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이말산의 영조 장인 최효원 묘. 이 묘 양 옆엔 최 숙빈이 낳다 죽은 첫째와 세재 아들 묘가 있다.
이말산에는 왕족, 내시, 궁녀, 역관, 중인, 상민, 여항시인 등 조선시대의 다양한 계층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1,746기의 무덤이 있다. 이들이 모시던 왕의 혼령은 어엿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정작 그들의 혼령들은 살아생전에 왕조궁궐문화를 주도해왔음에도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채 오고가는 이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우리 후손들이 관심을 갖고 보듬어야 할 문화재로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강재훈 시인의 내시 궁녀 시가 유독 눈에 밟힌다.
임금으로 살다 가나 내시 궁녀로 살다 가나
한 번 살고 죽어버림에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구나.
어느덧 혼백의 시효도 만료되어 구천에서 만나니
바람이 되고 구름 되어 북악을 넘나드네.
-2015년 여름 비내리는 이말산 구릉에서 강재훈.-
내시란?
내시는 궁녀와 함께 궐내에서 상주하던 집단이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내시라고도 하고 환관이고도 했는데, 정식 관직명은 내시고, 환관은 고려시대 이래 궁중에서 잡일을 담당하는, 생리적으로 고자인 자들을 통칭하던 말이다. 내시들이 담당하던 일은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청소, 잡 심부름 등으로, 업무 자체보다도 항상 궁궐에 거주하며 국왕 측근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내시들에게는 공동묘지가 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버려진 무덤 - 그것은 내시들의 공동 묘지였다. 후손들은 내시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에 내시들의 무덤은 없어지거나 훼손된 것이 많았다.
신체적으로 불구였던 그들이지만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내시들은 분명 부인과 자식이 있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내시는 양자를 들여 후손을 이어나갔다. 그 가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후손들이 조상이 내시라는 것을 숨기고 무덤을 훼손하거나 묘표 등을 세우지 않았다.
내시의 역사성
약 3,000년 전 은나라 때부터 내시제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내시가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9세기 신라 흥덕왕 때로, 천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고려시대 내시는 고자가 아니라 사대부출신 엘리트였다. 과거급제나 음서로 벼슬에 오른 문벌의 자제, 또는 군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젊은이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는 자를 선발하였으므로 탄탄한 미래와 영화를 보장받는 지름길이었다. 안향, 김부식의 아들, 이자겸의 장인으로 최충의 손자, 의종의 스승인 정습명, 윤관의 조카, 최충언의 사위가 모두 고려내시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인물이 무려 22명에 달했으므로 내시를 천정天庭 또는 천원天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고려 중기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거세된 환관내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환관 내시는 노비출신이나, 무녀 또는 관비소생, 부곡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벼슬도 7품 한직으로 양반과는 구별되는 남반南班에 속했다.
고려에서 원나라에 바쳐진 환관들이 황제의 신임을 얻어 고려의 각종 이권에 개입하기도 하고, 또는 원나라 사신을 따라 내려와 비리를 일삼으며 교만해졌다.
공민왕 때 121명으로 구성된 내시부를 두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40명으로 늘렸다.
원나라에 갔던 환관 김사행金師幸은 공민왕 때 돌아와 태조 이성계 때까지 내시부판사가 되어 조선 내시부제도를 정비하면서 내시는 완전히 환관으로 대치되었다.
갑오경장 대 환관제도가 폐지되었다.
내시 자격
왕과 대화가 통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 논어, 맹자, 중용 같은 사서나 소학, 삼강행실도등을 10년 정도 기본적으로 익혀야했다. 어린 내시는 19세가 되면 관직을 받았는데 자질을 평하기 위해서 1년에 4번 근무평가를 해서 불합격하면 승진에 불이익을 줬으며, 정적이나 적군에 포로가 됐을 때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인내력 테스트를 받았다. 또 유사시 왕을 비밀통로로 엎어 도피시키기 위해 탈출훈련도 했다.
내시임무
음식물 감독, 궁궐수위, 청소, 잡심부름, 궁중의 제사와 재산관리, 궁실공사와 궁녀관리 등을 했다. 정치적 혼란기에는 궁내의 정보를 독점하고 영향력을 행세했다.
고정월급을 받았고 모시던 왕이 죽으면 궁궐 밖으로 나와 살며 연금도 받았다.
상선은 정승 판서도 부럽지 않은 자리였다. 일부 내시는 출퇴근을 했다.
내시 정원은 140명 중 벼슬관리는 59명뿐이다.
관직은 종9품 尙苑에서 종2품 상선까지 두었다.
상선尙膳: 종2품의 우두머리로 임금의 수라상을 담당했다.
상온尙醞: 술을 담당하는 정3품
상다尙茶: 차를 담당하는 정3품,
상약尙藥 약을 담당하는 종3품
상전尙傳과 상책尙冊: 국왕은 정4품직 상전 2인을, 왕비는 종4품의 상책3인을 두어 명령을 전달시켰는데 승전색承傳色이라 한다. 가승전색假承傳色을 두기도 하였다.
承傳色은 내관 중에서 제일 높은 내시자리는 아니지만 승전색내시를 통해야만 왕명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중종 때 승전색 박한종은 문정왕후와 결탁해 공신칭호를 얻고 축재와 권세를 부려 환관 최고벼슬 종2품을 넘어 종1품까지 올랐다.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문서가 승정원에 모이면 이것을 국왕의 처소까지 출납하는 일은 내시들이 맡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편전에서 왕의 명령을 기초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승정원으로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때로는 내시들이 왕명을 변조하기도 하고 왜곡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 외에도 상책(尙冊) 3인, 상호(尙弧) 4인, 상탕(尙帑) 4인, 상세(尙洗) 4인, 상촉(尙燭) 4인, 상훤(尙煊) 4인, 상설(尙設) 6인, 상제(尙除) 6인, 상문(尙門) 5인, 상경(尙更) 6인, 상원(尙苑) 6인 등을 두었다.
내시거세
조선조에서는 음경은 놔두고 고환 만 잘랐다.
사설 내시거세업소까지 있어서 형틀에 사지를 묶어놓고 보조 시술자가 허리와 다리를 누른 다음 솜뭉치를 입에 물린 다음 도자장이 예리한 칼로 단번에 고환을 도려냈다. 시술자리는 나무대롱을 끼워 지혈하고 수술 후 3-4일 간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금식을 시켰다. 때로 수술후유증으로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거세에 살아난 아이는 순둥이가 됐고, 내관이 되는 수련을 거쳐 입궁했다.
거세한 환관은 양반보다 15-20년 이상 70세 까지 오래 살았다. 당시 평균수명은 임금이 47세, 사대부양반은 50-55세였다. 조선시대 내시 777명의 가계도 기록인 양세계보養世系譜에는 장수자 81명 중 3명은 100세를 넘어 살았다.
내시들은 때로는 소환시험을 실시해 내시의 거세특징을 확인하기위해 하의를 내려 신체검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내시결혼
조선의 환관은 고환만 제거했기에 음경은 남아있어서 발기가 가능해 결혼이 가능했고 첩을 거느리기도 했다. 때로는 일부 사대부에서 권력을 잡기위해 딸은 환관과 결혼시키는 사례도 있었다. 결혼한 뒤 내시의 지위가 높아지면 3세 이하의 어린 아이를 입양해 고자를 만들어 대를 이었다. 명종실록에는 양자의 수가 4,5명까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거세양자는 주요 내시공급원이었으며 후일 성공하면 본가를 돕는 경우가 많았다.
내시부와 내반원
내시부 청사는 궁궐 밖의 한양 북부 준수방에 있었다. 준수방은 경복궁 바로 옆으로, 지금의 효자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내시부와는 별도로 궁 안에 내시들을 위한 공간이 바로 내반원이었다. 내반원은 왕이 업무를 보던 선정전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의 수발을 좀 더 효과적하기 들기 위해서다. 궁궐 안에 있는 내반원은 내시부의 파견 처인 셈인데 내시들 중 가장 핵심인물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장번長番내시: 왕고 세자궁에만 제하 배치되었으므로 출세의 기회가 많았다. 처음 궁궐에서 먹고 자는 내시로 일정기간이 지나 경력이 쌓이면 출퇴근하는 출입번내시가 될 수 있었다.
출입번出入番 내시:출퇴근하는 내시로 종로구 봉익동, 운니동, 은평구 신사동, 진관내동, 응암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양주 고양, 관천, 용인, 안양, 파주 등 전역에 살았고, 심지어 평안남도 강동, 경북 풍기에 이르기 까지 다양했다.
사설 내시양성소 쇠귀할머니: 귀가 커서 쇠귀할머니로 부렸는데, 그는 월래 개성에 살던 돈 많은 과부였는데 조선이 개국 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자 새로운 내시가 많이 필요할 것을 알고 개성 근처의 거세된 아이들을 모하 양자로 삼고 글과 궁중법도를 가르쳤다. 그리고 재력을 이용해 관리들을 매수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양자들을 내시로 내보냈다. 이렇게 궁중에 들어간 내시들은 성장해 관동과 자하동에 집단거주 하며 관동파와 자하동파로 갈리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조 말까지 우이동에 있는 쇠귀할러니 산소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려 다녔다.
충신내시
김처선金處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 연산 등 6왕을 모신 충신이다, 그는 성종의 수릉내시가 되어 시묘살이를 했다. 상선 내시로 연산군 11년 왕의 무례를 직언했다가 팔다리가 잘리고 활을 맞아 죽었다. 그의 양자와 7촌 친척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연산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김처선의 고향 충남연기군 전의면 동교리 집을 파헤치고 연못으로 만들고 전의김씨 집성촌도 없애버렸다. 김처선의 죄명을 “바윗돌에 새겨 땅속에 파묻으라.”고도 했다. 그리곤 處자와 善자가 들어가는 모든 문서의 이름을 모두 다른 글자로 바꾸게 하는 가혹한 보복을 하고는 “처선에게 당한 봉변은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라고 시를 썼다. 어느 날 舍人 성몽정이 문서에 處라는 글을 썼다가 국문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4등공신에 오르고 훗날 대사헌까지 올랐다. 연산은 6개월 뒤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 그 후 250여년이 지난 영조 때 김처선의 신원이 복구되었다.
엄자치嚴自治: 세종, 문종 단종 세 임금을 모셨다. 계유정란공신에 오르기도 한 인물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봉정李奉貞: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부로 파천 길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해 왜군을 막아야 한다’는 방법을 제시해 선조의 환심을 끌었다. 그 후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원 독성진의 兵士武才를 시험관으로 파견돼 상벌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선조는 그에게 많은 어필을 내리기도 했는데, 후손이 그 어필을 인조에 바치고 6품 벼슬을 받기도 했다.
김계한金繼韓: 선조 때의 내시로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임금의 안위를 지킨 공로로 호종공신에 봉하자 이를 취하하라는 양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연양군호延陽君號까지 받아 시조로서 초안산에 묻혔다. 그는 사극 ‘왕의 남자, 내시의 세계’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양주에 사는 그의 13대 후손 김흥주金興柱가 내시계보를 정리한 족보가 코베이옥션이 주관하는 경매에서 시작 가 200만원에서 75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정동鄭同: 세종 때 명나라에 공납된 내시로 황제로부터 영민함을 인정받아 태감으로 불릴 정도였다. 예종, 성종 때 명나라로 가는, 조선사신은 맨 먼저 태감부터 만나 뵙고 일처리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는 명나라 사신을 따라 조선을 5번이나 다녀갔다. 당시 각궁제조에 필수품인 물소 뿔이 중요무기 부품에 들어 수출을 금하고 있었는데 정동이 나서서 해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유재현柳在賢: 고종과 민비의 신임이 두터웠던 내시로 갑신정변 때 정보를 왕에게 알려 경우궁으로 이어한 다음 날 낌새를 알아차린 윤치호, 서재필 등 개화파에게 살해당했다.
박상검朴尙儉: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붕당 대립의 와중에 1721년왕세제(王世弟)이던 이금(李昑, 뒷날의 영조)을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환관 박상검(朴尙儉, 1702~1722) 등의 궁인(宮人)들이 처벌을 받았다. 소론의 지지를 받은 희빈 장씨(嬉嬪張氏)의 아들인 경종과 노론의 지지를 받은 연잉군(뒷날의 영조)간에 벌어진 왕권후계자 책봉싸움에서 노론의 압력에 굴복해 경종이(경종 1)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고 대리청정하게 하자, 위기에 몰린 소론이 다시 경종을 설득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자연히 소론과 노론 간에 대립이 격화되자, 경종과 소론은 내시 박상검을 내세워 경종을 문안하러오는 연잉군을 해치고자 작전을 짰다. 이윽고 연잉군이 음력 12월 22일 밤 왕을 문안하러오던 연잉군을 박상검이 가로막고 나섰다. 놀란 연잉군이 입직궁관 김동필을 불러 구해달라고 했고, 김동필은 다음날 대신들에 알려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문유도(文有道), 궁인인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을 붙잡아 문초를 하려 했으나, 석렬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필정도 옥중에서 자살했다. 음력 12월 29일 박상검과 문유도에 대해서만 국문(鞠問)이 이루어졌으나 이들은 끝내 입을 다물고 경종과의 밀의密意를 지켜 끝내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관련자들을 추가로 잡아들여 심문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조정은 1722년(경종 2) 음력 1월 4일 문유도가 심문을 받던 도중에 목숨을 잃자 1월 6일 박상검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 외에도 중종반정 때 6명의 환관이 공신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24명의 환관이 선조의 피난을 돕고 공신에 올랐다.
권력내시
김자원金子猿:이 연산군 때 대표적 간신내시다. 이름에 원숭이라는 글자에서도 짐작이 가듯 나주 출신으로 직급은 4품에 지나지 않는 승전색 내시로 수장인 상선의 통제에서 벋어나 왕명을 사칭으로 직급을 올리거나 내리기도 하였다. 그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왕을 만날 수 없는 등 위세를 떨치며 가는 곳마다 뇌물을 받았다. 연산군은 수족 같은 김자원은 내시를 앞세워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추었고, 그를 이용해 양반들의 치부를 들춰낸다거나 또 정보를 캐냈다. 김자원은 이런 관계를 적극 이용했다.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처족들이 궐내 색장에 많이 소속되어 권세를 부렸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군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종적을 감췄다.
최세연崔世延: 독살스럽고 투기가 심한 처에 노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 충렬왕과 공주의 사랑을 받으며 칼싸움놀이로 총애를 받았다. 세자에게도 못되게 굴다가 세자의 탄핵을 받았는데도 충렬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사행金師幸: 원나라에서 돌아와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내부판사에 이르렀으며, 공민왕6년 왕명을 따라 노국대장공주의 魂殿인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하고, 민생을 괴롭혔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공민
왕을 꾀어 대공사를 일으킨 죄로 가산이 몰수되고 익산으로 유배되어 관노가 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391년(공양왕3)에 내시부판사가 되어, 왕을 경연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법을 강론하여 이를 믿게 하였다. 조선 건국 후인 1393년(태조2) 태조의 총애를 받아 내부시판사가 되어 조선의 내시를 완전히 환관으로 대치하는 내시부제도를 정비한 공로로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에 가락백(駕洛伯)으로 봉해져 항상 가마를 탄 채 궁궐에 드나들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붙잡혀 효수되었다.
이만李萬: 제대로 거세되지 않은 이만은 이를 기화로 세자빈 유씨와 육체관계를 맺었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유 씨 역시 궁궐에서 내쫓겼다.
박한종朴漢宗: 중종·인종·명종 등 3대를 섬기면서 진작 중종29년 승전색이 되었으며,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소윤에 가담하여 인종의 병세를 문정왕후에 일러바친 공로로 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密城君에 봉하여졌다. 명종4년 영의정 이기, 우의정 심연원과 함께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자식들을 적자로 만들어 준 공로로 內需司 提調로 발탁되었다. 제조가 되면서 선공감이 하던 궁권공사까지 맞아 경복궁 강녕전을 수리하다가 아궁이 과열로 불을 내 타버리자 삭직되었다. 1560년 다시 동궁소속의 承言色이 되어 세자 輔養官까지 맞으면서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고, 겸해서 그의 양자 박세겸도 역마를 타고 함경도로 돌아다니면서 왕명을 사칭해 뇌물을 챙겼다.
명종18년 박한종이 죽자 명종은 “국가에 큰 불행이다!” 한 반면, 시중에선 윤원형의 심복 陳復昌, 승려 보우와 함께 나라를 망치는 3대 원흉으로 여겼다.
이말산 내의 왕족묘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이인(李䄄)의 묘:1754.5.29.-1801.6.30.)-정조가 끝까지 목숨을 지키려했던 은언군
이말산에는 정조가 노론과 정순왕후의 집요한 살해 위협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주려고 했던 이복동생 은언군의 묘자리가 남아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훗날 철종의 할아버지가 되고, 천주교의 궁중전교의 효시가되기도 한다.그러나 불행히도 그 의 묘소자리는 타인손에 넘어가고 묘와 신도비, 묘비 등 묘설물들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스러움이 앞선다. 그 사연 속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나인 출신 후궁 숙빈 양제임씨의 아들이며, 정조와는 이복동생관계로 친동생으로는 은신군과 이복동생 은전군이 있다. 부인은 11세 때 결혼한 진천인 송낙휴의 딸 송씨다.
노론의 후원으로 왕에 오른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 세자의 여러 후궁들의 직위를 박탈하고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죽은 세자가 남인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17세의 은언군과 동생 은신군도 내쫓겼다. 그리곤 은언군 형제들이 하인배를 많이 거느리고 가마를 타고 다닌다고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로 노론 인물인 김귀주의 고발로 관직에 서용하지 못하도록 처벌을 받았고, 당시 가마를 구해 준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그의 아들 홍낙성도 함께 처벌을 받았다.
할아버지 영조의 눈에 난 은언군, 은신군 형제는 가난에 시달리다가 상인들에 진 빚이 문제가 되어 직산을 거쳐 다시 제주 대정현으로 안치되었다. 1774년 동생 은신군이 귀양지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어려운 유배생활을 근근이 버티다가 3년 만에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돌아와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2품 품계가 주어지기도 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은언군은 원릉수릉관을 거쳐 종친부제조, 산릉수릉관에 임명되고 오위도총관에 올라 매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 탄신일을 각별히 챙겼다고 한다.
정조2년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해 팔았다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으나 정조가 무마시키기도 했다.정조2년 세자시절 설서로 있던 홍국영이 도승지로 오르면서 기세가 등등해진 그는 자신의 13세 된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 원빈으로 들였다가 1년 만에 사망하자, 홍국영은 힘없는 은언군을 꼬드겨 그의 아들 담湛을 完豊君(개명 상계군)으로 부르면서 죽은 원빈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조 사후 왕위를 잇게 하려 공작을 펴다가 전모가 들어나 홍국영은 모든 관직에서 쫓겨난 채, 노론 벽파대신들의 거센 상소로 역모죄로 몰려 강원도 횡성과 강릉으로 귀양을 가 34세에 사망했다.
하지만 은언군의 장인이자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가 상계군이 역심을 품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안동김씨(노론집안)까지 은언군 부자를 홍국영과 한 패거리라면서 역모 죄로 엮어 몰아치자 상계군은 자살했고, 은언군도 끝없는 상소에 시달리지만 정조는 사도세자의 피붙이가 자신과 은언군 뿐이었으므로 구명받아 사형을 면제받고 귀양지로 제주도로 정했다가 다시 진도로 바뀌는 곡절 끝에 정조의 배려로 가까운 강화도로 귀양지를 옮겼다.
이 때 뒷날 철종의 아버지가 되는 전계군(뒷날의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막내 5남으로, 은언군과 첩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지 몇 년 안 된 어린 아이였다.
정조의 끈질긴 은언군 구명운동: 정조14년(1794)11월13일 정조는 사람을 강화도로 보내 은언군을 불렀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방해로 못 만날 것을 우려한 정조는 용산 별영에서 만나기로 밀약하고 4인이 메는 교자 3채를 보냈다. 1채에는 내수사 관원을 태웠고, 1채에는 의복을, 나마지 한 채는 은언군이 타고 오도록 빈채로 보냈다. 일행은 11월14일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성문을 몰래 빠져나왔다. 하지만 정순왕후와 내통한 강화성을 지키는 장수들이 3일 동안 문을 열어주지 않자 정조는 2차, 3차 선전관을 파견했음에도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장수들을 볼기를 치는 곡절끝에 새벽에야 은언군을 교자에 태워 겨우 탈출시켰으나 또다시 정순왕후가 보낸 내시들에 의해 가로 막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정조는 염탐기병을 보내 내시들을 끌어내고 은언군을 태워 마포로 오게 했다.
정조는 11월18일 융복에 말이 끄는 가마를 타고 정순왕후가 눈치 채지 못하게 무사들에게 활쏘기시합을 시켜가며 용산별영으로 갔다. 은언군의 교자가 밤을 틈타 언 한강을 건너 도착하자 급히 은언군의 생모 숙빈 임씨를 불러 모자상봉을 끝내니 날이 밝았다.
은언군 탈출이 알려지자 권신 등 162인이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인 채제공 마저 진언하자 정조는 “경은 70노인으로 지금 추위가 살을 에는데 밖에서 거적을 깔고 앉았으니 너무하다”며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바로 언문전교를 내려 역적을 성토할 것을 촉구하였고, 대신들은 정조면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은언군을 궁궐에 숨기고 면담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이 허락도 없이 문을 밀치고 들이 닥쳤다. 사헌부 지평 강극성은 도끼를 들고 들어와 손가락에 상처를 낸 혈서로 은언군 머리를 벨 것을 상소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정조는 도성 밖으로 나가거나, 단식으로 맞서며 은언군 지키기에 나서자 은언군을 죽이지 않는 대신 유배하기로 했다. 유배지가 제주로 결정되자 정조가 반발하자 다시 전라도 진도로 정했으나 정조는 또다시 진도는 너무 멀다며 강화도로 바꾸어 정배하도록 했다. 이 후 정조는 강화도로가서 유배지 근처에 유숙하며 항의성 시위를 벌리기도 했다.
정조는 이후 혜경궁홍씨 생일이나 사도세자의 기일, 정순왕후의 생일 등에만 은언군을 일시 방면시켜 왕궁에 초대되었다가 행사가 끝나면 강화도로 되돌려 보내곤 했다. 노론의 벽파들은 은언군이 국법을 어겼다며 탄핵상소가 빗발쳤으나 상소를 올린 승지 이익운을 파직해 강화부로 유배를 보내는 등 강경한 의지를 보였다. 그럼에도 은언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은언군의 가족과 천주교: 이즈음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종로구 송현동 근처의 폐궁으로 알려진 양제궁良娣宮에서 살면서 천주교인 강완숙姜完淑의 도움으로 가회동(성당)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서 각각 마리아 세례를 받았고 시비들도 입교시켰다. 이로써 왕족이 최초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선례가 되었다.
정조의 사망으로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강화도에 유배중인 은언군 일가에 칼을 뽑아들었다. 먼저 천주교를 박해하자 주문모 신부가 자수를 했고, 이어 시비의 밀고로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 등 두 마리아에게 먼저 사약이 날아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은언군은 강화도에서 탈출하다 붙잡혀 3개월 만에 사약이 내려졌으니 48세였고, 뒷날 철종의 아버지가 되는 전계군의 나이는 이제16세였다.
전계군은 부모와 형, 형수의 죄로 교동으로 쫓겨 가 빈농으로 살다가 헌종7년 사저에서 57세로 별세하자 아버지 은언군 묘 옆에 안장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노론세력들은 만만한 왕족을 골라 왕을 삼으니 철종으로 은언군의 막내 5남 전계군의 3째 아들 원범이다. 원범이 즉위하자 영의정 권돈인이 철종에게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묻자 “통감2권과 소학1.2궈을 읽었으나 근년에 읽은 것은 없소”하였다.
철종이 등극하자 비로소 전계군을 대원군으로 추봉하고 은언군과 함께 다시 묘역 재벙비에 들어가 각종묘설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철종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짓고 조인영이 글을 써 신도비를 세우고 정기적으로 제각을 찾아가 참배하였고, 그래서 이 동네에 제각말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김좌근이 짓고 철종의 장인 김문근이 글을 써 세운 비석과, 대제학 조두순이 쓴 신도비를 세운 전계대원군의 묘는 철종7년 3월26일 포천시 선단동으로 이장하였다.
은언군 이인 묘: 옥구임씨 상궁묘 근처(위쪽?)인 진관동 산90-4 酉坐(제각말푸르지오523동 뒤)에 있었다. 전계군묘를 이장한 후 58년 만인 1914.4.1. 후손 이완용이 묘지를 타인에게 매각하고 은언군의 유골은 화장하였으며, 문무인석, 장명등, 고석등 묘설물들은 흥창사 뒷산 창건주의 무덤으로 옮겨졌고, 신도비(이 신도비건립 년대는 崇禎紀元後4 辛亥8月로 되어있어 풀어보니 1851년 월 철종2년에 제작한 것)는 흥창사 경내 창건주의 송덕비로 둔갑되고, 철종이 글을 지어 세운 묘비는 1989.9.26.일 후손 이우용이 은언군이 받은 사약이 천주교와 연관이 있다하여 천주교에 기증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철조망으로 둘러친 옛 묘 터(위 사진참조)에는 은언군과 그 가족의 옛 묏자리임을 알리듯 빈 좌대와 상석 5점과 짝을 잃은 1개의 망주석 만이 덩그러니 남아있고, 새 땅주인 것으로 추정되는 묘 2기가 이 석물들을 지키고 있다. 진관외동 145번지에 있던 신도비각과 제각은 1951.1.4. 후퇴 때 영국군의 화목으로 살아지고, 恩彦君墓所宇內賜牌禁表碑는 은평뉴타운 한옥박물관 야외에 전시장으로 흩어져 있다.
포천시 선단동에 있는 철종의 생모 염씨 묘와 부친 전계대원군과 그의 부인 최씨 묘 3곳엔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화병돌이 놓여있는데, 천주교는 조선왕조에서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라 철종 즉위 후 3대에 걸친 철종 집안의 천주교기록이 왕조사에서 모두 지워졌음에도 이 화병들은 이 분들이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물증이라 할 수 있다.
은언군파 후손들은 현재 20여 세대에 불과하지만 스위스그랜드호텔 주인인 우영(愚英)과 중앙대 교수 우진(愚振)형제와 그들의 숙부 영주(寧柱 :전 낙선재 비서실장), 그리고 세용(世鎔 :송파구의회 의원) 등이 있다.
궁녀란?
궁녀란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으로, 다음과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통 궁녀라 하면 넓은 의미의 다음과 같은 직급의 여인들을 말한다.
①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민족 항일기에는 궁 밖에서 매일 통근하는 제도였다고 하나, 원래는 궁중에 붙박이로 소속되어 있었다.
②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비번 날 사는 개인 집인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이다.
③ 손님 : 왕의 후궁의 집에서 살림을 맡았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④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궁중 내의원(內醫院) 소속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임은 평상시에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기도 하고 비·빈들의 해산에 조산원(助産員) 노릇도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한다.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이기도 하다.
원래 의녀 제도는 궁중에서 비빈을 비롯해 궁녀들이 내외법으로 말미암아 남자 의원의 진맥을 회피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태종 때 창고궁사(倉庫宮司)의 어린 비자(婢子) 중에서 수십 명을 뽑아 진맥과 침 놓는 법을 가르친 것이 그 시초이다.
그러나 원래 배우지 못한 천민이라 무식해서 별로 성과가 없었으므로, 연산군대에 와서는 서울 각 관청에서 잔치가 있을 때 아예 화장을 시켜 기생으로 참가시켰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내려왔다.
고종대만 해도 의녀의 수가 80명이나 되었으나, 서양의사(西洋醫師)가 궁중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의녀 제도는 없어졌다.
⑤ 나인 :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실제로 궁녀는 왕족의 사생활을 위한 일종의 사치 노예이므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왕족의 각 독립처소였다. 독립된 처소로는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지밀나인은 몸종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가장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사양[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또는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본궁의 궁녀들은 별궁나인을 ‘궁것’이라고 경멸했다. 본궁의 경우, 왕을 비롯해 모두 독립세대로 영위되며 왕과 왕비와 왕대비 등은 같은 규모의 궁녀 인구를 갖는다.
궁녀가 90명이라 할 때 왕·왕비·대비전의 처소별 궁녀수는 대개 지밀 20∼27명, 그밖에는 15∼20명 정도로 추측된다.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즉,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그리고 일명 지밀상궁으로도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했다.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와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입궁
보통 입궁은 생 각시로 하게 되는데 지밀나인은 4-5세, 침방과 수방은7-8세, 나머지는13-14세 때 선발되었다. 주로 가난한 평민출신이나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대상이었다. 생 각시들은 수습나인으로서 전문교육을 거친 다음 15세가 되면 관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어 항아님이라 불리고 내명부의 하급 품계를 받았다. 그때부터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을 입고 단체 생활에서 벗어나 궐내에 독립된 방이 주어지고 각방서리라 하여 밥 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둘 수 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궁녀의 보수는 고정적으로 아기나인이 한 달에 백미 너 말(4斗 : 오늘날의 3두꼴)이고, 옷감이 1년에 명주와 무명 각 1필, 여름에는 베·모시도 하사품으로 내려 충분히 쓰고 남을 정도였다. 식생활은 궁중에서 해결되었으므로, 이러한 보수는 친가 부모·형제들에게 보탬이 되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단,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이들은 궁중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옷은 그런대로 입었고 밥도 굶주리지는 않았겠지만 잠은 마루로 된 냉골 판방板房에서 자야했으며, 부모형제나 친척들도 만나볼 수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들어온 무수리들에게는 가혹한 궁중생활이었던 것이다.
영조의 모친 숙빈최씨의 출생과 입궁
아마도 최 씨 역시 생계나 양육 문제가 어려워 어린 나이에 친척들에 의해 궁중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은평구 이말산의 영조 장인 최효원 묘. 이 묘 양 옆엔 최 숙빈이 낳다 죽은 첫째와 세재 아들 묘가 있다.
숙빈최씨(현종11.1670-숙종44.1718)는 해주가 본관으로 1670년 서울 여경방餘慶坊 서학동西學洞(세종로 일대)서 태어났다고 신도비명에 적고 있다. 부 최효원 모 남양홍씨. 조부는 최태일, 증조부는 최말정, 고조부는 최억지라 하나 족보에는 실리지 못했다.
최 씨는 최효원의 막내로 태어나 겨우 3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현종13년(1672) 35세로 사망하한데다, 또 이듬해 어머니 남양홍씨까지 세상을 떠났으므로 최 씨는 네 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고아로 자랐다.
하지만, 정읍지의 최 씨의 출생기록은 이와 다르다. 나주목사가 영광군수로 부임길에 태인 대각교大脚橋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고, 목사부인 민 씨가 불쌍히 여겨 친척인 민유증에게 거두게 하였는데, 훗날 민유증의 딸 인현왕후가 간택되어 입궁할 때 7세의 어린 나이로 따라 들어가 옷 짓는 일을 했단다.
그러나, 영조는 숙빈이 태어난 서학동을 매우 중시하여 장인 최효원의 외조부 홍계남洪繼南의 자손을 대대로 살게 하면서 팔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녀의 선대 고향은 전라도일 것이나 출생지는 한양인 듯싶고, 또한 정읍지의 기록대로 최 씨가 인현왕후를 따라 입궁했다면 당시 그녀의 나이는 7세가 아니라 13세가 되어야하니 왕후 민 씨를 따라 입궁한 것은 아닌 듯싶다.
하여간, 최씨는 3살 때 아버지가, 4살 때 어머니가 각각 작고하여 고아가 된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녀가 고아가된 현종연간에 9회의 역병대유행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부모가 전염병에 희생된 게 아닌가 한다.
그 때 오빠 최후는 겨우 10살 전후였고, 언니는 대여섯 살쯤 되었으니, 그 집안의 절박했던 형편을 가히 짐작할 만 하다. 10살도 넘지 않았던 어린 고아 3남매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가 호남에서 상경해 종6품의 하급 무관직인 행충무위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벼슬하던 가난한 사람이었으므로 서울사람인 외조부 홍계남으로부터 다소간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아울러 숙빈최씨 부친 최효원 묘역에 홍계남과 외삼촌 홍계웅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점도 외가에 도움 설에 설득력을 갖게 한다.
숙빈은 1676년(숙종2) 6살이 되던 해에 무수리로 입궐하였다.
그녀는 만만찮은 궁녀생활 속에서 신중하고 감정 표현을 절제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소하며 자만하지 않고 궁녀수습기간 15여년을 보내며 점점 어린이 티를 벗고 꽃다운 처녀로 성숙해 바느질하는 침방의 견습과정을 거쳐 정식 나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인 최씨, 승은을 입다.
숙종이 14세에 결혼한 이듬해 6세의 최 씨 생각씨로 입궁하였고, 그 4년 후 인경왕후 김 씨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현종6년(1680) 남인의 추천으로 최 씨보다 11년 연상의 장옥정이 궁녀로 입궁하였다. 이내 숙종이 장 씨에 빠지자 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굴다가 모후 인경황후 김 씨의 눈에 나 장 씨가 궁궐에서 쫓겨 난데다가, 경신환국이 일어나 영의정 허적 유악사건이 발단에 이어 삼복三福의 역모 변까지 발생했다. 숙종은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 송시열등 서인정권을 불러들였다. 숙종7 송시열의 추천으로 20세의 숙종이 14세의 인현왕후 민 씨와 재혼을 했다. 그 2년 후 쫓겨났던 장 씨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모후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장옥정을 3년 만에 다시 불러들여 숙원으로 책봉한 것이다. 2년 후 장 씨가 경종 균을 낳자 원자로 삼고 장 씨를 희빈으로 책봉하면서 끝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왕비자리에 까지 올랐다. 이를 반대하던 송시열, 김수항, 김수흥 등을 귀양 보냈다가 사사하고 남인을 다시 불러들이는 기사환국이 발생한 것이다. 그 무렵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을 두둔하다가 남해에 귀양중인 김만중도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간접적으로 장 씨를 공격했다.
그렇게 왕비 장 씨와 2년을 보내던 29세의 숙종이 우연한 기회에 9살 연하의 최 씨를 만났다. 그 무렵 숙종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하는 장 씨에게 실증을 느끼고 쫓겨난 인현왕후 민 씨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차에, 궐내를 산책 중, 때마침 사가에 나가있는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최 씨의 순덕한 심성에 반해 승은을 입히고 종4품의 숙원을 내린 것이다. 이후, 숙종은 숙원 최씨의 마음씀씀이에 반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찾았다. 민 씨가 폐출 된지 4년만의 일로, 그녀가 한참 때를 살짝 넘긴 만23세 때였다. 일개 궁중나인이었던 최 씨에겐 인생의 대전환점의 기회가 됐던 것이다.
연잉군(영조)이 태어나다.
이듬해 10월에 최 씨가 왕자 영수永壽까지 낳자 총애가 잇따랐다. 비록 2달 후 왕자는 죽고 말았지만 이내 재 임신해 연잉군을 출산하자 숙종은 “에미를 닮았으니 몸은 튼튼하겠구나.”라고 매우 기뻐하면서 종2품 숙의로 추봉하였다. 이렇게 되자 최 씨가 남인의 후원을 받던 왕후 장 씨로부터 심한 질투와 견제를 받았고, 소론에서도 때를 놓칠세라 숙의 최 씨에게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노론의 김춘택이 손을 쓰러 나섰다.
김춘택은 숙종의 장인이었던 김만기의 손자였습니다.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그는 인현왕후 집안과도 밀접해 인현왕후 복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내연 관계를 형성한 후, 그녀에게 남인 내부의 정보를 얻어내 인현왕후 복위에 이용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김춘택은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 씨의 조카로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의 증손자이기도 한 배경으로 궁중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숙의 최 씨방을 기웃거리며 인현왕후 복위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의 첩과 사통해가며 빼낸 남인 내부의 정보로 숙종의 유모를 꼬드겨 장씨왕후가 최 숙의를 독살하려 한다고 최 씨를 설득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시중에 퍼트렸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이니 철이 없는 호랑나비 오락가락 하는구나.”
김춘택의 베갯잇 송사설이 주효했나, 마침내 왕후 장 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의 최 씨를 독살하고 남인들이 정변을 준비한다는 소문과 고변이 올라오자, 숙종은 격노했다. 장 씨 왕후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비를 폐출 된지 5년 만에 다시 복귀시켰다. 남인들이 정계에서 쫓겨나고 민 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민지환등이 조정 요직을 차지했다. 노론측도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조사석등이 신원 복관되는 갑술환국이 발생한 것이다.
이듬해인 숙종21년(1695) 최 씨 귀인이 3남을 임신하자 단종복위 기념으로 종1품 귀인으로 진봉시키고. 전답 160여결(약 48만평)과 노비 10여명을 하사했다. 비록 최 씨가 낳은 3남이 곧 사망하긴 했지만 그 4년 후(숙종25년.1699)엔 29세의 최 씨에게 전례를 깨고 정1품의 숙빈을 내리는 파격이 잇따랐다. 이어 연잉군 탄생축원기도처인 파계사를 왕실원당으로 지정하고 시주를 내려 국보 67호인 각황전을 건축했으며, 부속암자 성전암에 어필편액을 내리기도 했다.
숙빈이 된지 2년 후인 숙종27년 인현왕후가 복귀한지7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자, 왕후에 깊은 은혜를 입은 숙빈 최 씨가 인현왕후저주사건을 발설하고 말았다.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의 인현왕후 거소 주변에 꼭두각시를 묻어 저주했다”는 것이다. 저주에 나섰던 무녀, 후궁, 장희재와 그의 첩을 참하고 장 씨에게 사약을 내리자, 세자 경종과 소론의 이상진과 남구만,·최석정 등이 나서서 특별히 용서하기를 간청했어도 소용이 없었다. 장 씨가 사사되자 그 시신이 오포읍에 매장되었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사사 된 후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교지를 내리기 까지 했다. 그 후 숙종의 빈 마음을 채워준 사람은 숙빈 최씨였지만 그녀는 숙종의 교지에 따라 중전이 될 수 없었다.
최 숙빈이 연잉군과 함께 살다.
숙빈 최 씨가 32세가 되던 해 16세의 숙종이 소론 집안의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 경주김씨와 세 번째 재혼을 하자 숙종은 8세의 아들 연잉군을 새 왕후에 입적시키고, 최 숙빈을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梨峴宮(종로4가 인의동소재)을 30마리의 말을 동원해 3개월간 대대적 수리를 해서 나가살게 하였다. 이 즈음 숙종이 장희빈을 사사한 일을 두고 후회하고 있었나. 이후 숙종은 숙빈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고 한다. 숙빈은 이현궁에서 7년을 혼자 살았는데, 사람들은 이 집을 숙빈방이라 불렀다.
아들 연잉군이 10세에 결혼하자 숙종은 통의동 순화방에 창의궁을 지어주고 출궁해 살게 하였다. 그리고 이현궁의 숙빈을 이곳으로 옮겨 살게 함에 아들과 오래간만에 재회해 10년을 함께 살았다.
연잉군이 2년 연상의 달성군부인 서 씨와 혼인한 첫날 밤 그녀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곱냐.”고 물어보자 “험한 일을 하지 않아서 그리하였다”고 대답하니 연잉군이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 씨를 업신여긴 것으로 생각하고 평생 정을 주지 않고 소박을 논 까닭에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실을 떠나서, 이 말은 당시 신하들이 영조의 어머니 최 씨를 은근히 무시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동네에선 순화방 아들집으로 돌아온 숙빈의 출신을 들먹이며 연잉군에게 ‘네 어미는 종이다(爾母婢也)’라고 무시하기 일쑤였으나, 개의치 않고 어머니를 존경하며 8년을 같이 살았다고 전한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묻기를,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하니 “중누비, 오목 누비, 납작 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하고 최 씨가 대답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임금이 된 영조는 평생 동안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고 한다. 이는 후대에 구전으로 전해 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숙빈이 한 때 침방나인으로 일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여기서 최 씨의 무수리 출신 설은 잘못 와전되었음이 분명하고, 정사에는 어디에도 무수리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숙종42년(1716) 숙빈이 46세로 병이 들자 나가 치료하라는 어명에 따라 인왕산자락 장의동藏義洞(효자동)사가에서 2년을 머물다가 48세로 사망하였다.
임상궁 묘
숙빈최씨의 부친 최효원 묘 위로 올라와 동쪽으로 10여분 가다가 우측으로 빠져 내려가면 제각말 여우꼴 입구로 내려가는 길목에 임상궁 묘가 있다. 묘는 도굴되고 묘비만 남아있다. 땅은 사유지라 매입비용에 수백억이 소요된다고 한다.
부친 옥구 임씨 동지중추부사 임효원은 재산을 가벼이 여기고 동네 위급한 일을 구제해 칭송이 자자했다고 묘비문에 적었고, 임씨는 입궁해 실수한 적이 없다고 했다.
13세로 입궁해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숙종의 어머니 명성태후를 모셨고, 숙종의 막내 여동생 명안공구 집에 가 19년을 살면서 집안일을 도맡으며 40여 년 간 효종, 현종, 숙종 등 4임금을 모셨다.
75세로 사망하자 관재와 포백을 내려 신혈리 동남쪽에 장사지내니 부모와 선영이 있는 곳이다. 장사 지낸지 4년 후 숙종39년 5월 비를 세웠는데 상궁묘비로는 유일하다고 한다. 이 묘비 아래에 보모상궁 김씨묘(위치?)가 있고 위쪽에 은언군의 묘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