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3:18-21.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오광만 교수)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012년 말에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셸리 케이건 저 [죽음이란 무엇인가?](박세연 옮김. 서울: 엘도라도, 2012)는 그 책의 제목만큼 내용도 많은 사람에게 도발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자 케이건은 미국 예일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입니다. 당시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덜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인기를 끌자 케이건이 곧 이어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케이건은 인간을 하나의 물질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사용하다가 고장 나면 폐차 처리하고, 고장 난 라디오를 버리듯이, 인간의 몸은 하나의 물질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만 존재하다가 죽는 순간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죽음입니다. 케이건은 당연히 성경에서 가르치는 죽음 이후의 삶도, 영생도 부인합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모 신학교의 어느 교수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성경공부시간에 케이건이 물질주의자로서 죽음 이후의 삶을 부인하는 책을 썼다고 핏대를 높여가며 비판하는 것을 제가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여 기독교의 영생 교리를 부정하려고 쓴, 반 교리적인 책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대 헬라철학부터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해온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말도하지 마십시오. 단지 화두를 “죽음”으로 정한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케이건이 기독교 전통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물질주의적 입장에서 죽음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가 영적인 것은 부정하고 물질적 가치만을 인정하면서 이 책을 시작하고 있어, 그의 명제와 주장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발견하고 처음엔 마음이 불편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케이건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도 우리는 저자가 정작 말하려고 한 것은 다른 데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3장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이란 제목(특히, 428-35쪽)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고, 그런 인생을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교훈입니다. 케이건은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이고 인생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들이 자칫 자기에게 주어진 한 평생을 망쳐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설령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영생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망쳐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케이건의 말대로 우리가 모두 죽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다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케이건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죽음이 새 출발의 기회마저 앗아가는가?” 이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고 단정합니다. 사람이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100년 뒤에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그 전에 우리는 새 출발의 기회를 잡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429쪽). 제 생각에는 이 대목이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건설적인 결론이며 추론이며, 케이건은 바로 이것을 위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케이건과 같이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죽음이 빨리 찾아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인생을 신중하게 살아가라고 권할 것입니다. 어영부영 살거나, 허투루 시간을 보냈다가는 새로 시작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들 것이고, 그간 저지른 인생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신중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케이건은 그 까닭이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에 비해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다는 사실에서 찾을 것입니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는 식으로 인생을 허비할 여유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무어라고 가르칠까요? 이사야서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상적인 세상을 내다보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새 일을 행하실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려 바벨론에 포로로 간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여 그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그의 택한 백성에게 마시게 하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사 43:20). 이전의 황폐했던 땅과 비교가 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약속도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43:19). 이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요 창조자라는 것을 알리실 것입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43:11).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43:14).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43:15).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런 일을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그분을 찬송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알립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43:21).
여기서 “찬송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기린다,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부른다는 뜻 이외에, 그분의 영광스러움의 이모저모를 알린다는 뜻을 가진 의미의 폭이 넓은 단어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동일한 맥락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찬송하는 것을 표현한 베드로전서 2:9도 이와 비슷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 너희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부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삶의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설교로 전하는 하나님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하나님의 성품 알리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여 그 혜택을 누리는 자들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말 역시 노래를 부르라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상생활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간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 역할을 잘 수행해왔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시 19:1).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송의 노랫말과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중 “저 하늘은 주 영광 나타내고”는 피조물들이 저마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솜씨와 그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것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하나님의 인격적임과 부유하심을 더 잘 전하는 피조물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삶의 전반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야와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되는 삶을 살아라.”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구별되게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나타내며 살아라.”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생활이 찬송이라고 하니까 본문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활하면서 찬송하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뭐 노래가 좋으면 생활하면서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노래하지 말하고 해도 노래를 하니까요. 제 말은 이사야의 이 본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삶이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찬송을 하지 않고 말로 하지는 않아도, 직장에서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하든지, 취미생활을 하면서 손을 놀리고,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만드는 것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일은 설교하거나 선교하는 일입니다. 성경이라는 특별계시에 담겨 있는 것을 밝혀 성도들이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자비를 좀 더 정확하게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한다면 목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잘 설명하는 메시지를 전해야만 그것이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처럼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성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설교하지 않는 성도들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선포할까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은혜가 한량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도우시고, 힘이 없고 억울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보호하고 변호하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선포하려면 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그러한 정신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됩니다. 인권 보호 단체나 인권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돕고, 무료 급식하는 것이 이 일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참되고 공의롭게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법조인들일 것입니다. 불의로 재판하지 않고 공의로 판결을 하고 징벌 받을 자에게 징벌 받게 하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벗겨줌으로써 법조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살인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하나님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분들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약사, 그밖에 보건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낙태를 함부로 실시하지 않고, 항생제를 남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가정에서 음식을 만드는 주부도,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그들이 하는 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음식은 생존과 건강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즘 건강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음식에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공한 음식이 아니라 자연식품에다가,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여 요리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음식은 배부름의 문제만 아니라 건강과 맛과 인체에 이로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익이나 돈벌이를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드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찬송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하나님은 40년간 이스라엘에게 음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숫자도 많고 광야라서 식재료를 구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음식을 백성들에게 제공하셨습니다. 그저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라면서 맛도 없는 음식을 던져 준 것이 아니라 꿀처럼 달콤하고 맛있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이 귀찮거나 재료가 부족하다고 밥솥에 밥을 해놓고 일주일 내내 그 밥을 먹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밀 한 알이 주먹만 하게 큰 유전자 변형 음식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공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음식을 내렸습니다. 프랑크라는 음악가가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이라는 곡을 만들었는데, 하늘의 양식 먹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소망을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매일 맛있는 음식을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백성들의 건강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부가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는 것도, 식당에서 유전자 변형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여 손님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음식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됩니다.
심지어 저는 가족이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 하는 것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결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체를 만지거나 유출병 앓는 사람을 만진 사람에게는 물로 정결케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이밖에도 부정한 것에 접촉한 사람은 반드시 정결의식을 통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집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그래야 거룩하고 정결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씻고 집안 청소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정결한 속성을 드러내는 찬송입니다. 환경미화원은 이 분야에 탁월한 찬송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성인 남자들은 밖에 나갔다 집에 들어와도 손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려 하고, 손 씻기를 싫어합니다. 대부분 여자들은 잔소리합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하나님을 본받고 싶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처럼 정결해야 한단다. 손을 깨끗이 씻으렴.” “손을 씻는 것은 거룩하고 정결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란다.” 이 말 한 마디면 끝!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삶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행동을 하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일간의 우리의 삶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의 삶속에서 우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권하면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했습니다(벧전 1:14, 15).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신자들의 삶을 교회 생활과 성경 읽기와 기도와 헌금하는 일 등 일부분의 삶에 국한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지, 거룩하고 경건한 삶과 관련을 시켜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일의 생활과 나머지 6일간의 생활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교회를 지도하던 옛날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 잘못된 삶의 모범으로 작용한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교단을 만드신 어른들 중에도 이렇게 가르쳤고,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 계십니다. 기도생활은 중요하지만 밥 먹고 아이 키우고 설거지하고 직장 생활하는 것은 거룩한 생활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분의 삶을 규범으로 따르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은 이원론적인 삶을 살게 되고, 평상시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한 것과 관련하여 말씀 드린 것을 조금만 더 열거해 보겠습니다. 피조물은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고 합니다(시 19:4). 그렇다면 무생물들인 피조물들은 사상 전달에는 제한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존재와 움직임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좀 더 의미가 있고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나 의미 있는 말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문학가들은 하나님의 참되고 바르고 좋은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SNS의 활용으로 망가진 언어를 사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아름답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미술가는 색채로써 또 점과 선과 도형의 균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미술가, 디자이너, 심지어 간판을 다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형과 색채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시간만 나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술가들이 좋아하는 햇살이 비칠 때만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원래 신학교에 가서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를 습득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성직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신은 신학을 할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입니다. 그래서 고흐는 미술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일 고흐가 목사님이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그의 이름을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미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상파 화가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건축가는 기하학과 조형, 구조와 공간으로써 하나님의 피조물의 장대함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창조의 축소판을 보여줍니다. 스페인 카탈루나 출신의 안토니오 가우디는 그가 바르셀로나 도시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반영한 기하학적인 건축물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공원, 집, 성당을 보러 바르셀로나를 찾는 까닭은 그가 만든 건축물에서 범상하지 않은 영광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판에 박힌 건축물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상상과 곡선미가 어우러진 건축가로서 하나님의 영광 말입니다.
음악가는 구체적인 노랫말에 곡조를 붙여 하나님의 지혜, 자비, 영광, 업적을 기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노래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주는 메시지와 감성을 전달해왔습니다. 감정 전달의 관점에서 보면 음악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탁월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송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나 찬송 이외에 앞에서 열거한 예술 분야와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감히 음악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의 최고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말씀을 이 상황에 적용하자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미술, 건축, 음악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음악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일이 죽어 영원한 세계에서도 계속되는 것은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케이건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하나님을 찬송하던 것은 영원 세계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과 15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1-3).
내가 보니……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구원 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에서 그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로써 하나님의 의롭고 참되심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며 경배합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아울러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는 일 중에 “찬송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고 교회는 이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도 찬송 부르는 일이 계속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때에 찬송을 영원히 부를 것을 대비하여 지금부터 찬송을 연습하고 실력을 갈고 닦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배 요소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을 반영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예배에서 찬송은 우리 삶의 모든 찬송의 출발이며, 동기 부여하는 찬송입니다.
신자들이 이 땅에서 할 일이 많이 있겠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함과 조화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신자들이 새로이 시작하고 평생 수행할 중요한 일입니다. 각 사람의 특기와 직업 등은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함을 표현하기에 좋은 수단입니다. 직업은 소명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새로이 시작하면 좋을까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입니다. 그 창조물은 본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송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하고, 교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자신이 잘하는 것을 준비하고 계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림교회가 상계동 이 자리로 이전하여 예배를 할뿐더러 한국의 무너진 교육체계를 염려하여 앞으로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로서 하는 새로운 일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예림교회가 꿈꾸는 학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르게 사고하고,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 됨을 드러내는 자녀를 양육하는 학교입니다. 교육은 사회 전반에 필요한 일꾼을 양성하는 일입니다. 창조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분야를 가르치고 배우는 기관입니다.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온 교우들이 힘을 합치겠다고 하니, 예림교회와 앞으로 세워질 학교의 방향은 오늘 강설 주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것을 실천하기에 교육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생활 전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림교회와 부설 (가칭) 예림 기독교 학교가 이런 일을 잘하셔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