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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포르치운쿨라 행진기 - 길따라 주님따라 -
< - 진도 팽목항에서 산청 성심원까지 - >
*** 프란치스칸들의 포르치운쿨라 행진 공식 기록으로 첫 번째로 간주되는
2015 포르치운쿨라 행진기의 “주님의 이름으로 행진”을 요약
<출처: 위 행진기 27 – 74쪽이 원본이고,
2018년 행진자를 위하여 요약(https://cafe.daum.net/p-.m/jFtl 12-21번) 된 것임 >
<1일차 : 2015.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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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팽목항에서의 첫 미사
하느님 거기 계시고
하느님 함께 하시고
하느님 더 슬퍼하시고
하느님 더 비통해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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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 개의 노란 리본만이 검푸른
바다 바람에 흐느끼고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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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첫날부터 탁발이다. 점심때가 되어 탁발을 해야 하는데 자매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형제님들과 신부님께서 탁발을 하시는데 영 시원찮다. 그래도 형제님들은 풋고추와 된장을 얻어 왔으나 신부님께서는 된장은커녕 물도 한 바가지 못 얻어 오셨다. 그것을 본 대전의 젊은 자매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더니 밥을 한 양푼이나 얻어 왔다. 누군가 비닐봉지 안에 된장과 밥을 넣고 흔들어 대니 된장 비빔밥이 되었다. 한 숟가락이라도 옆 사람을 더 먹이고 싶어서 그랬을까? 형제님 한두 사람이 드셔도 시원찮을 판에 20명의 순례자들이 먹고도 남았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게나 깔끔을 떨며 살아 온 나는 순례 하루 만에 위생이 웬 말인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고 있었다.
누가 가져왔는지 빨간 자두가 하나 있었는데 너무나 귀한 나머지 아무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밥을 준 할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로 갖다 드렸다.
우리는 모두 천사였다. 그때까지는….
(사부님과 초기 동료들처럼 우리도 순례 기간 내내 모든 숙식은 ‘탁발’로 해결하기로 했다. 사실 프란치스칸이 되어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탁발’이었다)
<2일차 : 201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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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대장님의 훈시
우리가 성당에서 머무는 이유는 다만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부님과 초기 동료들도 순례를 할 때 면 늘 성당에서 머물렀습니다. 왜냐하면 성당은 우리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라도 십자가만 보면 무릎을 꿇고 찬미경을 바쳤습니다. 찬미경은 기도 시작이나 끝에 바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순례자의 기도이고, 교회의 기도이며, 십자가의 기도입니다
<3일차 : 201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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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숙식을 함께 하면 더 이상은 속일 수가 없나 보다. 말은 하지 않지만 각 사람의 행동을 보며 판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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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그 이상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순화되지 못한 내 안의 내가 상대방 안에서의 내 모습을 보고 걸려 넘어진 것이다. 손에서는 쉬지 않고 묵주를 돌리고 있었지만 결국은 나와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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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 1
그냥 길 가는 아주머니를 붙들고 순례 동기를 말씀드리며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는데 어찌나 간절하게 말을 했던지 말하고 있는 내 목이 다 메었다. 아주머니는 주고 싶은데 해 놓으신 밥이 없다고 하셨다. 그럼 쌀이라도 좀 달라고 했더니 당신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내친 김에 김치도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여러분도 아시라! 이때 덤으로 꼭 한 마디 덧붙이는 말이 있으니 ‘쪼금만 더 주세요’ 이다. 아주머니는 교회 집사님이라고 하셨다. 20명의 빨래가 산더미라 짤순이 탁발까지 그날 탁발은 대성공이었다
<이 부분은 편집상 끼워 넣은 6일차 상황인 것 같다>
<4일차 : 201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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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우리 순례 너무 잘하고 있는 거 맞죠? 그 신호가 바로 ‘불평불만’ 아닌가요?”.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 안의 불평불만이 불편하지가 않으니 내 밖의 불평불만도 불편하지가 않았다. 눈도 마주칠까 무서워 피하던 내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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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강론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기적을 보여 달라고 그러지요?
우리는 순례 여정에서 매일 기적을 체험하지요?
천사를 찾아가고, 천사가 찾아오고, 마음을 열면 도처에 천사가 있지요? 그 대신 마음을 닫으면 천사는커녕 모든 일에 불평불만이지요? 멈추세요. 멈추면 가라앉고, 멈추면 밝아지고, 멈추면 맑아집니다. 그때 내가 보입니다. 그러니 멈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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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이다
오, 주님/ 내 영혼 맑게 하소서. (유경환 /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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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지난 7월11일 밴드와 카페에 올린
“7월 11일(수) - 행진11일전- ” 2018년 행진자를 위한 기도 말미에 올린 글입니다.
http://cafe.daum.net/p-.m/jFt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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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 2015.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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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강론 중--
어머니가 아이를 열 달 동안 뱃속에 담고 있듯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 곱씹고 곱씹어 완전히 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착한 행실로 말씀을 낳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저희 수도회에 구순이 넘으신 수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말씀이 늘 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황소가 영양가 없는 풀만 먹어도 그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죽이 되도록 밤새 되새김질을 하여 소화시키기 때문입니다.
<6일차 : 2015.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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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 공소는 어찌나 가난한지 그 옛날 포르치운쿨라 성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물도 안 나온단다. 신자들은 도회지로 다 떠나고 선교사도 없이 공소 회장님께서 13년째 공소 교우들을 돌보고 계신단다. 총 신자 수는 어른 4명이고 어린이가 6명(어린이 예비 신자 4명)이란다.
공소 회장님 소개로 영전 노인정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탁발에 나섰다.
이웃집 마실가듯 아무 집이나 문을 열고 쑥 들어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녁 땟거리가 없으니 쌀 좀 달라고 했다. 50쯤 되어 보인 아주머니셨는데 당신네가 직접 농사지은 쌀이라며 우리 일행이 먹고도 남을 만큼 쌀을 담아주셨다. 김장 김치도 있으면 좀 달라고 하면서 ‘쪼금만 더 달라’고 했더니 아예 김치 통 하나를 다 주셨다. 된장은 처음 뵌 공소회장님께 벌써 부탁해 두었다. 아무래도 탁발에 재미가 붙었나 보다.
지금도 그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큰절을 올리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리도 선뜻 내어 줄 수 있을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그분들을 위해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생면부지에게 쌀을 주고 밥을 주고 김치를 주고 된장을 주고. 그러고 보니 그분들은 우리가 달라는 대로 다 주셨다. 생각 같아서는 감사 선물을 사 들고 일일이 찾아뵙고 싶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니 온통 신기한 일투성이었다. 낯선 사람이 낯설지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무나 붙들고 쌀 좀 달라, 김치 좀 달라 하는 나는 누구일까?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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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 공소를 떠나 남창 신기 마을에 이르렀다. 점심은 주먹밥 한덩이와 미숫가루 한 컵인데 너무나 고되고 힘들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려 운동화 속으로 빗물까지 스며들어 물집으로 상처투성이인 발바닥이 피범벅이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정자나무 옆에 있는 노인정으로 들어갔다.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노인정을 지키고 계셨다. 그 옛날 우리 할머니에게 하듯 할머니 무릎에 두 발을 올리고 볼멘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할머니, 발이 너무 아파요. 좀 주물러 주세요”. 할머니는 조금도 의심 없이 당신 손녀라도 되듯 “오메, 오메” 하시며 발을 주무르고 계셨다. 나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
# 탁발 2
공소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아랑 곧바로 탁발에 나섰다. 이번에는 아예 방앗간으로 가서 쌀 좀 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쌀을 사러 오는 줄 알고 계시다 그냥 얻으러 온 줄 아시고 너무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참 통도 크다’ 하시면서도 오만가지 영양잡곡을 넣어 쌀을 담아 주셨다. 당신은 교회 집사님이시란다. 반찬은 그 옆 호남식당으로 가 보라 일러 주시기까지 했다. 호남식당 아주머니는 밥 먹으러 온 손님보다 우리를 더 반기시는 듯 모 대학 교수님인 아들 자랑을 하시며 여러 가지 식당 반찬들을 담아 주셨다. 낼 새벽에는 배추 겉절이를 버무리니까 또 오라 하셨다. 우리는 언제 다리가 아팠느냐는 듯 휘파람을 불며 숙소로 돌아오는데 그 옛날 사부님과 초기 동료들이 생각나 눈물이 핑돌았다.
< 7일차 : 2015. 7.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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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천근만근이고 다리는 죽어라 아픈데 영혼은 기름지다. 참 신기하다. 몸과 영혼이 따로 논다. 순교자들을 생각했다. 사자 밥이 되어도, 모진 고문의 칼날 앞에서도 웃으며 찬양하며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육이 영을 조금도 지배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육체를 제어’할 수 있다는 사부님의 권고 말씀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떠올랐다.
죄를 지을 때나 해를 입을 때 원수나 남을 자주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지배하에 맡겨진 그 원수를 항상 손아귀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지혜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이렇게 하는 한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어떤 원수도 그를 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권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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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성당에 도착했다(우리 일행은 도착하면 먼저 성당에 들러 성체 조배를 한다). 제대 앞 십자가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성당 벽에는 노랑과 검정색으로 조화를 이룬 플랜카드가 길게 걸려있었는데 그 글귀를 그대로 옮겨본다.
< 5줄 생략 ---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 ? --- 하여 나는 줄인다 >
‘기억과 회개’라는 우리의 순례 목적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것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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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구간 참여자로 새로 합류한 자매님이 반기를 들었다. 잠자리 때문이었다. 당신이 누우려는데 전구간 참여자 한 분이 거기 자리 있다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단다.
그 밤중에 당장 이불을 사러 가야겠다며 걷잡을 수 없이 울분을 토하는데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신선한 눈으로 바라본 자매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의 순례를 재점검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의 처신에 대해서도 새로이 다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성깔이 걸걸한 자매님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사자 같았다.
- 자기네들끼리(전 구간 참여자들)만 어울린다.
- 일의 분배가 불합리하다.
- 왜 식사를 꼭 자매들이 준비해야 하는가?
- 가난한 공소에서는 물과 전기를 아껴 쓰자 등등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별것 아닌 듯하나 그동안 꾹꾹 누르고 참아 왔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터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호미, 가래로도 막을 수 없었으며 막을 일도 아니었다. 어떤 자매님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불만을 토했다. 또 어떤 자매님은 당장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고 했다. 딱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광야 여정의 이스라엘 백성 같았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순례 중간인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하느님의 뜻 같았다. 남은 기간 동안 전 구간 참여자들의 인내와 사랑과 기다림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계속해서 구간 참여자들이 들어올 텐데, 잠자리는 물론 모든 것을 그분들 먼저 배려하기로 하고 우리는 서로 손 잡고 ‘주님의 기도’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 8일차 : 2015. 7.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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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했던가!
어젯밤 늦게까지 성토 대회를 한 결과인지 모두들 달라졌다. 표정도 한결 환해지고, 형제님들은 물론 심 신부님까지 부엌에 들어오셔서 설거지를 거들고 계셨다. 자매들의 성토 대회가 우리 순례단 모두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제8일은 새로운 날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진!
속을 썩인 사람은 여전히 속을 썩이고,
고집 센 사람은 여전히 고집이 세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 말만 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화를 잘 낸 사람은 여전히 화를 잘 내고,
말이 많은 사람은 여전히 말이 많고,
잘난 척하는 사람은 여전히 잘난 척하고,
개인행동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개인행동을 하고….
뭐, 그래도 괜찮다. 그렇다고 속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순례 이틀째 신부님 강론 말씀이 떠오른다. 현상을 가만히 바라보세요. 그럼 고요가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냥 바라보세요. 그냥….
이제야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들꽃이 너무나 아름답다.
프란치스코 사부님이 아닌 누구라도 저리도 예쁘고 앙증맞은 들꽃을 보면 ‘누이’라고 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보나벤뚜라 성인의 삼중도가 나에게도 적용이 되고 있다는 말인가? 길을 걷다 매미 껍질을 만나 또 한참을 이야기한다.
얘!
나는 어디 가고 너만 있니?
나는요 7년을 땅속에 있다
7일을 냅다 울었더니
이렇게 껍데기만 남았답니다.
참 나는요
나비가 되어
온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답니다.
몸은 파김치가 되어 한 발짝도 뗄 수가 없는데 머리는 맑다. 물병 하나 가지러 갈 힘도 없는지 이제는 신부님까지도 시켜먹는다. “신부님, 그것 좀 이리 던져주세요”. 신부님도 수사님도 형제도 자매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존재다. 오직 순례자만 있을 뿐이다.
장흥 성당에 도착했다. (이하 15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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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의 업그레이드
어제 점심때는 자매들이 쌀이 아니라 아예 밥을 지어 밥통째 탁발해 오더니 오늘 점심에는 콩국수(백남용 수사님께서 쪽방 두부 집에서 친히 가져오심)를 삶기 위해 가스불은 물론 물김치까지 탁발해 왔다. 자매들 탁발 실력이 일취월장해 놀라울 뿐이다. 철도 녹이고 돌부처도 녹여 탁발을 해 올 기세다. 우리 모두는 프란치스칸 성소와 함께 탁발 성소도 받은 게 틀림없다. 하하!
<9일차 : 2015. 7. 25.>
순례 인원: 23명.
구간 거리: 장흥 성당 - 보성 녹차마루(2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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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대장님의 훈시
이제 우리는 포르치운쿨라 도보 순례의 반을 지나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처음 시도였기에 전반부에는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제 탓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영적으로 이끌지 못한 제 탓입니다. 오늘 우리는 보성으로 갑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와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당신의 탓으로 돌리시는 말씀에 마음이 아렸다. 신부님의 마음이 헤아려지니 모세의 마음도 헤아려졌다. 남의 말이 쓴지 단지, 아픈지를 모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 고집이 세고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모세가 훈시하시는 신부님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되어 지나갔다.
사실 그동안 신부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안전을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시는 모습이셨다. 차가 씽씽 달리는 아스팔트 국도를 걷노라니 맨 뒤에 승합차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는데도 여차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칠순 팔순도 더 넘긴 듯한 허름한 봉고차는 20개가 넘는 엄청난 무게의 배낭을 싣고도 불평 한마디 없이 불순종(사고의 위험보다는 우선 시원한 가로수 그늘 쪽으로만 걸으려는)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보디가드가 되어 지켜 주고 있었다.
우리가 길을 떠나면 자기도 떠나고, 우리가 쉬면 자기도 쉬고…. 그는 그냥 짐만 실어 나르는 봉고차가 아니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광야의 봉고차’였다. 계속 뒤에서 덜덜거리며 따라오는 소음에 속으로 짜증을 부렸던 게 미안했다. 그 옛날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할머니랑 지낼 때 할머니가 밤새 기침을 하실 때면 듣기 싫다 짜증을 부렸던 일이 60이 된 지금까지도 너무 미안해 눈물이 나듯이 ….
신부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포르치운쿨라의 의미
지금 우리는 깊은 심연을 가고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 의 길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수난, 고통, 죽음의 길을 가 고 있습니다. 이것이 포르치운쿨라의 의미입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원천
프란치스칸 초창기에 살고자 했던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입니다. 가난과 작음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이 순례 여 정 안에서 실제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 의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곧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형제들에게 권고하고 훈계하고 충고합니다. 세상을 두루 다닐 때 형제들은 말로써 논쟁 을 벌이거나 다툼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이와 반대 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온유 하고 화목하며 겸양하고 양순하고 겸허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득이한 사정이나 병 때문이 아니면 말을 타서는 안 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10,5)하고 인사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복음에 따라 차려주는 모든 음식은 먹어도 됩니다(인준 규칙 3.10이하).
숙식을 함께 하다 보면 실망이 커 가깝던 사이도 멀어지는 법인데 1회 신부님 수사님들은 함께 할수록 존경스럽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뭘까? 무엇 이 나를 이토록 이분들을 존경스럽게 보게 할까? 수도자 개개인의 장 단점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엇, 그 무엇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모르겠다.
< 10일차 : 2015. 7. 26. >
순례 인원: 24명
구간 거리: 보성 녹차마루 - 곡성 석곡 공소(19.3Km/ 90Km 차량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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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보성 성당에서 우리 순례단을 거절한 까닭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흙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스물네 명의 순례객들이 하룻밤 묵어갈 곳을 사방팔방으로 찾던 중 천사는 바로 등잔 밑에서 나타났다. 그 천사는 우리를 펜션으로 인도했다. ‘탁발’을 원칙으로 한 순례이기에 펜션은 좀 생각해 볼 일이라시는 대장 신부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하!
사부님께서도 주교관에서 하룻밤은 머물지 않으셨던가! 하느님께서는 보성 성당 주임 신부님께 완고한 마음을 보내시어 거지 떼와도 같은 우리를 오아시스로 인도하신 것은 아닐까? 종려나무 70그루와 샘이 열두 개가 있는 엘림에 도착하여 잠시나마 꿀 같은 휴식을 취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프란치스코처럼 자유롭게 온 세상을 가고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게 작은 자가 된다~’
발바닥은 물집으로 헤어져 살이 종잇장처럼 너덜거린다. 참 신기하다. 한겨울 밖에 널어 둔 빨래가 얼면서 마르듯이 내 발바닥도 새살이 돋으면서 짓물러 터지고 있다. 모두들 그런 발을 해 가지고 어떻게 걷느냐지만 발바닥이 쓰리고 아픈 것과 나와는 별개의 문제 같다.
도보 순례 일주일이 넘고 열흘이 넘으니 이상 증세가 나타나는데 그냥 실실 웃는다는 것이다.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고, 누가 고집을 부리면 그 모습을 보며 웃고, 버럭 화를 내면 돌아서서 또 웃고, 걷는 모습이 오리궁둥이 같다며 웃고, 다리가 짧아 바퀴가 굴러가는 것 같다며 웃고, 힘들어도 웃고 힘이 안 들어도 웃고, 그냥 눈만 마주쳐도 웃는다.
옆에서 같이 걷던 김수희 수사님이 한 말씀 거드신다. 머리에 꽃 단 여자도 그렇게 웃는단다. 하하!
그렇지만 머리에 꽃 단 여자는 하느님 없이 실실 웃는 것이고 나는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과 함께 걸으면서 웃는 거라며 제법 옹골진 말을 하려다 그냥 꾹 삼켰다.
안 그래도 그녀(머리에 꽃 단 여자)와는 뭔가 통하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백 수사님께서 쪽방에서 가져오신 콩물로 콩국수를 해 먹는 날이었다. 마을 회관에서 쉬고 있는데 정말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 동네에 사는 여자 같았다. 그런데 유독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뭔가를 주고 싶은지 당신 지갑을 이리저리 뒤지더니만 껌을 두 통이나 사와서 우리 일행에게 한 개씩 나눠 주었다.
내가 당신 친언니나 되는 듯 잠자는 내 모습을 여러 번 핸드폰에 담더란다. 우리 일행이 다시 길을 떠나려 하는데 그녀는 나를 꼭 붙들고 가지 말라며 울기까지 했다.
보성의 너른 들판에 들어서는 순간 녹차 향이 코끝을 스쳤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명산 스님과 마시던 그 차 향이었다. 옆에서 함께 걷던 악양 은둔소 신부님께서 찬물을 끼얹으셨다.
“농약 냄새일 거예요.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차밭과는 아주 많이 떨어져 있어 그럴 리가 없을 거예요”. 하하! 난 향이 천 리라면 차 향은 만 리가 아니던가!
< 11일차 : 2015. 7. 27. >
순례 인원: 25명(중간 지점 합류 4명 제외)
구간 거리: 곡성 석곡 공소 - 구례 성당 산동 공소 (19,7Km/35Km 차량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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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석곡 공소이다. 공소가 얼마나 아담하고 아름다운지. 거기다 한지에 곱게 그려 넣은 동양화 성 미술이 스테인드글라스 토착화를 말해 주고 있었다. 1회 황정민 수사님의 어머님이 선교사로 계셨는데 그림은 수사님의 여동생이 그리신 거란다. 선교사님 인상이 하얀 박꽃 같아 보였다.
미사 강론
오늘 겨자씨의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씨 뿌리는 순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추수할 곡식을 생각하고 공중의 새도 쉬어 갈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해 하지요. 누룩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가루 서 말이 30kg쯤 된다면 그 밀가루가 부풀어 오를 때면 엄청나겠지요. 그것으로 빵을 만든다면 온 동네가 축제가 되고 남을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해 하겠지요. 그래서 작은 것은 큰 것과 다름이 없지요.
이처럼 하늘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희망과 함께 행복한 축제가 시작됩니다.
오늘도 신비의 생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영원히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 / 오늘
고마운 빗님이시다. 우리가 걸을 때면 꾹 참고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을 하거나, 중간에 쉴 때면 장대같이 쏟아진다. 참느라 고생한 우리 누이 빗님! 서울에는 계속 비가 내리는데 그곳은 어떻느냐며 전화가 빗발치는데 우리네 남쪽 하늘은 오늘도 맑음!
< 12일차 : 2015. 7. 28. >
순례 인원: 29명(중간 합류 1명 별도)
구간 거리: 구례 성당 산동 공소 - 화개 장터(22.6Km/17Km 차량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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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산동 공소는 청정 지역으로 산수유 고장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구경에 나서는데 제일 먼저 논두렁에서 우렁이가 인사 를 한다. 어머나, 우렁이구나~. 엄마 돌아가시고 슬픔에 빠져 지낼 때, 우렁이는 나의 위로였다.
우렁이는 뼈가 없다 / 뼈를 모두 뽑아 / 새끼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새끼들은 그 속에서 어미를 먹고 / 날마다, 날마다 살이 오른다 /
이내 장성하여 집을 떠날 즈음 / 어미는 빈껍데기가 되고
숭숭 뚫린 지붕은 허옇게 뒤집힌 채 / 물 위를 둥둥 떠다닐 뿐이다
바람은 하염없이 / 비탄의 노래만 부르고 또 부르고…
김영희 / 우렁이의 사랑
어린 시절 시골에서 흔하게 보던 우렁이, 그 우렁이였다. 당신의 살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어미 우렁이는 돌아가신 엄마와 똑같았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은 성체처럼 거룩해 모두가 천국에 가리라는 믿 음을 주었던 우렁이의 사랑을 그곳에서 만났다.
섬진강 물길을 따라 종일 걸어 화개 장터에 도착했다. 경남 지구 3회원들이 마중을 나오셨다. 그분들은 경남 땅에 들어서는 바로 그 곳 경계에 서 계셨다. 하하! 면장님과 이장님께서도 찾아 주셨는데 면장님 격려 말씀이 대박이셨다. “저희 공직자들이 잘못 살아 여러분들 고생이 많습니다. 앞으로 잘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탁발’은 끝났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여기저기에서 은인들이 찾아오셨다. 장성 요양원에서는 신부님 수사님들께서 고구마와 감자를 쪄 오시고, 서울 해외 선교 팀에서는 시원한 수박 화채와 야쿠르트, 거기다 구간 참여자들이 가져오는 음식들로 그날 먹지 않으면 상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칸이 되어 하고 싶었던 ‘탁발’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사치스러운 탁발 체험이라는 것도 안다. ‘탁발놀이’라고 해야 할까?
부끄러움, 수치심만 내려놓는다면 ‘탁발’도 별 게 아니구나 싶었다. 저 집에서 안 주면 이 집으로 가면 되니 안 준다 하여 상처도 받지 않았다. 진정 빌어먹어야 할 절박한 상황이 온다면 그때도 즐기며 동냥을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사부님과 초기 동료들의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봤다는데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잊지 못할 꿀꿀이 죽
주방을 맡은 요셉피나 자매님은 남은 음식이 뭐든 비닐 봉다리에 묶어 두었다가 주로 아침이면 들통에 다 집어넣고 끓인다. 라 베르나 가기 전 마지막 날은 라면까지 넣고
끓여 완전 퉁퉁 불은 꿀꿀이 돼지죽이었다. 보아하니 형제님들은 당신 앞에 놓여진 양만 드신 후 양푼에 죽이 남든 말든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뜨시는 듯했다. 그날따라 꿀꿀이 죽이 많이 남았다. 혼자 덩그러니 앉아 식사하고 계시는 신부님께 “신부님 더 드세요” 했더니 지금 세 그릇째란다.
< 13일차 : 2015. 7. 29.(수) >
순례 인원: 30명(당일 참여 14명 별도)
구간 거리: 화개 장터 - 라 베르나 수도원(19Km / 6Km 차량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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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순례 13일째다. 오늘은 라 베르나 수도원에서 김명겸 새 신부님 첫미사가 있어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어제는 섬진강 강물을 따라 녹차밭을 지나고 대나무숲을 지나고 아스팔트 길이 아닌 풀밭을 걸으니 살 것만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 도보 순례에 비교하면 양반 중에서도 상양반이다. 적어도 흙길이나 산길, 풀밭길을 걸으니까 말이다.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새벽 5시면 일어나 별들을 보며 걷는다. 그래서 콤포스텔라(별들의 들판)라고 한단다. 그렇지만 순례의 의미나 목적으로 본다면 우리 도보 순례가 훨씬 값지고 우월하다 하겠다. 초기 프란치스칸들이 살고자 했던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토대로 가난과 작음의 삶을 되돌아보며 순례 여정 안에서 실제로 살아보자는 것이었으니 이 세상 어디에 이런 멋진 프로그램이 있겠는가! 한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창안해 낼 수 없는 무모한 프로그램이라 여기기도 하지만. 하하!
구간 순례자들이 합류함으로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20명이던 순례자가 40명이 훌쩍 넘었다. 오학준 신부님과 함께 청원기 수사님들도 합류했다. 우영성 신부님과 맛세오 수사님께서도 오셨다. 요한 수사님은 벌써부터 합류하고 계셨다. 형제자매들이 서울에서, 대전에서, 진주에서, 광주에서 속속들이 합류했다. 샛강이 모여 강물을 이루듯 우리는 구간 순례자들과 금방 하나가 되어 포르치운쿨라 대축제 행사장을 향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라 베르나 옥탑방 성당!
바람 한 점 들어올 곳 없는 그런 찜질방 성당은 내 생전 처음이다. 열 사흘째 지열로 달궈진 우리에게 또다시 열탕이라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죄가 얼마나 많으면 또다시 뜨거운 열에 달궈야만 하는지 몸은 성당에 앉아 있는데 연옥에 왔구나 싶었다. 그 작은 옥탑방 성당에 다섯 분 신부님과 세 분 수사님, 40명이 넘은 순례자들…. 그 때 찍은 사진이 딱 한 컷 있는데 인상으로 말하자면 고생고생하다 죽은 시신과 거의 흡사한 표정이다.
그날 새 신부님은 땀으로 첫미사를 드리셨다. 눈물인지 땀인지 안수까지 해 주시며 당신 생애에 첫 미사가 마지막 미사이시듯 혼신을 다하시는 모습에 저절로 더위와 일심동체가 되어 버렸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함께 하신 다섯 분의 신부님들은 제의까지 입으시고 얼마나 더우셨을까? 아무래도 우리보다 죄가 더 많으신가 보다. 하하!
국제, 국가 형제회에서 맛있는 깍두기와 육개장을 준비해 주셨다. 대장 신부님께서 국가 영보님이시기도 하지만 순례 내내 우리는 신부님과 수사님들의 은덕으로 온갖 호사를 누려온 셈이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 14일차 : 2015. 7. 30.(목) >
순례 인원: 43명
구간 거리: 라 베르나 수도원 - 지리산 궁항마을 회관(1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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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대장의 훈시
이제 우리의 순례는 라 베르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성심원까지는 안병호(베드로) 수사님께서 구름기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구름기둥’의 의미는 하느님의 현존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여정 중에는 성막을 세울 수가 없어 메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천막 안에 성막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성막 위에 구름이 머물면 자기네들도 머물고, 구름이 떠나면 떠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전을 모시고 다녀야 합니다. ‘마음의 성전’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길을 걷다가도 하느님의 방문을 받으면 옷소매로 성전을 만들어 기도했습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가슴 성전’을 세웠습니다. 여러분, 사부님과 초기 동료들의 순례를 떠올리며 오늘도 순례를 시작합시다.
신부님께서는 순례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에 1223년에 인준 받은 작은형제회의 회칙 3장의 말씀을 읽어 주셨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 나의 형제들에게 권고하고 훈계하고 충고합니다. 세 상을 두루 다닐 때 형제들은 말로써 논쟁을 벌이거나 다툼 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이와 반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온유하고 화목 하며 겸양하고 양순하고 겸허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득이 한 사정이나 병 때문이 아니 면 말을 타서는 안 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하고 인사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복음에 따라 차려주는 모든 음식은 먹어도 됩니다(인준 규칙 3.10이하).
지리산 깊은 숲속 라 베르나 은둔소!
카르체리 은둔소나 첼레 은둔소와 같이 영적인 형제들이 살고 계실 것만 같아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특별히 그곳에 모셔져있는 14처 십자가의 길은 용산 당고개 성지에서 모셔 왔단다. 라 베르나 은둔소 모기는 메뚜기만큼이나 컸다. 모두가 혈안이 되어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려 잡으려 하니 은둔소의 실베스텔 신부님께서 흐흐 웃으시며 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쫓으세요. 흐흐.
숲속 산짐승들도 그 아래 동네 밭은 온통 휘저어 놓으면서도 수도원 밭은 먹을 만한 것이 없어 그러는지 손을 안 댄다고 하셨다. 산짐승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실베스텔 신부님께서만 모르시는 것 같다. 자기네 사부님이신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살고 있어 봐 드린다는 사실을….
구간 참여자들이 계속 늘어나 조별로 움직였다. 각 조마다 수련수사님들이 팀장이 되시어 우리를 말씀과 기도로 이끄셨다. 점심도 조별로 먹었다. 점심 후 잠시 레크리에이션 시간이었다. 다같이 개똥벌레 노래를 불렀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 걸~’ 하는데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개똥벌레가 그렇게 슬픈 노래였다니, 탁발을 하며 얻어먹고 다니다 보니 그런가.
앞으로 남은 마지막 3일은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단다. 신부님과 한 조가 되어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둘레길을 걷는데 갑자기 신부님께서 수련 수사님을 데리고 남의 밭으로 들어가시더니 잘 익은 토마토를 여러 개 따 오셨다. 모두들 허기진 상태이기도 했지만 얼마나 깔깔거리며 행복하게 맛을 보았는지 모른다.
흰 수건을 머리에 질끈 묶고 서리하신 신부님 손놀림이 번개처럼 빠르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르실 것이다. 하하!
한번은 레오 형제와 함께 포도원 앞을 지나다가 배고프다고 말하는 레오 형제를 위하여 성인은 포도 한 송이를 따서 그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그런데 뜻밖에 포도원 주인이 나타나 레오는 도망갔지만 작고 병약한 프란치스코는 붙잡혀 몽둥이로 실컷 얻어맞았다. 수도원까지 가는 길에 성인은 몸의 고통을 잊어 버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후렴처럼 불렀단다.
“레오 형제는 배를 잘 채웠고 프란치스코 형제는 몽둥이로 잘 맞았다네. 레오 형제는 실컷 먹었고 프란치스코 형제는 자기 몸으로 충분히 그 대가를 보상했다네”.
< 15일차 : 2015. 7. 31.(금) >
순례 인원: 44명(전일 참여 1명 포함)
구간 거리: 산청군 옥종면 궁항마을 - 덕산 공소(2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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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1독서는 아직도 탈출기다. 이제 모세는 모압 벌판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에게 세 번에 걸쳐 거듭거듭 유언처럼 설교를 하는데 시나이 산에서 맺은 당신과 의 계약을 되새겨주기 위해서이다. 쉐마 이스라엘, 쉐마 이스라엘!
이제 우리도 16박 17일간의 긴 광야 여정을 되돌아보며 산청 덕산 공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구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새 로운 세대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어제의 나는 불볕더위 속에 서 죽고 영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모두는 포르치운쿨라 축제에 참석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나눔의 은총
매일 순례를 마치면 자유스럽게 나눔을 하는데 하는 사람도 울먹이고 듣는 사람도 울먹일 때가 많다.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성령이 꿀꿀이 죽을 먹으며 숙식
을 함께하는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나눔을 하고 나면 얄미운 사람까지도 존경스러워 보인다.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 때문일 게다. 자기 자랑이 섞인 나눔은 역겨운데 하느님을 자랑하는 나눔은 매번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옳거니, 이제야 답을 찾았다. 신부님 수사님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 할수록 실망보다는 존경심이 생기는 이유가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는데 바로 미사, 매일 아침 드리는 미사 때문이었다.
그분들의 이타적인 모습 안에서 말없이 그리스도를 느꼈던 탓일까?
프란치스코 3회원으로 네 분의 1회 수도자와 24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은총! 이 은총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프란치스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북돋아 주리라.
< 16일차 : 2015. 8. 1.(토) 도보 순례 마지막 날 >
순례 인원: 59명
구간 거리: 덕산 공소 - 성심원(14㎞/20㎞ 차량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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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교구 산청 성당 덕산 공소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덕산공소 신자 분들이 새벽 같이 일어나 60명이 넘은 순례단 아침과 점심에 먹을 주먹밥까지 준비해 주셨다. 포르치운쿨라 행진이 로고로 찍힌 꽃 분홍 티셔츠를 입고 한 줄로 걸어가는 긴 순례 행렬이 참으로 장관이다. 그 파란만장 아수라장 속에서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가 완주했다는 사실이 기적에 가까운 기적이며 기적을 넘은 기적이다.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다시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
그럼, 내년에 또?
< 도보 순례를 마치고 >
도보 순례를 마치고 생각하니 감사함뿐이다. 먼저 순례를 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큰절을 올리며 남편 OOOO 께도 감사드린다. 탁발 그릇을 가득 채워주신 고마우신 분들과 먹여주고 재워준 천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순례 대장이신 김찬선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맑은 강론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여주신 심규재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순례 마지막 날까지 물집 치료는 물론 그 무거운 배낭을 실었다 내렸다 수도 없이 수고해 주신 원 베드로 수사님께 감사드린다. 웃음 바이러스로 정말 수희 언니가 되어 어려울 때마다 언니처럼 힘이 되어 주신 김수희 수사님께 감사드린다. 나중에 합류하셨지만 요한 수사님, 베드로 수사님께도 감사드린다. 회계 담당 소피아 자매님과 그의 남편께도 감사드린다. 순례 기간 내내 기쁘게 말없이 주방 일을 담당해준 요셉피나 자매님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형제님들 자매님들 한 분 한 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으로 그 고통스러운 발바닥 물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잘 걸어준 내 발님께도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
*** 대부분의 일차별 기록을 요약하면서 읽으시기 편하게 문단을 나누는 등 편집을 하였습니다.
행진기 원본과 다름을 이해하여 주세요.
### 2015년 행진을 대표하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의도이였으나, 거의 모두를 김영희 모니카
자매님이 쓰신 글이기에 엮은이 다수결로 실명을 밝혔고, 2015 대표 행진기임을 첨언합니다.
2015 행진 기록 - 길따라 주님따라 출간 : https://cafe.daum.net/p-.m/YxG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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