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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8년 7월 24일~1960년 4월 26일(사임) |
부통령 | 이시영 (1948 ~ 1951) 김성수 (1951 ~ 1952) 함태영 (1952 ~ 1956) 장면 (1956 ~ 1960) 이기붕 (1960) |
총리 | 이범석 (1948 ~ 1950) 장면 (1950 ~ 1952) 장택상 (1952) 백두진 (1952 ~ 1954) 변영태 (1954) |
전임: 초대(제-대) 후임: 윤보선(제4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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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19년 9월 11일~1925년 3월 21일(탄핵 후 면직) |
국무총리 |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이동녕 |
전임: - 후임: 박은식(제2대) | |
출생일 | 1875년 3월 26일 |
출생지 | ![]() |
사망일 | 1965년 7월 19일 (90세) 한국 시간 19시 35분 |
사망지 | ![]() |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자유당 |
종교 | 개신교(감리교) |
배우자 | 박씨(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
자녀 | 아들 이봉수, 양자 이강석, 이인수 |
서명 | ![]() |
웹사이트 | http://www.syngmanrhee.or.kr/ |
이승만(李承晩, 영어: Syng-man Rhee 승만 리[*],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조선·대한제국의 근대화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교육가·언론인·정치인이며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탄핵당하여 사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임기 중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4·19 혁명 직후 사퇴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김구 등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 1948년 5월 30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7월 24일부터 1960년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으나 3.15 부정선거로 퇴각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처음 이름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황해남도 평산군(平山郡) 출신.
목차[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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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그는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庶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2]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2]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늦게 얻은 독자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2]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에 뛰어났다 한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3] 서당 정원에 꽃을 심는 것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 한다.[3]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셀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2]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4] 그러다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하였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2] 그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4] 그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2]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2]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2]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2]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2]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2]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베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899년 1월 17일 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2]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2]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5]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생활에 그의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1903년에 저술했다. [6]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2]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이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수 있었다.[2]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1904년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1904년 8월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7]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보냈다.[5]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5]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2]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2]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2]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2]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을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8] 어렵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7]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에 못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2]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9] 뒤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8]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10]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의거에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11]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했던것이다.
두명의 한국인이 루스벨트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이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사람들은 흉도이며, 최악의 악당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듬해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을때도 이승만의 반응은 미국여론을 살펴보면서 미국여론의 악화를 걱정했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것을 두려워했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리).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다.[12]
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3]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출처 필요]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14]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2]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15]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한인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16]
감리교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 통제하로부터 독립시켰다.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2]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신립교회'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2]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7]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18]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노령(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간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2]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조선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19]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20]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 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로 개칭했다. 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젼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1919년 9월 1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위원회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임시정부 공식대표로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로 개편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망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온 김규식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삼았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하와이 및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21] 이후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22] 또한,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 이승만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활동을 하고 다녔다.
한편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23]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었고, 상하이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출처 필요]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며,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오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24]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23]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25]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5월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집정관 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개편하여 만든 것이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묵살하였으며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했다.[26]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23]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23]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7]
1932년 4월 29일, 상하이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사가 폭탄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 의사 의거에 비판하였다.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 자서전 내용中-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28]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하여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대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29]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28] 2월 8일 그는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28]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처녀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났다.[28]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28]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28]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에 도착했고, 그해 10월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28]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28]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를 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30]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28] 139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 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 부인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28]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고, 10월 8일까지 신혼기간을 보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1935년 1월 24일 부인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28]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28],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1940년 3월 김구(金九)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 6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 침략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는 큰 설득을 얻게 되었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1] 12월 9일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루즈벨트, 국무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하였다.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32] 1942년 1월 2일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과 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31]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 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를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2년 2월 27일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행사 참석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그뒤에도 계속 미국에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31]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5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하였으며,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안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이후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3년초 이승만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33]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 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정부로 발송해주었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일제 강점기시대, 1942년에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다.'는 주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었다.[34]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어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前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로 지냈던 문제안의 증언에 의하면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은 힘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 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켜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35]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임정은 한국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미국국무성의 협조를 기대한다. 임정의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미국국무성및 국방성과 교류하며 임정의 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5일 이승만의 미국내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였고, 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다시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를 찾아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월 미국육군전략사무처의 협조를 얻어낸 뒤, 임정에 이를 통보하고 임정으로부터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 1942년 12월 4일 12명의 한인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1944년 8월 2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임정를 승인해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경 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무부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셉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 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을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
1945년 5월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32]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32] 김성숙(金星淑)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은 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2] 5월 14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하여(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33]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은 스탈린과 외무부의 비신스키차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승만을 "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하기도 했다.[33] 소련군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로, "이승만이 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근거로 했다.[33]
8.15 해방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36]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37]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38]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자신이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31일 돈암장을 찾아온 박헌영과 회담하였으나,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후 숙청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공산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했고, 11월 21일 이승만도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을 발표하였다.[39] "조선일보가 왜적(倭敵)의 압박 밑에서도 민족의 개명(開明)과 국권(國權)의 회복(恢復)을 위하야 분투항전(奮鬪抗戰)한지 다년(多年)이었는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게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痛念)히 여겨온 바"라며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하여 출세(出世)됨을 우리는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 [39] 11월 26일 이승만은 '전체 국민은 총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자'며 국민에게 호소하였다.[40] 11월 30일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였다.
1945년 11월말과 12월 초 돈암장으로 재력가 20여 명을 불러모아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려는 모든 국가지도자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들의 지원을 받는다. 조선에서는 이렇나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면서 경제보국회 결성을 독려하였다.[41][42]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43]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초대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44]
1945년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을 하였다.[45]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46]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김구, 김규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946년 1월 14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45] 이승만의 미국 도미를 불허하는 미군정의 반대로 이승만의 도미는 난관에 부딪혔으나, 출국을 감행했다. 이때 국내외 우파 단체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이승만의 도미 여비가 마련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이승만을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도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1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1946년 1월 14일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47]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48] 2월 8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설립되자 이승만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48]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49]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48]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이승만과 김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50]
1946년 3월 1일 김구와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51]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52]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53]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54]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55] 그러자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 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로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55]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1천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56]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에 선출됐다.[57] 1946년 8월 3일 여운홍의 사회민주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58]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에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59]
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60][61]
이러한 그의 과감한 발언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부터 '늙은 파시스트'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62] 1946년 9월 10일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하였다.[45]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 미수를 당하였다.[45]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은 김구·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63]
1947년 1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은 3.1절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김구와 임정의 행위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하였다.[64] 1월~2월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하였다.[65]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66] 김규식.장건상.김붕준(金朋濬) 등 중도우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66]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67]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8]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1947년 4월 21일 귀국하였다.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69]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을 전개했다.[70]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격적으로 외치는 이승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하지의 지시에 의해 연금상태에 들어갔다.[71]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72] [73]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김구와 함께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전보를 보내 반탁 시위대를 격려하였다.[74][75]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74]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격려에도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76]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77]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78] 9월 21일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0월 18일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79]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는 장덕수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80]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80]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80]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81]
김구와의 우정에 금이간 후 이화장을 찾아온 비서 박용만과 대화하던 중
김구 주석이 나하고 같이 한 길을 못가게 된 것은 정말 슬픈 일이며, 내 가슴이 쓰라리다. 원통한 일이다. 김주석은 내 아우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던 내 아우야! 정말 원통한 일이야.내 가슴이 쓰라리고 아파![82]
라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흘렸다.[82] 박용만에 의하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박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더 못했다고 했다. 이날 흘린 이승만의 눈물은 김구선생과 갈라선 이승만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한국의 앞날을 걱정한 온국민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82]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유엔한위를 마중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그러나 UN위원단 단장인 인도인 메논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판을 받았다.[83]
선거 연기설이 나돌자 이승만은 3월 30일 성명을 발표, 선거 연기설을 비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성명을 발표하였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84]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7월 22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상 생략)...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며...(이하 중략)...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尹潽善)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8년 7월 21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으며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15일은 단기로 4281년 8월 15일이었다. 8월 26일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9월 30일 대통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10월 8일 미국 국무성에 미군철수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19일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으며 11월 6일 여수순천반란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12월 12일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파리 유엔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49년 1월 6일 민족청년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월 7일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1월 8일 일본에 대마도의 반환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월 9일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고, 2월 18일 유엔의 북한과 협상소식을 듣고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고, 5월 20일 일본에 대한 대일배상요구 관철을 주장하였다.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고 돌아왔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6일 남북통일방안으로 북한 괴뢰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에는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9년 1월 장면(張勉)을 한국정부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로 임명하여 미국으로 파송하였다. 1월 2일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85]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출처 필요]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86] 자신의 전기인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그해 6월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개소식에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되었다. 그 이유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등이 결정적이었는데, 이는 당시 내무차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민특위 특경대 해체에 결정적인 권한을 내린 사람은 이승만이었다.[87]
“ | 내가 특별검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중략)... 특별 검찰대는 국립경찰의 노련한 경찰관이자 반공투사인 최운하등을 체포하였는데....(중략)..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의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 |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88]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89] 그러나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90] 한편, 북한을 수립한 김일성도 역시 친일파를 등용했다는 자료가 있다.[89] 1948년 7월 초대 총리를 한민당이 아닌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을 천거하자 한민당은 집단으로 반대하여 총리서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8월 15일 이범석을 서리로 천거하자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한민당은 이범석을 인준하였다.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2년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91],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91]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92]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92]
중국측의 영해침략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92]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92]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국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부섰다.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한강 철교 폭파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93]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을 비판을 받고 있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지 못 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94]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94]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94]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등 협조할 것이라는 것이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이승만은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않은 지역'에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닌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타먹기위해 가입한 양민들이 있었다. 현재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에 관해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어 "북조선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조선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중령 찰스 스미스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튜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 벨기에 · 캐나다 · 콜롬비아 · 프랑스 · 그리스 · 에티오피아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필리핀 · 태국 · 터키 · 영국 ·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공산군(조선인민군)은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공산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이 시행 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그러나 1951년 1월 4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북조선을 도와주자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50만 중국군을 상대로 후퇴하였다. 이때 중국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에 따라 전쟁을 원점으로 돌아갔고,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이 일어났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할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한때 대통령 이승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키는 것으로 비판받았다.[95]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李淳鎔),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 [96] 한국 전쟁 중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미국은 소련 및 중국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97]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한국전쟁 휴전 후 북조선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중국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했고 이승만 역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전시 중에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의 대거 당선되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아사 사건 등으로 이승만 정부는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용공분자의 음해라는 국민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으나, 국민 방위군 아사자를 목격한 윤보선 등의 진언을 거절함으로써 윤보선 등은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국민 방위군 총책임자 김윤근을 사형시킨다. 민주국민당 의원이었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중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하고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이승만은 수도경찰청 인사참모 겸 경기도경찰청 보안과장 최연(崔燕)에게 자유당의 청년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98]최연은 이원국에게 청도관 관원 5천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게 하였으나[98]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의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한편, 부통령 김성수는 부산정치파동 사건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장문의 항의서한을 남기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다시 재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86] 실제로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86]
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주미대사 양유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안보조약을 맺으면서 왜 유독 대한민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며, 미국 행정부 내의 친일인사들은[86]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재무장되면 "한국은 일본에게 또다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노골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99]
1952년 이승만은 "여성은 이르니 가당치 않다"라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100]
1954년 3월초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직후 양유찬 대사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99] 4월과 11월 한표욱에게도 편지를 보내 "덜레스는 일본을 증강시키기로 작심한 인물", "덜레스는 일본 때문에 한국군대를 증강시키지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99] 4월 7일 미군 제315공수사단을 방문하여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195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99] 1953년 11월 중순 닉슨이 방한하자 이승만은 아시아인들은 소련과 일본의 결탁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너무 강하게 증강시키지 말 것을 주문했다.[99] 1954년 2월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주장했다.[99] 같은해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101]
54년 3월 5일 그는 국제사회에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하였고, 3월 27일에는 일본제상품의 몰수를 지시했다. 3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의 증강을 미국이 보장하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하는 한편 4월 28일 일본의 반공연맹 가입을 반대하였다. 5월 6일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석한 6.25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국제연합 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시키려하였으나 5월 12일 이승만이 맹렬히 반대하자 대한민국 재선거안을 철회했다.
그후 1954년 사사 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여 1956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엇고,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저항을 타개해 나갔다. 1954년 7월 미국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콜롬비아대학교에서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한편 미국이 일본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54년 8월 3일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하고 8월 9일에는 한일회담 재개용의를 표명하는 한편,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8월 30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정책을 경고하고, 11월 4일 일본의 한국 재침략 망상을 비난했다. 11월 14일 미 국무부가 제안한 일본의 반공동맹 참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5일 적성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언명하다.
1955년 3월 15일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대통령 암살음모자 이성재 외 6명을 검거했고, 10월 7일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관계자 김동훈 등 8명을 체포했다.
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고,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승만은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56년 3월 5일 자유당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출마 않기로 작정했다."는 유시를 내렸다.[102] 그러나 3월 6일 국민회·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102]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강권하는 집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의 집회현장을 다니면서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의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리고 3월 13일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대한노총의 정치파업이 있자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3월 10일 이승만은 외신 기자들에게 "(국민이)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말해 민의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3월 11일부터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비구승도 나섰고, 선거권이 없는 중고등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비를 맞으며 시위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우마차 조합에서 우마차 8백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하는 우의마의를 이승만한테 알렸다.[102] 우의마의 소동으로 서울 거리는 똥바다가 되었다. 3월 12일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3월 1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그를 만나 통일방안 협의하였고 일주일쯤 지난 3월 25일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했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 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103] 3월 28일 이승만은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적격이라고 말했다. 3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정부 및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이승만의 생일은 3월 26일이었다.)[102]
이승만은 후보로서 단 한번도 공식적인 정견 발표를 하지 않았다.[104] 이에 대해 서중석은 이를 유권자를 바보 취급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한 망자존대 의식의 소치였다고 보았다.[104]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익희와 조봉암을 비판했다.[104] 5월 3일 이승만은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는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렛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화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유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104]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신익희 후보가 기염을 토하자, 이승만은 그날로 바로 역전 유세 보다 훨씬 강도를 높여 두 후보를 공격했다.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이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했다.[105]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에서 갑자기 급서하였고, 이승만은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5월 22일 선거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는 당선공고를 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6월 25일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였고, 7월 8일에는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으며, 7월 26일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했다.
8월 15일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취임식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 등 부통령인 장면은 홀대하였다 한다. 8월 16일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고, 9월 1일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으며 9월 13일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으나 한국의 UN가입은 무산되었다.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대선 전부터 일본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해왔으므로 9월 30일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하는 한편 11월 4일 동해안을 시찰하였다.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7일에는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들을 예찬하며,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고,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8월 31일 방한한 UP통신의 극동 총국장인 호브라이트씨 부자를 면담하였으며 미국 오크라호마 주지사가 증정한 명예 시민증을 전달받았다.
1957년 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경무대를 찾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이승만은 스탈린식의 사고방식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했다.[106][107] 1959년에 가서야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초안을 짰다. 그러나 4.19로 3개년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월 8일에는 북조선을 비난하며 북조선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한편 계속 미국의 한일회담 압력이 들어오자 이승만은 3월 28일 일본 총리 기시(岸信介)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를 표한다. 3월 31일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용의를 표명했고, 4월 26일 멘델레스 터키 총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수여했다. 58년 5월 19일에는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를 면담하였으나 협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58년 6월 29일 AP기자의 서면질문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했고, 8월 5일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 8월 29일 아시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하고 대만에 유재흥 국군 연합참모총장을 특사로 파견했다. 9월 13일 대만과 중공의 충돌 사태(금문도-마조도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자, 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원자력 연구를 지시하여,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 일본에 대항한 국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했으며 3월 25일에는 미국에 서한을 보내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요구했다. 59년 3월 29일에는 미국 언론에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959년 4월 초부터 미국과 소련이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했고,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으며 59년 6월 25일 미국 적십자사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9월 10일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통령후보자의 표를 개표조작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부정개표를 항의하는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
1960년 4월 11일 한 낚시꾼이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부정선거반대시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했다. 시체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것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를 확대시켰다. 4월 19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된 시위인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하야할것을 권유, 설득했었다. 이에 장시간동안 설득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매카나기에게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 |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 |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권유대로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108]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자진 퇴임을 선언하였는데, 연설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1960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이어서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4월 28일, 경무대에서 가족들과 함께 자살하였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4·19 혁명은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109] 김일성은 4월 21일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109]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109]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109]
4월 26일 이승만 사퇴성명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 국제부장 박용국은 평양주재 대사들에게 브리핑했다. 브리핑에서 박용국은 "시위대가 탱크병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으며, 부통령인 이기붕의 집을 박살냈고, 전 내무장관인 최인규가 대만으로 도망갔고, 남조선 경찰들도 동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109] 이어 미국이 이승만을 남기고 그 정부만 교체하길 원했지만 이승만의 사퇴는 불가피하다[109]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110]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자신에게 오는 후원금을 거의 쓰지 않고 아꼈는데, 그는 이 돈을 모으는 이유를 귀국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인수에게 말했다. 이후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한국 시간 19시 35분에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향년 91세였다.
유해는 1965년 7월 22일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 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추모 인파는 백만명이 몰렸다고 하며[111], 한편 그의 사저인 이화장 주변에도 100만여 명의 추모인파가 몰려서 이화장의 담벼락이 무너졌다고 한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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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시신 귀국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112]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112]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된다며 반발하였다.[112]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112]
미군정기 당시의 이승만은 좌우합작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추진하지 않았으나, 1945년 11월 박헌영과의 논쟁, 공산당의 독립촉성회 결별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의지를 표현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로는 북한과의 통일관계는 승공통일, 멸공통일이라는 원칙을 제시하였고, 이 원칙에서 일보 벗어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승공통일, 멸공통일의 방법으로 무력통일을 시도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이승만은 북한을 무력으로라도 격퇴하고 통일을 달성하려는 의지를 관철하려 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좌절되었다. 6.25 전쟁 중에는 맥아더와 협력하에 만주 폭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는 맥아더가 원수직에서 해임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이 무력통일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반발은 1953년의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을과 경계를 지향하였다.[113]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출처 필요]
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대만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개석을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에는 내한한 장개석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114]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114]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114]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114]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114]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115]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116] 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116]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117]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였다.[118][119]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되 4사 5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118][119]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119]
대한민국 임시정부활동 당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썻다는 이유로 탄핵 제기를 당하게 된다. 이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 [120][121]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122]
하와이에 있는 재미교포 사회에서도 분열을 조장한 원흉이라는 비난의 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하와이 재미교포들은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이승만은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123][124] 박용만 지지세력들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은 하와이 재미교포들에게 돈을 각출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여 돈을 걷어 들였는데, 하와이 재미교민들의 돈으로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하에 귀족처럼 " 호의호식 "하며 직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에 맞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하와이 교민들은 사탕수수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고 한다.[125][126][127][128]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117]
강준만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이렇게 답했다.
“ |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129] | ” |
다음은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자료를 찾아오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시켰다는데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에 돌아와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 서정주[130]
소설가 미당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131] 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에 대한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131]
대한민국정부 수립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점과[132][133],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해방정국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필요]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부정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출처 필요]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134]
이러한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 강준만은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129]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135]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136]
원자력 개발과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을 추진한다. 그러나 원자폭탄 개발 시도 2년 만에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절반도 시공되지 못했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은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137]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안으로 고려된 인물은 신익희, 조병옥, 이시영, 장면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137] 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그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137]
1950년대 말에 있어서는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하여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기붕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던 그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박용만과 갈등하기도 했다. 박용만은 그를 하와이로 초청한 인물이기도 했다.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1919년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만나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렸다가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위임통치 의혹으로 이승만은 신채호, 신성모 등 임시정부의 무장투장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고 임정 대통령직을 사퇴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내무부총장 김구, 의정원 의장 최창식(崔昌植) 등 소수였다.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테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138]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택하자 이승만은 미국내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한편 이승만의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과 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1932년 11월에는 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본부인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 이봉수를 잃은 뒤,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강석이 사망한 뒤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이 양자 후보로 낙전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며 양자 입적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뒤 이승만의 양자는 같은 항렬의 친족의 아들 이인수를 양자로 들이게 됐다.
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열녀상(賞)을 부활시켜서 매년 열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58년 11월 5일에는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발표했다.[139]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86] 반세기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통하여 나타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교류,무역등 철저히 배격할 정도였다.[86]
미국에는 경제원조 받으면서 호의적이었으면서도 미국의 대한정책을 상당히 불신하였다. 그 일례를 들자면,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하는 내용의 편지서신을 보내기도 했다.[86]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는 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국 노선으로 갔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이승만의 과도한 친미적 행태에 대한 후대의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시도이다. 훗날 국민당 장개석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통치하게 된다.[129]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140]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140]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80][141]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80]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80]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142]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와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143]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143]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143]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과 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임영신을 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미극동 사령관 크락크 장군의 이승만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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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나는 '아시아의 별' 이승만 대통령" |
金泌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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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RV-z9tPsCNw&feature=related
이승만初代 大統領사진모음
이 화장은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내외가 1947년부터 경무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가옥이다. 낙산공원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평소 육중한 철제대문이 닫혀 있지만 관람을 예약한 사람이 전화(02-762-3171)를 하면 문을 열어 준다.
이화장 동판
"이승만 대통령은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매우 능수능란했다. 특히 워싱턴에서 날아온 전문가들과 우리 사령부에 있는 전문가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데 있어 능숙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또 주한 미 대사관과 미군 사이의 대립도 교묘히 유발시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6.25 남침을 당하여 死活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도 李承晩 대통령은 동해의 한 가운데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어업자원을 보호하고 獨島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다.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선박에 총격을 해가면서까지 나포했다. 침범한 중공선박과 교전하기도 했다. 독도와 평화선은 피로써 지켜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8VqQ9UfAp-0 이승만의 생애 (동영상)
이승만初代 大統領사진모음 정원에 모셔진 초대 이승만 대통령님의 동상 이화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위치한 건축물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된 권영일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이 집을 사서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이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의 구조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던 본관, 내각을 구상하고 조각(組閣)을 발표했다는 조각당, 1985년 이화장의 효과적인 보존관리와 유족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생활관이 있다. 본관은 1988년부터 역사자료 및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평소 사용하던 가구 및 유품을 전시해 개방하고 있다. 이 화장은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내외가 1947년부터 경무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가옥이다. 낙산공원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평소 육중한 철제대문이 닫혀 있지만 관람을 예약한 사람이 전화(02-762-3171)를 하면 문을 열어 준다. 이화장의 육중한 철문 이화장 동판 뜰에는 이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다. 좌측의 본관(전시관)으로 들어선다. 건물에는 남북통일(南北統一),경천애인(敬天愛人), 민족정기(民族精氣), 안빈낙업(安貧樂業) 등의 친필휘호가 부착되어 있다 정원의 이 대통령 동상 이 대통령 친필휘호(남북통일, 경천애인) 기념관 외벽의 사진 전시모습 오스트리아 출신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체구는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의 소지품 중 핸드백은 모서리가 닳도록 사용했고, 몽당연필은 붓대를 끼워 썼다. 특히 양산을 30년 동안 사용할 정도로 늘 검소해 일반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였지만 국모로서 참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와이교민들은 1934년 결혼 당시 이승만이 외국인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영부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소녀시절의 프란체스카(1916년 모습) 프란체스카 비망록
헤진 핸드백 각종 장신구와 악세사리 책상에는 골동품 같은 타자기가 한 대 놓여져 있다 이 대통령 서재와 낡은 타자기 이 대통령 비망록 침 실 동상이 있는 곳의 언덕에는 조각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조그만 한옥이 있다 조각당 이 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미군정 종료후 대통령이 되었으며 6.25전쟁을 치르며 잿더미로 변한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제2차대전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의 우호협력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미방위를 튼튼히 하는등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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