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젊은 은사(隱士), 삼절공자(三絶公子)
새벽(黎明)은 싱그러운 광휘로 시작되었다.
운예서각(雲藝書閣) 가득히 넘실거리는 향기는 뒤뜰에 자라나고 있는 수선(水仙)의 향기일 것이다.
그는 이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새벽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정실(靜室)에 앉아 화선지 가득히 난(蘭)을 치고 있었다.
그가 그려 내는 것은 바위(岩)에 뿌리를 내린 한란(寒蘭).
그가 그려 내는 사군자화(四君子畵) 가운데 으뜸가는 것은 난이었는 바, 낙양성의 유지들은 하인들을 보내거나 자신이 친히 운예서각을 방문해 그가 그린 난초화를 구해 가곤 하였다.
잿빛 유삼(儒衫)을 걸친 문객(文客), 그는 삼절공자(三絶公子)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낭대인(浪大人).
낙양성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떤 경로로 낙양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낙양 한 귀퉁이를 차지하였고, 자그마한 서점을 꾸며 운예서각이란 이름을 지었다.
하나, 그는 곧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서점 때문이 아니라 수묵화(水墨畵)와 의술(醫術)로써, 낙양성의 유림(儒林)에 이름을 드날리게 된 것이다.
그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조용함을 즐기는 성품 때문일까? 벌써 삼 년째 그는 자신의 장원(莊園)에서 오십 리(五十里) 밖으로 나아가지를 않았다.
기껏 멀리 나가야 낙수(落水) 가이며, 그가 거기에 가는 이유는 청죽간(靑竹竿)을 도도한 낙수에 담근 채 낚시질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림(畵)과 의학(醫學)에서 신수(神手)로 손꼽히는 삼절공자 낭대인. 그에게 인심을 얻고자 한다면, 국화분(菊花盆) 하나를 그에게 보내면 된다.
아마도 그는 그대에게 친필의 서화 한 폭을 보내어 줄 것이다.
"됐다!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다만!"
낭대인은 붓을 벼루에 걸쳐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폭의 난초화를 완성하고 난 그의 표정은 변황을 정복하고 옥문관(玉門關)으로 개선하는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의 표정, 그것이었다.
싱긋, 입가에 지어 보이는 미소. 가식이 전혀 없는 미소가 호감을 일게 한다.
그가 화선지의 한란 한 뿌리를 내려다보며 흡족해하고 있을 때, 이제까지 그를 쭈욱 바라보고 있던 문가의 거한(巨漢) 하나가 머리를 쓱쓱 긁으며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한 그림을 거금(巨金)을 주고 사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나으리."
하마같이 거대한 녀석이다. 날씨가 쌀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삼(短衫)을 걸치고 있다.
풀어진 옷자락 사이로 털이 무성한 우람한 가슴팍이 들여다보인다.
가히 역발산기개세의 역사.
아마도 낙양성에서 가장 거대한 체격을 지닌 녀석일 것이며, 저자거리에 선다면 그의 머리는 다른 사람의 머리 위로 확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문약해 보이는 서생의 하인 노릇을 하기에는 뼈대가 아까운 천하거한(天下巨漢). 그는 백 근(百斤)이 넘어 보이는 거부(巨斧)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새벽마다 그는 통나무 오십 개를 쪼개는데, 그 일에 걸리는 시각은 일각(一刻)에 불과하다.
거한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녀석, 누가 네 녀석더러 서화를 멀리 하랬더냐? 네 녀석이 짬짬이 서화를 공부했더라면, 그림 보는 눈이 생겼을 텐데!"
낭대인은 늘 웃는 표정이었다.
어찌 본다면 이제 열두세 살배기의 천진난만한 표정 같고, 또 어찌 본다면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탈속한 표정 같기도 했다.
"제길, 하여간 못마땅합니다. 이런 구석에 처박혀서 서점이나 경영하고, 난초나 국화를 기른다는 것이!"
거한이 툴툴거릴 때였다. 세 채의 목옥(木屋) 가운데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목옥이 활짝 열리면서, 소동(少童) 하나가 달음박질쳐 나왔다.
흰 옷을 입은 세 살짜리 아해(兒骸).
너무나도 귀엽고 개구스럽게 생긴 남아(男兒)로, 그 나이 특유의 청기(靑氣)가 짙은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으며 하이얀 치열을 갖고 있었다.
아이는 다짜고짜 정실로 뛰어들려 하였다.
"아이구, 소공자(少公子)! 벌써 깨셨구려!"
툴툴거리던 구 척 거한은 두 손으로 아이를 번쩍 쳐든 다음, 철사 같은 수염이 수북한 뺨으로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마구 부볐다.
"아파! 따가워."
아기는 쫑알거렸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낭대인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어 아이가 거한의 팔에서 내려져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서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옷을 바꿔 입은 것을 보니, 고모가 깨웠나 보구나?"
"예."
아기는 벌써 그의 목에 매달리고 있었다.
실로 정겨운 광경이다.
"만보대상(萬寶大商)에 간다며, 빨간 옷을 찾아 입었습니다."
"핫핫… 무향(無香)이 빨간 옷을 입다니, 오랜만인데? 늘 흰 옷만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웃음소리는 지극히 청아했다.
타오른다.
사립문을 열고 뜨락으로 내려오는 한 여인.
이제 나이 열아홉 정도 되었을까?
새빨간 옷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살결은 너무나도 희어, 첫눈의 그 빛을 연상케 하였다.
신비를 간직한 듯한 두 눈은 슬픔과 동시에 희열을 빨아들이듯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건강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피부빛이 너무 창백하며, 두 눈의 초점이 흐릿하여 불안하게 느끼어진다.
그리고 여인의 성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이 지극히 짧아 기묘한 부조화를 느끼게 하였다.
무향(無香).
기구한 소녀이다. 나이가 열아홉인지 스물인지, 혹은 열여덟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 년 전, 폭우 속에서 낭대인에게 발견되었으며… 무려 사흘에 걸친 수술을 받아야만 살아나게 될 정도로 뇌호혈(腦戶穴)에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짧은 이유는 그 때, 뇌호혈을 치료하기 위해 삭발(削髮)해야만 했기 때문이며… 지난해 병이 재발되었을 때 또다시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고 뇌호혈을 째야 했기 때문이었다.
"……!"
무향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정실로 다가섰다.
몹시 겁이 많아 보이는 큰 눈, 그녀의 눈빛은 낭대인이 가까이 있을 때마다 바람을 만난 호수처럼 울렁거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바보스럽던 그녀의 눈망울은 낭대인의 모습이 망막에 담기면서부터 격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와, 왔습니다."
무향은 말을 약간 더듬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그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반벙어리인데, 삼절공자의 신의술로 인해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아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차리니… 어여쁘구나, 무향."
"부,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무향, 늘 방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아니 된다. 너의 병세는 햇볕을 많이 쪼여야만 좋아진다."
"……."
"너는 사람을 혐오하고 있다. 그래서 거리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 오늘 만날 사람은 나의 좋은 친구이니, 겁낼 것 없다. 얌전히 일다경(一茶更) 정도만 참으면 된다."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삼절공자의 말이나, 차갑고 싸늘하게 말하는 말보다 힘을 갖고 있었다.
무향은 거역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삼 년 내내 근처 오십 리 안에서만 살아온 삼절공자.
그는 새벽에 대체 어디에 가고자 하는 것일까?
* * *
낙양은 왕조와 흥망을 같이하는 곳이 아니다.
낙양을 도읍으로 삼던 무수한 왕조는 멸하였으나, 낙양성만은 여전히 살아남아 천하대도로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십수만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낙양 저자거리.
그 곳에 가면 하나의 건물을 보게 된다.
<만보대상회(萬寶大商會)>
거대한 횡액이 걸려 있는 이곳은 낙양성에서 가장 추레한 건물이되, 가장 부유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의 규모는 무려 사층, 실내 면적 또한 넓기에 일시에 수백 명이 들어선다 해도 좁다고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더욱이 그 안으로 발을 들인다면, 칠이 벗겨진 외부와는 전혀 다른 아방궁이 펼쳐진다는 데 놀랄 것이다.
또한 만보대상회는 세인들이 낙양제일부호(洛陽第一富豪)라 말하는 천풍장(天風莊)의 주인, 백리대인(百里大人)의 거처와 직통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만보대상회와 천풍장은 크게 따져 하나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었다.
운예서각을 떠난 삼절서생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바로 그 곳이었다. 그의 곁에는 무향이 예의 두려운 표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이미 약속되어 있기 때문일까? 삼절서생과 무향은 곧장 지하실로 안내되었다.
만보대상회의 지하실은 상층보다 더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도처에 골동서화(骨董書畵)가 가득하고, 서역(西域)의 비단과 향(香)이 상자에 가득히 쌓여 있다.
진주(眞珠)와 호박(琥珀)을 담은 상자도 수북하며, 희귀한 약재(藥材)들의 향기가 만보대상회 지하실을 휘감고 있다.
만보대상회는 천하도처에 지부를 갖고 있는 만보대표행(萬寶大 行)의 총타였던 것이다.
만보대표행은 천하의 금맥(金脈) 가운데 십분지일(十分之一) 정도를 장악하고 있는 중원 최대의 표국이다.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인원이 도합 이만사천여(二萬四千餘).
만보대표행주는 가히 천하상가(天下商街) 막후의 지배자라 할 수 있었다.
"향지국(香至國)의 자단목(紫檀木)이로군?"
삼절공자는 팔선탁(八仙卓) 옆에 앉으며 말했다.
무향은 그와 떨어질 경우, 지옥으로 추락하기라도 하는 듯 아무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백리대인(百里大人)의 첩(妻)이자 만보대상회의 여관사(女管事)인 능향(凌香)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하신 안목이십니다."
오만하고도 도도한 그녀인데, 지금은 손수 두 잔의 향차(香茶)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만보대상회에 오는 사람 가운데, 능향에게서 친히 향차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탐이 나신다면 갖고 가십시오. 향지국에서 열 개를 갖고 왔으니, 하나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능향의 입가에 홍조가 번져 나간다.
그녀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삼절서생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아름다운 남자다. 천하에 보기 드물 정도로. 한데, 이 유약한 서생이 회주(會主)의 특별 대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그녀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공자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 드리라는 것이 회주의 명이셨습니다. 어떠한 고가품이든 간에!"
"훗훗… 낙척서생(落拓書生)이 기진이보(奇珍異寶)를 갖는다면, 개(犬)가 웃을 것이오."
그는 피식 웃으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능향은 그를 슬쩍 흘겨보며 입술을 쫑긋댄다.
"천하의 기진이보를 갖고 계시면서, 무슨 그러한 말씀을……."
그녀는 시선을 무향에게 던지고 있었다.
무향, 정녕 아름다운 여인이다.
한때 강남일기(江南一妓) 소리를 들은 바 있던 능향이었으되, 무향에 비한다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다.
능향이 말하는 기진이보란 바로 무향이다.
능향으로선 무향에 대한 말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으되, 무향을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런 미녀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늘 칩거하고 있겠지.'
능향은 상당히 새촘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잘룩한 허리를 약간 숙였다.
"회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십팔표두를 만나신다 하셨는데… 그들을 부를까요? 그들은 이미 당도하였습니다."
십팔표두, 만보대표행의 축(軸)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북십삼성(南北十三省)에 흩어져서 만보대표행의 무수한 지부를 관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실로 힘든 일이다.
한데, 그들이 지난밤으로 모두 모인 것이며… 그 이유는 바로 삼절공자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보대표행의 막후지배자 백리대인은 삼절공자가 소지하고 있는 서화 열두 폭을 건네받고, 삼절공자에게서 다섯 가지의 비전약방문(秘傳藥方文)을 전달받은 데 대한 대가로 두 가지 청을 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우연히 입수한 구엽선란지초(九葉仙蘭芝草)를 넘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십팔표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들여보내 주기 바라오."
삼절공자는 나직이 말했다.
능향은 고개 숙인 다음,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문약한 서생에게 실로 대단한 힘이 있다. 저 사람 앞에서는 늘 숨이 막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아마도 과거에 거대한 세력을 거느렸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무언중 사람을 압도하는 기개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그녀는 조용히 물러났다.
이어, 삼절공자는 무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사람들이 와서 너를 볼 것이다."
"아……!"
"아무 말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무, 무서워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무향은 금방 눈물을 흘릴 표정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까! 나는 저 병풍 뒤에 있겠다. 늘 너를 보고 있을 테니, 안심하거라!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그는 찻잔을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섯 걸음 걸어 십장생(十長生)이 수놓아진 병풍 뒤로 돌아갔으며, 무향은 그가 모습을 숨기는 것을 보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잠시 후, 문이 조용히 열리며 중년인 하나가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미 어떠한 언질을 받고 들어선 듯 주저하지 않고 무향을 바라보았으며, 한참 동안 무향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향은 타인과 시선을 부딪치는 것이 겁나는 듯 피부 가득히 소름을 돋게 했다.
실로 미묘한 대면.
삼절공자가 어떠한 속셈으로 이러한 일을 꾸몄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보대표행의 광동표행주(廣東標行主)는 일각 동안 무향의 이목구비를 바라보다가는 병풍 쪽을 바라봤다.
그는 누군가 거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선 눈치였다.
그는 보이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는 삼절공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모르겠소이다."
"으음……."
"저 정도의 미인(美人)이라면 국조(國朝)에 이름을 날렸을 텐데… 제가 아는 인물 가운데 저러한 용모를 가진 사람은 없소이다. 송구스럽게 됐소이다. 아는 것이 상당히 많은 데에도, 저 소녀에 대한 것은 모르겠소이다."
"알겠소! 하여간 고맙소!"
"천만에요. 모두 회주의 명을 받드는 일이니, 영광일 뿐입니다. 늘 고독하신 회주에게 친구가 생겼다니… 평소 회주를 가까이서 섬기지 못하나, 실로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광동표행주는 그렇게 말한 다음, 포권(抱拳)으로 인사를 마치고 성큼 뒤돌아서 나갔다.
이어, 또 한 사람의 노표두가 실내로 접어들었다.
그는 심한 산동(山東) 방언을 쓰는 사람으로, 그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광동표행주와 진배없었다.
그 역시 한동안 무향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며, 결국 모른다는 말을 되풀이한 후 밖으로 물러났다.
산서(山西), 안휘(安徽), 절강(浙江),
호남(湖南), 호북(湖北), 섬서(陝西),
광서(廣西), 청해(靑海), 강소(江蘇)…….
각처의 표행주들은 하나하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 역시 무향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병풍에 대고, 그녀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한 다음 물러났다.
그 사이, 무향은 비지땀을 쭈욱 흘리다가 혼절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십팔 표두 가운데 마지막이 되는 사천표행주가 들어섰다가 나간 후에는 신음 소리를 내며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손(手)은 매우 희었다.
삼절공자는 마지막 표두가 나간 후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와, 무향의 이마에 손을 대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귀한 혈통을 타고났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네가 명가(名家)의 자제라 여기게 되었으며… 천하 어느 지방에서는 꽤나 유명했던 미녀로 알고, 십팔표두를 불러 너의 과거(過去)를 찾아 주고자 했다. 너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이름과 고향을 모두 잊고 말았으니까. 한데, 천하정세에 대해 해박한 십팔 표두 가운데 너를 아는 사람이 없다니… 아아, 너는 어느 어부(漁夫)나 농부(農夫)의 딸이란 말이냐? 결코 그럴 리는 없는데……."
그는 착잡한 기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향은 다 죽게 되어 그에게 발견되었다. 만에 하나, 그가 신의술을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무향은 죽었을 것이다.
무향과 그는 기묘한 사이이다.
비록 오누이 처지로 지낸다고는 하나, 그들은 엄연한 타인이다.
무향이 다친 뇌호혈 때문에 백치로 지내지만, 그녀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경국지색의 미녀가 아니던가?
꿈을 먹고 사는 듯 언제나 몽롱한 눈빛, 주사(朱沙)를 바른 듯 붉게 타오르는 입술은 언제 봐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결국 그는 무향이 늘 가까이 있다는 데 압박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무향의 가족을 찾기 위해 칩거를 깨고 나와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이목(耳目)을 갖고 있는 만보대표행의 총회주 백리대인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무향을 알지 못했다.
과거(過去)가 없는 미녀, 무향.
그녀의 잠든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기만 했다. 그녀를 구태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한다는 것은 일반 사내가 하기 힘든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고 너의 과거를 찾을 수 있겠지. 내가 찾아 주겠다. 너를 위해서."
삼절공자는 중얼거리며 조용히 손을 쳐들었다.
무향은 혼절한 상태에서도 그가 곁에 와 있음을 느낀 듯 그의 옷소매를 꼬옥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가 힘을 가하지 않는다면, 소매를 잡은 손길을 떨치기 힘들 정도였다.
화려한 거실.
백리대인은 자색 비단옷을 걸친 채 호피(虎皮) 태사의(太獅椅)에 앉아 있었으며, 삼절공자가 새벽에 그린 난초화를 탁자 위에 펼쳐 놓고 바라보면서 탄성을 연발하고 있었다.
"대단하오. 현기(玄氣)가 있으며, 생기(生氣)가 있소. 한란의 차가운 향기가 흘러넘치는 듯하오. 정녕 신품(神品)이오."
그는 잠시 전, 거실로 들어선 삼절공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백리대인의 나이는 대략 오십 정도, 배가 상당히 나왔으며 얼굴은 둥근 편이다.
모가 나지 않은 인상으로, 얼핏 보면 관직에서 물러나서 평온한 여생을 만끽하고 있는 퇴역관리처럼 보인다.
하나 그는 당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끼이는 실력가이며, 그의 진실된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애첩(愛妾) 능향이라 하더라도 그의 진실된 모습은 모른다.
만보대상회와 만보대표행, 그리고 천풍장.
그 세 개의 장소만 갖고 있더라도 가히 천하제일부호라 불릴 수 있으나, 그의 진정한 힘은 거기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은 빙산(氷山)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 년 전, 복통을 구실로 운예서각에 사람을 보내 삼절서생이 처방한 약방문을 얻어 온 바 있고… 그것을 빌미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비롯한 예물을 운예서각에 보내곤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귀한 책과 그림을 찾기 위해 운예서각을 찾는다고 하나, 그의 속셈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낙양성 내에서 삼절서생처럼 백리대인에게 예우를 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백리대인은 꽤 오랫동안 난초화를 감상한 다음, 엄지손가락을 불끈 세워 보이며 삼절서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氣)가 대단하오. 역시… 완성된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걸작이외다!"
삼절공자는 혼자 들어왔다.
삼절공자는 백리대인에게서 구엽선란지초(九葉仙蘭芝草)를 받고 나서 서각으로 되돌아갈 예정이었다.
"프핫핫… 의화서(醫畵書) 삼절인 낭대인과 더불어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고 싶어 지난 이 년 간 아부를 했는데… 프핫핫! 삼절공자는 이 년 간 나의 접근을 무시하셨소. 한데, 한 명의 바보소녀의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내게 허리를 숙였으니… 프핫핫! 역시 영웅(英雄)은 여인(女人)에게 약한 것이 아니겠소?"
의미심장한 말이다.
지난 이 년 간, 그는 운예서각 주위를 배회했다.
그는 무수한 중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양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삼절공자가 낙양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영웅이라니… 과찬이십니다."
그는 싱긋 웃었다. 그의 표정이며, 호흡에는 약간의 변화도 없었다.
백리대인 또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늙은 매의 눈으로 삼절공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빛, 그것은 보옥(寶玉)을 무처럼 베는 비수의 빛이었다.
"천년무사(千年武史) 가운데 그대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훗훗… 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오."
"나의 눈을 속이려 하지 마시오."
"……."
"훗훗… 나는 이미 알고 있소. 이 년 전에 우연히 그대를 다루(茶樓)에서 보고 그대를 알았으며, 그 즉시 이곳을 보통 가격의 두 배로 산 다음 나의 거점을 이곳에 만든 것이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바로 귀하가 여기 머물러 있기 때문이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철혈검후(鐵血劍侯) 혜성옥수(彗星玉手) 낭옥비(浪玉飛) 대협(大俠)이!"
실로 놀라운 말이다.
살아 전설이 된 풍운아(風雲兒), 혜성옥수 낭옥비.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일 정도로 우상이 된 인물이다.
철혈십구로를 이끌고 양대마세를 무찌른 인물, 변황의 준동을 막아 낸 중원의 영웅 혜성옥수 낭옥비.
삼절공자가 바로 그의 화신(化身)이란 말인가?
낭옥비, 그는 백리대인의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숨결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눈빛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는 예의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마시다 만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백리대인을 바라봤다.
백리대인의 눈빛이 타오르는 눈빛이라면, 그의 눈빛은 심연(深淵)이나 대해(大海)처럼 사물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눈빛이었다.
"내가 혜성옥수이든 아니든, 우리 두 사람 사이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외다, 살인회주(殺人會主)!"
살인회주.
차분히 내뱉은 말에 백리대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의 손이 격렬히 떨렸으며, 두 눈에서 뿜어지던 빛이 일순 흐트러졌다.
'무섭군, 나를 알아보다니! 무림 생활 사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살인회(殺人會).
일명 백일홍(百日紅)으로 불리는,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암살자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고가(高價)의 청부살업을 이행하며, 황금만 제공한다면 천하의 그 어떠한 존재라도 과감히 제거해 준다.
그들이 백일홍(百日紅)으로 불리는 이유는, 살인청부 받은 자를 일백 일 안에 깨끗이 제거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을 자를 가려 죽이고, 정파의 협사와 여인,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기에… 지탄을 받기는 하되 악마(惡魔)로 불리지는 않았다.
강호대세에 상관하지 않는 이기적인 단체, 살인회.
백리대인이 바로 그 집단의 우두머리란 말인가?
침묵이 꽤 오래 갔다. 백리대인은 뜨거운 찻물을 다섯 잔 들이킨 다음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언제… 알았소? 내가 살인회주라는 것을?"
"글쎄, 훗훗… 나는 귀하를 처음 보는 순간, 귀하가 살인회주 백리소천(百里宵天)… 바로 강호의 최고 이단자 냉혈검후(冷血劍侯)라는 것을 알았소. 이 년 전, 낙양다루(洛陽茶樓)의 삼층 구석진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 년 전, 처음 만났다. 그 때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었다.
냉혈검후는 낙양 분타주에게 밀명을 내리기 위해 장사꾼 차림으로 변장한 채 낙양에 갔다가 우연히 다루에 들렸던 것이다.
낭옥비는 근처 대운서각주(大運書閣主)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 곳에 들렸었다.
두 사람은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한데, 두 사람은 이미 그 때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귀하는 과거, 내가 무사였던 시절… 탕마멸사(蕩魔滅邪)를 위한 살인명단(殺人名單)에 끼일 뻔한 사람이었소."
"아……."
"나는 귀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귀하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되, 지금 나를 따르고 있는 거패철협(巨覇鐵俠) 좌문룡(左門龍)이 귀하는 사악하되 죽을 정도의 마인은 아니라고 하기에 살인명단에서 제외했던 것이오."
"으음……!"
"나는 귀하가 왜 내 주위를 얼씬거리는지 알지 못하오. 귀하가 나를 제거하기 위해 머무른다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으나, 이 년 간의 행동을 보면 그것도 아닌 듯하구려."
피식… 낭옥비는 또 웃었다. 실로 천진스러운 웃음이다.
그가 과거의 젊은 절대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그는 여유 있게 팔짱을 꼈다. 그는 눈앞에 자객제왕이라 불리는 살인회주가 버티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백리소천은 그의 가슴에서 열한 군데의 허점(虛點)이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져 있다.
손을 떨칠 경우, 눈부신 검화(劍花)가 피어 오르며 팔십일방(八十一方)이 냉혈살검광(冷血殺劍光)에 휘어 감길 것이다.
강호출도 이래 단 한 번도 실패를 맛보지 않았던 필살의 살검!
하나, 그는 벽(壁)을 대하는 듯 차마 검을 뽑지 못했다.
"그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투명하군. 빌어먹을!"
백리소천은 투덜거리며 검자루를 놓았다.
어느 틈엔가 그의 등판은 땀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오. 역시 나의 눈은 정확했소. 귀하는 내가 이 년 간 뒤따라 다닐 만한 인물이었소."
백리소천은 살의(殺意)를 포기해 버렸다.
그는 겹겹의 비밀로 자신을 위장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수하라 할지라도 그의 진실된 모습을 모르고 있다.
하나, 신비가 많다는 데에 있어서 혜성옥수 낭옥비를 능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문(家門)도, 사문(師門)도, 왜 무림에 들어섰고, 왜 무림을 떠났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 낭옥비.
그는 백리소천이 자신에게 뇌물(?)로 주고자 한 구엽선란지초가 자라고 있는 화분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향에게 쓰여질 것이다. 하나, 그것으로 무향이 완쾌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낭옥비란 인물 근처를 배회했는지 말할 필요는 없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태여 알고 싶지 않으니까."
"알아야 하오."
"왜……?"
"귀하는 완벽한 무사요. 귀하가 무림을 떠난다는 것은 무림에 있어 중대한 손실이라 할 수 있소."
백리소천의 목소리는 사무적으로 화해 갔다.
그는 비정한 인물이며, 철저할 정도로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천하가 바란다 하더라도, 자신의 터럭 하나 뽑지 않을 인물이다.
어쩌면 지금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낭옥비와 정반대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귀하가 무림을 떠난 이유를 알고 있소."
"흠, 재미없군."
"귀하는 무림을 위해 무림을 떠난 것이오. 귀하가 중원무림계에 남을 경우, 많은 사람이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기에… 귀하는 과감히 무림을 버린 것이오."
"훗훗……!"
"또 하나의 이유라면, 귀하를 추종했던 이십팔성숙좌(二十八星宿座)의 무사들이 폭발 가운데 모두 죽고 그대만 살아났다는 데에서 오는 죄의식일 것이오. 그러하기에, 귀하는 무림맹주(武林盟主)의 지위를 흔쾌히 포기한 것이오."
백리소천의 눈빛이 또다시 강해졌다.
낭옥비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차분히 선란초만 응시할 뿐이었다.
"귀하는 뛰어나되, 어리석은 사람이오."
"……!"
"귀하는 천하무림을 위하되, 천하의 명숙은 귀하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소. 세월은 감사하오. 그대는 이미 잊혀졌고, 그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대를 적으로 여기오. 귀하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소. 그리고 과거 귀하에게 스러졌던 변황세력이 재준동하고 있으며, 최초의 표적으로 그대를 선택했소. 또한 무수한 암살 추적자들이 혜성옥수를 찾아다니고 있소."
실로 냉정한 말이었는데, 낭옥비는 묵묵부답이다.
"……!"
"그뿐이 아니오. 의열천군맹의 움직임도 수상하며, 대해(大海) 쪽에서도 그대를 주시하고 있소."
"……!"
"가장 무서운 적수라면, 천축제일인(天竺第一人) 좌백강이라는 자가 일으킨 군림혈사맹(君臨血死盟)일 것이오. 그들 또한 중원을 탐하고 있으며, 중원을 얻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귀하를 제거할 것이오."
"……!"
"귀하는 완전한 고독자(孤獨者)요. 아무도 귀하 곁에 없소. 그러하기에, 귀하를 바라오."
"바라다니?"
낭옥비는 처음으로 눈길을 쳐들었다.
부드러운 눈빛이되, 백리소천은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자객제황(刺客帝皇) 백리소천, 그는 대체 어떠한 이유로 낭옥비를 바라는 것일까?
"귀하를… 초빙하고 싶소."
"초빙?"
"자객집단이라고 얕보지 마시오. 아마도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일 것이오. 귀하가 원한다면, 나의 사문이 이백 년 간 모은 기진이보(奇珍異寶)의 이 할을 제공하겠소. 그리고 매달 황금 백만 냥의 대가를 지불할 것이며, 정예무사 오천(五千)의 생사여탈권을 주겠소. 그리고 살인회에 있어서의 지위는 나와 동등하게 될 것이오. 살인회는 귀하와 더불어 일취월장할 것이며, 오만하고 위선적인 천하백도에 결정타를 가하여 독보천하(獨步天下)할 것이오."
실로 엄청난 제안이었다.
매달 황금 백만 냥. 가히 꿈속의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말한 조건은, 내가 귀하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이오. 아마도 황제라 하더라도, 귀하에게 그런 대접을 해 주지 못할 것이오."
백리소천은 낭옥비를 살인회의 제이회주(第二會主)로 초빙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년 간 낭옥비 근처를 배회한 것이다.
그리고 낭옥비는 그가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으며, 이 년 만에 처음으로 진실된 신분으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낭옥비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 달에 황금 백만 냥씩이라… 나의 무공을 너무도 과대평가하셨소."
"비꼬지 마시오. 나로서는 최대로 예우하는 것이니까."
"훗훗… 비웃는 것이 아니오. 나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오. 사실, 나는 과거의 혜성옥수가 아니오."
"……!"
"검은 녹슬고, 실전능력은 감퇴되었소. 그리고 내공은 반도 아니 되오."
낭옥비가 미소지으며 말하자, 백리소천은 즉시 반박했다.
"아오, 모두 알고 있소. 지난 이 년 간 귀하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것을 모조리 분석했소. 귀하에 대해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 할 정도로.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귀하의 무공이 아니오. 나는 귀하의 경륜과 귀하의 권위를 바라는 것이오."
"……."
낭옥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향을 대신해 고마움을 표하오. 무향의 과거를 찾지 못해 유감이나, 그대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으음……!"
백리소천은 자신이 거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만한 자!'
그는 묘한 분노를 느꼈다. 하나, 그보다 더한 감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살인회주의 지위를 거절당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그는 낭옥비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귀하는 제거당할 것이오. 처절하게!"
"훗훗… 그럴 수도……."
"귀하는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럴 수도……."
"빌어먹을!"
백리소천은 욕설을 토하며 발을 세게 굴렀다.
쾅-!
석판 다섯 개가 동시에 깨어졌으며,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그 날 저녁, 만보대상회의 현판이 떼어졌다.
그리고 천풍장이 극히 헐값에 팔린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며, 그러한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백리소천과 그의 측근 인물은 이미 오백 리 밖으로 떠나가 버렸다.
백리소천은 낙양의 거점이 만에 하나라도 소문날까 우려한 나머지, 휘하세력을 모조리 철수시킨 것이다.
그는 그렇게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러하기에, 그의 세력은 지금처럼 거대하게 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