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장백산(長白山)
고행선은 그의 처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처의 친족이라고는 달랑 장인영감인 홍걸 하나뿐이었고, 지금 그들 부부가 머무르고 있는 장원도 원래부터 처가가 터전을 잡고 있던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처가의 내력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홍걸이 홍리화에게 보이는, 아니 태중(胎中)에 있는 아기에게 보이고 있는 그 집착은 가끔씩 광기로까지 비쳐질 때가 있었다.
이제 임신 사 개월에 접어들었는데, 홍리화의 배는 벌써 태산만하게 불러왔다.
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온 몸은 공기를 잔뜩 불어넣은 가죽부대처럼 한껏 부풀려져 있었다.
얼굴과 온몸이 타는 듯 붉었고, 몸의 열기를 견디기 어려워 하였다.
아무래도 원인은 홍걸이 마구 복용시키는 그 숱한 약재들에 있음이 분명했다.
고행선이 세상을 견학하기 위해 중원으로 나온 것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못하였고, 그 이전까지는 장백산의 심심산중에서만 나고 자랐다.
자연히 오래 묵은 산삼이나 하수오와 같은 영초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조금은 있었고, 더구나 그의 부친께서는 약리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자기고 계신 터라 어깨너머로 들은 말씀들이 또한 적지 않았다.
분명 영약 영초의 과잉 복용과 잘못된 복용법으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좋은 것이지, 몸이 견디는 한계를 넘어서면 곧 독으로 변하는 것이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홍걸은 각 영약 영초들의 특성과 그 복용법에 대해서는 가문의 선대로부터 오랜 기간 준비를 해 온 것이며, 또한 옥황심결에는 약효들간에 있을 상충작용에 대한 중화(中和)의 공능(功能)이 있으므로 부작용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자신하였다.
또한 지금 홍리화의 상태는 영약의 효능이 태아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 조금 정체되어서 그런 것일 뿐이고, 뱃속의 태아가 조금만 더 성장하면 약효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훨씬 빨라질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오히려 강변을 하였다.
고행선이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차근차근 설득을 해 보았으나, 홍걸은 처음부터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홍리화의 몸은 자꾸만 불어났고, 이제는 그 상태가 얼마나 위태위태하게 보이는지 자칫 조그만 충격이라도 받게 되면 그냥 펑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급기야 고행선은 처와 태중 자식의 안전을 위해 하나의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부친이 계시는 장백산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미 거동조차 어렵게 된 홍리화를 데리고 근 한 달은 족히 걸릴 장백산까지 간다는 것은 상당한 무리와 위험까지도 감수를 하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행선이 믿을 곳이라고는 오로지 그의 부친 밖에는 없었다.
그만큼 부친은 그의 둔한 재주로는 도저히 측량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학식과 경륜을 지니신 분이었다.
비록 자신이 부친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어려워하고, 또 그분의 곁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는 하늘이라도 나는 듯한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지만, 지금 이와 같이 사정이 급박하게 되다보니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친이었다.
홍걸은 당연히 펄쩍 뛰었다.
그로서는 가문의 수 백년 염원이 걸린 일이었다.
그러나 고행선의 결심은 너무나 확고하여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고행선은 평소 유순하고 온화하기만 하였던 사람인데, 일단 한번 결심을 굳히고 나자 그 의지의 굳건하고 완고하기가 마치 바위덩어리나 쇳덩어리와도 같았다.
그는 홍걸에게 처와 자식은 자신의 소관이니 아무리 장인이라 해도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바른 도리가 아니라며, 홍걸이 정히 반대를 한다면 관계의 절연(絶緣)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아주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물론 그런 정도에 쉽게 굴할 홍걸이 아니었지만, 나중에는 홍리화까지도 남편 고행선의 편을 들고 나서는 바람에 그로서도 계속 강수를 둘 수만은 없게 되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에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하더니, 홍걸과 고행선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자 홍리화는 결국 남편의 편을 들고 말았다.
고행선을 따라 홍리화마저 부녀간의 절연을 불사하겠다는 기세로 나오는 데야 홍걸로서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상황이 못 되었다.
사위는 몰라도 딸과 절연을 하게 된다면, 그가 목을 매달고 있는 태중 외손자와의 혈연도 자연적으로 끊어지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홍걸은 한 가지의 조건을 붙여 고행선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 조건이란 바로 장백산까지 그가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홍걸에게 있어서 어차피 정해놓은 집은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이 바로 그의 집이었고, 천하의 모든 집이 바로 그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 온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다만 비고(秘庫)의 보물들만 잘 갈무리하여 지니고 간다면, 장백산이 아무리 세상과 단절된 곳이라 해도 외손자를 위한 안배를 계속 베푸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었다.
사위의 말로 유추해 보건 데 사돈영감의 성질이 보통으로 꼬장꼬장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는데, 그것 또한 홍걸에게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홍걸이 일단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구워 삶을 자신이 있었으니, 궁벽한 산골짜기에 처박혀 평생 글이나 팠을 까짓 고리타분한 먹물 영감쟁이 하나쯤이야 어떻게 하더라도 요리를 하지 못하랴 싶었던 것이다.
고행선은 한시가 급한 마음이었지만, 홍걸이 떠날 채비를 갖추는 데는 사흘이나 걸렸다.
홍걸이 가장 신뢰하는 등평(鄧平)과 몇몇 문중의 인사들을 불러 자신이 없는 동안의 일에 대해 이런저런 꼼꼼한 지침을 전하고, 또 커다란 이두마차를 두 대나 준비하여 짐을 챙겨 싣는 등, 그 준비하는 모양새가 이번 참에 아주 장백산에 들어앉을 기세인 것 같았다.
마차 한 대는 홍걸과 홍리화 그리고 고행선이 탈 것이었고, 나머지 한 대에는 빈 공간 하나 없이 짐이 가득 실렸다.
수행하는 호위무사 및 하인들이 십여 명이나 되었고 몸이 동산만하게 부푼 임산부까지 있으니, 여행 중 소요되는 잡다한 일상의 용품들과, 또 만약을 위한 여러 가지 비상용품들이 준비되었다.
비고에 들어 있던 그 숱한 영약들이 몇 겹의 잠금장치로 보호되는 철궤에 넣어져 짐 칸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 거창한 준비를 보고 고행선이 기막혀 하였으나, 이미 홍걸의 성질머리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그저 모른 체 하였다.
그 문제로 홍걸과 시비가 붙어 봐야 시간만 더 정체될 것이었다.
부전여전(父傳女傳)일까?
홍리화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해 가지고서도 처음으로 뵙는 시아버지께 드릴 예물을 준비하느라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부부의 연을 맺어 이제 덜컥 아이까지 가진데다, 더구나 온전치 못한 몸으로 시 어른을 뵈어야 하니, 아무리 사소한 예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따지지도 않는 그녀라고 해도 내심으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아버지가 얼마나 완고한 어른인가에 대해서는 고행선으로부터 이미 여러 차례 들은 바가 있었고, 또한 고행선이 그의 부친을 언급할 때마다 무의식 중으로 주눅이 들어 하는 모습을 보아 온 터였다.
뭔가 그 분이 흡족해 하실 만한 예물을 준비하여 귀여움까지는 몰라도 꾸지람을 조금이라도 덜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간절하였다.
홍리화가 그 같은 생각을 아버지 홍걸에게 말했더니, 홍걸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개방하여 주지 않았던 비고의 문을 아예 활짝 열어 주며 무엇이든 그럴 듯한 것으로 골라보라 하였다.
홍리화가 미리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고의 물건 중 어느 것 하나도 세상에 귀한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평생을 심심산중에서 책만 읽으셨다는 시아버지에게 그런 따위의 보물들이 가당키나 할 일인가?
'그래! 서책이다. 학자에게 서책 이상의 선물이 또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홍리화가 그 하나하나가 다 가치를 따질 수조차 없는 무가지보인 희대의 고서들과 진품의 고서화들을 두고 숱하게 저울질을 하던 중에 문득 비고의 한구석에 볼품없이 쑤셔 박혀 있는 고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금강부동신법? 소림의 것이 왜 여기에 있지?'
하긴 비고에 어디 소림의 것만 있었으랴?
역시 무공이려니 하고 그냥 팽개치려던 홍리화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책장을 몇 장 넘겨보았다.
넘어가는 대로 몇 장을 넘겨 보았더니, 무공비급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무슨 뜻인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장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대충 감을 잡기로 무슨 불경의 구절을 해석해 놓은 것 같은 데, 각 구절마다에 무슨놈의 주석(註釋)이 그렇게도 겹겹이 달렸는지 한 구절을 놓고서도 홍리화가 한 두 번은 들어 본 듯한 소림의 유명하다는 역대의 고승들이 몇 십대를 거치면서 주석을 달고 또 달아놓았다.
원문은 기껏 다섯 장이나 됨 직한데, 거기에 달린 주석이 쌓여 서책의 장 수는 근 백여 장 가까이나 되도록 두툼하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한 번 피식 웃고는 던져 버렸을 것인데, 지금은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단지 엄청나게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 오히려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다.
'학자들은 무조건 어려운 내용을 좋아한다?'
그런데다 책의 서장을 장식하고 있는 보리달마와 혜능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지극의 찬사들은 책의 가치를 무한정으로 높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 이 것이라면 어쩌면 시아버지의 눈에 들지도 모른다.'
홍리화가 들고 온 금강부동신법의 비급을 보고 홍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오래 전 한때의 혈기로 취해놓고는 그 동안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던 물건인 까닭이다.
쓸모없으나, 자칫 세상에 잘못 흘러 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위험천만 한 상황을 몰고 올 물건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에게 이 물건이 있다는 것이 바깥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의 재주로 보아 당장에 잡히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남은 여생동안 소림의 땡중들에게 끊임없이 쫓겨 다니는 각박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로 이내 묘한 의미를 담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무용지물인데다, 그렇다고 내 손으로 없애기는 썩 내키지 않는 물건이다. 차라리 장백산 깊은 산중으로 가져다 놓는다면, 다시 세상에 나올 일도 없을 것이고, 먹물만 잔뜩 든 사돈에게 생색을 낼 수도 있으니 또한 좋은 일이다. 만약 이 물건이 먹물들에게도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잡서라면, 불쏘시개로나 쓰이면 그 또한 제격일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나자 홍걸은 자꾸만 헛웃음이 솟아나며, 괜스레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기분도 들어 절로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달마와 혜능이 극찬한 금강부동신법이 이 홍걸의 손을 거쳐 드디어는 한낱 불쏘시개로 쓰인다? 으흐흐흐!'
홍걸 일행이 드디어 북경을 떠나 장백산으로 출발을 하게 되니, 그 때가 한여름인 칠월 중순이었다.
산천은 푸르고 온 천지가 활기에 가득 차 있건만, 홍걸 일행은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홍리화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거의 마차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홍역을 치루면서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더구나 홍리화의 몸 상태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가자, 고행선은 물론이지만 홍걸 또한 다급해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행보를 서두르라 하인들을 독촉하였다.
사실 북경을 출발할 때만 해도 홍걸은 홍리화의 몸 상태가 천고의 영물들을 복용할 때 흔히 생길 수 있는 일시적인 부작용이라고만 여겼고, 뱃속의 태아가 성장하고 있으니 옥황심결을 보다 성심으로 운기하다 보면 장백산에 도달할 즈음에는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홍리화의 상태는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가 되어서 북경을 출발한지 이십 여일이 지날 무렵에는 아주 위급을 다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녀의 몸은 이제 도저히 사람의 몸이라 봐줄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얼굴과 온 몸에는 검붉은 열꽃들이 빽빽이 번져 올라 마치 역병(疫病) 환자와도 같이 징그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홍리화는 자신보다는 뱃속의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다행한 것은 가끔씩 뱃속의 아이가 약하게나마 태동을 보였고, 그럴 때 마다 그녀는 천지신명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자신의 목숨은 거둬 가도 좋으니, 제발 아이만은 무사하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또 올렸다.
그런 눈물 속에서 홍리화는 진정으로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고, 또한 어머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고행선은 홍리화의 곁에서 한결같이 좋은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장백산에 도착하기만 하면 부친에게 반드시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홍걸이 비록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일이 이쯤에 이르자 그만 사위와 딸의 얼굴보기가 민망해져서 말도 붙이지 못하고 마차의 벽 쪽으로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 모두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한시라도 빨리 장백산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팔월 중순.
근 한 달 여만에 일행은 마침내 장백산 초입의 한 산골마을에 당도하였다.
이제부터는 마차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좁고 험한 길이라, 홍리화를 위한 가마를 한 채 준비하였고, 마차에 싣고 왔던 짐은 재분류하여 하인들이 등짐으로 져 날라야만 했다.
그래도 새벽에 동이 트자마자 바로 출발하여 하루를 부지런히 걸으면 산중에서 밤을 보내지 않고도 고행선의 집에 당도할 수 있다 하였으므로, 그에 맞추어 짐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와 잎갈나무가 정교하게 뒤섞여 장관을 연출하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지나 한나절을 계속 올라가자 사방은 어느새 태고적부터 숲을 이루어 온 거대한 침엽수들의 원시림으로 변해 있었다.
그 웅장한 모습과 폐부를 싸늘하게 적셔 오는 산의 신령스러운 공기에 새벽부터 쉬지 않고 걸어 올라온 피로와 온몸을 적시고 있는 땀을 좀 씻어 내나 했더니, 하늘이 변덕이라도 부리듯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강풍과 함께 소나가기 쏟아졌다.
지난 밤 별이 총총하기도 했고, 새벽부터 날씨가 청명하기 이를 데 없어 비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터라 모두는 피하고 말고 할 사이도 없이 흠뻑 젖고 말았다.
홍리화가 타고 있는 가마라도 어떻게 비를 피해볼까 하고 근처의 커다란 바위틈을 하나 찾아 들고 보니, 그 사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가 그치며 하늘에는 해만 쨍쨍하였다.
"제기랄!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이 변덕스러운 날씨하며 도대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첩첩산중이니 원...!"
홍걸이 대 놓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산중에서 무대책으로 밤을 맞지 않으려면 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는 수 밖에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긴 협곡을 벗어나자, 다시 사방팔방이 험준한 바위산으로 둘러 쌓인 조그맣고 아늑한 분지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세 칸으로 된 아담한 통나무집 한 채가 마치 한 폭의 산수화 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고즈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고행선의 부친 고진당(高晋當)은 특이한 기도를 가진 인물이었다.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엄격하고 완고한지를 홍걸은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골수까지 먹물이 배여 온몸으로 꼬장꼬장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전형적인 노문사(老文士)였다.
그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에 차 있던 홍걸은, 이제 말 한 마디 나누어 보지 않고서도 이미 기질에 있어서 자신이 한 수 밀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걸의 안목과 경험에 의하면 고진당과 같은 인물이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꺾이지 않을 신념의 소유자이기 쉬웠다.
홍걸의 직업상 일평생 수많은 고관대작들과 무림의 절정고수들을 살펴보고 관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호리호리한 체격의 노인네만큼 깊고도 강한 기질을 풍겨내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관직에 의한 위엄이나 내공에 의한 기도와는 다른, 오랜 세월 다듬어진 맑은 정신에 의한 기질이었다.
홍걸은 시세에 맞추어 펼 줄도 알고 굽힐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를 꼭 꺾어야 한다면 가차 없이 목에다 칼을 찔러 넣지 못할 바도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대는 자신과는 절대로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홍걸이 눈빛을 바로 하고 얼굴빛을 최대한 온화하게 바꾸어 고진당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상견례의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막상 고진당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뜸 고행선을 향해 호통을 쳤다.
"네, 이 노옴! 세상 보는 눈을 넓히라고 산을 내려 보냈더니, 겨우 일 년도 되지 않아 계집을 데리고 돌아와?"
노한 호통이라고 해서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나지막한 호통에 담긴 위엄이 얼마나 삼엄했던지 통나무집을 둘러싸고 있는 멀리 장백산의 준령들이 부르르 떨리는 듯 했다.
고진당이 내뿜는 그 시퍼런 서슬에 고행선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서 있던 홍리화는 물론이고,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누구 앞에서도 진정으로는 주눅이 들어 본 적이 없었던 홍걸마저도 그만 움찔하니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물론 딸 가진 부모의 입장이니 한 수가 꿀리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그 이전에 그만큼 고진당의 위엄이 서릿발 같았다.
고행선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아버님!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고진당이 차갑게 말을 내 뱉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볼 마음이 없으니, 같이 온 사람들이며 물건들과 함께 물러가거라."
"아버님!"
고행선이 애절하게 고진당을 불렀으나, 고진당은 휘적휘적 걸어 사랑의 마루로 올라섰다.
그 때, 겨우겨우 버티고 서 있던 홍리화가 그 자리에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화매! 정신 차리시오."
고행선이 놀라 홍리화의 몸을 부축하며 정신없이 부르짖었다.
"아버님! 화매를 살려주십시오. 그녀는 태중에 아버님의 손자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 울부짖음에 이제 막 사랑으로 들려든 고진당이 멈칫 서더니 급히 몸을 돌렸다.
"일단 사람부터 방 안으로 옮기거라."
고행선과 홍걸이 부랴부랴 양쪽에서 홍리화를 부축하여 아래채로 옮겼다.
한동안 홍리화의 맥을 짚고, 눈을 열어 보고, 얼굴과 목의 피부를 살펴보고 한 다음에, 고진당이 은은한 노기를 띤 채 고행선에게 물었다.
"이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더냐?"
"그것이...?"
당황해 하는 고행선을 대신하여 홍걸이 얼른 대답하였다.
"딸아이가 잉태를 하였기로, 제가 임부(妊婦)와 태아의 보신을 위해 몇 가지 영약을 구해 복용을 시켰습니다."
고진당의 눈초리가 매섭게 홍걸을 향했다.
"이런 무지한...!"
홍걸이 어이없다기보다는 차라리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고진당의 차가운 질책이 이어졌다.
"자연의 영기(靈氣)란 것은 자연 속에 있을 때만이 영기인 것이지, 사람의 몸속에 들어왔을 때는 그 체질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왜 몰라?"
고진당의 노기가 워낙 거센 것이라, 홍걸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영약을 복용시킴에 있어 그 상생상극의 기운을 따져 조화시켰고, 또한 딸아이로 하여금 정심한 내공심법을 부지런히 운기하도록 하여 부작용을 최소화 하도록 하였으며..."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더욱 차가운 질책뿐이었다.
"어허! 지금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꼴을 보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시오?"
그 한 마디에 홍걸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조급하기로 따지면 아비인 그만큼 조급한 사람도 또 없었다.
홍걸은 금방 애원하는 눈빛이 되어 있었다.
"무슨 방도가..."
"허허! 사람의 몸 안에다 기를 억지로 가두어 두는 것은 순리가 아닌 법. 그리고 영약이란 것도 기실은 자연의 기를 편중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니, 그 또한 순리가 아니라고 할 것이오. 다만 기가 부족하거나 허해졌을 때 그것을 보(補)하는데 쓰이는 것은 몰라도, 아이 가진 임부에게 이리도 무분별하게 마구잡이로 복용을 시켰으니 어찌 큰 탈이 나지 않겠소?"
고진당의 서슬 퍼런 질책이 이어졌으나, 홍걸은 이제 무조건 매달리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홍리화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여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고, 호흡마저 미미하여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분간이 어려운 상태로 정신을 놓고 있었다.
지금 홍걸이 딸과 외손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에게 기대어 보는 수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예, 예! 모든 것이 다 제가 무식한 소치입니다. 제발 여식과 외손자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홍걸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하자, 고진당도 처음에 비해서는 노기가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음! 당신 여식의 목숨은 몰라도 뱃속의 아이는 어쨌든 내 핏줄을 이은 혈손이니, 당신이 그리 부탁하지 않아도 당연히 최선을 다해 구할 것이오."
"고맙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해 놓은 짓거리가 하도 어이없을 정도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할 것 같소. 그러니 일단은 바깥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시오. 서로간에 얽힌 복잡한 관계는 일단 임부(妊婦)의 치료를 하고, 또 아이를 순산하고 난 다음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니어서 홍걸의 이마가 가만히 찌푸려지는데, 마침 정신을 차린 것인지 홍리화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님!"
홍걸이 반가운 마음으로 홍리화를 바라보았으나, 간절함을 가득 담은 딸의 눈은 고진당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고진당이 짐짓 차갑게 말했다.
"나를 그리 부르지 말게. 나는 아직 소저를 내 며느리로 받아들인 바 없으니..."
"아버님! 저는... 저는.... 흐흐흑!"
홍리화가 말을 채 맺지 못하고서 결국은 서럽게 흐느끼고 말았다.
당장에 고진당으로부터 나직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어허! 아이 가진 여인이 어찌 그리 감정을 격하게 먹누? 당장에 마음을 평정하게 가라앉히지 못할까?"
홍리화가 서러운 중에도 움찔하며 울음을 속으로 삼켰으나, 그녀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은 양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 마음이 아픈 홍걸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가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고진당이 홍걸을 향해 한결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니 하룻밤을 묵게는 해 드리겠소. 그러나 보시다시피 궁벽한 살림이라 겨우 하룻밤 밤이슬 피할 자리를 드릴 수 있을 뿐이외다."
착잡한 심정에 홍걸은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샜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마당에 임시로 친 천막에서 잠을 자고 있던 호위무사들과 하인들을 깨워서는, 급하게 행장을 꾸려 먼저 산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였다.
이어 아래채 딸 내외의 방문을 살짝 열어 보니, 긴 여로에 지쳤던지 두 내외가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홍리화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자, 고행선이 먼저 일어나 놀라 예를 갖추고 이어 홍리화를 깨웠다.
"내가 여기에 더 있어서 네게 도움이 될 것이 없겠다. 나는 이 길로 산을 내려갈 것이니, 너는 부디 몸을 소중히 돌보아 순산을 하거라. 네 뱃속의 아이에게 거는 이 아비의 염원을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아이를 놓거든 무인(武人)으로서의 기초를 잘 닦아 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면 내가 수시로 사람을 보내어 무엇이건 준비하여 줄 것이다. 먼 나중의 일이 되겠지만 아이가 철이 들면 내게로 보내야 한다. 설마 하니 이런 산골짜기에서 평생을 살게 할 수 야 없지 않겠느냐? 만약에 아이의 나이 열다섯이 되어도 보내지 않는다면, 그 때는 이 아비도 앞뒤의 체면을 돌보지 않고 외손자를 데리러 올 것이다. 너는 이 아비가 지금 하는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으며, 최대한 양보를 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리라 믿는다."
홍걸이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고 한참이나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는 방을 나섰다.
홍리화가 저 혼자서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라 다만 눈물로 아비를 배웅하였고, 고행선이 급히 홍걸을 따라 나섰다.
고행선이 산 밑까지 장인을 배웅하려 하였으나, 바로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듯 하던 홍걸의 신형이 금새 휑하니 멀어지더니 눈을 두 번 깜빡이기도 전에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놀랍고도 신기한 광경에 고행선이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다 두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며 아무도 없는 앞을 향해 길게 허리를 숙였다.
고진당은 홍리화에게 특별한 처방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엄명을 내리기를 만약에 몸에 무공을 지녔다면 출산 때까지는 절대로 쓸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였다.
물론 보이지도 않는 몸 안의 내공을 쓰고 안 쓰고 하는 것을 무공에 대해 문외한인 고진당이 일일이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었으나, 홍리화는 감히 고진당의 말을 어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만약 잠시라도 무공을 쓰는 일이 있다면, 네 뱃속 새 생명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리라."
고진당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 외에 고진당이 내린 유일한 약 처방이라고는 집 밖에서 자생하는 몇 가지 평범해 보이는 잡초들을 뜯어 와 그것으로 생즙을 내어 며느리에게 아침저녁으로 마시게 한 것이 다였다.
세상에 그렇게 시금털털하고 쓰고 비린 이상야릇한 맛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홍리화는 처음으로 알았다.
입 안에 머금기는 하였으나, 차마 목구멍으로 삼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엄한 눈초리로 지켜서 있는 고진당 덕에 죽을 각오로 생즙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고진당이었다.
물론 고진당이 그녀에게 시아버지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이전에 고진당에게는 무언지 모르게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위엄과 같은 것이 있었다.
무서운 만큼 오히려 믿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런 마음의 덕분인지, 그 지독한 맛의 생즙을 삼키고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욕지기를 억지로 참고 있노라면, 이내 뱃속으로부터 한 가닥 시원한 기운이 돌며 전신으로 피가 통하는 듯한 후련한 느낌이 오는 듯도 했다.
홍리화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고진당은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며느리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기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무슨 일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철저하게 시간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정해주었다.
자시(子時)가 되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묘시(卯時)가 되면 또 무조건 잠을 깨야만 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절대로 무엇에 기대거나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만약 잠시라도 벽에 몸을 기대기라도 할라치면, 어디에서 지켜보고 있었던지 바로 고진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앉아 있으려 해도 자꾸만 저절로 무너져 내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홍리화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아야 했다.
고진당의 노한 호통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두려움과 각오였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은 시련의 시간이 흘러 칠 일째가 되었을 때, 홍리화는 비록 어둔한 몸놀림이지만 그래도 방과 마당을 혼자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집살이는 그 때부터였다.
그 때까지 밥 짓고 빨래를 하는 등 집안의 살림살이와 텃밭을 돌보는 일 따위는 고행선이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홍리화가 걸을 수 있게 된 다음날부터 그 일들은 모두 홍리화에게 맡겨졌다.
고행선에게 대신 맡겨진 일은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일이었다.
홍리화가 살림살이를 해 본적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가 본래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 할 줄 아는 것이야 많았지만, 그게 다 뛰고 날고 치고 하는 것들이었지, 언제 밥 짓고 빨래하고 텃밭 일구는 일을 하게 되리라고 꿈에서라도 상상을 해 보았겠는가?
몸이 맘대로 따라 주지 않는데다 평생 처음으로 해 보는 낯선 일이니 힘이 몇 배로 더 드는 것은 당연하였다.
밤이면 열이 들끓어 헛소리를 내뱉었고, 깜빡깜빡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서는 눈물 쏟아 내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옆에서 보는 고행선의 안타까운 마음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행선이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 부친의 눈을 피해 그녀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는 일 정도에 불과하였다.
다시 한 달 여가 흘렀다.
매일매일이 지옥 같은 시련의 나날이었으니, 홍리화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마당 한 쪽의 텃밭을 손질하던 홍리화는 무언가 차갑게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녹아드는 야릇한 감촉에 문득 눈을 들었다가, 문득 탄성을 발했다.
"아아! 눈이다."
뿌옇게 흐린 하늘에 비록 가늘기는 했지만 새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장백산에서 사계(四季)를 보내 보지 않은 홍리화로서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사실 장백산의 겨울은 빨리 온다.
구월 하순이면 벌써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인 것이다.
때 이르게 휘날리는 눈발을 보고 벌써 겨울인가 하고 잠시 정취에 젖어 있다가, 홍리화는 자신의 몸에 붓기가 거의 다 빠져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제 산달을 세 달여 앞둔 터라 배는 제법 불렀지만,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이며 목이며 팔 다리는 다만 좀 건강한 촌부와 마찬가지로 보일 정도였다.
신기한 듯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홍리화가 아주 조심스럽게 배를 감싸 안고 땅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조심스럽게 배를 어루만지던 홍리화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으흐흐흑!"
마침 사랑의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내려서던 고진당이 며느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놀라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한걸음에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고진당이 그처럼 급하게 달려는 갔으되, 언제나 엄하게만 대해왔던 홍리화인지라 뭐라고 말은 건네지 못하고 다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지켜만 보고 서 있었다.
홍리화가 그제야 고진당의 기척을 알아채고 눈물로 잔뜩 얼룩진 얼굴을 들어 배시시 웃음 지었다.
"아버님! 아기가... 뱃 속의 아기가 다시 움직여요."
장백산에 온 이후로 홍리화는 뱃속 태아의 태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태아가 힘찬 발길질을 한 것이었다.
순간 고진당의 얼굴로 확연히 기쁜 빛이 떠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담담하게 표정을 되돌리며 짐짓 엄하게 홍리화를 나무랐다.
"어허! 임부(妊婦)는 늘 마음을 평정하게 가져야 하는 법이라고 내 그리도 누누이일렀거늘, 왠 망동이더냐?"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고진당은 다시 사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꼬장꼬장한 뒷등을 바라보며 홍리화는 환하게 웃었다.
시아버지가 그 동안 엄한 시집살이를 시켜 온 것에 나름의 깊은 뜻이 있었다는 것을 홍리화는 이제야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시아버지의 비범함에 대해 더욱 굳게 믿게 되었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홍리화는 시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 않고 더욱 더 성심으로 받들었다.
사람이 함께 하다 보면 정이 생기는 것이 곧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고진당 역시 홍리화에 대한 마음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아들과 홍리화에 대한 노여움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버릇없고 배운 게 없어 근본 없다 여겼던 홍리화였는데 의외로 착하고 순수한 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귀여운 생각이 조금씩 드는 것이었다.
아들 고행선에게는 하루 종일 가야 한 마디도 하기 어려운 고진당이었는데, 요즈음 홍리화에게는 아침 저녁으로 몸이 어떤지를 물어보는 자상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홍리화에 대한 인식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뱃속에 고씨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혈손이 자라고 있으니 미워도 잘해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몸이 정상적인 임부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홍리화의 마음도 차츰 산속의 고즈넉함을 닮아 조금씩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그녀가 사람간의 정에 대해 보다 깊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남녀간의 정이 아니라, 고진당에게서는 엄격하나 깊이가 있는 어버이의 정을, 뱃속의 아이와는 혈육의 교감을,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천하를 떠 도는 아버지 덕분으로, 비록 모자라게 살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정과 사랑을 받아 보지는 못하였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 바깥으로 쉬 드러나지는 않으나 대신 깊고 은은하게 우러나오는 가족의 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밤중에 모두 잠들었을 때 홀로 깨는 날이면, 홍리화는 그 정의 소중함에 새록새록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럴 때 그녀는 뱃속의 아기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녀가 지금껏 살아 온 얘기와, 가슴 설레도록 만끽하고 있는 지금의 이 행복에 대한 얘기와,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커줬으면 하는 바램에 대해서.
"아가야! 그저 건강하게, 그리고 지금 이 엄마가 느끼는 것처럼 작지만 소중한 기쁨을 늘 느끼며 사는, 그런 행복한 아가가 되거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