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강기희 연보
1964. 3. 7. 강원도 정선 출생
1998. 《문학21》 소설 신인상
1999. 장편소설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
1999. 장편소설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2001. 장편소설 『은옥이 1,2』
2001. 장편소설 『도둑고양이』, 제1회 디지털 문학대상 수상
2003. 도시 생활을 떠나 고향 정선으로 돌아오다
2006. 장편소설 『개같은 인생들』
2012. 장편소설 『연산-대왕을 꿈꾼 조선의 왕』
2013. 친일파 이범익 단죄비 세우다
2016. 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
2018. 장편소설 『위험한 특종-김달삼 찾기』
2019. 3.1 만세혁명 100주년 기념 정선 거리 행사 추진
2020. 장편소설 『이황-김팔발의 난』
2020. 친일파 박춘금 단죄비 세우다
2020. 정선 평화의 소녀상 세우다
2020. 장편소설 『이번 청춘은 망했다』
2021. 일제 강점기 정선 신사터 표지판 세우다
2022. 시집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
2022. 정선동학농민군 역사비 세우다
2022. 소설집 『양아치가 죽었다』
그 외 『정선아리랑역사기행』 『정선인문기행』 『정선』 등 출간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회원, 정선시민연대대표, 정선문화연대대표,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 역임
2023. 8. 1. 덕산기 숲속책방 지킴이가 되다
정선을 사랑한 소설가 강기희와 내 아름다운 남은 생
유진아 동화작가
정선에서 태어나 정선에서 자랐고, 정선에서 마지막 호흡을 다한 소설가가 있다. 고 강기희작가다. 그가 쓴 글들은 대부분 고향 정선에 바치는 사랑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연산군의 아들 이황이 정선으로 유배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제주 4.3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정선의 관계를 몰랐을 것이다. 투병하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물었을 때 “없다. 내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말은 작품에 다 써 놓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고향 정선을 한없이 사랑하며 탐구한 소설가였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강기희 작가는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는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아라리촌에 가면 ‘강원도지사이범익각하영세불망비’가 있다. 이범익은 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를 창설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강기희 작가는 이 비석을 없애는 대신 그 옆에 비석 하나를 더 세우고자 계획했다. 뜻을 모아 결국 ‘거물친일파 이범익 영세불망비 단죄문’비석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이 불망비가 먼지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이범익의 친일행각을 기억하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단죄문을 쓰던 강기희 작가 표정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책무를 다한 홀가분함이 보였다.
아라리촌에는 정선에서만 볼 수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시민 모금으로 소녀상 건립을 추진하였는데 청동 소녀상을 주문하기에는 기금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정선 소녀상은 흙으로 구워 만들게 되었다. 그 결과 토속적이면서도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소녀상이 탄생하였다.
관광지로 유명한 화암동굴에 가면 ‘친일파 박춘금 단죄비’가 있다. 동굴 박쥐 형상으로 제작된 탑 모양의 단죄비로 천포금광(련 화암동굴) 주인이었던 박춘금의 친일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화암동굴 관람을 마치고 출구로 나오면 주차장에 세워져 있으니 한 번쯤 눈여겨 봐주기를 바란다.
강기희 작가는 일제강점기 신사터가 어디에 있을까 늘 관심을 갖고 어른들께 질문하고, 문헌을 뒤적이곤 했는데 비봉산 옛 충혼탑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자리에 정선일제신사터 표지판을 세웠다.
녹송공원에 가면 ‘정선동학농민군역사비’가 있다. 녹도(현 녹송공원)는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역사비는 이곳에서 효수당한 농민군과 지도자 지왈길 장군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기억하지 않으면 진실은 사라집니다.” 강기희 작가의 말이다.
강기희 작가가 기록한 진실은 그가 남긴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났지만 치열하게 기록하고 남긴 흔적들을 통해 우리 기억 속에 잠시나마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별을 겪고 그 아픔까지 이겨낼 수 있어야 오래 사는 것도 행복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직은 너무나 커서 지금은 오래 사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에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지난 8월 1일 눈을 감았다. 병원을 다니는 중에 스스로 연명 치료 거부 신청을 하고 등록 카드를 내게 가지고 있으라고 툭 내밀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가 암을 이겨내고 반드시 살 거라 확신했기에 웃으며 그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음식을 삼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수액 링거줄을 줄줄이 달고, 호흡곤란으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점점 더 강한 진통제를 투여해야만 하게 되자 ‘연명치료거부’ 카드는 내게 고문 도구에 다름 없었다. 그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남편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는 족쇄였던 것이다.
작가로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할 일이 많았던 남편은 나를 늘 외롭게 한 사람이었다. 아내로서 여자로서 나는 때때로 서운했고, 더러는 미웠고, 수시로 원망했었다. 그가 떠난 후 무너져내린 마음에는 세월이 정직하게 축적해 놓은 지층들이 켜켜이 단면을 드러냈다. 미움의 깊이, 원망의 높이, 서운함의 긴 띠가 무한대로 이어져 쌓여 있었다. 부끄러운 어느 한 층을 감쪽같이 파내어 흔적을 지우려 해도 이것들이 서로 끈끈하게 맞물려있어 어느 한 부분을 허물면 내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도록 촘촘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하여 나는 남편을 추모하는 글을 쓰면서도 미움, 원망, 서러움 같은 단어들을 하염없이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통곡하고 애곡하며 뒤늦게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다. 미움과 원망과 서운함과 서러움으로 채색되어 알아보기 어렵지만, 이 모든 지층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수없이 변주된 절절한 사랑이었고, 사랑받고자 하는 간절함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유리문이었던 책방 유리창이 깨졌을 때 나는 그 유리가 아깝다는 생각보다 속상해할 남편이 더 가엾고 속상했다. 나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옆에 있을 때 그 사실을 몰랐던 바보였다. 한 번만 더 끌어안고 말해줄 수 있다면 사랑해, 사랑해,라고 수없이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자존심과 욕심만 부리느라 수많은 기회를 안타깝게 놓치고 후회의 눈물만 미련하게 흘린다.
남편은 마지막 순간에 바늘, 산소마스크, 끊임없는 채혈, 각종 검사를 거부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아름답다는 말을 이렇게 슬프고 아프게 쓰다니. 이제 아름답다는 말은 내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특수문자로 남았다. 그가 아름답게 갔듯이 나도 아름답게 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할 내 아름다운 생은 이렇게 또 슬프고 아픈 것이 되고야 말았다.
유진아 김포 출생. 장편동화 『아라리할아버지』 외. 정선아리랑문학상 외 수상.
한세상 잘 놀다 가는 거외다
―故강기희 작가에게
이 승 철
우리 몸속에 삶과 죽음이 깃들어 있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지상 위로 닻을 내렸을 때는 홀로 떨구어졌지만 떠날 때는 이토록 만인의 가슴팍을 사무치게 하는구나. 일국의 작가로서 상처뿐인 현장에서 몸부림치다가 혹은 시인으로서 예언의 나팔을 불다가 죽는 그 순간까지 글을 썼던 그 사람이 기어이 떠나가시는구나.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 떠오른다. 저리도 몸부림치며 전진을 거듭하다가 돌연 종착역에 당도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뭐 살아보니 별것도 아니더니만, 목숨 줄과 맞바꾼 정선 덕산기 ‘숲속책방’은 어이하라고, 더 다정할 수 있었던 그대 아내 유진아 작가만을 홀로 남겨둔 채 끝내 그대는 옛살라비로 되돌아갔구나.
마지막 열차 시간이 머지않았건만 탑승을 거역하고 말겠다는 그 단호한 의지는 매매일 ‘페이스북’으로 전해졌고, 그대 안녕에 우린 한마음으로 ‘좋아요’를 몇 번이나 눌러댔던가. 그리하여 지난 2023년 6월 3일 숲속책방 재개관식 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정한 벗들이 오직 당신 쾌유만을 빌며 그 책방에서 함께 나눈 그 말씀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대는 참으로 긴긴 고통의 시간을 깡마른 육신 하나로 견디었던가. 마침내 붉은 낙엽 한 장으로 떨구어질 그 시각까지라도 허용해 달라고 하늘에 간구했지만 끝내 저 흙 속으로 태곳적 바람 속으로 떠나가야 했으니, 비련의 한생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후회 없구요. 운명이라 받아들입니다. 걱정들 고맙구요. 행복했습니다. 징징 울지 않습니다. 웃을랍니다.”*
인생이란 하고 많은 길 중에서 왜 우리는 외골수, 글쟁이 외길만을 선택했던가. 나의 상처를 밑거름삼아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게 영원의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가. 아,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그리 오래 앙버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 삶 속에 나동그라진 서글픈 사랑의 흔적을 혹은 뼛골에 박힌 비루한 상처만을 밤새도록 깨물고 씹고 어루만졌다면 그대 이제 허위허위 떠나가도 좋으리라.
서글서글한 네 눈매와 강단진 그 얼굴과 조선 5백년 선비다운 긴 턱수염과 전국 문학판을 청산유수로 뒤흔들어대던 ‘사회주의자 강기희’의 능청스런 말솜씨를 이젠 어디서 발견할 수 있으랴. 외진 골목길 모서리에서 혹은 그 거리 한복판에서 한 그루 죽창이었다가 때론 화들짝한 꽃불송이로 우린 타올랐던가. 그러다가 문득 닳아빠진 생의 육통을 단호히 벗어던진 그대 이름자 앞에 내가 부른 진혼가는 이토록 허망하구나.
아무렴, 망자의 깃발소리로 가득 찬 돛을 힘차게 올려보자. 어기영차 한세상을 새뚝이처럼 살아왔으니 창공을 향해 푸르뎅뎅한 그 목소리로 맘껏 외쳐다오. 그대 떠나는 마지막 뱃길이 구슬프지 않도록 차고 넘치도록 술을 캐라, 술잔을 채워라. 저토록 푸르렀던 정선 하늘가 꽃비처럼 흩날리는 만장들이 그대 얼굴로 가득 차 온다. 아아, 덕산기 계곡수로 한없이 흘러 넘쳐 오는 그대를 보고 또 본다. 잘 가시오, 그대. 그래도 이만큼 살아냈다면, 한세상 잘 놀다 가는 거외다.
*강기희 작가가 타계 직전인 지난 2003년 7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유언.
이승철 전남 함평 출생. 1983년 《민의》 등단. 시집 『그 남자는 무엇 으로 사는가』 외.
덕산기 물매화
- 작가 강기희의 명복을 빌며
이 원 규
섬진강 매화가 질 때면 나는야 봄바람 난 유목민의 아들
말안장 위에 야영 장비를 단단히 묶고
북상하는 꽃들을 따라 먼길을 나섰다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고
채찍으로 허벅지를 때리며 강원도 정선을 향하여
108마력의 슬픔으로 내달렸다
초봄의 동강 뼝대 위에는 동강할미꽃이 피어나고
가을 물매화가 피면 정선아라리문학축전이 열리고
덕산기 깊은 계곡에는 소설가 강기희가 있었다
17년 전 금강산에서 처음 한 방에 묵었다
2006년 11월25일 금강산문화예술축전 때
밤새 음주 일합을 겨루며 동무가 되었으니
일생 가난한 전업 작가와 전업 시인
강원도 양아치와 경상도 출신 양아치가 그 누구보다 당당했다
그날 밤 함께 술을 마시던 스스로 춤꾼
아직 젊은 무용과 여교수도 4년 뒤 세상을 등지고
다시 물매화가 피기도 전에 강기희마저 떠났으니
금강산은 어드메뇨, 정선 덕산기는 또 어드메뇨
남은 생의 왕복 천 리 길이 문득 사라졌다
기희야, 어머님보다 먼저 간 불효막심한 기희야!
대범하게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강기희!
그래도 너는 잘 살았다, 이미 다 이루었다
못다 한 꿈이야 봄이면 동강할미꽃으로
해마다 가을이면 다시 물매화로 피어날 것이니
고향의 푸른 별에서 가난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심심하거든 이 한심한 세상의 나와 나 같은 놈들에게
싸리 회초리를 들어라, 마구 종아리를 때려라
너는 가고 없어도 세상도처 두두물물에 네가 있다
이원규 경북 문경 출생. 1984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외. 16회 신동엽문학상 외 수상.
아름다운 지휘자 강 기희
그는 지휘자였다. 그의 오케스트라는 첩첩산중, 생의 구비를 돌고 돌아 비로소 안착한 생명들이 머무는 곳, 아늑한 분지였다. 최초의 단원은 하늘과 맞닿아 늘 푸른 능선이었고 산허리 춤을 휘돌아 감아대는 구름이었다. 최초의 악기는 숲속의 나무들을 춤추게 하는 바람이었다. 고산준령을 타고 넘어와 다시 고산준령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물줄기였다. 그리고 그것에 몸 기대며 함께 사는 사람들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이름은 따로 정하지는 않았다. 정선군 농민회나 정선 문화연대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고 정선 소녀상 건립추진 위원회 또는 친일파 이범익 박춘금 단죄비 설립의 주축이라고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한국 문학 평화포럼. 민족작가연합에도 그의 선율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아우라지나 정선아라리 붉은 숲 골짜기 단임골, 덕산기 계곡등의 이름을 떠올리면 대개는 그가 지휘하는 연주곡의 레파토리를 상상하곤 했다. 아라리촌의 가운데 세워진 소녀상 제막 때는 한여름 늦 장마비가 그의 지휘를 방해했는데 그의 감성에 젖은 지휘봉은 빗줄기마저도 연주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었다. 3.1절에는 일제 때 신사가 있었던 비봉산 아래에서 저잣거리가 흔들리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지휘했다. 그가 사회까지 맡아 진행했던 아라리 문학축전은 경향 각지에서 모인 이들의 축제였다. 초청받은 시인은 정선을 노래했고 박수소리로 화답한 객들은 그날 저녁이면 정선의 밤하늘과 대작하며 술을 마셨다. 그는 자신이 악기였다. 10권의 장편소설과 한권의 시집 그리고 인문여행서‘정선’을 통해 스스로를 연주했다. 2023년 6월3일 그의 마지막 지휘곡은 ‘덕산기 숲속 책방’이었다. ‘덕산기 숲속책방’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조율해낸 오케스트라의 완성본이었다. 노랫소리는 물론 술 넘기는 소리와 여울 물소리 심지어 밤 하늘을 빼곡 채운 별 흐르는 소리까지도 어우러지게 만드는 명곡名曲중 의 명곡이었다. ‘후회는 없고요 운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행복했습니다’ 채 육십갑자를 넘기지 못한 짧은 생이었지만 그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을 무릎 하나 구부리지 않고 살아서 들어갔다. 2023년 8월 1일 그는 천국의 초대를 웃으면서 받아들였고 우리는 세상을 위해 기꺼이 울어주었던 이, 아름다운 지휘자 강 기희를 그렇게 보냈다.
이지상 경기도 포천 출생. 가수 겸 작곡가. 저서 『사람을 노래하다』 외. 음반 <나의 늙은 애인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