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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가난한 과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칭찬(누가복음 21:1-4)
이 몇 절의 말씀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두 번이나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교훈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1. 불쌍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이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명하셨고 또한 권장하셨다. 주님은 바로 앞에서 불쌍한 과부들을 착취한 서기관들의 만행에 대하여 말씀하셨다(20장). 이 기사는 아마 서기관들이 처분하던 교회의 기금을 가장 정성껏 바치는 사람은 불쌍한 과부들이었음을 밝히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리라.
2. 예수께서는 우리가 불쌍한 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것을 보고 계시며 자선사업을 위하여 바치는 헌금도 보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전도하시는 일에도 집중하고 계시지만 연보궤에 어떠한 헌금이 들어가는지도 보고 계셨다(1절). 주님은 우리가 충분히 또한 관대한 태도로 우리가 소유한 것에 비례해서 바치고 있는지 또는 몰래 하찮게 바치는지 보고 계신다. 아니 주님은 더 멀리 보신다. 우리가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지 혹은 인색하게 마지못해서 바치는 지도 보신다. 이 사실은 연보할 의무에 우리가 성의가 부족하지 않은지 두려운 생각이 들게 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만한 일쯤은 대단치 않게 여기시겠지 하는 구실로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일은 풍성하게 바치도록 힘써야 할 일이다. 사람들이 아는 것을 문제삼을 것은 없고 주님께서만 아시면 족하다. 주님은 비밀리에 보시고 공공연하게 갚아 주신다.
3.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연보를 특별히 주목하시고 또한 받아 주신다. 바칠 것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많은 헌신을 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 돕고 스스로 빌 수 없는 사람들을 돕고 빌어 줌으로써 의무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가난하면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을 연보궤에 바친 과부가 있다. 별 값어치도 없는 두 렙돈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누구의 것보다도 뛰어난 헌금이라고 칭찬하셨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주님께서는 그녀가 경솔하게 자기 자신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바친다고 책하지 않으시고 또 허영심에서 부자들 틈에 끼어 연보궤에 돈을 넣는다고 나무라지도 않으셨다. 그보다는 그녀의 관대한 마음을 칭찬하시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을 칭찬하셨다. 그녀가 한 일은 자기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한 데서 나온 일이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4. 누가 무엇이라 말하든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존중히 여기고 우리의 능력 아니 능력 밖이라도 기꺼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전도와 복음, 종교의 전파와 선전, 청소년 교육, 수감자들의 위안, 과부와 나그네들을 위하여 또한 빈한한 가정생활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으로 드리면 기꺼이 받으시고 또한 갚아 주실 것이다.
2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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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예언(누가복음 21:5-19)
Ⅰ. 성전의 겉으로 보이는 장엄함과 웅대함을 보고 어떤 사람이 감탄해서 말했다. 주님의 제자 중에도 몇 사람은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가리키며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다"(5절). 성전의 외부는 좋은 돌로 쌓았고, 그 내부는 성전을 위하여 바친 선물들로 아름답고 풍성하게 꾸미고 또는 달아 놓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도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되셨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성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도 멸망되었을 때에 너무도 후회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성전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말해야 하며 그 안에 집행되는 예배,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교통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에 그 장엄함과 수입, 그 교회의 직원들과 치리자의 권위와 권세를 주요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왕녀가 광영스럽지 그의 처소의 화려함에 있지 않은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의 주가 되신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말을 아주 경멸히 여기셨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될 것을 단언하셨다(6절). "너희 보는 이것들이 너희가 그처럼 중하게 여기는 그것들이 때가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하신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그 성전 건물이 애석하게도 허물어질 것이다.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굳센 건물, 아무도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그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이 무너뜨려지자마자 복음의 교회 곧 영적 성적(성전의 실체)이 세상에 번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외적인 영화가 폭파되고 쇠퇴함을 예견했을까. 우리는 외관의 화려함만 보던 그들처럼 임박한 멸망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겠다.
Ⅲ. 주님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어떠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 큰 멸망이 이를 시기를 물어보았을까.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읍니까?"(7절) 우리도 장래의 일을 알고, 우리로서는 알 일이 못되는 일이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우리가 할 의무가 무엇인지 큰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묻기를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하였다. 그들은 그 예언을 확인하고 믿으려고 하여 현재의 징조를 묻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에는 이미 그 징조를 알려 주셨는데) 그들은 예언의 성취가 다가오는 그 장래에 일어날 징조를 물어서 마음에 명심해 두려고 하였던 것이지만, 그 때의 징조는 그들이 명심하도록 이미 가르쳐 주신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분명하고도 완전히 그들의 질문에 답변해 주셨다. 그만하면 그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는데 필요한 지도를 해 주신 것이다. 무슨 지식이나 그것을 실천해야만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있다.
1.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거짓 예언을 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행 9:13 에서처럼) 예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사칭하는 사기꾼은 있었지만 여기에 말하는 뜻은 "예수의 이름으로" 온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야의 명칭과 본성을 사칭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로마로부터 유대 교회와 유대 나라를 구할 해방자인 것처럼 꾸며 그 해방의 날을 점침으로 많은 무리가 그의 마수에 빠져 파산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o]ti evgw, eivmi-즉 내가 그다, 혹은 바로 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말함으로 자신을 마치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전할 수 없는 이름(I am)을 받은 것처럼 꾸며댈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도록 할 욕심으로 "왕국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가 가까웠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는 자만이 그 왕국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것을 대비해 주의할 몇 가지 사항을 알려 주고 있다.
(1)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나 자신이 왕국들의 보좌를 소유하기 위해 외형적인 영광 속에 다시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라.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말라.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진지하고 간구하는 맘으로 "주여 언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하고 물을 때 그리스도의 첫째 대답은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라"였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그 자체로써는 좋은 것이나) 넘어가기 쉬운 위험이 있으므로 그들에 대해 특별한 주의가 요청됨을 명심하라.
(2) "저희를 좇지 말라. 너희는 메시야가 오셨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다른 자를 찾아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그런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말 것이며 그들과 함께 어떤 일도 하지 말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확신한다면, 그리고 그의 교훈이 하나님께 속한 복음임을 확신한다면 다른 그리스도, 다른 복음의 간교한 꾀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2. 나라와 나라가 소란하며 유대인과 그 이웃 나라에 여러 가지 심판의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1) "피로 물들 전쟁이 있을 것이다(10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유대 나라의 일부분이 다른 나라에 대적하여, 혹은 모든 유대 나라가 로마 민족에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아 그들은 로마 권력에 대항하여 무장함으로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케 하신 그 자유를 거부할 때 그들은 "죄된" 방법으로 정치적 자유를 얻으려 멋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투쟁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2) "처처에 큰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을 놀라게 할 뿐 아니라 도시와 성읍들을 파괴시키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묻어버린 것이다.
(3)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이것은 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땅의 열매들을 파괴하고 사람들은 악조건의 기후와 영양실조로 불치의 질병에 걸리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사람들을 벌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누차 강조해 온 심판의 네 가지 유형은 신앙의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반복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대에 와선 영적인 심판이 보다 보편적인 심판이 되었으나 하나님께선 일시적인(세상적인) 심판도 역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4)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구름이나 혜성, 별 등을 통해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나 평범한 것만 보던 자들에겐 겁을 주며 그런 것들은 지금까지 무언가 좋지 못한 것을 암시하거나 징조로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고 있다. 두려워 마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보고 떨지라도 너희는 떨지 마라. 그러한 두려운 광경을 볼지라도 그것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가장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를 보는 자들이다.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마라(렘 10:2). 그리고 기근과 온역에 대해여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라.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기근의 날에도 배부를 것이며 온역으로부터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두려워 하지 마라. 오히려 전쟁의 소식을 들었을 때, 밖에선 싸우고 안에선 두려움에 쌓였을 때, 그 때에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이 모든 심판이 아무리 무섭다하더라도 너를 해치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 그것들을 두려워 마라." 왜냐하면,
[1] "현재 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네 관심이어야 한다. 네가 아무리 걱정한들 사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치료할 방법도 없다. 단지 너희 자신들을 이런 일들에 합당하게 만듬으로 편히 지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2] 그 "뒤엔 더한 것"이었다. 이 모든 고난의 끝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기뻐하지 마라.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은 순서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닥친다." 두려워 마라. "너희가 그처럼 빨리 용기를 잃는다면 어떻게 앞으로 닥칠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겠는가?"
3.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난 "징조"와 "이적"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박해받는 것은 예수가 지금 예언하는 성읍과 성전의 파괴를 예시(豫示)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이 다가올 파멸의 첫 징조가 될 것이다. "이 모든 일 전에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에게 경고하기 전 먼저 너희가 흠 없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어떤 징조를 보게 되면 싱싱한 나무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하물며 마른나무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고 반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벧전 4:17, 18 참조).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박해받는 자의 고난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박해자들의 죄로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내리기 전에 그들은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함으로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울 것이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한 민족의 멸망은 언제나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해의 죄는 다른 죄보다 더 확실하고 고통스런 파멸을 얻게 된다. 이것은 한 민족의 진노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가장 심하게 임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 민족에 대해 가장 심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1)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을 고난을 말하였다. 이는 마태복음 10장에서 그가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이 받을 고난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요지이다. 그들은 박해의 보상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앉아서 값을 세도록" 해야 했다. 현재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지만 제자들 중에 가장 많은 고난을 견디고 겪은 사도 바울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행 9:1)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은 원래 유대인들이었고 아직도 구약과 유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는 여전히 존경하고 있었고 다만 의식에서만 다를 뿐이므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받은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와 같은 것을 기대하지 말 것을 밝혔다. "오히려 그들이 너희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설 것이다."
[1] "그들은 너희를 박해하는데 그들의 종교적 권력을 쓸 것이다. 너희를 회당에 넘겨주며 거기서 욕을 하고 자기들의 종교 파문(破門)할 것이다."
[2] "그들은 너희를 대적하기 위해 정치적인 힘을 빌릴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옥에 넘겨주어 내 이름을 인하여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려니와 그들로부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3] "심지어 너를 아는 자들도 너를 배반할 것이다(16절).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디가 안전한지조차 알 수 없게 되리라."
[4] "너희 신앙이 제일 큰 죄목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피를 흘리기까지 거절해야만 할 것이다. 너희 중 몇은 그들이 죽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가 명예와 부(富)를 기대하지만 결국 죽음, 그것도 가장 무서운 죽음밖에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럴 것이다. 게다가,"
[5] "너희는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이것은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로 여김을 받고 "세상의 미말에 두임"을 받았을 때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고전 4:9, 13).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미워하는) 그들은 악한 자들로 복음의 빛을 입지 못하며 (왜냐하면 복음의 빛은 그들의 악한 행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빛을 입고 얼굴에 넘치는 자들을 미워하며 갈기갈기 찢으려는 자들이다. 변화되기를 싫어하는 악한 세상은 위대한 변혁자 그리스도를 미워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도 미워하였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퍼지면 그들의 외곡된 권세가 종말을 고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복음에 대적하여 갖은 술수를 다 쓰고 백성들의 마음에 그것에 대한 미움을 심어 복음을 전하는 자나 믿는 자들을 배척하게 만들었다.
(2)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떤 박해를 받게 되더라도 이에 굴하지 말고 박해를 견뎌내며 맡겨진 사업을 계속해 나갈 것을 권면 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선 그 자신과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영광을 내려 주실 것이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3절). 너희가 이처럼 나타내어 굳게 서서 여러 사람 앞에서 박해받는 것으로 너희는 도리어 더 알려지게 되고 너희 교훈과 이적이 더 충만해질 것이다. 너희가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는 것으로 도리어 너희에게는 그들에게 설교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런 기회가 아니면 그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그와 같이 괴로운 일을 당하며 가장 악한 생활을 하는 못된 자들에게 미움을 받음으로 도리어 그것이 네가 선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고는 그처럼 악한 자들을 적으로 삼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고통을 받으면서도 용기와 기쁨과 의지를 지니고 있음으로 그것은 네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뒷받침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과 영광이 네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가 된다."
[2] "너희가 시험받을 때, 하나님께선 너희 곁에 계시며, 너희를 보호하시며, 너희를 도우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변호인이며 그가 너희에게 충분한 지시를 하실 것이다(14, 15절). 회당에서나 법정에서 너희를 반박하는 고소, 고발, 변론, 책망과 심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까 연구하지 말고 반대로 복음을 마음속에 두고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며 너희가 무엇을 답하기 전에 저들로 숙고하지 않도록 애쓰라. 너희 자신의 재치와 지혜, 너희 자신의 사색과 지모에 의존하지 말라. 갑자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불신하거나 무시하지 말라.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를 마치 너희 자신의 문제처럼 오직 너희 입장과 처지에서 그저 평범한 하늘의 섭리에 만족하여 쉽게 처리할 생각을 말라. 내가 약속하노니 특별한 하늘의 은총을 내릴 터이니 그것에 의존할 것을 약속하라. 내가 너희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리라. 이 말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지혜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며 "구재를 주는 것"도 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
첫째, "구재"와 "지혜"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 섬기는 일에나 고난받는 일에나 꼭 있어야 할 것들이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아야 할 지혜, 그리고 그 지혜를 가장 효과 있게 말할 수 있는 구재(口才),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일과 말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이다. 마음속에 "새 것과 오래된 것"으로 잘 정돈된 "보고"(寶庫)를 가지고 "말의 문으로 이것들을 펼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변론할 자들은 그들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께 의존해야 한다. 그것으로 그들은 변론해야하며 특히 그의 이름으로 인하여 관리 앞에 불려나갔을 때엔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가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 그들 대신 대답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단지 그들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어 스스로 대답할 수 있게 하여 그들에게 더 큰 영광이 미치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과 은혜를 씀으로 더 큰 영광을 돌리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선 "어린아이와 젖먹는 아이의 입을 통하여 적들과 복수자들의 입을 봉하신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증인들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실 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자신들을 위하여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어 대적하는 자들이 말을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강림 이후 큰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셨으며, 사도들이 대제사장들과 관장들 앞에 불러 나갔을 때에도 이와 같이 대답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하였다(행 4, 5, 6장 참조).
[3] "그들이 이 모든 시련을 너희에게 내릴 것이나 너희는 전혀 상함이 없을 것이다(18절).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그들 중 몇 머리를 잃은 것이라 했으면서 머리털 하나도 상치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상상의 가장 큰 보상과 약에 종종 같은 말이 쓰이고 있다. 어떤 주석자는 이 말의 뜻은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살해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역사가들은 그와 같은 박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다른 주석가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 때문에 죽은 수많은 무리와 연관시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와 같은 의미로 설명한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리라."
첫째, "내가 그 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마 10:30 에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셨다. 그러므로 남김없이 모두 지켜보시며 그가 버리지 않는 한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둘째, "내가 그것을 정성스레 보살피리라." 우리는 좋은 목적으로 주어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경우에 "잃은 것" 혹은 "상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몸을 바칠 때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영광으로 간주한다.
셋째,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수지 계산을 해 볼지라도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현재의 평안 속에 큰 유익을 얻었음을, 특히 영원한 생명을 얻은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잃은 자가 되고 싶어도 결국엔 그 때문에 잃은 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되지도 않을 것이다.
[4] "그러므로 너희가 고난받으며 나라가 고통을 받는 중에 마음의 거룩한 분결과 성실을 지키는 것이 너희의 의무이며 관심이다. 그렇게 함으로 언제나 너희는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1절).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너희의 영혼을 얻는 너희 영혼을 얻고 늘 소유하라." 어떤 주석자는 이것을 약속으로 해석하여, "너희는 너희 영혼을 얻게 될 것이며 얻을 수 있을 것이다"로 풀이한다. 모두 같은 의미로 통한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첫째, 우리 자신의 영혼을 안전하게 얻는 것이 평소의 특히 어려운 시험기간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이며 관심사이다. 영혼이 파괴되거나 영원히 잃게 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영혼을 얻는 것에 방해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현세에서 상실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너희 영혼을 얻으라. 스스로 서는 자들이 되어라. 이성의 권위와 위엄을 지키라. 감정의 무절제를 막으라. 그리하여 슬픔이나 걱정이 너희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며,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말고 자기 만족에 빠지지 말라."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다른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때엔 믿을 만한 것을 확실히 믿고 우리의 영혼을 얻도록 하자.
둘째,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선 인내, 그리스도의 인내가 필요하다. "고난의 때엔 인내로 너희 영혼을 지키는 파숫꾼을 삼으라. 인내로 너희 영혼의 질서를 유지하고, 너희를 흥분시켜 이성을 잃게 할지도 모르는 모든 상념들을 조정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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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예언함(1) (누가복음 21:20-28)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후 38여년 동안에 이루어질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이제 이 모든 일들이 마침내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민족의 완전한 패망, 이런 것들은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는 증거로써 그 날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된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의 같은 내용에서보다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예루살렘에 정신의 근거를 두고 있는 자들에게 예루살렘의 파괴는 곧 그들의 세상의 파괴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Ⅰ. 그들은 예루살렘이 "군대들로 둘러싸이는" 것, 로마 군대들로 포위 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20절). 그리고 이것을 보게 되면 그들은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포위 기간 중에 "종말"이 닥칠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자비를 베푸실 때와 마찬가지로 심판을 내리실 때에도 시작을 하셨으면 끝을 맺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Ⅱ. 이런 징조가 보이면 모두 각자 목숨을 보존하려고 뛰어 다닐 것이다(21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성읍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예루살렘)내에 있는 자들은 성읍이 완전히 봉쇄 당하기 전에,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참호를 파기 전에 나갈지며, 성 밖 촌이나 시골에 있는 자들은 행여나 성내가 안전할까 생각하여 성내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셔서 파멸 당하게 버리신 성읍과 도시를 떠나라. 나의 백성들아, 거기서 나오라."
Ⅲ. 유대 나라에 일어날 참상(22절). "이 날들은 형벌의 날이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처럼 누누히 말했던 악한 백성들이 빠짐없이 벌받을 심판의 날이다. 그들의 모든 예언은 이제 이루어지며 구약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이제야 보상을 받으리라. "기록되든 것이" 남김없이 "이루어지리라." 오랫동안 참고 참았으니 이제는 "형벌의 날"이 올 것이다. 심판 유예는 용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멸망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1. 멸망의 원인. 그것은 "이 백성에 대한 진노," 하나님의 진노이다. 이 진노로 심판의 불이 점화될 것이다.
2. 특히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를 키우고 있는 여자들에게 큰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그들이 남보다 더 겁을 많이 먹고 안전한 곳으로 미처 피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살육자들을 위하여 아이를 배고 키우는 것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3. 모든 나라에 닥칠 혼란. "땅에 큰 환난이" 있으리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길로 가야할지,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Ⅳ. 유대인과 로마인 사이에 벌어질 투쟁이 어떻게 결말지어질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1. 그들 대부분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당시 유대인 전쟁을 통해 유대인들이 110만 이상이 죽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포위는 결과적으로 군사적인 면에서 된 것이었다.
2. 나머지는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갈 것이다. 칼케돈에 정복되었을 때처럼 "한 나라"에 잡혀간다면 서로 단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제는 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방에" 잡혀감으로 그들이 서로 "연락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서로 "협력"하는 일은 더 어렵게 될 것이다.
3. 예루살렘 자체는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나서 그 도시는 "반역과 말썽 많은 도시로 제왕과 통치에 해가 많고" 따라서 자기들을 미워할 것이 자명한 고로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할 놀라운 광경들. 하늘에서는 놀라운 징조들이 "일월 성신"에 일어나겠고, 하늘 아래 세상에서는 "바다와 파도가 우는소리를 내며" 공포의 폭풍과 태풍이 일어나는 데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현상들로 자연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 현상을 파괴하는 것들이다. 이 결과로 "땅에서 민족들이 혼란한 중에 곤고하여" 큰 소란과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25절). 하몬드(Hammond) 박사는 여기서 말하는 "민족들"이란 유대민족의 지역 국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를 의미하며, 이 나라는 이 최후의 곤경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무서워함으로 기절하리니"(26절), avpofuco, ntwn avnqrw,pwn -즉 사람들이 아주 낙담하여, 혼이 빠져, 정신을 잃고, 무서워 죽을 지경이 될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당한 것처럼(롬 8:36), "종일 죽임을 당하게" 된다. 즉 그들은 종일 죽임을 당할 공포로 떨게 된다. 그들이 밟고 있는 곳 아래로 빠져 들어가면서 이 보다 더한 공포가 닥칠 것을 두려워하면서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면"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온 세상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안전할 것인가?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고" 땅의 지주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있는 유대인들의 정부, 종교, 율법들과 사회는 비교할 수 없는 심한 재난이 겉잡을 수 없는 혼란과 함께 닥쳐와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상은 클라크(Clarke) 박사의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께선 이런 것들을 단지 상징적인 표시로만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종말의 때가 오면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엔 "하늘들이 두루마기처럼 걷히고" 그 모든 권능들이 흔들릴 뿐 아니라 무너질 것이며 땅과 "땅 안에 있는 모두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벧후 3:10, 12). 그 날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겐 공포와 파멸의 날이었으므로 믿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겐 더 큰 두려움이 닥칠 것이다.
Ⅵ. "인자의 현현(顯現).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절). 예루살렘의 파괴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한 행위이며 인자에게 맡겨진 심판이었다. 그의 종교는 성전을 파괴하고 레위인들의 제사장직과 정책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세워질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후에 개종한 유대인들은, 수많은 이방인들도 그랬지만 그것을 못 버리고 집착했다가 마침내 멸망 받고 말았다. 따라서 "인자가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은 밝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름 속에" 보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심판을 수행하는 데엔 "구름과 암흑이 그를 둘러싸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이,
1. 메시야의 첫 번째 도래의 "증거"가 되었다.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때서야 믿지 않던 유대인들은 너무 늦었지만 예수가 메시야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은혜의 능력으로 오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가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진노의 권능으로 오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를 자기의 "왕으로 모시지" 않으려는 자들은 결국 그를 자기의 "정보자로 모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그것은 그의 재림의 확실한 전조"가 되었다. "그때에" 그날의 두려움 속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말세의 모든 공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재림의 모형을 볼 것이며 희미하게나마 재림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무서우니 앞으로는 어떨 것인가?
Ⅶ. 그 날의 두려운 사건들에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예루살렘이 에워싸이고,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나 위를 보라. 다른 사람들은 아래를 볼 때 너희는 하늘을 보라. 믿음과 신앙과 기도로 너희 머리를 들어 기쁨과 확신을 가지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1.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 오실 때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박해받고 억압받았던 그리스도를 구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때에 교회들이 쉼을 얻었다."
2. 그가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엔 그의 백성들을 한숨으로부터 "구속"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대한 암시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겐 기쁜 만큼 악하고 경건치 못한 자들에겐 두렵게 느껴진다. 그들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날이 다가오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구속이 가까웠음"을 알고 모든 것을 구속자에게 맡김으로 "기뻐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Ⅷ. 유대 나라의 멸망 외에 이해하기 어려운 예언의 말씀이 또 있다. 24절에서 나온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1.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이미 지나간 것으로 해석한다. 하몬드 박사의 해석이 그렇다.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이방인들은 계속 예루살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아드리안 황제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건된 이후 유대인들은 그 재건 사업에서 제외되었다가 후에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합류하게 되기까지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워 긴 세월을 지켜 나갈 자들은 순전히 이방인들일 것이다.
2.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휘트비(Whitby) 박사가 그렇게 해석한다. 예루살렘은 한 민족 혹은 여러 민족의 이방인들에게 점령당할 것인데 아직 믿음이 없는 민족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얻어 이 세상의 나라들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유대인들도 회개하기까지라고 해석한다. 예루살렘에는 그들이 살게 될 터인즉 이제는 다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나 그들의 성읍이 밟힘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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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예언함(2) (누가복음 21:29-38)
예언의 말씀을 끝맺으시며,
Ⅰ. 그리스도도 제자들에게 때의 징조를 분간하라고 지시하신다. 즉 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 듯이 앞서 한 말씀들을 명심하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 때의 징조들을 분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29-31절). 자연 세계에 원인의 체계가 세워져 있듯 섭리의 세계에도 사건들은 서로 연관지어져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한 민족이 그들의 불의로 가득 채워지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멸망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박해하던 권세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박해하던 권세가 물러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알 수 있다.
봄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하면 계절이 바뀔 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사건들의 연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성소에서 일어서심"을 보면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잠잠히 서서 그의 구원을" 보게 된다.
Ⅱ.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에 대해 "의심하거나 아직 먼 것으로 여기지 말고"(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이런 말씀에 대해 그다지 느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이며 "곧 일어날 것"으로 믿으라고 분부하신다. 유대 민족의 멸망은
1. "곧 일어날 것"이었다(32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지금 살아있는 자 중 그것을 볼 수 있는 자가 있으리라. 지금 이 말을 듣는 자 중에 그 일을 볼 자가 있으리라.
2. "확실한" 것이다. 판결은 번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지출 사항"이었다. 발표는 벌써 되었다(33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천지는 없어질 것이 분명한 일이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내 말을 듣든 안 듣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말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라(삼상 3:19).
Ⅲ.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안일과 방탕한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방종은 다가오는 환난의 때에 그들을 안전하게 해 주지 못하고 환난이 닥치면 두려워 떨게 만들어 준다(34, 35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리하여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멸망을 자초하지 말라." "안일한" 상태에선 안전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조심하고 있어야 하지만 특히 조심할 때인 다음을 고찰해 보자.
1. 우리의 "위험." 죽음과 심판의 날이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에 전혀 "준비도 되 있지 않은 상태에 우리도 모르게 닥치게 되지나 않을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도록 부르심을 들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 언제나 가까이 있어야 할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생각밖에 "멀리" 있는 것이 폭로되지나 않을까, 그것이 "우리에게 덫으로 닥치지나 않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땅 위에서 살면서 세상 것에만 마음을 쓰고" 하늘과 교통하지 않은 모든 인간에겐 이와 같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겐 그것이 "덫이" 될 것이다. 전도서 9장 12절을 참고하라. 그날은 그들에겐 "공포"이며 "멸망"이 될 것이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갇히고 보다 더 무서운 벌을 예비하러 어둠 속에 가두게 될 것이다.
2. 이런 위험에 직면한 우리의 "의무."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마음에 짐이 많아 너무 무거워져서 죽음과 심판을 준비해야 할 마땅한 입장에 부당하고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우리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으려면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1) 육의 욕망에 빠지고 정도 이상으로 감각의 만족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으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무절제한 음식과 술은 마음을 둔하게 하고 아울러 그로 말미암아 죄를 지게 될 뿐 아니라 육체의 무질서로 인하여 정신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우둔하게 만들고 책임을 소홀하게 하여 맡은 일에 무관심하고 질서 없는 행동을 야기한다. 양심을 둔하게 만들고 가장 "민감한" 사물에 대하여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2) 이 세상의 유익한 일을 무절제하게 구하는 것. 마음은 "생활의 염려"로 둔해진다. 전자가 쾌락을 추구하는 자에게 던져진 덫이라면, 이것은 일하려는 자, 즉 "부자가 되려는 자"에게 던져진 덫이다. 우리는 양손을 동시에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살펴 볼 뿐 아니라 "어느 때라도" 우리 마음이 이처럼 둔해져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한다.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보살펴야 한다. 이 둘은 늘 지켜야 한다.
Ⅳ.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마지막 날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으라고 권면한다(36절).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1. 우리의 목적.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포되면 우리는 그 심판의 벌에서 보호함을 받게 되고, 우리는 누구나 당할 재난을 겪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이 당한 재난을 우리는 당하지 않게 되고, 죽음의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이며 지옥의 저주인 죽음의 화살을 피하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피하는 것" 뿐 아니라 "인자 앞에 서게 되도록 목적"을 삼아야 한다. 우리의 심판자이신 그의 앞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날에 자신 있게 설 뿐 아니라(우리가 이 모든 것을 피할 때 이렇게 할 수 있으리라.) "그 앞에 서고," 우리의 주인인 그를 모시고, 항상 그의 보좌 앞에 서서 그의 전에서 밤낮으로 그를 섬기며(계 7:15) 천사처럼 "그의 얼굴을 항상 뵈옵게" 되어야 한다(마 18:10). 그런 성도들은 앞의 20장 35절과 마찬가지로 "능히"(합당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선 그들 가운데 은혜로 선한 일을 이루심으로 이와 같은 행복을 "얻게 하시며" 그들을 향한 은혜의 선한 뜻으로 인하여 그런 행복에 "합당한" 자들로 만드셨다. 그러나 그로티우스(Grotius)가 말한 것같이 우리 자신의 무익함을 깨달을 때 우리가 합당함을 얻게 된다.
2. 이런 목적을 위한 우리의 "행위."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깨어있음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느 4:9). 다가올 진노를 피하고 다가올 기쁨을 얻고자 하는 자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언제나 해야 하며 생명이 끝날 때까지 쉬지 말고 해야 한다. 이유는,
(1)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모든 책임을 다하며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대로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너희 주님의 오심을 바라며 깨어 있으라. 그리하여 그를 맞이할 수 있는 합당한 준비를 갖추고 그를 맞이할 수 있는 합당한 준비를 갖추고 그를 환영하도록 하라."
(2) 하나님과의 교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라. 항상 이 의무를 잊지 말고 행하라. 이를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라. 기도에 충만하라. 어떤 경우에든 기도하라." 이 세상에서 기도의 생활을 한 자들은 다른 세상에서 찬양의 생활을 할 자격이 있는 합당한 자들이 될 것이다.
Ⅴ. 마지막 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영광 중에 입성하신 후 배반당하여 붙잡히신 밤까지 3, 4일 간 어떻게 지내셨는가 보여 주고 있다.
1. 그는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안식일 뿐 아니라 평일에도 가르치셨다. 그는 지칠 줄 모르던 설교가였다. 그는 적대자들의 면전에서, 어떻게 하든 그를 해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리는 무리들 가운데서 설교하셨다.
2. 밤에는 성읍에서 약 1마일 가량 떨어진 올리브 산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쉬셨다. 성안에도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 쉬게 하려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나 그는 저녁엔 성읍의 소란을 떠나 밖으로 나가 자기 때가 가까웠으므로 조용한 준비를 할 시간을 갖고자 하였다.
3. 아침 일찍 그는 다시 성전으로 나와 거기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아침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설교하려고 나가시는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38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를 해하려고 아무리 방해를 놓아도 그들은 창문에 몰려든 비둘기 떼처럼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으로 모여들었다. 때로는 진지하고 솔직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고 얻은 맛과 향기가 재치있고, 학식있는 자, 권위를 세우는 자들의 주장보다 더 가치있고 귀한 것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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