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全氏)는 2천년 충의(忠義)의 명문벌족(名門閥族)
“정선아리랑 부르며 불사이군의 충절 지켜”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지려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민족의 애환이 서린 정선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아리랑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노랫말을 지은 이는 정선전씨(旌善全氏) 도시조의 29세손인 고려 말 충신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이다. 그는 고려말기 공양왕 때 대제학에까지 오른 당대의 명신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관향인 정선으로 낙향 서운산 기슭에 은거하여 만수산 검은 구름(이성계 일파의 음모)이 엄습해 오는 서울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망국의 울분을 아리랑의 가락에 실어 보냈다.
이처럼 정선아리랑은 전(全)씨 문중의 충절의 애환이 서린 노랫가락인데, 이 충의(忠義)의 정신이 시조로부터 흘러 내려 온 2천 년 전(全)씨 가문의 전통정신이다.
전(全)씨의 시조(始祖)는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歡城君, 현재의 서울) 전섭(全聶).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聶), 을음(乙音) 등과 함께 온조(溫祚)를 도운 개국공신 10명 중 한 분이다.
그의 단소는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으며, 매년 양력 10월 3일 전국 종친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전씨의 도시조 전섭(全聶)은 온조왕 때에 백제국을 개창한 십제[백제]공신 중의 한 분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고, 연대는 한성제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다.
도시조 전섭(全聶) 이후 한반도가 삼국통일의 전란기를 맞으며, 그의 가문에 대한 기록은 7세까지 끊어졌다가 정선전씨의 관조가 된 시조의 8세손 전선(全愃)에 이르러 부흥된다. 그는 신라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천년신라의 독창적인 문물을 꽃피울 문화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으며, 후에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정선(旌善)을 본관으로 삼으니 자손이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9월15일에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서운산에 있는 묘소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정선군(旌善君)의 후대에 와서 정선과 천안 등 18개 문파로 갈라지지만, 전(全)씨 모두는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의 후예이다.
이처럼 全씨는 정선(旌善)을 관향의 대종으로 하는 사실상 단일본의 성씨이다.
전(全)씨는 역사 깊은 명문벌족(名門閥族)으로 신라, 고려시대를 통틀어 군(君)에 봉해진 사람이 35명, 정승 12명, 판서 43명을 배출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 제자만 60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전(全)씨 문중에서 특히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형제와 전락(全樂)의 3종반의 충절을 빼놓을 수 없다.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당하자 이들 3종형제는 전이갑을 왕건으로 가장케 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 왕건을 탈출시키고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후삼국을 통일 고려개국의 대업을 이루게 하였다.
이밖에도 정선아리랑의 작가 전오륜(全五倫)과 고려왕가에 충절을 지킨 고려말 공조판서 전순(全順), 병부상서에 올랐던 전신(全信) 등의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전(全)씨 문중의 인물 중에서 한국사에 크나 큰 족적을 남겨 후세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인물은 역시 조선말기의 전봉준(全琫準)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 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민중혁명의 지도자였다.
전(全)씨 가문의 흥망성쇠의 맥락을 짚어볼 때, 그가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全樂)의 후손으로, 동학혁명을 일으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행동으로 일깨웠다.
부패한 지배계급 타파와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어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항세구국의 기치를 올려 당시로서는 과히 혁명적인 신분상의 차별대우 개선 등 정치개혁요강 12개 조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점령을 노리고 있던 일제가 동학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자, 전봉준(全琫準) 장군은 손병희와 함께 22만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대전투를 벌였으나, 신식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으니…….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민중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중 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다.
안창호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던 전덕기(全德基)목사와 문화재 보호로 애국을 실천한 전형필( 全鎣弼), 그리고 의병장 전덕원(全德元) 등이 그들이다.
전(全)씨 문중은 도시조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으로부터 2천년 역사를 통해 충의(忠義)의 명문거족으로, 후대들에게 선조들의 불계기공(不計其功: 그 공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며), 불모기이(不謀其利: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등의 종약 5대강령(宗約 五大綱領)과 종무지표(宗務指標)의 훌륭한 정신을 물려주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첫댓글 전씨 성을 가진 모든 종중회원들은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