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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선생문집梧峯先生文集” 해제
심경호沈慶昊*1)
1. 서언
“오봉집”은 경상도 의성義城 하천리下川里에 거처를 두고 선조, 광해군, 인조 초에 활동한 신지제申之悌(1562∼1624)의 문집이다.
신지제의 자는 순부順夫(夫는 남자의 미칭으로 ‘보’로 읽기도 함), 호는 오봉梧峯 혹은 구로龜老이며, 본관은 아주鵝洲로, 구미파조龜尾派祖 신광귀申光貴의 후손이다. 의성의 아주신씨 가문은 의성읍과 봉양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이 중에 읍파邑派인 내부령공파內府令公派는 읍성에 세거하고 구파龜派의 봉주공파鳳州公派는 봉양면 구미리에 세거했다. 읍파는 16세기 초 신원록申元祿으로부터 번창하기 시작했고, 봉주공파는 신지제가 봉양면 구미리에 입향하면서 큰 가문을 형성했다.
신지제는 1613년부터 1618년 2월까지 창원 부사昌原府使 시절의 시를 「회산잡영檜山雜詠」으로 엮고, 1618년 7월 이후 1624년 1월 8일 타계하기 직전까지 구미촌龜尾村의 구장龜莊에 살던 만년의 시를 「구당만록龜堂漫錄」으로 남겨 두었다. 후손들은 이를 기초로 유집遺集인 “오봉집”을 편찬하고 간행했다. 이[1]오봉집은 1740년에 현손 신진귀申震龜와 신하귀申夏龜 등이 장대서원藏待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오봉선생문집 원집梧峯先生文集原集” 7권과 부록 2권 합 4책, 그리고 1789년에 6세손 신체인申體仁(1731∼1812)이 일시逸詩 61제를 모아 간행한 “오봉선생별집梧峯先生別集”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봉집”의 부록은 상권과 하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는 이민환李民寏이 지은 행장行狀, 1738년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행장 후지後識,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 1739년에 이광정이 지은 묘지墓誌, 이민성李民宬 등 4인이 지은 제문祭文 4편, 이호민李好閔과 장현광張顯光 등 18인이 지은 만사輓詞가 있다. 또한 장대서원 상량문과 1672년 김계광金啓光이 지은 봉안문, 이유장李惟樟이 지은 상향 축문이 있다.
원집의 서문은 1739년 이광정이 짓고 원집의 발문은 같은 1739년에 권상일權相一이 지었으며, 신진귀의 원집 후지後識가 있다. 별집의 발문은 1742년에 김이만金履萬이 지었고, 신체인이 별집 개편 후지를 덧붙였다. 원집과 별집은 국립중앙도서관 등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속12로 표점 영인되었다.
“오봉집”의 원집과 별집에는 449제題의 시가 실려 있다. 즉, 원집 권1 35제, 권2 회산잡영(상) 108제, 권3 회산잡영(중) 54제, 권4 회산잡영(하) 90제, 권5 구당만록에 95제, 권7 습유拾遺에 6제, 그리고 별집 61제이다. 이 61제는 신지제가 예안 현감으로 있던 1590년대 지은 「우록암牛祿巖」부터 신지제가 졸하던 1624년에 지은 「갑자년 새 달력에 쓰다[題甲子新曆]」까지, 원집에 실리지 못한 시들을 연대순으로 수록했다. “오봉집”에 수습된 시들은 많지 않지만, 왜란 당시의 여러 상황, 저자의 교유관계, 향촌 생활의 양상을 잘 드러내 보여 준다. 소재가 특이한 것이 많다.
“오봉집”에는 신지제의 산문이 그리 많이 실려 있지 않다. 원집 권6에 기記 2편, 서序 1편, 권7에 차箚 1편, 교敎 3편, 제문祭文 8편, 묘지墓誌 2편, 서書 6편 등이 가까스로 수습되어 있다. 별집에는 소疏 1편, 서書 5편, 지발識跋 2편, 제문祭文 2편이 있다. 경학이나 성리학 관련 저술은 남기지 않은 듯하다. 별집의 「사승지소辭承旨疏」는 1623년 반정 이후 인조가 승지 벼슬을 제수하자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올린 글이다. 6세손 신체인은 별집 후지에서, 이 상소를 실어 신지제가 광해군 때 벼슬했던 대절大節을 지키려 했음을 보여 주려 한다고 수록 의의를 밝혔다.
한편 신지제 관련 문헌으로 종택에 있던 전적·고문서 8종 5책 78매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2. 신지제의 삶
신지제는 신몽득申夢得과 월성 박씨月城朴氏(박민수朴敏樹의 딸)와의 사이에 태어난 3남1녀 가운데 제2남이다. 모친 박씨는 8세 되던 1569년에 여의었다. 아내는 함안 조씨咸安趙氏로, 조지趙址의 딸이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이다. 아들은 신홍망申弘望이다. 신지제의 형은 지효之孝, 아우는 지신之信이며, 누이는 김희맹金希孟의 부인이다. 이복동생으로 고창 오씨高敞吳氏(오사익吳士翼의 딸)가 낳은 지의之義·지행之行·지경之敬·지훈之訓이 있는데, 지행은 숙부 신몽필申夢弼의 후사로 나갔고, 지훈은 요절했다.
신지제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서는 사위 이민환이 지은 행장과 현손 신진귀가 작성한 「연보」에 자세하다.
(1) 출생에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신지제는 1562년 7월 19일, 의성현 하천下川 신례동新禮洞 집에서 태어났다. 9대조 안렴공은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 관동리館洞里에 살았는데, 5대조 상장공 때 안동安東 풍산현豐山縣 정사동鼎寺洞으로 옮겼다가, 증조 판결사공 신한申翰이 다시 신례동으로 이주했다.
조부는 증 공조 참판 응규應奎이고, 부친은 증 좌승지 몽득夢得이다. 모친은 월성박씨月城朴氏로 민수敏樹의 딸이다. 8세 되던 1569년 12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했다.
13세 되던 1574년 안동 가야곡佳野谷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가서 수학했다. 권태일權泰一·박의장朴毅長과 함께 공부했다. 17세 되던 1578년 가야곡에서 의성으로 돌아와 의성 천방산天榜山 지보사持寶寺에서 글을 읽었다. 1581년에는 백씨와 함께 의성 빙산사氷山寺에서 공부했다. 23세 되던 1584년 2월, 함안 조씨와 혼인했다. 1588년 4월, 스승 김언기를 곡했다.
28세 때인 1589년 증광增廣 대소향시大小鄕試에 응시하고, 4월에 문과 갑과甲科 3인으로 합격했다. 이때 이단異端에 대한 대책對策이 1등으로 뽑혔다. 시관이던 류성룡柳成龍이 신지제의 인품을 두고 ‘제일 인물第一人物’로 높이 평가했다. 5월에 무공랑務功郞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다. 휴가를 청하여 성친省親했다가, 11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선무랑宣務郞에 승품되고, 곧 이어 선교랑宣敎郞에 올랐다. 만력萬曆 17년 즉 1589년의 11월에 이조가 선무랑 사섬시 직장 신지제를 선교랑 사섬시 직장으로 임명하는 교지를 발급한 것이 현전한다. 1590년 4월에 승훈랑, 5월에 승의랑에 올랐다.
1591년 2월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6월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어 7월에 부임했다. 11월에 봉직랑奉直郞으로 승품했다. 예안에 부임한 이후 도산陶山으로 가서 이황李滉의 사당을 배알했다. 매달 서원으로 가서, 이황의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1531∼1598),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구국 활동
1592년 4월에 고향에서 수연壽宴을 열었는데, 왜구가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예안으로 돌아갔다. 5월에 백씨 신지효申之孝(1561∼1592)가 어머니 오씨를 모시고 응동鷹洞(또는 천동泉洞, 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에 피신했다가 왜병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 베였다.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어, 아우 신지제에게 직수職守를 생각하여 임난수명臨亂授命하라는 내용의 혈서를 쓰고 죽음을 맞았다.
신지제의 6대손 신체인은 1817년 목판 간행한[1]응암실적鷹巖實蹟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에서 신지효의 ‘혈서’ 작성 경위를 밝혀 두었다. 이 무렵 안집사安集使가 안동을 지키지 않고 도망했으므로, 5월에 신지제는 안동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신지제는 두 고을의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용궁龍宮으로 가서 적의 길을 차단했고, 적이 안동으로부터 예안현을 범하자 군사를 일으켜 적을물리쳤다. 1593년 봄, 기축(1589년) 과거에 동방 급제한 김해金垓(1555∼1593)가 의병장이 되었다. 김륵金玏(1540∼1616)의 [1]백암집栢巖集에, 김륵이 예안 현감 신지제에게 안동 부사를 겸하도록 하고, 김해를 안동 의병장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해는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에서 분전했고,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했다. 신지제는 그를 위해 뇌시誄詩를 지었다. 겨울에는 관찰사에게 주책籌策 4조를 올렸다. “오봉집” 별집에 실린 그 글은 ①상전賞典을 분명히 할 것, ②군율軍律을 제대로 시행할 것, ③비장裨將을 많이 두지 말 것, ④무비武備를 늦추지 말 것 등을 권계했다. 12월에 김성일의 장사葬事에 참여했다.
1594년 정월 통선랑에 오르고 예조 정랑 겸 예안 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9월에 청량산에 올라갔는데, 지세를 파악하여 청량산성을 수축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595년 4월, 춘추관 기사관을 겸대했다. 1596년 2월 조봉대부에 올랐다. 5월에 임기가 차서 공조 정랑이 되었으나, 체찰사 이원익의 계청으로 예안 현감에 잉임仍任되었다. 7월에 조산대부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대했다.
36세 되던 1597년 2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어 시강원 문학이 되었다. 3월에 사임하고 용양위 부사직에 제수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성친했다. 4월에 문학으로서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방백方伯과 함께 팔공산성八公山城에 들어가 그곳을 지켰다. 벽견산성에 병으로 누워 있을 때 권전權詮(1549∼1598)을 만나 오언율시 1수와 칠언절구 1수를 주었다. 이듬해 왜구가 쳐들어오자, 방백은 근왕勤王을 이유로 성을 버리고 갔다. 신지제는 이용순李用淳을 방백으로 삼아 먼저 산성에 들여보내 여러 수령을 독려하여 전투에 대비하게 했다. 그리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곽재우郭再祐(1552∼1617)와 함께 창의했다. 김시형金始炯(1681∼1750)이 갑인년(1734) 늦봄에 지은[1]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1]창의록倡義錄
)에 부기된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 따르면 당시 성을 지키던 종사관은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 조방장助防將은 밀양 부사 이영李英, 조전장助戰將은 창녕 현감 장응기張應奇 외 6명이 었으며, 함께 성을 지킨 사람은 모두 678명이었다.
(3) 선조 말 광해군조의 관력
1598년 3월에, 선백씨가 초선抄選한 성리서性理書에 지어識語를 적었다. ‘성리서’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을에는 성성재 금난수가 이황 편찬의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을 베껴서 보내 주었다. 39세 되던 1600년 2월, 중훈대부에 올라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40세 되던 1601년 1월에 예조 좌랑이 되고, 2월에 중직대부에 올라 예조 정랑이 되었으며, 7월에 영남의 여러 사람과 장악원掌樂院 새 건물에서 영남동도회嶺南同道會를 발족했다.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영남 사람 중에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 26명의 관직과 출신 지역을 적은 「영남동도제명권嶺南同道題名卷」을 작성했다. 8월에는 전주 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601년 6월, 신지제는 전주 판관으로서 전운판관轉運判官 허균許筠과 만나 법성창法聖倉 등의 조운을 감독했다. 허균이 남긴 「조관기행漕官紀行」(성소부부고권18 문부 15)을 보면, 8월 12일(신미) 저녁 무렵 전주에 들어가, 13일(임신) 진남헌鎭南軒에서 방백과 함께 장간長竿·주승走繩·도상跳床 등을 구경했다. 저녁 무렵 허균의 대부인이 설익은 감을 먹고 체하여 위독하게 되자, 허균은 부사副使 채형蔡衡, 중군中軍 이홍사李弘嗣, 판관 신지제와 함께 밤새 동헌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이 이후 신지제가 허균과 창화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허균은 체차되어 원접사 이정귀李庭龜의 종사관과 형조 정랑·병조 정랑을 거쳐, 34세 되던 1602년 10월에 사복시 정이 된다.
1602년 3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고, 통훈대부에 올라 체찰사 종사관이 되었다가,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7월에 실록교정청 낭청에 뽑혔다. 1603년 8월에는 경상도 군무안핵사慶尙道軍務按覈使로 파견되었다. 43세 때인 1604년 5월에는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 지제교가 되었다.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이름이 올랐다. 선무원종공신은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공신에 책훈된 사람들 이외에 9,060명을 녹훈한 것이다.
44세 때인 1605년 5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고,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다. 지평으로서 「헌부차자憲府箚子」를 작성해서, 풍수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를 기술했다. 그런데 대사헌 박승종朴承宗이 시임 재상을 몰아세웠다는 이유로 차자를 위로 올리지 않자, 사직하고 귀향했다. 1606년 4월 충무위 부사용에 제수되고, 7월에 통제사 종사관이 되었다. 1607년 3월에 강계부 판관이 되었으나 부친의 병환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고, 4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신지제가 선무원종공신 1등이라서 돌아가신 6월에 부친은 좌승지에 추증되고 어머니 박씨는 숙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오씨도 숙부인에 증직되었다. 7월에 부친을 비안현比安縣 동쪽 화장동花藏洞에 장사 지냈다. 이후 3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1609년 2월 선조가 승하하자, 여막 문을 나가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했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 8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12월에 공조 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3월에는 충청도 도사가 되었다가 사직하고 귀향했다. 8월에 함경도 평사評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무렵 낙동강의 지류 남대천南大川의 구미보龜尾洑를 쌓는 데 공을 들였다. 1610년 9월 작성된 “구미구복신장도목완의龜尾舊洑新粧都目完議”에 따르면, 신지제가 마을 몽리답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하기위해 길부촌(봉양면 문흥2리) 앞에 저수지를 쌓고 구미리까지 4㎞에 이르는 관개 시설을 만들어 인근 7개 동의 전답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1611년 10월, 전라도 도사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13년 8월, 창원부사에 제수되었는데, 9월에 어머니의 명으로 부임했다. 1614년 조임도와 함께 월영대月影臺를 유람했고, 성안의가 와서 여러 날 머물렀다. 4월에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과 함께 공명정空明亭 아래서 배를 띄워 영산靈山의 창암강정蒼巖江亭으로 곽재우를 방문하고 창화시를 남겼다. 당시 창원의 학교가 황폐해 있었는데, 신지제는 녹봉을 덜어 학교를 건립했다. 8월에 무과 감시를 주관하고, 9월에 무과 도회시를 주관했다.
1615년 4월에 모친 오씨의 수연壽宴을 열었다. 1616년 정월에 창원 향교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을 했다. 12월에 김륵을 곡했다. 1617년 정월에 손기양을 곡했다. 3월에는 정구鄭逑가 지난날 은둔했던 창원의 관해정觀海亭을 중수했다. 이보다 앞서 1587년에 정구는 함안 군수로 재직하면서 창원에 관해정을 지을 터를 사 두었다. 그리고 신지제에게 서찰을 보내 “바닷가에 일찍이 내가 지은 정자가 있는데, 관할 후생들이 다시 보수하여 강학하는 장소로 삼을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수월한 일이 아니니 가만히 유념하여 살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이후 함안 유생들이 초가집을 지었던 듯하다. 해정 즉 관해정을 중수하면서 신지제는 칠언율시 「해정을 중수하고 지은 시[海亭重修韻]」를 지어 “처음에 비경을 찾아 작은 집을 지었고, 다시 우뚝한 정자 지으니 물색이 새롭네.[初營小築天慳破 更著高齋物色新]”라고했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합천에 거처했으나, 신지제는 창원 부사로 있는 6년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어떤 품관이 창원 부사가 궁궐의 면포 40필을 사사로이 사용했다는 말을 지어내어 정인홍에게 알리자, 정인홍은 “나는 부사의 정사政事에 관해 들었다. 필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할 만큼, 신지제를 청백리로 인정했다고 한다.
(4) 구미촌의 만년과 죽음 이후
신지제는 57세 되던 1618년 2월에 망우당 곽재우를 곡했다. 3월에 체직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창원 부사 시절의 시를 「회산잡영」으로 엮었다. 7월에 살 곳을 구미촌에 정하고 ‘구로龜老’라 자호했다. 또 나서 자란 곳이 하천下川 오동산梧桐山 북쪽이라서 ‘오봉梧峯’이라고 자호했다. 1619년 안평安平 교동橋洞에 부친과 모친 박씨 묘를 개장하면서 합폄合窆했다. 1620년 정월에 한강 정구의 부고를 듣고 곡했다. 1621년7월 28일 도적이 들어 집과 서적 500여 권이 불탔다. 1622년 2월에 후금이 중국의 강토를 점령했다는 소문을 듣고 「요양가遼陽歌」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다. 62세 되던 1623년 3월에 인조가 즉위하고,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2월에는 모친 오씨의 상을 당했다. 이듬해 1624년 1월 8일 정침正寢에서 졸하고, 3월 17일 의성현 서북 우곡방羽谷坊 율곡리栗谷里에 장사 지내졌다. 향년 63세였다. 1646년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세자 좌부빈객에 추증되었다.
1669년 8월에 사림이 경상도 의성군 신례동 서쪽, 봉양면 장대리에 있는 장대서당藏待書堂 오른쪽에 사당을 세웠다. 장대서당은 1610년 신지제가 후진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강당이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장기어신 대시이용藏器於身待時而用’이라는 현판을 써 준 데서 서당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현판의 글은[1]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의 “군자가 자신의 몸에 보배스런 기물을 간직했다가 때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 무슨 불리할 일이 있겠는가.[君子藏器於身 待時而動 何不利之有]”라는 말에서 취한 것으로, ‘장수이대지藏修以待之’의 뜻이다. 1672년 12월, 정묘호란 때 좌도의병장 이민성李民宬의 위판과 함께 장대사藏待祠에 위판이 병향並享되었다. 이유장李惟樟이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지었다. 1685년 인근의 사우에 모셔져 있던 김광수金光粹와 신원록申元祿의 위패를 옮겨 왔고, 1702년 장대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87년에 묘우, 1996년에 강당이 복원되었다. 1991년에 현재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 금산 언덕의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신체인과 함께 신지제의 위판이 봉안되었고, 2005년 신지효도 추향되었다. 1782년에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건립한 금연정사錦淵精舍가 1912년에 무너진 것을 1977년 중건하고, 1991년 서원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3. 신지제의 시
[1]오봉집
원집 권1은 예안 현감으로 있던 1591년 이후부터 1613년 창원 부사가 되기 전까지 지은 35제의 시를 수록했다. 권2∼4는 1613년에서 1618년까지 창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은 「회산잡영」으로, 회산은 창원의 별칭이다. 「회산잡영」은 상권 108제, 중권 54제, 하권 90제이니, 모두 252제의 시를 수록했다.
권7 습유에는 시 6제가 실려 있다.
신지제는 중년에 시를 잘 짓지 않았다. 홍위洪瑋(1559∼1624, 자 위부偉夫)는 예천 군수로 나갈 때 칠언율시 1수의 전별시를 써 주면서 그 제목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곧, 「내가 중년에 시 짓기를 그만둔 지가 한참 되었는데, 지금 서담 홍위부가 남방으로 가면서 떠날 적에 나에게 “이번 행차에 어찌 한 마디를 주지 않는가. 한적할때 친구의 시를 벽에 붙여 두고 때로 읊고 감상하면서 회포를 풀리라.”라고 말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글 솜씨 부족을 핑계로 사양하기 어려워서 삼가 한 수를 지어서 드리다[愚漢中年 久廢吟詠 今洪偉夫(瑋號西潭) 將適南州 臨行語余曰 此行何不爲一言以贈 閒寂中將故舊詩什付之壁 有時吟賞以開懷也 余聞此言 難以荒拙辭 聊奉一律]」[우한중년 구폐음영 금홍위부(위호서담) 장적남주 림행어여왈 차행하부위일언이증 한적중장고구시십부지벽 유시음상이개회야 여문차언 난이황졸사 료봉일률]」라는 제목이다. 신지제는 시에서 수사에 공을 들이지 않고, 근체시나 고시를 통해서 사유, 보고, 의론, 기록을 성실하게 행했다. 특히 한시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인 칠언율시를 즐겨 사용했다. 사우師友나 관원들과의 수창을 통해 정서적인 공감을 표시하고, 현실 정치나 민중생활의 상황을 보고했다. 개인의 일생을 회고하고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고, 잡체시雜體詩등 여러 특수한 시 형식을 실험하기도 했다. 따라서 시의 세계가 상당히 다채롭다.
(1) 수창시酬唱詩
신지제의 시는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수창이 많다. 특히 신지제는 영남의 퇴계학맥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고 그들과 수창을 많이 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신지제는 소년 시절 김언기金彦璣에게 배웠다. 김언기는 이황의 급문제자及門弟子로, 벼슬에 나아가길 단념하고 도산陶山 근처에 유일서사惟一書舍를 두고 후진을 교육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신지제를 비롯해 남치리南致利, 정사성鄭士誠, 귄위權暐, 박의장朴毅長, 권태일權泰一 등이 배출했다. 신지제는 그들과 수창했을 테지만, 수습되지 않은 탓인지 “오봉집”에는 김언기의 다른 문하생과 수창한 시를 볼 수가 없다.
또한 신지제는 이황의 고제 김성일金誠一을 흠모하고 스스로 제자를 자칭했다. 김성일의 문인으로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인재訒齋 최현崔晛,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운천雲川 김용金涌 등을 꼽을 수 있다. 권태일은 신지제와 마찬가지로 김언기에게서 배우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김용과 수창한 시가[1]오봉집에 들어 있다.
그런데 신지제는 23세에 조려趙旅의 후손 망운정望雲亭 조지趙址의 딸과 혼인하면서, 함안 조씨의 여러 학자와도 교유했다. 조지의 아들은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남포南浦 조순도趙純道, 방호정方壺亭 조준도趙遵道, 지악芝嶽 조동도趙東道이다. 이 가운데 조형도는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서 전공을 세웠다.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사위이고, 오운의 장인 허사렴許士廉은 이황의 큰 처남이다. 그런데 그는 1587년에 정구鄭逑에게 배웠고, 퇴계학과 남명학을 겸섭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지제는 여헌 장현광을 종유했다. 신지제의 사촌 처남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1585∼1664)는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1567∼1629)과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1531∼1605)에게서 수학했으므로 퇴계학통에 연결된다. 그런데 그의 「취정록就正錄 간송별집 권1)에 보면, 그가 의성 사곡촌舍谷村에 우거하던 1600년에 선대인을 모시고 하천리下川里의 신지제를 방문했을 때 신지제가 그의 선친을 모시고 장현광을 종유하는 광경을 목도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임도 자신도 젊은 시절부터 장현광의 수양론과 실천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단, 그는 경상도 함안에서 태어났으므로 남명 조식의 학풍에서 영향을 받은 면도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지제는 퇴계의 학맥을 이은 인사들을 종유하고 그들의 시에 수창했다. [1]오봉집
에는 이황의 고제 월천 조목이 지은 시에 차운한 시가 있다. 즉, 조목은 71세 때인 1593년 9월에 안동시 도산면 온계천溫溪川 하류의 청음석淸吟石에서 시를 지었는데, 신지제는 그 시에 차운한 칠언율시 3수를 남겼다. 또 [1]오봉집
에는 1594년 9월 금난수와 청량산을 함께 노닐고 그를 이별하며 지은 「고산금난수 어른과 이별하며[留別孤山丈(琴公蘭秀)]」 칠언율시 1수가 있다. 신지제는 특히설월당 김부륜의 시에 차운하거나 그에게 올린 시를 문집에 많이 남겼다.
∙「설월당 김부륜 어른에게 남겨 두고 떠나며 좌우 군자들에게 보여 주다[留別雪月丈(金公富倫) 兼示左右諸君子]」:김부륜에게 보낸 칠언절구 1수
∙「울분을 표출하여 설월당 어른에게 올리다[奉呈雪月丈寄憤]」:칠언율시 1수
∙「설월당 어른의 시에 차운하다[謹次雪月丈韻]」 갑오년(1594):예조 정랑으로서 예안 현감을 겸했을 때 지은 오언절구 1수
∙「또 설월당 어른의 시에 차운하다[又次雪月丈韻]」:오언절구 1수
∙「가야로 가다가 술을 들고 오는 설월당 어른을 만나 모래사장에 앉아 이야기 나누다가 술에 취해 절구 한 수를 읊다[將往佳野 路上見雪月丈佩酒而來 坐話沙頭 醉吟一絶]」 병신년(1596):칠언절구 1수
∙「설월당 어른이 술을 들고 찾아와 잠시 앉아 있다가 소매에서 시 몇 폭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바로 종리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동년 급제자 모임을 기념한 것이었다. 좌중에서 화답한 이가 많아 취중에 아무렇게 두 편을 짓다[雪月丈佩酒枉顧 坐頃袖出詩累幅示之 乃步鍾離先生韻 記榜會事也 座中多和者 醉中亂草二篇]」:칠언절구 2수
∙「설월당 어른의 시에 삼가 차운하여 왕림에 대해 사례하다[謹次雪月丈韻謝枉顧]」:칠언율시 1수. 김부륜의 「낙중의 친구들에게 보여 주다[示洛中諸友]」에 차운
∙「설월당 어른이 남긴 시에 삼가 차운하다[敬次雪月丈留韻]」:오언절구 1수
∙「선주 단련판관 두목의 시에 차운하여 설월당 어른에게 올리다[次杜團練宣州韻 奉呈雪月丈]」:칠언율시 1수. 두목의 「선성을 떠나 장안에 벼슬하러 올라 가다[自宣城赴官上京]」에 차운하여 김부륜에게 올린 시
∙「설월당 어른의 초대를 받았으나 바빠서 가지 못해 길 가는 중에 써서 올리다[雪月丈見招 忙不克進 途中書呈]」:칠언율시 1수. 1597년 신지제가 순찰사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고을을 지나면서 지은 시 신지제는 김성일과 장현광 두 인물의 학문태도와 성취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 특히 김성일의 학맥을 이었다고 할 이민성李民宬(1570∼1629, 자 관보寬甫, 호 경정敬亭)과 이민환李民寏(1573∼1649, 자 이장而壯, 호 자암紫巖) 형제와 오랜 교분이 있어서, 그들의 시에 차운하거나 그들에게 준 시가 여럿 있다. 이민환은 16세 때 김성일의 문하에 들어갔고, 21세 때 김성일이 순국하자 겨울 한 철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30대 이후에는 장현광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후 이민환은 후금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생환했다.
∙「예조 정랑이 되어 서울로 가는 이관보를 보내며[送李寬甫(民宬號敬亭)爲禮曹正郞赴洛]」:1613년에 이민성을 전송하면서 쓴 시. 오언율시 1수
∙「빙산동(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입구 시냇가에서 술을 마시고 관보와 이장(이민환이니 호가 자암이다) 및 제생들과 함께 운자를 불러 짓다[氷山洞口 臨溪酌酒 同寬甫而壯(李公民寏號紫巖)及諸生呼韻]」:칠언절구 1수
∙「서울로 이장을 맞이하러 가는 관보를 전송하며[送寬甫迎而壯于洛下]:오언율시 1수
∙「충원으로 부임하는 이이장을 전송하며[送李而壯赴忠原]」 계축년(1613):역적
유인발柳仁發이 처형되면서 그의 고향 충주목이 충원군으로 강등된 이후 충원으로 부임하는 이민환을 전송하면서 지은 오언율시 1수
∙「관보의 절구시에 차운하다[次寬甫絶句]」:칠언절구 3수
∙「아들이 이경정이 황제의 부음을 듣고 감회를 서술한 시에 차운하여 나에게 주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家豚次李敬亭聞 皇帝訃音述感韻示我 仍和其韻]」:경신년(1620)에 명나라 신종황제(만력제)가 죽은 후 이민성이 「신종황제를 곡하다[哭神宗皇帝]」 시를 짓자 신지제의 아들 신홍망申弘望(1600∼1673)이 차운했는데, 신지제가 다시 그 시에 차운했다. 칠언 14운 28구
∙「중국에 사신 가는 이경정을 전송하며[送李敬亭朝天]」:계해년(1623)에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吉泉里에 있는 아주 신씨의 재사인 천동재사泉洞齋舍에 있으면서 이민성을 위하여 지은 칠언절구 1수
∙「우연히 이웃 친구와 앞개울에서 회를 떠 먹고 그 일을 읊어 관보에게 보이다. 2수[偶與隣友膾魚前溪 詠其事示寬甫 二首]」:구미촌 별장에 있을 때 이민성에게 보인 오언율시 2수
∙「관보가 아우를 생각하며 모은 두보 시 절구 10수에 차운하다[次寬甫憶弟集杜詩十絶]」:이민성이 후금에 잡혀 간 이민환을 생각하면서 지은 화두和杜 10수에 다시 차운한 오언절구 10수
∙「가을에 관보가 기성에 가서 이장을 만나려고 하기에 짤막한 율시를 지어주며 송별할 참이었다. 그가 여정을 나서지 않다가 나중에서야 길을 떠났는데, 아마도 지금쯤이면 이미 이장과 서로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일전에 지어 놓은 시를 고쳐서 생각하는 바를 부친다[秋間寬甫欲赴箕城見而壯 有短律擬贈別 其行止未出 後乃作行 想今已與而壯相會 改點前述 以寄所思]」:오언율시 1수
∙「관보가 관서에서 돌아와 이장의 소식을 전하기에[寬甫自關西還 傳而壯消息]」:오언율시 1수 신지제는 1613년부터 1618년까지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유학幼學인 구산립丘山立(자 경앙景仰)과 자주 어울렸으며, 그에게 준 증시나 수창도 있다. 그리고 창원 부사로재직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회산잡영」 상·중·하를 보면, 창원 교수 박서귀朴瑞龜(1546∼1623)와 수창한 시가 가장 많다. 박서귀는 자가 정하呈夏, 호는 악견嶽堅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창원 교수였기 때문에 신지제는 그를 ‘광문廣文’이라고 불렀다.
저술로[1]악견시집嶽堅詩集
이 있다. 그 시집에 「신영애에게 드리다[贈申永崖(之悌)]」 시가 있고 신지제의 차운 2수 가운데 1수만 있다. [1]오봉집
에 수록된 신지제의 시 가운데 박서귀와 수창한 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봄날 박 광문과 뒤 골짜기에서 노닐다[春日與朴廣文遊後洞]」:칠언율시 1수
∙「남쪽 성문 위에서 광문, 별장과 대작하며 별장의 시에 차운하다[南城門上 同廣文別將對酌 用別將韻]」:칠언율시 1수
∙「북정에서 광문에게 보이다[北亭示廣文]」:오언율시 2수
∙「광문과 언시를 전송하며 술자리에서 어지러이 짓다[送餞廣文彦時 酒席亂稿]」:칠언율시 3수
∙「육유陸游의 시에 차운한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用陸韻]」:칠언율시 1수. 박서귀가 서울로 과시를 보러 가려던 참이었다.
∙「향교로 광문을 찾아갔다가 별장을 불러서 함께 이야기 나누었는데 유생들도 함께했다[黌堂訪廣文 邀別將共話 冠童亦與焉]」:오언고시 40운 80구. “둘 다부평초 같은 나그네 신세인 데다가, 다시 겸이 겸에게 의지하고 궐이 천리달리는 짐승에게 의지하듯 서로 기댄다네.[羇旅共浮萍 且復倚鶼蟨]”라고 했다.
∙「광문에게 주다[贈廣文]」:칠언율시 1수. 동헌으로 찾아온 박서귀와 시주를 즐기며 수창했다.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韻]」:칠언율시 2수와 또 다른 칠언율시 1수
∙「밤에 이야기하며 광문에게 주다[夜話贈廣文]」:칠언율시 2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4수와 또 다른 칠언율시 2수
∙「광문의 시에 거듭 차운하여 한 수로 광문을 위로하고 한 수로 답답한 마음을 달래다[疊廣文韻 一慰廣文 一遣煩懷]」:칠언율시 2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2수
∙「광문의 시 중에 ‘등’ 자 운으로 지은 시가 나를 흥기시키므로 지어서 경징(손기양孫起陽)에게 주다[廣文韻中 有登字起我 仍綴贈景徵]:칠언율시 1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韻]」:칠언율시 2수. 박서귀의[1]악견시집
에 있다. 원운인 「신영애에게 드리다[贈申永崖(之悌)]」가 있고, 신지제의 차운 2수 가운데 첫 번째 시만 부기했다. 글자가 약간 다른 것이 있다.
∙「마산포에서 뱃놀이를 하며 여성우 어른에게 올리고 광문에게도 보이다[馬浦泛舟 奉呈呂聖遇丈 兼示廣文]」: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일대의 마산포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여대로呂大老(1552∼1619)에게 지어 올리고, 뱃놀이에는 오지 않은 박서귀에게 보인 칠언율시 1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5수
∙「삼월 삼짇날에 찰방 송현승, 광문과 함께 강선대를 유람하니 별장 조방보도 찾아와서 함께하다[三月三日 與察訪宋顯承及廣文遊降仙臺 別將趙邦寶亦來與]」:창원시 진해구 비봉동에 있는 바위인 강선대를 박서귀 등과 함께 가서 칠언율시 6수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제1수는 박서귀의 시에 차운했다.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2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1수와 또 다른 칠언율시 2수
∙「단옷날에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端陽日次廣文]」:칠언절구 1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 한편으로는 유생들에게 한편으로는 광문에게 보이다[次廣文韻 一示諸生 一示廣文]:백일장을 열어 유생들을 뽑는 날 지은 칠언율시 2수. 별도로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 칠언율시 2수와 「술자리에서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酒席次廣文韻]」 칠언율시 1수가 있다.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5수
∙「광문의 운에 따라 짓다[用廣文韻]」:칠언율시 2수
∙「해정에서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海亭次廣文韻]」:칠언율시 1수. 해정은 1604년에 정구鄭逑가 소요하기 시작한 관해정觀海亭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 서원골에 있다.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1수
∙「뱃놀이에 이장과 전이성全以性(1578∼1646) 성지가 온 것에 기뻐하여 광문의시에 차운하다[舟遊喜而壯性之(全公以性)來 次廣文]:칠언율시 1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칠언율시 2수
∙「단옷날에 광문을 맞이하여 술을 조금 마시다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마침 병이 나서 술을 마시면 안 되기에 이전의 운으로 차운하여 「홀로 깨어서」라는 시를 짓다[端陽日邀廣文小酌 適病妨飮 因作獨醒詩 用前韻]」:칠언율시 1수
∙「해정에서 한자진, 장문재와 함께 유람하고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海亭同韓子眞張文哉遊 次廣文韻]」:칠언율시 1수. 한몽일韓夢逸(1577∼?)과 장익규張益奎와 유람할 때 지은 시
∙「박서귀 광문의 「단오일에 읊다」 시에 차운하다[次朴廣文(瑞龜)午日詠]」:칠언율시 1수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1617년에 지은 칠언율시 1수
∙「우연히 박 광문이 황회원과 ‘고’ 자로 수창한 시가 떠올라 그 시에 차운하다[偶記朴廣文與黃會元倡和糕字 仍次其韻]」:칠언율시 1수. 박서귀가 동래 부사 황여일黃汝一(1556∼1622)과 수창한 시에 차운했다. 한편, 신지제는 곽재우를 종유하였고, 그의 시에 수창했다.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
玄風,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유곡 찰방幽谷察訪·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 때 밀양·영산·창녕·현풍 네 고을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지켰는데, 이후 창해정蒼海亭에서 소요했다. 그의 문집인[1]망우당집
은사위 성이도成以道가 처음 엮은 것을 토대로, 1629년 그의 조카 곽유郭瀏·곽융郭瀜이 2권 1책으로 증보하여 목판 간행했다. 그 뒤 후손 곽진남郭鎭南이 사적을 더 수집하여 1771년에 5권 3책으로 중간했다. 신지제는 곽재우를 위해 제문과 만사를 지었다. [1]망우당집에는 별집 제5권 부록에 신지제가 지은 「창암정 아래에서 망우당에게 올리는 시[滄巖亭下奉呈]」 1편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시는[1]오봉집에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 여러 시들이 [1]오봉집에 전한다.
∙「망우정 어른께 삼가 드리다[奉呈忘憂亭僊丈]」:칠언절구 1수
∙「해정 시에 첩운하여 장군에게 사례하다[疊海亭韻謝張君]」:칠언율시 1수
∙「곽망우당 어른의 시에 차운하다[次忘憂堂郭丈韻]」:병진년(1616)에 지은 오언절구 1수
∙「곽망우당 어른의 시에 차운하여 자장을 떠나보내다[次郭丈韻 送別子張]」:오언절구 1수
그리고 신지제는 자신보다 앞서 창원 부사를 지낸 손기양孫起陽(1559∼1617)을 종유했다. 손기양의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 또는 송간松磵, 본관은 밀양이다. 158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울주 판관·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밀양 칠탄서원七灘書院에 제향되었다. 훗날 이익李瀷이 작성한 「창원 부사 오한 손공의 행장[昌原府使聱漢孫公行狀]」에 따르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월간月澗 이전李㙉 및 그 아우 창석蒼石 이준李埈, 부용芙蓉 성안의成安義,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검간黔磵 조정趙靖,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등과 함께 신지제도 손기양을 따랐다고 한다. [1]오봉집에는 신지제가 손기양과 수창한 다음 시들이 전한다.
∙「역적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 사면령이 내려졌는데, 경징이 그 일을 읊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逆賊見誅後有赦 景徵詠其事 仍次其韻]」:오언율시 1수. 예안 현감 때 지은 시
∙「경징의 시에 차운하다. 2수[次景徵 二首]」:칠언율시 2수. 1593년 손기양이 장제원張悌元(1556∼1621)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야성차장중순野城次張仲順」에 다시 차운한 시
∙「손경징의 ‘월영대에서 정교은의 운(「창원 월영대에서[題昌原月影臺]」)으로 읊다’ 시에 차운하다[次孫景徵月影臺用鄭郊隱韻]」:손기양의 시에 차운한 시. 칠언율시 2수
∙「경징의 「가을의 감회」 시에 차운하다[次景徵秋懷韻]」:오언율시
∙「경징이 이숙평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경징을 전송하다[次景徵寄李叔平(埈號蒼石)韻 送景徵]」:손기양이 이준李埈(1560∼1635, 자 숙평叔平)의 시에 차운하여 보낸시에 다시 차운하여 손기양을 전송한 시. 칠언율시 1수
한편 정경세의[1]우복집愚伏集 권1에 「남쪽으로 돌아가는 신지제 순부와 이별하면서 차운하다[次韻別申順夫(之悌)南歸]」라는 시가 있으나, 신지제의 원운은 [1]오봉집에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신지제는 손기양과 종유한 인물들 가운데 이윤우李潤雨, 이준李埈, 성안의成安義, 여대로呂大老 등과 수창한 시들을 [1]오봉집에 남겼다.
∙이윤우李潤雨(1569∼1634)에게 준 시:「배 속에서 한강 정구 선생을 모시고 반자(판관) 이윤우(호가 석담이다)가 부르는 운을 써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드리다[舟中陪寒岡先生鄭公逑 奉贈左右諸位 用李半刺潤雨氏(號石潭)呼韻]정구를 모시고 뱃놀이하면서 이윤우의 호운號韻에 따라 지은 칠언절구 1수. 「경양대 아래에서 이윤우 무백의 시에 차운하다[景釀臺下 次李茂伯(潤雨)韻]」도 정구를 모시고 노닐며 이윤우의 시에 차운한 칠언절구 1수이다.
∙성안의成安義(1561∼1629)에게 준 시:「‘다’ 자 운을 거듭 써서 정보에게 주다[疊多字韻贈精甫]」칠언율시2수. 「해수욕을 간 정보에게 부치다[寄精甫浴海水]」 오언율시 1수, 「육방옹의 시에 차운하여 정보에게 부치다[次放翁韻寄精甫]」 칠언율시 3수도 있다.
∙이준李埈(1560∼1635)과 관련 있는 시:「흩어진 글 중에 이숙평이 서울에서충청도 도사로 부임하는 나를 전송하며 지은 시가 있었다. 그때 그는 홍문관 교리였고 지금은 풍기 군수가 되었는데 끝까지 다 보기도 전에 문득 감회가 일었다. 마침 거센 바람과 세찬 비를 만나 이윽고 그 시에 차운하여 이별하는 뜻을 기록하다[散帙有李叔平往在京師 送我赴湖幕敍別詩 時爲弘文校理 今爲豐
基郡守 閱未終篇 忽忽有懷 適見狂風大雨 仍次其韻記別意]」1610년에 이준의 「호서 막하로 떠나는 신순부를 전송하며[送申順夫赴湖西蓮幕]」에 차운한 칠언율시 3수. 1610년 정사신鄭士信(1558∼1619)이 연경으로 사신을 갈 때 이준이 전송한 시에 다시 차운한 「이숙평의 시에 차운하여 연경에 사신 가는 정자부 영공(이름은 사신, 호는 매창이다)을 전송하다[送鄭子孚令公(士信號梅囱)赴京 用李叔平韻] 칠언율시 2수, 「창석이 진사 수암 류진柳袗(1582∼1635) 계화에게 준 시에 차운하다[次蒼石贈柳進士季華(袗號修庵)韻]」 칠언절구 1수, 「창석이 절구를 늘려서 장률을 짓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다[蒼石演絶句爲長律 仍次其韻]」 칠언율시 3수 등도 있다.
∙조정趙靖(1555∼1636)에게 준 시:「청도 군수 조안중이 임기가 차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주려고 짓다. 40운[聞趙淸道安仲 秩滿將還 擬贈 四十韻]」오언고시 40운 80구. 「조안중의 시에 차운하여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허이정(허길許佶, 1571∼?)에게 주다[次趙安仲(靖號黔澗)韻 贈別許而正秩滿還洛] 칠언절구 1수도 있다.
∙여대로呂大老(1552∼1619)와 관련 있는 시:「합천 군수 여성우가 계미년(1583) 촉석루의 방회 때 쓴 시(「촉석루 방회 계축에 쓰다[題矗石樓榜會契軸]」)에 점화하다[點化呂陜川聖遇(大老號鑑湖) 題癸未榜會矗石樓]」칠언율시1수는 여대로의 시에 점화했다.
이외에 「여 어른과 이별하다[奉別呂丈]」 칠언율시 1수 및 오언율시 1수도 있다.
그리고 신지제는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시에 차운한 「아계의 ‘달 뜨다’ 시(「달 뜨는 것을 구경하다[觀月出]」)에 차운하다[次鵝溪月出韻]」 칠언율시 1수를[1]오봉집에 남겼다.
한편, 이로李魯(1544∼1598)의[1]송암집松巖集 권1에는 을미년(1595)에 지은 「선성현감 신순부(지제)가 시를 요구하기에 급히 지어 보답하다[宣城倅申順夫(之悌)索詩走草以報之(乙未)] 오언고시 30운 60구가 있다. 이로는 이 시에서 “을미년 봄에 서로 만나서, 속마음 드러내고 석 잔의 술 마셨지. 옥야(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일대)에서 객지의 고통을 함께했고, 응천(현 경상남도 밀양의 옛 이름)에서 나그네의 고생을 같이했네.
시운에 상심하니 시름을 견디기 힘들고, 나라를 걱정하니 한을 가누기 어렵네.[相逢春乙未 披蘊酒三杯 沃野同羈苦 凝川共旅灾 傷時愁不耐 憂國恨難裁]”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신지제의 화운은[1]오봉집에 들어 있지 않다.
(2) 현실 기록과 포학한 지방관 비판
[1]오봉집
권7 습유에 신지제가 임진왜란 중에 작성한 「울분을 표출하여 설월당 어른에게 올리다[奉呈雪月丈寄憤]」 칠언율시 1수가 있다. 설월당은 앞서 보았듯이 퇴계학파의 김부륜을 말한다. 이 시에서 신지제는 명나라가 조선 조정의 뜻과 다르게 일본과 화의和議를 진행한 것을 비판했다. 남송의 간신 진회秦檜가 동창東牕에서 자기 아내 왕씨王氏와 은밀히 계획을 세워 금金나라와 화의할 것을 주장하고, 척화신이었던 충신 악비岳飛를 죽인 일이 있다. 신지제는 그 고사를 인용하여, 대국의 위신 상실을 책망했다. “작은 나라에 좋은 대책 없음을 스스로 알지만, 잃어버린 대국의 위신은 어떻게 회복하려는지. 동창 아래서 마침내 남조의 의론 주동하니, 용 그림 부절 들고 범 아가리로 간 사행길이 헛수고였구나.[褊壤自知無上策 大邦何復損王靈 東牕竟主南朝議 龍節徒勞虎口行]”라고 했다.
신지제가 예안 현감 시절에 지은 「병중에 두서없이 진술하다[病中漫述]」는 임진왜란을 겪고 난 직후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 국토의 유린 상황, 가족들의 이산離散을 근심하며 지은 연작이다. 제1수는 칠언고시 24구, 제2수는 칠언절구, 제3수는 칠언절구, 제4수는 칠언절구, 제5수는 오언율시, 제6수는 오언절구로, 여러 시 형식을 이용하여 현실을 알리고 내면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는 경상도 방백이 팔공산八公山에 성을 쌓아 요새를 만드느라 산 아래 수령 예닐곱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려 했지만, 원수의 저지를 받아 모두 흩어져 떠났다. 왜적이 쳐들어오니 성이 텅 비어 있었으며, 병기와 양식이며 물자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신지제는 뒷날 팔공산 아래를 지나갈 때 그 일을 생각하며 크게 탄식했다. 당시 승려 덕변德辨이 승병장으로서 휘하에 있었으므로, 덕변이 지닌 시축의 시에 차운하여 칠언절구 2수를 적어 주면서 지난 일을 탄식했다.
창원 부사로 있던 1615년에는 수군의 낮 훈련과 야간 훈련을 보면서 장쾌한 풍격의 칠언율시 1수씩을 지었다. 1617년에 창원 부사로 있으면서는, 창원시 마산의 합포영合浦營을 돌아보고 「합포에서 감회가 일어 읊다. 70운[合浦感懷 七十韻]」이라는 장편 오언고시를 지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원병을 거느리고 오지 않아서 “시체 쌓여 관아에 피비린내 진동하고, 핏물 흘러 들판이 붉게 얼룩졌다.[屍塡腥館舍血走染郊圻]”라고 했다. 하지만 합포의 백성들 가운데서는 적에게 투항하여 빌붙은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는 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으나 진영을 옮긴 뒤 부사를 독립시켜 그대로 머물며 다스리게 했으며, 군사를 모집하여 군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거늘 전함을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을 요구하고 왜인에게 줄 잡물고를 갖추게 하였으며, 장정의 결원을 보충하고 경작 토지를 측량하는 일까지 벌어져,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질 나쁜 운미運米를 백성들에게 사서 먹도록 강요하고 빚을 갚게 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신지제는 영남 절도사들이 포학하여 지방 행정이 난맥인 것을 가슴 아파했다. 「박 병사가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며 탐욕스럽고 불량하니 향원과 군정이 시신을 나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고을의 군정이 온 고을로 뿔뿔이 흩어져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고 죄악이 끝이 없기에 개탄한 나머지 붓이 가는 대로 끄적이다[兵使姓朴恃勢驕橫 貪虐無狀 鄕員軍正馱屍絡繹 列郡軍丁合境流散 邦紀解弛 誅惡無期 慨歎之餘 信筆書之]」라는 제목의 칠언고시 64구의 장편은 절도사들의 횡포를 비난하는 언사가 매우 격렬하다.
군사와 백성의 고혈 남김없이 짜내어 軍民膏血浚無餘
개와 이리가 물고 사나운 새가 덮치듯 狗噬狼呑鷙鳥攫
대곤과 장두 차고 연포 입고 와서 大棍杖頭練布來
밤낮으로 관청 뜰에서 탁탁 쳐대네 日夜庭中聲椓椓
밭도 팔고 집도 팔아 모두 넘기니 賣田賣舍盡歸輸
재물이 높은 산처럼 우뚝이 쌓이고 積之崒嵂如山嶽
밭과 집이 다 없어지면 맨몸으로 달아나니 田舍盡後赤身走
황폐한 마을에 참새만이 날아갈 뿐 但見荒村飛鳥雀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신지제는 마산馬山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통영統營으로 가는 도중에 눈으로 본 풍광과 귀로 들은 사적을 「바다에서 짓다[海錄]」 9수의 연작으로 노래했다. 제1수부터 제4수는 칠언율시이다. 제3수는 수군 훈련에 대하여 “펄럭이는 깃발에 교룡도 둥지로 숨고, 서슬 퍼런 칼날은 서릿발처럼 번뜩이네.[蛟龍避窟分旗影 霜雪廻光耀劒鋩]”라고 장쾌하게 읊었다. 제5수는 오언율시로, 두룡포 밖 바다의 멋진 광경을 “맑은 파도에 하늘 그대로 비치고, 고운 백사장은 거울처럼 반짝반짝.[波澄天影落 沙靜鏡光虛]”이라고 노래했다. 제6수와 제7수는 칠언절구로 병영의 아낙에게 준것이다. 자주自註에 “이 아낙이 임진년 밤중에 왜인 셋을 만났는데, 뗏목을 타고 와배를 탈취하려 했기에 조카 두 명과 함께 상앗대를 집어 들고 때려 죽였다. 당시 수군절도사였던 원균元均이 그 수급을 가지고 자기 집안 자제의 공으로 올렸다.”라고, 원균의 부당한 처사를 비난했다. 제8수는 칠언율시로, 10년 만에 두룡포에 다시들른 감회를 노래했고, 제9수는 배에서 육유陸游의 시를 읽고 충정을 마음에 새겼다.
(3) 자술自述과 술회述懷의 시
신지제는 자신의 지난 일과 집안 사정에 대해 술회한 시를 여럿 남겼다. 우선, 임진왜란 중 예안 현감으로 있을 때 신지제는 「회포를 적어 낙금과 갈봉 두 벗에게 보여 주다. 18운[述懷 示樂琴葛峯兩契 十八韻]」이라는 제목의 칠언고시 18운 36구를 지었다. 낙금은 이정백李庭柏(1553∼1600)의 호, 갈봉은 김득연金得硏(1555∼1637)의 호이다. 이 시에서 신지제는 “찰방의 급히 걸친 복장 보기 민망하고, 나라에 내린 엄중한 명령 두렵게 듣네. 작은 봉록만 탐하여 떠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병을 앓아도 아직 치료를 못했네.[羞見督郵衣帶急 畏聞軍國簡書嚴 徒饞斗粟難求去 久病瘡痍未試砭]”라고, 자신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을 담았다.
1617년 무렵,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지은 「회포를 풀다. 40운[遣懷 四十韻]」은 장편 오언고시 형식을 이용하여 현실과의 괴리감을 토로했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이은吏隱에 만족한다는 뜻을 말하여 “낮은 관직으로 숨어 사는 고상한 풍모 있으니, 장자가 바로 나의 부류이리라.[吏隱高風在 南華是我徒]”라고 했다.
1618년에는 「새해 초하루에 회포를 읊다. 22운[元日詠懷 二十二韻]」이라는 제목의 장편 오언고시를 지어 “늘그막에 이룬 공명도 없고, 휑한 고을 세월 더디기만 하네.[末路功名薄 荒城歲月賖]”라고 한탄하면서도 “곤륜산 같은 큰 공적은 없지만, 명을기다릴 만큼 잘못한 것도 없다네. 왕조의 봄은 오늘부터 시작이니, 성조의 달력 만세토록 영원하리.[未有崑崙績 猶無待制瑕 王春今日始 聖曆萬年遐]”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창원 부사로 있던 1615년 무렵에 지은 「형식을 갖추지 않고 우연히 읊다[偶綴 無體格]」는 특이하게도 무운無韻의 장단구 32구를 실험했다. 일부만 보면 이러하다.
취하고 꿈결 같은 신세에서 벗어나 叫廻醉夢身世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찾아가리 尋向安樂生涯
흰 구름과 푸른 산을 白雲靑山
울타리와 병풍으로 삼고 爲藩籬爲屛障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빛 淸風明月
바로 내 손님이며 벗이라네 是賓僚是朋儔
또한 1617년 무렵에는 풍자와 해학을 위주로 「배해체로 이것저것 읊다[雜述 徘諧體]」라는 칠언율시도 남겼다.
1621년에 지은 「신유년 7월 28일에 불이 나서 집이 반이나 탔고 서책 500여 권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시종도 여섯 명이나 화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辛酉七月二十八日逢火盜 家舍半火 書冊五百餘卷爲灰燼 侍婢傷者六人 幸無死亡]」는 칠언율시 3수이다. 제1수는 상황의 다급함을 묘사하고, 다친 사람을 부축하여 주면서 뒤를 수습하는 침착함을 잘 드러냈다.
하녀가 다급해하며 방으로 들어와서는 下女愴忙叫入閽
도적떼가 야밤에 담장을 넘었다고 하네 已聞羣盜夜踰垣
처음에 잠에서 깨니 약간의 취기가 도는데 初廻枕上微酣起
모두들 곤히 잠든 상황에 손을 쓸 수 없었네 無奈鋒前衆睡昏
앞다투어 상처 점검하여 흐르는 피를 닦아 주고 爭點瘢瘡披亂血
다친 사람을 부축하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네 走攜呻痛慰驚魂
다행히 죽은 사람 없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幸無殤殀餘何問
도적 잡느라 분분하다가는 원망 살까 걱정인 걸 逮捕紛紜恐或冤
신지제는 1618년 창원 부사에서 체직되어 돌아와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의 전장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구미 별장에 터를 잡고 살며[龜庄卜居]」 칠언율시가 당시의 유유자적한 심경을 잘 보여준다. 곧, “열심히 농사지어 우선 생계를 이어가고, 작은집 지어 그나마 추위와 더위 견디네.[力耕且足供飢飽 小搆聊堪度暑寒]”라고 했다.
한편, 신지제는 두보 등 중국 시인들의 시에 차운하여 자신의 심회를 드러내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나 석주 권필權韠(1569∼1612) 등 조선 시에도 적극적으로 차운했다.
우선 김시습의 시에 차운한 시로는 「매월헌의 ‘청평산’ 시에 차운하다[次梅月軒淸平山韻]」 칠언율시 1수, 그리고 같은 운자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재차 매월헌 시에 차운하다[再用梅月韻]」 칠언율시 1수가 있다. 두 수 모두 김시습이 산수 속에서 유유자적하던 사실을 상상하고 그 정신세계를 닮고자 하는 뜻을 가탁했다. 앞의 시에서는 “천상의 해와 달은 속세의 기운 없고, 뭇 상제의 누와 대는 푸른 기운 속에 숨었네.
[諸天日月除人世 羣帝樓臺隱翠微]”라고 칭송했다.
「석주 권필의 ‘임거십오영’ 시에 차운하다[次權石洲(韠)林居十五詠]」는 15편의 칠언절구 연작이다. 이른 봄의 풍광. 늦봄의 풍광, 초여름의 풍광, 가을 소리, 초겨울의 풍광, 가뭄 걱정, 내리는 비를 기뻐함, 사물을 보면서 일어나는 감회, 하릴 없이 소요함, 사물 관찰의 방식, 시냇가 정자, 홀로 즐기는 생활, 마음 살피는 방도, 성품을 보존하고 수양하는 태도, 가을 해바라기 등을 차례로 읊었다. 제10에서는 사물 관찰의 방식과 관련하여, 주돈이周敦頤가 창 앞에 무성한 풀을 베지 않고 ‘나의 의사와 같다.[與自家意思一般]’라고 했던 뜻을 존숭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충만한 기운 오고가는 속에 洋洋一氣往來中
하늘의 뜻 사심 없어 만물이 절로 생기 이네 天意無私物自融
봄비 내린 뒤 푸른 풀이 뜰에 가득하니 綠草滿庭春雨後
천년 전에 염옹과 같은 이 뉘 있으랴 濂翁千載有誰同
(4) 측은지심의 발로
신지제는 측은지심을 시로 표현했다. 우선 신지제가[1]오봉집에 남긴 만시輓詩는 애도의 진실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스승 김언기를 애도하는 칠언절구 1수. 1588년 작
∙김해金垓를 애도하는 2편. 홍여율洪汝栗(1563∼1600) 시에 차운한 칠언절구 2수와 독립적으로 애도하는 오언 20운 40구. 1593년 작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1605년 작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을 애도하는 오언 18운 36구. 1609년 작
∙오로산五老山에 장사 지낸 성은城隱 신흘申仡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와 칠언절구 2수. 1614년 작
∙청안 현감을 지낸 서사원徐思遠(1550∼1615)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합천 군수 이숙李潚(1550∼1615)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2수
∙서울에서 벼슬살 때 어울렸던 송원기宋遠器(1548∼1615)를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조카 신명기申命夔를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와 오언율시 1수
∙백암栢巖 김륵金玏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1616년 작
∙곽재우를 애도하는 오언 50운 100구. 1618년 작. 하평성 제9 ‘청靑’ 운 일운도저一韻到底. “신선은 본래 영웅에서 나오니, 출처에 권도와 경도 있네. 고을을 맡아서 신선을 배웠으니, 수명을 늘리려는 것이 아니었네. 쓰이든 버려지든 구차히 나아가지 않았으니, 충성과 의리를 누가 평가하랴.[神僊本英雄 出處有權經 縣知學餐松 不是希引齡 陞沈不苟就 忠義誰能評]”
∙창녕 현감을 지낸 윤민철尹民哲(1555∼1618)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장기 현감을 지낸 권희순權希舜(1548∼1598)의 천장 때 지은 칠언절구 1수
∙사인舍人 권흔權昕(1568∼?, 자 숙절叔節)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운천雲川 김용金涌(1557∼1620, 자 도원道源)을 애도하는 칠언고시 20운 40구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늙은 여종을 애도하는 만시 5언 30운 60구
∙동료를 애도하는 만시 칠언율시 3수
∙권익權翊 부인의 종형제를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김 처사金處士의 아내 장씨蔣氏를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이 충의李忠義를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고향 친구 이민홍李民宖(1557∼?, 자 택안宅安)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2수
∙찰방 김춘룡金春龍(1558∼1621)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돈와재遯窩齋 류성춘柳成春을 애도하는 칠언율시 1수
∙신영제申永躋(자 봉명鳳鳴)를 애도하는 5언 12운 24구
이 만시들 가운데, 「늙은 여종을 애도하는 만시[輓老婢]」는 5언 30운 60구의 장편이다. 자주自註가 있어, 여종이 본래 처가에서 3대 동안 부린 옛 종인데, 일찍이 신지제를 따라 서울 집에 와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두 아들을 마치 자기 아들인 마냥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해 주었고 정성을 다해 주인을 모셨다고 했다. 주인에게 의탁하다가 여든여섯에 자식도 없이 죽어 살아서는 봉양할 자식이 없고 죽어서는 장사지낼 줄 이가 없으니 매우 가련하다고 했다. 그리고 시에서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은, 돼지와 같다고 깔보았지. 옥황이 천당문을 열어서, 너를 불러 머물게 했네.[人間爲惡者 下視如豚狶 玉皇闢天堂 格汝來棲遲]”라고 하여, 착한 성품을 지닌 여종이 옥황상제의 천당에 오르기를 기원했다.
신지제는 예안 현감으로 있을 때, 외가 종형제 항렬의 누이 장씨가 곤궁에 처한 것을 애처롭게 여겨서 김춘룡金春龍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느라 시를 지어 보냈다. 즉,「누이 장씨를 위하여 4운시를 지어 김춘룡 원서 형에게 주고 중서 아우에게 보이다.[爲張氏妹賦四韻 呈于金元瑞兄(春龍)示仲瑞弟]」 칠언율시 1수이다. 김춘룡에 대해서 신지제는[1]오봉집 권5에 만시, 권7에 제문과 묘지를 남기기도 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불쌍하게 떠돌며 살던 장씨 누이 瑣尾流離張氏妹
호해에서 잠시 만났구나 相逢湖海暫時人
어려운 시기에 다들 외면하니 畏途顔面元多厚
타향에서는 친한 인척 더욱 적네 異地婚姻更少親
곤궁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으랴 不爲困窮寧有此
다른 형제가 있다지만 누구를 의지하겠나 謂他兄弟欲誰因
구덩이에 쓰러져도 내 구제할 수 없으니 將塡丘壑吾難救
지하의 조상 야단친 지 오래됐으리 地下先靈久已嗔
장씨는 5∼6년 전에 남편을 잃고 홀로 지냈는데 지금 병란을 만나 생업을 잃었다. 또 인척들에게 자주 속아서 편히 지낼 수 없었으므로 어렵게 살던 집을 떠나 월성을 떠돌다가 김춘룡의 집에 더부살이를 했으나 형편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신지제는 고령의 부모를 모시고 죽은 큰형의 식구들을 돌봐야 해서 장씨를 보살필 형편이 못되었으므로, 유복한 김춘룡에게 장씨를 특별히 부탁한 것이다.
어느 때인가, 손자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서, 신지제는 「손자가 자기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기에 옛날에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어머니 박씨가 1569년에 타계함) 큰형은 9살, 나는 8살, 누이는 5살, 아우는 4살, 막내 여동생은태어난 지 10개월이었는데 당시 너무도 슬퍼하던 모습이 선친을 속상하게 함이 어떠했을까 생각나서 너무 애통하여 눈물을 훔치며 짓다[孫兒戀母甚苦 仍憶吾兄弟喪母時伯九歲 仲八歲 妹五歲 季四歲 末妹生十月 當時哀哀之狀 惱我先考心如何 哀慟之至 揮淚而書]」라는제목의 칠언절구 1수를 지었다.
고작 삼십 리 떨어졌다고 손자는 괴로워하거늘 纔三十里渠猶苦
이른 나이에 어머니 여읜 우리는 어떠했으랴 早歲幽明我若何
슬하의 우리 다섯 남매가 너무나도 슬퍼했으니 膝下哀哀五男女
그 당시 얼마나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을까 異時何限惱先爺
(5) 명나라의 몰락과 후금의 흥기에 관한 우려를 표명한 시
신지제가 활동한 시대에는 명나라가 쇠미하고 후금이 요동에서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신지제는 이민성·이민환 형제 등을 통해 요동의 정황을 알고는 불안감을 시로 표현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의식과 시절을 우려하는 우환의식이 그러한 시들에 잘 나타나 있다.
「명나라가 군대를 징발했다는 소식을 듣고[聞天朝徵師]」 칠언율시 1수에서는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 우려감을 표출했다.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자, 1618년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명나라 양호楊鎬가 이끄는 10만 군대와 조선의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군사는 적을 협공하기로 했으나 부차富車에서 대패했다. 이때 이민환이 강홍립의 막하로 출전했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17개월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1620년에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박엽朴燁의 무고를 받아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신지제는 이민환이 평양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장이 기성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고 읊다[聞而壯滯箕城有述]」라는 제목으로 오언율시 1수와 칠언율시 2수를 지었다. 제2수인 칠언율시의 두련에서는 “그대와 평소 지내면서 장부라고 여겼는데, 나라 사람들은 그대가 몸 바치지 않았다고 허물 돌리네.[與子平居倚丈夫國人歸咎欠捐軀]」라고 아쉬워했다.
만주의 여진족은 1616년에 누르하치의 지도 아래 흥경興京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라 칭하며 후금을 세웠다. 그 뒤 1619년에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10만 대군을 궤멸시켰다. 신지제는 「울분을 달래려 두보의 율시 ‘여러 장수’의 시를 차운하다[遣憤次杜律諸將韻]」 칠언율시 5수에서, 이성량李成梁(1526∼1615)이 죽은 후로 유관楡關 즉산해관山海關 동쪽의 요동 지역이 불안하게 된 사실을 개탄했다. 이성량의 자는 여계如契, 호는 인성引城이다. 조선 출신 이영李英의 후손으로 요동 철령위鐵嶺衛 지휘첨사指揮僉事의 직위를 세습해 왔다. 1570년에 요동 총병이 되어 몽고 및 여진에 대한방위와 교역을 총괄했다. 신지제는 이성량이 장군이 된 지 50여 년 동안 오랑캐가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건만 이성량이 떠난 뒤로는 그 후임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재앙을 부르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당시 명나라는 ‘왕 참정’을 보내 수군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군사와 함께 의주를 지키고자 했다. 이때의 왕 참정은 1598년 6월 흠차어왜서로감군欽差禦倭西路監軍 산동포정사사 우참정山東布政使司右參政으로 조선에 나왔던 왕사기王士琦는 아닌 듯하다. 왕사기는 1618년 강남순무江南巡撫에 임명되었으나 직을 수행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신지제는 왕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듣자니 왕 참정이 수군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군사와 함께 의주를 지키고자 했다. 이때에 오랑캐가 요동을 함락한 뒤 요동과 계주에 웅거하고 있어 왕 참정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고 오랑캐의 후방을 요격하기를 도모하여 마치 관군과 양편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취하는듯이 한다고 한다. 그 뜻이 장대하고 원대하니 중국에 큰 인물이 있구나. 이 계획이 만약 성공하면 중국을 위해 일을 처리함이 막중하다. 다만 우리나라에 이익과 피해가 어떠할지 모르겠고, 일의 형세를 따라야 할지 말지를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왕 참정의 조치를 크게 여기면서도 조정의 계책을 결단하기 어려움을 걱정하여, 마침 그 일을 읊는다[聞王參政 領舟師二萬到鴨綠江 欲同本國守義州 時奴賊陷遼 雄據遼薊 參政以孤軍深入斬奴使 謀爲要擊奴後 若爲官軍猗角之勢 其志壯且遠 上國有人矣 此計如就 其爲上國料事重矣 第未知本國利害如何 亦未知事勢之可從與否竊思之 誠非放過之地 於是韙王公之擧措 而慮廟謨之難斷 偶詠其事]」라는 긴 제목으로 16구의칠언고시를 지었다. 신지제는 “조정의 계책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나, 매우 어려운 일이라 힘써 강구해야 하리.[不知廟筭出何塲 事有至難宜勉强]”라고 우려했다.
1620년 명나라 제13대 황제 주익균朱翊鈞이 죽자, 이민성은 황제의 부음을 듣고시 「신종황제를 곡하다[哭神宗皇帝]」를 지었다. 주익균의 묘호廟號가 신종이다. 만력萬曆(1573∼1620)의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만력제萬曆帝라고 부른다. 아들 신홍망申弘望이 그 시에 차운하여 보여 주자 신지제는 장편 칠언고시를 지어 역시 만력제를 애도했다. 「아들이 이경정이 황제의 부음을 듣고 감회를 서술한 시에 차운하여 나에게 주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家豚次李敬亭聞 皇帝訃音述感韻示我 仍和其韻]」라는 제목이다. “수치 씻어 준 황제의 은혜 보답하기 어렵고, 위기를 구한 공로는 더욱 헤아릴 수 없네.[恩湔羞累曾難報 功濟艱危更未量]”라고 하여, 이른바 재조번방再造藩邦의 은혜를 언급했다. 만력제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범했을때 명나라에서 이여송李如松을 조선에 원군으로 보냈고, 1597년에 일본이 다시 침략했을 때 마귀麻貴 등을 조선에 원군으로 보냈다. 왜적이 물러간 것은 조선 의병과 관군의 공적이 크겠지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대체로 명나라의 파병을 재조再造의공으로 평가해왔다.
신지제는 1622년 2월에 후금이 중국 강역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번민을떨쳐 버리다[撥憫]」라는 제목의 오언율시를 지어 “이 땅의 영웅들이 떠나고 나니, 산하에 오랑캐 기운 만연하네.[天地英雄逝 關河虜氣橫]”라고 우울해했다. 또한 「중국으로가는 두 사신이 바다를 가다가 연이어 불행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聞西使兩行海路相繼不幸]」 오언율시 3수의 제2수에서는 “궤멸된 명나라 군사를 애도하나니, 요동이벌써 오랑캐 땅이 되었네.[慟哭王師潰 遼陽已漠南]”라고 했다. 그리고 「울분을 달래며[遣憤]」 오언율시 2수 가운데 제2수에서는 “계주 숲은 먼지로 자욱하고, 요하에 눈이내려 어둑하네.[薊樹風塵暗 遼河雨雪昏]”라고 했다.
「현실을 슬퍼하며[傷今]」는 전체 4수의 칠언율시 연작이었으나, 제1수는 전하지않는다. 제4수에서 신지제는 국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분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
시 짓느라 고심한 하손何遜과 음갱陰鏗을 배우지 않고 呻吟不用學陰何
국은에 보답하기 위해 평소 칼을 갈았네 報國平生一劒多
하늘은 어떤 마음이기에 적을 잊고 있나 天下何心忘此賊
이 강토는 오늘날 진정 누구의 나라인가 域中今日定誰家
오천의 하나라 방패가 적다고 하기 어렵고 五千夏楯難爲少
백만의 진나라 채찍도 자랑하기 쉽지 않네 百萬秦鞭未易誇
머리 위 하늘을 우러르며 힘써야 할 것이니 頭戴一天宜黽勉
성은은 동해바다처럼 마를 날이 없구나 東溟不渴是恩波
신지제는 「요양가遼陽歌」 칠언절구 4수를 지어 요동의 현황을 우려했다. 제1수에서는 “요양에서 사람 죽이길 삼대처럼 어지럽게 하여, 연경 사람 떠나더니 모두 돌아오지 않았네.[遼陽殺人亂如麻 燕人有去皆無歸]”라고 했다. 제3수에서는 명나라 장수가 요동을 굳건히 지켜 주길 기대했다. 1619년 명나라의 양호楊鎬는 47만의 군사를 이끌고 요양을 지키며 후금과의 전투를 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했다. 명나라는 웅정필熊廷弼(1569∼1625)을 하남도 감찰어사 및 대리사승으로 임명하여 요동을 지키게 했다. 이후 원응태袁應泰(?∼1621)가 웅정필을 대신하여 요동 방어의 책임을 맡았지만 1621년 후금에게 패하여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빼앗기고 자살하게 된다.
군문에서 웅 노야 같은 이를 거듭 보리니 轅門重覩熊老爺
너 아니면 지금 사람들 모두 잘못되리라 微爾今日人盡非
웅 노야는 앞사람처럼 하지 말고 삼가야 하리라 老爺愼勿如前人
양호와 원응태는 기책이 전혀 없었다네 楊公袁公無一奇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군문軍門의 장관으로 있던 이의립李義立(1562∼1642)이 서울에서 와서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쉽게 이기고 요동을 회복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의립의 본관은 강양(합천)으로, 1637년 초계 군수草溪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는 인물이다. 신지제는 이의립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없었다. 「이의립이 서울에서 와서 명나라가 오랑캐와의 전쟁에서 쉽게 이겨 오랑캐가 자리 말 듯이 돌아가 요동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하는데, 말이 사실이라면 천하의복이다. 참인지 거짓인지 답답해하다가 잡체를 지어 사실이기를 바라는 뜻을 부치다[李義立自京來 傳天兵與奴賊戰快捷 奴賊捲歸 遼東恢復 此說若然 天下之福也 信疑交惱 聊述雜體
以寄望誠之意]」라는 제목으로 칠언율시 1수를 남겼다. 신지제는 왜란이 끝난 후 우리 국가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후금이 일어나 중국을 침략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불안해했다. 현실의 정세에 민감하면서, 위정자들이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6) 남명南冥과 신산서원新山書院 관련 한시
신지제는 퇴계학맥을 이었지만, 동시에 남명 조식曺植(1501~1572)도 존중했다. 심지어 「꿈에 가야산을 찾아 가을 기운이 서늘하고 산의 형세가 험준한데 고운과 남명을 생각하며 한참 동안 읊다[夢中過伽倻山 秋光凄爽 山勢料峭 思孤雲南冥 沈吟久之]」라는 제목으로 칠언율시를 지었다. 그리고 “가벼운 노을과 엷은 안개 빛이 흐릿하고, 가파른 벽과 기이한 바위 기세 매섭네.[輕霞細霧光輝薄 峭壁奇巖氣勢豪]”라고, 조식의 깊은 학문과 매서운 기개를 자연물에 빗대어 칭송했다.
신지제는 조식의 위패를 모신 신산서원新山書院을 방문하고 시를 남겼다. 신산서원은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酒東里 주부酒府골의 신어산神魚山 자락에 있으며, 조식과 함께 신계성申季誠의 위패를 모셨다. 1593년에 서원을 건립하기 시작했으나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되어 그해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훼철되었으나 1999년 김해시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부속건물인 산해정山海亭은 조식이 건립하고 제자들과 강학했던 곳이다. 현재는 서원 강당에 산해정 현판이 걸려 있다. 신지제는 서원이 재건된 지 4년 되는 1613년,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서원을 방문하고 「신산서원新山書院」 칠언율시 2수를 지었다. 그 제2수에서 신지제는 조식의 풍격과 성망을 칭송하고, 학문의 원류에 이르고 싶다는 뜻을 말했다.
예부터 최고의 명승지라 하던 산해정 久聞山海擅名區
하늘이 낸 큰 스승 홀로 와서 노닐었네 天放高蹤獨往遊
아직도 마루와 섬돌에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猶想堂階聞謦欬
문득 떠돌다 잠시 머무는 내 신세 가련하네 却憐萍梗寄淹留
십 년 전란으로 황폐해져 슬프고 十年兵甲傷蕪沒
한 자락 서원 다시 세워서 기쁘네 一畒儒宮喜刱修
세상에는 요즘에 기이한 길이 많으니 人世邇來歧路異
참된 줄기를 찾아 근원을 접해 봤으면 願尋眞派問源流
앞서 말했듯이, 신지제는 망운정 조지趙址의 딸과 혼인하면서 그 아들들인 조형도, 조순도, 조준도, 조동도 등과 가까이 지냈다. 신지제는 1613년 창원 부사로 부임한 직후 오언 64구의 「원북촌에서 일을 서술하다[院北村述事]」를 지어, 현재의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함안 조씨 집성촌의 내력을 서술했다. 신지제는 특히 한 집안에서 숙부와 조카 등 세 사람의 충신이 나온 사실을 특별히 언급했다. 조붕趙鵬(1534∼1598)은 정유재란 때 울산의 학성鶴城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국했다. 조붕의 조카 조응도趙凝道(1555∼1597)는 진주성 전투와 기문포器門浦 해전에서 활약하고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순국했다.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1537∼1597)는 1596년에 함양 군수가 된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을 받고 안음 현감 곽준郭䞭과함께 의병을 규합해서 황석산성을 수축하고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신지제는 「원북촌에서 일을 서술하다」의 끝에 자주自註를 두어 “처음에 조려가 와서 살 적에 꿈에 쇠로 된 호랑이 세 마리가 동굴로 들어갔는데, 두 마리는 튼튼하고 한 마리는 병약했다. 마침내 이를 따라 동, 금, 철 세 호랑이로 이름을 삼았다. 그 뒤로 철호鐵虎는 후손이 없었고 동호銅虎와 금호金虎는 번성하여 그 후손이 지금 함안의 명망 있는 일가를 이루었으니, 꿈에 본 병약한 호랑이와 튼튼한 호랑이에 맞아 떨어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1]오봉집
에는 신지제가 조씨 집안 사람들에게 준 시로,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봄날 월영대에 놀러가면서 조생의 운으로 짓다[春日將遊月影臺 用趙生韻]」:사촌 처남 조임도의 시에 차운한 칠언율시 1수. 조임도는 조형도·조준도의 당제∙「조대이의 시에 차운하다[次趙大而(亨道)韻]」:조형도趙亨道(1567∼1637, 자 대이大而)의 시에 차운한 칠언율시 1수와 오언율시 2수. 조형도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학자로, 신지제의 처남이다.
∙「조준도 경행의 집에 가니 이날 밤에 바람이 거세고 비까지 내렸다. 대이등 여러 공 및 이수경, 상사 이공직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읊다[抵趙景行(遵道)家 是夜風惡且雨 與大而諸公及李秀卿 李上舍公直 對話偶詠]」:조준도趙遵道(1576∼1665, 자 경행景行)의 집에 가서 조형도, 이준성李俊成(1561∼1624, 자 수경秀卿),이간李榦(1576∼1637, 자 공직公直)과 함께 담화하다가 지은 칠언절구 1수. 조준도는 청송 출신으로, 조형도의 아우. 1627년 정묘호란 때 고을 사람들과 함께창의하고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1629년 행의行義로 천거된 뒤의영고 주부를 지냈고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부호군을 역임했다.
저서로는[1]방호집이 있다. 「선성 동각에서 신오봉의 칠석 시에 차운하다[宣城東閣次申梧峯(之悌)七夕韻」(을미, 1595년)와 「오봉과 누대에 올라 읊다[與梧峯登樓有吟]」, 「제신오봉문祭申梧峯文」을 남겼다.
4. 신지제의 산문 (1) 삼자함三字銜을 띠고 작성한 교서
1604년 5월,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 지제교가 되었다.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록에 이름이 올랐다. 그런데[1]오봉집
에 「선무공신 이광악에게 내리는 교서[敎宣武功臣李光岳書]」와 「호성공신 고희에게 내리는 교서[敎扈聖功臣高曦書]」, 「오련에게내리는 교서[敎吳連書]」가 실려 있다. 이것들은 모두 1604년 신지제가 지제교의 삼자함三字銜을 띠고 왕명에 따라 작성한 교서들이다.
1592년 4월에 왜적이 부산포 동래성을 함락한 후 20여 일 만에 한양을 공격해오자 선조는 의주로 도망했다. 난이 끝난 후 1604년에 선조는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으로 가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한 공을 세운 86명에게 3등급의 호성공신扈聖功臣의 호를 내렸다. 선무공신은 18인을 3등(1등 3명, 2등 5명, 3등 10명)으로 구분했고, 호성공신은 86명을 3등급(1등 2명, 2등 31명, 3등 53명)으로 구분했다.
이광악李光岳(1557∼1608)의 본관은 광주廣州로, 158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병마절도사·훈련원 도정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했으며,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선조를 호위하던 부안 출신의 선전관 고희高曦(1560∼1615)는 선조를 등에 업고 임진강·대동강·청천강을 건넜는데, 적을 만나 한쪽 귀를 잃었다. 선조는 1604년에 고희를 호성공신 3등급인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에 올리고 영성군瀛城君에봉했으며, 정2품 자헌대부 호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하고 사방 10리 땅을 하사했다. 그 부친 고사렴高士濂은 제원군濟原君에 봉하고 병조 판서를 추증했다. 교서는 신지제가 지었고,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고희는 본관이 제주로, 49세 때 귀향하여 56세에 졸했다. 고희의 아들 홍건弘建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 공을 세워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고, 홍건의 양자 두황斗煌은 알성무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1625년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 계곡 청호리에 3대를 향사하는 부조묘당不祧廟堂인 효충사效忠祠가 건립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 교서는 국내에 9개가 남아 있다. 문신과 무신 8명, 의관 1명의것이다. 2018년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 소장의 「오련吳連 공신교서」가 처음 발견되었다. 오련은 본디 양민으로 부여扶餘의 정병正兵이 되어 이마理馬 즉 사복시司僕寺의 잡직이었는데, 호성공신 제3등급인 충근정량호성공신에 오르고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졌다. 본관은 낙안樂安이다. 이 교서도 신지제가 작성하고 한호의 글씨로 썼다.
신지제가 작성한 교서에는 “임금을 존경하고 윗사람을 친근히 대하는 마음은 귀천에 차이가 없으니 노고에 보답하고 공로에 답하는 은전에 어찌 경중을 구별하겠는가? 이에 법도에 따라 특별한 예우를 보이노라.……지난 날 동쪽 오랑캐가 흉포하게 나라를 유린하여 어가가 허둥지둥 서쪽으로 피신했을 때에 크고 작은 고을이 모두 붕괴되니 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대부분 짐승이 달아나듯 새가 숨어 버리듯 했는데, 너는 하례下隷(낮은 신분)로서 임금을 뒤로하지 않고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루었고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온 마음으로 마부의 역할을 다 했으니”라고 하여 오련의 공적을 분명히 밝혔다. [1]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에 보면, 오련은 “부여扶餘의 정병正兵으로서 어가를 따랐다.”라고 했다.
오련은 석성군에 봉해짐으로써 낙안 오씨 석성군파의 시조가 됐다. 한편 제천의병전시관에 「이공기李公圻 호성공신 교서」가 있는데, 이것도 1604년에 신지제가 짓고 한호가 쓴 것이다. 이공기는 선조의 어의御醫로, 호성공신 3등에 오르고 한계군에 봉해졌다. 교서는 가로 198㎝ 세로 39㎝ 크기의 대나무실 종이로 제작된 옥축玉軸 형태로,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도화동) 한계공 영당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8년에 제천시에 기증되었다. 교서의 앞부분은 소실되었다.
(2) 차자箚子와 사직소
신지제는 조정 관료로 있을 때 필시 차자를 여럿 올렸을 듯하지만, [1]오봉집에는 사헌부 지평으로서 작성한 「헌부차자憲府箚子」 1편만 있다. 곧, 44세 때인 1605년 풍수에 의한 재앙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를 묻는 왕명에 응하여 작성해서 올리려고 했던 차자이다. 신지제는 임진왜란 직후의 현실에 대해 “이제 겨우 나라가 조금 안정되었는데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편안히 즐기려는 습관이 굳어 졌으며 번지르르한 형식만 있고 실질적인 효과는 없으며 사소한 재미를 즐기느라 장래의 걱정을 잊었습니다.”라고 우려했다. 1188년 남송 간의대부 사악謝諤이 주희朱熹(1130∼1200)를 천거하자 주희는 사양하는 뜻을 적은 「무신봉사戊申封事」를 효종에게 올려, “진정으로 나라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둔 사람은 결코 칼을 어루만지거나손뼉을 치는 따위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라고 하고, 사사로움과 사특함의 폐해를 깊이 경계하되 궁중의 은밀한 곳에 대해 간절하게 말했다. 그리고 1050년 송나라 영종英宗이 홍수 피해에 대한 대책을 널리 구했을 때 정향程珦(1006∼1090)은 ①뜻을 세울 것, ②책임을 지울 것, ③어진 이를 구할 것을 건의했다. 신지제는 그 상소의 예를 거론하고, 선조에게 성학聖學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바른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재상이 올바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해서, 시재時宰를 공격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보위에 오른 뒤로 지금까지 40년 동안 격치 성정格致誠正의 학문과 참찬위육參贊位育의 공부와 강유중정剛柔中正의 법도를 오래도록 익히고 편안하게 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어진 재상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힘썼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은 있는데 전하께서 등용하지 않아서입니까?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을 맡겨 책임을 다하게 하는 요령은 오직 전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이른바 근본과 강령에 대하여 상하가 함께 닦아야 할 책임이 물불 속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것보다 다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헌부 대사헌 박승종朴承宗은 이 글이 시재를 몰아세웠다 하여 선조에게 올리지 않았다. 이해 11월 8일(무인) 행 대사헌 박승종, 집의 이덕형李德泂, 장령 이덕온李德溫, 지평 민덕남閔德男 등은 천재지변·공법·군정·인재등용·분경 등에 관한 사헌부 상소문을 올렸다. 성수星宿가 궤도를 어기고 우양雨暘이 제때를 잃어서 시정時政의 실수가 또한 재변을 부르게 되었다는 인식에서 작성한 것이므로, 신지제의 당초 차자와 취지가 같다. 그런데 박승종 등의 상소문은 “공법의 어지러움과 군정의 폐추를 우선 강구하여 조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되 “나라의 부세를 공평히 하고 군사들의 기강을 세우는 일은 성상께서 유사들을 책려하여 한 번 일신시키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미온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신지제가 재상의 역할을 강조한 것과는 취지가 다르다. 신지제는 자신의 차자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고 귀향했다.
한편 별집의 「사승지소辭承旨疏」는 1623년 반정 이후 인조가 승지 벼슬을 제수하자 신지제가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올린 글이다. 생전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오봉이 승지를 사양한 상소문은 바로 군자가 말년에 행하는 큰 절개인데 한스럽게도 문집에 실리지 못했다. 들리는 바로는 잃어버렸던 글을 다시 찾았다고 하니 이보다 큰 다행이 있겠는가. 서둘러 이어 간행하여 세상에 전해지도록 해야 할듯하네.”라고 권했다고 한다. 6세손 신체인은 별집 후지에서, 신지제가 광해군 때 벼슬했던 대절大節을 지키려 했음을 보여 주려고 수록한다고 밝히고, “이 상소문을 살펴보고서 은미한 뜻을 이해한다면 아마 숙연히 공경심이 일어나 그 숨은 덕을 드러내 밝히려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3) 서발문, 유기遊記, 서찰
신지제는 독서인으로서 많은 서발문이나 독후감을 남겼을 테지만, 현전[1]오봉집에는 서발문이 3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우선 권6에 서序 1편이 있다. 곧 「회산잡영서檜山雜詠序」로, 창원 부사로 있던 1613년부터 1618년까지 자신이 지은 시를 「회산잡영」으로 묶은 내력을 적은 글이다. 신지제는 어머니의 뜻에 이끌려 마지못해 고을에 부임했는데, 공무의 여가에 무료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고픈 생각이 들고 계절의 변화에 느꺼운 마음이 일어나 이따금 시구로 표현했다. 그 서문에서 신지제는 “몇 말 쌀 때문에 얽매임에 고향으로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므로 소리 내어 읊은 나머지 끓어오르는 감회를 부치는가 하면 심심한 번민을 달래기도 하면서 이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 했다.”라고 밝혔다.
그 외에 부록에 2편의 지발識跋이 있다. 즉, 「[1]두시초선 뒤에 쓰다[書杜詩抄選卷後]」와 「죽은 형이 [1]성리대전에서 손수 초록한 책 뒤에 쓰다[亡兄手抄性理卷後識]」이다. 신지제는 안동 와룡면 가야의 김언기 모재茅齋에서 공부할 때, 스승의 책상 위에서 김광문金光門의 [1]두시杜詩 전질이 있는 것을 보았고, 1592년 예안 수령으로서 병화를 만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 두보杜甫와 흡사하여 김광문에게서 [1]두시 전질을베껴서 다섯 권을 나누었다고 한다. 김광문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또 [1]두시
전질이 편년체인지 분류체인지, 중국본인지 조선판본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지제가 초선할 만큼 두시를 혹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지제의 형 신지효는 사서四書와 경전經傳을 모두 직접 써서 날마다 외웠다. 신지효가 죽은 지 7년 뒤, 신지제는 형의 책 상자에서 “[1]성리대전 중에 좋은 글귀 약간을 가려 뽑았다.”라고 쓰인 초록집을 발견하고 오열했다. 아우와 조카들에게 이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경계하는 뜻에서 지어를 적었다. 신지제 자신이 [1]성리대전의 성리학 개념 정의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취했는지는, 그 지어를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1]오봉집
권6에는 유기 2편이 있다. 그 가운데 「청량산 유람록[遊淸涼山錄]」은 예안 현감으로 있던 신지제가 1594년 9월 3일 비장 강효업康孝業, 금난수琴蘭秀, 김강金堈(1558∼1595) 등과 함께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기행문이다. 김강의 자는 기중器仲, 호는 설애雪厓,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청량산 유람 때 김강과 여러 시를 주고받아, 그 일부가 [1]오봉집
권1과 부록에 남아 있다.
∙「김강 기중과 함께 ‘천 길 산 위에서 한 번 옷을 턴다.’라는 구절(주희 「오금언화왕중형상서五禽言和王仲衡尚書」)을 가지고 운자를 나누어서 ‘천千·강岡·일一·의衣’ 등의 운자를 얻어 짓다[與金器仲分韻千仞岡頭一振衣 得千岡一衣等字]」:칠언절구 2수,오언고시 1수 54구, 칠언절구 1수
∙「화가가 산을 너무 못 그렸기에 장난삼아 짓다[畵師圖山形甚拙 戱吟]」:칠언절구 1수
∙「산중에서 읊다[山中吟]」:오언절구 1수
∙「소 등에서 장난삼아 짓다[牛背戲吟]」:오언절구 1수
∙「고산잡영孤山雜詠」:칠언율시 2수
∙「산성에서 감회가 일어[山城起感]:청량산 남쪽 구간에 해당하는 공민왕산성에서 지은 오언율시 1수. 부록 수록
∙「장인봉에서[丈人峯]」:청량산 12봉우리 중 하나인 장인봉에서 지은 칠언절구 1수. 부록 수록
∙「산을 나오며[出山]」:칠언절구 1수. 부록 수록
1593년 겨울에 신지제는 경상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1543~1621)에게 글을 올려 “먼저 험준한 곳으로서 예컨대 소백산, 청량산, 주왕산, 팔공산 등을 찾아서 그 형세를 살피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 각 진에서 나누어 지키며 서로 돕는 것도 한 가지방법입니다.”라고 했다. 그 후 1594년 홍이상洪履祥(1549∼1615)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신지제에게 비장 강효업과 함께 청량산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신지제는 9월 3일 고산孤山(즉 일동日洞,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佳松里)에 들러 금난수를 방문하고 그를 따라 절벽에 새겨져 있는 이황의 「고산의 바위 절벽에 쓰다[書孤山石壁]」를 감상하고 이황의 서첩을 보았다. 그리고 청량산을 올라 연대사蓮臺寺에서 묵었다. 4일에는 축융봉祝融峯에 오르고, 강효업이 먼저 돌아간 후 다른 일행과 함께 금탑의 가운데로 길을잡아서 가면서 대여섯 개의 암자를 일일이 보았다. 저녁에 고산으로 돌아와 한밤에 월명담月明潭에서 뱃놀이를 했다. 5일에 금난수와 김강과 헤어졌다. 「청량산 유람록」에서 신지제는 “우리나라의 명산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산이 있는지 묻는다면 청량산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퇴계 선생이 왕래하며 유람한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 개 바위와 만 개 골짜기에 아직도 선생이 지팡이 짚고 다닌 자취가 남아 있다.”라고 했다.
「월영대기月影臺記」는 1613년 신지제가 창원 부사가 되었을 때 9월 16일 벗들과 함께 남포南浦에 배를 띄워 월영대에 이른 사실을, 다음 해 가을 아들이 이어서 유람하고 난 후 회상하여 적은 글이다. 월영대는 신라 말 최치원이 소요하던 곳으로,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는데, 당시에는 창원 관할이었다. 이 글에서 신지제는 최치원의 불우함을 한스럽게 여기고 명량제우明亮際遇의 바람을 가탁했다.
한편, [1]오봉집에는 서찰이 11편밖에 없다. 즉, 원집 권7에 6편이 들어 있고, 별집에 5편이 있다. 별집에는 1592년 설월당 김부륜에게 왜적의 동향과 지방 군진의 형편을 알리는 서찰이 남아 있다.
∙「설월당 어른에게 답하다[答雪月丈書]」(1):1592년 김부륜에게 보낸 답장. 양사兩使(감사와 병사)가 지시하는 사목과 각 관아에서 통문을 전하고 관문關文을돌리는 일이 잠잠하여 왜구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고, 류성룡이 원수가되고 김응남金應南이 부관이 되어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누암樓巖에 진을 치고 형세를 살피러 새재를 넘었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진위를 알 수 없다고했다.
∙「설월당 어른에게 답하다[答雪月丈書]」(2):서울에서 내려온 안동 사람에게 들으니 왜적이 이미 조령과 죽령을 넘었고 충주진도 패했다고 하지만, 왜적이 안동에 도착했다는 말은 헛소문이었다고 알렸다.
∙「설월당 어른에게 답하다[答雪月丈書]」(3):병마절도사가 내일 행차하게 되어있어 백성들을 모으려 했지만 백성들이 모집에 응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설월당 어른에게 답하다[答雪月丈書]」(4):군사를 모으는 일은 이미 도모할방법이 없고 매복을 설치하라는 명령도 필시 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답답해하였다. 청량산 산세를 살피라고 하지만 병리兵吏가 아직 나타나지 않아 분통이 터진다고도 했다.
[1]오봉집 원집에는 다음과 같은 서찰이 수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주다[與或人書]」:수신자 미상. 선산善山은 군대와 병마가 왕래하는 곳이므로 둔전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병산 현감 아무개에게 주다[與屛山守某書]」:현재 경북 의성군 비안면 일대에 있던 고을인 병산의 현감에게 준 서찰. 상주尙州 출신의 선비 황정간黃廷幹(1558∼1642)이 비안현 단서면丹西面에 있는 저곡촌渚谷村으로 이주했는데 5월 중에 부친상을 당한 뒤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니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고 운구 행렬이 금당金堂을 거쳐 위만威萬과 입석立石 등지를 지날 때 경유지의 백성들로 하여금 네댓 마리의 큰 소를 동원하여 호송하도록 해 달라고 청했다. 황정간은 류성룡의 문인이다.
∙「김기중에게 답하다[答金器仲書]」: 임진왜란 후, 스승 김언기에게서 함께 수학한 김강金堈(1558∼1595)에게 보낸 답장. 선생의 묘소에 잔을 올리고 선생의 부인께 장수를 기원하는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갈봉 김득연에게 답하다[答金葛峯書]:스승 김언기의 맏아들 김득연金得硏(1555∼1637)이 부탁한 일에 대해 김강金堈과 의견을 조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들 홍망에게 부치다[寄子書]」:과거를 보기 위해 떠난 아들 신홍망에게 보낸 서찰. 의성현 하천下川(지금의 의성군 봉양면)의 종질宗姪 형제 두 집에 모두 역병이 번져서 두 질부가 연이어 병치레를 했고, 구미촌 본가 인근에도 전염병이 창궐하고 화점花店과 천곡泉谷에 혹은 역질이 돌고 혹은 마마가 번지고 있으므로, 내려올 때에 그리로 가지 말고 곧바로 오라고 훈계했다.
∙「대구 부사 김윤안에게 주다[與金大丘書]」:류성룡의 문인으로 대구 부사로 있는 김윤안金允安(1562∼1620)에 보낸 서찰. 병든 누이가 대구에 살고 있는데 요즘 지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하므로 봄이 오면 병문안을 갈 텐데, 그때 찾아뵙겠다는 뜻을 밝혔다.
∙「관찰사에게 올리다[上方伯書]」:1593년 경상도 관찰사 한효순에게 올린 글.
겨울이 다 가도록 적이 물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급선무를 제시한 것으로, “①포상이 분명해야 한다. ②군율이 공정해야 한다.③비장裨將이 불필요하게 많으므로 줄여야 한다. ④군비 확충을 늦추어선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4) 제문과 묘지
[1]오봉집 원집 권7에는 제문 8편과 묘지墓誌 2편, 별집에는 제문 2편이 있다. 우선 신지제가 작성한 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학봉 김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祭鶴峯金先生文]」:학봉 김성일을 위한 제문.산문이되, 입성운을 격구 압운했다.
∙「송소 권우를 애도하는 제문[祭權松巢文]:이황의 문인으로 광해군의 사부였던 권우權宇(1552∼1590)를 위한 제문. 4언 19구. 격구 압운하면서 4구 혹은 6구마다 환운했다.
∙「남계 이보에게 올리는 제문[祭李南溪文]」: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이후 거창 현감에 이른 이보李輔(1545∼1608)를 위한 제문. 4언 16구. 상평성 제4 ‘지支’ 운의 8개 운자(兒·非·慈·私·時·朞·誰·思)를 격구 압운했다.
∙「곽계수 영공에게 올리는 제문[祭郭季綏令公文]」:곽재우를 위한 제문. 4언 80구. 격구 압운하면서 4구마다 환운했다. 곽재우의 의병 항쟁의 업적을 기리되, 그의 진퇴출처를 개괄하여 “공의 일생을 돌아보건대, 참으로 구차하지않아, 나아가고 물러남이, 진정한 대장부였습니다.[顧瞻始終 誠不區區 其行其止一大丈夫]”라고 칭송했다.
∙「손경징에게 올리는 제문[祭孫景徵文]」:손기양을 위한 제문. 모두 74구로, 8개 운류를 격구 압운했다. 각 구는 4언, 5언, 6언, 7언을 혼용하되, 전체적으로 보면 6언이 중심이다.
∙「외사촌 형 선전관 박종남을 애도하는 제문[祭內兄朴宣傳官文]」:외사촌 형 박종남朴從男(1558∼1620)을 위한 제문. 산문으로 작성했다. 박종남의 호는 유촌柳村, 본관은 경주이다. 1591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곽재우의 휘하에서 왜적과 싸웠다. 의흥의 구음서원龜陰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지제는 고인에 대해 “형이 처음 조정의 청요직에 제수되었을 때 부정한 도를 따르고 싶지 않아 용단을 내려 이내 물러났고, 형이 다시 변방의 열장이 되었을 때에 불의를 달가워하지 않아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처신했기 때문에 창을 쥐고 숙위하는 낭관으로 일생을 마치도록 조금의 작위도 헛되이 제수 받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논평했다.
∙「찰방 김춘룡에게 올리는 제문[祭金察訪文]」: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을 지낸 김춘룡金春龍을 위해 지었다. 4언 65구. 하평성 제7 ‘양陽’ 운, 일운도저. 신지제는 김춘룡을 위해 묘지墓誌도 지어주었다.
∙「기우제 제문[祈雨祭文]」:1613년 창원 부사로 부임한 이후 작성. 4언 48운.하평성 제7 ‘양陽’ 운. 일운도저
∙「종가 어른 성은흘 애도하는 제문[祭城隱宗丈文]」:원집 습유에 수록. 신흘申仡을 애도한 제문. 4언 24구로 입성운으로 격구 압운했다, 6언, 7언의 구로 짓되 주로 6언을 이용했다. 신흘의 자는 구지懼之,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해金垓·류종개柳宗介·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왜군을 막았다.
∙「학동 이공을 애도하는 제문[祭鶴洞李公文]」:부록에 수록. 이광준李光俊을 애도하는 제문. 4언 52구. 13개 운류를 환운했다. 이광준의 자는 준수俊秀, 본관은 영천이고, 학동은 그의 호이다. 156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형조 좌랑·하동 현감·강릉 부사·형조 참의·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586년 청송 부사에 임명되었을 때, 신지제가 그를 찾아가 처세의 방도와 몸가짐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다. 의성군 금성면 운곡리雲谷里에 입향했고, 묘소는 의성군 봉양면 신평리에 있으며,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학록정사鶴麓精舍 광덕사光德祠에 제향되었다. 신지제는 그에 대해 “비록 크게 쓰이진 못했지만, 오히려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니, 세 조정의 원로 신하이고, 온 나라 백성들이 따랐습니다.[雖未大試 尙有聲績 三朝耆舊 國人攸服]”라고 아쉬움을 말했다.
∙「노경필 구중의 널을 고향으로 반장할 때 제문[祭盧懼仲返襯文]」:부록에 수록. 정구鄭逑의 문인인 노경필盧景佖(1554∼1595)의 널을 문소聞韶 즉 의성義城에서 일선一善 즉 선산善山(경북 구미시 선산읍)의 안강 노씨 묘역으로 반장할 때 지은 제문. 전체 56구로, 격구 압운하되 13개 운류를 바꾸어 사용했다. 노경필의 자는 구중懼仲, 호는 역정櫟亭, 본관은 안강安康이다. 신지제의 외가에
장가들었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임진왜란 때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상주 전투에 참여했다. 1594년에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으로 재직중에 병사했다.
한편, 신지제가 남긴 묘지墓誌는 모두 임진왜란 때의 의병을 위해 작성한 것들이다. 우선, 「김 찰방의 묘지[金察訪墓誌]」는 김춘룡을 위한 글이다. 김춘룡의 본관은 경주로, 아우 김경룡金慶龍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고 팔공산과 화왕산 회맹에 참여했다. 울산 무룡산舞龍山 및 개운포開雲浦에서 왜적을 격파한 공훈으로 송라도 찰방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단, 신지제가 작성한 이 묘지에는 “임진왜란 때 곡식을 군량으로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정에서 기어이 찰방의 직첩을 내렸으니, 군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어떤 일로 서울에 갔을 때 영의정으로 있던 서애(류성룡)가 군을붙잡으며 벼슬길을 열어 주려고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돌아와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곤궁함을 지키면서 태연하게 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정위보의 무덤에 올리는 글[鄭衛甫塚文]」은 의병 정의번鄭宜藩(1560∼1592)의 무덤에 넣은 묘지이다. 위보는 정의번의 자로, 호는 백암栢巖, 본관은 영일이다. 영천 사람으로, 1585년 소과에 합격했는데, 1592년 봄 4월 13일 왜군이 쳐들어와서 부산 동래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정세아鄭世雅(1535∼1612), 아우 정안번鄭安藩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영천 의병은 6월 10일 영천을 탈환하고 경주성으로 진격했다가 8월 21일의 경주 서천 전투에서 종노 억수億壽, 영천 12현사와 함께 왜적에게 사로잡혀 죽었다. 부친 정세아는 경주성을 탈환한 후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화살촉으로 초혼하여 고향에 돌아온 후, 생전의 그의 벗들에게 만시를 받고 망자의 옷과 신발을 더하여 장사 지냈다. 사람들이 그 무덤을 시총詩塚이라고 불렀다. 신지제는 장내범張乃範(1563∼1640)으로부터 정세아가 아들을 위해 시총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글을 지어 보냈다. 장내범의 본관은 인동仁同으로, 장현광과 정구의 문인이다.
한편, 정세아는 병조 좌랑에 추증되었다가 1732년 좌승지에 증직되고 1734년에 다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세아는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향리에서 글을 읽다가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청송·박연·하양·울산·부산 등의 전투에 공을 세우고 6월 19일에 영천성을 복성하고 8월 21일 경주성으로 진격하여이틀 만에 경주성을 탈환했다.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세아와 정의번 부자의 위패는 영천 임고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는데, 환고사는 이후 환구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신지제는 「정위보의 무덤에 올리는 글」에서 “아! 난리에 임하여 절의를 바쳤으니 충정이 크고, 적진에 달려가 아버지를 구했으니 효성이 지극하다. 그러나 공의 7척 육신을 찾으려 해도 아득한 초원에 백골이 나뒹굴어 참으로 옥석을 구분할 수 없게되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 겪은 공의 영령을 생각해 보건대, 일월을 꿰뚫어 지금까지 빛나고 있는 것은 그의 충정이 아니겠으며, 산하가 되어 나라를 굳건하게 한 것은 그의 기상이 아니겠는가!”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글 끝에 4언의 명銘을 두어 “살아선 장렬한 선비였고, 죽어선 귀신의 영웅 되었네.[生爲烈士 死作鬼雄]”라고 예찬했다.
5. 맺는 말
1739년에 이광정李光庭(1674∼1756)은 「오봉선생문집 서문[梧峯先生文集序]」을 작성하면서, 신지제가 이황의 학풍을 이은 점을 부각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지제는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에 겨우 9세였으므로 항상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예안 현감으로 부임했을 적에는 임진왜란을 겪고 피폐해진 뒤라 군대를 수습하고 백성을 돌보기에도 바빴지만, 달마다 도산에 가서 퇴계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고 문하의 원로들과 선생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정무를 논의하면서 골똘히 힘써 탐구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다.
신지제는 젊어서 김언기에게 배우고, 30대 예안 현감으로 있을 때는 도산을 왕래하며 이황 문하의 장로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특히 학봉 김성일을 따랐다. 따라서 신지제가 퇴계 학맥을 이은 것은 분명이다. 하지만 신지제는 영남학파 가운데서도 퇴계 학맥과는 학풍이 조금 달랐던 장현광을 따랐고, 처가인 함안 조씨의 사람들과 함께 남명의 학풍도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정구의 관해정을 중수하는 등, 정구와 깊이 교유했다. 신지제는 퇴계 학풍만을 고수하지 않고 영남의 여러 학맥에서 장점을 흡수하면서 자신만의 사유 양식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신지제는 정인홍의 합천 거처를 일절 방문하지 않았다.
이광정의 「오봉선생문집 서문」은 신지제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장에서 고초를 겪었고 광해군 시절에 대북과 소북이 정권을 잡자 경륜을 펼 수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지방의 원님으로서 백성들에게 많은 은덕을 끼쳤다고 언급했다.
불행히 6년 동안 전란을 만나 항상 전쟁터를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북과 소북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끝내 세상에 공의 경륜을 조금도 펼치지 못하고 시골 사람들이 은덕을 입고 아름다운 정사를 칭송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실로, 신지제의 두드러진 공적은 왜란 때 예안 현감과 창원 부사로 있으면서 경내를 왜적으로부터 지킨 것이라고 할 것이다.
[1]난중잡록亂中雜錄에 보면, 1592년 6월, 영덕 현감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 한효순,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 신지제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라고 했다. [1]난중잡록의 저자는 [1]경상순영록을 인용하여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신지제는 임진왜란 때예안을 지켰을 뿐 아니라, 경상북도 예안과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구휼에 전념하여 해당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이 사실이다. 신지제는 의병 모집을 위해 단기單騎로 안동 용궁 방면으로 다니다가 왜병 70여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과거 훈방된 죄수가 은공을 갚아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예안과 안동의 겸관으로 있을 때는 구휼한 백성이 수천에 이르렀다. 의병장 김해金垓와 약속하여 피차 나랏일로 목숨을 잃을 때에는 처자를 의탁하기로 했는데, 김해가 경주 진중에서 순국한 이후 그 집안을 돌봐 주었다고 전한다.
신지제의 결전의 뜻은 다른 의병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배인길 裵寅吉(1571∼1592)과 그 종형 한림 배용길裵龍吉도 의병을 일으켜 예안 현감으로 있는 신지제의 막하에 들어가서 용궁의 진중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적병을 만나 배인길은 전사했고 그 소식을 들은 부인 월성 이씨는 순절했다. 왜적이 물러난 후 배용길은 봉화 석평리 호산골에 의관장衣冠葬을 치렀는데, 그 무덤을 의사총義士塚이라 부른다. 1817년 영남의 선비들이 장계하여 부인 이씨와 함께 쌍정려雙旌閭의 은전이 내려 봉화군 석평리에 쌍절려각을 세웠다.
1596년 4월 신지제는 순찰 종사관으로서 팔공산에 이르러 여러 고을의 수령들에게 ‘일사종시동난사一死終始同難事’를 권면했다. 그리고 함양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동맹 창의했으며, 왜란이 끝날 때까지 통제사 종사관, 삼영 종사관 등을 역임했다.
이광정은 1739년의 「오봉선생문집 서문」에서 신지제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평가했다.
공은 평소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 「회산잡영」과「구당만록」만 조금 남아 있다. 시집의 내용들은 온후하고 화평하여 평소 지낼 때 읊은 작품이라도 모두 성정에서 우러나와서, 꾸미지 않아도 소리가 청아하고 가락이 잘 맞았다.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며 시대를 안타까워하고 백성을 측은히 여겨 스스로 주체할 수 없어 지은 시들은, 충심이 깊고 슬픔이 묻어나 성대하게[1]시경의 유음遺音이 있었다.
신지제의 시는[1]오봉집에 수습된 것이 많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는 내면의 덕행이 바깥으로 드러나 문장을 이룬 것이며, 인의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말이 성대[藹如]했다. 이러한 특징은 산문에서도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즉, 전황을 염려하면서 김부륜에게 보낸 서찰, 지제교로서 작성한 공신교서의 문장, 사헌부 지평으로서 올리려고 했던 차자, 인조반정 후 관직을 사양하면서 적은 사직소 등은 신지제의 인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지제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학교를 진흥하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창원 부사로 있을 때 향교 강당에서 강신례를 올리면서 지은 시가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려 준다. 즉, 신지제는 「고을의 집강 세 사람이 술을 가지고 와서 선물하니 곧 향교의 강당에서 머지않아 강신을 열기 때문이다. 감회가 일어 이 일을 서술하여 감사할 참이다[鄕執綱三員持酒來饋 庠堂將有講信之會也 有感述此擬謝]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1수를 남겼다. 그 두련頭聯에서 “향교에 강당을 세운 것이 뜻이 없어서겠는가,
마을의 기강을 바로잡을 현인을 얻는 데 있네.[建堂庠序豈徒然 綱紀州閭在得賢]”라고 하여, 흥학이 지방공동체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1]오봉집을 통해 우리는 신지제의 일생 행력과 시문에 관해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검출할 수 있었다.
첫째, 신지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었다. 그는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 예조 좌랑, 문학,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고, 왜적이 국토를 유린하는 때에 항왜의 활동을 하여 공훈이 두드러졌다.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와 뜻을 같이하여[1]화왕산동고록火旺山同苦錄에 이름이 올라 있다.
둘째, 신지제는 국가의 통치와 관련한 관각 문학에도 뛰어났고, 개인의 서정을 토로하는 순문학에도 뛰어났다. 그는 지제교知製敎의 삼자함三字銜을 지닐 만큼 국가의 공적 문장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1]오봉집에 실린 많은 수창시에서 알 수 있듯이, 사우들이나 지방관, 하급 관료들과 폭넓게 시문을 주고받은 문학가였다.
셋째, 신지제는 지방관으로서도 탁월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고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특히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했다. 창원 부사 재직 시에 명화적 정대립鄭大立을 체포하여 경내를 안정시킨 것은 중요한 공적이다. 그리고 57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로는 고향의 의병 유가족 돕기와 후진 양성에 전력했다.
넷째, 신지제는 영남의 여러 학풍을 흡수했다. 그는 소년 시절 퇴계학맥의 김언기에게 배우고, 그 후 김성일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는 한편으로, 장현광을 종유했고, 남명학맥의 학자들과도 교유했다. 따라서 신지제는 경상좌도와 우도의 학맥을 소통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실로 신지제는 17세기 초반 영남 학맥에서 이채를 띠는 인물이다. 17세기 영남의 문학사와 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문과 일생 사적을 보다 면밀하기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 참고 문헌
김진옥, 「오봉집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해제, 2006.
장필기, 「조선후기 義城 鵝洲申氏家의 가계 이력과 향촌 재지 기반-의성 아주신씨 邑派·龜派의 고문서 검토를 중심으로」, [1]사학연구
88호, 한국사학회, 2007,
pp.685∼718.
박명숙, 「梧峯 申之悌 先生의 生涯와 學問」, [1]동양예학 38, 동양예학회, 2017.12,
pp.6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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