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어긋남을 느꼈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인지충격에 따른 불화다. 둘 중 하나는 틀렸다. 세상이 틀렸거나 내가 틀렸거나다. 내가 틀렸다면 죽어야 하고 세상이 틀렸다면 벌거숭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인간들이 도무지 뇌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다. 내가 옳고 세상이 틀렸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줄 방법이 없다. 우주 안에서 혼자 고아가 된 느낌이다. 구조론은 작정하고 덤벼든 것이다. 인간들이 눈으로 뻔히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소실점이 대표적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소실점의 존재가 아니라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회피하는 비겁함이다. 과거 만화가들은 입을 얼굴 옆에다 그리는 식의 이상한 짓을 했다. 코를 그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코를 뾰족하게 그리면 얼굴은 측면이 된다. 입이 뺨으로 옮겨붙는다. 그게 어색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직도 그렇게 그리는 사람이 있다. 특히 무협지에 많다. 순정만화는 아예 코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눈을 크게 그려서 남는 빈 공간 문제를 마사지한다. 나는 그런 거짓에 분노한다. 코가 그렇게 무섭다는 말인가? 굴복할 일인가? 포기할 것인가?
이집트 벽화가 그렇다. 가슴은 정면이고 발은 측면이다. 동양화도 초상화는 발의 각도가 어색하다. 고구려 벽화는 활을 왼손으로 당기고, 김홍도 그림은 오른손과 왼손이 바뀌어 있고, 신윤복 그림은 발 각도가 180도다. 문제는 작가들이 문제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고 꼼수를 쓴다. 비겁하게 말이다. 사실상 그들은 원근법을 먼저 발견하고도 회피한 것이다. 사실주의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화 그리는 요령이 있다. 독자와 작가의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만화고기가 대표적이다. 만화에만 있는 정체불명의 커다란 고기다. 그런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리얼리즘으로 가면?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의 작가 미우라 켄타로는 54살에 죽었다. 과로사로 불 수 있다. 작가들이 편법을 쓰는 이유다. 그들은 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주의로 방향을 틀면 모든 것을 정확하게 그려야 한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편하게 만화체로 밀어보자. 만화가는 거짓말을 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은 척하자. 그래야 산다. 그렇게 망가졌다. 동양이 서양에 뒤진 이유다. 꼼수와 요령과 잔머리와 실용주의가 켜켜이 쌓여 사유를 가두는 거대한 감옥을 만들었다.
서양의 발달한 과학을 실전에 써먹은 역사는 불과 300년이다. 그리스인의 지혜도 3천 년 동안은 공리공론이었다. 우공이산은 서양이 실천했다. 그들은 꼼수로 도망가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버텼다.
관성은 지동설을 반대하는 사람이 먼저 포착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은 제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성질이 있으며 움직이는 것은 추진력이 있다고 믿었다. 지구가 돈다면 그 추진력은 어디서 나오지? 관성은 에너지가 계에 숨는 성질이다. 속도는 가속하거나 감속하여 변할 때만 보인다. 갈릴레이는 거기에 관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뉴턴은 그것을 계산했다. 갈릴레이의 적들은 단서를 잡고도 그 성과를 갈릴레이와 뉴턴에게 양보했다. 어리석은 일이다.
혹시 모르잖아. 도박 한 번 하자는 거지. 갈릴레이 말이 의심스럽지만 맞다치고 지구가 돌아도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이론을 만들어봐? 젊은 혈기로 도전해 봐? 만약 그랬다면 대박이 나는데 말이다. 갈릴레이는 반대파의 공격을 방어하려다가 사고실험으로 관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반대파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다.
뭐든 뒤집어서 반대쪽을 검토해 보는 것은 상식이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도 있다. 고정관념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단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를 뒤집으면 전부 뒤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요령과 꼼수를 빼면 고쳐야 할 것이 수십 가지가 된다. 누가 작정하고 하나하나 지적하면 피곤하다. 도망쳐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그렇다. 그냥 보면 보이는데 사람들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리얼리즘이 무섭기 때문이다. 지구가 둥근 것을 내 눈으로 보는 순간 괴력난신은 물 건너간다.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음모론도, UFO도, 초능력도, 사차원도, 초고대 문명설도, 내세도, 천국도, 윤회도, 사이비종교도, 환빠도 다 물 건너간다. 그 많은 거짓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기는 아까우므로 지구가 둥근 것은 보지 않는 걸로 하자. 짜고 치기 들어간다. 인간들 수준이 그렇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인간들이 죄다 벌거숭이라는 단서를 하나씩 수집했다.
1. '라고 한다의 법칙'이다. 이름이 이상하지만, 이는 초딩이 기억하기 쉽게 하려는 것이다. 거북이가 토끼의 경주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고? 터무니없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문장 뒤에 '라고 한다'를 붙이니까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사실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에는 룰이 있다. 교과서는 룰을 그렇게 정한 것이다.
도무지 세상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게임이라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맞게 대응해주마. 이해가 안 되는 어른들의 말에는 모두 '라고 한다'를 붙여 봤더니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구나. 정부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구나. 그렇게 말해야 하는 속사정이 있었구나. 표현이 그런 것이고 의미는 각자 헤아려서 접수하면 되는구나.
2. '의하여와 위하여의 법칙'이다. 학이 체온을 절약하기 '위하여' 한쪽 다리를 들고 냇가에 서 있다는 내용을 책에서 읽었다. 이상하다. 그럼, 여름에는? 관찰했더니 거의 모든 새가 심심하면 한쪽 다리를 들고 있었다. 새는 원래 신체 구조가 한쪽 다리로 설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다리로 서는 것보다 한쪽 다리로 서는 것이 뇌의 입장에서 의사결정하기 편하다. 두 다리에 체중을 고루 분배하는 것은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다. 새는 목이 짐벌이라서 원래 균형잡기에 능하다.
'위하여'는 인과법칙과 맞지 않다. 일상적으로는 '위하여'라는 표현을 쓸 수는 있으나 과학적인 탐구에 있어서는 위하여를 쓰면 안 된다. 특히 진화생물학은 위하여를 남발한다. 건강한 유전자를 얻기 위하여? 그럴 리가 있나? 성 선택설이 대표적이다. 좋은 유전자를 획득하고자 하는 의도가 동물에게 있을 리 없다. 동물이 뭘 안다고? 성 선택이 아니라 성적 조절장치다. 지나친 짝짓기 몰입을 막고 다른 종과 교미하는 실패를 피하려면 종을 분별하고 암수를 구분하는 표지가 필요하다. 사슴의 거대한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깃은 성적 조절장치다. 말이 소와 교미하는 실패를 막으려면 성적 표지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게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초딩이 알아낸 초딩도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아무도 벌거숭이를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인류 모두가 잘못된 사고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진지한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버렸다. 사소한 것은 열심히 따지고 중요한 것은 모르쇠를 시전하며 얼버무린다.
문명의 기반은 과학이고, 과학의 기반은 수학이고, 수학의 기반은 인과율이다. 그런데 인류 중에 인과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알아도 써먹지 않는다. 왜 결과를 원인으로 돌려막기를 하는가? 위하여는 미래다. 미래는 현재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남을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내 안의 스트레스와 집단 무의식에 의하여다. 자식을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래야 부모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자식과의 동일시에 따른 부모 마음의 불편함이 자식을 챙기는 원인이다. 그게 숨은 권력의지다. 자식을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이다. 자녀를 조종하려는 부모의 권력의지에 '의하여'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이게 다 너 잘되라고, 이게 다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란다. 위하여가 말하기는 편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3. 사전찾기 숙제를 하다가 국어사전이 특별한 기술 체계 없이 주먹구구로 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나중 어른이 되면 국어사전을 기술하는 체계를 정립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구조론을 연구한 계기다. 사전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닌데 인류 전체가 다 틀렸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니까 그런 게 보였던 것이다. 이 문명은 뭔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 모든 존재는 접근경로가 있고 발생경로가 있을 텐데 왜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지? 인류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마.
4. 자석에 쇠붙이를 붙이는 실험의 결과를 말하려다가 일종의 장 개념을 발견했다.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이 어떤 실체에 있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어떤 객체 하나를 가지고 설명하면 무조건 틀렸다. 무엇을 설명하든 'A면 B다' 하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해야 한다. 언제나 A와 B를 통일하는 C가 원인이다. 그냥 방망이가 공을 때려서 공이 날아간 게 아니고 야구라는 게임 속에 방망이와 공의 대결이 있다. 대립하는 둘을 가두는 또 다른 하나를 발견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이전에 문명을 발견하고, 선과 악 이전에 사회성을 발견해야 한다. 원인은 수평구조에 없고 그것을 가두는 더 높은 단계의 수직구조에 있다.
독일이 침략해서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북한이 남침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식은 제대로 짚은 것이 아니다. 이는 수평적인 접근이다. 그 이전에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간이 대결이 있었고 그 이전에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과 인종주의가 있었고 그 전에 맬서스 트랩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북한이 남침하기 전에 미소 냉전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역학구도가 있었고 불균형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말해야 한다. 모든 변화는 하나의 균형에서 또 다른 균형으로 갈아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잘 모르는 산수 문제는 극단적인 비교를 통해 답을 유추할 수 있다. 축구 시합에 12명이 뛰는 경기와 10명이 뛰는 경기 중에 어느 경기가 더 많은 골이 터지겠는가? 1 대 1 축구와 100대 100 축구를 비교하면 된다. 1 대 1은 페널티킥이다. 당연히 선수의 숫자를 줄여야 더 많은 골이 터진다. 실험할 필요없이 사고실험으로 알 수 있다.
6. '에서 으로의 법칙'이다. 이름이 얄궂지만, 에너지의 방향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화살표다. 벡터 개념과 같다. 원인과 결과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원인과 결과를 별도로 분리하는, 즉 잘못되고 만다. 궁수와 과녁 둘로 설명하지 말고 날아가는 화살의 방향성 하나로 설명해야 한다. 모든 이원론은 일원론으로 바꿔서 설명할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과 같다. 뭐든 대칭되는 것은 더 간단하게 일원으로 설명해야 한다.
7. 무한은 없다. 불교의 윤회설과 같이 과거로 무한하다는 식은 모두 '에서 으로의 법칙'을 어긴다. 과거와 미래는 없다. 현재도 없다. 하나의 화살표를 보되 머리를 보느냐, 가운데를 보느냐, 꼬리를 보느냐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관측 방법일 뿐 자연에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변화다. 변화는 화살표다. 시간은 화살표다. 자연에 무한은 없고 연속이 있을 뿐이다. 수학의 무한대 개념도 잘못이다. 그게 귀납적 접근이다. 수학은 연역이다. 연역으로 보면 연속이다.
8. 귀납은 없다. 모든 둘씩 짝지어져 대칭되는 것은 관측자의 개입에 따른 귀납의 오류다. 화살은 하나인데 관측자와의 관계가 둘이다. 관측자를 개입시키지 말고 자연 그대로를 봐야 한다. 귀납은 관측된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하면서 방향이 바뀌는데 다른 오류다. 운동회 날 이어달리기를 하는데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어린이가 있다. 그런 실수다. 인류문명은 통째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맞추어진 귀납문명이다. 자연과 일치하는 연역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9. 린네의 생물 분류를 배우면서 무생물을 분류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생물을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분류한 것이 구조론이다. 무생물도 탄생과정을 거쳐서 존재하는 것이다. 발생 경로가 있어야 한다.
10. 교생 선생님이 말해준 제논의 궤변이 큰 깨달음을 주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다. 그것은 크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귀납을 연역으로 바꾸면 된다. 크기는 귀납이고 연역으로 보면 비례다. 우주에 크기는 없다. 모든 크기는 비교된 크기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문제다. 척도가 되는 제삼자가 없을 때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서로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
11. 양질전환은 없다. 양질전환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섞이는 것이다. 온도가 올라가면 물이 끓는 게 아니라 불의 열이 물로 옮겨간 것이다. 물에 설탕을 타서 설탕물이 된 것과 물에 열을 타서 끓는 물이 된 것은 정확히 같다.
12. 인력은 없다. 굳이 말하면 집력集力이다. 모든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에 의해 공간을 차지하려는 척력이다. 척력이 교착되면 인력처럼 보인다.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면 모순이다. 계의 모순을 해소하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여 언밸런스가 밸런스로 바뀌는 게 척력이다. 인력은 척력이 꼬인 것이다. 두 척력이 등을 맞대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인력은 계가 특정한 수학적 구조에서 더 쉽게 밸런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13.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끌어낼 때 A와 B를 통일하는 C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C가 변할 때는 방향성이 있다. 그 방향성이 순환의 오류에서 탈출하여 변화를 추적하게 하는 단서다.
14.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한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플랫폼의 공유다.
15. UFO는 없다. UFO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미확인이면 비행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 인간들이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UFO는 없다. 의미가 있으려면 동력 비행 사실의 확인에 더하여 금속 물체의 질량이 확인된 상태이나 운전자의 정체는 미확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뜻을 싣지 못하면 말이 아니다. 역사 이래 유의미한 UFO 포착사례는 한 건도 보고된 것이 없다. 유명한 가평 UFO는 참깨가 카메라에 튄 것이다. 얼마 전의 설악산 신흥사 UFO는 새똥으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초딩도 그게 가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딱 봐도 색깔과 질감이 물체가 아니잖아.
생각해둔 것이 많았는데 돌아다니느라 다수 잊어버렸다. 이것은 세계관이 다른 문제다.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연결부위에서 인지충격이 발생하고 그러므로 거짓은 반드시 들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 반대로 인지충격은 인지부조화로 뭉개고 물타기 하여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다. 평원으로 나와서 회전을 하자는 사람과 숲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하자는 사람의 차이다. 경찰은 평원으로 나와서 따져보자고 하고 도둑은 숲에 숨어서 수를 내보려고 한다. 이해관계가 다르므로 타협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권력이다. 진리가 발견될수록 자신이 을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컴퓨터가 등장하자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졸지에 컴맹으로 몰리는 것과 같다.
사실주의로 가면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 같고, 슬램 덩크의 이노우에 타케히코 같은 극소수의 독종만 살아남고 엉성한 그림체로 이세계물이나 그리며 어영부영 때우는 보통 작가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시장을 다 먹으려면 독종이 되어야 한다. 우공이산을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