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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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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성전 스크랩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교회론 [라은성교수]
상록수 추천 0 조회 11 14.10.28 2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교회론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교회론

 

라은성 교수

 

교회론

 

가톨릭 인들과 복음주의자들 간에 가장 큰 상이한 점들 가운데 교회론(ecclesiology)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설립하셨다는 점, 교회의 머리가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간에) 그리스도이시라는 점, 성례에 세례와 성찬식이 들어있다는 점, 교회의 목적이 구원적이며 복음적이라는 점과 같은 점(1부을 보라)등은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See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270-76, 292.

여기 우리의 목적은 매우 중요한 상이점을 검토하는 것이다. 11장에서 베드로의 우수성, 사도적 계승, 그리고 로마교회의 무오류성과 같은 상이점을 검토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 외에 교회론과 연관된 논쟁점들, 즉 교회의 가시성, 단일성, 사제의 권위성, 그리고 일관성 등을 살펴보도록 한다.

 

 

A. 가시적 교회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교회는 불가시적인 신비적 몸일 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가시적 조직체이며 그 본부는 로마라고 한다. 이것을 지지 받기 위해 성경과 거룩한 전통의 청원하여 주장하고 있다.

 

1. 가톨릭 변호

“교회의 궁적적인 목적과 효과 있는 신성의 직접적인 원인들을 상상할 때 교회는 실제로 영적이다. 하지만 교회의 일원들과 영적 은사들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고려할 때 교회는 외적으로 필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이”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1에서 인용함. 라고 교황 레오 13세는 선언했다.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는 회칙(encyclical) “신비적 몸”(Mystical Corporis)에서 교회가 가시적이라는 가르침을 확언했다. 그 안에서 그는 교회가 “단순히 영적 실재이며 믿음 상에 차이점이 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들을 연결하는 가시성으로 함께 연결되어있다”는 견해를 완강히 거부했다. Ibid.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신약성경에서 가톨릭교회가 성체의 거룩하시고 가시적 희생이신 주님의 제도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새롭게 가시적이고 외적 사제직[can. 1]이 교회 안에 있으며, 옛 것은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진다[히 7:12]고 고백해야만 한다” Denzinger, Sources of Catholic Dogma, no. 957, 23. 고 선언했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 신약성경에 가시적이고 외적 사제직이 없다거나, 주님의 참 몸과 보혈을 축성하고 드리는 능력이 없다거나, 죄를 용서하고 죄를 간직하는 능력이 없다거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제들이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성직자들에게만 제한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파문이 내려질 것이다.” Ibid., no. 961. 294-95.

로마 가톨릭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또 다른 견해들도 거부하면서 주장하기를, “가르치는 권위적 직책이 없다면 성례의 집행이나 교리의 순수성을 위한 정확한 규범이 없다. 교권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가시적 교회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1. 가톨릭인들은 교회의 가시성이 성경과 전통에 근거한다고 믿고 있다.

 

a. 성경적 주장

가톨릭 교의의 근거로 널리 사용되는 것으로 “교회의 가시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교권제도의 신적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르치는 직책은 믿음에 순종하는 임무(롬 1, 5)와 믿음의 고백(마 10, 32 et seq.; 롬 10, 10)을 그 책임을 받음 성직자들에게 요구한다.” 더욱이 “신실한 자들 편에서 부여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임무는 사제들에게 부합된 것이다(요 3, 5; 6, 54).” 더 나아가서 “목자 편에서 교회 권위에 순종하는 책임은 목회자들에게 부합된 것이다(마 18, 17 et seq.; 눅 10, 16).” 또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멀리 서서 볼 수 있는 높은 산과 같은 것으로 메시아 왕국을 예견했다. 그 높은 산은 다른 모든 산들보다 더 높이 솟아 있으며 그 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다”(사 2, 2, et esq.; 믹 4, 1 et seq.)고 주장한다. 또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교회는 지상 왕국, 무리, 건물, 포도나무, 산 위의 도시와 같다. 성 바울은 교회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한다”고 주장한다. Ibid., 301-2.

 

어떤 현대 가톨릭 학자들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단순히 가시적 지역교회나 불가시적 보편교회가 아닌 가시적 보편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주장한다. 미 출판 된 James Akin, A Defense of Catholic Theology (San Diago, 1994)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들의 확언에 따르면, 1)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가시적 교회의 특권을 소유토록 임명하신 것이 아니라(엡 5:23) 가시적 지상적 교회의 특권이었다; 2) 예수님께서 교회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은 가시적 교회를 지칭한 것이다; 3) 묶거나 풀 수 있는 권능을(마 18:18) 지상에서 행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은 가시적 지상적 교회를 겨냥하시며 말씀하신 것이다; 4) 마태복음 18:18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보이는 지상적 교회의 출교령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5) 지옥의 문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천국교회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지만 소멸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b. 전통적 주장

이레니우스(2세기)와 같은 초대교부들이 교회의 가시성을 고수했다고 가톨릭 신학자들은 주지한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를 . . . 7개 촛대, 즉 모든 것이 가시적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담고 있는 촛대로 . . . 비교했”기 때문이다. Irenaus, Against Heresies V, 20, 1은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2에 요약되어 있다. 더욱이 “성 어거스틴은 교회를 산 위에 있는 도시로 비교했다(마 5, 14): ‘교회는 모든 사람 앞에 명백하게 가시적으로 서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숨어있지 않고 산 위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Augustine, Contra Cresconium II, 36, 45;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2에서 인용함.

어떤 가톨릭 신학자들은 “교회의 가시성에 관한 최종적 근거를 신적 말씀의 성육신에서 찾는다.”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2.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때에 가시적이었던 것처럼 그의 몸, 즉 교회는 그가 계시지 않을 때 가시적이 된다는 것이다. 켈리(J.D. Kelly)는 이에 덧붙여 하는 말이 “초대교부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줬던 것은 항상 경험적, 가시적 사회였다. 그들은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간에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 190-2.

 

2. 프로테스탄트 답변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언급한 교회는 가시적 조직체, 즉 로마 가톨릭교회로 명시되어야만 한다는 로마 가톨릭 주장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들은 이 문제와 연관하여 성경에 관한 가톨릭 해석과 전통에 관한 그들의 사용을 거부한다.

 

a. 성경적 주장에 대한 답변

그리스도의 참 교회인 가시적 지상적 조직체에 관한 가톨릭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된 본문의 문맥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성경구절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 본문들을 간략하게 검토하므로 그들의 주장들이 허상임을 밝히도록 하겠다.

로마서 1:5. 이 본문의 말씀을 근거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치는 직책이 믿음에 순종하는 책임을 임무로 요구하고 있다”고 가톨릭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믿음의 순종을 나타내기 위해 그[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사도직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의 사도직에(1절) 관해 말하고 있으며 베드로와는 아무런 연관, 즉 로마 가톨릭 교황들이 억지 주장하는 베드로의 계승자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더욱이 사도가 되기 위해 사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가 되어야만 했다(행 1;22; 고전 9:1; 15:5-7). 하지만 1세기 이후에는 그러한 자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치는 직책이 여기에서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목격자가 되는 것에 덧붙여진 것은 12사도들, 즉 교회를 설립하는데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사람들이 되었고(계 21:14), 설립에 관해 쓰여진 특별히 요구된 위치를 점유하는(행 1:22) 12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엡 2:20), 그들의 이름들이 교회 기초에 새겨 질 것이고, 재림하실 때 12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들도 한 사도가 (마 19:28) 아니었다. 또 다른 사도들의 사도적 권위성을 다른 사도들의 것으로 비교했다(갈 1:17-2:5-9). “사도의 표”(고후 12:12)를 잘 명시한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적격성을 열거했다. “내가 자유자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이라고 썼다. 이처럼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자신과 동료 사도들에게 보이신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7-8).

더욱이 바울 이후 사도적 권위를 확언하시려고 그리스도는 단순히 나타나셨다는 증거를 여러 본문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 첫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맨 나중에”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후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히브리서가 쓰여졌을 (히 2:3-4) 69년에 이르러 마지막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사도로 확언되는 이적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바울이 세상을 떠난 후 서신서를 남긴 유다는 과거부터 살았던 사도들을 언급하였고(유 17) 그들이 교회에 “단번에” 전해준 믿음에 관해 말하고 있다(3절).

끝으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사도의 표”를 명시하고 있는데(고후 12:12), 비록 불치병으로는 귀신들린 것(마 10:8; cf. god 16:16-18), 성령께 거짓을 말하므로 죽은 것(행 5:1-11),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행하는 것과 같은 것(마 10:7; cf. 행 20장)이 있지만, 그 표는 모든 질병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한다(마 10:1). 사도바울은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도록 하는 능력을 행하였다고 기록한다(행 28:9). 후에 바울이(딤전 5:23; 딤후 4:20) 어떤 동반인들을 낫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도적 은사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낫게 하는 것을 쉬었다는 것이나 “그[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떤 경우에는 치유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cf. 히 2:3). 그들의 기능이 사도적 메시지를 확언하는데 일시적이었기 때문에(히 2:3-4),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새로운 계시가 확언되고 기초가 세워졌을 때, 더 이상 그러한 은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히브리서 2:3-4이 말씀되어질 때 이러한 은사들은 이미 사라졌었다(Geisler, Signs and Wonders, chap. 9와 부록 2와 8을 보라).

사도적 표가 아직도 효험을 나타내고 있을 동안 “육체적 약함”(갈 4:13)을 언급한 바울의 의미는 사도들이 모든 병들을 낳게 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도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이적적 능력들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마치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돌들을 빵으로 만들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마 4장).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경우에 실행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cf. 히 2:4). 바울이 개종했을 때(행 9장) 그리스도로부터 현기증 나는 빛으로 눈을 멀게 되었기 때문에 큰 글자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갈 6:11). 여하튼 사도적 은사의 기한은 당시에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도들의 새로운 계시를 확언하려는(히 2:3-4) 이적들을 행하는데 특별한 초자연적 능력이 따랐다(고후 12:12).

을 낫게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도적 표들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도적 표들 없이는 사도적 권위를 소유했다고 할 수 없다.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권위는 이적들이 중지되었을 때에도 존재했다. 이러한 사도적 표들이 확언될 때에만 그들의 권위는 영구적인 사도적 문서들에 나타났다. 이렇게 확언된 사도들이 죽게 되자 살아있는 권위도 사라졌다. 오늘날 살아있는 사도적 권위는 사도적 표로 확언된 사도적 문서들(즉, 신약성경)의 권위뿐이다. 신약성경처럼 사도들까지 거슬러 갈 수 있는 분명하고 문서적인 전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신약성경만이 사도적 권위를 담고 있다(11장을 보라).

마태복음 10:32(과 로마서 10:10). 이 구절들에 따르면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신자들이 고백할 것을 명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은 가시적 조직체에게 그것을 행할 당위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말씀이 쓰여졌을 당시 1세기에 세례조차도 교회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행해졌다(cf. 행 2:38; 10:46-48; 16:31-33). 공개적 증거 의식과 세례로부터 로마교회의 가시적 교권제도를 수용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일 뿐이다.

요한복음 3:5(과 6:54). 이런 본문들이 세례와 성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가톨릭인들은 주장한다. 그들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가 가시적 지상적 조직체라는 가톨릭 교리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어색할 뿐이다. 첫째, 평신도들과 이단자들(프로테스탄트 사역자들을 포함하여)이 집행한 세례가 가치 있다는 것을 가톨릭 신학도 인정하고 있다. 가톨릭 학자들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사역자들이 공식적으로 이단성이 있다고 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이단성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잘못이 무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견문이 넓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는 한 단지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가시적 로마교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둘째, 다른 곳(부록 E를 참고)에서 보았듯이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시적 교회의 본질적 성례도 아니다. 심지어 (“피의 세례”[순교]와 “소망”교리의 “세례”에서)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114, 311을 보라. 또 “소망의 세례는 행해진 행함에서 비롯된다. 거룩케 하시는 성령을 부어주신다. 그리하여 원죄, 실제적인 죄, 그리고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을 면죄시키신다.”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소망의 세례로 인해 구원받았다.

가톨릭 신학은 세례가 결코 구원의 필수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세례를 받지 않은 (받을 수 있었지만 받지 않은) 사람은 그것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시적 교회와 연관된 외적 표의 필요성이 다시금 이 본문에서도 증명될 수 없다.

마태복음 16:16-18. 가톨릭 교의와는 정반대로 이 구절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참 가시적 교회임을 증명하지 못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분이신 것처럼 지상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가 아니라고 어리석게 추정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오늘날에 볼 수 없지만 아직도 지상에 계시는 (그의 몸 된) 교회에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이심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기억시킨 후(엡 1:22-23), 바울은 계속하여 사도들(즉, 그 때까지 살아있었던 사도들)이 교회의 “터”의 부분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2:19-20) 에베소인들도 한 부분이(19절에 “너”를 주시하)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가시적 교회의 머리이심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교회의 지상적 머리는 필요하지 않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가시적 지상적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가톨릭 주장은 논점을 교묘히 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미 (11장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를 모든 것의 유일한 머리로 삼으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모든 사도들에게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동일한 권능을 주셨다(마 18:18).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된 곳이다(엡 2:20). 베드로가 터 위에 가졌던 역할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하였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모퉁이 돌이시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이 시작할 때 어떤 신자라도 죽지 않았고 천국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가시적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웠을 때 가시적 교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죽어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불가시적 교회만이 자랐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지상의 가시적 기독교 교회가 있었다는 것, 즉 출교를 포함하여 교회 위에 권위를 행사했던 사도들에게까지 되돌아가는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대하(고 가톨릭인들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 관할권이 본래의 가시적 교회의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가시적 교회는 사도들과 더불어 시작했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멸망시킬 지옥의 문 없이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마태복음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이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 교황청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언급된 “교회”는 지역 회당처럼 지역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보편(가톨릭)교회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신자들의 연합적이고, 뛰어나고, 그리고 권력을 가진 몸과 같은 신약교회는 오순절에 이르러 존재하게 되었다(행 1:8; 2:1-4, 42-47). “교회”의 의미가 마태복음 18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로마 가톨릭인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성례를 집행하고, 신자들을 무오류하게 가르치고, 그리고 훈련시키는 가시적 교회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이 구절은 믿음과 예식에 관한 모든 논쟁들을 정리할 수 있었던 우주적 사도적 권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공격했을 때(18:15) 범하는 “죄”와 “허물”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가시적 로마교회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려는 가톨릭인들의 주장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끝으로, 이 본문이 비록 교리와 행위 면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권위에 복종해야하는 것을 말했다하더라도 가시적 교회를 위한 가톨릭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 권위를 가시적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이 구절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견해는 동방 정교처럼 오래된 다른 가시적 교회들도 반대하고 있다.

누가복음 10: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톨릭 교회에게 주어진 권위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나 사도들에게 제한된 어떤 권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명령을 위해 보냄을 받은 “70명” 제자들에 관한 말씀이다(눅 10:1-3). 또 그 구절은 매고 푸는 것과 같은 교회적 권위를 행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씀이고 단지 그리스도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눅 10:10-11).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라는 어구는 가시적 교회의 조직적 구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는 그의 메시지를 언급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런 메시지가 무엇을 수반하든지 간에 심지어 1세기에 베드로가 지상권을 가졌던 가시적 교회의 권위를 언급하지 않는다. “너희”(헬: humas)라는 말씀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며 모든 제자들을 일컫는다. 이미 본대로 마태복음 6장에서 베드로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제자들에게도 맬 수 있고 풀 수 있는 동일한 권위를 주셨다(마 18:18).

이사야 2:2(미가 4:1). 구약성경 선지자들이 산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미래 나라에 관해 말했다는 사실은 로마교회가 말하는 가시적 교회론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가톨릭 권위자 루드빅 오트(Ludwig Ott)에 따르면, 선지자는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그 구절이 문자적 외적 나라를 예언하고 있다고 하지만 로마교회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자적 다윗의 나라, 즉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팔레스타인 땅에 그들의 메시아(예수님)와 더불어함께 거하게 될 이스라엘 국가를 약속했던 나라를 지칭한다(창 12:1-3; 13:14-17; 15:1-16). 이 기간에 “인자가 . . .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이런 일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때에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행 1:6) 시키시려고 오실 때 일어날 것이다. 또 그 때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을 때이다(롬 11:24).

끝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기독교 교회의 가시적 명료성을 예시하기도 하지만 기원적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주의의 주장을 이런 구절들을 통해 증명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은 무리, 건물, 포도나무, 인간의 육체, 그리고 산 위의 도시처럼 지상에서 미래의 신자들을 예언하시지만 가톨릭 학자들이 이런 것들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가 아닌 지역교회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e.g., 고전 14:1-4). 다른 구절들은 가시적 교회가 아니라 불가시적 교회를 언급한다(엡 1:22-23). 그들 중 누구도 로마 가톨릭 교회로 알려진 가시적 교회를 말한다고 할 수 없다. Ibid., 301.

 

 

b. 전통적 주장에 관한 답변

교부들에서 가져온 주장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불신할 수밖에 없다. 교회 교부들이 이런 주제에 관해 만장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톨릭 학자들도 익히 알고 있다. 켈리(Kelly)의 말대로 모든 교부들이 교회 내의 가시적 조직적 연합체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신약성경의 말씀처럼(cf. 엡 1-4장), 불가시적 교회를 인정했다. 더욱이 가시적 연합체를 믿었던 사람들일지라도 로마 가톨릭인들이 로마 감독의 지상권이 절정에 달할 때에 가톨릭교회의 교권제도에 중심체였던 것을 상상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행하지 않는다. 동방교회 교부들은 서방 교회에서처럼 그것을 확언하지 못하고 있다. 끝으로,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교황제는 상대적으로 후기의 고안물이다. 교황 레오 1세(461)가 고안했다. 교회 교부들이 강조했던 가시적 연합체는 로마의 무오류한 교황의 지도력 아래 조직적 연합체와 동일하지 않다. 로마 가톨릭주의의 결론은 초대 교부들의 일치된 견해를 뛰어 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만장일치”에 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B. 교회의 연합체

 

 

로마 가톨릭 교회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가시적 연합에 덧붙여 가톨릭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부여하신 연합체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연합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명시되는데, 믿음의 연합과 성찬의 연합이다.

 

1. 가톨릭 변호

 

“믿음의 연합과 성찬의 연합은 교황의 지상권과 교회의 최고 교사며 목회자에 의해 보장된다. 믿음의 연합체로부터 분리되는 이유는 이단이기 때문이고 성찬의 연합에서 분리되는 이유는 분파주의이기 때문”이라고 로마 가톨릭주의는 가르친다. Ibid., 303.

1896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Satis gognitum)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은 수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도 그것을 반대할 수 없다.” Denzinger, Sources of Catholic Dogma, no. 1954, 494, 강조는 가미된 것임.

이런 연합체의 성격은 교황에 의해 상술되었는데 “예수님은 한 교회를 가지런히 정리하셔서 조직하셔서 같은 성격을 지닌 여러 공동체들을 연합토록 했지만 구별 나게 하셨지만 믿음의 상징들, ‘나는 한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상징들을 고백한 후 교회를 불가시적이고 유일하게 만드는 끈들로 묶은 것이 아니다.” 계속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며 영속적이다. 누구든지 [그것에서] 분리되면 주 그리스도의 뜻과 법규에서 떠나 방황하여 구원 길에서 떠나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진리의 영으로 가르침을 받고, 이적들로 확언된 살아있고, 순전하고, 그리고 영속적인 권위를 한 교회 안에 제정하셨다.” 덧붙여 하는 말이 “신적 설립자께서 교회가 믿음,행정, 그리고 성찬에서 하나임을 명하셨다. 그래서 베드로와 후계자들을 선택하셔서 연합체의 중심과 원리가 되도록 하셨다.” Ibid., nos. 1955-57, 1960, 강조는 가미된 것임.

 

로마의 관할권 아래 교회의 가시적 연합을 변호하기 위해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경과 교회 전통에 청원한다. 성경적 주장은 다양한 본문을 근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은 믿음의 연합체에서 지도를 받고 있고, 다른 것은 성찬의 연합체에서 지도를 받고 있다. 가톨릭 학자들이 말하는 믿음의 연합은 “교회의 모든 일원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책으로 제안된 믿음의 진리들을 내면적으로 믿는다는 것과 적어도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진리를 고백하는 신앙으로 구성함을 의미한다.”“믿음의 연합체는 교회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논쟁적 질문들에 다양한 견해들을 포용하고 있다.”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3.

성찬의 연합은 “한 편으로는 감독들과 교황(행정적 연합이나 교권적 연합)의 권위에 복종하는 일원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동일한 의식과 동일한 은혜의 방편(의식의 연합이나 예식적 연합)에 참여하므로 사회적 연합으로 일원들을 묶고 있다.” Ibid.

 

a. 성경적 주장

가톨릭 학자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명령을 사도들에게 주시며, 그 선포에 무조건적 동의를 명하신다(마 28, 19 et seq.: 막 16, 15 et seq.).” 또 “대제사장 기도에서 그는 성부에게 사도들과 미래 신실한 자들의 연합을 위해 끊임없이 간구 하신다[요 17:20].” 더욱이 “바울은 상징적으로 교회를 집(딤전 3, 15)과 인간의 몸(롬 12, 4 . . .)으로 비유하여 교회의 연합을 나타내었다. 그는 내적이고 외적인 연합을 즐겼다. . . (엡 4:3-6). 그는 끊임없이 분파와 이단을 경고하였다. . . . (고전 1, 10 . . . 딛 3, 10).” Ibid., 304.

 

 

b. 전통적 주장

 

가톨릭 신학은 성찬에 관한 교회적 연합의 개념을 지지하기 위해 전통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들은 이단에 반하여 싸웠던 초대교부들, 특별히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에게 청원한다. “카르타고와 로마 교회회의로부터 부탁 받은 성 키프리안은 가톨릭 교회의 연합에 대해 처음으로 특수한 글을 썼다.” Ibid. 후에 어거스틴은 자신의 글 『반 도나티스트 작품들』(Anti-Donatist Writings)에서 분파에 관해 강한 반감을 나타내면서 가톨릭 교회가 본질적 교리들로 일치시키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Augustine, Correction of the Donatists 6.22-24.

 

 

2. 프로테스탄트의 답변

 

“가톨릭[우주적]교회를 확언하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만 로마 가톨릭인들이 행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연합에 관한 프로테스탄트 개념의 공감되는 부분은 교리적이고 영적이지 조직적이 아니다.

 

a. 성경적 주장에 대한 답변

복음주의자들은 가시적, 조직적, 그리고 교회적 연합체에 관한 자신들의 교리들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는 가톨릭인들을 완강히 거부한다. 참 연합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영적(신비적) 몸, 불가시적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가시적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복음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마태복음 28:19(막 16:1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주셨지만 그들은 로마가 이것을 해석하는 의미, 즉 “선포에 무조건적 동의”를 명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Ott,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303.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라”는 말씀을 들었을 뿐이다(마 28:20). 하지만 “믿어라”(막 16:16)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면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믿음에 관련하여 사람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유의지가 아니고 당연성으로 그를 섬긴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Augustine, Of True Religion 14. Denzinger, Sources of Catholic Dogma, no. 1875를 보라. 하지만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이단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일치하도록 강요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을 때를 보면 자신의 원리와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Anti-Donatist Writings을 보라).

 

더욱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무조건적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제자도의 필수조건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어떠한 지상적 조직체를 만들어야한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분명하게도 “보존”하라는 “명령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이지(마 28:20) (베드로처럼) 지상에 그리스도의 억지 주장하는 대표자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교황의 무류설(11장), 마리아의 육체적 승천설(15장), 그리고 외경(9장)과 같은 것을 가톨릭 교회가 더하였던 초성경적 교리들에 관해 말할 필요가 없다.

끝으로, 여기에 그려지는 연합체는 조직적이 아니라 교리적이며 영적이다. 지상적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현존의 연합체이다(마 28:20). 조직적 연합체는 이 구절에서 그릴 수 없다. 적어도 로마 가톨릭인들이 고수하고 있는 명백하고 획일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다.

요한복음 17:20-21. “저희도 다 하나가 되”도록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지만 복음주의자들은 그 기도가 조직적(organizational) 연합체가 아니라 유기적(organic) 연합체임을 주장한다. 외적인 일치성(external uniformity)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 연합체, 즉 불신자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요 13:35) 서로를 사랑이라는 영적 연합체를 가시적으로 명시하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 것이지 모든 교회들이 하나에 속하기를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연합체는 가시적이어야 하지만 조직적일 필요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인들이 함께”(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가 발표한 최근 논문에 의하면 역사적 프로테스탄트 견해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견해에 결정적인 교회관, 즉 가시적과 불가시적 차원간의 구별을 더 흐릿하게 만들고 말았다.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ium,” final draft (29 March 1994). 부록 F를 보라.

연합체가 영적이라는 분명한 사실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견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보라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는 자들은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나이지, 교파, 종교회의, 또는 관할권 안에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당면한 논쟁이 교회의 가시적 연합체에 관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조직적 연합체를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로마 교황청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타당하지 못하다: 1) 어떠한 행정적 연합체에 관해 이 구절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2)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 안에 “믿게 될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며 지상에서 조직화된 신자들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영적 모든 지체로서 볼 수 없는 모든 신자들을 일컫는다; 3) 그가 기도하셨던 연합은 신격의 위격들 간의 연합(“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즉 영적이고 불가시적 연합이지 가시적이고 조직적인 연합체가 아니다; 4) 세상은 이런 연합체의 표지를 인식시킬 수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23절)이며, 영적 결합이지 조직체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여기 분명하게 명시된 연합체는 가톨릭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시적 조직체가 아니라 참 영적 연합체이다.

에베소서 4:3-6.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했다. 기독교 교회의 조직적 연합체를 의도한 것, 즉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연합체가 아니다. 뉴 아메리칸 바이블(New American Bible)에 의하면 “성령의 하나”(the unity of the spirit, 3절)라고 말할 때 조직적 연합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성]령의 하나”(the unity of the [Holy] Spirit, NIV 또는 RSV)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령, 즉 모든 참 영적 연합체의 근원에 의해 역사 하는 영적 연합체보다 더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적 연합체는 사람에 의해서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몸으로 세우시는 이 연합체를 유지하는 일에 노력해야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 몸”은 몸, 즉 “한 성령”(4절)에 의해 세례 받은 신자들로 구성되는 몸을 말한다.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영적 몸, 즉 모든 신자들이 속해있는 유일한 몸을 의미한다. 그 몸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즉 죽은 사람들)은 가시적 교회에 일원이 아님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를 의미하며 그 세례로 인해 그리스도의 불가시적(영적) 몸과 더불어 하나로 연합된다. 물세례(차이점을 알기 위해 cf. 행 1:5; 10:47)의해 지상에 그리스도의 가시적 몸의 일원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연합은 성찬의 연합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연합을 의미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고 언급할 때 고백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인들이 믿는바 대로 행정적, 조직적 연합체, 우주적 범위에 이르는 방대한 범위를 이 본문에서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2:4.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몸”은 가톨릭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적 교회의 가시적 조직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맥상 지역 모임에 나타난 영적 연합체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바울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롬 1:7, 강조는 가미된 것임)라고 서신을 시작할 때 모든 가시적 기독교 교회를 의미하지 않았다. 모든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를 주고 있는 것이지 결코 가시적이거나 조직적 연합체를 마음에 두고 “몸”(12:4)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언급한 “한 몸”이 등장하는 문맥은 지역 모임(6-8절)의 발전을 위해 각 일원들이 받은 은사들을 계발하라는 것을 권하고 있다. 신자들의 한 지역 몸에 진실한 것이 다른 신자들의 지역 몸에게도 진실하지만 이와 같은 교회들을 다스리는 가시적 권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예외가 있는데 (1세기의) 살아있는 사도들의 권위가 있었고 계속되어지는 세기동안 신약성경에 사도적 문서들의 권위가 있다. 바로 이러한 면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믿고 있는 바이다.

이 본문은 한 몸이 우주적 교회가 아니라 로마 도시에 있는 지역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끝으로 여기에 논의되어진 지역교회를 넘어 이 본문을 적용시키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지 하나의 가시적 교회로 보고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연합체가 있다는 로마 가톨릭 주장은 비합리적이다. 신약성경은 가끔 각 교회가 스스로 다스리는 권위를 “교회들”에게 권하고 있다(행 20:17; 빌 1:1; 딛 1:5). 개체 교회들의 권위는 사도적 권위에 종속되어 있었다. 사도적 권위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에 행했던 것(살후 2:15; 딛 1:5)이고 신약성경의 사도적 문서들로 나타난 후부터 지속된 것이었다(10장을 보라).

 

디모데전서 3:15. 가시적 교회를 다루는 본문이 있다고 주장하는 가톨릭 학자들은 지상의 모든 가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짐”과 “진리의 기둥과 터”와 같은 어구를 “교회”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의해야할 요소들이 없지 않다. 첫째, 이 어구들이 우주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지체하면” “어떻게 행할 것”을 쓰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15절). 이 본문은 특별한 지역교회에 가고자 했던 바울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가 목회적이기 때문에 바울이 가르쳤던 것들을 지역교회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과 다른 문서들을 공적으로 읽는 것을(4:13) 언급하고 우주적 교회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5:4-16)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어구는 성경이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는 다양한 개체 “교회들”을 포함하는 집합적 의미일 수 있다(cf. 행 20:17; 계 1:4). 우주적 가시적 교회를 언급하는 것보다 집합적인 의미에서 개체적 모든 교회들을 일컫는 일반성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비록 우주적 가시적 교회를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로마 가톨릭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획일적인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지상에 믿는 모든 신자들의 집합적 의미를 표명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미 언급한 대로, 1세기 우주적 가시적 교회로부터 로마 가톨릭 교리, 즉 오늘날 지상에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참된 사도적 교회가 있다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가지 주요(하지만 증명되지 않는) 단계가 있다.

디도서 3:5(고린도전서 1:10). 신약성경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하면서 신자들에게 거짓교리를 신중하게 다루어야한다고 강권하고 있다(딛 3:10). 하지만 거짓 교사가 지역 모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끊는 것이 지역 몸의 신자들의 본문이라고 하고 있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처럼 가시적 우주적 조직체의 본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가 도덕적 기강이 필요할 때 그 모임이 행해야하는 지침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에 있는”(고전 1:2) 지역교회에게 언급하면서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함이라”(고전 5:4-5, 강조는 가미된 것임). 확신컨대 사도적 권위(바울)은 이 결정 이면에 놓여 있고 지역 몸의 신자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모든 교회들을 결합시켰던 1세기 살아있는 사도적 권위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권위는 교회를 설립하는데 결정적 요소들 중 하나였다(엡 2:20). 하지만 이런 권위가 신약성경에 명시되었고 그 권위를 행하도록 위임받은 권위적 가시적 조직체가 있었다는 로마 가톨릭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 15장. 교회들에 등장했던 이슈가 일반적 관심과 자문을 일으키게 되면(행 15장), 예루살렘 협의회(conference)의 예를 보면, 바울이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확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고 무오류한 선언이라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사도에게 계시를 주시고 확언하신다는 사실을 결정하는데 여러 가지가 있다(갈 1;11-12). 첫째, 안디옥 교회로부터 일어난 이슈는 자발성의 문제였다(행 15:2-3). 둘째, 사건의 성격은 교회 회의보다 협의회의 성격이었다. 사도들과 장로들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모여 결정했던 것이다(행 15:22-23). 셋째, 가톨릭 주장과는 정반대로, 협의회를 주도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였다. 그는 협의회의 종결짓는 말을 했다(15:13-21). 넷째, 그 결과 내용의 어조는 중도적(moderate)이었고 모든 일들에게 적절한 표현이었다. 협의회의 결과는 “편지”로만 전달되었지(15:30) 파문을 다루는 교황적 회칙과 같은 형식이 아니었다. 끝으로, 협의회는 바울의 메시지에 관해 하나님의 초자연적 확언을 인정했다(행 15:12).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로 말미암아 말씀이 곧 신적 계시였음을 인정했다는 의미이다(고후 12:12; 히 2:3-4).

 

b. 전통적 주장에 대한 답변

전통을 기반 하여 기독교 교회의 조직적 연합체를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입장은 수많은 이유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첫째, 초기 몇 세기에는 그러한 연합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어떤 때에 로마의 감독이 권력을 과시하면서 기독교계에서 서방 기독교인들을 출교시키는 권한을 주장하면서 소아시아로부터 그들을 제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조직적 연합체는 없었다. 더욱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우리가 알다시피 콘스탄틴과 어거스틴 시대(4세기) 이후부터 발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대 전에 연합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어떤 지역에서 다루었던 순전한 고백적(e.g., 사도신경)이거나 아니면 교리적 탈선행위들을 다루는 경우였다. 최초의 범종교회의는 니케아 이전에는 없었다(325). 그리고 교권제도가 있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과 같은 조직적 연합체도 볼 수 없다. 니케아가 지상의 모든 참 기독교 교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우산 밑에 모으기 위한 교리적 연합을 산출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더욱이 대부분 프로테스탄트들이 동의하는 바대로 로마 가톨릭 주장에 뒷받침할만한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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