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청춘의 계절에/이명철
창 너머로 모양성의 연초록물결이 조용히 들어온다. 비겐 후 바람이 헹궈준 초록바다는 4월부터 연속된 아름다운 오월의 시작이다. 그 수레바퀴는 5월의 대지에 머물며 산마다 골짝마다 푸르름으로 장식하며 짙어간다.
아들딸 손주들과 청보리밭 길을 거닌다.
야외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해제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청보리밭 길을 걷는다.
길마다 고랑마다 추억의 오솔길이며 바람이 누워 쉬었다 간 바람의 길목이다.
보리밭에 피어난 노란 유채꽃은 초록바탕에 수(繡)놓아진 바느질 자국 없는 하늘나라 선녀의 옷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이 온 들판을 환희의 노래로 가득 메운다.
아직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지 않고 유채꽃 위에 나비 한 마리 날지 않아도 보리밭 자체로도 마음껏 뛰노는 손주들의 모습에서 평온함이 깃든 자유가 있음을 본다.
오월의 초록바다는 꽃보다 아름답다.
꽃이 지고 꽃이 피듯 연초록새싹도 자연이란 나무의 가지에서 티 없이 맑은 초록을 틔운다.
그것은 푸른 청춘의 아우성이다.
좁아진 나의 심량(心量)에 한없이 맑았던 지나간 청춘의 꿈들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다시 아로새겨준다. 나는 지금도 아로새겨진 그 푸르렀던 추억들을 황혼 속에서 슬픔인 듯 바라보고 있다.
해마다 선물처럼 다가오는 저 연초록 새싹, 그것은 자연이 나에게는 주는 새로운 희망이었고 그 희망 따라 작은 행복들을 쌓아가며 살아왔고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었다.
오월, 그 자연의 자유 속에 대지는 온통 연초록 푸른 잎에 덮여있는데, 어느 솜씨 좋은 사람이 뿌려놓았는지 간간히 붉은 꽃 방긋 웃고 있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의 색깔 저 청록, 꽃이 없으면 어떠랴. 비에 씻긴 초록은 저렇게 맑고도 청정한 아름다움인데.
오늘은 언제나 나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 오월의 청춘 같은 날이다.
오늘이 있기에 나는 항상 오월의 청춘으로 살아올 수 있었고, 그러기에 나의 오늘은 오월의 청춘이 저물어 가는 황혼이 아니라 아직도 내 가슴에서 불타는 열정과 가장 젊은 날의 꿈인 것이라 믿고 살아온 것이다.
나는 나의 꿈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오늘,
오월의 청춘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영원히 시들지 않은 아름다운 꽃으로 승화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오지 않는 날이 언제 닥칠지 불확실하다 할지라도ⵈⵈ.
찔레꽃/이명철
작은 누님과 나는 여덟 살 차이다.
작은 누님과의 추억은 평생을 같이 한다. 큰누님과의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큰누님은 나 낳기도 전에 이미 시집을 가버렸기에 어릴 적 기억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아기일 때 어머니 일 나가시고, 작은 누님이 나를 업어서 키웠고, 내가 걸어 다닐 때는 누님을 따라다니며 응석을 부리면서 누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옛 우리 집은 대문 없는 울타리로 둘러쳐진 초가집이었다.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는 ㄱ자 모양의 양쪽 울타리 길을 열병식을 하듯 걸었다. 그 길은 약 5미터 정도였으며 양쪽 울타리 중 언덕으로 이어지는 한쪽에는 찔레꽃이 피어있었다.
찔레꽃에서는 짙은 분향이 났다. 그 냄새는 예나 지금이나 정겨운 그리움이 담긴 아련한 추억이다.
찔레꽃 향기는 종생불변(終生不變)의 지문(指紋)처럼 우리 누님을 상징하는 꽃이며 은은한 고향 같은 냄새다.
아침 산책길에 동리국악당 뒤 울타리에 핀 하얀 찔레꽃을 마주하곤 한다. 덤으로 질레향이 폐부(肺腑)는 물론 옷이며 내 몸 곳곳에 스며드는 느낌을 받는다.
이 계절 오월 찔레꽃향의 음미는 이제 돌아가시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누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눈물어린 향기이다.
누님은 찔레꽃 핀 울타리에서 찔레 순을 꺾어 연한 가시를 떼어내고 줄기를 두 손으로 비빈 후 껍질을 벗겨 나에게 주면서 자신은 하얀 찔레꽃을 따먹었다.
달콤한 찔레 순의 그 맛, 지금 생각하니 어린 누님이 어린 아기인 나를 보면서 나에게 주는 자연산 간식이었고 사랑이었다.
누님과의 추억은 시집가서까지 계속 이어진다.
서럽고 배고팠던 피난시절, 입 하나라도 덜겠다고 피난생활 하던 한 마을에서 입던 옷 한 벌 그대로 입고 시집을 갔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가마 속에서 속으로 삼켰음인지 울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가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을 못들은 채 등 뒤로 흘리고, 이제 영원히 우리 집은 안 올 것만 같았던 불안감에 가마 뒤를 무작정 따라갔다. 거기까지였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집까지 들어가지 않고 집 옆 동산 잔디밭에서 뛰놀다 나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지금도 찔레꽃만 보면 그때 서러워했을 누님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 온다. 열일곱 살이면 집에서 응석부리기에도 모자란 나이의 누님, 그 누님 돌아가신 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누님 생각은 찔레 순 꺾어주며, 찔레꽃 따먹던 소녀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 누님은 4남매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그 손주들까지 다 키워준 인고의 세월을 살다 가셨다.
이제 추억도 버려야 할 때다. 버리면 채워진다는 사랑, 채워진 사랑 주고 싶어도 누님의 자식손주들이나 내 자식손주들은 이제 멀리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