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재발견...방하리 고분군 ♣ 소재지: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84~5( 6.25때 대광중학교 분교 자리) ♣ 시대 : 6~7세기경, 상군 치소지 추정 ♣ 고분 : 봉분 [封墳] 6기와 봉분이 없는 1기(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초기에 30여기가 있었으나 6.25전쟁과 대광중학교 임시 분교를 사용하면서 일부 소실됨. 어떤 일제강점기에 일부 소실되었다고도 함. ♣ 현장조사: 2019년2월11일 ♣ 유물: 신라시대 철제, 관,굽달린목긴항아리(대부장경호), 뚜껑(개), 굽달린접시(고배) 등의 토기와 허리띠장식(대금구), 관고리,토기류 등 70여점 조사용역을 맡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방하리고분군은 일제 강점기를 비롯한 도굴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여서 유물의 발견은 다소 적지만, 봉분의 규모와 형태 등으로 미뤄 둔덕기성과 거제고군현치소지의 초축과 비슷한 연대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방하리고분군은 그동안 발견된 거제지역의 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로 만들어진 데다 봉분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 및 연구 가치도 높다는 평가다. 이와 관련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3일 둔덕면 소통간담회 전 방하리고분군을 방문한 변광룡 시장에게 이미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둔덕기성과 관련 유적인 거제고군현치소지, 방하리고분군을 연계한 문화재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거제시는 둔덕기성을 비롯해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인 방하리고분군과 지난 95년 일부 발굴이 진행됐던 거제고군현치소지를 거제지역의 대표 문화유적으로 연계해 국가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할 방침이다.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측은 “이번 방하리고분군의 조사는 거제지역의 가야유적 발굴로 시작했지만, 조사 결과 둔덕기성과 거제고군현치소지와 관련된 유적으로 가닥을 잡았고, 둔덕면 일대가 고대 거제지역의 중심지였다는 기존 연구자료와 부합하는 결과를 얻었다”면서 “둔덕면 일대의 유적은 이 지역에 건립 예정 중인 시립박물관은 물론 거제지역의 정체성을 알리고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95년 발굴을 시작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162호인 거제고군현치소지는 신라시대 거제지역의 지명인 상군(詳郡)과 관련된 상사리(裳四里) 명문 기와가 처음으로 발견된 곳으로 신라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축조된 대규모 관청 건물이 위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상사리 명문 기와를 비롯해 신라와 고려시대의 토기 조각, 고려청자·분청자기 조각 등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문화재청으로부터 2018년도 하반기 긴급발굴조사비를 지원받아 진행하였으며, 두 달여간 발굴조사 결과 거제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의 봉토고분군으로 밝혀졌다. 직경 7~12m, 잔존높이 1~2m 정도의 봉분을 가진 봉토고분 6기와 봉분이 잔존하지 않는 고분 1기가 조사되었으며, 무덤방의 구조는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으로 입구부의 형태와 시상대(시신을 안치하는 시설)의 중복관계 등을 통해 수차례의 추가 매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거제 방하리 고분군은 거제지역의 재지문화를 바탕으로 당시 확산된 신라문화가 융합되어 형성된 고분군으로 거제지역 최대급 유력 정치체가 형성한 고분문화 및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인근의 둔덕기성(성곽) 및 고군현치소지(행정관청) 등과 고분군이 함께 조사되어 신라 문무왕(661~681년) 당시 설치된 상군(裳郡)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향후 관련 연구가 기대된다. 한편, 거제시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방하리 고분군을 올해 상반기 안에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 신청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며, 지정 이후에는 도비를 지원받아 유적 정비와 추가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방하리 고분군이 발견된 곳에는 60년 전 유두원(80)씨가 밭일을 하면서 2박스 분량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대형 토기 한 점만 보관하고 있다. 그 때 발견한 유물은 1,50m장검, 장신구, 청자접시,처자조각 등이 였다고 한다. 그곳에는 6.25때 서울 대광중학교 임시 교사로 사용하면서 많은 도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30여기 였으나 일제강점기와 6.25동란으로 많은 소실이 있었다고 한다. ☎ 대광중학교 둔덕분교 대광중학교는 1947년 한경직목사(평남출생,1945년월남)가 서울에서 설립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거제도에는 피난민들이 물밀 듯이 쏫아졌다. 거제도 학교만으로는 학생을 수용할 수 없어 연초에 함흥중학교와 장승포,지세포,사등,둔덕에는 대광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분교교사는 신애균선생이었는데, 그 분은 현봉학(흥남철수작전 지휮자) 선생의 어머님이 섰다. 1954.3 폐교 될 때까지 600여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대광중.고등학교 분교자리는 신라시대 고분(古墳)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목회자 옥한흠 목사도 지세포 대광중.고등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자료제공: 대광중학교 행정실장, 김복희..거제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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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역사연대 역사연대 | 연대 | 무덤 | 시대구분 | 거제시 | 구석기 | 70~1만년 | 봉토(封土)무덤(흙,돌) | 선사시대(문자없음) | 수월리 서기재료산지(1) | 신석기 | 1만~4000 | 독무덤[甕棺墓], 움무덤[土壙墓], 적석(積石) 토광묘(土壙墓), 집단묘(集團墓) | 선사시대(문자없음) | 패총, 지석묘, 토기 (11) | 청동기 | BC2000~300 | 고인돌,석관묘 | (역사시대) 고조선,기자조선 | 지석묘군(90), 각종유물, 토기 등 | 철기시대 | BC300~ | | 여러나라(부여,고구려,동예,삼한,동예) | 고조선 멸망, 위만조선 | 1)삼국시대 | BC50~AD936 | 석관묘,(石槨墓) 순장(葬法). | 고구려,백제,신라,가야 | 산성,고분군,지석묘,토기 (17) | 2)고려시대 | AD918~1392 | 석관묘(石槨墓) | 후삼국통일 | 절터, 둔덕고군현치소지,아양삼층석탑(9) | 3)조선시대 | AD1392~1910 | 회곽묘((灰槨墓) | 임진왜란전(전기) 임진왜란후(후기) | 성터,봉수대,고분군,사찰(71) | 4)근현대 | 1897~1945 | 봉토,납골,소목장,자연장,평장,바다장,냉동장,미라장,사리성형 | 근대(1876~1945) 현대(1945~현재) | 사찰,건물,비석 등(68) |
삼국시대 무덤의 종류 덧널무덤 | (木槨墓, Wooden chamber tomb) 덧널무덤은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판재나 통나무를 쌓아 덧널(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널(관)이나 주검을 넣는 무덤이다. 널무덤에 비해 무덤의 규모가 크다. 널 또는 주검과 덧널 사이의 공간에는 많은 껴묻거리를 넣었다. 삼한시대 후기에 영남지역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4세기 이후에 껴묻거리를 묻는 덧널(부곽)은 日자형으로 하나 더 만든 무덤이 만들어졌으며 그 규모가 큰 것은 전체길이가 15m이상 되는 것도 있다 | 돌무지덧널무덤 | 돌무지덧널무덤 (積石木槨墳) ,Wooden chamber tomb with stone mound)...신라시대 (경주) 돌무지덧널무덤은 긴 사각형의 구덩이를 파서 그안에 나무덧널을 만들고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다음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냇돌로 덧널을 덮어 돌무지 시설을 하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다져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이다. | 구덩식돌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竪穴式石槨墓, Shaft stone chamber tomb)...삼국시대,가야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말골이나 강돌로서 4벽을 쌓아 덧널을 만들고 그 내부에 널이나 주검및 껴묻거리를 위로부터 넣고 큰돌로 뚜껑을 덮어 밀폐시키는 무덤이다. | 굴식돌방무덤 |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墓, Corridor-style stone chamber tomb)...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겉길(묘도)와 안길(연도), 시신이 안치되는 방(현실)등으로 이루어진 무덤이다. 현실은 넓고 높은 공간을 이루고 있으나 안길은 넓이나 유물을 들여 놓거나 보행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너비와 높이로 길게 만들어져 있다. | 돌무지무덤 | 돌무지무덤 (赤石冢 Stone Mound Tomb)...고구려 고구려의 특징적인 무덤형태인 돌무지무덤은 강돌을 장방형으로 쌓은 무기단식과 긴사각형 또는 사각형의 단을 만든 기단식이 있는데 기단이 많은 것은 4~5단 인 것도 있다. 그리고 기단식 돌무지무덤의 내부시설에는 돌로 짜서 한사람만을 넣을수 있는 구덩식돌덧널과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연도)을 만들어 여러 명을 한 석실에 묻을 수 있는 굴식돌방으로 나뉘어진다. | 앞트기식 돌방무덤 |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Horizontal entrance stone tomb)...가야,삼국시대 무덤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임구가 있는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고구려나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의 매장방식을 가야지역에서 받아들여 구덩식 돌널무덤의 구조에 접목시킨 것이다. 구덩식 돌덧널무덤의 한쪽 벽에 입구를 만들어 주검이나 널을 무덤안에 들여 넣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나의 무덤에 추가로 여러명을 더 매장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굴식 돌방무덤과 같으나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방으로 들어가는 무덤 겉길(묘도)이 있으나 무덤 안길(연도)이 없는 것에서 차이가 난다. 처음에는 구덩식돌덧널무덤과 같이 긴 사각형이었으나 점차 굴식돌방과 같이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 독널무덤 | 독널무덤(甕棺墓, Jar Coffin)...삼국시대,가야 독널무덤은 나무널이나 돌널 대신 독(옹)이나 항아리(호)등의 토기를 널로 사용한 무덤이다. 장소, 시기를 불문하고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중국에서는 와관이라고 한다. 하나의 토기에 돌뚜껑이나 토기뚜껑을 덮는 단곽식, 두개의 토기 아가리를 맞붙인 합구식, 세개의 토기중 가운데 토기의 바닥을 깨고 연결한 연결식으로 구분 할수 있다. 대체로 어린이무덤에 사용되었으나 영산가유역이나 창원의 독널무덤은 어른의 무덤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 특히 영산강유역의 독널무덤은 지역적인 특색을 가진 것이다. | 뼈항아리무덤 | 뼈항아리무덤(火葬墓, Cremation Urn)...통일신라시대 통일 신라시대 전후가 되면 불교영향으로 화장이 크게 유행한다. 화장한 뒤 뼈를 추려 그릇에 담아 땅에 묻는 화장묘가 나타나는데 이때 뼈담는 용기를 뼈항아리(골호)라고 한다. 초기의 뼈항아리는 주로 일상생활에 쓰던 토기를 이용하였으나 차츰 시기가 내려오면서 여러가지 무늬가 새겨지고 재료와 형태도 다양하게 된다. | 순장(殉葬) |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죽은 사람을 함께 묻는 장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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