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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9:1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 "다리오가 왕"된 것은 메대 바사 전국의 왕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바벧론 지역의 왕이란 뜻이다. 전국의 왕은 고레스였고, 다리오는 고레스의 관하에 있었다(E.J. Young).
단 9:2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 "서책"은, 예레미야 예언서를 가리킨다. 이어귀는 예레미야의 서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보여준다.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렘 25:13 참조. 다니엘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거기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여 기도하였다.
단 9:3,4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 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다니엘의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1) "금식" 기도.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기도를 상달케 하기 위한 것이다. 사58:4에 말하기를, "오늘 금식하는 것으로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하려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사야는 금식을 가리켜 "마음을 괴롭게"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도 말하고, 압박 당한 자들의 "결박을 풀어주"기 위한 것으로도 말하였다(사58:6). 요컨대, "금식"은 죄를 원통히 여겨 슬퍼하며 고치며 기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슬픔을 그 욧점으로 가진다. 슬픔에는 감정적(感情的)인 슬픔도 있지만, 의지적(意志的)인 슬픔도 있다. 이것은 금식으로 표현된다. 눈물이 마른 사람들은 금식으로라도 죄악을 슬퍼하는 행위를 가짐이 필요하다.
(2)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맏은 기도. 하나님은 무수한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는, 이 모든 언약들로써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약속하셨다. 이 언약 성취를 누가 볼 수 있는가? 언약 성취를 볼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킴이, 법규만을 지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그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며 기뻐하는 동기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쉬운 일이다.
단 9:6-13
이 부분에는 다니엘의 죄관(罪觀)이 몇 가지로 드러난다.
(1) 남들의 죄악에 대하여 책임지는 데도. 이 부분에 "우리"란 말이 28차례 나온다. 이 말은 귀한 뜻을 가지고 사용되었다. 다니엘은, 유다 민족의 죄악에 대하여 자기의 연대 책임(連帶責任)을 느낀다. 그 민족의 죄악이 바로 자기의 것인듯이, 그는 거듭거듭 "우리"란 말을 사용하면서 죄를 자복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걸머지는 것은 귀하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를 남보다 못하게 여기는 겸손이며, 다른 사람들의 죄책도 부담하는 형제애(兄弟愛)이다. 우리는 남의 짐을 질 줄 알아야 된다(갈 6:2).
(2) 죄의 성격에 대한 바른 인식. 그는 죄악을 가리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라고 한다. 앞에 5절의 "패역", "반역"등은 권위 무시의 행위를 말함이다. 옳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6,10,11,14)다는 것이, 이 뜻이다. 옳은 말을 귀로만 듣고 순종치 않는 것은, 참으로 들음이 아니다. 재앙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던 것이, 역시 그들의 죄악이었다(13절). 이것은,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죄악이다.
(3) 패망을 죄 값이라고 확인(7,8,11,12,13)함. 사람들이 함부로 범죄하면서 그 죄 때문에 망할 것은 깨닫지 못한다.
단 9:17-19
다니엘은 구원의 길이 인간의 어떤 의(義)나 방법에 있지 않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짓되, (1) "주를 위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며(17절), (2) "주의 이름"을 위하여 들어주시기를 원하며(18,19). (3)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을 들어 주시기 원하며(18절), (4) "주 자신을 위하여"들어 주시기를 원한다(19절).
이렇게 기도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자기에게는 구원 받을 공로(功勞)나 의가 전연 없는 줄 알기 때문에 한사코 기도로만 주님께 매달린다. 그는 어떤 희생을 하면서라도 기도할 것이다. 비루마의 선교사 저드슨(Judson)은 말하기를, "어떤 희생을 내서라도 기도를 유지하라"라고 하였다(Make a sacrifice to maintain prayer.).
단 9:21-23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내게 이르더니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 하나님께서는, 참되이 기도하는 자를 이렇게 급속히 도와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23절에,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왔느니라"라고 한다.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곧, 24-27절에 기록된 그 계시(啓示)를 주려고, 그가 왔다는 뜻이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 "위하여"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알이다. 이 말을 "거스려"라고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경우에는, 유다 민족을 거스레 재앙과 같은 무거운 짐이 온다는 의미가 여기 포함된다. 그러나 이 아래 나오는 "칠십 이레"의 계시는, 유다 민족이 당할 어떤 고난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이말은, "관하여"란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 "네 백성"이란 말과 "네 거룩한 성"이란 말 때문에 게이블라인(Gabelein)과 기타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 아래 예언이 육체적 이스라엘에게 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예언이, 우선 육체적 이스라엘에게 관계를 가지지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영적 이스라엘)에게도 관계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 예언의 내용이 메시야의 사역을 진술하기 때문이다(갈 6:16).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 이 문구는, "칠십 이레"의 계시(啓示)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말한다. 곧, 하나님의 백서의 참된 회복을 위하여 일정한 기간이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 70년 시대는 끝날 것이나, 이제 또 하나의 70이란 말로 표시될 놀라운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운, 다니엘이 상상하였던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다. 바로 이 시대에 메시야로 말미암는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업으로 프로그램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칠십 이레"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할 것은, (1) "이레"란 말의 히브리 원어는 "일곱들"(sevens)이란 뜻이며 "칠십"이란 말보다 앞에 있어서 역설체(力說體)를 지니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란 어귀를 자역(字譯)하면 "일곱들, 그것들의 칠십"이란 뜻이다. 여기서 "일곱들"이란 말이 역설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된다.
(2) "칠십 이레"란 말이 "70 주간"이라고 번여고디는 일이 있다. 그러나 주간(週間)을 의미하는 낱말은 보통으로 여성 명사 솨부오드인데, 여기서는 남성 명사솨부임이 사용되어 그저 "일곱들"(7의 복수)이란 의미를 가졌다. 곧, 이 말이 주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말함이 아니고, "일곱들"이란 숫자가 상징하는 성격(신령한 뜻 있는 성격)을 말함이다. 그 신령(神靈)한 뜻에 대하여는, 이 아래 해석을 참조하여라.
그러면, "칠십 이레"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하여는 중요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칠십 이레"의 "이레"란 것이 7 년을 의미한다는 해석(Calvin, Heng stenberg). 세대주의 학자들도 이 해석을 따르며, 영국 개정 표준역도 그렇게 번역했다. 이 해석을 정당시하는 사람들의 논거(論據)는, 다니엘이 본장 초두에 유다 민족의 포로 기간 70 년을 관설하였는데, 여기서도 연수(年數)를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한다(Hengstenberg). 그리고, "이레"라는 것이 희년(禧年)과 관련되었겠으니(레25:1-12), 역시 연수를 생각한 말이라고 한다. 희년이란 것은, 7 년씩 일곱 번 지나서 임하는 것인데 그 때는 모든 부채(負債)도 탕감해주고, 종도 해방시키는 등 모두 속량(贖良)하는 해(年)이다.
(2) "칠십 일곱들"("칠십 이레"란 히브리 원어의 자역)이란 것이 문자적으로 연수를 의미하지 않고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랜지 알 수 없다는 해석.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는 것이다(Keil, Leupold, Young). 이 학설을 지지하는 이유는, 다니엘이, 본장 초두(2절 끝)에 예레미야의 예언중 70 년(렘 25:12)을 관설하고 여기 와서"칠십 이레"를 말하였으나, 그것은 연수를 염두에 두고 대조시킨 말이 아니고, 70년 포로 생활이 의미하는 심판과 앞으로 임할 구속의 축복을 대조시킨 것이다. "칠십 일골들"이란 어귀에 있어서 강조점은, 위에 벌써 관설한 바와 같이 "일곱들"("이레"란 히브리어의 자역)이란 말에 있다. 그 이유는, "일곱들"이란 말이 어순상(語順上)으로 첫머리에 나오기 때문이다(7 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상징함). 다니엘이 이 예언 중에 희년(禧年)을 생각하였을지 모르나, 그가 여기 있는 말씀을 연수적으로 그것(희년)과 병행시킨 것은 아니다. 희년 제도에서 말하는(레 25-26장) 문자적 7 년은, 히브리어로 솨빠드이고, 여기서 말하는 "일곱들"("이레"란 히브리어의 자역)은 솨부임이다. 여기서 가르치는 주요한 뜻은, 신령한 뜻이다. 여기 "일곱들"("이레"란 히브리어의 자역)이란 말 솨부임은, 문자적으로 시일(時日)을 가리키지 않는다. 10:2-3을 보면, "일곱"이란 말이, 시간적 의미를 가질 때에는 그것에 "날들"이라는 히브리어(야밈)가 첨부되어 있으며, 8:14에서도 문자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기 위한 "이천삼백"이란 숫자에 "주야"라는 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 9:24에는 그렇게 시일(時日)을 가리키는 말이 첨부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의 "칠십 일곱들"이라는 것은 신령한 뜻을 가진다. 9 장 본문에 7 수가 7 년을 의미한다는 아무런 내증(內證)도 없다.
근년에 와서 루폴드(Leupold)는, 이 말씀 해석에 있어서 옳은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창조 주간 이후로 7 수는 언제나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는 상징수이다. 70은, 7 수를 10 수는 곱한 것이니, 완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 기간을 비유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칠십 일곱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결정하신 것이다. 곧, 그의 구속(救贖) 사업의 완성을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그 작정은, 그의 완전히 지혜로우신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랠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 이 귀절은, "칠십 이레"기간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사역의 여섯 가지 결과를 표시한다. 이 여섯 가지가 다 "칠십이레"기간 안에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세대주의 학자들의 주장과 반대된다. 그들은 이 여섯 가지가 칠십 이레 후에(천년 왕국 시대에)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위의 여섯 가지를 분류하면, 처음 세가지는 소극적 방면에 속하고, 그 다음 세 가지는 적극적 방면에 속한다.
소극적 방면. --"허물이 마치며". 여기 "마치며"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칼라이니,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 한역과 같이 마친다는 말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제재(制裁)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칼빈(Calvin)과 복음주의 주석가들은, 제재된다는 뜻을 택한다. 제재라는 것은, 가둔다는 뜻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눈 앞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되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 "허물"이란 말은, 매우 강한 말인데 반역을 의미한다. 이것이 관사(冠詞)를 가지고 있는 것인만큼, 그 아래 나오는 두 가지 죄나 또 어떤 사람들의 죄든지 포괄할 총괄적 명칭일 것이다. 이와 같은 죄가 제재되기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립될 것이었다. 이 일은, 세대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천년 왕국 시대에 한해서만 될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실현된다. 그것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여기 "허물"이란 말이 관사를 가지어, 어떤 특수한 계층의 죄악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일반적으로 총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죄가 끝나며". 이것은, 죄악을 치워버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처분하여 버리셨다는 것이다.
"죄악이 영속되며". 여기 "영속"된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키펠이니,"덮는다"는 뜻이다. 덮는다 함은, (1) 그 덮어주는 자가 제사장인 경우엔 그가 어떤 범죄자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과 화목시켜줌을 의미하고, (2) 만일 그 덮어 주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면, 그가 죄인을 용서하심을 의미한다(시 65:3 참조)(Driver).
우리 본문에서는 어떤 경우를 가리키는지 분변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것을 속죄라고 부른다. 사람의 죄가 덮어줌이 될 때는, 그 "죄악"이란 말은, 히브리원어로 아온이니, 불의(不義)로 말미암은 거리낌(有罪感)을 가리킨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제거된다.
위의 세 가지 곧, "허물", "죄", "죄악"은, 인간의 부패성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필요한 술어들이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당한 저주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면, "칠십 이레"의 기간에 하나님의 하실 첫째 일은, 그 백성의 받은 저주를 제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히9:26).
적극적 방면,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여기 "드러난다"는 말은, "가져온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 의(義)가 인간의 주관적(主觀的) 의가 아니고, 자기 밖에서 선물로 받는 "의"인 것을 보여준다. 여기 "의"란 말은 체덱이니, 이 귀절 상반에 벌써 나온 사죄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사죄된 자리에 적극적으로 "의"를 주신다는 뜻이다. 그 "의"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인데(시 85:1-13; 사 51:5-8).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태양과 같이 올라온다(말 4:2). 그 "의"가 "영원"하다고 하였는데, 두 가지 이유로 그러하다(Hengstenberg). 첫째, 그 "의"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서 왔으니 영원하고, 둘째, 그 "의"는 피조물과 달라서 썩지 않는 것이니 영원하다(사 45:17, 51:5-8). "의"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메시야 시대의 특징이다. "의"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하여 거저 주시는 것이다. 렘 33:16에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 하였고, 사 61:3에는, 믿는 자들을 "의의 나무"라 하였고, 사53:11에는 고난 받는 메시야께서 "많은 사람을 의롭게"하리라고 하였다. 위의 모든 말씀들을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면,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이 됨을 예언한 것이다.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여기 "응한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뎀이니,실상 "마친다"고 번역해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이, "참되다고 확신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뜻을 구약이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약 시대가 종결될 때에 성립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일이 재림 때에 된다고 한다(Keil, Kliefoth, Leupold).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 후에도 "이상과 예언"이 계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 "이상과 예언"은, 분명히 구약 시대의 것들을 가리킨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과 예언"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에게 임한 것이다(사 1:1; 암 1:1).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는 예비적이었고 모형적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실것을 가리켰고 그의 오신 다음에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히 1:1-2).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문구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Antiocho-Epiphanes)의 핍박으로 더러워졌던 성전이 후에 재건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난관이 있다. 이 귀절의 모든 다른 부분들이 메시야의 사역을 가리켰는데, 어찌하여 여기서는 그것과 아무 관련 없는 말을 했을까? 매코비 1서 4:14이하를 보면 제단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 기록되었는데, 거기 제단에 기름부었다는 말이 없다(Leupold). 그리고 성전 청결에 대한 요세보(Josephus)의 기록에도 그런 말이 없다. 카일(Keil)과 클리에포드(Kliefoth)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학설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귀절의 다른 부분들이 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가리켰기 때문이다(Leupold, Calvin, Hengstenberg, Young). 여기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무한히 받으실 것을 가리킨다. "기름 부음을 받음"은, 성령받은 것을 상징한다(슥 4:6,14; 사 61:1; 삼상 10:1 이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메시야의 자격에 대한 구약적 표현이다(사 11:2, 42:1, 61:1).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은, 독특하시다(행 10:38; 요 3:34). "지극히 거룩한 자"란 말(* =코데쉬 카다쉼)을 직역(直譯)하면 "거룩한 것의 거룩한 것"인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켰을까 의문된다. 그렇지만 (1) 대상 23:13을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성별하고 "지극히 거룩한 자"(거룩한 것의 거룩한 것)라고 하였다. 이 귀절을 보아서, 이 명칭이 인격에게도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눅 1:35에 그리스도를 "거룩한 자"(거룩한 것)라고 하였고, 신약 다른 부분에서도 그리스도를 가리켜 "거룩한 자"라고 한다(행 3:14, 4:30; 요일 2:20; 계 3:7). (2) 여기 24-27 절 말씀은 메시야(예수 그리스도) 중심한 말씀이다. 훼파된 성전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성전이 생길 사실이, 여기 예언된다(26-27). 유대인들의 죄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은 훼파되고, 하나님도 거기서 떠나셨다. 그와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성전(이것은 그의 豫表)의 완전한 성취로 오실 것이다. 그가 오셔서 낡은 성전 대신에 참된 의미 있는 성전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의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사람들과 교제 하신다. (3) 그리고 이 귀절에 있는 말씀이 모두 다 메시야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러면, "칠십 이레"의 일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Antiocho-Epiphanes)의 시대와도 관계 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천년 왕국과도 상관 없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관계된 일이다. 다니엘은, 기도 응답으로 이렇게 계시를 받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잊어버리시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다. "칠십 이레"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기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메시야의 구속 사업을 목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때까지 맛보지 못한, 보다 큰 구속(救贖)의 프로그램을 보여주신 것이다.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아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 "깨달아 알지니라"란 문구는, 깨닫는다는 말과 안다는 말을 겹친 것으로서 역설체(力說體)이다. 이것은, 이 아래 나오는 예언이 알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도 다니엘서(11:31,12:11)에 대하여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다. 곧,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 24:15)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도 하셨다(마 13:9).
"영"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다발이니, 우리 한역에서는 명령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실상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바사왕에게서 나왔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이란 말이 여기 나왔다(23 절 참조).
이 명령은 언제 내렸을까? 이것이 해석상 문제가 된다.
(1) 이것이, 아닥사스다왕 제 20 년(B.C. 445)에 내린 명령이라고 하는 학설(헹스텐벌키와 세대주의 학자들). 느 2:7-8을 보면, 아닥사스다왕이 느헤미야에게 성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을 쓰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보다 70 년 전에 벌서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는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학2:1-4). 그 뿐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고레스"(바사왕)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리라고 하였으며(사 45:1,13, 44:26-28), 또한 에스라서를 읽어 보면, 느헤미야가 돌아오기 전에 벌써 예루살렘이 중건되어 있었다(스 4:12, 9:9). 이 모든 사실들을 보면, 예루살렘성의 중건은 아닥사스다왕 제 20 년(B.C. 445) 훨씬 전에 중건된 것이 확실하다.
(2) 이 명령이 그레스 원년(B.C. 538)에 내린 것으로 생각하는 학설(Calvin, Kliefoth, Keil, Leupold, Young).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상 중대한 해(年)는 고레스 원년이다. 그런데 1:21에,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란 말씀이 있고, 그가 고레스왕 3 년에 계시(啓示)를 받았다고 하였으니(9:1의 갈대아 왕 다리오 원년은 고레스 원년임) 이상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1:21에는 그가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고레스왕 원년이 바로 유대인의 포로 생활이 끝나는 해이기 때문에, 다니엘이 그 해(年)를 보게 될 것이 놀랍다는 의미뿐이다. 1:21의 "원년까지"란 말은, 다니엘이 "고레스 원년"후에는 바벧론에 있지 않으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유명한 해 곧, "고레스 원년"(B.C. 538)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질서(秩序)가 시작된 해이니만큼, 9:25은 이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해에 유대인들이 고레스의 허락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스1:1-4). 그 해의 일이 이렇게 중대한 것만큼, 성경에 두 번이나 같은 말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대하 36:22-23; 스 1:1-4). 고레스 원년에 내릴 명령을 예레미야도 예언한바 있고(렘 29:10), 이사야도 그리하였다. 사 44:28에는 고레스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리라고 하였고, 45:13에도 그리하였다.
이 귀절(25 절)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곱 이레와 육십 이레" 끝에 온다고 한다. 그러면 문제는, 여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마쉬아크 나기드)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드라이버(Driver)는, 그 문구가 고레스왕을 의미한다고 하였지만, 드라이버(Driver)의 해석은 마땅치 않다. 그 이유는,여기(단 9:25)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학설이 가장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이 아래 해석을 읽으라.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란 말은 특수한 말이다. 이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자"인 동시에 "왕"이라는 의미이니, 그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다(구약 시대에 제사장과 왕은 기름 부음을 받았음).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였고,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세례 받으시고 공중 성역(公衆聖役)을 시작하실 때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Young)은, 이것이 그런 특수한 시점(時點)을 생각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을 일반적으로 가리킨다고 하였다(물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별도로 하고). 이 해석이 옳다. 어쨌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란 말이 그리스도를 의미한 것만은 확실하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귀절은, 그 앞절(24 절)의 뜻을 받아 나오는 것인데, 24절은 명백하게 메시야를 내용으로 한 것이다. 거기에 내포된 구원 축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레스는 사죄와 영원한 의를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2) 24 절 끝에 있는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란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므로, 거기에 직속하는 이 귀절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도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이 문맥상(文脈上) 자연스럽다. (3) "기름 부음을 받은자 곧 왕"은 문맥상으로 보아 신정국(神政國)의 왕이고, 그레스와 같은 이방 왕이 아니다. 이 왕이 아니다. 이 왕은, 26 절에 나오는 "한 왕의 백성"이란 문구에 들어 있는 왕과 대조된다. 하나(25 절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왕")는 영원한 축복을 가져오는 반면에 다른 하나(26 절의 것)는 멸망을 가져온다. (4) 우리는, 25 절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일을 할 자는 역사상에 한 분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만이 죄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의(義)를 가져오신다. 그 분만이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시다. 그 분으로 인해서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실시된다(사 55:3-4, 61:1-3).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 이렇게 시대를 둘로 나눈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시대는,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일곱 이레"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유다 민족이 회복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Young, Hengstenberg, Gabelein). 그러므로 이 시대는, 고레스 원년부터 에스라, 느헤미야의 지도로 말미암아 성전과 예루살렘 중건이 완성될 때까지이다. 이에 따라 "육십 이 이레"가 오는데, 그것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중건을 완성할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이르기까지이다.
"그 때 곤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오 해자가 이룰 것이며"란 말씀은, 여기서 "육십 이 이레"가 지난 뒤에 될 일을 말한 것 같이 번역되었다(우리 韓譯에는). 그러나 이 말씀이 보여주는 일은 실상 "일곱 이레"의 시대에 벌써 이루어질 일이다.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하에서 되어질 일이었다.
"일곱 이레"의 시대를 예루살렘과 성전의 중건 시대로 보는 해석이 당연하다는 이유로,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모세 율법의 희년 제도를 회상하였다. 희년은, 실상 매 49 년 지나서 임하는 것인데(레 25:8, 10), 그 때에 유다의 모든 비참하였졌던 일들이 원상으로 회복되는 법이었다(레 25:13-16). "일곱 이레"는 실상 49 년인데, 그시대를 유대인의 회복 시기로 볼 만하다. 이렇게 희년 제도와 "일곱 이레"는 서로 병행(倂行)된다.
"곤난한 동안"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중건할 때에 당할 모든 방해 운동을 예언한 것이다(느 4:1 이하, 6:1 이하, 9:36-37). "거리"란 말은, 넓은 장소이며 성 안의 지역을 가리키나니 그것은 도시 자체이고, "해자"란 말은, 실상 참호(塹琥)를 의미하는데 도시의 외변 방위선(防衛線)을 가리킨다.
이 귀절은 그 내용으로 보아 다니엘의 기도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그 민족과 예루살렘을 돌보아 주시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9:4-19). 그 결과로 이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그에게 위로의 말씀으로 임한 것이다. 곧, 유다 민족의 포로 생활은 끝나고 예루살렘은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 계시를 받던 때의 유다 민족과 예루살렘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현실에 처하여 있었으므로 회복되거나 중건된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계시 가운데 약속하신 것은, 희년에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성전이 장차 중건되리라는 것이다. 25 절의 내용을 도표(圖表)하면 아래와 같다.
| | | | |
| 영 | | 예 | | 기름 부음을 받
| 이 | | 루 | | 은 자 곧 왕이
| | | 살 | | 일어남
| 내 | | 렘 | |
| 림 | | | |
| | | 중 | | (예수의 초림)
+-+--+ | 건 | |
+----------------------+----+-----------------------+-----------------
| 일 곱 이 레 | | 육 십 이레 |
+----------------------+----+-----------------------+
단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서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 이 귀절에서는 둘째 시대(곧,62 이레) 후에 될 일들을 보여준다. 물론 이 시대는, 예루살렘성이 중건된 때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끊어진 때의 어간이다. 그런데 여기 이 시대 안에서 될 일은 여기 말한바 없고, 이 시대 후에 있을 두 가지 사건을 말한다. 곧, 첫째는 "기름 부음 받은자"의 끊어짐이고, 둘째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이 "육십 이 이레"의 얼마 후에 될는지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27 절을 보면, 그 두 가지 사건이 실질적(實質的)으로 제 "칠십 이레"(69 이레 다음인 마지막 한 이레) 주에 될 일로 알려진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마쉬아크)란 말은, 25 절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과 같은 인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여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끊어져 없어질"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이유는, 끊어진다는 말(이카레드)이 사 53:8에도 메시야에게 사용되었는데, 이는 자연사(自然死)를 가리키지 않고 피살되어 죽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레 7:20에는, 이 말이 사형 받아 죽음을 가리킨다. 이 말은 종종 악인들의 종국(終局)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시 37:9;잠 2:22). 그리스도는, 죄 없이 죄인 취급을 받으셨고 사형까지 받으셨으니 만큼, 이 말씀이 그에게 합당하다.
여기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뿐 아니라, 또한"없어진 것"(에인로)이라고 한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直譯)하면, 이 말은 그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여기서 천사의 의미한 바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진 사실을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천하게 보일 것을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 이 어귀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메시야로서 당연히 받으실 대우를 받지 못하시고 전적으로 배척 당하실 것을 가리킨다.그의 동족들도 그를 버리면서 하는 말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임금이 없나이다" 하였고(요 19:15),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를 버리셨기 때문에 그는 부르짖으시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다(마 27:46). 다시 말하면,그의 죽으시는 때에는 그가 대신하신 자들의 죄 짐 외에는 그에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버림을 당하시고 끊어지셨다. "육십 이 이레" 후에 있을 또 한 가지 사건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인데, 이 사건은 메시야의 끊어진 뒤에 따라 일어날 것이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말해 볼 수 있다. 곧, 메시야께서 끊어진 후에 성읍과 성소가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 "육십 이 이레" 후 얼마 뒤에 될지,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았다. "성읍과 성소" 란 말이 강조되기 위하여 문장 초두에 나온다. 그러면, "성읍과 성소"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하는 다니엘의 기도가 여기서도 응답된 것이다. 천사는 여기서 그것들의 장래에 대하여 말해 주었으니, 곧,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멸망시킬 자는 "장차 한 왕의 백성"이라고 한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은 누구를 가리켰을까?
(1) 자유주의 학자들은 "장차 한 왕"이란 말이 안티오코 에피파네스(Antiocho-Epiphanes)를 가리킨다고 하였다(Montgomery, Prince, Rowley). 이 해석은 성립될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역사상으로 보아 안티오코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완전히 훼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코비 1서 1:31 이하를 보면, 이것이
분명하다.
(2) 카일(Keil)과 루폴드(Leupold)는, "장차 한 왕"이란 말이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들은, "성읍과 성소"란 말이 기독교회를 비유한다고 하며, 장차 적그리스도의 할 일이 이 교회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 "성읍과 성소"를 교회의 상징 뿐으로 생각할 수 없고, 문자 그대로 성읍과 성소일 것이다.
(3) 세대주의 학파는, "장차 한 왕의 백성"이란 문구의 "백성"은 지나간 역사상에 나타난 로마 민족을 가리킨다 하고, 그 민족이 주후 70 년에 이 예언과 같이 예루살렘을 훼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 "장차 한 왕"이란 말만은, 역사상 로마의 군대를 거느렸던 그 당시의 지도자 디도(Titus)가 아니고, 재림 직전에 일어날 재생 로마 제국의 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여러가지 난관을 만난다. 어떻게,"장차 한 왕의 백성"이란 말을 갈라서 "백성"이란 말은 주후 70 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한 로마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고, "장차 한 왕"이란 말은 재림 직전에 올 적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왕과 백성은, 함께 같은 시대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뜻일 것이다. 20 세기의 아이젠하워(Eisenhower)를 18세기의 죠지 워싱톤(George Washington) 군대의 장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랄킨(Larkin)과 기타 세대주의 학자들이, 여기 "장차"란 말을 가지고 위의 해석을 성립시키고자 하나, 무리한 일이다.
곧, "백성"이란 말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한 로마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고,"장차 한 왕"이란 말은 그 때의 왕이 아니고, 그 백성의 시대에서 훨씬 지나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속한 자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 "장차"란 말은, 다니엘의 처지(주전 6 세기)에서 볼 때 장차이고, 주후 70 년 로마 군대의 처지에서 생각될 "장차"는 아니다.
(4) 칼빈(Calvin)과 영(Young)은, "장차 한 왕의 백성"이란 말이, 지나간 역사상 로마 군대와 및 그 지도자 디도(Titus)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26 절 하반에 기록된 "성읍과 성소"의 멸망된 내용이 주후 70 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라고 한 말은 그 멸망이 아주 완전한 것을 보여주는데, 주후 70 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그와 같았다. 그리고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라고 한 말씀을 보아도 그 환난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Antiocho-Epiphanes)의 박해와 같이 일시 지나갈 침략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으로 그 "성읍과 성소"가 아주 멸망할 것을 예언한다. "작정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변하실 수 없는 결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드려다볼 것은, 하나님의 변하실 수 없는 결정으로 그것들이 재건되기도 하였으나(25 절), 그와 동일한 결정에 의하여 이제 그것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내리시는 벌이다(단 9:27, 11:36; 사 10:23, 28:22).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정확히 이루어졌다. 로마 군대가 유다를 침략하였을 때 항전하다가 항복한 사실을, 역사가(歷史家) 요세보(Josephus)가 정확히 기록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때의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계속적인 격렬(激烈)한 항전에 분노하여 유대인들을 아끼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낙심하여 자살한 자도 많았다. 갈릴리에서는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전에 수 천명이 피살되고, 3 만명 종으로 팔렸다. 로마 군대는 1 년 이상의 전쟁으로 예루살렘 외에 유다와 갈릴리의 모든 지방들을 점령하였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질서는 문란해졌으며 유대인들 중에 내란이 일어나 항전파와 평화파로 나뉘었다. 대제사장직은 아주 수치스럽게 무너졌고, 항전파는 암살대를 사용하여 평화파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성전 바깥 뜰에는 피가 넘쳐 흘렀으며, 하루는 8,500구의 시체가 거기 잇었다. 이렇게 내란으로 인하여 죽은 12,000구의 시체는 매장되지도 않은채로 버려두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110만명이 죽었고, 97,000 명이 종으로 팔렸으며, 성전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성읍은 파괴되었다. 기근을 당한 유대인들은 밤중에 식량을 구하러 나가 다니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루에 약 500 명씩 그렇게 죽었다. 십자가 하나에 많은 시체들이 달려 있을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시내에 매장할 수 없어서 그 시체들을 골짜기에 굴려 버렸다. 도망가던 자들 중에는 저축하였던 금을 입에 물고 피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잡히기만 하면 학살을 당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이렇게 고난을 당한 일이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26 절에 기록된 예언은, 주후 70 년에 로마 군대로 말미암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켰다고 생각된다.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 이 귀절은, 남아 있는 "한 이레"라는 시대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란 것이, 그 한 가지 성격이다.
여기 "그가"란 말이 가리킨 인물은 누구인가?
(1) 안티오코 에피파네스(Antiocho-Epiphanes)라는 학설(Montgomery, Driver). 안티오코 에피파네스가 대다수의 예루살렘 사람으로 더불어 언약한 바 있다고 한다(Montgomery). 그러나 역사상으로 보아서 안티오코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과 언약한 일은 없다. 다만 어떤 유대인들이 안티오코 에피파네스에게 제안하기를, 다른 나라들로 더불어 계약하도록 해 달라고 한 일은 있었다. 그 목적은, 그들이 이방 풍속을 수입하기 위함이었는데,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는 그 청원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자신이 언약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방들로 더불어 한 것이었다.
(2) 세대주의 학자들의 해석, 그들은, 여기 "그가"란 말이 재생 로마 제국의 왕 곧, 적그리스도(7장의 "작은 뿔")라고 하였다. 곧, 그가 유대인들로 더불어 마지막 "한 이레"의 초두에 언약하고, 전 삼 년 반이 끝난 뒤에 그 언약을 파기하고 유대인을 핍박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이 학설의 내용을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의 할 일은 아직 미래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26 절에서 될 일과 27 절에서 될 일 사이에 다니엘이 말하지 않은 신약 시대가 끼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공백 시대 혹은 괄호 시대라고 한다. 곧, 구약 예언에 들지 않은 예외(例外)의 시대(신약 교회 시대)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땅위에 다윗의 왕국을 세우려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하였으므로 그 일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따라 구약에 예언되어 있지 않은 교회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유다 민족과 관계 없는 것인만큼, 유다 역사에 대하여는 별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괄호 시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 말하기를, 다니엘은 그 시대에 대하여 침묵하고, 뛰어 넘어가 재생 로마 제국의 임금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역사를 다시 말하기 시작(27 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교회 시대는, 세대주의 학파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때에 생긴 하나님의 예외적 구원 행위의 시대인 것이며, 그 시대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만큼, 마지막 "한 이레"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조만간 재생으로 로마 제국이 일어나 그 나라의 임금이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로 하여금 성전과 예루살렘을 건축하도록 하였다가 전 삼년 반이 끝나면 그 계약을 파기하고 유대인들을 핍박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으로 말미암아 천년 왕국이 팔레스틴을 중심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위의 세대주의 학파의 해석은 합당치 않다. "육십 이 이레" 시대와 마지막 "한 이레" 시대 사이의 공백기는, "칠십 이레" 전체보다 4 배나 길다고 하는 말도 그들은 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없는 사상이다. "육십 이 이레" 시대 후에 26 절의 두 사건이 일어나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후 장구한 세월(신약 시대)을 지내서야 27 절의 사건들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우리 본문에 없다. 26 절에 메시야께서 죽으신다고 하였으니, 그 결과가 바로 은혜 계약의 발효(發效)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한 이레"에 될 일(27 절)은, 26 절의 시대(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 사역 시대)의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멸망의 가증한 것"과 관련되 사건을 예언하셨는데(마 24:15-16), 그 때에 우리 본문 27 절을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 것이다. 그들은 27절 초두의 "그가"란 말이 그 앞절(26절)의 "장차 한 왕"이란 인물을 가리켰다고 하나 억해이다. 26 절에서도 그말("장차 한 왕")이 "백성"이란 말의 부속어(附屬語이고, 주어(主語)가 아닌데, 어떻게 그것이 27 절 초두의 주어가 될 것인가?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킥삘 뻬리드)란 말은, 처음으로 언약을 맺는다는 말이 아니고 재래의 언약이 발효(發效)하도록 함을 의미한다. 언약을 맺는다는 히브리어는, 여기 우리 본문에 있는 것과 달라서, 카라드 빼리드이니, 짜르므로 언약을 맺는다는 말이다(to cut a covenant). 우리 본문의 것은, 분명히 재래의 언약으로 발효케 함을 의미한다(Young, Leupold). 그러므로 세대주의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재생 로마 제국의 임금 곧,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로 더불어 언약을 맺을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3) 27 절의 "그가"란 말이 메시야를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해석은, 우리 본문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란 말의 히브리 원어와 잘 통한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재래의 은혜 계약을 발효시키셨다. 이와 같은 해석은, 우리가 취급하는 24-27 절의 문맥에도 맞는다. 이 장절들은 메시야(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하여 말하고 있다. 곧, 메시야께서 모든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24 절), 메시야께서 일어나신다는 것(25 절), 메시야께서 죽으시고 거기에 따라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26 절)등 모두 다 메시야 중심한 사상이다. 그 뿐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란 말도 메시야와 관련된 성경적 술어이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야 한 분과 그의 많은 백성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사 53:11에 말하기를, 메시야께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고 하였다.
이 세째 해석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은혜 계약을 발효(發效)시키셨다는 것이다.
"언약"(혹은 계약)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처음으로 주셨던 것을 후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순종(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에 의하여 이 은혜 계약을 완전히 발효시키셨다. 이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요서(信徒揭要書) 7 장 3 절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은혜 계약으 발효시키셨는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 시대에 성취되었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오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여기서 "그가"란 말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이레의 절반"이란 말(카치 핫솨부아)은, "이레 중에"(in the midst of seven)라고 번역해야 된다(E.J. Young, The Prophecy of Daniel, pp. 216-217). "제사와 예물을 금지"함은, 그가 자기의 죽으심("끊어져 없어질 것"-26 절 상반)으로 구약의 제사 제도(제사와 예물를 폐지시키셨다는 뜻이다. 그가 자기 몸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으므로 그렇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히 10:8-9이 밝혀준다. 히 7:1, 9:25-26 참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사죄(赦罪)와 영원한 의(義)가 우리에게 부여되엇으므로, 그 때부터 구약의 제사 의식은 무용하게 되어졌으며(히 7:18),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한 점이 될 수 없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의 제사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가중한 일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짐으로 상징되었다(마 27:51; 눅 23:45;히 10:19-20). 칼빈(Calvin)이 말한 것과 같이,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구약의 의식(儀式)을 폐지한다는 것 뿐 아니라,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도록 하는 뜻을 가진다.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란 말을 개역(改譯)하면, "황폐케 하는자가 미운 물건의 날개 위에 있으리라"이다. "미운 물건의 날개"는, 성전 꼭대기를 의미한다. 성전을 "미운 물건"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뒤에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 그것은 우상 숭배와 같이 가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황폐케 하는 자"가 성전 꼭대기에 있다는 뜻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의 장군 디도(Titus)가 성전을 아주 훼파하고 설 것을 가리킨다(Young).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있으니, 여기 "날개" 란 말은, 새의 날개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바(출 19:4; 신 32:11; 시 18:10), 그것은 권세의 상징이다. 그러면 "미운 물건"의 권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사으이 권세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스랍 위에 계신데 대조하여, 황폐케 하는 자 곧, 이방 원수는 우상의 세력을 가지고 온다. 위의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이 말씀은, 주후 70 년에 디도(Titus)의 인솔한 로마 군대가 성전을 훼파할 것을 가리킨다.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이 말씀은, 앞에 나온 문구(황폐케 함에 대한 말)의 결과이다. 26 절 끝에 "작정되었"다는 말이 잇음과 같이, 여기에도 "이미 정한"이란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결정하신 목적을 가리킨다. 여기 "종말까지"란 말도 26 절의 "끝까지"란 말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귀절의 내용은 서로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 곧, 양자(兩者)는, 로마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성전이 훼파될 것을 가리킨다(주후 70 년).
여기 "진노"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 네케라차는 사 10:23, 28:22 에도있다. 이것은 완필 곧, 변동할 수 없이 정한 완전한 멸망을 가리킨다. 특별히 "쏟아지리라"란 말도 역시 완전한 멸망을 암시한다.
"황폐케 하는 자"란 말 쇼멤)은, "황폐케 된 것"이라고 번역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훼파된 성전을 의미한다. 여기 "쏟아지리라"라고 한 것은,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성전에 대한 심판, 또는 자기 백성(유다 민족)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 마지막 문구(27 절 끝)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 물론 그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는 것이다. 카일(Keil)과 루폴드(Leupold)도 이와 같이 해석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유대인을 멸망시킨 자를 심판함이 아니고, 로마 군대로 말미암아 훼파된 성읍과 성전에 대하여 임하는 심판이 저렇게 철저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있는 말씀은, 마지막 "한 이레"의 끝을 가리킴보다도 "육십 이 이레"후에 될 일을 가리켰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죽으심에 뒤따른 사건(성읍과 성소의 멸망)을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에 24-27 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연대적(年代的)으로 맞추려고 힘씀보다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해석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시므로, 우리를 위한 위대한 구원이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서의 중심이다. 본서에 일찌기 기록된 예언들(2:34-35, 7:13-14)도 하늘나라(그리스도의 나라)를 중심하였다. 곧, 바벧론이 망하고 그 뒤에 또 나라들이 일어날 것이지만, 결국 영원한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일찌기 기록된 예언들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 저렇게 대체로만 진술되었다. 그런데 여기 9 장에 와서는, 일찌기 나왔던 왕국론(王國論)(2장, 7장)이 메시야 개인의 구원 사역으로 바뀌어 논술(論述)된다.
2 장과 7 장에 왕국론으로 예언된 구원이, 결국 메시야 개인의 죽으심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인자"(人子)의 나라가 영원하고 무한히 광범하지만, 그것이 성취되기 위하여 그의 죽으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장에서 갈보리의 십자가를 대면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위로이다. 메시야의 속죄의 죽으심(그의 끊어짐)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킨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원한 의(義)를 성취하셨다. (위의 24-27 절에 대한 길고 자세한 해석은 Harvie Conn 목사께서 이 주석에 寄稿하여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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