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수탈해 갑부로… ‘재벌 반감’ 씨앗 뿌린 민영휘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① 민영휘 부자
일제 치하에서 대부분의 식민지 백성들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거부(巨富)를 일군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치하라고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일찍 감지해 거부가 된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해 거부가 된 민영휘 부자는 경우가 달랐다.
민영휘가 살던 가옥.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있다. 철종의 사위 박영효도 한때 살았던 주택이다. 민영휘(아래 사진)는 평안감사 때 착복한 재산을 기반으로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별건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몇몇 부자사람’은 존재했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제일 갑부로 꼽힌 민영휘는 한국 사회에서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착되게 만든 원조였다. 민영휘의 원명은 민영준(閔泳駿)이었는데 1901년 처형된 김영준(金永準)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 민영휘의 부친은 민두호(閔斗鎬)인데, 황현(黃玹)은
황현은
민영휘의 부친 민두호는 춘천부 유수(留守)를, 민영휘는 평안감사를 역임하는데 이때 강원도와 평안도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 조선 제일 갑부가 된 원동력이었다. 황현은
형조참의 지석영은 ‘민영휘 처형’ 상소
황현은
“남정철(南廷哲:망국 후 일제로부터 남작 수여)이 과거 급제 2년이 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왕비의 친척이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귀한 자리에 나간 것은 근세에 없던 일이었다. 그가 평양 감영에서 계속 진헌(進獻:뇌물을 바침)하자 고종은 충성으로 생각해서 영선사(領選使)로 뽑아 천진(天津)으로 보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민영휘)이 남정철의 자리를 대신한 후 작은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금으로 주조해서 바치자 고종은 얼굴색이 변해서 ‘남정철은 참으로 큰 도둑이었군. 관서(關西:평안도)에 금이 이렇게 많은데 그가 혼자 독차지했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총애는 쇠퇴하고 민영준은 날로 중용되었다.(
민영휘가 바친 금송아지가 평안도 백성들의 고혈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했던 고종은 민영휘를 크게 총애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집이 불타기도 했지만 고종의 신임은 식지 않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이조참의, 도승지 등으로 계속 승진시켰다.
민영휘에게도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한 번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일본이 김홍집 등의 온건개화파를 내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였다. 이때 민씨 척족들이 ‘동학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몰려 몰락하고, 민영휘도 전라도 영광군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이 무렵인 고종 31년(1894) 전 형조참의 지석영(池錫永)은 민영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신이 전국의 모든 입을 대신해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정사를 전횡하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해서는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고는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자가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민영휘)으로서……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지석영의 말대로 민영휘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의 탐학이 전국적 농민봉기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영휘는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이는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민씨 척족이 무너지자 민영휘는 유배지로 가는 대신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도주했다. 이 첫 번째 위기는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의 갑오개혁 내각을 무너뜨린 몇 달 후 특지로 징계를 면해주면서 벗어났다.
고종은 재위 38년(1901)에는 민영휘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해 왕실 업무를 관장시켰고,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기 직전인 재위 42년(1905) 3월에는 정1품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임명하고 10월에는 태극장(太極章)까지 하사했다.
그러나 민영휘에게 고종은 이(利)를 위해서 맺어진 사이일 뿐이었다. 민영휘는 왕후 민씨의 총애로 성장했지만 막상 민씨가 죽고 엄비(嚴妃)가 고종의 총애를 받자 백관을 사주해 엄비를 황후(皇后)로 책봉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한 게 그의 성향을 잘 말해준다.
은행·학교 경영 통해 이미지 쇄신 노려
1907년 10월 일본 왕세자가 방한하자 민영휘는 신사회(紳士會) 환영위원장을 맡아 재빨리 일본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민영휘를 계속 총애했다.
민영휘의 두 번째 위기는 1907년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 양위당하면서 찾아왔다. 고종이 힘을 잃자 민영휘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민영휘(閔泳徽)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백성의 재산을 탈취해서 전후에 거만(鉅萬)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들어 혹 재판소에 호소하기도 하고 혹 그의 집으로 달려가 칼을 빼어 들고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 각 신문에다가 그의 오랜 악행을 날마다 게재하자 민영휘는 이를 걱정해서 변호사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소송을 받지 말게 했다. 또 신문사에도 애걸하여 그 악행을 숨기려 했지만 신문사에서는 그가 애걸하면서 은폐하려 했다는 것까지 함께 보도하자 민영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가족을 모두 상해(上海)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빨리 일제로 말을 갈아탄 민영휘를 백성들이 이길 수는 없어서 이소사의 소송도 2심에서는 민영휘가 승리했다. 일제
민영휘는 탐관오리로 축재했지만 한일은행(훗날 東一銀行) 은행장(1915)도 역임하는 등 돈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휘문의숙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을 통한 이미지 쇄신도 꾀했다. 민영휘는 1931년 6월 80 노구로 여의도 조선비행학교를 시찰한 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 장안 상공을 비행 유람하는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1935년 12월 30일 관훈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남긴 1000만여원의 재산을 둘러싸고 소송전이 벌어졌다.
민영휘 유산 1200만원 놓고 아들끼리 법정 소송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① 민영휘 부자(2)
19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최고 부자는 농업재벌인 민영휘로서 그의 재산은 대부분 농토였다. 그만큼 일제시대 자본의 성장이 미미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민영휘의 후예들 사이에서 상속소송이 벌어져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감고당.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했다. 감고당은 원래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의 사저였다가 고종비 명성황후를 거쳐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1935년 12월 만 여든 셋에 세상을 떠난 민영휘의 인생 자체가 큰 화제가 되었다. 민영휘는 대한제국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의정부 총리대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품계를 받았다. 그럼에도 일제로부터는 1910년 10월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5만원의 은사금까지 받았다. 동학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란 비난도 받았고, 친일 김홍집 내각이 집권하자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망명했지만 다시 일본으로 말을 갈아타 자작까지 되었다.
삼천리
그의 재산은 동산과 부동산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부동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어 정확한 액수를 알기 어려웠다. 또 상해(上海)의 외국 은행과 일본에 숨겨둔 재산이 있느냐 여부도 논란거리였다. 민영휘를 총애하던 고종이 강제 양위를 당하자 그에게 재산을 빼앗겼던 백성들이 난입했기 때문에 민영휘는 상해로 도주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그가 죽자 “상해 외국 은행에 저금한 돈이 있느니 내지(內地:일본) 무슨 회사에 비밀히 투자한 돈이 있느니, 있는 풍설, 없는 풍설 자자했다”고
민영휘, 여성 편력 심해 첩이 5~6명
민영휘의 유산은 동일은행(東一銀行:옛 한일은행)을 비롯한 각종 주권(株券)이 약 100만원 정도로 추정되었고, 한 해 8만 석을 수확하는 광대한 농토가 약 1000만원 정도로 추정되었다. 민영휘가 13도를 돌아다니며 고르고 고른 옥토양전(沃土良田)이었다. 그 외에 경운정(慶雲町:현 종로구 경운동) 64번지 1600평의 사저, 가회정(嘉會町:현 종로구 가회동)의 아방궁 같은 별장, 그리고 종로를 비롯한 서울 일대에도 부동산이 즐비했다. 민영휘의 경운정 사저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 이갑(李甲)이 야반에 뛰어들어 돈을 요구해 오성(五星)학교를 지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담긴 집이었다.
동일은행(왼쪽)과 한성은행. 모두 조흥은행의 전신이다. 민영휘 부자가 농업부호에서 금융부호로 넘어가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최소 1200만원에 달하는 민영휘의 유산을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갈까. 쌀값을 기준하면 1934년 쌀 1석(160kg) 가격이 22원30전이다. 이를 현재의 10kg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1600억원을 넘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누린 민영휘였지만 적자(嫡子)만은 갖지 못한 것이 유산 분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방(大房)마마’로 불렸던 정실부인 신씨(申氏)는 자식을 낳지 못해 민형식(閔衡植)을 양자로 들였다.
황현은
그러나 이 때문에 “(민형식은) 완전히 거세를 당하여 명목만 장자로 있게 되어 그의 생활은 궁핍한 정도에 있었다(
심지어 민형식은 1931년 11월 20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까지 받았는데 이 사건은 장안의 큰 화제였다. 민형식은 구자흥(具滋興)에게 8만원을, 원산의 박홍수(朴鴻秀)에게 2만1000원을 빚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남을 돕다가 발생한 빚이라는 것이 세간의 시각이었다.
민형식 쪽엔 김병로·이인 등 항일 변호사
민형식은 당대의 명필이기도 했다.
민형식은 민영휘 사망 이듬해인 1936년 7월 16일 자작 작위를 습작하면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작위를 습작했으므로 재산 상속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었다. 민형식은 부친의 3년상이 끝난 후 민대식 등을 상대로 유산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이른바 해주마마라고 불렸던 소실 안유풍 소생의 대식·규식 형제를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유산 전부의 신탁을 해제하고 분배 정리를 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민영휘는 원래 장남 형식을 관계(官界)로 보내고, 차남 등은 재산을 관리하는 후계구도를 짰었다. 그래서 민형식은 고종 29년(1892) 문과 급제 후 부친의 후광으로 고종 39년(1902)에는 평안도 관찰사, 고종 43년(1906)에는 학부협판(學部協判) 등을 역임했다.
그럼에도 민형식은 이 재산을 민대식 형제에게 신탁한 것으로 여기고 장남 병주에게 수익금 일부를 받아오게 했는데 민대식이 그때마다 차용증서에 날인하게 하자 의심이 생겼다. 그후 재산 정리를 요구하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응하지 않기에 삼년상이 끝난 후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민대식 형제가 관리하는 재산은 자신이 신탁한 것이라는 민형식의 주장과 민영휘가 생전에 증여한 것이라는 민대식의 주장이 맞선 것이었다. 이 소송은 변호인들의 성격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민형식 쪽의 변호인들은 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신태악(辛泰嶽)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항일 변호사들이었던 반면 민대식의 변호사는 친일단체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경성지부장을 맡은 이승우(李升雨) 등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산소송은 민대식 형제에게 유리하게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민형식은 1938년 경운정 저택까지 경매에 내놔야 했지만 민규식은 1940년 동일은행 취체역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인 1947년 5월 14일
그렇게 돈의 역사도 그릇된 역사의 한 부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촌 형제, 기업·금융 함께 경영한 첫 근대적 부호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③김성수·김연수 형제
민영휘가 ‘농토 부호’라면 김성수 형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부호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적 같은 기업체 외에 학교·언론사 경영도 겸하면서 민족주의자로 비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제 군국주의가 민족개량주의마저 탄압하면서 김성수에게도 위기가 왔다.
경성방직에서 만든 태극성표 광목의 광고 포스터. 경성방직은 당시 국내 공장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중앙포토]
삼천리』 1930년 11월호의
“제1의 민영휘씨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인 양반계급에서 태어난 덕택으로 세도바람에 치부를 한 권세가요, 제2의 김성수씨는 조선의 보고인 전라도 출생으로 비록 세도는 하지 못했을망정 리식(利殖)과 경리에 눈이 밝은 호농(豪農)의 후예로 태어난 까닭에 누(累)백만의 재산을 세습한 행운아요.(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김경중(金暻中)의 4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수는 세 살 때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출계했지만 부모 품을 멀리 떠난 것은 아니어서 생가와 양가는 솟을대문이 경계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김기중·경중 형제의 부친 김요협(金堯莢)은 장남 김기중에게 1000석 농토를 주고 김경중에게는 200석 농토만을 주었다고 전하는데 경중의 재산증식 수완이 뛰어나서 1918년에는 형의 750정보보다 훨씬 많은 1300정보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두 형제 농토의 수확은 연 2만 석 이상이 되어 호남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김성수 생가,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김기중·경중 형제는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김경중은
일본 유학 후 25세에 중앙학교 인수
김성수는 만 열두 살 때 자신보다 다섯 살 위인 고정주(高鼎柱)의 딸 광석(光錫)과 혼인했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였던 고정주는 고향인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과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했다. 김성수는 여기에서 평생지기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를 만났다. 둘은 함께 일본유학 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등을 거쳐 1910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했다. 송진우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탈하자 일시 귀국했지만 김성수는 남아서 학업을 계속했다. 191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성수는 이듬해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로 중앙학교를 인수하는데 류광렬은 그 내막을 신파조로 묘사하고 있다.
“수성(守成)이 먼저인 부형이 거만(巨萬)의 대금(大金)을 던져서 불생산적(不生産的) 학교를 경영하는데 누가 즐겁게 허락하리요. 이에 김성수씨는 며칠 조르다 못해서 최후적으로 신명(身命)을 걸고 대명(待命)하였다. 빈방에 문을 첩첩(疊疊)히 닫고 며칠을 굶으며 자살할 뜻을 보였다….(
이렇게 부모 돈을 타내서 인수한 학교가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와세다대 졸업 1년 전인 1913년 양부와 생부를 모두 일본으로 초청해 와세다대를 구경시키면서 교육사업에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고도 전한다. 양부 김기중도 부안군 줄포(茁浦)에 영신학교를 설립했던 인물이므로 김성수의 교육사업 구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수는 교육사업과 ‘동아일보’라는 언론사업에도 투자했기 때문에 민영휘와 달리 사회의 세평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레 학교·언론을 경영하는 민족 기업가처럼 비쳤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굳히는 한편 경성방적 등을 통해 근대적 자본주의 경영에 나섰다. 민영휘가 소작료에 의존하는 봉건 부호로 인식된 반면 김성수가 근대적 사업가로 인식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광수는
이 글에서 이광수는 “김성수를 말하면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연상하고 경성방적주식회사를 연상하고 또 동아일보사를 연상할 것이다. 아마 해동은행(海東銀行)도 연상하고 중앙상공주식회사(中央商工株式會社)도 연상할 것이다”라고 김성수의 사업체들을 열거하면서 “이 모든 그가 관계하는 사업을 총칭하야 ‘김성수 콘체른’이라고까지 칭하는 이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점자본, 기업결합 등을 뜻하는 콘체른(Konzern)은 재벌과 비슷한 의미인데 이광수는 “김성수가 이 모든 사업에 중심인물의 지위를 가진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는 기업과 금융을 동시에 소유한 최초의 사업가였다. 1931년 자본금 300만원의 해동은행은 민영휘 소유의 동일은행(400만원)에 이어 두 번째 규모였다. 김성수의 경영스타일도 화제였다. 이광수는 앞의 글에서 김성수는 “한번 사람을 신용해서 무슨 일을 맡긴 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그에게 일임한다. 중앙고보의 인사행정은 중앙고보의 교장에게 일임하고, 경성방적은 전무 이강헌(李康賢)에게, 동아일보는 말할 것도 없이 사장 송진우의 전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 초대 주필 장덕수(張德秀) 가족에게는 8년 동안 미국 유학비를 대주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김성수의 기업경영은 그의 동생 김연수(金秊洙)와 떼어놓고선 생각하기 쉽지 않다.
동아일보 경영
사회사업은 김성수, 영리사업은 김연수 식으로 정리되었다는 투인데, 류광렬은 형제 사이의 우애에 대해서도 좋게 평가하고 있다. “내형(乃兄) 성수씨가 양가로 출계(出系)해서 전 재산을 사회사업에 소비하자 그(김연수)는 뒤로 다니며 수습에 힘쓰고 자가 재산도 대부분을 쓸어 넣되 일찍이 그 형에 대하야 원언(怨言:원망하는 말)이 없고 무슨 사업이든지 형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서서 모든 공로와 명망은 형에게 돌린다 하니 또한 미덕이라 아니 할 수 없다…김연수가 폐병으로 중태에 빠지자 김성수가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동생이 불행하면 자기 사업도 다 보는 날이라(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이광수와 함께 일제에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주창하다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불매운동을 당하기도 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한국어 신문 경영은 그 자체로 민족주의자란 인상을 주었다.
김성수 형제에게 만주국 수립은 도약의 기회였다. 소설가 박계주는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김연수는 심양(봉천)과 석가장(石家莊)에 방적회사를 세우는데, 심양의 남만(南滿)방적회사의 건설비만 800만원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성수 형제의 사업에 만주국 수립과 1937년의 중일전쟁은 큰 호재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미국 학자 카터 에커트(Eckert)는 경성방직을 일제의 보호와 지원으로 성장한 ‘일제의 아이(Offspring of Empire)’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중일전쟁은 새 시장이 열렸다는 기업경영 측면에서는 호재였지만 김성수가 이후에도 민족주의자란 이미지를 유지하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민족개량주의마저도 강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일제의 강요로 친일단체 가담과 학병 권유 연설도 해야 했다. 김연수는 친일단체 가담, 학병 권유 연설, 비행기 헌납 등으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수모를 당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줄곧 자의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대륙침략에 따른 경제적 수혜를 일부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