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김순희 경기도)

[박서현]

약력 : 2003년 문예시대 시로 등단.

       한국문협, 경남문협, 부산불교문협, 밀양문협, 김포문협 회원

       시집 「차 익는 소리 들리는가」 「차 한잔 우려두고」

물처럼 바람처럼

            - 조선왕릉 투어를 시작하며 -  

                                                     김 순 희

 회갑을 보낸 다음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해외여행도 이미 여러 번 했던 터라 이젠 관광이미지를 버리고, 국내에서 올망졸망 테마여행을 하면서 우리 것에 맘껏 빠져보리라 마음먹었었다.

 내가 살아온 부산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부산 갈맷길과 경남 인근의 둘레길을 마스터하고, 수도권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우리 부부의 생각은 더 폭넓게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직까지 우리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더 가까이, 더 깊이 있는 경험을 하고자 조선왕조 투어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5대 왕궁을 한 번씩 돌고, 다시 해설사와 함께 한 번 더 시간을 가졌다. 학창시절에 배우고, 조선왕조실록도 여러 번 읽곤 했지만, 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면서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곧이어 서울성곽길을 8회에 걸쳐 걷고 또 걷고 하면서, 조선왕조가 자리 잡았던 서울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하지 않는가, 난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만큼 알아지기도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또 살아온 연륜도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나이 먹는 것도 꽤 괜찮다는 생각도 하면서...

 모두들 늦은 나이에 생활의 터전을 바꾸기 쉽지 않다고들 하지만, 부산, 밀양에서만 살았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또 모르고 살았겠는가.

 이번에는 조선왕릉 투어를 하기로 했다.

 설을 보내고, 아직은 추위가 한창이었지만 털옷과 목도리로 완전무장을 하고, 깨끗한 물 끓여 마호병에 담고 헌다잔과 우전 한 봉지를 챙겨서 태조릉(건원릉)이 있는 동구릉으로 향했다. 다시 가슴이 뛰었다.

 물론 왕릉투어에 앞서 인터넷을 뒤져 조선왕계도, 조선왕조일람표와 그 분포지역과 왕릉 명, 역대 왕의 재위기간 등을 꼼꼼히 챙겼다.

 잎 다 떨구어 낸 떡갈나무, 오리나무 숲길을 지나면 붉은 홍살문이 기다리 듯 다가오고, 참도 끝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정자각이 정겹게 반긴다.

 그 뒤로 우아하고 웅장하고 정갈한 능이 보이고, 푸른 소나무는 변함없이 능을 기품 있게 보듬어 안고 있다.

 어느 한 시대에 한 나라를 통치하며, 만백성이 그 앞에서 엎디어 높임을 받던 왕과 왕비들.

 재위 시의 역사며 일화, 왕과 왕비로서의 삶과 인간으로의 삶 등에 대해서 앞뒤 없이 시공을 넘나들며 생각이 분주하다.

 이럴 땐 복잡하게 생각 말고 단순해지자.

 왕과 왕비가 누린 권력과 시시비비는 역사에 맡기고,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싶다. 왕과 왕비가 지켜야 하는 많은 법도와 그 무거운 짐과 고뇌에 대해서...

 왕과 왕비이기에 못한 것들, 아니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능이 잘 보이는 곳에 차석 깔고 정성스레 차 한잔 우린다.

 찻잔에 향이 피어오른다.

 오늘, 후손이 찾아 와

 정성껏 차 한잔 올립니다.

 왕과 왕비시여!

 맑은 차향 흠향하시고

 평안히 영면 하소서!

나는 조선왕릉이 있는, 김포 장릉산 언저리에 산다.

점심 후, 나른함에 하늘을 본다.

풀벌레 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들리는 가을이다.

가을은 지난 시간들을 퍼 올리는 마중물 되어, 울울창창한 숲과 멋진 오솔길이 있는, 왕릉 가는 길로 나를 데려간다.

아마 때늦은 매미소리와 풀벌레소리, 산새소리로 왕릉에도 가을이 내려앉고 있겠지.

 조선왕릉 어디에나 그 고즈넉하면서도 멋진 숲과 바람, 잘 다듬어진 오솔길이 평온하게 다가오고, 자연과 지형이 잘 어우러진 바로 그곳에 왕릉이 있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조금은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누군가 그리울 때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왕릉 숲길을 걷는다.

 그리고, 정자각 너머로 왕의 능을 본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 있는데.

쉼표가 마침표가 될 때

                    - 양주 온릉에서 -

                                                         김 순 희

  나이만큼 빠른 속도로 가는 것이 세월이라 했던가.

  또 해가 바뀌고, 올 해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으로, 새해를 맞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으로부터 코로나가 유입되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 신천지사태로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는 그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봄꽃들이 애타게 불러도 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봄날들을, 집콕 만하면서, 오는 봄 · 가는 봄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혼란과 혼동으로 연속된 날들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바깥 사정도 이렇듯 좋지 않은데, 내 몸도 때를 맞춰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내 눈과 마음 즐겁게 하자고 무리했던 다리가, 이젠 그만 걸으라고, 더 이상 못 참겠다고 걸음마다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더 버티기 힘들 거라며 수술을 권유받고 있던 터에,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못한 이때, 수술이나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수술 날을 잡았다.

 두려움 보다는, 왠지 부모님에게서 받은 신체를 잘 건사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과 송구함이 먼저 들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내 마지막 관절로, 의미 있는 곳을 다녀 온 다음에 수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무덤조차 없는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곳을 생각다가, 언뜻 지난 신문에서 양주 온릉이 시범개방 된다는 기사를 읽은 것이 떠올랐다.

 조선왕릉 40기. 남한에 있는 38기중, 37기의 투어를 마치고, 나에게 마지막 남은 1기가 온릉이었기에, 미뤄 둔 숙제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 그 곳이면 딱 이겠다 싶었다.  

 수술 전, 마지막 주말

 코로나를 뚫고, 영원한 나의 동반자인 남편과 양주에 있는 온릉으로 향했다.

 벚꽃 가로수에선 마지막 꽃잎들이 흩날리고, 개나리와 목련꽃은 흔적도 없이 지고, 그 자리에 새잎을 달고 반짝였다.

 참으로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였다.

 그리 크지도 않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료는 시범개방중이라 무료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양쪽으로 난 숲길 사이로 소박한 오솔길이 있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를 하는 공간인 재실이, 왼쪽에서 조용히 길 안내를 한다.

 다른 왕릉의 숲길 보다는 짧은 숲길을 조금 더 가면, 홍살문이 서서 반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직선으로 참도(향도, 어도)가 박석으로 깔려있고, 정자각 뒷문 정면에 능침이 보인다.

 온릉은 복위된 왕비의 능으로, 다른 능에 비해 단순하였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석양과 석호도 한 쌍씩 줄였고, 무석인은 아예 없고, 무인석만 서 있는, 아주 단조로운 능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참도 오른쪽엔 수복방 터만 남아 있고, 정자각 오른쪽엔 비각이 있어, 단경왕후의 시호와 행적을 알 수 있는 비각이 있었다.

 지금도 조촐한 온릉 너머로 군부대가 있고, 온릉을 빼고는 주변이 군부대 시설로 통제되고 있었다. 그런 연고로 온릉 전체의 공간은 매우 협소하게 보였다.

  온릉은 일명 ‘치마바위’의 장본인이기도 한,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로, 중종과 결혼하여 부부인이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왕에 오르며, 왕비가 되었고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비가 된지 일주일 만에 폐위가 되면서, 사가로 내쳐졌다.

 7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친정 거창신씨 선산에 폐비신씨의 묘로 있다가, 182년이 지난 영조 15년(1739년) 다시 왕비로 복위되면서, 시호를 단경왕후, 능의 이름을 온릉이라 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게 되면서, 다시 왕후의 직분을 얻게 된, 비운의 왕후이다.

 여기에 오면, 왕후라 해도 비켜가지 못한, 그 시대의 ‘여자의 일생’을 보게 된다.

 “하늘같은 지아비”란 말이 새삼 생각난다.

 남자는 권력을 먹고 살고, 여자는 그 권력을 먹고 사는 지아비의 그늘에서만 살 수 있었음을 보면서, 왜 남편이 하늘같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비와 신랑 잘 만났으나, 권력의 힘에 상처 받고, 정쟁의 희생양 되어, 평생을 외로이 살다가, 죽어서도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사후 늦게야 복위되면서  홀로 안식처에 든 단경왕후의 그 처절함이, 절절이 내게로 와 닿으며 시대가 낳은 ‘여자의 한’을 느낀다.

 살아서는 임 그리다가 마친 일생, 죽어서도 임의 곁에 같이 있지 못하고, 임이 있는 왕릉 쪽으로, 먼산바라기 하고 있는 왕후를 보면서, 애가 닳고 안타까움에 그저 먹먹할 뿐, 다른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사릉(단종 비의 능)을 갔을 때도 그랬었다.

 슬프고도 외로운 숲길을 되돌아 나오는데, 봄새들은 왕후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저기서 지저귀고, 숲 군데군데 핀 진달래꽃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자꾸만 쉬었다 가라며 말을 걸어온다.

 다리도 쉴 겸, 벤치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제서야, 부모님 묘소에 다녀온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잠시나마 단경왕후와 엄마를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등 뒤로 바람 한자락,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래도 괜찮아, 이젠 세월도 많이 흘렀는걸.”

 “너도 괜찮을 거야”라고 토닥인다.

 돌아오는 길목에 송추계곡이 있다는 걸, 왕릉 가는 길에 봐 둔 터라,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부부 참새가 되기로 했다.

 혹시나 그곳에서 늦은 봄이라도 만나려나하고...

 게으른 왕벗꽃이 몇 군데에서 활짝 피어 반겨주었고, 계곡의 맑은 물소리에  온릉의 슬픈 기운마저 떨쳐내고, 잃어버릴 뻔 했던 나의 봄도, 스마트폰에 몇장 담아올 수 있었다.

 이층 창 넓은 카페에서 차 한잔 하는 여유도 부리면서.

 내일부터 수술준비나 잘 하자.

 잘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