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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스크랩 포스트 모더니즘과 설교 / 총신대, 김창훈 교수
상록수 추천 0 조회 11 14.11.08 23: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포스트 모더니즘과 설교(총신대, 김창훈 교수)

독서의계절 조회 21 | 2010.02.25. 12:28 http://cafe.daum.net/cbook/Jjus/3
 
 
 

포스트 모더니즘과 설교(총신대, 김창훈 교수)


오늘날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한다. 실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생활에 침투했고, 때로는 무분별할 정도로 빈번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더 이상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부 지식인들만 향유하는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황이 설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본고는 오늘날의 설교 상황(context)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설교학적 접근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I.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알아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첫 번째 특징은 ‘상대주의’이다. 근대는 거대담론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윤리, 종교, 예술, 철학, 건축, 문학, 삶의 방식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치 또는 규범)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에는 비정상적이고 죄악시 되었던 동성애, 성 전환 등이 이제는 단지 삶의 방식, 성향 또는 기호의 차이 정도로 여겨진다. 종교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모더니스트들이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각도로 공격하였다면, 포스트모던니스트들은 기독교가 구원을 주는 유일한 진리가 아니고 단지 하나의 종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특징은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절대적 진리와 규범을 부인하는 상대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객관적 과학주의를 반대하고 문학, 예술, 문화, 철학 등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며 문화적 삶도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관용과 여유가 최고의 덕목이며,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전파하고 강요하는 것은 무식과 교만과 독선으로 간주된다.

세 번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감성주의’이다. 근대는 합리적 이성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성보다 감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모든 영역에서 감정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성경과 교리의 기초 위에서 신앙을 세워가기보다는, 체험이나 신비 또는 느낌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예배와 찬양과 기도에 있어서도 감정적인 부분이 우선시 된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의 특징은 ‘혼합주의’이다. 근대는 절대적 가치와 상위 가치가 인정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탈 장르화 현상이 두드러져서 독특한 장르의식이 해체되고 이질적인 장르들이 혼합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는 ‘유니섹스’(unisex), 그리고 팝과 오페라의 만남인 ‘팝페라(popera)’, 사실(fact)와 허구(fiction)를 결합한 ‘팩션(faction)’ 등의 신조어는 모두 혼합주의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서도 혼합주의적 현상이 나타난다. 오늘날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와 이교화(異敎化)는 대표적인 혼합주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원리가 교회에 그대로 수용되어지고,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디어져서 다른 종교와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II. 포스트모더니즘과 새 설교학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문화적 상황과 함께 설교학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설교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논리와 설득이 강조되는 명제 중심의 전통적인 설교(이러한 접근은 다분히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의 대안으로 소위 ‘새 설교학(New Homiletics)’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지난 30여 년 동안 새 설교학은 설교학계에 엄청난 도전과 변화를 주었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과 보조를 함께 하며 발전한 새 설교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먼저는 청중에 대한 관심과 고려이다. 새 설교학에서 전통적인 설교와 관련하여 제기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설교에 있어 청중의 역할과 청중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통적인 설교는 청중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청중도 고려되었으나 역동적인 참여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설득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새 설교학에서 청중은 설교의 준비와 전개와 전달에 있어서 우선적인 관심과 고려의 대상이 된다.

새 설교학의 두 번째 특징은 설교에 있어서 귀납적인 접근에 대한 강조이다. 전통적인 설교는 대개 요점과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그 후에 그 요점과 결론을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설득하거나 논리적인 설명을 보충하는 연역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새 설교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사용된 연역적 방법은 권위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청중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진단하면서, 함께 결론을 만들어가거나 결론을 열어놓는 귀납적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특징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story-telling 또는 retelling-story) 또는 ‘이야기 형식’(story-style)의 강조이다. 새 설교학 학자들은 설교의 사명은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는 것인데,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진리를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삶의 내용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이상 새 설교학의 대표적인 주장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새 설교학의 우선적인 관심은 한 마디로 ‘효과적인(또는 지루하지 않고 흥미를 주는) 전달’이라고 할 수 있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청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분명하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귀납적 접근이 필요하며,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이며 감동적으로 진리의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새 설교학은 위에서 언급한 상대주의, 다원주의, 감성주의 그리고 혼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포스트모던 시대와 설교
위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등장하게 된 새 설교학의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새 설교학은 설교에 있어서 커다란 지각 변동을 가져왔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많은 교훈과 도전을 주었다. 그러한 공헌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새 설교학이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몇 가지를 놓치고 있고, 일방적이고 편협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서 바람직한 설교를 위해 설교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①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 설교학의 중요한 특징은 청중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과 고려이다. 물론 청중은 설교의 내용과 구성을 위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설교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청중이 아니라)께 인정받는 것이어야 하고(고전 4:1-4), 설교자의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뜻(청중이 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때때로 청중이 원하지 않더라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돌 맞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②성령의 역사하심에 온전히 의존하라.
효과적인 전달은 새 설교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그들은 좀 더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접근을 위해서 청중을 고려하고 귀납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야기 형식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새 설교학의 제안들이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 어느 정도 유익한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이다. 청중을 고려한 새로운 접근 방식 자체가 반드시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들은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한 바울의 고백을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③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요구된다.
필자의 판단으로, 새 설교학에 있어서 특히 이야기(식) 설교에 있어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문제는 본문을 피상적으로 접근하거나 본문의 의미를 왜곡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 설교학이 하나님의 바른 뜻(“What”)의 전달보다는 흥미 있고 효과적인 전달 방법(“How”)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야기(식)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는 경우를 훨씬 더 빈번하게 볼 수 있다. 필자는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금도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본문을 충실히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

④ 복음의 기본 진리(또는 교리)를 자주 그리고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필자는 새 설교학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정체성의 약화라고 생각한다. 새 설교학은 삶의 변화를 위한 효과적인 전달에 우선적 관심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와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소홀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감성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설교는 단지 삶의 변화만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지만, 삶의 변화는 설교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기독교인보다도 훨씬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비 기독교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복음의 기본 진리나 교리에 대한 가르침 없이 삶에 대한 강조에 치우치게 되면 순간적인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신앙 안에서 삶의 진정한 변화는 기독교의 바른 진리와 교리의 기초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IV. 글을 맺으면서
포스트모던의 시기는 설교에 있어서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이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또는 설교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위대한 설교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셨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능력 있는 설교를 위해서 시대의 상황과 청중은 분명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본문에 충실한 메시지를 전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 때 주의 은혜로 설교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것이고, 그 때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을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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