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품 첨삭-3
1. 하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권삼국
푸른 잎사귀로 휘감긴 느티나무가 정겹다. 교정을 둘러싼 느티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더해간다. 5월 햇볕 따스한 날의 과학 수업 시간이었다. 물고기가 물에 뜨고 가라앉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반 아이들과 물고기를 해부해 보기로 약속 하였다. 전날 아버지께서 매운탕 집을 운영하는 승민이가 붕어 두 마리를 가져오기로 하여, 한 마리는 해부를 하고 나머지는 지느러미와 부례를 관찰해보기로 하였다.
3교시의 과학 시간을 기다리느라 아이들은 1교시부터 애를 태운다. 손으로 만지다가 화가 나면 연필로 꾹꾹 찔러대니 애꿎은 물고기들만 도망 다니느라 혼줄이 난다. 2교시 마침 종이 울리자마자 모두가 준비물을 가지고 후다닥 운동장으로 내 달린다.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물고기와 칼, 먹물, 종이 등을 준비하고 먼저 어탁을 시작하였다. 붓으로 물고기 몸을 이리저리 까맣게 칠 한 후 종이에 찍어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이제 해부할 차례다. 물고기 한 마리를 거꾸로 잡고 승민이부터 칼질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배를 가르려 애써 보지만 생각처럼 쉽게 되질 않는다. 배에 작은 상처만 남기고 이내 포기하고 만다. 보다 못한 내가 칼을 잡고 붕어의 배를 가르고 속을 꺼내었다. 피가 흐르고 내장이 나오자, 얘들의 괴성에 귀청이 따갑다.
부레를 꺼내어 물고기가 위로 올라올 때와 아래로 내려갈 때의 공기 부풀린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데, 주연이가 “선생님! 승민이가 울어요.”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민이가 옆 나무 아래 혼자 웅크리고 흘쩍거리고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물고기가 죽자 슬퍼서 울고 있지 안는가?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울먹이듯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했다. 유난히 정이 많은 민정이가 “선생님 이 물고기 묻어 주어요......”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자 모두가 그러자고 박수를 친다.
백엽상 옆에 나뭇가지로 작은 구덩이를 파고 물고기를 종이에 감싸 정성스레 묻고, 예쁘게 돌로 단장까지 해 준다. 다 같이 하늘나라에 가라며 무덤을 감싸고 앉아 두 손 모으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말을 않고 서 있었다.
작은 민물의 죽음에도 이토록 마음 아파하면서 애통해하는 천사의 모습을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좋으련만. 구호로만 그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 입으로만 교육을 얘기하는 위정자들보다 눈물이 날 정도로 너희들이 장하고 자랑스럽다. 작은 사랑이 타인을 위한 실천이고 배려임을 감안 한다면 나는 아직 그에 대한 사랑을 시도도 못한 것이 아닐까? 묵상이 없는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 나를 아이들이 일깨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때론 교육이란 이름으로 족쇄를 채우려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이참에 나의 못남도 털어 내어 본다.
2시간을 계획하고 시작한 수업이 아직도 10분이나 남아서, 아이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모두 자리에 머리를 맞대고 원을 그리고 누워서 솜털처럼 하얀 뭉게구름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에는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조잘대며 한참을 보고 있던 성주가 갑자기 “선생님 저기 저 구름 물고기 같지 않아요?” 하며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모두가 “어디? 어디?” 하면서 성주의 손가락을 따라 물고기 형상을 찾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손끝에는 정말로 좀 전에 죽은 물고기가 파란 하늘에서 자맥질하고 있었다. 강이 좁아서 하늘로 간 물고기. 배를 가른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미끄러지듯 그름 속으로 몸을 숨긴다.
이처럼 자연은 다시 푸르름을 이어가고 이 어린 얘들도 자연을 닮아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고 있다. 나 또한 작고 단순한 일상에 무료함을 갖지만, 오월의 미풍을 위안 삼아 오늘에 충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2. 방구석 피아니스트 김형윤
1.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마음은 잿빛 하늘처럼 우중충하다. 매사에 의욕도 줄어들었다. 그나마 책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2. 아들이 장성해서 집을 떠난 빈 방은 내차지가 되었다. 책을 보다가 문득 한쪽 벽면에 붙어있는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어릴 때 큰맘 먹고 산 것이지만, 이제는 치는 사람이 없어 뚜껑이 항상 닫혀있었다. 무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아노 건반을 눌러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살짝 눌러보니 여전히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를 다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피아노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수업이 끝난 뒤 복도를 뛰어다니다가 문이 열려 있는 음악실에 살그머니 들어갔다. 음악실을 점령한 도도한 녀석이 있었다. 처음 보는 까만 피아노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얀 이를 가지런히 내밀고 있어 얼핏 유쾌할 것 같지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녀석과 사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4. 짝꿍이었던 영희는 건반을 톡톡 잘도 눌러댔다. 경쾌하게 움직이는 작은 손가락 끝에서 예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시는 피아노를 구경하기도 힘들었을 때였는데 영희는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나도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내 말이면 뭐든 들어주시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셨다.
5. 할 수 없이 달력 종이 뒷면에 자를 대고 건반을 그렸다. 영희가 알려준 대로 계이름을 부르면서 더듬더듬 종이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를 친다는 설렘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동생들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하고, 방바닥에 혼자 앉아 침을 튀기며 연습하던 것도 차츰 시들해졌다. 먹통 피아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바람기처럼 미련이 남아 한동안 음악실 주변을 서성거렸다.
6. 피아노는 내가 정복하지 못한 거대한 산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큼 멋진 일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가 한없이 부러웠다. 영희가 치는 ‘소녀의 기도’를 들으면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음악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7. 언젠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현실은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지만, 정작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간절했던 꿈도 고된 생활에 닳고 홈이 파이고 희미해지더니 슬그머니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늘 바쁘게 동동거리며 사는 내게는 바로 옆에 있는 피아노가 십 리보다 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나마 아들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이 내 꿈의 결실이었을까.
8. 코로나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꿈과 다시 만났다. 뽀얗게 묻은 먼지를 털고 서랍 속에 갇혔던 꿈을 꺼냈다. 이순이 넘은 나이에 시작하는 피아노 연습이 어설펐지만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일단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으니 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꾸준함만 있다면 특별한 레슨을 받지 않아도 악보를 보면서 혼자 연습할 수 있었다.
9. 요즘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내 마음속 우울을 걷어내고 고운 주단을 깔아놓는다. 처음에 어렵게 느껴지는 곡들도 반복해서 연습하면 놀랍게도 멋진 음악이 되었다. 피아노는 어느새 내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새 친구가 되었다. 피아노와 대화를 나누며, 날마다 새로운 경험 속으로 스며들었다.
10. 집안에서 혼자 즐기는 나를 스스로 '방구석 피아니스트'라고 명명하였다. 아직은 과분한 호칭이지만, 혹시라도 이루어질지 모르는 미래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손가락 사이로 싱싱한 물고기 떼들이 물 위를 튀어 오르듯 경이로운 음들이 펼쳐졌다. 나 혼자 신나서 노래를 불렀다.
11.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어머니가 즐겨 부르셨던 노래를 쳐본다. 생전에 어머니는 자식들이 공부하는 것을 대견해하면서도 뒷바라지를 다 못했던 것을 애달프게 생각하셨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는 다 잊어버린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흘리셨다. 쌀을 살 돈도 없는데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철딱서니 없는 딸을 야단치지 않으셨다. 아이의 기를 꺾을까 봐 안 된다는 말을 삼켰던 가난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피아노를 치는 손이 느려지고 눈가가 흐려진다.
12. 추억 속에서 나는 먼 옛날 단발머리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 짧은 치마를 나풀거리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멀리서 달려온다. 마당에 서 있는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가슴이 화롯불처럼 다시 훈훈해졌다.
13. 뒤늦게 피아노 치는 재미에 빠져 남편이 산책하러 나가자고 해도 따라나서지 않는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소곤소곤 할 말이 많아진다. 그럴 때 코로나는 언제나 저만큼 물러나
3. 황혼육아/남병웅
1. 며칠사이 #이상기온인 듯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더니만 사무실 앞 화단에 있는 산수유 나무에 노오란 꽃이 피었다.
나무 한 쪽에는 아직도 철 지난 빨간 열매가 그대로 달여 있는데도 말이다.
포근한 날씨에 일찍 피기 시작한 산수유 꽃과 철 지나고도 달려있는 산수유 열매가 공존 하고 있는 것이다.
2. 붉은 열매가 조금 시들기는 했지만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도 얼지 않고 아직 그대로 달려 있는걸 보니 생명력이 강한 것 같다.
문득 산수유 열매가 장수 식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두산백과에 10월 중순 상강 이후에 수확하는데, 단맛과 함께 떫고 강한 신맛이 나며, 육질과 씨앗을 분리하여 육질은 술과 차 및 한약재로 사용한다고 되어있다.
산수유열매는 옛날부터 신선이 먹는 열매라고 하여 귀하게 여겼으며, 신장기능 강화와 갱년기 증상, 당뇨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4. 해가 바뀌어 노란 꽃이 다시 피어나니 같은 나무에 봄 꽃과 철 지난 열매가 공존하면서 꽃만 보거나 열매를 볼 때 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것 같아서 잠시 구경하다가 폰에 담아 본다.
5. 본격적인 봄이 되어 노오란 꽃이 활짝 피고 잎이 무성해지면 열매는 저절로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겠지.
6. 새싹이 움 트듯 갓 피어나는 꽃과 이미 철 지난 열매가 공존하고 있는 산수유 나무를 보면서, 문득 우리네 인생사에서 마치 노인과 아이가 한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7. 나이가 들어서 맞벌이 아들 내외를 위하여 손녀 둘을 돌보며 소위 말하는 황혼 육아를 하고 있는 우리집의 경우도 생각이 난다. 나는 아직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손녀들 육아를 같이 하지 못하고 있다. 혼자서 몇 년째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아내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8. 다행히 아내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들을 곁에서 돌봐줄 수 있어서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쁘게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 손녀들을 보면서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고 하니, 아내의 수고에 더욱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9. 이미 우리나라도 2017년도부터 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 노인인구가 많아지면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생산인구 감소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육아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10. 요즘은 핵가족 시대라서, 자녀들이 자라면 당연히 분가해서 따로 살게 된다. 맞벌이 가정의 육아문제는 심각하다. 육아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노후에 자신의 인생을 위해 자유롭고 즐겁게 보내기를 추구하는 젊은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요즘은 혼자 벌어서는 육아비용을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다고들 한다. 직접 육아를 할 수 없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 육아도우미를 쓰게 되면 육아비용 또한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다. 이는 곧 출산율 저하로까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1. 우리가 어렸을때는 대부분 3대가 모여 살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 시절에는 조손이 같이 살지 않더라도 방학이면 으례히 외가 든 친가 든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가서 지내다 오는 것이 통과의례 처럼 당연시 되었다.
12. 어느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혼과 만혼이 증가하고, 저출산과 인구감소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황혼육아는 나름 그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한다고 본다.
13. 물론 시대가 바뀌어서 과거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손주들 육아를 하면서 조손이 함께 정답게 살아가는 그런 집이 많아진다면 육아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다.
14. 철이 지난 빨간 열매와 새로 피어나는 노란 꽃이 같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산수유 나무를 보면서 조손이 함께 지내는 황혼육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15. 노오란 산수유 꽃이 활짝 만개 하여 아름다운 봄처럼 ~
집집마다 조손이 어울려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정겨운 세상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4. 규방공예 / 박송애
1.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2. 19세기 보자기의 미에 빠져 몇 년 전부터 규방 공예를 배우고 싶었다. 어느 날 문화강좌 안내 전단지가 들어왔는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규방공예 소품들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거다.
3.첫날은 바늘에 실을 꿰어 매듭짓는 방법부터 끝맺기, 매듭 숨기기, 감침질을 배웠다. 퀼트가 주로 화학 섬유에 홈질을 한다면 규방공예는 천연섬유에 감칠질 기법이 주로 쓰인다.
4. 바늘과 실, 자, 바늘꽂이, 천을 마름질하는 판, 쵸크, 다리미가 일부분이 되어 내방 구석에 항시 앉아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화로나 인두가 없어진 자리에 스팀 다리미가 편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 규중칠우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저들도 쟁론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하나라도 없으면 일이 아니 되니 소중하기는 다 똑같다.
5.모시는 풀에서 채취하여 천연염색의 과정을 거쳐 우아하고 깊은 색감을 주었다. 까칠까칠한 촉감과 올이 그대로 보여 청아하고 섬세함과, 단아한 멋이 있다. 더러 올이 빠진 천은 팍팍 하게 살아가면서 조금 비껴가는 여백의 삶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들었다. 모시는 천이 빳빳하여 박음선을 접으면 말을 잘 듣는데 잘못하여 다시 펴려면 애를 먹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름질을 잘하여야 한다.
6.마름질을 하고 바느질을 시작하면 처음엔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바늘 쥔 손에 땀이 배어난다. 등에도 진땀이 나는가 하면 눈앞이 아른아른 보이질 않고 몇 분이 흐르면 그나마 감이 잡혀 온다. 바느질은 1미리 간격으로 감침질을 하는 데 높이는 0.5미리로 올 한올 한올 뜨는 기분으로 섬세하게 해야 한다. 처음엔 모두 손이 굼뜨고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너무 당기거나 느슨하거나 간격이 너무 촘촘해서 어설퍼 보였다. 바늘땀은 간격이 일정해야 마무리 하고 나면 솜씨가 보인다. 감칠질이 워낙 쉬운 기법이라 솜씨들이 저마다 부쩍 늘어나 남의 것에 평도 해주고 서로 칭찬과 지적을 해주다 보면 수업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린다.
7.집에 오면 주로 마무리를 하는 데 뭘 잡으면 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돋보기 쓴 할머니 마냥 잔뜩 옹크리고 앉아 있다 보면 등이 당기고 목이 뻐근하고 손이 저리기 까지 한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해야지 하는 마음과는 달리 잡으면 손을 놓지 못하니 이것도 큰 병인 것 같다.
8.처녀작품은 천의 결대로 재단한 탓에 약간 삐뚜룩하니 모양이 어긋났지만 첫 작품이라 그런지 제일 정이 가고 자주 들여 보게 된다. 모시 향 주머니는 앙증맞고 이뻐서 여러 개를 만들어 선물을 주었더니 즐거워하여 주는 마음이 더 컸다. 그 다음엔 다포와, 다완받침, 잔 받침, 찻상보를 만들었다.
9.조각을 이어나가는 바느질법과 테두리 두르는 모양새, 상침, 귀장식이 들어가니 바느질 법도 다양해지고 모양도 점점 복잡해지면서 바느질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완성품은 다림질하여 하나하나 간직하는 데 이를 수시로 꺼내보는 즐거움도 크다. 작품이 쌓이는 즐거움 하루하루 살아가는 낙이라면 큰 낙이다.
10.바느질하면서 문득 정신을 놓거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금방 바느질 땀이 표가 난다.
"아! 바느질도 도를 닦듯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 순간에 땀이 일그러지거나 흉한 모양이 되니 針道 해야겠네"
11.우리 것들이 일본에선 우리보다 더 선풍적인 인기를 차지하니 이도 놀랄 일이다. 일본에선 요즘 퀼트보다 규방공예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는 데 우린 나이 든 사람들이 다시 바늘을 잡는 현실이니 젊은 사람들이 우리 것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요즘 같이 너무 빠른 것만 추구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세태에 우리 것을 찿아 한땀 한땀 바느질하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일인 것 같다.
12.감히 바느질을 침도라 불러 보면서
5. 모습 /이문자
1 십여 년 전 사진 찍는 걸 배우면서 뒷골목을 자주 돌아다녔다. 내가 사는 동네는 물론이고 도심의 뒷골목을 발길 닿는 대로 쏘다니곤 했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들르게 되는 동해안의 작은 어촌인 고향 마을과 낯선 시골의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온종일 셔터를 눌러대기도 했다. 내가 그랬던 건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모든 사진을 자동 모드로 찍어대는 왕초보에게 웬 깊은 뜻이 있었겠는가. 그건 아마 그 무렵 알게 된 프랑스의 풍경 사진가 으젠 앗제(Eug`ene Atget)를 흉내 내느라 그랬던 것 같다.
2 아무튼 사진 찍는 의도와 사진의 작품성 따위와는 무관하게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뒷골목 풍경들이다. 네온사인이 화려한 커다란 간판들로 치장된 도심의 앞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뒷골목의 모습들. 온갖 생활쓰레기들이 여기저기 크고 작은 무더기로 내팽개쳐져 있거나, 취객들이 다급하여 볼 일을 본 탓인지 지린내가 등천을 하거나, 삼켰던 게 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토사물이 질펀하거나, 수리를 필요로 하는 의자 따위가 놓여있기도 했다. 시골의 뒷골목은 도심과는 사뭇 달랐다. 시골은 뒷골목이라기보다는 그저 골목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했다. 골목 양쪽으로 집들이 죽 늘어섰는데, 한 쪽의 집들에게 뒷골목인 곳이 다른 한 쪽의 집들에겐 앞골목이 되기 때문이다.
3 어린 시절 고향 집 뒤쪽에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이라기보다는 담과 집 사이의 좁다란 공간이었다. 거기엔 굴뚝이 있었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이 있었다. 비를 맞으면 안 되는 건 처마 밑 벽에 걸려 있었고, 비를 맞아도 괜찮은 것들은 바닥에 함부로 내던져져 있었다. 담 밑에는 꽃다지 따위의 풀들이 자라기도 했다. 나는 친구들과 그 비좁은 곳에서 가끔 소꿉놀이를 했다. 굴뚝 주변에 부엌살림살이들을 늘어놓고, 꽃다지를 꺾어 찬거리로 삼았다. 때때로 우리는 여자 친구끼리 신랑 각시 역할을 정해서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끔씩 정말로 부부라도 된 양 어른 흉내를 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기억들이 희미하지만, 어떤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한 번은 팬티를 내리고 상대의 은밀한 곳의 냄새를 맡아본 적도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가슴이 인정사정없이 쿵쿵거려 무서워하면서도 끝내 그럴 수 있었던 건, 그 장소가 앞마당이 아니라 뒷마당이어서였을 것이다.
4 도시나 시골마을에 뒷골목이 있고 집에 뒷마당이 있다면, 각각의 개체에겐 뒷모습이 있다. 물론 모든 개체가 다 그런 건 아니다. 돌이나 나무나 빗방울 따위에 뒷모습은 없다. 그렇지만 얼굴을 가진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눈을 가진 것들은 대개 뒷모습이 있다.
5 뒷골목과 뒷마당과 뒷모습의 공통점은 뭘까?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에 대한 학술적이거나 상식적인 지식이 없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건 있다. 그건 바로 자유로움과 무질서와 은밀함과 편안함이다. 이런 것들을 선물하기 위해 신은 사람의 눈을 한 쪽에만 둔 걸까? 사람들이 규정했을 앞과 뒤라는 것의 기준은 도대체 뭘까? 눈일까? 만약 우리의 눈이 하나는 이마에 있고, 다른 하나는 뒤통수에 있다면, 앞과 뒤가 사라질까? 아니면 앞과 뒤가 뒤바뀔까?
6 한없이 번져나는 상상의 실타래를 싹둑 자르고 사람의 뒷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뒷모습. 난 심하게 안장걸음을 걷는다. 왠지도 모르고,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어린 시절 친구들이 다리병신이라고 놀릴 때나,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질 때 확,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나이가 들면서 그 일로 긴장할 때가 점점 더 잦아졌다. 특히 아는 사람이 내 뒤에서 걸을 때는 초긴장 상태가 된다. 걸음에 신경 쓰느라 대화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한다. 요즘은 딸아이 앞에서 걸을 때가 제일 불편하다. 거의 안절부절이다. 억지로 일자로 걸으려고 용을 쓰노라면 이마와 등에 땀이 송송 배날 지경이다. 함께 걸을 때 내가 슬그머니 뒤쳐지는 이유를 딸아이는 알까?
7 나는 이제 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걸을 때 한사코 나를 앞세우는 이유를. 아버진 이십 대에 병을 앓아 한쪽의 갈빗대를 두 개 떼어냈다. 그래서 가뜩이나 짜리몽땅한 몸이 기우뚱하기까지 하다. 간혹, 정말이지 어쩌다가 앞서 걷는 아버지를 뒤에서 보면, 그 자리에서 맴을 돌며 아주 조금씩 나아가는 듯하다. 마치 내가 수영장에서 평영을 첨 배우던 모습 같다.
8 이래저래 내게 있어서 뒷모습은 불편함이고 불안이다. 그리고 쓸쓸함이다. 삼십 년 알고 지내는 옛 직장동기가 얼마 전 갱년기우울증을 심하게 앓는 날 위로하러 온 적이 있다. 긴 치마를 입고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굽이 제법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직도 그런 구두가 신어지니? 난 맨날 운동화를 신는데.”
내 말에 친구는 무심결에 이렇게 대답했다.
“응! 너처럼 이상하게 걷게 될까봐.”
난 굳어진 표정과 한없이 쓸쓸해진 눈을 들킬까봐 모로 돌아섰다. 막 돋아나기 시작한 벚나무 이파리들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친구보다 두어 걸음 뒤쳐져 걸었다.
9 친구보다 두어 걸음 뒤쳐져 걸으면서 무방비상태로 걷고 있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난스레 뒷골목을 쏘다녔던 건 으젠 앗제를 흉내 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이가 들면서 이젠 괜찮다고, 다 괜찮아졌다고 여겨온 내 걸음걸이에 대한 상처가 깊숙한 기억의 창고에서 시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날 위로해주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왔다는 그 친구는 그 순간 그 말을 왜 내게 했을까? 작정한 것도 아닐 텐데 무심결에 말이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혹여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물어보았다면 말을 내뱉은 그 친구는 명확한 이유를 말해 줬을까? 도대체 명확한 이유를 그녀가 알기나 했을까? 어쩌면 그녀 자신도 그녀가 왜 그런 말을 불쑥 내뱉었는지 모를 거란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내 생각은 이렇다. 내가 이전에 그녀의 뒷모습이나 혹은 모습과 관련한 어떤 것에 대해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녀는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어떤 것. 그녀 앞에서 했거나, 그녀 뒤에서 했거나.
10 그날 친구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알게 됐다. 최근에 친구가 다리를 많이 다쳐서 치료받았다는 것을. 아직도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는 것을. 되돌아올 때 난 친구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11 이렇게 하고 보니 뒷골목과 뒷마당과 뒷모습의 공통점이 몇 개 더 떠오른다. 진솔함. 가벼움.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역지사지. 후련함…….
12 갱년기증후군 따위는 싸리빗자루로 싹싹 쓸어 담아 내다버리고, 오래 처박아둔 카메라를 꺼내 들고 다시 뒷골목들을 쏘다녀보려 한다. 예전에 눈살을 찌푸리며 다녔던 그 골목들을 이젠 싱긋거리며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간간이 박장대소하는 내 웃음소리에 골목들이 울컥울컥 멀미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17.5매)
6. 극한 초보/이장희 3
‘면허를 따긴 땄는데…’라는 표현에 웃음이 난다. 병아리 그림이나 ‘초보운전’ 보다 얼마나 상큼하고 애교 넘치는가. 양보에 감사한다느니 아기가 타고 있다는 표현은 구태의연하다. 표현이야 좋든 싫든 초보는 불발탄 같아 피하고 본다. 어느 날 ‘극한 초보’ 패찰을 붙인 차가 서 있기에 마치 나의 삶인 듯하여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2.휙휙 스쳐가는 차량을 살피며 쩔쩔매던 때가 엊그제 같다. 시동을 꺼트리는가 하면 야무지게 주차하려다 전봇대를 박은 적도 있다. 남의 차에 긁혀 보상받고 돌아서서 다른 차를 스쳐 물어줘야 했을 때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짐칸 문 닫는 소리를 옆 좌석 승차로 오인 출발하여 아내를 다치게 한 실수는 두고두고 자책한다.
3.초보라는 이실직고는 정직한 자기고백이며 하소연이 아닐까. 서툴기 때문에 양해를 바라는 방어수단이며 혹시 타인에게 피해주더라도 절대 고의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다. 나 자신 남다른 인생 초보의 길을 달려왔지만 끝나지는 않았다. 코로나19로 대인관계마저 뜸해져서인지 매사가 낯설고 다가올 앞날이 선명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4.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열 살을 갓 넘겨 학교를 쉬어야 했다. 소년 가장 노릇하다 이태 후 6학년에 재입학했을 때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라더니, 실력이 밑바닥 수준이라 여러 분단 중 맨 끝 분단 앞줄에 앉았다. 기초학력을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지만 노력 끝에 첫 분단 앞 좌석에 앉던 감격을 잊지 못한다. 틈틈이 만화책을 따라 그리며 중학교 때 수채화를 익힌 것은 덤이자 도전이었다.
5.고졸 후 취직해 밥은 굶지 않겠다 싶을 때 군대 영장이 나왔다. 훈련병 시절엔 어릴 때 배곯은 이력과 근시안이 고생을 부풀렸다. 누더기 훈련복에 뛰고 달리는 게 힘에 부대꼈다. 과녁을 향한 정조준이 빗나가기 일쑤라 쪼그려 앉은 자세로 산을 오르는 벌칙을 감내해야 했다. 그것도 철모 위에 M1 총을 거꾸로 세워 들고서였다. 혹시 꾸물대다가는 몽둥이세례가 이어졌다.
6.불혹에 도전한 대학 입학, 지천명을 지난 대학원 공부가 힘들었던 것도 전공보다는 교양과목 탓이었다. 기초가 부족한데다 그조차 까맣게 지워졌기 때문이다. 남들 즐기는 바둑이나 당구, 낚시를 모르고 산 것도 뒤늦은 공부 때문이다. 하모니카나 트럼펫 연주하는 친구들이 요즘도 부럽다.
7.아내는 온 시내를 누벼 살 집을 찾아 나섰고 살림을 일으키려 구멍가게도 했다. 아들 둘을 업고 걸리며 고생해 집을 사고 혹은 짓기도 했지만 살림에 문외한인 나는 거들기에도 초보였다. 하필이면 손 없는 날 이사한다 하면 근무일이거나 출장, 연수와 맞물려 아내가 도맡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8.마당에 텃밭을 가꾸거나, 빈터에 나무를 심어도 난 그저 선머슴처럼 시키는 일만 한 것 같다. 집을 지어도 어떤 구조로 설계할지 완공 후 무슨 가구를 들여놓을지 아내의 안목을 따를 뿐이었다. 색깔이나 디자인을 어찌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이나 하면 다행이었다. 건물관리나 청소도 아내가 맡기면 거들긴 했 그것도 퇴직 전후 몇 년에 불과했다.
9.직장에서는 나름 중책을 맡았고 등급 높은 정부포상도 받았지만 은퇴 후 생활은 초보나 다름없었다. 직장 일을 성실히 수행했으니 가사도우미도 쉬울 줄 알았다. 십 년이 덧없이 흐른 지금까지 아내의 눈높이에서 보면 만년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제자리걸음 한 게 아닌가 싶다.
10.그뿐이랴, 엄벙덤벙 하기까지 한다. 얼마 전, 아들이 출장 오며 내 차를 써야 한다 해서 도착시간에 맞춰 역으로 갈 때가 그랬다. 핸드폰을 깜빡하고 출발하여 아차! 싶었으나 갖고 오기엔 너무 와버렸다. 지금은 주차장을 익혔지만 그때는 세울 곳이 마땅찮.아 역 부근을 맴돌다 땀이 바짝바짝 났다. 아들은 도착해 지금쯤 아비를 찾고 있을 텐데 낭패다. 일단 백화점 지하주차장에 세우고 생면부지의 행인을 붙잡았다. ‘핸드폰 좀’하며 통사정했음은 물론, 아들에게도 이해를 구해야 했다. 고생을 사서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다.
11.전자제품만 해도 디지털 시대에 대처해 잘 적응해왔다고 믿었다. 제때에 업데이트했기에 컴퓨터나 내비게이션, 블랙박스도 친구처럼 편했다. 그런데 요즘 낯선 말썽들이 나를 옥죄어 온다. 아들 집에선 핸드폰 충전이 안 되더니만 은행에서는 인증서 비밀번호 외에 인증번호를 또 더 넣으라는 둥 컴맹인지 확인하는 것 같다. 깨알 같은 제품설명서 글씨, 첨단 작동 시스템에 미숙해 두 손들 때가 있다. 급변하는 모바일 시대에 대처하지 못해 젊은이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두려워진다.
12.새내기 때에는 불법이나 비위를 저질러도 이해될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인지 정도가 심해서인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노련한 경력자들이 욕망을 채우다 물의를 빚는 일이 잦은 요즘이다. 매스컴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정치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들의 말실수를 꼬투리 잡는다. 인생 극한 초보 과정을 거친 내 눈에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차라리 정치 초보라면 밉상이 덜할까 싶기까지 하니 씁쓸해진다.(12.5매)
7. 그녀의 스타일/차갑희
1. 3월의 끝자락은 날씨가 변덕스럽다. 아침저녁으로는 두텁게, 낮 시간대는 가벼운 봄옷 차림으로 꾸며야 낭패가 없다. 환절기에 찾아오는 계절병을 단도리 하려는 사람들의 매무새는 무거워 보였다.
3.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버스 승강장에 엉덩이를 걸쳤다. 내가 탈 북구 3번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코로나 시국 집에만 있는 생활을 해 오다가 접하는 역 앞의 정경들이 반갑다.
4. 기차역을 스치는 대다수 여행객은 말끔한 정장 차림이다. 긴 봄 가뭄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산을 손에 쥔 웨더 코트의 여인이 눈에 뜨인다. 질끈 한 가닥으로 묶은 긴 머리에다 앞창이 넓은 야구 모자까지 눌러 썼다. 등에는 작은 배낭 하나 달려 있다. 책을 펼쳐 들었지만, 자꾸만 곁눈질 하게 된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옷차림새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5. 오 남매의 넷째인 나는 세 살 터울인 언니의 옷을 자주 물려받았다. 명절이 몇 번 지나갔지만 정작 새것을 입은 기억조차 없다. 사회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을 때야 엄마는 나만의 옷을 마련해 주었다. 친구들은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선택한 개인 취향에 맞는 의상으로 젊음을 표출하고 다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물려 입기는 여전하였다.
6. 결혼하고 첫 생일이 되었다. 시어머님께선 당신이 손수 원피스를 만들어 막내며느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겐 새 옷보다 만들어 입힌 옷가지 수가 훨씬 많았다. 대가족 생활 속에서 외출은 눈치가 보이기 마련이었다. 모처럼 둘만의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는 날이었다, 시집살이의 보상을 해 주려는 그이가 선물을 해준다고 했다.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지난 날이었다. 좋아하는 것, 나에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머뭇거리면서 어영부영 따라다니기만 하는 그 사람은 대뜸 화부터 내었다. 그날의 데이트는 엉망이 되어 귀가를 서둘렀다. 이후 남편은 살아오면서 나의 코디네이터가 되기로 작정한 듯 매사 간섭하였다.
7. 위, 아래검정 옷을 입은 묶음 머리의 여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보행이 불편해 보이는 늙수그레한 남자와 간간이 대화를 나눈다. 서너 대의 버스가 정차 후 사라졌다. 허둥지둥거리는 남자가 불안해 보인다. 옷 속 깊은 곳에서 서툴게 꺼낸 전화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성급한 마음이 들어 대신 전화기를 받아쥐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대변해 주는 사이 내가 탈 버스는 지나가 버렸다, 두어 정거장을 지났던 여인이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근한 내 이웃처럼 살갑다. 눈빛이 맑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의 모습이 부럽고 사랑스럽다. 앞으론 옆지기 손 꼭 잡고 다니시라고 웃으면서 전하니
“건강하세요!”라며 진심 어린 인사를 대신한다.
8. 가끔 주위에선 멀쩡하게 입다가 싫증 난 옷을 더러 가지고 온다. 적절한 시기에 나에게 와서 안성맞춤까지 이루어진다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옷은 옷장에 머문 어느 것보다 정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잠자고 있는 것일지라도 상대에게 유용하다면 선뜻 내어 줌에 아깝지 않다.
9. 외출하는 날, 새로 장만한 원피스가 눈에 띄인다. 차려 입는다는 부담감이 앞서 대충 편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요즘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모습의 ‘꾸안꾸’가 유행이다. 그 또한 어느 정도 미적 감각을 소유해야만 꾸안꾸 패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외국의 어느 유명한 ceo는 똑같은 의상의 수백 벌을 장만해서 번갈아 입는다고 한다. 공항 패션의 단어가 나온 지 오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에게 가장 편한 옷차림으로 오른 여행길이 최고의 공항 패션이 아닐까 싶다. 새것보다 입던 것에 더 매력을 가지고 있는 내 스타일은 어떤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골목길의 벚꽃은 팝콘처럼 몽실몽실 피어 오른다.
8. 친정엄마가 쓰는 책 /허명순
1.“말도마라. 내가 살아 온 거 책으로 쓰면 열권은 넘는다.”
엉덩이만 땅에 대면 엄마는 생애사를 입으로 쓴다. 한평생, 가슴에 멍울진 말이 저렇게 많을까 싶다가도 이제는 좀 안쓰럽다.
2. 엄마는 열다섯 살 평양소녀였다. 1.4후퇴 때, 개미 떼와도 같은 피난민들 틈에 끼여 우여곡절을 겪고 수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느 군부대 근처였다. 외할머니는 천금 같은 오남매를 데리고 한옥 집 문간방에 세 들었다. 다행히 집 앞 공터를 이용해 좌판을 펼 수 있었다. 낙타 담배 다섯 갑과 껌이며 사탕, 잡화 몇 가지가 전부인 장사 시작으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만하고 목숨을 부지해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3. 자식이 무얼까. 외할머니는 두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3년씩 늦게 태어난 걸로 호적에 올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운 좋게 두 아들은 피난민이 운영하던 일터에서 급사로 일하고 야간 학교를 다니며 성장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노점상을 하는 외할머니를 도우며 부업을 받았다. 앙고라 털실로 뜨는 애기 옷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삯 뜨개질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야무진 손끝이라 해도 그 수입과 좌판에서 나오는 하루 벌이로 여섯 식구가 먹고 살아내기란 턱없이 모자랐다.
4. 엄마 나이 열아홉 되던 해, 중매쟁이가 다녀갔다. 취사병을 도와 밥 짓는 일을 하던 친척이 입하나 덜도록 주라는 말만 던지고 떠난 뒤, 외할머니는 잠자리에서 속삭일 듯 말 듯 딸에게 말을 꺼냈다,
“신랑감이 개성 사람이고, 인물이 훤칠하며 믿는 사람이라 하네. 그이 말로는 일등 신랑감이란다.”
군대 식당에서 배식 때마다 보던 그 청년이 친척의 눈에는 야무져보였던 모양이다. 어른들이 내세운 구실에 어리석게도 등 떠밀리다시피 엄마는 철없이 신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5. 당신은 오늘도 말로 책을 쓴다.
“개성 사람이고 믿는 사람이라 하더니, 네 아버지는 어찌 그리 거짓부렁을 했는지 영감쟁이 만나기만 해봐라.”
이미 세상을 버린 지 가물가물한 아버지를 또 타박한다. 농사일밖에 모르던 엄한 아버지와 엄마의 언쟁은 대감추위도 울고 갈 정도로 혹독한 나날이었다.
6. 김장배추 값이 폭락하던 어느 해, 그것조차 엄마를 탓하고 패대기치며 아예 밭뙈기를 갈아엎어버릴 정도의 아버지였다. 엄마의 노동력이 당신 반 눈에도 못 미친다는 욕심은 매번 화를 불러일으켰다. 불같은 아버지의 성품에 시커멓게 타다 남은 속을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던 남편 시집살이였던 모양이다.
7. 엄마는 여전히 책을 말로 쓰고 있다.
“우리가 군인 가족으로 영원히 살 줄 알았지, 그렇게 갑작스레 네 아버지가 제대 할 줄은 상상이나 했겠나. 말도마라.”
수원에서 경산까지 입하나 덜자고 무작정 따라 나서던 그날을 첫 문장으로 다시 쓰기 시작한다.
“네 아버지는 작은집 '양자' 로 되어 있더라. 거기서 재촉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제대하고 왔더니만, 그해 바로 작은할아버지께 아들이 태어났잖니. 그 때문에 우리는 지욱댁이 살던 오두막으로 쫓겨나 눈물에 밥 말아먹던 날들, 말도마라.”
8. 철부지 난 알 리가 없었다. 농촌의 엄마는 새벽부터 지심 매고 해 질 때까지 호미질 해가며 허리가 휘어지도록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이미 먼 나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탓해서 무엇 하랴. 정작 홀로 남겨진 당신 인생 후반을 위한 준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 새끼들이 다 떠나버린 빈 둥지만 어루만지는 것도, 주말이면 하나라도 날아 올 런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을 게다. 당신이 살아온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생의 아쉬움을 속속 게워내는 걸 보면, 그제야 늦은 근심 걷어내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는 듣기가 어려워지자 말과 더 친근해지는 것 같다.
9. 어리석음 이었을까. 나도 엄마를 향한 애틋함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막상 말로 책을 쓰는 당신을 대하니 모녀간에 정이 새롭다. 물설고 낯 선 땅까지 와서 성미 급한 아버지 비위 맞추고 홀로 정 붙이며 자식을 지키느라 무던히도 참고 견뎠으리라. 외롭게 걸어 온 그 길을 이제야 헤아려진다. 가끔씩 엄마가 부르지 않아도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나도 적잖이 세월을 먹었나 보다. 피란길에서 헤어진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또 다른 비극은 없었으면 좋겠다며 엄마는 분단된 그 아픈 상처를 아직도 쥐어뜯는다.
10. 그 시절, 일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을까싶다. 오죽하면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장님 삼년이란 우리 속담이 있었으랴. 그 말은 며느리의 시집살이에만 속한 되는 것만이 아니지 않을까.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 깔린다. 후제, 어떨 값이라도 평양 신리 168번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혼잣말에 엄만 평양행 열차를 기다리는 눈치다.
11. 당신이 손수 끓여놓은 강된장에 호박잎쌈을 그 어떤 퓨전 음식에 비할 수 있겠는가. 입하나 덜자던 그 날이 울컥울컥 밀려드는 날이면, 피란살이의 설움과 허기졌던 시간들을 친정엄마는 어제 일처럼 사계절 내내 입으로 책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