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 이야기
Ⅰ. 회고(回顧) 편
11. 법정다툼
⑴ 학원개원
막내아우 득수의 추천으로 공무원수험을 인터넷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사이버 강의 학원인 (주)대한고시연구원을 운영하는 김인수를 소개받아 우리나라의 국가직공무원과 지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을 망라한 공무원들의 분야별 취업시험과 진급시험 그리고 공인중개사와 주택관리사의 자격시험을 동영상으로 공부하는 동영상전문학원인 대한고시연구원 산하의 독립채산제 형식의 지사인 한국고시학원을 경영하게 되었다.
지사사무실과 학원사무실을 겸하여 신림동에 오픈(Open)하였고, 살림집은 관악구인 봉천동 국사봉아래 반지하방인 ‘국회단지’라는 지명을 갖은 ‘봉천9동’ 지금은 ‘은천동’으로 바뀐 곳으로 옮겼다.
앞으로 비젼 있는 교육 사업이며 명분도 있는 학원사업이었다. 9급 공무원시험을 비용이 많이 드는 일반적인 오프라인(Off-line)학원을 통하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만 있으면 웹(Web)상에서 유료회원에 가입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획기적인 온라인(on-line)교육 사업이었다.
사업성에 기대하고, 없는 돈 있는 돈 모두 투자하여 시작하였다. 학원의 총수익은 먼저 홈페이지에 무료회원으로 가입하도록 한 후 그들을 상대로 상담하여 유료회원으로 얼마만큼 전환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네이버 야후 다음 한미르 코리아닷컴 네이트 등에 광고를 게제 했으며 각 대학에
‘나도 이제 인터넷으로 공부하여 공무원 될 수 있다!’
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국대학교 구내식당의 메뉴 표 짜는 화이트보드를 무료제공하고 칠판하단에 슬로건과 홈페이지주소 그리고 전화번호를 올리도록 하였으며, 8급 간호직공무원과 9급 보건직공무원을 겨냥한 안내서적을 발간하여 각 병원에 근무하는 조무사에게 우편으로 보내주고 조무사 자격시험 날에는 아침 일찍 조무사시험장에 찾아가 입실 수험생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꼭 성공해야겠다는 일념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작년 10월 1일 오픈하여 10개월이 다 되 가지만 어찌된 사업이 앞이 보이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어렵기만 했다.
갖고 있는 사업투자자금이 동이 나고 카드돌려막기의 연체에 따른 고리 이자부담 등으로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홈페이지에 가입한 회원에게 전문 상담직사원이 지원별 각 분야에 맞도록 상담 해주어야 하기에 전문상담원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여러 명의 상담원을 고용하여 전문 지식을 한 달 이상을 가르쳐 상담원으로 활용했다.
정상적인 상담을 하기위해서는 적어도 3개월의 경험과 교육이 필요 했는데 그로인해 교육비용 지출로 더욱 어려웠다. 게다가 어느 정도 익숙하게 가르쳐 놓으면 대부분 가정주부인 여직원들의 특성상 가정 사정 등으로 그만두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였다. 그러니 점점 수익의 악화로 적자가 누적되었다.
하는 일 마다 왜 이렇게 안 풀리는지 모르겠다. 최선의 노력을 하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업 성공만을 기원해주고 뒤를 밀어준 아내에게 미안했다.
‘더 이상의 손실보존이 어렵기에 사업을 또 접어야하나.’
고심하고 있는데 때 마침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사업시작하고 첫 여름휴가다. 어쩌면 조만간 폐업할 수도 있다. 고 생각하고 고민하며 사무실에 들어와 보니 철없는 직원들은 -
‘우리여름 하기휴가를 며칠 정도 보내주는지 어떻게 보내줄 것인지’
의견을 나누고 있다. 참 한심했다. 사업주는 존폐를 고심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직원들은 하기휴가 타령이라니..,
속내를 말할 수도 없고 내 원 참!
⑵ 울릉도
어찌되었던 지금 당장에 문을 닫는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는다면 여름휴가는 불가피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머리도 식힐 겸 내가 먼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여 먼저 아내와 같이 강원도로 휴가를 떠났다. 사실상 답답한 현실 도피였으며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 대한 배려차원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폐업절차를 경험한 나로서는 이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눈에 선하다.
아내와 동거하면서 그동안 사업 시작하여 몇 달도 않되 문 닫은 업체가 ‘청호사업’ ‘밀레생미기사업’ ‘포토밀러사업’ 그리고 금방 시작한 지금의 ‘인터넷학원’ 서로알고 생활한 짧은 기간 동안 벌써 몇 번째냐 이번만은 꼭 성공하고 싶어 올인(All in)했으나 결국 따라주지 않는 사업 운 앞에 또 무릎 끓는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내 운명은 이렇게 설계 되었었나? 무엇보다 또 실망할 아내를 생각하니 무능력한 내속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더욱 한숨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휴가다.
아내에게 여행에서 돌아와 곧 벌어질 폐업과 앞으로 벌어질 순탄하지 않을 삶에 대한 보상차원의 여행이기에 출발 전 휴가비는 주느냐고 묻는 직원들에게 만약 휴가기간에 일정한 실적을 올리면 하기휴가 상여금을 주겠노라며, 지금까지 상담원 1인 월 평균15명 정도의 회원가입 실적이었으나 이번 달 목표를 20명이상 가입시킨 상담원은 상여금으로 100%주겠노라며 상향목표를 세워주고 나왔으며, 이번여행을 끝으로 사업을 접을 요량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에게는 극비였기에 가급적 사업이야기는 피했다.
관광버스 편으로 강원도 속초로 묵호로 정동진으로 추암 해수욕장의 촛대바위로 동해의 환선굴로 그리고 묵호항으로 돌아와 배를 타고 울릉도로 향했다.
동해의 푸른 파도를 보면 답답했던 가슴이 펑하고 뚫려야하지만 그동안 나를 믿고 따라준 아내와 직원들에게 얼마 후면 일을 저질러야할 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울릉도 도동에 도착하여 산 넘어 저동으로 넘어가서 잠을 자고 촛대바위를 보고 주변의 어시장을 둘러보고 다시 도동으로 이동하여 작은 셔틀버스를 타고 88자가 보이는 88도로로 케이블카를 타고 옛 선인들이 이주정책이후 이곳에 올라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망향봉의 제1전망대에 올랐다.
날씨가 좋으면 독도가 육안으로 보인다고 하였으나 이날은 안 보였다. 다시 내려와 울릉도 주변을 돌면서 나리분지로 성인봉을 구경하고 바닷가에 몸을 적셔도 보고 관광유람선을 타고 새우깡 유혹에 겁 없이 달려드는 갈매기와 벗하고 맑고 푸른 쪽빛바다를 감상하며 여러 날 보냈으나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미적대는 내 모습에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내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사업에 관하여 사실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이제 서울에 도착하면 사업장은 폐업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내는 깜짝 놀라며 왜 그랬냐고 묻기에 최선을 다했지만 내 능력 부족이라고 했더니 최선을 다해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어찌할 수가 없지 않겠냐며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더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실의에 빠진 나를 달래며 서울로 가자고 한다. 역시 마음이 착한여인이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내가 감당할 몫인데..,
쾌속여객선으로 묵호항으로 돌아와 선착장 뒤편 방파제아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막 잡아온 오징어와 성계를 고무 통에 놓고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안주 한 접시를 주문해서는 소주 한 병을 다 비워보지만 속이 풀리질 않는다.
“그래 가자!”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고 그동안 배터리를 아끼느라 켜지 못했던 휴대폰에 배터리를 갈아 넣고 휴대폰을 켜자 밀렸던 문자 메시지가 가득했다. 순서대로 읽어 내리는데 -
“사장님 우리 보너스 많이 주셔야 해요 200%목표달성 해 냈어요” 라는 메시지와 김인수 사장의 사업 활성화에 따른 축하메세지가 와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하셨기에 하늘이도와 200% 목표달성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서울로 오시는 데로 사무실로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200%라니 그렇다면 이사업이 되는 사업이 아닌가.?
와 - 이게 웬일인가!
대박이라 하하하!!!
너무 기쁜 마음을 추스르며 아내에게도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니 믿기지 않은 거짓 같은 사실에 나보다 더 놀라는 것 같다. 옛말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는지 서울행 버스의자에 기대여 눈을 감으니 잠이 쏟아진다.
⑶ 명당
2001년 11월25일, 불안했던 학원사업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의 삶에 세 번의 행운이 찾아온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행운이 언제 내 앞을 지나갈 줄 모르니 기다리고 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스쳐지나가도 그것이 행운(幸運)인지 불행(不幸)인지 알 수 없어 수수방관(袖手傍觀)하게 되어 놓치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행운을 잡을 수 있을까?
노력하면 될까?
아니 열심히 하면 될까?
음---. 그렇다면 열심히 노력하면 다 되겠네?
그러면 그동안 나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 나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이게 뭐야?
맞다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다 나름대로의 복(福)을 갖고 세상에 나온다.
그 복을 발복(發福)하여 세상에 보이게 하여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사용하며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그냥 은닉(隱匿)시켜 잠만 재우면서 언젠가는 나도 행운이오겠지 하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복을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인간은 신(神)이 아니기에 어떻게 발복시켜야 되는 줄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점쟁이 에게 점도 보고 사주도 보고 교인 같으면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도 할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지?
종교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앉아서 행운이 우연히 오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나. 잘되면 내가 잘한 것이고 안 되면 조상 탓으로 돌린다고 한다, 조상님께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해야 할까?
학원을 시작할 무렵 답답한 마음에 힘이 들면 가끔 찾던 ‘판교 모란’의 아버님 산소를 오늘도 찾았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엎드려 절하며 빌었다.
늘 착하기만 하셨던 아버님이시다. 그런 아버님의 산소를 언젠가는 고향 선산에 모시지 못해 늘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언젠가는 고향땅에 묻혀드려야지 하면서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날을 잡아 산소를 옮기고자 작심하고 어머님과 형제들의 의견을 모아 산소이전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집안이 잘되려면 조상님이 잘 돌봐 주어야 한다는데...,
당내간을 포함한 우리집안 모두는 매년 한식과 추석에 성묘를 다니며 가을에는 성남시 판교에 있는 모란공원의 아버님묘소로 그리고 광시에 할아버님과 조상님들의 묘소로 다니며 벌초를 해야 했다. 이는 피할 수없는 우리형제의 몫이었다.
사촌과 육촌 그리니까 당내간이 모두모여 벌초를 하였다 언제나 벌초할 때는 동갑인 사촌 익수 형이 앞장서 솔선수범하여 일을 하였기에 늘 고마웠다.
일을 마치고 내려와 분두골 아저씨 댁 앞마당에 모여앉아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어느 해도 거르지 않고 행하는 집안의 큰 행사다. 이런 행사를 통하여 비록 고향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일체감을 알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집안은 그런대로 단결과 화합으로 결속을 다져온 집안이다.
그런데 고향 주변의 안산과 초롱산 그리고 분두골 뒷산이 모두 조상님들의 땅이다 그러다보니 조상님의 산소를 이쪽저쪽으로 흐트러져 각자 다른 산기슭에 묘를 썻기에 후손된 우리들은 해마다 이쪽저쪽을 다니며 벌초를 해야 했다. 이런 일들은 너무 불편하여 언젠가는 아버님의 산소와 할아버님의 산소들을 정리 정돈하여 할아버님의 산소주변으로 모두 모아놓고 싶었다.
우리 모두가 쉴만한 예쁜 가족공원같이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런데 이주변의 땅들은 조상님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종산이다.
그런데 이를 종갓집인 큰댁에서 많은 식구를 건사하기 바빠서 그런지 조상 땅을 조금씩 잘라 팔아버렸다 대를 이어온 조상님들의 땅이기는 하나 안 주룰 박 씨의 대들보인 큰댁아저씨의 명의로 되어있기에 모든 것은 그분이 결정할 나름이었다.
위엄을 갖춘 큰댁어르신은 젊어서 광시면의 면장을 지내셨다. 면장은 면민의 투표에 의해 정하던 시절이기에 선거전이 치열했으며 많은 선거비용이 필요했다. 몇 번의 면장 선거에 도전 하셨던 아저씨는 부득이 관리하고 있던 조상님의 재산을 축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어른은 젊음시절 우리 집안의 장손으로써 대단히 존경을 받으신 분이다. 광시면장을 하실 무렵 큰아버님은 부면장을 그리고 셋째 댁 아저씨는 면사무소의 간부직원으로 근무하셨기에 광시면에서 안 주룰 박 씨 들의 존재는 대단했다고 봐야한다.
면장 어르신이 광시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 오실 때면 기침소리만 해도 쩌렁쩌렁 마을이 울리곤 했다. 한 고을에 500년을 내려온 권위 있는 집성촌의 모습그대로다. 큰댁어르신의 자택은 안 주룰 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다.
오래된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고택으로 사당이 집안에 있으며 뒤에는 지방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5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사랑채의 넓은 앞마루가 있는 고택이다. 생각해보면 지역의 어른인 면장의 자리는 그분에게는 그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지키려 애를 쓰셨을 것이다.
가문의 집안 어르신에 위치를 유지하기위한 큰댁아저씨의 고충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큰댁어르신과 백부님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시던 집안 형제사이 이시다. 그런데 큰댁어르신의 연세는 백부님보다 많으시나 백부님은 지병으로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으나 추운겨울 정월 열이틀 날 작고하셨고 마음이 넓고 인자하신 큰댁아주머님도 먼저 작고하시어 큰댁아저씨 혼자 외로이 홀 며느리의 부양을 받으며 사랑채에서 생활하셨다.
그런데 모란공원묘지에 모셨던 아버님을 선산에 모시려면 그 큰댁 아저씨의 허락이 있어야 무리 없이 추진 할 수 있는데 그 어르신의 연세가 90이 넘어 원로하시기에 어르신이 계실 때 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늦기 전에 어르신을 찾아뵙고 아버님의 산소이전 문제를 의논 하였다. 역시 어르신답게 쾌히 당연한 일이라며 서둘러 진행해 보라고 하시었기에 이를 집안 어른이신 당숙(堂叔)부(父)를 만나 의논하였다.
셋째 댁 아저씨인 당숙부님은 많은 생각을 하시고 가족들과 의논을 충분히 하신 후 길수형을 통하여 산소주변에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당 숙부님의 가묘(假墓)가 있는데 우리가 구입 하여 아버님을 그쪽에 모시고 당 숙부님의 가묘는 안산에 모신 셋째 댁 할머님과 같이 초롱산 으로 이전하여 가족묘소를 공원화 해놓으시겠다고 하신다.
오래전에 당 숙부님의 생각에는 그동안 의좋게 지내던 사촌형제간 옆에 자리를 나란히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가묘를 만들었으며 언젠가는 우리 아버님의 산소가 이쪽을 옮긴다 해도 할아버지의 왼쪽하단에 쓰는 것이 합리적이기에 본인은 오른쪽 공간에 자리하여 가묘를 만들어 놨다고 하셨다.
순리적으로 맞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그러니까 왼쪽 편으로 아버님을 모실경우 풍수지리상 좌측과 우측이 모두 막혀버리는 형상이기에 답답하여 명당자리라고 볼 수 없기에 오히려 당숙부님의 오른편이 더 좋은 자리라고 나는 판단했다. 물론 그곳은 경사가 급하기는 하지만 이는 묘지 작업을 통해 얼마든지 보강이 가능하다고 보여 졌다.
현재 산소주변은 우리 조부모님의 산소를 맨 윗자리에 모셨고 내려오며 왼쪽 편에 백부님 그리고 오른편에 당숙부님의 가묘가 있다. 나는 자주 산소에 올라 내려다보며, 당숙부의 가묘 오른쪽 편이 지리상 경사면은 좀 심했으나 최고의 명당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앞쪽으로는 장터 가는 아리랑고개의 정점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안산(案山)이 있고 아래로 토강과 냇물이 흐르고 있어 청룡(靑龍)이 되며 뒤편 산세는 초롱산의 기운으로 힘차게 내려와 잉(孕)을 이루었으며 좌측만 조금 가려준다면 풍수(風水)에서 말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와 주작(朱雀) 현무(玄武) 의 명당(明堂)자리에 버금한다고 보았다. 이곳을 최고의 자리로 보고 우선 길수형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묘를 구입했는데 가격은 당시 우리의 형편을 감안하여 저렴하게 넘겨주셨기에 늘 감사했다.
2002년 5월26일 산소를 이전하는 대대적인 이전공사 작업을 하였다. 총 공사의 주책임자로 고향 친구인 김연수에게 맡겼는데 경험이 풍부해서 일을 아주 잘해 주었다.
우선 안산에 고조부님의 산소를 조부모님의 산소위로 옮기고 성남시 판교 모란에 있는 아버님의 산소를 용인의 득수 장인이신 사돈어른의 협조로 이쪽으로 이전했다. 이때 시형이가 참여하여 득수와 같이 ‘판교모란’에서부터 선산인 이곳까지 아버님을 모셔 안장(安葬)에 이르기 까지 최선을 다 해 주었다.
공사에 동원된 중장비 포크레인에 전기톱에 여러 대의 경운기, 온양에서 구입해온 금잔디 그리고 은사리의 젊은이는 모두 동원된 큰 공사였다 그런데 산소 앞을 큰 나무들이 가로막아 내가 원하는 산소공원이 아니기에 이를 제거해야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큰댁어르신이 반대하거나 동내에서 또는 군청에서 알게 되면 후에 벌금으로 나오거나 공사에 관련된 사람들에 제재가 있을 것이기에 모두 망설인다.
어떤 이는 산의 나무를 허가 없이 함부로 잘못 베면 바로 구속된다는 엄포도 있었고 어떤 이는 이렇게 큰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리면 큰댁아저씨의 노여움을 살 것이니 자르지 말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개의하지 않고 그냥 자르라고 지시를 해도 일하는 인부들은 모두 후에 받을 책망 때문에 망설였다. 하는 수없이 나는 선(善)이의 거짓말을 했다.
‘연수’야 나는 얼마 전 이 작업을 하기위해 큰댁 어르신하고 의논 하 였고 또한 면사무소 담당자와도 의논하여 산소를 정리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를 예상하여 부분별 나무벌채신고를 해놨으니 걱정하지마라.
그리고 만약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전기톱’작업을 해!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자신 있게 호언장담 말을 하였다. 그렇게 주변에서 숙덕거리는 여론을 잠재우고 전기톱을 동원하여 산소주변과 특히 산소아래부분의 오래된 소나무들과 큰 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더니 산소 앞이 시원하게 탁 트여 멀리 장터 넘어가는 아리랑고개가 훤히 보인다. 산소주변을 명당자리로 만들었기에 좋기는 하였으나 큰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린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나의행동에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산소작업을 마무리 할 즈음 큰댁 어르신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올라 오셨다. 그리고 이미 나무를 모두 베여 앞이 훤하게 뚫린 모습을 보시고 -
“경수가 잘하는 구나 잘했다 앞이 훤하니 시원하구나!”
하시며 잘했다고 칭찬을 하신다.
그렇다!
생각은 모두 같으나 실행에서, 조심성이 너무 많아 행동에 옮기기를 두려워하며 남에게 불편한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이 본능이 아니겠는가.
어르신의 말을 듣고서야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같다.
문득 충청도 사람의 우유부단함을 말할 때 ‘당체 개갈이 안 난다.’ 고 하는 고향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큰댁 어르신은 너무 황당하게 잘라버린 나무들을 보고 아쉬움은 있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잘라버린 나무이며 고향에 조상님들의 일을 열심히 하는 내 모습에 굳이 거북한 말을 피해주신 어른의 배려(配慮)였을 것이다. 그릇이 크신 어르신에 도량(度量) 깊은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안산에서 고조부의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하고 이동하여 조부님과 부친의 유해(遺骸)를 매장(埋葬)하고 산소에 금잔디 때를 입히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 작업을 모두 끝내고 재사를 올리고 내려오니 마음이 뿌듯하고 가볍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객지에서 귀향을 못하고 떠도시던 아버님의 영혼(靈魂)과 유해(遺骸)를 고향에 모시니 이제야 조금이나마 자식의 도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행사는 우리형제와 가족의 단합이며 결속력이기에 형제와 가족이 자랑스럽다.
⑷ 학원 활성화
얼마 전 교육계가 높은 사교육문제로 떠들더니 대안으로 EBS교육 방송국에서 동영상강의로 보충수업을 하도록 하여 비싼 사교육비를 줄여 수능에 대비하도록 공식발표가 있었기에 더불어 이제 정부에서 온라인 교육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동안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은 사양이 낮아 버퍼링이 자주일어나 강의가 끊기는 등의 부작용으로 유저(user)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점점 컴퓨터(computer)의 용량이 커지고 평면의 모니터(monitor)와 모뎀이 디지털(digitel)화 되면서 강의 끊김 현상도 없어지고 좋아졌기에 집에서 혼자 교제를 보고 동영상강의를 듣는다면 못할 공부가 없다.
EBS교육 방송국에서 강의하는 교수들이 우리학원 강의를 하도록 하니 반응은 더욱 좋았다. 사실은 원래 우리학원의 강사였으나 EBS방송국에서 공무원시험과 공인중개사 자격증시험에 따른 강의 방송을 시작하면서 방송에서도 우리학원교수들이 강의를 하니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제는 본격전인 영업을 해야 했기에 지점을 증설했다. 사업자등록과 통신사업자 신고를 하고 홈페이지만 있으면 누구나 인터넷 학원을 운영할 수 있기에 지점확보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책상 하나놓고 홈페이지와 상담 능력만 배우면 누구든 수익을 올릴 수 있기에 지점학원을 운영할 수 있었다.
(주)대한고시연구원의 지사장으로 지점운영권을 갖고 있는 나는 우선 많은 지점학원이 필요했다.
이때 우리 형제들도 관심이 있어 관수와 막내 미자도 같이 해보겠노라 하여 같은 건물에 사무실을 임대하여 ‘바로고시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영부실과 운이 맞지 않아 조기에 문을 닫았다. 그런데 이때 입은 손실로 관수와 미자는 오랜 동안 장기 채무에 고생하였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지점학원운영 체제로 바꾸어 운영했으며 때마침 정부의 방송강의 시책에 맞았기에 모든 지점학원에서 사업을 잘해주었으며, 당시로는 동영상강의가 대세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주어 수익의 증가로 연결되었다.
나를 이곳에 추천했던 막내 남동생인 득수내외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인터넷학원 춘추전국시대가 된 것이다. 친구이며 육촌인 국가공무원학원의 한수, 그리고 나라고시의 육촌동생 의수, 승리고시학원의 사촌형수, 바로고시의 조카 희정이, 이화고시학원의 초등학교 동창인 이화연, 홍성에 열린고시학원, 드림고시학원, 우리고시학원, 스터디학원, 그리고 안사람이 별도로 운영한 고시웨이학원, 공무원공인중개사학원, 코리아고시학원, 서울 우면동에 스카이고시학원, 원 고시학원, 스타고시학원, 코리아고시학원, 프로고시학원, 시흥에 하나고시학원, 조광수의 스마일고시학원, 등 여러 지점학원을 운영하였다.
여러 지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지점확보와 운영에는 나를 도와 육촌인 한수가 많은 공을 세웠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한수와는 육촌사이보다 아주 가까운 친구다 어려서부터 이웃하는 사이며 친구이기에 한수가 다른 일을 하기위해 학원을 정리할 무렵 그동안의 많은 협조를 해주었기에 나름대로 서로 원만하게 끝맺을 수 있도록 나는 최대한 노력해 주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사이가 불편 하지 않게 무사히 끝난데 감사한다. 한수도 그것을 염려하여 원만하게 정리를 해 주었을 것이다.
⑸ 주택구입
지하방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나에게 집주인의 부인이 찾아와 이집을 사라고 권유한다. 당시 집주인은 사업을 하다 어려워 파산 직전에 몰렸기 때문에 이집을 빨리 처분해야 했었다. 나는 집 없이 떠돌이로 살았기 때문에 항상 집을 갖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나 여유 돈이 없는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사업이 활성화되면 자금회전이 가능할 것 같았고 또 전세금과 융자를 안고 산다면 별돈 안 들기에 아내와 의논하여 구입하였다. 4층 건물이며 8세대가 같이 살 수 있는 다가구 주택이다. 국사봉 공원과 인접하여 있으며 건물 옆에 공원을 경계선으로 자투리땅이 10여 평이 있어 주변의 집에 비해 주차가 용이하여 활용도가 높았다. 뿐만 아니라 아래가 훤히 보여 관악산은 물론이고 신림 역 앞 학원사무실도 보이기에 조망권도 좋았다.
하지만 산길의 비탈이 심하며 마을버스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5분은 족히 걸어야 하며 신림역을 가려면 10분정도 마을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은 감수해야했다. 무엇보다 집을 구입하는 데는 학원 사업장의 지점들과 식구들이 모두 열심히 일해준덕분에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⑹ 멸문
고향의 어른이신 큰댁아저씨가 96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많은 조문객이 다녀갔다. 박 씨 문중의 어른이 타계한 것이다.
안주룰 문중의 종가며 집안에 대들보이셨던 어르신답게 품위를 갖고 계셨던 분이다. 그런데 운명하시기 얼마 전 큰댁의 큰형수님이 내 사무실인 서울 신림동 학원사무실로 찾아오셨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형수님의 방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든 시골 산소에 들렀다 오게 되면 꼭 큰댁에 들러 인사를 하고 온다. 그것이 예(禮)라고 생각하기에 늘 그래왔다.
그러니 형수님이 내명함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형수님이 직접 찾아오시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무슨 사연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해보지만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해를 거르지 않고 늘 고향산소에 들르곤 했다. 그때 마다 꼭 큰댁을 들르곤 했는데, 원로하신 큰댁어르신을 뵈워야 했기 때문이다.
부인과 큰아들을 앞세운 고령의 큰댁어르신은 90세를 넘기시며 노령의 나이 때문에 치매가 왔으며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게 되면서 사랑방에서 혼자 고생하셨다.
이런 어르신을 환갑이 넘은 홀 며느리가 혼자서 뒷바라지하며 온갖 시중을 감당했으니 얼마나 힘겹고 고생스러웠을 것인가 그러기에 종갓집 큰며느리인 형수님이 늘 감사했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고향의 안산(案山)인 조상 땅과 큰댁의 명실상부한 고택을 포함한 주변의 큰댁어르신명의로 된 재산의 일부를 부득이 처리해야 하기에 이를 어른이신 셋째 댁 아저씨인 당숙부와 의논하고자 올라 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에 살았던 큰댁 집 좌측 아래의 당숙부집이 건물은 당숙부의 명의이나 대지는 큰댁의 소유이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지상권자인 당숙부의 권한이기에 철거를 해주시던 아니면 건물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해주시던 해야 하기에 부득이 당숙부가 계신 인천에 찾아갈 목적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고 한다. 나는 한동안 말을 못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무언가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같이 멍하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이라는 말도 있다.
500년을 넘게 버텨온 자부심의 고향땅이 지금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자긍심(自矜心)의 고향산천이 무너지는 모습을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한동안 내 귀를 의심도 해보았다.
이를 어떡하지?
전통과 추억이 무너지는 재산을 정리하고자 셋째 댁 당 숙부를 찾아가시는 이 길에 내가 있구나?
신이여 어찌해야 합니까?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습니다.
너무도 아쉽다.
어려서 나의 모든 추억을 갖고 있는 추억의 중심에 있는 박 씨의 자긍심(自矜心)인 큰댁의 고택과 주변 땅들 그리고 건너편의 병풍같이 아늑한 안산을 모두 매각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기에 부득이 이렇게 올라왔다고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큰댁의 막내아우 명수가 사업자금이 필요하여 금융권에서 융자받을 때 큰댁형수님이 보증을 섰는데 그때 근저당의 담보물로 야산인 안산과 주변의 토지를 저당권 설정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명수의 사업부진으로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따른 이자가 연체이자로 변했으며 점점 불어나는 채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빚을 만들뿐 이기에 이를 해결 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본시 큰댁어르신의 사후에 가족들을 모아 의논하여 처리하려 하였으나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 고리의 연체를 감당할 수가 없어 부득이 큰댁어른이 생존해 계시기는 하나 고령에 침해를 앓고 계시니 생존에 계시더라도 우선 늘어나는 채무를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 되여 이렇게 올라 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많은 고충으로 시달렸기에 형제간인 남수형과 문수형 그리고 병수에게도 이를 알렸으나 해결의 핵심은 돈이 있어야 했고 누구도 이를 해결할만한 돈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수형은 연락이 두절 되여 전달이 제대로 안되었으며 대전에서 현직경찰로 있던 남수형도, 충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병수도, 모두 어렵기는 매일반이며 또한 아들 희준 성수는 아직 본인의 앞가림하기 바쁘다.
그래서 이방법이 종가 집 종부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해결방법이기는 해도 달리 방법이 없어 부득이 이렇게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천에 가서 당 숙부를 만난다고 해도 실질적 지상권자이기에 쉽게 허락해줄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리고 부득이 넘어가는 땅이라면 당숙부 소유건물의 실질적 토지가 얼마 되지 않기에 당숙부가 그냥 건물바닥의 토지를 매입하겠다고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욱이 앞산을 포함한 수천 평의 많은 토지를 채무에 의해 매각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면 토지의 매각 중 몇 십평 정도의 당숙부의 옛 주택 바닥면적을 적당한 가격으로 넘겨준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으로 보여 진다. 인천으로 큰댁 형수님이 가신 후 나는 한동안 이리저리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수’를 만나 이런 일련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한수 역시 고향의 향수를 갖고 있기에 깜짝 놀라며 안타까움과 아쉬움 때문에 병수를 만나 예기를 해보고자 같이 한달음에 충주로 내려갔다. 충주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병수를 만났으나 안타깝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형편이다. 밤을 지세며 서로 의견을 개진했지만 결론은 돈이 없는 무능함과 막막한 현실에 한탄만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집안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현실을 모두 손을 놓고 있는 무능의 결정체였다. 이후 형수에게 전화를 해 지난번 인천에 간일이 어찌되었는지 소식을 물어보니, 찾아가 현실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고 의논하니 당숙부님은 조금도 서슴없이 이에 따른 어떠한 사족도 달지 않고 인감도장을 갖고 오라고 하시며 -
“시아버님 모시고 어려운 일 하느라 고생이 많다”
고 하시며 도장을 바로 찍어주고 여비까지 주기에 바로 내려왔다고 한다.
역시 선비정신의 어른이시다. 짧은 나의 기우와 어리석고 얄팍한 내 소견에 그리고 어르신의 멋있는 해결에 나는 고개가 숙여지며 부끄럼을 느꼈다. 이후 부동산 일체는 이미 계약 실행되었으나 유저당 계약 형식을 갖추었기에 일정한 기간이 도래되면 자동적으로 매매가 실행되는 형식을 갖추고 매매가 종료되었다.
그러니까 현재 큰댁아저씨가 생존해 계시니 사후일정기간이 지난 후 매매성립의 형식을 갖추고 매도자인 큰형수님은 매매대금을 받아 금융권의 채무일체를 변제하였다. 이제는 언젠가는 때가되면 지금 살고 있는 고택을 비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랬기에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매도한 것이다.
이를 전혀 모르고 있던 큰댁아저씨는 결국 내용을 모른 체 운명하셨다. 장례행사가 진행되는 기간 중에 여기저기에서 쑥덕임의 화제의 속내는 역시 큰댁의 존폐에 따른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얼마 후 큰댁은 종가의 고택을 비워주고 분두골 산기슭에 판넬로 지은 단칸방의 작은 주택을 지어 이사했다. 물론 지금도 큰댁의 남은 임야와 토지는 상당이 많다.
하지만 종가로써 오랜 고택과 조상이 물려준 종중의 땅들을 지키지 못한 양심과 책임을 갖고 평생 살아가야할 모습을 지켜보며, 주변의 우리들은 모두다 죄인이다.
누구보다 이번 일을 앞에서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했던 형수님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며, 또한 앞으로 피할 수없는 따가운 눈총으로 이어질 쑥덕임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유야 시동생의 보증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말 못할 속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의구심은 -
『첫째 정말 막내 명수의 잘못 때문인가?
둘째 정말로 남수 형은 이를 해결할 수 없었을까?
셋째 장손인 희준 이와 성수는 무엇했으며 또한 부동산분야에 실력 있는 사위도 있었다는데...?
넷째 다른 것은 모르되 고택만은 살릴 수 없었을까?』
많은 의구심은 가지만 가문과 조상의 재산보존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 할 수단으로 오직 그 방법이 최선이라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형수님의 한숨을 들으며, 진정 사람목숨하고야 어찌 비교 하겠는가 언젠가 형편이 되면 다시 찾으면 되지 않겠나 하면서 위로 해 보지만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있었을 것 같은 예감을 떨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고향과 향수를 모두 잃어야했다.
⑺ 소송
집을 구입했다는 즐거운 마음이 가시기도 전, 몇 개월쯤 지났을 때 인천기술보증기금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집은 전집주인의 유일한재산인데 사업에 실패로 인천기술보증기금 측의 보증으로 은행채무가 있으나 갚지 않아 전집주인인 왕해성의 재산에 압류하려 진행 중에 이집을 왕해성과 우리가 서로 짜고 매매하였으며 이는 악의로 구입한 부동산이기에 사해행위이며 무효이기에 돌려주거나 그 채무를 우리가 갚아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소송이 들어온 것이다.
오랜 고심 끝에 무리하게 라도 장만한 내 집이건만 참으로 너무도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법정다툼의 시작으로 소송이 1심, 2심, 3심의 대법원까지 그리고 재소하여 또 고법까지 소송이 이어지면서 3년이 넘는 기나긴 소송이 되었다.
1심의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피고인 내가 직접 솟장의 답변서를 작성하여 소송에 승소하였고 이에 원고인 기보 측의 불복으로 2심에서는, 혹여 내가 고법도 진행하면 잘못될까봐 고대출신이며 인천시청에서 세무담당공무원을 지냈던 동일이 형의 도움을 받았다.
최선을 다하여 신림동 사무실에 매일 나와 소에 따른 서류를 작성하며 열심히 도와주었으나 고법의 재판에서는 뜻밖으로 패소하였다. 무조건 이길 것이라 생각했건만 고법의 재판장의 법리는 다른 곳에 기준하여 패소하였다.
이어 대법원에 상고까지 하였으나 결국 뒤집지 못해 패소하여 할 수 없이 서정욱 변호사를 선임하여 재소하였으나 변호사의 실수로 재소기간을 1일 넘기게 되어 결국 재소가 기각되었다.
변호사의 소송기간누락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실수는 나를 늪으로 빠트리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서정욱 변호사는 잘못했다고 시인하였으며 대신 전집주인에게 손해배상에 따른 소송을 무료로 진행해주겠노라고 약속하여 진행해주어 이 소송은 승소하였으나 돈 한 푼 없는 전 집주인을 상대로 한 승소판결문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나는 변호사의 잘못으로 패소했으며 긴 소송기간으로 그동안 재산권행사를 할 수 없어 입은 손실은 더욱 크다. 여기에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염려하여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또한 보증금의 보존을 염려한 세입자가 경매를 신청하였기에 결국 세입자가 원하는 금액을 합의금으로 모두 주어야했다. 또한 인천기보 측에 찾아가 현금1600만원을 합의금으로 주고 합의하여 우선 등기부에 기재되어있는 사항을 없애주기로 합의하였다.
다행이 그동안 전세금이 오르고 또한 사업이 잘되었기에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아예 모든 것을 취하해 줄 것을 전제로 합의를 했어야 했는데 우선 세입자들의 성화를 해결하는데 만 급급하여 기보 측 채무자명단에서 아내의 이름을 삭제하지 못하고 그냥 ‘부동산가처분’부분만 해결한 것은 지금생각하면 현명하지 못한 해결방법이며 좀 더 신중했어야 했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내는 기보 측의 채무독촉을 받고 있는데 마음 아프다. 어른들이 살다보면 송사가 있을 수 있는데 절대 소송에 말리지 말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학원상호가 한국고시학원이다 이는 내가 일찍이 학원상표등록을 해놓은 것이다. 또한 사업자등록증을 낼 때 상호가 ‘한국고시연구원’이기게 한국고시의 상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한국고시’신문사의 대표 민태설은 나를 상호에 따른 제호 위반으로 소송을 걸어 왔다.
소송이 2004년부터 지루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집 구입하면서 시작된 소송이 -
『1.‘인천 기술보증기금’ 측과 구상금소송. 2.왕해성과 ‘손해배상청구소송’. 3.‘한국고시신문사’의 민태설과 ‘부당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법률위반소송’, 4.세입자의 ‘경매소송’ 그리고 5.금천세무서장을 상대로 ‘심사 청구소송’』등 한번 시작된 소송은 봇물이 터지듯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나를 막으면 또 하나가 터지고 또 막으면 또 터진다. 그야말로 신들의 조화 같았다. 아니 종교에서 말하는 몹쓸 사탄 마귀들의 방해 같았다. 나의 신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인가?
⑻ 부동산학
많은 사람을 국가‘공인중개사’자격증 시험을 보도록 하였으며, 이때 나는 경매에 관심이 있어 민법과 경매에 대해 공부를 해두었다.
지난번 막내아우 상가임대차 계약과 내가 집구입할 때 소송에 말리게 된 것은 부동산법률의 전문지식의 무지에서 온 현상이다. 민법과 부동산관련 법령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부동산 지식이 더욱 필요할 것 같아 명지대학원에서 부동산전문학에 대해 강의를 신청하여 듣고 공부를 했다.
동내입구 ‘단지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중개업도 해보았다. 법원경매장도 수없이 다니며 많은 공부를 했다. 월세, 전세, 매매, 경매, 부동산교환 등 부동산 임장활동과 부동산중개업에 관해서는 많은 경험을 해보았다. 살며 꼭 필요할 것 같아 부동산에 관해 학문과 실습을 두루 경험해 보았다.
⑼ 산악모임과 어울림
집을 수리해야했다. 건물이 오래되어 보일러 동파이프배관 때문에 이곳저곳이 누수 되어 각층 방바닥이 물바다가 되기 일쑤다.
옥상의 물탱크를 철거하고 각층배관을 교체하며 진입배관의 관로경구를 넓혀주었으며 옥탑으로 올라오는 직수배관을 새롭게 설치하여 보온장치를 하였으며 옥상에는 15평정도의 거주할 수 있는 방과 거실의 시설을 만들었다.
이는 후에 불법건축물로 벌금을 물게 된다. 하지만 우선월세를 놓아도 벌금을 내고 도 월40만 원 이상이 남는 장사다.
살던 곳도 지하에서 3층으로 옮겼다. 주변에 많은 사람도 사귀여 산악회도 4곳이나 가입하여 산행을 다니며 산행의 두려움도 극복했다. 골프(golf)도 배워 필드(field)에 나가 그린(green)을 밟으며, 라운딩(rounding)을 즐기기도 했다. 골프연습장인 ‘봉일스파랜드’의 VIP회원으로, 파트너는 이각훈 이상빈을 만나 많은 게임(game)을 즐겼으며 후에는 오인섭과 오정환 그리고 신교수와 초등학교동창인 최원태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 스크린골프를 즐겼다. 스크린골프는 그린의 현장감은 떨어져도 라운딩 비용절감과 시간절약에는 스크린골프도 좋았다.
산악회 중에 이수산악회는 회장이 이중광씨다. 그는 인기가수 이효리의 부친이 된다. 회장이 샤프(sharp)하고 멋스럽다. 딸이 아빠를 닮아 예쁜 것 같다.
얼마 전 회장선거에서 따님의 인기에 힘입었던지 주변의 많은 지지회원이 그를 따랐기에 2007년1월 이수산악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당선되었다. 명예직이기는 해도 ..,
회장은 나에게 학원에서 학생들과 직원들에게 한참 인기스타인 이효리의 싸인이 들어있는 사진을 많이 만들어 주어, 학생들에게 주기도 했다. 참 고마운 분이다.
늘 나를 공무원시험학원의 원장이라며 배려하여 예우해주었기에 관광버스 안에 서 학원을 알리도록 하는 안내 방송을 할 수 있도록 마이크를 주어 그 기회에 학원광고 방송을 하여 산악회원 중에는 우리학원에 가입하여 공부하는 학생이 몇 명 있었다.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이수산악회에서는 한삼랑 박영식 양사장 김명환 산악대장, 그리고 지연이 임진숙 하여사 이상빈 등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즐겼으며 인선산악회, 봉천둥지산악회, 당산산악회, 등에서 월1회 정기산행을 하기에 전국유명산을 많이 다녔으며, 특히 이중광회장과 서로 뜻이 맞아, 같이 많은 곳을 다녔다.
그동안 월1회 산악모임의 산악회 다섯 곳, 이수산악회, 인선산악회, 당산산악회, 봉천둥지산악회, 충청산악회, 를 다니며 다녀본 곳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
강원도에 추운겨울날 눈이 수북 히 쌓이고 풍차가 있어 멋있는 대관령과 오대산, 태백산으로, 팔봉산으로 선재령, 주문진, 발왕산, 오대산, 두타산, 정선, 설악산 오색약수터, 소금강, 양평에 소리산, 명지산, 유명산, 축령산, 가깝기에 시간만 있으면 틈 내어 수없이 올라간 관악산, 북한산, 청계산, 수락산, 불암산, 삼각산, 아차산, 유명산, 인왕산, 인천 무인도 실미도, 백운봉, 백운산, 감악산, 문수산, 대모산, 소요산, 삼성산, 용문사가 있는 용문산 화학산 강화에 마니산, -
충청도 대전 쪽에, 바위가 많고 급경사인 계룡산으로, 칠갑산, 계룡산 갑사, 국사봉, 조령산, 선자령, 가리왕산, 대덕산, 매봉산, 봉화산, 태안에 백화산, 서대산으로, 인삼이 많은 금산, 안면도의 휴양림으로 문경세제, 이화제, 화양계곡,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 용봉산, 청양의 칠갑산, 가야산, -
영남으로는 600년이 되었다는 천연기념물인 석송령 소나무가 있는 예천, 단풍이 아름다운 청송에 있는 주왕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남해의 보리암, 거재도의 해금강과 소매물도, 구미 금호산, 전대통령의 박정희 생가, 포항 보경사, 호미곶, 청량산, 팔공산, -
호남 쪽으로 목포에 유달산, 멋있는 바다가 펼쳐진 여수 항일암, 그리고 모양이 말의 귀를 닮았다는 마이산, 완주군에 있는 대둔산, 백양사가 있는 선운산, 내장산, 부안에 내소사, 두룬산, 변산, 지리산 등 전국을 방방곡곡 다 다녀본 것 같다. 아니 다녀본 곳도 또 가본일도 허다하다.
내가 산에 미쳐 산행을 좋아하다보니 관절이 안 좋아 산이 라면 그렇게 싫어하는 아내도 나와 같이 관악산은 물론 수락산 우의산 도봉산 청계산 우면산 그리고 용봉산과 강원도 월정사가 있는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을 같이 완봉하기도 했다.
운동부족으로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다리가 약해 꼭해야 할 하체운동이기에 가장 돈 없이 저렴한 방법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 등산이라 생각하고 운동 삼아 다닌 것이 이제는 취미생활이 되었다. 여러 곳의 산악회원으로 10년 이상을 활동했으니 땅덩어리 좁은 이 나라에서 어딘들 안 가봤겠는가?
여기에는 우리 집을 수리하며 알게 된 집 동네에 살며 ‘국회철물점’을 운영하는 몇 살 아래 후배인 이종찬과 나이 드신 이희태씨가 다리를 놓아 알게 되었다.
동네에 같이 살며 나이가 나보다 위인 이종성 송사장 그리고 바둑을 즐기던 목재소 최사장 노래방 김원배 사장, 서진부동산 노희수 사장 국회부동산의 남사장 하림식당, 대학당빵집, 맥주집 대박아저씨, 그리고 딸이 우리학원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던 김재천, 마을부자며 여장부 김옥화, 그리고 유경자 박순임 윤병무 복진호 송순근 한명희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서로 좋은 관계의 인연을 맺으며 지냈다. 가진 것은 없어도 순진하고 착한사람들이다.
⑽ 소득세 과세
2500만원이 넘는 개인소득세가 나왔다. 아무리 학원이 잘된다 해도 이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정말로 사업이 잘되어 나온 세금이라면 그만큼 수입도 좋다는 예기니까 기쁜 일이다.
그런데 담당세무사의 실수와 카드사의 전산처리과정에서 수익누락으로 생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소명해도 이를 금천세무서에서 인정해 주려하지 않는다. 직원급여가 100만원 조금 넘으니 2500만원이면 20명분의 급여분 정도가 잘못된 세금계산 때문에 내가 내야한다는 얘기다. 이를 피할 길이 없다.
할 수없이 국세청에 심사 청구하여 원시장부를 제출하고서야 일정부분 탕감 받았지만 1,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개인소득세로 지불해야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별의별일을 다 겪어본다.
♠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복도 지지리도 적은가보다. 하늘이 내게 이 지구상에 일생을 살 수 있도록 일정한 양의 복을 주었는데 그 양이 꽉 찼는가보다 어떻게 해서든지 넘친 그 양을 흘러가도록 하든지 아니면 넘친 만큼 빼앗든지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양이 너무 적어 살기가 힘들어 포기하려하면 또 죽지 않을 만큼은 보내주는 것 같아 신기하다. 분명 신들의 조화일 것이다. 어찌 이렇게 복도 지지리 적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도 감사해야 했다. 크면 좋겠지만 적게 준 것에도 신께 감사해야했다. 그것이 나의 복 인걸 어찌하겠는가?
어느 산속 소나무 숲에 곧고 잘 자란 소나무사이로 작고 아담한 소나무가 있었는데 솔방울이 다닥다닥 잔득 매달려있다. 보기에 아주 탐스러울 정도로 매달려 있는 소나무는 잘 자란 소나무에 비해 자기가 약하다고 느끼기에 위기의식을 갖고 이어줄 다음세대를 위해 비록 나는 주변 환경 때문에 잘 자랄 수 없었기에 빨리 번식해야한다는 위기의식으로 번식을 선택했기에 솔방울이 잔득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내 예기는 의학적으로나 공학적으로의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옛 예기 중에 먹고살기 넉넉한 놀부의 식구보다는 살기 힘든 흥부의 식구들이 훨씬 많았지 않았는가? 식구가 많은 집은 수입이 적어 먹고살기 어려워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 운명은 어떤 것인가?
열심히 일해 좀 괜찮다고 느끼면 바로 돈 나갈 구석이 먼저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체가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늘 베풀고 살아야 하는데 갖은것이 없으니 이를 어이할꼬..,
과거에 연연하지 말아야하며, (No yesterday)
미래에 미련두지 말아야하며 (Not tomorrow)
오직 지금만을 위해 (Only today)
어느 강연장에서 강사가 열변을 통하던 문구가 생각나서 적어보았다.
그러니 나는 이제부터는 현실을 즉시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