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017]澗松(간송)先生시 晉陽途中詠野梅(진양도중영야매)
원문=澗松先生文集卷之二 / 詩○七言絶句
晉陽途中詠野梅 辛亥春 신해년(1611, 광해군3) 봄 진양 가는 길에 들판의 매화를 노래하다
澗松(간송) 趙任道(조임도)
野外梅花草裏開。야외매화초리개 細風吹送暗香來。세풍취송암향래 世人不貴和羹實。세인불귀화갱실 誰肯移渠近地栽。수긍이거근지재
들판의 매화가 풀숲에서 피어나니 산들바람이 그윽한 향기를 날려 보내네 세상 사람들은 국에 간맞추는 열매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누가 그 나무를 옮겨 가까이 심으려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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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2
작가-趙任道=(1585~1664) 자 : 덕용(德勇) 호 : 간송당(澗松堂) 본관은 함안(咸安). 조식(趙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병절교위(秉節校尉) 유상린(柳祥麟)의 딸이다. 김중청(金中淸)·고응척(高應陟)·장현광(張顯光) 등을 사사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 『관규쇄록(管窺鎖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거상대절(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조임도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취정록(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김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대소헌유사(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경종 원년(1721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송정서원(松汀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澗松集)』 7권 4책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