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작] 권인순 외
아빠의 편도 티켓 / 권인순
“지민아. 아빠가 곧 여행을 떠날 거야.”
어둠이 짙게 깔린 호수 위에 불빛이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 있는 별들을 따다가 호수에 뿌려놓은 것 같았다. 나는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물 위에서 즐기는 불멍이라고나 할까.
“박지민! 아빠 얘기 듣고 있어? 아빠 여행 갈 거라고?”
나는 낚싯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낚싯대의 불빛이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잔잔했던 호수 물결이 일렁였다. 나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계속 찌를 노려보았다.
“언제, 어디로 가는지는 안 궁금해?”
이런 중요한 순간에 시답잖은 말로 방해를 하는 아빠에게 슬슬 짜증이 났다.
“항상 가족여행은 아빠가 알아서 했잖아. 왜? 설마 나만 빼고 엄마랑 둘이 가는 거야?”
엄마 얘기를 하니 다시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아침에 스마트폰 게임 시간 때문에 한바탕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사실 오늘 낚시도 엄마에게 혼나고 난 뒤 꾸리꾸리한 장마철 날씨 같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아빠가 준비한 깜짝 여행이었다.
아빠는 이렇게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걸 좋아한다. 날씨가 좋아서, 비가 와서, 기분이 우울해서, 기분이 좋아서 여행을 떠났다. 어떻게든 여행을 가기 위해 이유를 찾는 것 같았다.
“아니. 혼자 가는데 이번엔 좀 오래 걸릴 거야.”
“나도 가면 안 돼? 사춘기 아들을 엄마랑 단둘이 전쟁터에 남겨두고 떠나는 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요즘 엄마랑 나는 매일 크고 작은 전투중이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일들을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고 잔소리를 했다. 방 정리, 학원숙제, 게임 시간, 심지어 양말 벗는 것까지 잔소리를 했다. 나도 4학년 때처럼 착하기만 한 아들은 아니었다. 일부러 더 반항하기도 하고 엄마에게 더 뾰족하게 대들기도 했다. 아빠는 내가 지금 사춘기라 몸도 마음도 크는 중이라고 했다.
“하하. 엄마랑 지민이는 적군이 아니야. 서로 아군이지.”
“아군끼리 돌아서면 더 무서운 적이 되는 거 몰라?”
낚시대는 작은 움직임을 끝으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민아. 사실 아빠가 얼마 전에 누군가한테 편도 티켓을 선물 받았어. 아빠가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티켓이야.”
“누군데? 해외여행이야? 아빠 친구가 있다는 프랑스? 아빠 혼자서 해외여행 가니까 미안해서 그러는 거지?”
나는 고개를 돌려 아빠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빠가 낚싯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좀 더 먼 곳이야. 거기엔 아빠가 정말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어. 아빠랑 고등학교 때 베프였던 친구도 있고,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계시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곳? 내가 생각하는 그분들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아빠가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면 뭐지?
“어디 간다는 거야? 내가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또 계셔?”
“아니. 저기 높은 곳 말이야. 아빠가 이번엔 거기로 여행을 가야 할 것 같아.”
아빠가 고개를 들어 초승달이 흐릿하게 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내 얼굴을 보고 슬프게 웃었다.
“하늘? 하늘나라? 왜? 아빠 죽어?”
낚싯대를 잡고 있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늘에서 아빠가 빨리 보고 싶은가 봐. 생각보다 빨리 오라고 하네. 아빠는 이제 곧 지구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새로운 곳에서 여행을 시작할 거야. 우리 지민이, 아빠가 여행 좋아하는 거 알지?”
“뭔데? 무슨 농담을 이렇게 무섭게 해.”
“아빠가 얼마 전에 건강검진 한 거 알지? 아빠가 좀 많이 아프대. 그래서 곧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거라고 하네.”
“병원 가면 되잖아. 가서 치료하면 되지. 무슨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디 놀러 가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심장이 쿵쾅쿵쾅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아직도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운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울지마,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니야. 좀 빠르긴 하지만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한테 어떻게 그래? 낚시 재미없어졌어. 집에 갈래.”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간신히 낚시 의자를 부여잡고 버틸 수 있었다.
“앉아.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손맛은 봐야지.”
아빠는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힘없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내 맘도 모르고 여전히 아름답게 반짝이는 불빛들을 힘껏 째려보았다.
“엄마는 알아? 아빠 여행 가는 거?”
“어. 엄마가 요즘 너한테 예민하게 구는 건 너 때문이 아니라 아빠 때문이야. 그래서 여러모로 아빠가 너한테 미안해. 그러니까 우리 지민이가 좀 엄마를 이해해 줬으면 해.”
“언제 가는데? 그 여행이라는 거.”
“삼 개월쯤 뒤에.”
일 년도 아니고 반년도 아니고 삼 개월. 남은 시간이 겨우 백 일쯤이었다. 나는 아빠한테 처음으로 화가 났다. 그리곤 그날 집에 돌아올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낚시터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의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뜨거운 불길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나는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고장 난 시계처럼 자주 삐걱거렸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멈춰서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엄마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혼자 맞은 고목처럼 표정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마치 엄마가 불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유일하게 아빠만 더 바빠졌다. 여느 때처럼 매일 아침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맛있는 빵을 구웠다. 단골손님들과 더 밝게 웃으며 대화했고 새로운 빵 개발에도 열심이었다. 매일 화분에 꽃을 심더니 열흘 만에 아파트 베란다를 화원처럼 꾸며놓았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마음이 쑥대밭이 되었다. 엄마와 나에게 엄청난 폭탄을 투척해놓고도 한가롭게 꽃을 심고 있는 아빠가 밉고 화가 났다.
“왜 자꾸 꽃을 심는 건데? 아빠 없으면 결국 얘들도 다 죽어 버릴 텐데.”
“예쁘잖아. 아빠는 꽃이 참 예쁘더라.”
“그러니까 그 꽃들은 왜 자꾸 심냐고? 나중에 누가 키우라고?”
낚시터에서 돌아온 후 오랜만에 하는 부자지간에 대화인데 가시 돋친 말이 쏟아졌다.
“예쁜 거 보면 기분도 좋아지고 행복해지잖아. 우리 지민이랑 엄마랑 예쁜 꽃 보면서 행복해지라고…….”
“아빠가 없는데 우리끼리 행복할 수 있겠어? 아빠 바보야?”
“지민아. 아빠는 이곳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엄마랑 너랑 더 많이 사랑하고 행복하고 즐기고 싶어. 오랜 시간 지나 우린 다시 만날 거니까. 아빠가 가고 나면 한동안은 슬프겠지만 남은 사람은 또 그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살아야 해.”
“아빠도 힘들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좀 하지 말라고. 그게 더 짜증 난다고.”
“아빤 괜찮아. 다만 우리 아들이랑 함께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은데 해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야. 지민이 이제 곧 수염도 날 텐데 면도하는 것도 알려줘야 하고, 초등학교 졸업식, 중학교 입학식도 다 보고 싶은데……아들 이쪽으로 와 봐.”
“요즘 촌스럽게 누가 입학식에 와. 그리고 웬만한 건 인터넷에 다 나와 있어.”
아빠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지민아. 이건 설란이야. 해마다 봄이 되면 별처럼 예쁜 핑크색 꽃을 피운단다. 봄의 미소를 닮았지. 설란은 물을 너무 자주 주면 안 돼. 아주 예민한 녀석이거든. 이건 삭소롬이라는 꽃인데 보라색 꽃이 핀단다.”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인데.”
나는 화가 잔뜩 난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한 가시 돋친 말들을 아빠에게 쏟아냈다.
아빠가 베이커리에 나간 뒤에 엄마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왔다.
“지민아. 계속 그렇게 화만 내고 있을 거야? 아빠가 떠나면 많이 후회되지 않을까? 아빠가 편히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우리가 힘들지만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수술하면 되잖아. 근데 왜 엄마도 아빠도 당장 죽을 것처럼 이야기해?”
“이미 전이가 많이 돼서 병원에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 수도 있어. 아빠는 병원 침대에서 남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야. 지민이랑 엄마랑 행복한 추억을 더 많이 만들고 싶데.”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리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가 내 앞에서 운다. 나는 비로소 얼마남지 않은 아빠의 여행을 실감했다.
엄마와 나는 아빠가 마음 편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도와주기로 몰래 약속을 했다.
우리는 매주 캠핑도 가도 낚시도 가고 꽃구경도 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활짝 웃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했는데 우리집 시계는 열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빠는 계속 살이 빠지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팬더처럼 진해졌다. 힘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꽃을 심고 나에게 물주는 법을 알려주었다.
베이커리의 문을 닫는 날, 아빠는 맛있는 빵을 듬뿍 만들어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했다. 손님들에게는 긴 여행을 떠난다고만 했다.
“엄마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돌볼게.”
갓 구운 바삭한 크루아상을 먹으면서 나는 툭 던지듯 내뱉었다. 갑작스런 나의 말에 엄마 아빠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당연히 우리 아들 믿지. 하하하. 그런데 넌 네 나이에 맞게 너의 인생을 즐겁게 살면 돼. 알았지?”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쪼그만 게 웃겨. 누가 누굴 책임지겠다는 거야? 양말도 맨날 뒤집어서 벗는 철부지가. 엄마 강한 사람인 거 몰라? 우리 셋 중에서 제일 힘도 세고.”
엄마가 내 볼을 세게 꼬집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랑 지민이 요즘 사이가 좋네. 이제 전쟁을 끝낸 건가? 하하하하.”
“내가 언제 엄마랑 싸웠다고 그래. 항상 일방적으로 당했지. 그리고 우린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라고.”
“그렇지. 우린 모두 한팀이지. 하하하.”
모처럼 집안이 커다란 웃음으로 채워졌다. 고소한 빵 냄새 때문인지 갓 구운 우유 식빵처럼 마음이 푹신하고 말랑말랑해졌다.
아빠는 편도 티켓을 받은 약속된 날보다 한 달쯤 뒤,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아빠가 떠나고 엄마와 나의 시간은 한동안 멈췄다. 연극을 마친 배우들처럼 공허함과 헛헛함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라면을 한 번에 다섯 개를 끓여 먹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전부 토를 하기도 했다. 신물이 넘어와 속이 쓰렸다.
아빠가 떠나고 보름쯤 지났을까? 문득 베란다에 화분들이 생각났다. 아빠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거짓말처럼 아예 기억에서 지워졌던 곳이다. 물도 한번 주지 못했는데 다 말라서 죽어 버렸을까 봐 걱정됐다.
“으아아앙 으허허헝.”
나는 베란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주방에서 간식을 준비하던 엄마가 깜짝 놀라서 주걱을 든 채로 뛰어왔다.
“지민아. 왜? 무슨 일이야?”
“엄마. 설란이 꽃을 피웠어. 내가 바보같이 깜박 잊고 물도 안 줬는데 아빠 말처럼 별꽃을 피웠어. 아빠가 잘 도착했나 봐. 으아아앙.”
엄마가 나를 꼭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분홍색 별꽃이 햇빛에 반짝였다.
로봇 오통통 / 문애란
추웠던 겨울이 가고 2030년의 새봄이 왔다. 오늘은 영주동생을 사기로 한 날이다. 맞벌이 부부인 아빠, 엄마는 3학년인 영주가 늦은 시간에 혼자 있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마침 엄마 동료가 영주와 또래인 자녀를 위해 돌보미 로봇을 샀다는 것이다. ‘돌보미 로봇’이라니.
실제 다양한 로봇을 주변에서 마주치는 시대이긴 하지만, 엄마는 우리들의 일상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로봇에 대해서 묘한 낯섦과 기계라는 이질감이 있다. 동료는 몇 가지 제품을 추천까지 했다. 로봇 전시장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큰 전시장에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있는 인공지능 로봇들로 꽉 채우고 있었다. 입구의 첫 부스는 손님들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애완동물용 코너, 영주는 애완견 로봇의 코너에서 강아지의 귀여운 동작에 눈을 떼지 못하는데, 갑자기 ‘스스스’ 소리와 함께 영주 발등으로 무언가 타고 올라와 영주는 기절할 듯이 소리쳤다.
“엄마야! 으악...”
작은 뱀이 영주의 발을 타고 있었다. 영주도 엄마도 큰소리로 허둥거리자, 애완동물 코너에서 점원이 나오더니
“가짜예요, 가짜. 로봇 뱀입니다.”
하면서 뱀을 손으로 잡았다. 점원은 뱀의 스위치를 껐다. 갑자기 뱀이 축 늘어졌다.
엄마와 영주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어린이를 위한 옆의 부스로 갔다. 영주는 점원에게
“저는 유치원 여자 동생을 갖고 싶어요.”
라고 신이 나서 말했다. 점원은 영주와 엄마를 의자에 앉도록 권하며
“여기의 로봇들은 본보기로 놓아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선택 사항을 하나씩 확인하시고 선택주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라면서 서랍에서 물품 선택 품목 용지를 무려 4장이나 주셨다.
외모 선택, 보행 능력, 언어 능력, 상황에 맞는 지식 활용 및 습득 등 선택해야 할 조건이 매우 다양했다. 잠시 후, 엄마와 영주의 선택을 확인한 점원이 말을 이었다.
“어머님께 자녀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 프로그램을 추가하시길 추천합니다. 첫째는 어린이 보호기능과 학습 도우미 기능입니다. 로봇에게 저장된 데이터에 의해 위급한 상황에서는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 보호 모드로 자동 전환됨과 동시에 부모님께 알립니다. 또한 학습 도우미는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가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택한 조건에 따라 맞춤 제작된 동생 로봇이 2주 후에 집으로 배달될 예정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영주와 엄마는 동생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엄마, 내가 오영주이니까…. 아유, 뭐가 좋지? 어려워요!”
“얼굴이 귀엽고, 통통하니 통통이라고 지으면 어때?”
“통통이? 좋아요. 나는 오영주, 내 동생은 오통통.”
그날부터 영주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드디어 약속한 날인데 하필이면 소미의 생일파티랑 겹쳤다. 영주는 파티에 가면서 ‘선물 빨리 주고, 케이크 먹고 얼른 와야지’ 하며 나갔다. 그런데 소미의 생일파티엔 같은 반 은혁이가 왔다. ‘멋진 은혁이’ 은혁이는 영주가 항상 짝이 되고픈 멋진 친구였다. 로봇 동생에 대한 기대로 급했던 영주의 마음은 은혁이를 보자 잠시 통통이를 잊었다. 즐거운 놀이를 하다 영주가 설레는 목소리로
“얘들아, 나도 동생이 생긴다. 로봇 동생.”
라며 자랑을 듬뿍 담아서 말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미 다양한 로봇을 봤던 터라 기대만큼 새로워하지 않았다.
“너 처음이야? 처음에만 신기하지 그냥 로봇이야. 맨날 같은 말만 할걸. ”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랑 달라.”
친구들이 시큰둥하게 말해서 영주는 놀라며 속으로는
‘이게 무슨 소리야, 통통이를 보면 모두 부러울걸.’
라고 입을 비죽이는데 엄마의 문자가 왔다. 영주는 친구들에게 ‘안녕’하고 먼저 뛰어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소파에 곱슬머리 통통한 인형이 앉아 있었다. 기사님께서는 통통이의 뒤 허리 쪽을 살펴 전원을 켜주셨다. 통통이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기사님이
“오통통, 언니네 가족에게 인사해야지?”
라며 말하자 오통통이는 기계음 같은 유치원생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저는 오통통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신기했다. 기사님은 영주에게 통통이의 머리는 사람처럼 중요한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며 특히 갑작스러운 충돌을 조심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날부터 영주는 집에서 모든 행동을 통통이와 함께했다.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통통이, 언니 올 때까지 기다려. 집도 잘 지키고.”
서로 윙크까지 하며 인사를 나눴다.
며칠 후, 영주가 통통이를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들을 초대했다, 은혁이, 정희, 소미, 정빈이와 기안이는 처음엔 통통이에게 관심이 있었으나, 역시나 곧 시들해졌다. 로봇 동생보다는 3학년에 올라와서 연예인 중에 누구를 좋아한다, 반에서는 누구랑 짝이 되고 싶다, 공부를 잘한다, 학원을 몇 개 다닌다 등의 수다가 잔뜩 늘어지다 아파트 놀이터로 우 몰려 나갔다. 통통이와는 집안에서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들어온 영주는 통통이에게
“통통아, 은혁이 멋지지? 진짜 멋져. 은혁이가 우리 반에서 인기가 제일 많아. 여자애들이 서로 짝하고 싶어 한다고. 나도 은혁이랑 짝하고 싶어.”
라며 동의를 바라는 눈빛으로 통통이를 바라봤다. 그런데 통통이는 동그란 눈을 감았다 뜨며
“은혁이 오빠는 영주언니랑 같은 반 친구야.”
라는 말을 반복했다. 영주가 ‘에휴’ 하며 통통이의 이마를 콕 쥐어박고는
“너는 내 동생이라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지금 오통통 별로야.”
하며 혼자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아 버렸다. 저녁에 퇴근하신 아빠 엄마는 낮의 이야기를 듣고 하하 웃으셨다. 영주도 생각해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미안한 마음에 거실로 가서 통통이를 안아 주었다. 그러자 통통이가 슬그머니
“이제 영주언니 호흡이 제대로 왔어. 화가 끝났어.”
라고 말했다. 영주가 킥킥 웃었다.
“너는 나를 안으며 내 호흡을 확인한 거야. 아이고, 네 머릿속에 있는 저장된 데이터”
따뜻한 햇볕으로 온 곳에 꽃들이 만발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영주네 반 5교시는 체육 시간. 선생님과 운동장에 나오며 아이들은 소리를 크게 질렀다.
“피구해요. 피구, 피구”
선생님은 웃으시며 홀수 번호팀과 짝수 번호 팀으로 나누자 하셨다. 영주는 속으로 좋았다.
‘앗싸, 은혁이랑 같은 편이다, 그런데 정희도 같은 편이네. 이건 별로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희도 은혁이를 좋아하며 지금은 은혁이의 짝이라 영주가 은근히 샘을 내는 친구였다.
피구가 시작되었다. 공을 무서워하는 영주가 공을 피하지 못하고 먼저 아웃되어 수비로 왔다. 영주는 일부러 은혁이와 가까운 수비의 자리로 왔다. 정희는 피구를 어쩜 저리 잘하는지 날아오는 공마다 척척 받아 냈다. 정희는 공을 잡을 때마다 수비하는 은혁이에게만 공을 던져 주었다. 영주가
“정희야 나한테도 공 좀 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다. 3번의 게임에서 그때마다 정희가 끝까지 살아남아 영주네 팀이 이겼다. 오늘의 우승자는 정희처럼 보였다. 교실로 걸어가며 은혁이가 정희에게
“야, 네가 그렇게 피구를 잘하는 줄 몰랐어. 너무 잘해.”
라고 두 손 엄지를 추켜세우자, 정희가 까르르 웃으며
“너도 수비하면서 상대 팀을 3명이나 아웃 시켰잖아. 너도 잘해”
“아니야. 넌 앞으로 피구왕이라고 부를게. 아니다 여자니까 피구여왕”
하며 서로 칭찬을 주고받았다. 뒤에서 따라 걷던 영주는 속상했다. 하교 후, 위로받고 싶던 영주는 식탁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체육 시간 일을 통통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런데 곁에 서 있는 통통이는
“정희 언니는 피구를 잘하고, 은혁이 오빠는 친구를 칭찬하는 좋은 사람이야.”
라는 말만 했다. 영주가 벌컥 화를 내며
“통통아, 정희가 얼마나 얄미운데. 나한테는 잡은 공을 한 번도 주지 않았어.”
“언니는 체육을 잘못하고 은혁이 오빠가 체육을 잘하니까 그런 거지”
“뭐라고? 정희는 은혁이를 좋아해서 은혁이한테만 공을 준 거고, 나는 경쟁자니까 안 준 거고. 알아?”
“경쟁자? 영주 언니는 피구를 못하는데. 게임에서 이기려면 체육을 잘하는 사람에게 공을 줘야지.”
“야! 오통통, 나랑 정희는 은혁이를 좋아해서 서로 경쟁자라는 이야기야. 너는 내 동생이면 내 편을 들어 줘야지. 필요 없어. 미워!”
하며 몹시 화가 나서 식탁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곁에 서 있던 통통이의 가슴을 확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밀린 통통이가 식탁 쪽으로 넘어지며 머리를 식탁의 모서리에 세게 부딪쳤다. “쾅!” 뭔가 충돌하듯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방으로 들어간 영주는 로봇 동생의 상황을 모른 체 친구들이 한 말이 생각났다.
‘맨날 같은 말만 해.’‘ 우리는 고장 나서 베란다에 뒀어.’
영주는 한동안 침대에 벌렁 누웠다. 시간이 좀 지나자, 화가 가라앉고 심심했다. 생각해 보니 통통이에게 화를 심하게 낸 것도 미안했다.
“통통아, 이리 와봐. 언니한테 와.”
하고 불렀다. 조용했다. 의아해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통통이가 식탁 옆에 고꾸라져 있었다. 다음날 통통이를 수리점에 맡기고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허전했다. 영주는 털퍼덕 소파에 앉으며 항상 여기 앉아서 자기를 기다렸을 통통이를 그리워하다 문득 ‘통통이는 지금 나를 보고 싶어 할까?’ ‘ 만약에 통통이가 로봇이 아니고 진짜 사람이라면 지금 내 마음을 이해해 줄까?’ 궁금했다.
그래도 괜찮아 / 윤경례
"안녕? 못 보던 친구인데. 이름이 뭐니?"
할머니집 대문옆 담벼락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노란 민들레를 보려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새린이에게 이웃집 아저씨가 말을 걸었어요.
"네? 저……요? 새린이. 이새린이요."
"하하. 예쁜 이름이구나. 새를 좋아하는 어린이. 새린이?"
"네? 새, 새요?"
새라면 참새, 까치, 까마귀 정도밖에 모르는 새린이에게 새를 좋아하는 어린이라고 맘대로 생각하고 결정해 버리는 아저씨야말로 봄날 졸고 있는 할머니집 암탉을 닮은 것 같았어요.
"저, 저는 새 몰라요. 좋아하지도 않구……."
"하하. 새를 자주 보면 너도 새의 매력에 빠지고 말걸. 언제 나와 함께 새 보러 가지 않을래?"
뜻밖의 제안을 받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새린이를 향해 길다란 팔을 흔들며 아저씨는 날렵한 걸음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쳇, 새처럼 빠르기도 하시지.'
할머니 집은 새린이가 10년 동안 살던 도시와는 달리 모든 게 낯설고 익숙지 않아 불편했어요.
그럴 때마다 새린이는 거의 매일 말다툼에 결국은 서로 헤어지게 되어 새린이를 할머니집에서 살게 한 엄마, 아빠에 대한 원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왔어요.
그날도 그런 생각들이 가득 차올라 찔끔거리며 울다가 할머니한테 들키는 것이 싫어서 동네 산책을 한다며 집을 나섰어요.
동네라고 해야 삼면이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여섯 집이 띄엄띄엄 살고 있는 작고 고요한 시골 마을이에요.
집을 나서면 곧 두 갈래 길이 있는데 한 길은 마을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개천으로 향하는 길이 있어요.
아무도 없는 낯선 길을 가는 건 다소 두렵기도 했지만 마음껏 엄마 아빠 원망도 하고 소리도 지를 수 있는 개천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저 멀리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어요.
황새처럼 키 크고 마른 할머니집 이웃에 사는 아저씨 말예요.
아저씨도 새린이를 알아보셨는지 손짓으로 새린이를 부르셨어요.
아무도 없는 개천에서 아저씨는 새린이가 올 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있었어요.
망원경 속에 보이는 건 작은 돌 들과 저 멀리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모습까지 보였으나, 새는 보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망원경 중앙을 자세히 보렴"
처음에는 돌들만 보였는데 다시 보니 자갈색과 비슷한 새의 깃털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보였어요.
"근데 왜 움직이질 않아요? 어디 아픈가요?"
"지금은 포란(알을 품는 것) 시기이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면 알의 온도가 떨어져서 부화(알에서 깨어나는 것)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단다.
"그럼 엄마 새는 화장실도 안가고 밥도 안 먹어요?"
"아주 급할 때는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곧 돌아온단다."
그래서 모든 엄마 새들이 아기 새를 키울 때면 깃털의 윤기도 사라지고 깃털도 많이 빠지고 수척해진다고 했어요.
포란과 육추(먹이를 먹여 키우는 일)의 기간이 제일 중요한데 이때 어미 새가 천적에게 잡혀 먹히거나 사고를 당할 경우 아기 새들도 함께 죽음을 맞게 된다고도 하셨어요.
"아빠 새는요? 우리 할머니처럼 다른 새가 키워 줄 수는 없나요?"
"엄마 아빠 새가 함께 육아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새들의 경우 엄마 새가 육아를 전담한단다."
아빠는 밖에서 일해서 생활에 쓸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새들도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린이는 한참을 말없이 망원경을 통해 흰목물떼새라고 알려준 작은 새를 바라보았어요. 엄마새 깃털을 봄바람이 쓸고 지나가자 엄마 흰목물떼새도 추운지 고개를 움츠리며 삐삐 작은 경계음을 냈어요.
"오호. 새린 양. 드디어 흰목물떼새에 반했구나! 내 그럴 줄 알았지. 담주에 오면 아가 흰목물떼새를 만날 수 있을 테니 오늘은 그만. 철수!"
아저씨 덕분에 평범하게 느껴졌던 마을 개천이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진 하루였어요.
'아기 물떼새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을까?'
엄마 새가 사고를 당하면 아기 새들도 함께 죽는다는 아저씨의 말이 생각나서 새린이는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았어요.
멀리 산골짜기 어디선가 고라니의 울음소리, 야행성 조류들의 깊고 투박한 소리들이 바람결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곤 했어요.
아저씨와 함께 다시 찾은 개천의 자갈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저기 재잘거리는 새들의 소리로 웅성거리는 듯했어요.
"오, 무사히 태어났구나!"
아저씨도 새린이만큼 아기 새들이 보고 싶으신지 서둘러 망원경을 설치하셨어요.
"아저씨. 아기 새가 어디 있어요? 안 보이는데요."
"하하. 아기 새들이 자신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털 색깔을 주변의 돌 색깔과 비슷하게 바꾼단다."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마치 작은 돌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기 새들이 종종거리며 걷다, 서다,를 반복했어요.
그러다가 한줄기 바람이 몰아치면 엄마 새는 아기 새들을 불러 모아서 품어 주기를 반복했어요.
아직은 날씨가 추워서 자주 아기 새들을 품어 주는 거라고 했어요.
엄마 흰목물떼새가 삑삑 소리를 내면 아기 새들이 종종거리며 달려와 엄마 새의 깃털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즐거워 보여서 새린이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엄마 아빠가 같이 살았을 때 생각이 났어요. 엄마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새린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보고도 훤히 아는 것 같았어요. 하루는 짝꿍과 별것 아닌 일로 싸우고 토라져서 집에 온 날,
"우리 새린이 무슨 일 있었구나!"
하시며 꼭 안아 주고 토닥여 주었을 때 모든 억울함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거든요. 아기 흰목물떼새도 엄마 새의 품속에서라면 태풍도 두렵지 않을 거예요.
"새린 양.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흰목이와 함께 살 작정인가요?"
흐뭇한 미소를 띤 아저씨의 목소리에서 새린이는 잠시 아빠와 함께 있다는 착각을 할 뻔했어요.
"흰목물떼새가 안전하게 자라고 있으니 이제는 산새를 보러 갈까요?"
"우아! 산새요? 좋아요. 지금 당장 가요."
"하하. 새 별로 안 좋아한다는 어린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아저씨의 그런 놀림 섞인 말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어요.
귀여운 아기 새와 엄마 새의 모습을 보면 어느새 엄마 아빠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은 저 멀리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아저씨와 산새를 보러 간 날은 꽃샘추위에 일찍 핀 봄 꽃들이 얼음꽃이 될 것 같은 그런 날이었어요.
아저씨가 작년 이맘때 박새가 둥지를 지었던 곳에 가 보자고 했어요.
"아저씨. 박새는 어떻게 생겼어요?"
새에 대해 별로 관심 없던 새린이가 새에 대해 묻는 것이 기특했는지 아저씨는 휴대폰으로 작년에 찍은 영상을 보여 주셨어요.
깔끔한 도시 사람처럼 연둣빛과 잿빛의 세련된 날개 색깔에 날렵한 몸매의 박새를 보는 순간 새린이는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아저씨. 지금은 나무들이 옷을 안 입어서 새를 찾기 쉬운데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서 어떻게 새를 찾아요?”
"새린양, 잠시 눈을 감아 볼까요?"
영문을 모른 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신기하게도 더 많은 새소리가 들렸어요 .
"아하! 새의 울음소리로 찾는군요!"
"딩. 동. 댕! 이제 당신은 새 관찰 중급 단계로 승진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새에 대한 호기심이 이렇게 빨리 깊어질 줄은 새린이 자신도 예상 못한 일이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어요.
"쉿! 조용히! 저기 보이는 썩은 나무 속에 올해도 박새가 알을 낳았을지도 몰라."
나뭇잎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아저씨는 썩은 통나무 둥치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살짝 안을 들여다봤어요.
"앗! 이런. 천적에게 당한 것 같구나."
아저씨의 손에는 새의 깃털과 검불, 깨진 알 조각 등이 섞인 채 잡혀 나왔어요.
"천적이요? 누가 천척인데요?"
"알과 새끼를 노리는 천적은 주변에 많단다. 뱀, 까치, 청설모, 어치, 까마귀 등……."
"……."
처음 보는 일이라 당황하여 얼어붙은 새린이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아저씨가 말했어요.
"야생에서 새를 관찰하다 보면 기쁜 일만 있는 게 아니란다."
새린이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아저씨는 그동안 새를 관찰하면서 겪었던 아찔한 위기의 순간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놨어요.
뱀이 알이나 어린 새끼를 해치려고 둥지를 향해 기어오르는 걸 긴 막대기로 떼어 멀리 던져 버린 일, 둥지에 비 맞지 않도록 넓적한 돌로 지붕을 만들어 준 일 등.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어느새 새린이 마음에 먹구름이 사라졌어요.
한참을 나뭇잎 밟는 소리와 새들 소리. 바람소리만 듣고 걷던 아저씨가 다시 말을 걸었어요.
"새린 양. 자연에서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란다."
"……."
"때론 바람이 말을 걸어오고, 꽃이 말을 걸기도 하고 혹은 산새와 다람쥐, 나무들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거든. 새린 양도 그 소리를 들을 때가 올 거야."
그래도 말없이 걷기만 하는 새린이에게 아저씨는 ‘괜찮아’ 게임을 하자고 했어요.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은 ‘괜찮아’로만 대답해야하는 게임이에요.
"오늘 새를 못 봤어도"
"괜찮아!"
"아저씨가 장가를 못 갔어도"
"괜찮아"
"새린이가 할머니와 함께 살아도"
"괜찮아."
‘괜찮아’ 게임은 진짜 신기하게도 기분을 괜찮아지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어요.
오늘은 비가 내려도, 지금은 혼자 외로워도, 공부를 좀 못해도, 친구와 싸웠어도, 경기에서 졌더라도.
그래도 괜찮아.
아저씨도 괜찮아. 새린이도 괜찮아. 모두 괜찮아
내일이면 다 괜찮이 질 거야.
그러니까. 오늘 힘내!
산이 등을 토닥이고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며 새린이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괜찮아.’
옥상 위 하늘 정원 식당 / 원순연
아빠가 없다.
아빠의 주황색 등산 가방과 카키색 모자, 등산 스틱은 여전히 방 한쪽에 있는데 아빠만 없다. 작년 겨울, 아빠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눈길에 미끄러진 트럭이 퇴근길 아빠의 차를 덮쳤던 것이다. 아빠와 하던 주말 산행도 그렇게 끝이 났다.
“아빠, 보고 싶어. 제발 꿈에라도 와 줘!”
준하는 아빠의 사진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액자 속의 아빠는 준하를 꼭 껴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빠가 떠난 후, 준하는 어두운 산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며칠 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아파트에 도착해 보니 공지 사항이 붙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계단을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속히 복구하겠사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16층까지 언제 다 올라가지?’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계단 통로가 왠지 싫지 않았다.
헉헉!
12층까지 오르자 숨이 차오르고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뻐근해져 왔다.
‘어? 이 느낌은?’
아빠와 가파른 산을 오를 때 느꼈던 그 익숙한 감각이었다. 순간 아빠와 오르던 남산의 계단이 떠올랐다. 뒤이어 아빠와 함께 올랐던 수많은 산길이 스쳐 지나갔다.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질수록 아빠와 했던 산행이 생생해졌다. 그날 이후로 준하는 엘리베이터 대신 자주 계단을 이용했다. 그리움이 밀려드는 날, 의기소침해진 날이면 터벅터벅 계단을 올랐다. 그러면 아빠가 함께 있어 주는 것처럼 용기가 나고 기운이 솟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16층을 다 올라도 기분이 영 그랬다. 점심시간에 영준이가 휴대폰에 들어있는 사진을 들이밀며 자랑했기 때문이다. 영준이와 영준이 아빠는 정상에서 부둥켜안고서 환호하고 있었다.
“제주도네. 한라산 백록담! 나도 가 봤거든?”
준하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순간 스르르 기운이 빠지면서 영준이의 핸드폰을 놓쳤다.
“야! 김준하 뭐 하는 거야? 국에 빠졌으면 어쩔 뻔했어?”
영준이가 준하의 어깨를 밀치며 화를 냈다. 영준이가 고함을 치며 씩씩거리는 데도 준하는 눈만 껌벅거렸다. 방학이 되면 한라산에 가자고 했던 아빠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준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오늘은 16층을 지나 24층까지 올라가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영준이와 실랑이를 하느라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그런지 배도 고팠다.
그때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누가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나 보네. 맛있겠다.”
지글지글 속닥속닥.
‘어, 분명 위층에서 나는 소리인데. 누구지? 위층은 옥상이라 출입 금지일 텐데.’
냄새에 홀린 듯이 준하는 옥상층으로 올라갔다. 철문에 손을 대는 순간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시원한 바람과 함께 향기로운 풀냄새가 밀려왔다. 준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자작나무 정원 한가운데에 아담하고 예쁜 집이 있었다. 하늘색 줄무늬가 있는 앞치마와 두건을 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분주하게 요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식당이 있었나?”
준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출출할 시간인데 우리 하늘 식당 요리 맛 좀 볼래요?”
준하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보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어묵탕과 빨간 떡볶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김밥.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막 그릇에 담아낸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어 보였다.
‘아빠는 김치볶음밥 위에 계란후라이를 올려 줬었는데.’
“김치볶음밥엔 반숙 후라이지요.”
할머니가 지글지글 구운 계란후라이를 볶음밥 위에 얹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가 고소한 통깨를 솔솔 뿌렸다. 할머니는 준하 앞에 볶음밥과 뜨끈한 어묵탕을 차려 놓았다.
“씩씩한 손님 맛있게 드세요!”
“저 하나도 안 씩씩한 아이예요. 오늘도 그렇고요.”
“충분히 씩씩해요. 잘하고 있어요. 자, 어서 먹어 봐요.”
준하는 어리둥절했지만, 어느새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준하는 숟가락으로 동그란 노른자를 터트린 후 볶음밥에 버무려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그리고 또 한 입, 또 한 입.
“너무 맛있어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준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빠가 가끔 해 주던 음식을 옥상 정원에서 먹다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볶음밥 한 접시와 뜨끈한 어묵탕을 다 비우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엄마가 늦게 퇴근할 때를 대비해서 챙겨 준 용돈을 만지작거리며 준하가 물었다.
“여기 하늘정원 식당은 모든 음식이 공짜예요.”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사랑의 후원금을 내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답니다. 후원자 중에는 준하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분도 있고요.”
할머니가 햇살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손님들이 와서 맛있게 먹고 기운을 내면 후원금이 더 많이 들어오니까 언제든 와서 맘껏 먹고 가세요. 어떤 요리 주문도 다 받아요.”
“정말요? 너무 감사합니다! 또 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 정원을 지나오니 아파트 계단으로 나가는 옥상 문이 열려져 있었다. 준하가 문을 통과하자 바람이 불어와 옥상 문을 닫아 주었다.
철컥!
‘내 이름을 알고 계셨어. 어떻게 아셨을까?’
준하는 후련한 기분으로 16층 집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뭔가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며칠 후 토요일 아침이었다. 엄마의 생일이다.
“준하야, 엄마 오늘 두시까지 올게.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빠가 떠난 후에 엄마는 급히 일자리를 구했다. 플로리스트 자격증이 있어서 근처 아파트 상가에 있는 꽃집에 출근하게 되었다.
엄마가 출근하자, 준하는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엄마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고 수국꽃도 좋아하고 연어 스테이크도 좋아하지.”
그 순간 하늘 정원 식당이 떠올랐다. 준하는 집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순식간에 옥상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철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 열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식당을 안 여나? 아니면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엄마의 생일 음식을 주문하고 싶었는데.’
쿵 쿵 쿵 쿵.
몇 번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분명 언제든지 오라고 하셨는데.’
준하는 집으로 내려가서 편지를 쓰기로 했다.
<하늘 정원 식당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며칠 전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먹었던 준하입니다. 언제든 또 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주문 편지를 남깁니다. 연어 스테이크와 스파게티를 해 주시면 엄마가 맛있게 먹고 힘을 낼 것 같아요.>
옥상 문에 도착해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 거센 바람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꿈을 꾸었던 걸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이었다. 문이 반짝하고 빛이 나더니 문 한가운데에 글자가 나타났다.
5월 28일 토요일 2시 김준하 외 1명 예약 완료.
“앗! 꿈이 아니었어. 감사합니다. 이따 올게요!”
준하는 신이 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드디어 두 시! 준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가 내리자마자 준하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오늘 아주 특별한 식당에 갈 거예요. 일단 나랑 같이 이리로 올라가요.”
“그런데 왜 계단으로 올라가는 거야? 어머! 이 싱그러운 수국들을 누가 여기에 내놨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특별하게도 계단이 꺾이는 모퉁이마다 싱그럽고 탐스러운 수국 화분이 놓여 있었다.
엄마와 준하는 꽃구경을 하며 계단을 올라 드디어 옥상 문 앞에 도착했다. 철컥! 문이 열리더니 싱그럽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머나,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이 옥상에 있다니!”
엄마가 놀라 탄성을 질렀다. 지난번과 똑같이 정원 한가운데 여전히 작고 아담한 집이 있었다. 하늘색 줄무늬 앞치마와 두건을 하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준하 어머니. 오늘의 요리는 연어 스테이크와 알리오올리오 파스타입니다. 후식으로는 생크림 딸기 케이크와 허브티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맛있게 드시고 편히 쉬다 가세요. 그리고 어느 멋진 분이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남편과 자주 먹던 음식인데……. 분명 천상의 맛일 거예요.”
엄마의 눈에 촉촉하게 눈물이 고였다. 준하는 이 모든 일들이 누구의 선물인지 알 것 같았다. 준하는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아빠!’
잔소리 폭탄 대소동 / 최진희
도준이가 구석진 놀이터 벤치에서 울고 있었어요. 왜 우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쌤통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앞을 지나가는데 조금 신경이 쓰였어요. 아진이는 돌아서서 도준이 옆에 앉았어요.
“김도준, 무슨 일 있어? 왜 울어?”
도준이는 아진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너무 무서워졌어.”
“무슨 소리야? 엄마가 무서워졌다니?”
도준이는 얘기 들어줄 사람을 기다린 것 같았어요. 옷소매로 콧물을 닦으면서도 계속 말을 했어요. 아진이는 더러워서 일어나려다가 참고 들어주기로 했어요. 누가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 봤거든요.
“원래 좀 그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런데 어제부터 갑자기 잔소리가 몇 배 더 심해졌어. 작은 것 하나하나 다 내가 잘못했대.”
도준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그득 차오르고 있었어요.
‘내가 도준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진이는 며칠 전 일이 생각났어요.
그저께 밤에 아진이는 두 손을 모으고 온 마음을 담아 간절히 빌었어요.
‘우리 엄마랑 담임선생님 잔소리 좀 없애주세요. 매일 똑같은 잔소리 듣기가 너무 지겨워요. 누구든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책상 위에 있는 뭔가가 보였어요. 그건 바로 탁구공 크기의 투명 공 3개와 반으로 접혀 있는 쪽지였어요. 아진이는 쪽지를 꼼꼼히 읽었어요.
「잔소리 수집 방법」
1. 잔소리 수집을 하고 싶은 사람을 정한다.
2. 정해진 사람 1m 안에서 공에 있는 초록 버튼을 누른다.
3. 잔소리 수집이 끝나면 공이 검은색으로 변한다.
4. 떨어뜨리지 말 것. 공이 터지면 안에 있던 잔소리들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흡수된다.
5. 잔소리를 수집한 공을 터뜨리면, 잔소리를 뱉어낸 후 공은 사라진다.
‘진짜야?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진 거야?’
아진이는 설마 하면서도 공 한 개를 들고 부엌으로 갔어요.
“아진이 일어났니? 일어났으면 빨리 씻어. 머리 잘 말리고 떨어진 머리카락 좀 잘 버리고.”
아진이는 엄마 등 뒤로 가서 공에 있는 버튼을 눌렀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엄마가 자주 하는 잔소리 글자들이 엄마 몸에서 튀어나와 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밥 먹어’ ‘컴퓨터 그만 해’ ‘게임기 좀 그만’ ‘공부 안 하니?’ ‘숙제는 했니?’ ‘고양이 세수하지 마’ ‘채소 좀 먹어’ ‘일찍 자야 키가 커’ 등등. 투명했던 공은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어요. 아진이는 정말 엄마 잔소리가 공에 들어갔는지 실험해 보기로 했어요.
“엄마, 나 오늘은 머리 안 감고 밥도 안 먹고 그냥 학교에 갈래요.”
엄마가 웃으며 말했어요.
“그럴래? 알았어.”
교실에 도착하니 담임선생님은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아진이는 선생님 곁으로 몰래 가서 두 번째 투명 공 버튼을 눌렀죠. ‘조용히 해’ ‘너희들 준비 안 해왔어?’ ‘선생님이 또 얘기해야 하니?’ ‘누가 그랬어?’ ‘손 머리 위로’ 등등의 글씨가 튀어나와 공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지금 보니까 꼭 검은 폭탄같이 변하네. 잔소리 폭탄 두 개 성공!’
그날 교실은 어땠을까요? 원래 아이들이 떠들면 선생님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조용히 ‘도’ 음으로 시작해요.
“이제 조용히 하자.”
그러다 아이들이 더 시끄러워지면 선생님의 목소리는 나중에 ‘솔’ 음까지 올라가죠.
“조용히! 말 안 들을래?”
그런데 이날은 달랐어요.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계속 수업만 했거든요. ‘도’ 음으로 시작해서 ‘솔’ 음을 넘어 ‘높은 도’ 음까지 변한 건 아이들이었죠. 웅성웅성 시작한 아이들은 광장에서 떠들 듯 정말 시끄러워졌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아진이는 자유 그 자체였답니다. 숙제도 안 하고 게임도 실컷 했어요. 아진이가 무엇을 하든 엄마는 계속 웃으면서 그러라고만 했답니다.
“엄마, 자장면 먹고 싶어.”
“좋지!”
저녁으로 자장면, 후식으로 과자와 아이스크림까지 실컷 먹고 나니 너무 졸렸어요. 아진이는 양치질도 세수도 안 하고 그냥 잤어요. 모두 잔소리 폭탄 덕에 생긴 기적이었죠.
다음 날 아진이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어요. 아침 9시였거든요.
“엄마, 왜 안 깨웠어? 내가 안 일어나면 엄마가 깨워야지.”
엄마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어요.
“깨우면서 잔소리하는 게 싫다며?”
아진이는 급한 대로 화장실만 갔다가 머리만 대충 묶고 최대한 빨리 학교에 갔어요. 물론 양치질, 세수를 할 시간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엄마는 더 밝아지고 선생님은 무표정하게 변했지? 사람마다 다르게 변하네.’
다행히 선생님은 왜 지각했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시끄러운 교실은 어제보다 더 난장판이 된 것 같았지만, 선생님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점심 급식을 먹고 난 후, 아진이 뒤에 앉아 있는 도준이가 말했어요.
“야, 정아진! 규성이랑 짝 되더니 둘이 닮아 가냐? 넌 규성이처럼 엄마가 없는 것도 아닌데 좀 씻고 다녀라.”
옆에 있던 규성이 얼굴이 목까지 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고 아진이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안 씻었는데 왜 규성이를 끌어들여? 내가 볼 땐 규성이가 너보다 훨씬 깨끗하거든?”
도준이는 늘 말을 밉게 하는 아이였어요. 뭐가 불만인지 예민하게 굴고 자주 투덜거렸어요.
‘잔소리 폭탄을 터트리면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 흡수된다고 했지? 너 한번 당해봐라.’
아진이는 하굣길에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도준이 집 초인종을 눌렀죠. 예상대로 학원에 간 도준이는 집에 없었고 도준이 엄마가 문을 열어주었어요.
“안녕하세요? 도준이한테 뭐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그러면서 아진이는 옆으로 살짝 잔소리 폭탄을 던졌어요. 그랬더니 잔소리 폭탄이 토하듯이 잔소리들을 쏟아냈어요. ‘공부 더 해라’ ‘학원 숙제 얼마나 했니?’ ‘더 깨끗이 씻어’ ‘TV 그만 봐’ ‘학습지 더 풀어야지’ ‘게임 금지’ 등등. 공중에서 잠시 머물던 잔소리들이 도준이 엄마 입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어요. 그리고 잔소리 폭탄은 투명하게 변하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답니다.
그게 어제였는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준이가 이렇게 서럽게 울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사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아까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이 교장실로 불려 갔었거든요. 아진이는 교장실 앞에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었죠.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그냥 두고 봤어요. 그런데 이틀 전부터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안 하는 이유가 뭔지 이젠 들어야겠어요.”
“교장 선생님, 저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뭔가 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아요. 저도 너무 답답합니다.”
아진이는 선생님께 너무 미안했어요. 도망치듯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 아진이 속도 모르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아이들까지 미워 보이기 시작했어요.
3일째 보는 ‘OK 엄마’의 모습도 새삼 너무 낯설게 보였어요. 잔소리가 사라진 엄마는 무조건 ‘네 마음대로 해’라고만 해요. 그런데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엄마와 선생님, 도준이 엄마까지 아진이가 원하던 대로 됐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았어요.
‘세 개 중에 엄마 잔소리를 수집한 건 도준이 엄마한테 터뜨려서 사라졌어. 선생님 잔소리를 수집한 폭탄은 내일 다시 선생님에게 터뜨리면 돼. 그러면 선생님은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렇다면 남은 건 아직 사용하지 않은 투명 공 하나에요.
‘아직 사용 안 한 투명 공에 도준이 엄마 잔소리를 담는 거야. 그러면 도준이 엄마는 원래대로 되겠지? 그리고 그걸 우리 엄마한테 터뜨려? 그랬다가 엄마 잔소리가 도준이 엄마처럼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도준이를 그냥 두면 계속 후회할 것 같았어요.
‘내일 원래대로 다 돌려놓을 거야. 정아진, 할 수 있어!’
잘못된 것을 돌려놓기로 한 날, 아진이는 서둘러 학교에 갔어요. 담임선생님이 첫 번째 목표였거든요. 교실 앞문으로 들어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잔소리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에서 나온 잔소리는 선생님 입으로 순식간에 들어갔고, 투명해진 폭탄은 또 감쪽같이 사라졌죠.
“어? 아진이 일찍 왔네. 오늘 모둠 발표 준비는 잘했어? 지난 시간처럼 대충하면 안 된다.”
다시 듣게 된 선생님 잔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선생님은 예전 그대로 돌아왔답니다. 하지만 도준이 표정은 그새 더 어둠의 아이처럼 변해있었어요. 그런 도준이를 보자 아진이는 살짝 초조해졌어요.
‘계획대로 잘 돼야 할 텐데.’
아진이는 학교가 끝나고 도준이 집으로 뛰어갔어요. 아줌마가 문을 열자마자 마지막 남은 투명 공의 버튼을 눌렀죠. 아줌마의 잔소리 폭탄을 들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어요.
‘OK 엄마는 이제 안녕! 좀 아쉽긴 하지만 난 잔소리쟁이 엄마가 훨씬 더 나은 것 같아.’
그런데 집에서 잔소리 폭탄을 던지는 순간, 어느새 나타난 강아지 ‘아리’가 폴짝 엄마 품에 안겼어요.
“왈왈왈”
"아리, 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설마 내가 한심해? 아니지?"
“멍멍멍멍”
“알았어. 10분만 더 하고 숙제할게. 잔소리 좀 그만해.”
엄마 잔소리는 원래대로, 거기에 아리의 잔소리가 더해졌어요. 아진이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대로의 엄마가 얼마나 괜찮은지 알았거든요. 그리고 아리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대전 동화 심사평
시니어 신춘문예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지 않게, 연륜에서 나오는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많아 반가웠다. 그러나 동화라는 장르에서는 ‘어린이’가 중심에 놓인다. 어린이의 시선에서 보는 것, 어린이를 보는 시선은 중요하다. 내가 어릴 적 겪은 이야기 혹은 지금 내가 겪는 이야기 모두 동화 작품이 될 수는 있으나, 이와 같은 시선이 빠진다면 동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투고된 작품들 중에 주최 측에서 요구한 원고량이 못 미치거나, 오타와 오문 등이 두드러지는 작품은 심사에서 제외했다.
<잔소리 폭탄 대소동>은 어른들의 잔소리가 지겨워진 주인공이 ‘잔소리 좀 없애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었다가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소원대로 막상 잔소리가 없어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지만,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전복적 상상력이 발랄하다.
<아빠의 편도티켓>은 죽음을 앞둔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렸다. 아빠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만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다루면서 아이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안정적인 문장과 구성이 작가로서 믿음을 준다.
<그래도 괜찮아>는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된 주인공이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흔한 주제지만, 이웃에 사는 아저씨와 새를 비롯한 자연의 생태를 관찰하게 되면서 자연에 동화되는 과정, 대자연 속에서는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울림을 준다.
<로봇 오통통>은 일상의 많은 부분이 로봇으로 대체된 가까운 미래를 다룬 작품이다. 로봇이 형제자매나 친구 대용으로 소비되고, 원하는 것은 모두 해줄 수 있지만 결국 진정한 소통은 되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어린이의 시선에서 기계 문명이 가져온 디스토피아 세계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옥상 위 하늘 정원 식당>은 갑작스럽게 아빠를 잃은 아이가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의기소침해진 주인공이 음식 냄새에 이끌려 아파트 옥상에 오르고, 그곳에 차려진 식당에서 아빠의 음식을 먹고 아빠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내용으로, 판타지 기법을 이용해 동화의 장점을 잘 살렸다.
심사위원 아동문학가 김진
첫댓글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와 주인공이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네요. 별꽃을 보고 아빠를 그리는 마음이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