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초분에 드는 길>
초분에 드는 길
청보리 마늘밭 지나 유채꽃 환한 세상
돌담길 북장단에 슬렁슬렁 떠납니다
흰 물결 만장이 되어 너울너울 앞섭니다
물 막은 구들장논 손끝이 다 닳도록
허리 한번 펴지 못한 다랭이 돌아돌아
아리랑 가락에 맞춰 육탈의 길 갑니다
빙 두른 이엉 위에 용마름 가볍게 얹어
이생의 업이야 손 흔들면 그만인 것
잔별이 내리는 그곳 하얀 뼈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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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뱀
- 나의 시조
꽃으로
치장하고
나를 향해 오는 이여
페로몬
향에 감겨
세상이 흔들린다
난 이미
두 눈 멀었네
돌아설 길 아예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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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하는 날
덤으로 주고받던 넉넉한 골목 웃음
공룡마트 올라간 날 굽은 등 숭숭 뚫려
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구멍가게 사장님
금이 간 골목길에 황사바람 일고 간다
시린 뼈 훑어내려 관절을 툭툭 치며
‘폐기물’ 스티커 붙여
길바닥에 나뒹군다
맨살의 시멘트 벽 더듬는 촉수 본다
말없이 달라붙은 담쟁이의 저 안간힘
수많은 잎사귀를 끄는
숨소리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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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오층석탑
천오백 년 저 멀리서 한 점 바람 불어온다
옥개석 모서리엔 잃어버린 풍경소리
속가슴 꽁꽁 싸맨 채 그림자로 서 있다
불바다 휩싸일 땐 석탑도 숨이 멎고
붉은 꽃 떨어지는 벼랑 끝 울음터에
백마강 구드레나루 달빛이 젖어있다
새겨 넣은 적장의 글* 비수로 박혀 있어
머리를 짓찧으며 흩날리는 진눈깨비
백지에 그날을 쓴다
핏물 찍어 다시 쓴다
*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의 글귀를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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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잇! 손들아
명절날 쫄쫄 굶은 귀신들의 성토대회
차례상 받으려고 새벽같이 길 나섰지 그놈들은 더 빨랐어 해외여행 가버렸어 노기등등 김 귀신이 거품 물고 내닫는데. 하늘호텔 찾아 갔던 이 귀신이 땅을 친다 겨우겨우 찾아가서 차린 음식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었더니 아래윗니 와장창, 플라스틱 음식인 줄 내 어찌 알았겠누. 점잖은 박 귀신은 택배음식 잔뜩 먹고 내리 사흘 설사하다 배를 깔고 누웠는데. 인터넷상床 받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정 귀신이 붉으락푸르락 침 튀기며 내닫는다, 똑똑한 그 아비라 어깨 으쓱 치켜들며 휘황한 불빛 아래 PC방 두드렸지 노크는 필요 없고 로그인 하라하네, 고아무개 이름 석 자 더듬더듬 치는 순간 귀신은 자격 없다 뒷발질로 걷어차네. 분통 터진 귀신들 종주먹 휘두르며
에라잇! 흥할 손들아, 자손만대 흥해라!
* 떠도는 유머를 페러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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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우거진 야자수가
적도를 당겨온다
신내림이 저러할까
활강하는 혼불 다발
벼리는
부싯돌의 꿈
가야할 길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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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한 벌
하얼빈 총소리가 어미에게 당도했네
약지를 자른 결의 하늘을 여는구나
목숨을 구걸치마라 수의 한 벌 보낸다
북천의 외로운 길 이 한 벌로 삭히랴만
배내옷 꺼내놓고 한땀한땀 달을 깁는다
바늘이 헛짚는구나, 창살 밝아 오는데
이역의 바람으로 천년을 떠돌아도
뤼순의 풀더미 속 흙으로 돌아가도
북두의 일곱 별이다, 어미의 높은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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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찍다
- 시각장애인 사진전시회
얼굴은 잘렸어도 웃음은 남아 있다
넘어질 듯 비스듬한 빌딩의 저 안간힘
비켜난 무게의 중심 위태로운 생의 찰나
날아가는 파랑새에 초점을 맞추다가
기억으로 셔터 눌러 담아보는 세상 빛깔
디카 속 화면 가득히 살고 있는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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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곰탕
꼬리곰탕 한 그릇을 바닥까지 비우다가
할배는 와 안 드시능교? 배고프다 해놓고는
와 이레 속이 답답하노 먹은 기 얹힜는강
소나 사람이나 한가지 아닌가베
잔등을 긁어주면 꼬리로 날 휘감았제
지금도 동동 뜨고 있는 국물 위의 그 목소리
쟁기질 할라카머 쇠꼬리 보질 말어
밭둑의 바우에다 두 눈을 탁 박아야제
팽팽히 당긴 고삐에 이랴!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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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
바람을 마주하는
그것은 숙명이다
모두 앉아있어도
일어나 가야하는
연어의
시간을 보라
모천 찾아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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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에 관한 보고서
햇병아리 공무원이 보존문서 정리하다
거슬러 넘겨보는 육십 년대 문서다발
‘닭 잡아 접대하오리까?’
붉은 도장 콱 찍힌
미스 킴의 타자소리 잊혀져간 팔십 년대
안주삼아 씹어대는 포장마차 뒤로 하고
현란한 디스코리듬
속도 밸도 다 쏟는다
도스는 징검다리 윈도우로 보는 세상
단 한 번 클릭으로 이천 년을 훌쩍 넘어
노래방 사이키 조명
여윈 손을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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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장날
보소 보소 그기 뭐라꼬! 하나 더 얹어주꾸마
건천장 난전에서 호객하는 고란댁
반시도 엉덩짝 들썩
단물을 뿜어댄다
첨부터 줄끼지 와그라요 할매도 참,
뭐라카노 밀고 땡기는 이 맛에 사는 기라
장바닥 질펀한 웃음
꼬인 매듭 다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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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시간
1
열흘 안에 지고 말 에덴의 꽃밭에서
원죄를 도려내는 꽃따기 한창이다
땅 위에 흩어진 별들, 잔혹사의 시작이다
2
아들의 머리 위에 얹혀진 사과 한 알
화살이 날아간다 영웅의 과녁으로
온 천지 꽃피우기 위해 불길 당긴 저 사내
3
국경 없는 마우스로 클릭하는 애플나라
벌 나비 화면 향해 날갯짓하는 사이
사과꽃 향기 날리며 살랑살랑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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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 서대문형무소에서
먹물로 둘러친 벽 우물보다 깊은 시름
새벽을 고대하며 어둠을 퍼 올린다
겹쌓인 붉은 벽돌 위 달빛만 핼쑥하고
분노보다 짙은 굴욕 왈칵왈칵 토하는 밤
바람도 날개 잃어 추락하는 가지 끝
심박동 뛰는 소리다, 미루나무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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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길
메로 치고 토닥이며 짓이기는 맨발이다
숨구멍 내기까지 무수히 밟아온 길
물레질 둥두렷하게 바람소리 담는다
불인들 뜨거우랴 뼈대 하나 세우는 일
손 없는 날을 받아 서늘한 숨결 돌면
천일염 제 살을 녹여 옹기 가득 단맛이다
금줄 친 한 시절은 가르마도 단정하다
씻고 닦는 젖은 손이 갈라지고 터지는 날
어머니, 파편을 안고 흙의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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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무늬
막으로 둘러싸인 미로 같은 생의 길목
가득 찬 눈물단지 몰캉하게 굳을 즈음
무영등無影燈
샅샅이 비춰
풀어내는 암호문
나무 끝 움을 트는 연초록 기도소리
긴 터널 뒤로하고 햇귀가 눈부시다
실밥이
툭툭 터진 날
꽃무늬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