 실망감이 먼저 들었다. 나는 천천히 현의 눈을 응시하며 강조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 방송국에 소속된 직장인 아나운서라고,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돈을 벌지 못하며, 그렇기에 선배 아나운서들 모두 유명해지면 프리선언을 하는 거라고, 네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지금 내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단호한 나의 말투에 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서렸다. 아마도 너무 달라진 현의 태도만큼이나 그때 나의 표정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대로 가서 커피 값을 지불하곤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면서 현을 돌아봤다. 나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축 처진 어깨로 자리에 앉아있는 현의 모습에 이젠 진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빠르게 걸어갔다.
그때 내가 현에게 돈을 빌려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자동차에서 내렸다.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렸다. 복도를 지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벌써부터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박피디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잠시 소리 없이 서서 스태프들과 박피디의 활기찬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조금씩 활력이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한 뒤, 박피디를 향해 손을 올려보았다. 곧이어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는 박피디에게 대기실에 있을 게, 하고 입모양을 지어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박피디를 보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걸어왔던 복도를 다시 되돌아가 내 이름이 적혀있는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슈트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오늘 방송의 큐카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8시 23분, 생방송에 들어가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늘 생방송은 미리 주어진 대본 없이 현장에서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할 거였기에 더욱 변수가 많았다. 결국 내 질문에 대한 결정은 오롯이 나 자신이 책임져야만 했다. 그만큼 중요한 선택이었지만 현의 기일인 오늘은 현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송에서, 그것도 생방송 중에 현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방송을 하면서 나는 수없이 현이 떠올랐었고, 그럴 때마다 고통스러웠었다. 그 고통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 역시 그만큼 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현이 나에게 마지막 연락을 한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었다. 그날따라 나는 마침 촬영이 없어 한가했었고, 오랜만에 민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예술가 선생님께서 웬일로 친히 먼저 연락을 주셨느냐고 농을 던지던 나에게 민우는 한숨을 내쉬곤 진지한 목소리로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라며 말했다. 현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민우가 전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현은 보험사 영업소를 차리려고 본가 전세금까지 담보로 잡고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경기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영업은 점점 힘들어졌고, 원금은커녕 불어나는 이자도 감당치 못해 결국 얼마 전부터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렸다. 더 놀라운 건, 현의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날, 현이 민우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민우는 오랜만에 연락해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하는 현에게 어이가 없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현의 소식을 묻는 어머니에게 차마 그 이야기까지 하진 못했다며 긴 탄식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상황이 그런 줄 알았다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할 걸 그랬다며 안타까워했다. 혹시 나한테도 연락이 올지 모르니 일단 꼭 만나자고 한 뒤, 붙잡아 놓으라고 덧붙였다. 나는 건성으로 알았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현이 나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걸 알기에 현의 어머니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깨져버렸다. 어쨌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창밖의 내리는 빗줄기를 보자 소주 한 잔이 생각났다. 그때쯤이었다. 갑작스레 휴대폰 벨이 울렸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여기며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현이었다.
나는 현이 대포폰을 쓸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어쩔 수 없이 통화를 했다. 현은 술을 마신 듯 약간 부정확한 발음으로 안부를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잠시 동안 현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현은 여전히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좀 빌려 줘. 발음이 분명치 않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현이 돈 좀 빌려달라고, 하고 다시 말했을 때, 나는 그동안 쌓여있었던 현에 대한 실망감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 건데? 현은 여동생 등록금 때문에 그런다며 오백만원 정도만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너 집에 연락 끊은 지 오래됐다며. 현은 피식거리며 물었다. 우리 엄마가 그러디? 나는 민우한테서 들었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현은 민우가, 하고는 말을 끊었다. 현의 침묵이 길어지자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낮에 들었던 민우의 당부를 떠올리며 현에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말을 건넸다.
말없이 듣고 있던 현은 시계가 넥타이에 걸려있는 시계추처럼 보여, 하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 나에게 천천히 다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한 발음이었다. 넥타이를 천장에 걸어놨는데 고리 사이로 보이는 벽에 걸린 시계가 시계추처럼 보인다고, 고장 나 멈춰버린 시계추. 나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거세진 창밖의 빗소리만 귓가를 맴돌았다. 정신을 추스르곤 이성을 찾으려고 애쓰며 지금 뭐하자는 거냐고 물었다. 현은 답했다. 이제 그만 하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이런 식으로, 하는 생각에 짜증이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마음 한편에서 현이 쇼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추락한 현의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지금 이런 식으로 돈 빌려달라고 협박하는 거냐? 냉소 섞인 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마음의 준비는 다 해놨다고 얘기하는 거야. 우린 친구잖아. 순간, 나는 애써 붙잡고 있었던 이성의 끈마저 끊어져 버리는 걸 느끼며 쏘아붙였다.
“그럼 조용히 혼자 준비한 대로 하면 되겠네. 친구한테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말고.”
그러곤 현의 대답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 전원마저 꺼버리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버렸다. 마음이 답답했다. 죽을 용기도 없는 놈이 협박은, 하고 중얼거리며 두 눈을 꾹 감았다. 새삼스레 학창시절부터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까지 현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즐거웠던 추억들을 망쳐버린 현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자 한편으론 이런 상황에까지 내몰린 현이 안쓰럽기도 했다. 현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들이 마구 혼재되어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내 안에서 회오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켰다. 그러곤 걸려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계속 울렸지만 현은 받지 않았고, 음성녹음으로 넘어간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휴대폰을 끊고 잠시 주저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현은 받지 않았다. 나는 혹시 현의 말이 진짜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휴대폰 키패드에 민우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민우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민우에게 메시지라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나 혼자서 과민반응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애써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밤새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을 지새우고 출근한 나는 가차 없이 현의 죽음과 맞닥뜨렸다. 아침 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아나운서실에서 경찰의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현이 목을 매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바로 나인 것이었다.
나는 현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고장 나 멈춰버린 시계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안을 서성거렸다. 벽에 걸린 시계가 왠지 눈에 거슬렸지만 쳐다볼 수 없었다. 훅, 한숨을 몰아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방송에서 현의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큐카드를 집어 들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질문을 메모하는 나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생방송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 앞 순번의 질문자로 나섰던 8명의 참가자들은 나름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큐카드를 내려다보며 진행을 이어갔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기에 긴장됐지만 표정관리를 하며 멘트를 던졌다. “오늘은 일주년 특집 생방송이니만큼 마지막 질문은 제가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저도 심리 상담은 처음이라 꽤 떨리는데요.” 나는 멘트를 중단한 채 잠시 머뭇거렸다. 큐카드에 메모한 질문을 읽으려고 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는데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고, 그걸 참아내는데 온 힘을 집중해야 했다. 카메라 앞에서 뜬금없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큐카드의 질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질문이 절로 흘러나왔다.
“친구가 자살을 했습니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어요. 어떻게 하면 죄책감을 이겨내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스튜디오 안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뒤,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입력한 질문에 대한 K-챗의 답변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동시에 그 답변을 읽는 K-챗 성우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당신이 찾아가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누군가를 죽인 것이 아닌 이상, 당신 주변의 어떤 죽음도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맹목적으로 무의미한 감정에 몰입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결국 컨트롤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컨트롤된 논리적인 감정을 통해서만이 당신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걸 느끼며 ‘상담 배틀 아하! 모멘트 : k-챗 vs 정각스님-9인의 특집’, 하고 모니터에 떠있는 방송 프로그램 제목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K-챗의 대답을 다시 한 번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속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곤 이 대답이 나에게 아하! 모멘트가 될 수 있을지 따져보았다.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아하! 모멘트,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그때, 정각스님의 답변이 시작되었다. 고개를 들고 정각스님을 바라보았다. 정각 스님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의 죽음은 내 탓이 아닐 수도 있고, 내 탓일 수도 있어요. 결국 모든 건 내 안에 있으니 내 탓이라 생각하면 내 탓인 거고, 내 탓이 아니라 생각하면 내 탓이 아닌 겁니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 답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해답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정각 스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해답이라면, 내가 굳이 외면했던 것이 해답이었다. 나는 생방송 중임을 잊은 채, 멘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맥연히 나지막이 속삭였다. 현아, 미안해. 귀고리를 한 현의 모습과, 귀고리를 하지 않은 현의 모습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쥐꼬리 / 이일우
“칼날 위에 서있구먼.”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주앉은 하상신 의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안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울긋불긋 기기묘묘한 그림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힘들겠어. 나한테 비법이 있긴 한데, 워낙 특별한 거라.”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린 후 천천히 말했다.
“쥐꼬리를 삶아 먹어. 최소한 일주일에 한 개씩 3개월 동안. 실험실에서 키운 희끄무레한 거 말고, 건강한 야생쥐. 안 그러면 올해를 넘기기 힘들어.”
하 의장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올해를 못 넘긴다는 말도 충격인데, 쥐꼬리를 먹으라니. 저절로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얼마 남지도 않은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더듬더듬 몇 번을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똑같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어렵게 수소문 끝에 찾아온 무당집이었다.
“저, 그렇게만 하면, 이번에, 당선될까요?”
아무리 3선의원이지만 신기가 있어 카리스마가 넘치는 무당 앞에서 말투는 저절로 공손해졌다.
“그건 내 말대로 하느냐에 달렸어. 그런데, 이 비법은 부작용이 있어.”
“무슨?”
“코끝이 빨갛게 변해. 절대 이상하게 생각 말고. 자네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무당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투였다. 복채로 준비해간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네고 서둘러 무당집을 나오면서 하 의장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괜히 용하다고 소문이 났겠어? 내로라하는 국회의원, 대통령후보까지 줄줄이 맞췄다는데, 시장만 될 수 있다면 까짓것…….’ 이곳을 추천해준 부의장이 원망스러웠지만 이 정도에 위축될 하 의장이 아니었다. 겉은 장비, 속은 제갈공명으로 불리는 하 의장이 아닌가. 복잡한 때일수록 직관을 믿고 행동이 빠른 그였다.
하 의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행복시 시장으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려면 강력한 경쟁자인 현직 시장을 눌러야 한다. 실행방향을 설정하자 혐오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는 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그 담장 위를 지금껏 무사히 걸어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하 의장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지난 십오 년 동안 이 서럽고 더러운 정치판에서 의지를 다질 때마다 무심코 해온 의식이었다.
하 의장은 시의회에 들어서자마자 서무주임을 의장실로 호출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서무주임이 빠른 걸음으로 2층 의장실로 들어왔다. 하 의장은 지천명을 앞둔 서무주임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의회 건물에 쥐가 있다던데, 아세요?”
“쥐요? 글쎄, 들은 적이 없는데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서무주임의 모습은 깡마른 체구 때문인지 상반신 전체가 굽실굽실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의장이 먼저 가볍게 잽을 날렸다.
“서무주임이 어떻게 나보다 의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수 있습니까? 평소 의회 방역을 어떻게 하길래. 의원님들이나 직원들에게 행여나 나쁜 병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이래가지고 좋은 일이 생기겠나…….”
하 의장은 일부러 마지막 말을 흐렸다. 자신의 의도대로 서무주임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얼마 후면 5급 승진심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승진이라는 민감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좋은 일’로 에둘러 표현한 자신의 센스가 만족스러웠다. 서무주임은 잔뜩 긴장한 채 색깔볼펜을 만지작거리며 연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괜찮은 업체한테 방역사업 계약조건을 알아보세요. 단, 업체직원들한테 쥐꼬리는 따로 모아달라고 하고.”
살짝 미소가 비친 얼굴의 하 의장은 곧바로 단도리를 했다.
“쥐꼬리는 조용히 처리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네네, 알겠습니다.”
서무주임은 난데없는 쥐꼬리미션으로 얼떨떨한 채 의장실을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업무용 수첩에는 쥐, 방역, 꼬리 따로, 승진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고 꼬리 따로 옆에 빨간색으로 별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이정아는 사무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직장에서는 사이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행복시처럼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는 달랐다. 생활소음의 변화가 가장 컸고 사이렌소리도 그 중 하나였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갑작스럽게 울려대는 사이렌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라곤 했다. 대도시는 그렇게 사람들의 사건사고를 먹고 자라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정아가 행복시의회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을 엄마한테 알린 건 지난 여름휴가 즈음이었다. 시집갈 생각도 않고 박사과정을 밟더니 이젠 일만 하는 딸에게 엄마가 불만섞인 말투로 물었다.
“시의회 전문위원이 뭐하는 사람이냐? 지난번보다 좋아?”
“엄마, 전문위원은 시장이나 시의원이 제출한 조례안을 검토하고 의원들한테 보고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좋지.”
“좋다니 다행이긴 한데, 하필 계약직이냐.”
“에이, 엄마가 몰라서 그래. 말만 계약직이지 크게 사고만 안 치면 계약은 계속 연장돼.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잖아,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일반직 공무원들이 시장 편을 들지 의원들 편을 들겠어? 그래서 나 같은 계약직 전문위원이 필요한 거라고.”
엄마 입에서 ‘만나는 사람은 있냐? 너, 올해 나이가 몇 살이냐, 이렇게 마흔 넘길래?’라는 말들이 쏟아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 했다. 이정아는 자신의 업무를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것도 계약직신분에 대한 걱정을 호의로 바꾸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전까지 중앙부처의 지방사무소에서 전문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이정아에게 의회 근무는 아직 낯설었다. 지방의회에서 근무를 오래 한 선배가 진지하게 이직을 권했을 때 마침 10년간의 중앙부처 근무에 염증이 생겼을 때였다.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에 익숙한 역사와 문화에서 정부중앙부처 근무는 겉보기에 근사해 보일 뿐 조직문화는 사무적이고 건조했다. 남의 떡이 커보일지라도 지방자치단체의 인간적인 문화가 내심 부러웠다.
막상 겪어 보니 지방의회라는 곳은 본청의 고참들에게 꿀보직이자 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청의 사업부서들보다 상대적으로 업무강도가 약하다 보니 주로 정년퇴직이 얼마 안 남은 고참들이 의회로 발령이 났다. 민선시장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현행 지방자치제도에서 본청보다 승진기회는 적을지 몰라도 자체사업이 적은 의회를 한가한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퇴직을 준비하며 대체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 했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그들만의 형님동생문화가 이정아에겐 썩 내키지 않았다.
“잠시 방역 좀 하겠습니다!”
오후 3시. 낯선 남자가 시의회 전문위원실에 들어왔다. 주로 시골에서 농약을 칠 때 사용하는 네모난 상자를 등에 짊어진 채였다. 기다란 작대기를 사무실 구석구석을 빗질하듯 움직이자 상자에 연결된 가느다랗고 길쭉한 노즐 끝에서 좁쌀 모양의 작은 알갱이들이 쏟아졌다. 호기심이 많은 이정아 전문위원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효과가 있어요?”
“그럼요. 이렇게 뿌려놓고 나중에 쥐가 먹으면 백발백중 밖에 나가서 죽어요.”
“밖에서 죽는다고요?”
“예. 최신이거든요. 쥐들이 이걸 먹으면 밖에 나가서 죽어요.”
남의 고통이 나의 행복인가. 이정아는 방역직원의 설명을 신기해하면서 ‘그러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안도감과 끔찍함이 밀려왔다.
며칠 후 나배고 전문위원이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 전문위원, 얘기 들었어요? 지하 세면장 천정에서 죽은 쥐가 발견됐대. 썩어서 구더기까지 있었다는데.”
“어머, 못 들었는데요.”
“어쩐지, 얼마 전부터 지하 세면장이랑 체력단련실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더라고.”
“그래요?”
“아무리 찾아봐도 냄새가 날 만한 걸 못 찾았거든. 근데, 세면장 천정 위에서 발견했다지 뭐야. 쥐 한 마리가 죽어가지고. 근데, 꼬리가 없다고 하더라고.”
이정아는 나 전문위원의 얘길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머리 위 천정 너머에 꼬리가 잘린 쥐의 사체가 썩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양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런 얘길 재밌어 하는 나 전문위원을 이정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회 주차장에서 새끼 쥐 한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다. 어른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의 새끼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담배를 피러 나온 나 전문위원이 발견했다. 서무주임이 계약을 체결한 방역업체의 조치는 신속하고 효과적이었다. 이로써 방역을 하고 죽은 쥐는 모두 3마리로 늘었다. 이상한 점은 죽은 쥐마다 꼬리가 잘린 채였다. 마치 누군가 예리한 도구로 일부러 잘라낸 모양이었다.
행복산 중턱에 위치한 행복시의회 건물은 예전에 보건소였다. 의회로 사용하기 위해 십여 년 전 리모델링이 됐다. 낡은 5층 건물이고 바로 뒤에 행복산이 있어 종종 건물 안에 지네가 출몰하기도 했다. 성인남성 집게손가락보다 긴 몸통으로 수십 개의 다리를 꼬물거리는 지네의 모습은 남자직원들까지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쥐는 차원이 달랐다. 어느 날엔 전문위원실 책상 위에 놓아둔 초콜릿통 뚜껑을 물어뜯은 흔적이 발견됐고, 쏜살같이 사무실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고 여직원들이 기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이정아 전문위원과 짧게 인사를 주고받자 보건위생과장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시장님의 공약 관련 조례안을 발의합니다. 긴급하니 잘 좀 살펴봐 주세요.”
“네, 무슨 조례안이죠?”
“행복시 위생환경개선을 위한 조례안입니다.”
보건위생과장은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갔다. 관내 공공건물과 다중이용시설에 쥐, 바퀴벌레 등을 퇴치하기 위해 약품을 지원하겠다는 게 이번 조례안의 요지였다.
“시민들의 건강을 챙기겠다는 취지이니 나쁠 건 없겠네요. 예산은요?”
“다음 정례회 예산안에 반영할 계획입니다. 이번 임시회에서 조례안만 통과된다면…….”
이 전문위원은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뭐, 결론을 정해놓고 통보하는 거야 뭐야. 의회를 뭘로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싫은 내색을 하는 건 초보라고 생각했다. 더러워서 자리를 피하더라도 따질 것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10년 공직생활 동안 몸에 밴 그녀의 습관이었다.
“근데, 왜 긴급히 발의하세요? 규정상 20일 동안 입법예고하고 회기개시 15일 전까지 의회에 제출해야 하잖아요?”
“네, 위원님. 그래서 오늘 협조를 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협조를 구하는 겁니까? 그쪽 스케줄대로 갑자기 찾아와서 통보하는 거지. 입장을 바꿔보세요, 기분이 좋겠나.”
보건위생과장의 니글거리는 말투 때문인지 이 전문위원의 언성이 높아졌다.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해서인지 보건위생과장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전문위원실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이정아 전문위원이 행복시 시장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보건위생과장처럼 시청 공무원들이 선출직 시장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잉충성하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었다. 그녀는 며칠 후 의장실에서 있을 안건사전설명회 때 이번 조례안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리라 다짐했다. 씰룩거리던 그녀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의장님, 말씀하신 거 준비했습니다.”
의장실에 단 둘만 남게 되자 서무주임이 미리 준비한 누런색 서류봉투를 건넸다. 서무주임의 얼굴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이 역력했다. ‘공무원한테 승진만한 낙이 없지. 봉사정신은 개뿔, 영혼이 밥 먹여 주나. 그런 건 뭣도 모르는 신참 때나 쓰는 거고. 이 줄만 꼭 붙잡자.’
‘가늘고 길고 건강하게’라는 가훈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서무주임이었지만, 공직생활 25년을 넘기면서 만년 6급 주사로 퇴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건 작년 말 큰 딸이 사윗감을 데려오고 부터였다. 시부모 되실 분들 앞에서 시집가는 큰 딸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다. 고시출신이 아닌 공무원들에게 5급 사무관은 그야말로 승진의 꽃이다. 사무관이 될 수 있다면 수천만 원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서무주임이 하 의장 라인이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 의장은 일주일에 두 번꼴로 서무주임이 조달하는 쥐꼬리를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하 의장에게 쥐꼬리는 히든카드요 비책이었다. 행여나 소문이 퍼질까 상대당 후보 진영에서 알까 조심스러웠다. 쥐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마누라한테는 당연히 숨겼다. 어느새 한 달을 먹다보니 쥐꼬리의 맛도 처음에나 역겨웠지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미세하고 촘촘하게 솟은 잔털이 눈에 거슬렸지만 흡사 쫄깃쫄깃한 오징어 다리를 씹는 맛이 났다. 얼마 전부터는 아예 꼬리를 햇볕에 말려서 육포나 가지고 다니며 먹었다. 시장 당선만 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잘근잘근 씹었다. 질긴 쥐꼬리를 씹으면서 오로지 당선, 당선, 당선만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문제는 부작용이었다. 먹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끝이 눈에 띄게 빨갛게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끝에 생긴 빨간 부위는 여러 개의 좁쌀 크기에서 새끼손가락 손톱크기로 커지더니 급기야 500원짜리 동전보다 커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하 의장 자신도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피부색과 유사한 화장품으로 가리기도 하고 과음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지역구에서 자주 마주치는 시민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투표 당일까지 후보의 얼굴을 알려도 모자란 판에 매번 마스크를 쓰고 다닐 수는 없었다. 출마후보자 프로필 사진 촬영은 메이크업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지만 마누라가 난리였다.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 아니냐며 병원으로 가자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모든 것을 선거가 끝난 후로 미루자며 아내를 설득하느라 하 의장은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면서 선거일정 막바지에 예정된 케이블방송사 주최 TV토론회가 가장 큰 고비라고 생각했다.
안건사전설명회를 위해 이정아 전문위원과 보건위생과장이 의장실 가운데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의장실 한쪽으로 보건위생과 직원들 세 명이 배석했고 긴장한 듯 모두 표정이 굳어 있다. 하 의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전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안건사전설명회는 정식으로 상임위 회의에서 심의하기 전에 의원님들과 전문위원에게 안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마련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안건은 시장이 제출하는 행복시 보건위생환경조례 일부개정안인데요. 먼저 보건위생과장이 안건취지부터 말씀하세요.”
보건위생과장이 말을 받았다. 공식적인 상임위 회의도 아니고 속기사도 CCTV녹화도 없지만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설명 상대가 의장이 아닌가. 보건위생과장은 준비해간 원고를 조심조심 읽었다.
“행복시 보건위생환경조례 일부개정안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먼저 제안이유를 말씀드리면, 본 개정안은 행복시 관내의 공공시설 및 다중시설의 위생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사전설명회가 시작되고 5분쯤 지났을까. 하의장의 코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몇 주째 지속된 증상이다. 코끝을 손가락으로 계속 긁어도 가려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길게는 30분 이상 가려움이 지속됐다. 설명회를 시작한지 불과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자꾸 코에 신경이 쓰여 보건위생과장의 보고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 의장이 과장의 말을 잘랐다.
“보건위생과장님, 그러니까 이번 일부개정안 요지가 뭐죠? 다들 바쁘시니까 결론부터 먼저 들읍시다.”
“아, 예. 결론만 말씀드리면 쥐나 바퀴벌레를 잡는데 쓰이는 약품 구입비용을 시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그 근거를 조례에 신설하자 뭐 그런 겁니다.”
“그래요? 공식적인 상임위 심의도 아니고 사전설명회 자리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하 의장은 연신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렇다고 직원들 앞에서 계속 코를 후비고 있을 수도 없고 잠자코 있기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서둘러 설명회를 끝내고 싶었다. 과장의 얘길 잠자코 듣고 있던 이정아 전문위원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의장님, 외람됩니다만, 이번 개정조례안에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순간 하 의장은 설명회를 일찍 끝내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게 뭐죠?”
이정아 전문위원이 또박또박 의견을 말했다.
“개정조례안의 취지 자체는 저도 공감합니다만, 이번 개정안은 내용적으로나 절차상으로 미흡한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첫째, 집행부가 이번 조례안의 핵심이 쥐, 바퀴벌레를 잡는 약을 무료로 시민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공직선거법상 사전선거운동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전선거운동이라는 용어에 배석한 직원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보건위생과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량이 크진 않았지만 이 전문위원의 목소리는 의장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둘째, 공공기관이라면 모를까 시민들의 세금으로 민간건축물까지 약품을 지급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개정안은 행복시의회 회의규칙상 회기개시 15일 전에 제출해야 한다는 절차상 규정을 어겼습니다. 의원님들의 심도있는 의안심사를 방해한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이 전문위원의 비판을 잠자코 듣고 있을 보건위생과장이 아니었다. ‘여기서 밀리면 시장님으로부터 찍히는 것은 물론이고 배석한 직원들한테 능력없는 과장이라는 비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 보건위생과장은 설명회에 오기 전 급하게 살펴봤던 규정이 떠올랐다.
“이 전문위원님,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51조를 보면 시장·군수·구청장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청소나 소독을 실시하거나 쥐, 위생해충 등의 구제조치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 긴급한 안건은 15일 이후에도 제출이 가능하잖습니까?”
“저도 그 법은 압니다. 근데요, 그 법률은 공동주택, 숙박업소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중심으로 시설을 관리하거나 운영하는 사람이 소독하고 방역하라는 내용이지, 시에서 직접 개인에게 방역비용을 현금으로 지급하라는 내용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자꾸 긴급하다 어떻다 말씀하시는데, 그 긴급하다는 이유가 뭔가요?”
“그야, 도처에 쥐나 바퀴벌레가 많다는 민원이 제기되니까 이번 기회에.”
“보건위생과는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나요? 도로나 골목, 공원같은 공공시설은 당연히 우리가 책임져야할 영역이죠. 헌데, 민원이 접수됐다고 예산을 들여 개인에게 방역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요? 응익(應益)의 원칙대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비용부담을 해야죠.”
‘회의를 끝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하 의장의 머리를 스쳤다. 집행부에 비판적인 이 전문위원을 누그러뜨리면서 다선의원의 조정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하 의장이 점잖으면서도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얘길 듣고 보니, 이정아 전문위원의 지적이 일리가 있네요. 물론 보건위생과장이 설명한대로 방역도 필요해 보이고. 상임위에서 의원님들이 논의하시겠지만, 예산지원 대상에 민간다중이용시설은 제외하고 공공시설만 포함시키는 게 어때요? 불필요한 오해도 없애고.”
의장이 수정안을 제안하자 보건위생과장도 이정아 전문위원도 얼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의회로 이직할 때 물밑에서 지원해 준 하 의장이었다. 집행부 직원들 앞에서 이정아가 대놓고 하 의장의 제안을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소속정당과 상관없이 친화력을 발휘하고 대립하는 주장들 사이에서 원만히 협상을 이끄는 능력, 고졸학력의 하 의장이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서 3선까지 살아남은 노하우였다. 선거를 앞두고 집행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싶지 않은 하 의장은 이 전문위원을 노련하게 달랜 후 의장으로서의 무게감을 과시하듯 마무리 말을 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집에서 쥐나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몸에 좋다면 뭐든 먹을 텐데, 쥐가 정력에 좋다고 하면 싹 사라지려나? 그래도 설마 쥐를 먹는 정신 나간 놈이 있겠어요?”
하 의장의 우스갯소리로 잠시 어색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하 의장 쪽을 향해 가장 크게 웃은 직원은 설명회 내내 바닥과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던 보건위생과 40대 남성 직원이었다. 하 의장은 다시 코를 만지작거렸다.
하 의장이 의장실 소파에 앉아 지역신문을 펼쳤다. 1면의 지방선거 여론조사결과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상신 후보 인지도, 지지도 선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쥐꼬리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모두 날아갈 것 같았다. 대통령, 국회의원은 언감생심이었지만, 행복시 시장정도는 분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당 공천도 무난하게 받았고 선거자금도 장마철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하니 얼마 안 남은 시장선거뿐 아니라 그 다음 더 큰 선거도 해볼 만 하겠구나 싶었다. 그는 이게 다 쥐꼬리 덕분이라고 믿었다.
행복시 시장 출마 후보자 TV토론회가 열리는 방송국 입구에는 방송시작 한참 전부터 선거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족히 수백 명은 됨직한 지지자들이 피켓과 현수막을 흔들며 야단법석이었다. 그 중에는 한쪽에서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정아 전문위원도 있었다. 평소 대칭관계에 있는 시장과 인간적으론 비호감이지만 의회의 어른인 하 의장의 토론광경을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지방의회에 근무를 시작하고 처음 보는 선거행사가 그녀에겐 신기하면서도 생경했다.
오늘 토론자는 모두 7명이다. 하 의장은 기필코 TV토론회에서 자신의 승기를 굳히겠다고 다짐했다. 현직 프리미엄이 있는 행복시 시장을 제외하곤 초·재선 정도의 후보자들이라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투표함을 열 때까지 결과를 쉽게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도 오랜 정치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그였다.
TV생방송을 앞두고 긴장되긴 3선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TV토론회는 리얼(Real)이 대세인 방송트렌드를 십분 반영해서 토론회 시작 전까지 후보자들이 서로 마주치지 못하게 방송국 관계자들이 엄격히 통제했다. 출연자들 간 사전합의나 조작을 방지하고 후보자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다.
하 의장은 수행비서가 가져다 준 예상질문과 답변자료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방송시작시간이 가까울수록 오히려 머릿속에서 ‘쥐꼬리, 시장, 쥐꼬리, 시장……’만이 떠돌았다. 특정 종교가 없는 그에게 용하다는 무당의 영험한 기도발이 유일하게 믿는 구석이었다. 복채 봉투에 초록색 지폐를 더 넣지 않은 게 새삼 후회스러웠다. 하 의장은 삶은 쥐꼬리를 먹은 걸로도 불안했는지 먹다 남은 쥐꼬리를 투명비닐봉투에 담아 양복 안주머니에 부적처럼 고이 접어 가져왔다.
부작용을 어떻게 감추느냐가 가장 힘든 과제였다. 어차피 방송용 메이크업을 하겠지만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빨간 코가 너무 눈에 띄었다. 가려움도 문제지만 이미 그의 코 전체가 방울토마토 몇 개를 이어놓은 것처럼 빨갛게 변해버렸다. 선거캠페인에서는 사소한 약점조차 상대 후보에겐 나를 찌르는 비수로 활용될 수 있다. 수행비서도 곁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럴수록 그의 빨간 코는 색깔만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TV토론 준비를 할 때는 주로 마스크를 쓰면서 모면했고 간혹 걱정스러워 하는 참모들에게는 곧 나아질 거라며 다독였던 하 의장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하 의장의 머리에 방법이 떠올랐다. ‘오늘만 마스크로 가리자. 독감에 걸렸다고 말하지 뭐. 아무렴 노출시키느니 가리고라도 방송하는 편이 낫지. 택시만 고집하다 버스, 전철까지 놓치면 안 되니까. 역시 나는 정치가 체질이야.’ 6월에 뜬금없이 무슨 독감이냐는 비난도 염려됐지만 하 의장은 오히려 자신의 임기응변이 마음에 들었다.
카메라와 조명이 제 자리를 잡고 제작진들의 동작이 멈췄다. ON AIR 불이 켜지자 방송세트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지역케이블방송사 주관 TV토론이지만 생방송은 생방송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담당PD가 아나운서에게 손짓으로 큐 사인을 보냈다. 아나운서가 오프닝멘트를 하는 동안 대기실에 있던 시장 후보자들이 줄줄이 세트장으로 입장했다. 하 의장도 비서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을 나와 토론회 세트장에 들어섰다. 순간, 그는 하마터면 생방송 도중 소리를 지를 뻔했다. 토론회 좌석에 앉은 6명의 출마후보자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아뿔싸.
후보자들이 사전에 추첨한 차례대로 짧게 인사말을 하는 순서가 됐다.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7명의 후보들은 모두 독감에 걸려 마스크를 쓰고 토론회에 임하게 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인사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후보자간 일대일 토론순서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긴장이 누그러졌다. 하 의장은 마스크를 쓴 채 6명의 후보들을 찬찬히 둘러 봤다. 그동안 겪었던 정치적 굴곡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문득 자신의 마스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10초 아니 30초쯤 흘렀을까.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하 의장이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자 하 의장의 얼굴이 방청객으로 향해 있는 모니터 화면에 크게 클로즈업됐다.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자 조연출은 방청객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다. 토론회를 지켜보던 수행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하 의장과 눈이 마주쳤다. 10년을 곁에서 모셨지만 수행비서는 지금처럼 강렬한 하 의장의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하 의장은 안주머니에서 쥐꼬리를 넣어둔 비닐봉투를 조용히 꺼내어 오른손으로 꼬깃꼬깃 움켜쥐었다.
런다운 / 최탁
옷장에 걸린 다양한 색깔의 넥타이를 훑어보다가 시선이 멈췄다. 다시 가을이었고 오석은 가을이면 파스텔 톤 파란색 넥타이를 자주 골랐다. 3년 전 정년퇴직 후 한동안 양복을 입을 일이라고는 결혼식과 장례식뿐이었으나 5개월 전부터 문화센터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하고 있어 매주 수요일에는 정장을 입었다.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했던 오석으로서는 정장이 몸과 마음에 주는 긴장이 익숙하고 반가웠다. 들뜬 표정의 오석이 옆에 서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파란색 넥타이 너무 자주 매는 것 같아. 수강생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아내가 오석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그거 맬 거면서. 당신 요즘 외모에 부쩍 신경 쓰네. 너무 짧게 매지 말고 혁대 버클 가리게 매.”
거울을 바라보니 이번에도 넥타이 끝은 버클 위로 한참 올라가 있었다. 오석이 얼른 넥타이를 풀자, 아내가 넥타이로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아직도 넥타이 매는 게 서투르니 참.”
오석은 아내가 매주는 넥타이의 끝이 허공을 휘휘 가르는 걸 보며 목을 길게 빼고 멋쩍게 서 있었다.
“어때? 목 돌리기 편해?”
목을 좌우로 몇 번 돌린 뒤 아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을 보니 넥타이 끝이 혁대 버클을 살짝 덮고 있었다. 아내가 오석의 등을 툭 치며 안방을 나갔다. 양복 상의를 걸치려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혜진이 보낸 문자였다.
‘선생님. 차 아파트 입구에 있어요. 천천히 내려오세요.’
오석은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지를 확인했다. 반지는 오래전부터 주머니에 있었다. 왼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안방을 나가자, 아내가 식탁에 차려놓은 아침이 보였다.
“미안해. 오늘 좀 일찍 나가야 할 거 같아. 아침은 못 먹겠어.”
회사에 출근할 때도 종종 있던 일이라 아내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현관으로 향하는 오석의 뒤를 아내가 따라오며 말했다.
“지갑 챙겼어?”
“아! 맞다. 급히 나오느라······.”
얼른 안방으로 향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석의 시선 속에는 혼란스러운 여러 감정이 혼재했다. 오석이 은퇴하기 전에는 두 사람이 매일 비슷한 대화를 반복해도 늘 이야깃거리가 풍성했다. 하지만 은퇴 후 둘의 관계는 뭔가 건조해진 느낌이었다. 은퇴 직전에 아들이 결혼하고 딸이 취직해 집이 빈 둥지가 된 것도 푸석해진 관계의 한 원인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은 많아졌지만, 공유하는 부분은 오히려 작아졌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언쟁이나 불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상황은 이미 달라졌지만 서로 적응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둘은 길고 지루한 하루를 아침마다 무료하게 맞이했고 무언가 기대할 게 있었던 지난 시절의 하루를 그리워했다. 그 무료함과 그리움은 집을 떠난 자식들보다 삶의 방향을 잃은 오석에 기인했다.
그런 대담한 행동은 평소의 오석과는 아주 달랐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는 복학생으로서의 성숙과 여유는 찾기 힘들었고 한동안 이성과의 접촉에서 강제적으로 격리됐다가 풀려난 남자로서의 조급과 미숙만 보였다. 여전한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캠퍼스에는 이미 봄꽃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학생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웠다. 오석이 두 여학생의 앞을 가로막자, 수경은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으나 배옥은 전혀 놀라지 않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벌써 보름 넘게 강의실과 캠퍼스 주변에서 오석의 눈길이 수경을 향했기 때문이다.
“국문과 2학년 하수경 씨죠? 단편소설을 썼는데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도서관으로 갑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오석이 리포트 용지 십여 장을 수경에게 건네주고 둘을 지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경과 배옥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잠시 오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먼저 시선을 거둔 배옥의 눈에 수경이 들고 있는 리포트 용지가 들어왔다.
“소설은 무슨, 연애편지 주면서.”
수경의 손에서 리포트 용지를 뺏은 배옥이 겉장을 소리 내 읽었다.
“‘시간의 역행’······ 7907-3236 기계공학과 3학년 채오석.”
배옥의 손에서 리포트 용지를 낚아챈 수경이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잘 쓴 글씨는 아니지만 반듯하게 정리된 문단들이 리포트 용지를 빼곡하게 메웠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리포트 용지 위에서 느린 속도로 같이 움직였다. 3월 하순의 봄볕이 찬 바람을 막으며 두 사람을 따뜻하게 감쌌다.
소설의 시작은 아주 유쾌한 내용이어서 두 사람은 이야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 같이 큰 소리로 웃었고 학생들이 둘을 힐끔거리며 지나치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는 가슴이 저려 둘은 같이 울먹이며 주인공에게 완전히 동화됐다. 그런데 마지막 결말 부분이 없었다. 수경이 리포트 용지를 앞뒤로 다시 넘겼고 배옥이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마지막 페이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오석이 갖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다음에 오석이 다시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지막 페이지가 빠졌다고 무심히 말하며 자존심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궁금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 도서관으로 오석을 만나러 갈 것인지 선택만 남았다. 자존심보다 궁금함이 앞선 배옥이 수경의 손을 끌었다.
“이 인간 선수네. 너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그래도 글은 참 잘 쓴다. 이제 학생 식당으로 갈까?”
배옥이 수경을 보며 꾸짖듯 말했다.
“뭔 소리야? 도서관으로 가서 마지막 페이지 내놓으라고 해야지.”
“아 싫어. 쪽팔리게. 너만 가서 받아 와.”
“나만 가면 주겠냐? 나, 결말 읽기 전에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한다. 이게 다 너 때문에 생긴 일 아냐?”
배옥의 부릅뜬 눈을 피하며 수경이 마지못해 답했다.
“그러면 결말만 받아 오자. 점심을 같이 먹자든가 차를 마시자든가 하면 바로 그냥 나오는 거야. 알았지?”
“당연하지.”
두 사람이 도서관으로 들어가 오석을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1층 열람실에는 오석이 없었다. 오석을 찾는 동안 수경의 머리에 오석의 얼굴과 큰 키가 점점 뚜렷이 각인됐다. 유쾌하고 애달픈 주인공과 오석의 모습이 겹쳐 오석을 찾는 건지 주인공을 찾는 건지 모호했다. 2층 열람실 구석에 있는 오석을 수경이 발견했다. 수경이 배옥의 옆구리를 찌른 손가락으로 오석의 자리를 가리켰다. 배옥이 수경의 손을 끌고 오석의 옆으로 다가가 수경의 등을 떠밀었다. 뒤로 물러서는 수경의 등을 배옥이 다시 세게 밀자, 수경이 하는 수 없이 오석의 어깨를 손끝으로 가볍게 친 뒤 허리를 굽히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마지막 페이지가 빠졌어요.”
고개를 돌려 수경을 올려다보는 오석과 수경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얼굴이 크게 들어왔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수경이 얼른 허리를 폈지만 이미 귓불이 발그레했다. 오석이 가방을 뒤적거려 마지막 한 페이지를 오히려 무심하게 수경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두툼한 원서에 집중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받고 어색하게 서 있던 수경이 오석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배옥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두 사람의 속마음이 기대한 것은 이런 건조한 만남이 아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오석이 도서관을 나오자, 이번에는 수경과 배옥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 도서관에서의 수줍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얼굴과 목소리로 수경이 따지듯 물었다.
“아니 무슨 이런 결말이 다 있어요?”
배옥이 말을 보태려고 했으나 수경의 말이 먼저 배옥의 입을 막았다.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열린 결말입니다. 독자에게 판단을 넘기는 거죠.”
배옥이 항의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수경이 빨랐다.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작가가 생각하는 결말이 따로 있나요?”
“물론 제 나름대로 결말은 갖고 있어요.”
수경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니까 어서 그 결말을 말해 봐요.”
오석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알려 드릴게요.”
수경이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물었다.
“다음이라니,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면 알려주겠다, 뭐 이런 심보인가요?”
“아니요. 데이트 신청은 할 거지만 결말은 제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할 겁니다.”
“그게 언젠데요?”
“말하고 싶을 때요?”
“아니, 데이트요.”
배옥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스스로 입을 닫았다.
강의가 끝나자, 혜진이 오석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오늘 첨삭지도는 점심 드시면서 하시죠.”
혜진은 45세 이혼녀다. 발레를 전공해서 그런지 아담한 키였지만 몸매가 예쁘고 목선이 길었다. 동네에서 발레 학원을 하는데 생각보다 학생들이 많았다. 혜진은 모습과 음성이 아내와 비슷했다. 가끔 강의실 밖에서 혜진의 목소리가 들리면 아내가 왔나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혜진은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수강생이었고 그녀의 글에는 관계에 대한 열린 사고와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가 담겨있었다. 그것도 아내와 비슷한 점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것이 혜진과 아내가 다른 점이었다.
“저도 오늘 지도받기로 돼 있습니다.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혜진 뒤로 체격이 큰 문호가 급히 다가왔다. 문호는 혜진을 마음에 두고 있는 동갑내기 노총각이다. 그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지난주에 제출한 단편소설은 분량이 제출 기준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내용은 거의 일기 수준이었다.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강의와 관련된 소설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다만 혜진을 만나기 위한 구실로 참여한다는 걸 수강생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첨삭지도 일정이 오늘이긴 했으니, 그의 동참을 내칠 수는 없었다. 오석은 오늘 혜진에게 은밀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훼방꾼을 배제하지 못해 아쉬웠고 혜진의 얼굴에도 깊은 실망이 어렸다.
문호의 대형 외제 차가 숲속에 있는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 그는 레스토랑 사장과 친분이 깊어 보였다. 사장이 경관이 좋은 별도의 룸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하늘에는 가을빛이 진하게 배었고 먼 산과 구름이 오석을 괜스레 감상에 젖게 했다. 윗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지를 다시 확인했다. 문호의 차 안에서 아내에게 점심을 먹고 간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아내는 아직 문자를 읽지 않았다. 아내는 혼자 늦은 점심을 먹거나 거를 텐데 자신은 이런 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식사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혜진은 그런 오석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문호는 그런 혜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윗도리 걸어드릴까요?”
오석이 정장 차림으로 식사하는 게 불편해 보였는지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문호가 오석에게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입고 있는 게 편해요.”
문호에게 간간이 싫은 내색을 하며 지금껏 별말이 없던 혜진이 오석에게 물었다. 오석을 향하는 눈빛은 문호를 볼 때와는 아주 달랐다.
“선생님. 제 글 유치하고, 엉망이죠?”
오석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혜진 씨 소설,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가독성이 높아 쉽게 빨려들어요. 탄력이 강해 문장에 생동감이 넘치고요. 저보다 뛰어난 부분이 많아요.”
문호가 오석을 띄우며 끼어들었다. 그는 어떻게든 오석을 매개로 혜진과의 간격을 좁히고 싶은 눈치였다.
“선생님은 베스트셀러 작가시잖아요? 저 같은 문외한도 선생님 작품을 읽었으니 더 말하면 입만 아프지요. ‘런다운’ 그거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런다운’이 무슨 뜻이었더라? 혜진 씨는 아시죠?”
문호가 오석의 소설을 언급하자 마치 스위치를 누른 듯 혜진이 바로 반응했다.
“아! 문호 씨도 그 소설 읽으셨군요. 선생님의 두 번째 소설집 표제작인데 ‘런다운’은 야구 용어예요. 두 베이스 사이에서 주자가 수비수들에게 갇혀 앞의 베이스로 진루하지도 못하고 뒤의 베이스로 귀루하지도 못하며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말하는 거죠. 우리 주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에요. 주자는 대개 아웃당하기 마련이지만 야수들의 베이스 커버가 미숙하거나 주자의 주루 센스가 뛰어나 살아남는 경우도 간혹 발생한다는 점이 소설의 반전 포인트예요. 너무 통쾌한 반전들이 단편마다 들어있어 읽는 내내 웃음과 진한 감동의 연속이었어요.”
오석과 문호는 포크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혜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오석은 조곤조곤 설명하는 혜진의 목소리가 정말 아내의 목소리와 똑같다고 느끼며 내용보다 음성에 집중했다. 혜진이 자신에게 모인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귓불이 발그레해졌다. 오석은 도서관에서 아내와 처음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머, 제가 혼자만 신나서 떠들었네요.”
문호가 사탕발림이 아닌 정말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소설에 조예가 깊으시네요. 대단하십니다.”
작가인 오석도 열성 독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야만 했다.
“십 년도 더 지난 소설을 마치 지금 읽은 것처럼 말해주니 정말 고맙네요. 사실 그 소설집 말고는 변변한 책도 없어요. 그래서 누가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말하면 지금도 어색하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첫 번째 소설집인 ‘시간의 역행’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잖아요? 직장에 묶여 많은 작품을 내지 못하신 것뿐인데······. 아주 아쉬워요.”
문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진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다른 직업을 가시셨나요?”
혜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다시 새로운 화제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기계공학을 전공하셨어요. 졸업 직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셨는데 그때 이미 기계회사, 그러니까 우성 컨베이어라는 회사에 입사하셨어요. 3년 전까지 생산 담당 임원으로 근무하셨고요. 중간중간 어렵게 발표하신 단편들을 모아 소설집을 3권 내셨지만, 저 같은 독자들은 여전히 갈증이 심해요.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열정과 환상을 더 경험하고 싶거든요.”
오석은 정말 자신에게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했다. 혜진이 소설 속 인물의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소설을 안 쓴지 너무 오래됐고 열정이란 단어도 이제는 낯설었다. 문호가 혜진과의 대화를 잇기 위해 다시 질문했다.
“작가와 컨베이어라······ 영 매치가 안 되네요. 무슨 연관이 있나요?”
혜진의 얼굴에 떠오른 안타까움이 문호에게 전달되자 문호의 눈썹이 바로 팔자를 그렸다.
“작가의 수입만으로 생활할 자신이 없어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다는 선생님 수필을 읽었어요. 그런데 수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컨베이어는 물건을 이동하는 기계다. 소설은 작가의 의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체다. 나의 의식을 독자에게 어느 정도나 전달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죽기 전에 단 한 편이라도 그런 소설을 쓰는 게 나의 꿈이다.’ 이 글을 읽고 얼마나 감동했던지.”
‘내가? 정말 그런 글을 썼다고?’ 오석은 잠자코 혜진의 말을 듣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오석이 창을 바라보니 창틀에 잠자리가 한 마리 앉아있었다. 잠자리도 혜진의 말에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오석이 5개월 전 첫 강의 시간에 수강생들과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혜진은 말이 없었다. 자기소개도 아주 짧게 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될수록 질문이 점점 많아졌고 자리도 앞으로 이동했다. 최근에는 애교가 담긴 문자를 수시로 보내며 오석의 일정을 묻기도 했다. 오석의 강좌는 3개월 단위로 수강생을 모집했는데 혜진은 연이어 수강했고 두 번째 강좌부터는 문호도 참여했다. 매번 강의가 두 달쯤 진행되면 단편소설을 하나씩 제출하라고 했다. 간단한 평가보다 면밀한 분석과 토의를 원하는 수강생에게는 개인 첨삭지도도 가능하다고 했다. 첫 강좌에서는 20명의 수강생 중 7명만이 소설을 제출했고 개인지도를 희망한 사람은 그중 4명뿐이었다. 오석은 그때도 두 사람씩 두 조로 일정을 짰다. 하지만 혜진과 같이 지도를 받기로 했던 수강생에게 급한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오석과 혜진이 카페에서 오붓하게 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혜진의 첫 작품은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내용의 연애소설이었는데 속도가 여유가 있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건강했다. 음식이나 의상에 대한 묘사는 오석이 거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했으며 독특한 문장과 구성 역시 전문 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첨삭할 부분이 없었다. 혜진은 자신이 누군가와 이렇게 편하게 많은 말을 하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전 남편과의 이혼 사유 중 가장 큰 것이 대화의 단절이었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세 번 이상 오고 감이 없었고 형식적인 대화가 아닌 감정이 실린 대화는 다툼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주에 제출한 두 번째 작품은 첫 작품과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어설프고 느닷없는 굵고 강함으로 대체했다. 문장도 너무 투박하고 엉망이라 같은 사람이 썼다고 믿기 어려웠다. 혹시 첫 작품은 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려고 무지 애썼다. 앞서 말한 인사치레를 거두고 솔직히 평가하자면 두 번째 작품은 다른 수강생들 작품과 비교해도 수준 이하였다.
게다가 율곡과 기생 유지가 주인공이었는데 누가 봐도 오석과 자신을 투영한 소설이었다. 심지어 율곡의 입에서는 오석이 강의 중 강조했던 말이 여러 차례 나왔다. 반면 유지의 대사에는 혜진의 노골적 감정이 실렸다. 율곡이 마음으로는 유지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육체적으로 거리를 두는 게 비겁하다는 낯 뜨거운 저질 비난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유지가 좀팽이 율곡에게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는 장면은 너무 일방적이고 우악스러워 유지 본인이 읽어도 화를 낼 것 같았다.
오석은 혜진의 편파적 자기애에 당황했고 동의하기 어려웠다. ‘왜 내가 법도에 얽매인 구식 늙은이 취급을 받아야 하지? 본인이 나보다 젊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반드시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역사와 현실에서 모두 이탈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괜히 말을 어설프게 꺼냈다가 선생님이 오해하신 거라고 말하면 그 또한 아주 난처한 일이었다.
오석은 벌써 혼자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테이크에 손도 대지 않고 대화에 푹 빠졌다. 문호는 혜진의 말에 완전히 몰입한 척했고 혜진은 자기 말에 스스로 감동해 열변을 토했다. 두 사람은 오석의 작품에 대해 말했으나 오석은 감히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혜진의 목소리가 점점 더 들뜨자, 변조된 음성이 아닌 본래의 음성이 나왔다. 저렇게 새된 목소리를 아내의 나긋한 음성과 헷갈리다니. 문호는 어느새 느긋한 표정으로 혜진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문호는 노련한 중개업자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혜진 씨.”
문호가 끈적한 목소리로 혜진을 불렀다. 느긋하게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는 문호를 바라보며 혜진은 문호의 다음 질문에 조바심을 냈다. 문호가 여유롭게 와인을 한 모금 삼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소설 중 어떤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문호가 부추기자, 혜진은 마치 큰 하사품이라도 받은 것처럼 활짝 웃으며 답했다.
“세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인 ‘비 오는 날의 서당 개’에서 중년 남자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요. ‘내가 나이 듦에 따라 점차 주변에서 사라진 덕목이 있는데 그건 어른을 대할 때의 수줍음이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이 나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나는 답하기도 전에 볼이 붉어져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말을 걸면 더 심했는데 그건 내 말이 그분에게는 아직 유치하게 해석될까 봐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박한 사회는 사람들에게 노인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존재라고 암시한다. 나는 이제 수줍음을 잃은 사회와의 공존을 포기한다. 시간을 거슬러 도태된 덕목의 흔적을 찾겠다.’ 저는 그 구절 중 ‘어른’과 ‘노인’을 ‘진실한 사랑’으로 바꾸면 울림이 더 커질 거로 생각했어요.”
문호의 경이로운 시선을 받는 혜진의 얼굴에는 장엄함과 뿌듯함이 가득 찼다.
“혜진 씨! 대단하십니다. 혜진 씨와 건배할 수 있는 영광을.”
잔을 부딪친 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는 두 사람에게 오석은 이제 형식적 동석자였다. 오석은 혜진의 이혼 사유가 대화 부족이 아니라 혹시 일방적 대화 과잉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내와는 아주 다른 점이었다. 아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오석은 갑자기 아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창을 바라보니 잠자리는 이미 사라졌다. 잠자리가 부러웠다.
오석은 3시가 훨씬 넘어서야 풀려났다. 구청 앞에서 헤어질 때 자세히 보니 혜진은 아내와 생김새도 아주 달랐다. 혜진의 마지막 강의는 ‘시간의 역행’ 결말에 대한 자신의 견해였는데 무려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혜진의 남편이 느꼈을 고통이 온몸으로 전달됐다.
버스에서 내리니 갑자기 하늘에 짙은 구름이 잔뜩 끼어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오석은 제과점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샀다. 아내에게 미안했던 하루가 못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같이 축하할 일이 있었다. 아파트 정문을 통과할 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실 전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비가 내려서인지 집 안은 어두웠다. 아내는 겁이 많아 비 오는 날 혼자 집에 있는 걸 무서워했다. 오석이나 아이들이 없으면 안방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오석이 전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안방을 향해 말했다. 현관문 소리로 불안해할 아내를 빨리 달래고 싶었다.
“나, 왔어. 그냥 방에 있어. 젖은 옷 갈아입고 들어갈게.”
그러자 오석의 귀가를 반기는 아내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흘러나왔다. 오석은 아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웠다.
“이제 안 무서우니까 천천히 샤워해도 돼.”
“그래. 알았어.”
거실에 들어오니 아내의 체취가 느껴졌다. 사람은 시각이나 소리보다 냄새에 더 단단하게 묶인다. 아내의 공간은 아늑하게 오석을 포박했다. 오석이 케이크를 식탁에 올려놓은 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은 아내의 손길이 많이 닿는 곳이다. 아내는 자신만의 규칙대로 욕실 물건들을 정리했다. 아내와 34년을 같은 공간에서 살았으니, 오석은 눈을 감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을 수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자, 거울 깊은 곳에 신혼 때의 아내가 보였다. 싱그럽고 맑은 아내의 모습이 오석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눈망울과 목이 동시에 뜨거워졌다. 오석이 결혼한 지 반년쯤 됐을 때 수경이 말했다.
“오석 씨는 회사 그만두고 그냥 글을 써. 우리 회사는 외국인 회사라 결혼이나 임신에 대해 관대한 편이야.”
오석은 그 순간 소설과 수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다. 첫 소설도 수경을 위해 썼었고 수경이 없으면 소설도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수경아! 나, 회사 다니면서 글 쓸 거야.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 임신한 널 회사에 보내고 내가 집에서 편히 글을 쓸 수 있겠어?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수경은 그게 말처럼 되지 않을 거라 말했고 정말 그랬다. 회사가 급속히 성장하며 오석의 일이 더 늘었다. 아들이 태어나자, 글 쓸 시간은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오히려 수경이 회사를 그만뒀고 3년 뒤 딸이 태어났다. 그때 오석은 이미 과장이었는데 일 뿐만 아니라 책임도 늘었다. 둘은 아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게 무엇보다 행복했고 오석에게는 안정된 생활이 소설 대신 위안이 됐다. 아들이 결혼하고 딸이 지방 소재 대기업에 취직해 기숙사로 들어가자, 정년이 임박했다. 수경은 오석에게 정년퇴직 후 이젠 정말 글만 쓰라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밀린 여행도 자주 다니자고 했다. 퇴직 일주일 전 수경이 선물을 건넸다. 파스텔 톤 파란색 넥타이였다.
“다음 주 퇴임식 때 매고 가. 사람은 물러날 때 멋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다음 달 유럽 여행 예약해 놨어. 기대되지?”
오석이 욕실 거울에 천천히 손을 갖다 대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수경이 옆에 있어 참 행복한 삶이었다. 나이가 드니 그립다는 말의 겉이 아니라 속을 알게 됐다. 그 말은 아프고 따뜻했으며 오래 지속돼야만 향기가 났다. 하지만 그리움 역시 점차 사라지는 덕목이었다. ‘어른’과 ‘노인’을, 속도와 효율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포장하는 ‘진실한 사랑’으로 바꾸는 것보다 시간이 쌓는 ‘그리움’으로 연상한다면 그 잔향이 오래 남을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 ‘비 오는 날의 서당 개’에 관해 물었을 때 오석이 그렇게 대답했었다.
수경의 눈이 커지며 환한 미소가 식탁을 덮었다.
“와우! 자기, 기억하고 있었구나!”
수경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수경이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와! 생크림 케이크에, 초도 정확히 39주년 기념이네.”
그때 소파에 던져놓은 오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오석이 소파로 다가가 휴대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딸이었다.
“그래, 딸. 아빠야.”
“아빠. 지금 어디야?”
딸의 목소리가 바깥 하늘처럼 흐리게 다가왔다.
“집에 있어.”
“지금 비 많이 와. 나가려면 우산 갖고 나가. 전처럼 괜히 비 맞고 다니지 말고.”
“안 나가. 걱정하지 마.”
딸이 잠시 말을 멈췄다. 딸의 숨소리가 불규칙했다. 딸의 불안이 오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오석은 딸이 말을 이을 때까지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유리창을 깬 어린아이가 선생님이 천천히 다가오는 걸 바라보는 순간 같았다. 초침이 멈춰 버린 아주 긴 시간이었다. 긴장한 수경이 오석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말했다. 오석이 수경에게 안심하라는 표시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들려오는 딸의 불안정한 목소리는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케이크 이미 사다 놨구나?”
오석의 가슴이 쿵쿵 울렸다. 딸의 목소리가 한층 차갑고 낮았다.
“그렇지?”
“응.”
“알았어. 지금 엄마하고 같이 있어?”
“응.”
“3년 전에 죽은 엄마하고?”
“응.”
“아빠! 인제 그만 좀 해, 제발! 아빠 때문에 내가 숨이 막혀.”
“엄마는 결혼기념일보다 아빠가 처음 반지를 선물한 날이 더 의미가 있대. 그래서-”
딸이 오석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
“그래서 매일 죽은 사람하고 대화하고 같이 지내는 거 그게······ 벌써 3년째야. 제발 엄마 좀 놔주라고.”
“엄마하고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쓰러졌어. 그리곤 다신 못 일어났잖아. 아빠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드디어 딸이 꾹꾹 참았던 울음을 격하게 터뜨렸다. 항상 그렇듯이 딸이 울면 그걸로 전화가 끊어졌다. 오석은 휴대전화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딸의 흔적을 찾았다. 딸이 오열하는 모습이 액정에 비쳤다. 긴 시간 딸을 슬프게 만드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수경이 오석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또 혼났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 내일 다시 전화할 거야.”
오석이 수경 앞에 앉아 10년짜리 초 3개와 1년짜리 초 9개에 불을 붙였다. 수경의 얼굴에 초의 불빛이 일렁거렸다. 오석이 억지로 표정을 바꾸며 손뼉을 길게 쳤다.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동시에 입김을 불어 초를 껐다. 수경이 케이크를 잘라 오석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 반지 아직 양복 주머니에 있지? 당신이 여름방학 내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사준 거잖아? 당신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수줍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반지를 건네는 순간 나는 너무 감격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어. 당신의 눈동자에 모든 것이 보였거든. 뜨거운 햇볕 속에서 땀 흘리는 얼굴, 반지를 신중하게 고르며 미소 짓는 얼굴, 전날 밤새워 말과 동작을 연습하며 멋쩍어하는 모습. 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 반지에 내 영혼과 마음을 담지 않을 수 있겠어? 병실에서 숨이 끊어지는 내 손을 잡고 있는 당신 앞에 내가 지금처럼 나타나 ‘앞으로 넥타이 혼자 맬 수 있지?’ 했더니 당신이 ‘못 해. 안 해. 당신 못 떠날 거야.’라고 대답했어. 서 있는 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누워있는 나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잖아? 누워있는 나도,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도 당신 말이 너무 슬프고 고마웠어.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현실이 된 거야. 당신이 나를 반지에 두 번 가둔 거지. 그런데 이 마법은 언제 풀리려나?”
“안 풀려.”
늘 그렇듯 수경이 오석의 굳은 표정을 미소로 달래며 말했다.
“당신, 요즘 글 안 쓰는 것 같더라. 시간도 많으면서.”
“쓰고 싶은 게 없어. 가슴속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수경이 오석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떡하나? 우리 오석 씨.”
“시간이 무서울 정도로 천천히 가. 아직도 한참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 아이들만 아니면 여기서 그만 끝내고 싶어.”
“‘런다운’ 속의 주인공들은 이럴 때 어떻게 빠져나왔지? 당신은 해답을 알고 있잖아?”
“다시 글을 쓰는 게 유일한 탈출구인 거 알아. 그런데 그게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야. 난 지금 시간을 하루하루 거꾸로 돌리고 있어. 당신과의 추억을 전부 복습할 거야. 같이 했던 모든 것을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려내는 거지. 가슴이 당신으로 가득 차면 언젠가 뭔가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지도 몰라. 어쩌면 자연스럽게 딸을 속일 수도 있겠지.”
“당신은 다시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시간의 역행’ 결말은 어떤 거야? 지금도 인터넷에서 ‘시간의 역행’을 검색하면 두 그룹이 결말을 가지고 극렬하게 싸우고 있는 거 알아? 이제 나한테는 말해도 되잖아?”
“다음에 알려줄게.”
“당신 참 고약한 사람이야. 귀신을 놀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빨리 말해.”
수경이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말했다. 예전 도서관 앞에서처럼. 그러자 오석도 다시 그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갔다. 오석이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봄꽃들이 보였다.
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대전 단편소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60편의 단편을 모두 읽고, 독서 가능한 열 편을 골랐다. 그중에서 발표 형식과 내용을 갖춘 <아하! 모멘트>, <쥐꼬리>, <런다운>, <길일>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가독성이 좋고 발표 가능한 소설을 골라놓고 보면, 모두 원고 형식을 갖춘 작품들이었다. 소설은,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우선 눈으로 보는 장르이다. 그러니 형식을 갖춘 내용은 더 단단하게 읽힐 것이다.
응모할 때의 발표 형식이란, 기본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원고 작성법이다. 글씨 크기는 주최 측의 요구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제목은 15포인트, 본문은 10포인트, 쪽 번호를 매기고, 들여쓰기(문단 바뀔 때마다 두 칸씩)를 저장한 다음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작업은 자신의 글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다. 언어가 생각 위에 걸치는 옷인 것처럼 말이다. 시는 여백으로도 말할 수 있는 장르지만, 소설은 한순간의 번득임으로 완성되는 장르가 아니다. 기승전결의 뼈대에 살과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에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태어난다. 그러니 작가의 개인적 넋두리와 현학적 사유 혹은 모호한 표현이 그 이야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버리시길 당부드린다.
<아하! 모멘트>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심리 상담 베틀을 소재로 한 단편이다. 몇 해 전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전을 떠올리게 했다. 이 소설은 ‘상담배틀 아하! 모멘트’라는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진행된다. 상담은 인공지능과 유명한 스님의 대결이다. AI와의 바둑 대전을 떠올리며 끝까지 진지한 독서를 했지만 시원한 대결의 끝을 보지는 못했다. 자살한 친구를 모른 체했다는 죄의식을 품은 주인공의 반성(돌이켜 생각하는 일)이 주를 이루었지만, 문장과 기승전결의 구성을 이끄는 솜씨는 충분했다.
오랜만에 웃으면서 읽었던 소설 <쥐꼬리>는 정치를 풍자한 블랙코미디이다. 문장이나 장면 묘사가 매우 정밀해서 간혹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시장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찾아간 점집에서 쥐꼬리를 하루에 한 개씩 먹으면 된다는 점괘를 받은 주인공이 코가 빨개지는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계속 먹는다는 설정이다. 후보들의 TV토론이 열리는 날 주인공은 피에로 코처럼 새빨간 코를 감추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서 참석한다. 그곳에서 그는 깜짝 놀란다. 다른 후보 여섯 명 모두 마스크를 쓰고 참석한 것이다.
소설 제목인 <런다운>의 뜻은 야구 용어다. 두 베이스 사이에 갇힌 주자가 앞뒤 어느 베이스로도 갈 수 없어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진퇴양난의 상태이다. 소설창작 강사인 ‘나’는 수강생 혜진을 보며 아내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독자는 이때 뻔한 흐름을 감지한다. 그러나 서사가 급선회하면서 그 뻔함을 벗어나자,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와 아내, 살아 있음과 죽음, 아내와 수강생 혜진 사이, 그때와 지금의 어느 순간을 ‘런다운’이라 말하는 게 아닐까. 이런 설정이 살짝 위험했지만, 이 또한 ‘런다운’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선택이라 여겼다.
<길일>은 예식장의 뷔페를 동업하면서 드러나는 동업자 간의 심리전이다. 전 직장에서의 거래처 사람이던 K와 뷔페 동업을 시작한 ‘나’의 고충을 침착하고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네고’ 등 업계 용어들을 이해하려다 독서에 방해받았음을 고백한다. 작가의 개인적 사유에서 나오는 묘사나 비유를 과감히 제거하고, 보편적 용어인 한글을 잘 활용했다면 더 깊은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심사위원 한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