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다섯단계 마쓰다 기이치( 1888 - 1968 )/ 홍순명 역(풀무농업기술고 교장)
공무원에는 서기관이나 이사관이 있고 또 부장, 과장, 계장 등이 있지만 농민은 모두 농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으로 농민에도 다섯단계가 있다. 하층의 농민은 바라지 않지만 상층의 농민은 장관이나 장군도 미치지 못할 만큼 존귀한 존재고, 또 모든 직업중 뛰어나게 행복하다. 어차피 농사를 지으려면 상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1. 생활을 위한 농민 지금 우리눈에 띄는 보통 농민은 한마디로 말하면 생활을 위한 농민밖에 없다. 하나도 생활, 둘도 생활, 셋도 생활이다. 그리고 그 생활은 허영, 향락의 두목표를 좇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조금이라도 자기를 위대하게 훌륭하게 보이도록 하자는 마음이 허영이다. 실질이상으로 잘 보이려는 것이다. 칭찬받으면 기뻐한다. 욕을 먹으면 화를 낸다. 싫어한다. 모두 허영의 덩어리다. 이 마음을 채우려고 집을 꾸민다. 몸을 꾸민다. 생활을 꾸민다. 결혼식을 꾸민다. 신분을 꾸민다. 요컨대 힘껏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실로 족자나 가구에 이르기까지 남에게 보여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니까 보통 신경쓰는 것이 아니다. 몸을 꾸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외투를 입는다. 양복을 입는다. 수염을 기른다. 머리를 기른다. 자기 혼자만 그렇게 하면 좋지만 부인도 아이도 꾸며야 하니까 다 고생이 많다. 특히 힘든 것은 아들, 딸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것과 딸을 시집보내는 일이다. 너무나 힘을 많이 들인 가정은 이것만으로 집안이 휘청한다.
농민이 파산을 하는 큰 이유의 하나가 이 허영이다. 인간인 이상 누구든지 다소의 허영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을 갈고 닦을수록 반드시 이 마음을 초월하고 해탈할 수 있다. 계급이 올랐다고 기뻐하고 훈장을 받았다, 표창을 받았다고 사람까지 초청하여 축하한다. 특별히 나쁠 것은 없지만 이런 것을 좋아할수록 인물은 작아진다. 공무원들은 월급은 조금 주고 표창으로 기쁘게 한다.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돈이 덜 든다. 자랑하기 좋아하고 겉보기에 근사한 것 좋아하고 멋있는 것 좋아하는 심리를 잘 파악하여 허영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좀 말이 심한 것 같지만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다. 전연 남의 눈도 외모도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 관심이 많을수록 큰 인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뽐내는 공무원을 보고 그를 큰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영과 함께 피는 꽃은 향락이다. 이것도 자손을 위하여 저것도 자손을 위하여라면서 재산을 만든다. 그 자손을 위한다는 것이 요컨대 자손이 일하지 않고 편히 살기 위해 평생 아무것도 안해도 안락하게 먹고사는 것을 가르친다. 인간의 행복은 모든 육체욕을 만족시키는데 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동안은 할 수 없이 일한다. 일하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농사를 짓지 않는다. 세상에 이것을 성공했다고 한다. 즉 허영과 향락을 획득한 사람으로 그가 농촌의 승리자였다. 농사를 그만두고 잘살게 된 것이 성공한 자니까 오늘 일하는 농민은 불쌍하게도 성공을 못한 낙오자다. 생각해보면 농촌진흥이란 씨도 안먹히는 말이다. 이와 같이 농민의 목적이 허영과 향락이니까 목표로 하는 것은 그저 돈벌이다. 그것도 될 수 있는대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다.
이것을 수치로 생각하기는커녕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동경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로 농민이 되어 보면 위와 같은 이론이 탁상공론으로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농민은 그런 의론이나 할만큼 그렇게 쉬운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사라는 직업은 보통 수고를 하지 않고서는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속담대로 “흙을 먹고 물을 마시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도 힘들다. 새벽에 별을 이고 나가 저녁달을 밟고 돌아온다는 문장이 있거나 “낟알 하나하나는 농민의 고생이 영근 것”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걸 보면 사실 농민은 농사를 마지못해 짓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지못해 농사를 짓는 체험이 길어질수록 농사를 짓기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진다. 농사만으로는 생활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 쫓기는가? 생활을 앞지르는가? 이것이 농민의 생명선이다. 이 생명선에서 낙오하면 마음에도 없이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한평생 머리를 들 수 없다. 그러니까 생활의 승리자, 즉 지주계급을 우러러 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지주는 농촌에서 위인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농촌의 위인도 그 자손의 운명은 가련하다. 거의 예외없이 흙에 살면서 흙에서 떠나 생산력을 잃으면 50년안에 망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어쨌건 농촌에서는 생활을 위한 농민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리고 그 대부분도 결코 동격이 아니다. 생활농민의 위단계로 오르기는 커녕 생활 하나 하지 못하고 생활의 첫 단계에 한쪽 발을 걸치고 위태롭게 떨어지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농촌구제나 농촌진흥은 제1단계의 농민을 2단계, 3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제1단계에서 떨어져가는 사람을 떨어지지 않도록 제1단계까지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실제로 농촌에서는 생활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직 농민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2. 예술적인 농민 농민이 돈을 모으면 왜 흙에서 떠나는가? 그것은 농업의 목적이 낮기 때문이다. 즉 생활의 방편이 농사니까 생활만 되면 농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하다. 생활을 할 수 있어도 농사를 짓는 인간, 누워있어도 먹을 만큼 재산이 있어도 농사를 그만두지 않는 사람, 그만두지 않을 뿐아니라 점점 더 농사에 힘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농업의 예술같은 맛을 이해하는 농민이다. 이제 2단계에 오른 인간은 재산을 모으면 모을수록 더욱 농사를 힘들여 짓는다.
농업의 예술미는 농업기술이나 경영을 잘하는 데서 나온다. 농사를 지을 때 나타나는 신들린 경지는 실로 예술의 극치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예술은 모든 것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조각가는 조각으로 표현하고, 음악가는 목소리나 악기로 표현하고, 무용가는 무용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우리의 예술은 농작물이나 가축으로 표현하고 경영한다. 세상에는 유명한 예술품이 많지만 우리 농민의 예술은 대상이 생물이고 천지의 영의 기운, 영의 힘이 함께 하는 복잡 미묘한 예술로서 농작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떤 예술품 못지않는 예술품이다.
그리고 그 취미로 말하면 살아있는 대상이고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 천지의 작용이 더해져 더욱 복잡미묘하기 때문에 한없이 심원하다. 우리 농장에서는 지금 보리파종, 보리이식이 한창인데 밭고랑은 똑바른 직선으로 내어 약간의 곡선도 허락하지 않는다. 다소 굽었어도 보리의 수확량이 줄지는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내가 농민이 되어 실험해본 결과 반듯한 고랑에서는 굽은 고랑보다 일단보에 한섬은 더 먹는다. 시험장에선 하는 실험은 두고랑 위의 선만가지고 비교하는 것이지만 농민이 하는 실험은 선 * 마음 = 수량 이런 계산이 된다. 보리 밭고랑이 반듯한 직선이면 기분이 좋으니까 날마다 보러간다. 보면 다시 한번이라도 만지고 싶다. 만지면 더 좋게 된다. 좋게 되면 또 만지고 싶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일단보에 한섬이상 증산이 된다.
농업의 예술화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만 즐거울 뿐 아니라 농사가 즐겁게 되고 광명에 빛나고 희망에 불타 노동의 고통을 잊고 농사에 몰두하니까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실패의 기회가 없어 부귀하고 번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둘 것은 농업의 예술미와 함께 맛보아야 할 것은 경영의 기동미라는 것이다. 경기가 좋아질 때는 원료값이 먼저 오르고 가공품이 그 뒤를 따른다. 경기가 침체될 때는 원료값이 먼저 하락하고 제품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니까 불경기가 되면 무엇이든지 가공해서 팔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미리 준비하였다가 앞으로 올 불경기를 대비한다. 이런 묘미를 알면 농사는 그만 두기 어렵다. 농업의 예술미와 경영의 기동미를 파악한 사람은 농민의 즐거움이 일약 100배, 1000배가 된다. 수확물이 목표가 아니다. 돈벌이도 목표가 아니다. 이해를 초월하여 농사가 도락(道樂)이 된다. 벼를 기르거나 보리를 기르거나 채소농사를 짓는 것이 도락이니까 수확은 도락의 찌꺼기다. 결과보다 원인을 즐거워하는 농민, 그런 사람은 결과가 시원치 않아도 농사를 그만두지 않고 돈을 모아 누워있어도 먹을 수 있다고 농사를 그만두지 않고 직업 그 자체를 즐기니까 일에 몰두하여 틈이 없고 틈이 없으니까 돈이 필요없고 도락이 생산이니까 지출이 적은 수입전문이 되어 가정이 번영하는 것이다.
3. 시적・정서적 농민 그보다 더 백성의 향기가 높은 것은 전원의 시적 생활에 들어간 사람이다. 천지의 자연미와 융합한 사람이다. 시적이란 일체의 현실을 떠나 자연의 환경에 공상하는 마음의 모습이다. 대자연에 취한 기분이다. 인간을 떠난 정서다. 그러니까 산천초목이 모두 우리의 생활대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는 더욱 우리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고 숲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도 풀밭에 우는 벌레 소리도 하나님이 연주하는 음악으로 들린다. 산은 높고 물은 맑고 공기가 시원한 농촌에 해와 달을 우러르며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집은 종전의 농가와 달리 시적 정서를 함양하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러면 주거의 둘레를 자연미가 풍부한 정원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취미와 실익과 위생을 조화시킨 정원이다. 봄에는 꽃 피고, 여름에는 짙은 녹색의,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은 마른 가지의 까치가 우는 정원이면서 봄에는 열매를 맺고 여름에는 자라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거두는 정원이다. 푸른 소나무의 춤추는 학이 아니라 산란율이 높은 닭을 기르고 오리를 양식하는 연못이다. 선경은 선경이라도 우리의 선경에는 생산성이 있다. 집의 구조도 정원정서를 띄는 것이 좋다. 기와담보다 생울타리가 좋다. 페인트 칠보다 흰나무가 좋다. 정서에는 음악이 필요하다. 노래도 좋다. 악기도 좋다. 숲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농가가 되면 더욱 좋다.
4. 철학하는 농민 농업의 4번째 단계는 천지의 소리없는 소리를 듣는 농민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이 하늘의 일을 돕는 것이고 상대가 천지니까 귀기울여 들으면 반드시 천지의 소리가 들린다. 천지의 소리를 진리라고 하고 진리를 찾는 학문이 철학이다. 그리고 우리의 철학은 최고의 철학이다. 천지간의 원리, 원칙을 알면 반드시 철학을 알게 된다. 우리 철학은 흙의 철학이다. 사람들은 각각 성격이 있다. 쉽게 깨닫는 사람도 있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진지하게 천지의 소리를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을 구도심(求道心)이라고 한다. 구도심만 있으면 반드시 부처님은 깨달을 기회를 주신다. 책은 확실히 깨달음의 길잡이가 된다. 그러나 읽는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마음이 울리지 않는다. 읽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실제로 사물에 접하고 사물에서 강하게 마음에 충격을 받을 때 일어난다. 독서가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로 천지의 살이있는 교훈에 접촉하면서 책을 읽지 않으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고 깨닫지를 못한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나서 알게 된다. 행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 깨닫는 길이다. 이 보잘 것 없는 글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에서 시험공부처럼 머리로만 읽어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불과 같이 진지한 마음이 달아올라 실천하면서 읽고 읽으면서 또 실천해야 한다. 이것을 되풀이 하면 반드시 깨닫는다. 책뿐 아니라 얘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흙의 철학, 즉 진리를 깨달은 농민은 절대로 방황하지 않는 농민이다. 모두 오르라. 이곳까지 오르라. 이곳까지 오르면 반드시 농민의 신념이 생기고 기운은 튼튼하게 잡혀 영구히 번영하리라.
5. 종교가 있는 농민 농민의 최고봉은 하늘의 일을 돕는 농민이다. 하나님의 일을 돕기만 하는 농민이다. 이 마음이 곧 종교다. 사실은 우리들은 오랫동안 농업의 종교화를 부르짖어 왔다. 그러나 부르짖기만 해서 무엇하랴? 신앙은 부르짖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신념이 있어야 한다. 신앙은 이치가 아니니까 설명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여기 있는 농작물이나 동물이 싹이나고 태어나고 자라는 것 모두가 하늘과 땅의 힘에 의한 것임은 누가 생각해도 알 것이다. 삐걱대는 기계소리 속에서 생활하는 직업이 아니고 티끌 날리는 거리의 이어진 집안에서 하는 직업도 아니며 대상이 하늘과 땅의 힘으로 영위하는 직업이니까 농민이 신앙심이 없으면 누가 신앙심을 가질 수 있으랴? 농업이야말로 신이나 부처님께 다가가는 길이다. 농촌이야말로 신앙을 얻는 장소다. 인간은 인간틈에 부대낄수록 나쁘게 된다. 사람없는 산야에 구름이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일하여 육체의 청즙(靑汁), 즉 독기를 밖으로 내보내면 신령한 기운이 몸안에 깃든다. 영의 힘이 가득찬 밤하늘에 중천에 걸린 초승달과 하늘에 가득한 별을 우러러 보면서 어둑어둑한 숲을 바라보면 신령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든다. 풍부하게 될수록 집은 필요이상 커지고 옷의 장식은 저속해진다. 이리하여 생활의 모든 장면이 대자연과 멀어진다.
그러므로 풍부할수록 마음은 혼탁해진다. 가난은 좋지 않지만 유복한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좋다. 어디까지나 선을 쌓는 적선의 가정으로서 하늘 은혜의 1만분의 1이라도 보답해야 한다. 생산하고 베풀고, 또 생산하고 베풀어야 한다. 즉, 왼쪽에 적선, 오른쪽에 생산이라야 한다. 이상 오근(五根)을 합친 사람이 참 백성이다. 생활만이면 이십성밖에 없다. 빨리 사십성으로 나가라. 육십성에 도달하라. 팔십성에 오르라. 그리고 백성(百姓)에 자리잡고 앉아야만 한다.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