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司空公)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시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 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司空)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 분이 바로 경주 김씨이다.”
그러나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 이씨(陜川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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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이씨 세보와 가승(家乘).
이상으로 볼 때, 전주 이씨가 중국에서 왔는지 또는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기록이 애매모호하여 단언할 수 없으며,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 이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이 된 후에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22대조이며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의 묘를 찾았다. 전주의 건지산(100.5m) 기슭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시조 묘를 찾기 위한 노력은 역대 왕들도 계속했다. 특히 영조대(英祖代)에는 땅을 파고 묘역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그 실상을 얻지 못하여 중단되었다. 다만 근방의 민묘를 철거케 하고, 감독관을 두어 건지산 일대에 푯말을 박고 사냥과 땔감 채취를 금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조선 말엽인 1899년 어느 날 우연히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의 갈퀴에 이상한 돌 하나가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예사 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무꾼은 그 자리에 표시를 해놓고 그 길로 현감에게 가지고 가서 아뢰었다. 현감이 보니 이것은 왕실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전주 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묘지석(墓誌石)이었다.
현감은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시조 묘를 애타게 찾던 왕실은 기뻤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정확한 묘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석이 발견된 능선 주변 남북 3520척의 경내의 다른 묘를 모두 없애고 단(壇)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주변 어디에는 틀림없이 시조 묘가 있으므로 경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시조 묘를 후손이나 타인들이 밟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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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 전북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에 조성한 조경단(肇慶壇ㆍ지방기념물 제3호).
이에 대한 ‘고종실록’을 살펴보면 광무 3년(1899년) 1월25일,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肇慶壇ㆍ전북기념물 제3호)이라 부르고 수봉관(守奉官) 2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은 내가 직접 써서 내려보낼 것이니 뒷면의 글은 전 대학사(大學士)가 지어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7월11일, 고종은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조경묘(肇慶廟)와 묘지인 조경단(肇慶壇),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의 관리를 맡을 제조(提調)는 해당 도(道)의 관찰사로 겸임시킨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해마다 한 차례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높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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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조경단(肇慶壇)에서 발견된 ‘天寶十三載 九尺下’라고 새겨진 지석(誌石).
조경단(肇慶壇)에서 발견된 앞면에 ‘天寶十三載 九尺下’라고 새겨진 지석(誌石)은 전북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이 지석이 정말로 시조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의 장례 때 묻었다면 그가 사망한 해는 ‘천보(天寶) 13년’이다. ‘천보(天寶)’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의 연호로 742∼755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천보(天寶) 13년’은 754년이요, 신라 경덕왕(景德王) 13년이다.
그 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ㆍ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陽茂)는 18세에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 안사(安社)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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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의 묘로 추정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濬慶墓). (下)이양무(李陽茂)의 부인 이씨의 묘로 추정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 영경묘(永慶墓).
목조(穆祖) 안사(安社)는 전주의 호족(豪族)으로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주(知州ㆍ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ㆍ山城防護別監의 약칭)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 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山城別監)이었다. 이에 고종 40년(1253년) 경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海路)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 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三陟)과 덕원(德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다. 고려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병마(義州兵馬)에 임명하고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의주(宜州)에서 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쌍성(雙城ㆍ지금의 永興)에 원(元)의 침략군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1254년 산길(散吉)은 이 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안사(安社)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 의주(宜州)에서 난징(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ㆍ지방관)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안사(安社)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해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다.
그 뒤 1258년에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해 싸우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이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고,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총관(趙暉),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결국 안사(安社)는 쌍성(雙城)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趙暉)ㆍ탁청(卓靑)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오동(斡東)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세력 기반을 아들 행리(行里)에게 넘겼다.
목조(穆祖) 안사(安社)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행리(行里ㆍ성계의 증조부)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뵈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익조(翼祖) 행리(行里)가 부인 최씨(崔氏)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도조(度祖) 춘(椿ㆍ성계의 조부)도 때때로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의 벼슬을 했다.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雙城ㆍ영흥)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고려 충숙왕 2년(1315년)에 출생한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彊)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雙城)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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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에 자리한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의 장남 안소공(安昭公) 이양우(李良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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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에 자리한 이원계(李元桂)의 차남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의 묘.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장남 원계(元桂ㆍ1330~1388)가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우왕(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수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환조(桓祖)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義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 성계(成桂)는 영흥(永興) 태생으로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倭寇)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러 이때부터 고려말 중앙정권의 중추에 등장하게 되었다.
1392년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이성계(李成桂)는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22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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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 갈대가 600년 동안 묘 위를 덮고 있는 태조 이성계의 묘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健元陵).
고조(高祖)까지 추존하여 대왕(大王)으로 높임으로써, 시조(始祖)로부터 17세 장군공 양무(陽茂)까지는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穆祖)부터 순종황제까지의 왕통계(王統系)는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고 하고, 목조(穆祖) 5왕자로부터 역대왕자(대군과 군)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고 한다.
본관(本貫)의 유래는 시조(始祖) 한(翰)의 조경단(肇慶檀)과 경기전(慶基殿)이 전주(全州)에 있고, 시조로부터 18世인 목조(穆祖)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전주의 호족(豪族)으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완산(完山) 또는 전주(全州)로 하게 되었다.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05파로서 거의가 왕자대군(王子大君ㆍ적자)과 왕자군(王子君ㆍ서자)을 파조(派祖)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安社) 이후 이태조(李太祖)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派祖)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ㆍ18世) 이전의 분파(分派)로는 시조 한(翰)의 14대손인 단신(端信ㆍ宮進의 차남)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琚ㆍ勇夫의 차남)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ㆍ楊茂의 3남)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安社)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翰)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安社) 이후 이태조(李太祖) 이전의 분파(分派)로는 안사(安社)의 아들인 안천(安川)ㆍ안원(安原)ㆍ안풍(安豐)ㆍ안창(安昌)ㆍ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行里)의 아들인 함녕(咸寧)ㆍ함창(咸昌)ㆍ함원(咸原)ㆍ함천(咸川)ㆍ함릉(咸陵)ㆍ함양(咸陽)ㆍ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椿)의 아들인 완창(完昌)ㆍ완원(完原)ㆍ완천(完川)ㆍ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子春)의 아들이자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군파(義安君派) 등 도합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太祖)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파(25대군ㆍ74군)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ㆍ미혼으로 죽음)이나 무후(無後ㆍ후사가 없음)의 대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인 왕족(王族ㆍ宗親)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ㆍ왕비ㆍ왕세자비의 동성친(同姓親ㆍ외척)과 이성친(異姓親)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ㆍ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간의 다툼은 조선 500년을 통해 거의 끊일 사이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전주 이씨는 그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내지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어 왔다.
전주 이씨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名家)는 밀성군파(密城君派ㆍ세종의 아들 침)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ㆍ정종의 아들 후생)가 부자 대제학(大提學)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政丞)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ㆍ세종의 5자 여),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ㆍ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ㆍ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ㆍ태종의 2자 보)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ㆍ정종의 아들 선생)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ㆍ선조의 생부 초)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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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제3대 태종(太宗)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의 묘소.
오늘날 전주 이씨의 후예는 260만 명(2007년 통계)을 넘지만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ㆍ덕천군파(德泉君派)ㆍ밀성군파(密城君派)ㆍ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태조(太祖)가 “우리 가문의 백이숙제(伯夷淑齊)”라 칭했던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고려 말 우왕(禑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명(明)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였다.
▲ (上)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자리한 이성계의 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의 묘. 세종의 4남으로 무안대군((撫安大君)의 양자로 들어간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묘.
제1차 왕자의 난 때 조준 등에게 살해된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세종의 명을 받아 양자(養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溥)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종실(宗實)의 현자(賢者)’로 불리웠고, 20세에 요절했으나 그 이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계감(戒鑑)을 편수했으며, 효경(孝經)ㆍ소학(小學)ㆍ사서삼경(四書三經)ㆍ음율(音律)ㆍ산수(算數) 등에 모두 뛰어났었다.
부(溥)의 증손으로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역임했던 수한(守漢)의 아들 의건(義健)은 명종(明宗) 때 당시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절(節)과 학(學)으로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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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정공(忠貞公) 이후원(李厚源)의 영정과 간찰.
군수(郡守) 욱(郁)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원(厚源ㆍ1598∼1660)은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로 1623년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으며,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출전했다. 163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지평ㆍ문학을 거쳐 장령이 되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진행되고 세자(世子)의 인질문제로 침통해 있는 인조(仁祖) 임금에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 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1639년 승지에 이어 여러 관직을 지낸 후 효종 1년( 1650년)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에 앞장섰으며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655년 예조판서로 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하여 강화를 방어하게 했다. 1657년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송준길(宋浚吉)을 병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을 이조판서로 발탁하는 등 인재등용에 힘썼다. 평생을 의롭게 생활하여 인간저울이란 뜻인 “의형(義衡)”으로 불리웠고, 특히 악신 김자점(金自點)의 축출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후원(厚源)은 만년에 광주(廣州) 선영 곁에 집을 짓고 그 집이름을 오재(五齋)라 했다. 광주(廣州) 수곡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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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필경재 뒤)에 자리한 혜정공(惠定公) 이유(李濡)의 묘와 영정 및 간찰.
유(濡ㆍ1645∼1721)는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현종 9년(1668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헌납 (獻納)ㆍ정언ㆍ지평ㆍ응교(應敎) 등을 지냈고, 숙종 6년(1680년) 서인이 재집권함에 따라 승지로 발탁되었다. 1683년 왕대비(王大妃)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뒤 경상도 관찰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전직되었으나 갑술옥사(甲戌獄事)로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고, 1702년 병조판서로 특별히 임명되었다. 1704년 우의정이 되어 백골징포(白骨徵布)의 폐(弊)를 시정하고 이어 좌의정ㆍ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도성방어의 강화를 위하여 북한산성의 수축을 완료하였다. 171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조 2년(1726년) 경종의 묘정(廟庭)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혜정(惠定).
정종(定宗)의 인맥으로는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의 후손들이 명맥(名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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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에 자리한 문헌공(文憲公) 이양원(李陽元)의 묘와 유묵.
선성군 무생(茂生)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ㆍ1526∼1592)은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ㆍ남파(南坡)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10년(155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저작을 거쳐 1563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해에 종계번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가서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은 공으로 광국3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평안도 관찰사ㆍ형조판서ㆍ대제학 등을 거쳐 선조 24년(1591년) 우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해유치(蟹踰峙)에서 적군을 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으며, 의주(義州)에 피란 중이던 선조(宣祖)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 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
양원(陽元)의 아들 시경(蓍慶)은 임진왜란에서 순절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원수를 갚는다고 아버지 영전에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전하여 육신으로 적을 격살하고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도 못 거두고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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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정공(忠貞公) 이홍주(李弘胄)의 간찰.
군수(郡守)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胄ㆍ1562∼1638)는 자는 백윤(伯胤), 호는 이천(梨川)으로 선조 27년(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거쳐 예조ㆍ병조ㆍ이조의 좌랑을 지냈다. 광해군 4년(1612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갔으며, 1618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619년 사은사로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1621년 함경도 관찰사ㆍ예조참판을 거쳐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팔도 도원수가 되어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호태감접반사(胡太監接伴使)ㆍ대사헌ㆍ도승지ㆍ병조판서 등을 지냈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636년 우의정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진에 왕래하며 화의를 교섭했으나 끝까지 항복은 반대하였으며, 1637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義政)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 초막뿐이었고 한 뙈기 공원에는 대(竹)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 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시호는 충정(忠貞).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의 후손으로 수창부정(壽昌副正) 칭(稱)의 아들인 헌국(憲國ㆍ1525∼1602)은 자는 흠재(欽哉), 호는 유곡(柳谷)으로 명종 6년(1551년) 별시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사간원 사간 등을 지내고 선조 8년(1575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57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처리에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판서로서 세자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좌참찬으로 있으면서 토적복수군(討敵復讐軍)을 모집, 활약하였다.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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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자리한 이효백(李孝伯)의 묘와 묘지석 탁본(경기도박물관 소장).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복(李復)ㆍ이형(李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 잘 쏘는 “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뛰어난 지감(知鑑)으로도 유명했다. ‘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道論里)에 있는데 그 터는 효백(孝伯)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으로, 그는 항상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반드시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어느날 활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현손 중호(仲虎ㆍ1512~1554)는 자는 풍후(風后), 호는 이소재(履素齋)로 종친 고양부정(高陽副正) 억손(億孫)의 서자이다. 어려서부터 의지와 기개가 정예하여 모든 일에 용감했고 통하지 못한 글과 숙달하지 못한 일이 없었다. 또 문장에 솜씨가 있었으므로 김안국(金安國)이 보고서 기특히 여겼었다. 일찍이 수양(修養)의 방술을 몹시 좋아했었는데 자신만을 아끼고 너무 좁으니 도(道)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고서, 이학(異學)을 모두 버리고 육경(六經)에서 도를 찾아 독실히 행하며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록해 놓았다. 상(喪)ㆍ장(葬)ㆍ제사의 예를 모두 예문에 맞게 하고자 하였으며, “효자는 종신토록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기일(忌日)에는 검은 모자와 흰 띠 차림을 하고 지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조석거리가 넉넉하지 못하여도 항상 태연하였으며, 간관(諫官)이 극력 추천하여 6품의 녹을 주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었는데 이 해에 죽으니 나이 43세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5대손인 직언(直彦ㆍ1545∼1628)은 초명은 시언(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으로 부호군 형(泂)의 아들이다. 선조 6년(1573년) 사마시를 거쳐, 157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ㆍ호조좌랑(戶曹佐郞)ㆍ공조정랑(工曹正郞)ㆍ지평(持平)ㆍ사성(司成)ㆍ영변판관(寧邊判官) 등을 역임하고, 평산부사로 나갔다가 선조 22년(1589년)에 사임하였다. 그뒤 교리ㆍ상의원정(尙衣院正)ㆍ태복사정(太僕寺正)을 지내고 강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뒤에 장령(掌令)ㆍ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에 피난가 있자 도보로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국가회복의 방책을 조목조목 진언하였다. 이어 사예(司藝)ㆍ헌납(獻納)ㆍ장령(掌令) 등을 거쳐, 해서(海西)에 나가 군량을 조달하고 돌아와 사간(司諫)이 되었다.
1593년 경상도에 진휼어사(賑恤御史)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돌아와 ‘시무팔조(時務八條)’를 올려 강화를 배척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정철(鄭澈)의 논죄를 추론(追論)하는 의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파직되었다가 1596년 해주목사에 기용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1601년 승지가 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광해군 1년(1609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ㆍ광해군의 형)의 옥사로 사임하였다. 1612년 개성부유수로 있다가 곧 사퇴한 후 광해군 5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우찬성(友贊成)ㆍ판중추부사ㆍ판돈녕부사로 임금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성품이 매우 청백하였으며, 시호는 정간(貞簡).
태종의 넷째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난 성령대군(誠寧大君) 종(種)의 후손에서는 ‘지봉유설(芝峰類說)’ 등 수십 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던 지봉(芝峰) 수광(睟光)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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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맨위가 문간공(文簡公) 이수광(李睟光)의 묘, 그 아래가 아버지인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의 묘, 제일 앞쪽이 아들 정숙공(貞肅公) 이성구(李聖求)의 묘. (下)경기도 양평군 장흥면 삼하리에 자리한 이수광(李睟光)의 묘.
수광(睟光ㆍ1563∼1628)은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으로 태종의 6세손인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선조 15년(1582년) 진사가 되고 1585년 별시문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했다가 패전하여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하고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 뒤 선조와 광해군ㆍ인조의 3대에 걸쳐 이조ㆍ병조ㆍ공조 등의 판서와 대제학ㆍ대사헌 등을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종하고 돌아와 12조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무책을 논하였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다시 강화(江華)에 호종하였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을 치르고 광해군 때부터 인조에 걸쳐 정치적 갈등과 어지러운 정국을 겪으면서도 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관, 양식 있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명(明)나라를 수차례 방문하여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을 가지고 들어와 광해군 6년(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한국에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등 실학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순천(順天)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수광(睟光)의 아들 성구(聖求ㆍ1584∼1644)는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ㆍ동사(東沙)로 선조 41년(1608년) 별시문과에 급제, 전적ㆍ감찰을 거쳐 형조좌랑ㆍ교리 등을 지냈다. 광해군 5년(1613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의 문제로 모함을 받자 이를 항변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14년 복직되었고, 1616년 영평판관(永平判官)으로서 포천(抱川)을 다스릴 때 그곳에서 이항복이 죽자 향민들이 서원을 세워 모셨는데 이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대사간ㆍ전라감사 등을 거쳐 도승지ㆍ경기감사ㆍ병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인조 12년(163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고, 1637년 왕세자가 볼모로 잡혀갈 때 수행하였다. 164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무고로 사직, 곧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이때 이계의 청(淸)나라에 대한 기밀누설사건을 논하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계의 온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양화강(楊花江)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시호는 정숙(貞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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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교지와 영정 및1691년 증손인 이상현이 편집ㆍ간행한 오리집(梧里集).
익녕군(益寧君) 치(侈)의 후손인 원익(元翼ㆍ1547∼1634)은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로 명종 19년(1564년) 사마시에 합격, 선조 2년(156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ㆍ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등을 지냈다. 1573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ㆍ예조ㆍ형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형조정랑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사간이 되었다. 1583년 우부승지로서 박근원(朴謹元)의 죄에 연루, 파직되어 5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1587년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 군병방수제도(軍兵防守制度)를 개혁하였고, 1년에 3개월 복무를 2개월로 단축시켜 이를 법제화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난길을 선도하였고, 1593년 평안도관찰사ㆍ순찰사를 겸하다가 1595년 우의정ㆍ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등을 겸하고 1598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7년(1615년)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에 풀려났으며,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公州)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이어 훈련도감도제조를 지내고 치사(致仕)하였다. 연로(年老)해서 퇴임을 청하니 인조(仁祖)는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였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 하여 그의 검소한 덕을 표하며, “평생의 검소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 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의 현황을 물었다.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정승 40년에 초가 두어칸 뿐이더냐” 하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여주(驪州)의 기천서원(沂川書院), 시흥(始興)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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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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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의 6대손인 동고(東皐) 이수록(李綏祿)의 유묵.
세종(世宗)의 아들 18형제 중 가장 명맥(名脈)을 이룬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5대손 수록(綏祿ㆍ1564∼1620)은 자는 수지(綏之), 호는 동고(東皐)로 극강(克綱)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년)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ㆍ정언ㆍ문학ㆍ수찬 등을 거쳐 1602년 서북면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했다. 이어 교리ㆍ응교를 거쳐 이듬해 대동도찰방(大同都察訪)의 외직으로 나갔다가 내자시정ㆍ상주목사를 지냈으며, 광해군 때 봉상시정ㆍ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광해군 9년(1617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했으며, 인목대비 폐비론이 대두되자 사직하고 고향 양근(楊根)으로 내려가 이원익(李元翼)ㆍ정엽(鄭曄)과 교유했다. 뒤에 여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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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에 자리한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與)의 묘.
수록(綏祿)의 아들 경여(敬與ㆍ1585∼1657)는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으로 광해군 1년(1609년) 증광문과에 급제,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심해지자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수찬(副修撰)에 기용되었으며, 163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 겸 대사성으로서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청(淸)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귀국,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런 중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귀국,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ㆍ소현세자빈)에 대한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나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효종 6년(1655) 영의정에 올라 궤장(廓杖)을 하사받고 다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정(文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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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에 자리한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묘.
경여(敬輿)의 아들 민서(敏敍ㆍ1633~1688)는 자는 이중(彝中), 호는 서하(西河)로 도정(都正) 후여(厚輿)에게 입양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김수항(金壽恒)ㆍ이단하(李端夏)ㆍ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했다. 효종 3년(165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의 기수로서 활약하며 검열ㆍ정언ㆍ지평 등을 역임했다. 현종 초 남인 허적(許積)을 탄핵한 까닭으로 병조좌랑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복귀하여 나주목사ㆍ이조참의ㆍ호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남인이 2차 예송(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 3년(1677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중앙 정계로 복귀해 승지ㆍ대사간ㆍ대제학ㆍ이조판서ㆍ우참찬 등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했던 효종ㆍ현종ㆍ숙종의 3대에 걸친 그의 생애는 이 시기에 일반적이던 유배 등의 정치적 탄압을 받지 않아 평탄했으나, 송시열이 주도한 서인의 정치이념을 일관되게 구현하고자 했다. 한편 양란을 거치며 심각해진 사회적ㆍ경제적 위기를 균역법과 대동법의 실시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이의 실현을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문장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으며, 나주 서하사(西河祠)와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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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공(文靖公) 이관명(李觀命)의 간찰.
민서(敏敍)의 아들 관명(觀命ㆍ1661∼1733)은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으로 슥종 13년(1687년) 사마시에 합격, 세마(洗馬)가 되었고 공조정랑ㆍ함열현감을 지냈다. 1698년 알성문과에 급제, 교리ㆍ승지ㆍ이조정랑ㆍ사인 등을 지냈고 오랫동안 홍문관(弘文官)에 재직했다. 예조참판ㆍ이조참판을 거쳐 1718년 사은부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예조판서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경종 1년(1721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아우 건명(健命)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극형을 받자 연좌되어 덕천(德川)으로 유배되어 관노(官奴)살이를 하면서 패랭이(平凉子)를 쓰고, 새벽 일찍 관가의 마당을 쓸어 놓고 군수가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령(待令)하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영조 1년(1725년) 풀려나와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흥덕(興德) 동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
관명(觀命)의 아들 휘지(徽之ㆍ1715∼1785)는 자는 미경(美卿), 호는 노포(老圃)로 영조 17년(1741년)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목사ㆍ유수를 지냈으며, 영조 42년(1766년) 문과에 급제, 곧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한 뒤 청(淸)나라에 다녀와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 되었다. 정조 4년(1780년) 평안도 관찰사에서 우의정에 승진하였으며, 1781년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여 ‘영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1784년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헌(文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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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영정과 간찰.
관명(觀命)의 아우 건명(健命ㆍ1663∼1722)은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로 숙종 10년(1684년) 진사시에 합격, 1686년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ㆍ응교ㆍ사간 등을 지냈다. 1698년 서장관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와 여러 요직을 지낸 뒤 1718년 우의정, 1720년 좌의정에 올랐다. 경종 1년(1721년) 노론의 영수로 연잉군(英祖)의 책봉을 주청하고 책봉주청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나, 경종(景宗)이 병석에 누어 후사(後嗣)를 정하는데, 아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자 세자(世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무고를 받아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를 덕산(德山)에 묻고 자결했으며, 영조 1년(1725년) 노론정권하에서 신원되어 시호가 내려졌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에 능했다. 과천(果川) 사충서원, 나주(羅州) 서하사, 흥덕(興德) 동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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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영정과 유묵.
건명(健命)의 사촌 이명(頤命ㆍ1658∼1722)은 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로 영의정 경여(敬輿)의 손자이다. 숙종 6년(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ㆍ박사를 지내고 1686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으면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영해(寧海)로 귀양가고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하자 호조참의로 조정에 복귀,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지냈다. 1698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형 사명(師命)을 변호하다가 공주(公州)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풀려나와 예조판서ㆍ대사헌 등을 거쳐 1708년 좌의정 등을 지냈다. 1720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淸)나라에 가서 천주교와 천문ㆍ역산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소개하였다. 1721년 세제(世弟ㆍ英祖)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실패하여 남해(南海)로 유배되어 있던 중 무고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영조 1년(1725년) 관작이 복구되고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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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이 요동에서 북경지방까지 군사형세도를 10첩 병풍에 그린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ㆍ보물 제1542호). 클릭!
세종의 제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의 아들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던 준(浚ㆍ?~1479)은 문무 겸비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세조 13년(1467년)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가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 14년(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때 공을 세워 익대공신 1등에 봉해졌으나, 1470년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찬성(贊成) 한계미(韓繼美)가 귀성군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밀고하여 경상도 영해(寧海)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또한 귀성군을 추대코자 하던 최세호(崔世鎬)와 권맹희(權孟禧) 등도 살해되었다. 숙종 때 신원(伸寃)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
충작(忠綽ㆍ1521~1577)은 자는 군정(君貞), 호는 졸암(拙庵)ㆍ낙빈(洛濱)으로 명종 14년(155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저작(著作)에 재직 중 효행으로 형조좌랑으로 특진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때 중 보우(普雨)의 죄상(罪狀)을 논핵(論劾)하였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소윤파(小尹派)인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 등 간신(奸臣)들의 보익공신(保翼功臣)의 호(號)를 삭탈하라는 청(請)을 올렸다.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하였으며, 일을 논하는 데 준엄하고 정직하였으므로 왕이 그의 행실을 가상하게 여겨 인사 추천할 때마다 끝자리에 있더라도 반드시 등용하였다.
시문에 능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피눈물을 흘리다가 마침내 실명(失明)하기에 이르렀다. 눈이 멀었는데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먼 거리의 묘 참배를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자 조정에서는 장님승지는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 “신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사랑한다. 보고서 못된 일을 하는 눈보다 아예 못보는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치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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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영정과 유묵.
광사(匡師ㆍ1705∼1777)는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ㆍ수북(壽北)으로 영조 31년(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卦書事件)에 연좌되어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가 진도(珍島)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윤순(尹淳)에게 글씨를 배워 진ㆍ초ㆍ예ㆍ전서에 모두 능했고,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했다. 그림도 산수ㆍ인물ㆍ초충(草蟲)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났다. 인물화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을 보이며, 산수화는 간결하고 담백한 남종화(南宗畵)의 특징을 나타낸다.
광사(匡師)의 아들 긍익(肯翊ㆍ1736∼1806)은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ㆍ연려실(燃藜室)로 그의 집안은 소론에 속하여 경종 때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와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크게 화를 입었고, 아버지가 나주괘서(羅州卦書)사건에 연루, 유배되어 죽은 후 벼슬을 하지 못하고 평생 야인으로 학문에만 정진했다.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최립 등 서인계열학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가학(家學)인 양명학에 학문의 기초를 두고 정제두(鄭齊斗)의 학문을 본으로 삼아 배웠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저작도 많으나 계속되는 귀양살이로 대부분 유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역사서적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있다. 실학을 제창하고 연구한 고증학파 학자로 조선근세사 연구에 선구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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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 영정. (右)문헌공(文憲公) 이휘지(李徽之) 영정.
서구(書九ㆍ1754∼1825)는 자는 낙서(洛瑞), 호는 강산(薑山)으로 영조 45년(1769년)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문장을 배우고, 1774년 정시(庭試)에서 뽑혀 섭기주(攝記注)에 임명되었다. 그 뒤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한성부 판윤ㆍ평안도 관찰사ㆍ형조판서ㆍ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대한 조예가 깊고 글씨에 능하였다. 중국을 다녀온 적은 없으나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 등 실학파 문사들과 교제하며 학문과 문학을 익히고 시국을 논하였으므로 현실문제와 조선의 역사 및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이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4가시인 혹은 실학4대가(實學四大家)라 불린다. 문집으로는 ‘척재집’과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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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공(文翼公) 이지연(李止淵)의 간찰.
지연(止淵ㆍ1777∼1841)은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곡(希谷)으로 순조 6년(1806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1808년 병조좌랑에 이어 지평을 지냈고, 1823년 공시당상(貢市堂上)ㆍ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ㆍ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ㆍ예조판서ㆍ광주유수 등을 거쳐 1834년 호조판서가 되어 공인(貢人)의 방납폐단을 바로잡았다. 헌종 3년(1837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栽官)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839년에는 사교(邪敎)의 금지를 주장하여 프랑스 신부를 비롯, 많은 가톨릭신자가 학살당한 기해사옥 (己亥邪獄)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1840년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희준(李羲準) 등에 의해 정권을 전횡했다는 탄핵을 받아 명천(明川)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
헌구(憲球ㆍ1784∼1858)는 자는 치서(稚瑞), 호는 국헌(菊軒)으로 순조 14년(1814년) 진사가 되었고, 18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82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ㆍ이조참의 등을 거쳐 헌종 2년(1836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거쳐 1842년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44년 대사헌으로 김유근ㆍ김홍근(金弘根)의 추죄(追罪)를 주장하다가 덕원(德源)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동지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왔고, 이조판서 등을 거쳐 철종 3년(1852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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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자리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묘.
하응(昰應ㆍ1820~1898)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로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헌종 9년(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고종 19년(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천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1886년 원세개(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으며, 순종 1년(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그 외 전주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완원군(完原君) 수(燧ㆍ성종의 다섯째 아들)의 증손 몽설(夢設)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保寧)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성(城)과 원은 학명을 떨쳤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 “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節義)를 세워 대제학(大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손자 조(肇)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근대 인물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을 지낸 승만(承晩)이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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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자주들러 몇번은 읽어봐야 이해가 될것 간네요.
어렴풋 했던 계보를 정리해 안다 함이 후손으로서의 도리일 것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