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공 휘 덕무의 발자취
비문 해석 : 公의 12세손 나연(후26세)
여기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의 산 85번지는 곧 옛적 나주나공 휘 덕무(羅州羅公 諱 德懋)의 만년 유택(幽宅 : 무덤)이다. 공의 자(字)는 면지(勉之)요 호(號)는 은봉(隱峰)이며 통덕랑(通德郞)은 그의 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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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휘 부의 단과 비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장곡 소재)
선계는 고려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 휘부(諱 富)를 시조로 하고 이후 관면 (冠冕: 벼슬)이 계속되었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세종대왕 시대에 문과로 급제하여 통훈대부로 무안현감을 역임하신 휘 자강(諱 自康 : 公의 5대조)은 공의 현조(顯祖:5대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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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현감 휘 자강(공의 현조- 5대조) : 전남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주룡선산 소재)
또다른 세상의 덕으로 자세하게 나타나는 기록은 공의 선고이신 금천현감의 묘비에 나타나 있으니 더 기록하지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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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고조부 장사랑공 휘계조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장곡 도선산 소재)
공의 고조이신 휘 계조(諱 繼祖)는 장사랑(將士郞)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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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증조부 승지공 휘 일손묘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장곡 도선산 소재)
증조이신 휘 일손(諱 逸孫)은 선무랑(宣務郞)이시며 조부이신 휘 고(諱 暠)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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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조부 진사공 휘고의 묘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장곡 도선산 소재)
공의 선고이신 휘 사율(諱 士慄)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지금의 경기도 시흥, 군포, 의왕, 광명의 조선조 옛지명인 금천현(衿川縣)의 현감(縣監)이시며 先妃(모친)는 정부인 영광정씨(靈光丁氏)로 명종 21년 을축(明宗乙丑 : 1565년)년에 공을 낳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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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부친 금천현감 휘사율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장곡 도선산 옆 안산 중턱소재)
공의 성품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에 그 마음이 닿았다. 부모를 섬김에 있어 공경심과 효심을 다하여 극진하게 받들고 또한 공의 성격이 배움에 있어 매우 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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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묘소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안산 : 공의 선고 상단 위치)
일찌기 부모의 훈육을 몸소 습득함에 있어번거롭게 여기지 아니하고 매일 문예(文藝 :문학과 예술)를 익힘에 있어서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사서삼경 등 여러가지 서책을 많이 읽고 제자백가(諸子百家 :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노자, 맹자, 장자, 한비자 등 여러학파들이 쓴 자료)를 읽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바르게 생활하고 실천하는 바에 있어서도 작은 게으름도 피우지 아니하였다.
부모 상을 당하여 장사를 지내고 3년상을 하루같이 받들었는가 하면 조상의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도 예의 범절을 중히 여기고 실행하였다.
자식을 훈육함에 있어서도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신의와 믿음으로 대하도록 가르치셨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향리의 유림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며 우러러 칭송하였던 바, 무릇 대략 기록한 내용은 앞에 기술한 바와 같고 좀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하고 생략함이 옳을 것이다.
오호통재라!. 공은 을해(1,635년 : 인조13년)년 9월 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라. 공의 묘는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산 85번지 구봉마을 앞 선산 봉우리에 모셨다.
공의 배우자는 공인(恭人 : 정, 종5품의 종친과 문무관 아내의 품계를 일컫는 말) 화개임씨로서 정묘(丁卯 : 1567년 선조1년)년에 태어나시고 무오(戊午 : 광해18년 1618년)년에 돌아가시니 향년52세이다. 묘는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 앞산자락에 경좌갑향(庚坐甲向 : 묏자리나 집터가 경방을 등지고 갑방을 바라보고 앉은 자리)이다. 슬하에 자식들은 3남1녀을 두었으며 장남은 승소요, 차남은 홍소, 막내는 돈소이며 사위는 이정백(李廷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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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차자 홍소 : 나주시 보산동 장곡 도선산)
장남 승소는 슬하에 1남 장방손 우(祐)를 두었고 차남 홍소는 슬하에 3남으로 차방손 겹(겹),탁(탁)임(임)을 두었으며 돈소는 슬하에 5남으로 암(암), 경(경), 지(祉), 단(袒), 유(裕)를 두었으며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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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손자 휘임의 묘 : 전남 나주시 보산동 장동 도선산 소재)
오호라! 공의 유적(遺蹟 :남긴 발자취)은 마땅히 세상에 날리고 드높일 일이나 세월이 오래되어 그 기록을 가히 보존함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의 근원을 문서로서 헤아릴 수 없도다. 또한 예로로부터 구전하는 바를 어른들로부터 듣고서 상기처럼 기록한 바와 같다.
애석하게도 감히 선대의 일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함을 후손으로서 가이 부끄럽게 여기고 아쉬울 따름이다.
단기 4328년(1995년 : 을해년) 2월 종중일동
13세 방손 종관(鍾官)이 글을 짓고
진원(珍原: 박혁거세의 후손) 박경래(朴京來)가 쓰다.
첫댓글 공의 묘소는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산 85번지 구봉마을 앞산에 초장하였다가 다시 초장의 상단으로 이장 후 최근 나주시 보산동 안산 공의 선친의 묘소 위로 새로 모시게 되어 현재의 위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진 파일이 너무 크니 나는 컴에서 사진이 보이질 않네....
족장님 제 컴에서는 잘 보이는데ᆢ
파일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