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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A코스 : 두문동재~은대봉~중함백(인증)~함백산(100명산 인증)~수리봉~화방재(B코스 출발/차량 중간 대기)~사길령(인증)~태백산(100명산 인증)~깃대배기봉(인증)~신선봉(인증)~구룡산(인증)~도래기재(약35.9km/15시간)
ㅇ B코스 : 화방재~사길령(인증)~장군봉~태백산(100명산 인증)~깃대배기봉(인증)~신선봉(인증)~구룡산(인증)~도래기재 (약24.4km/15시간, 자유시간 포함)
* A코스 출발지점 : 두문동재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금대봉길 296 함백산쉼터 앞)
* B코스 출발지점 및 중간 차량 대기 장소 : 강원도 태백시 혈동 155-3 어평재휴게소
* 모든 코스 집결장소 : 도래기재(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산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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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기재] 763m
도래기재는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
- 금정광산
금정광산은 백두대간 구룡산의 심장에 해당하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일대에 위치. 일제 강점기 때부터 50년 이상 금을 캐온 금정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구룡산 계곡 한쪽에 광미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어설픈 광해 방지 작업이 더해져 5년이 지난 2002년 여름 끝내 무너져내렸다. 태풍 루사에 의해 폐기물 더미가 완전히 무너진 것.
초기 복구를 담당한 산업자원부는 폐기물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아카시아를 심었지만,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부실하게 복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큰 비를 맞고 무너져내린 중금속폐기물은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우구치리계곡을 비소, 구리, 수은 등 중금속으로 오염시켰다.
우구치리는 '창지개명(創地 改名)'된 명칭이다. 애초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돼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된 금정광산에서 캐낸 금을 봉화로 실어내 오면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폐광지역 침출수가 영월로 흐르는 하천을 오염시켜 지역간 환경 분쟁을 낳고 있다.
[구룡산] 九龍山 1345.7m
강원 영월군 상동읍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 사이에 있는 한국의 산.
태백산(太白山:1,567m), 청옥산(靑玉山:1,277m), 각화산(覺華山:1,177m), 옥석산(玉石山:1,242m) 등과 함께 태백산령에서 소백산령이 갈라져 나가는 곳에 있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남북으로 흘러서 각각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은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여 구룡산 이라 하는데,용이 승천할 때 어느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뱀봐라" 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겨 용이 떨어져 뱀이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룡산 아래를 천평이라 한다.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때 태백산 정상을 天嶺이라 하였고, 천제단이 있는 곳을 天山이라 하여, 그 아래 있는 들을 "하늘들"이라 하여 "天平"이라 하였다 한다.
[고직령] 高直嶺
고직령은 '높고 곧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곳은 '높은 것'은 당연하고 '곧은 길'은 서벽리에서 올라오는 '곡내계곡길'이다. 따라서 춘양면의 입장에서 이름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구룡산에서 떨어지면 높고 곧은 고직령이다. 설에 의하면 고개 북쪽에 사창(社倉)이 있어 고직(庫直)이가 지킨다. 고산자 김정호[대동지지]삼척 산천에는 서쪽 일백십리에 고석령(孤石嶺)이 있고 매우 험하다.
[곰넘이재]
'옛날부터 이 고갯길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였으며 특히 태백산 천제를 지내러 가는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고갯길이었다. 문헌 영가지(永嘉誌)에 웅현(熊峴)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제부터인가 순 우리말로 순화하여 곰넘이재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뜻풀이에 의하면. "곰"은 "검"에서 온 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이라 불렀다. 즉, 웅현(熊峴)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이니 다른말로 "신령(神嶺)이다. 일설에는 "곰"을 "고개"로 해석하고 "님이"를 "넘이"로 봐서 "곰님이"는 "고개넘이"로 보기도 한다.
[신선봉] 1300m
화방재에서 시작하든 도래기재에서 시작하든 크게 힘들인 다음에야 오르르 수 있는 보우리다. 정상을 사이에 두고 앵 방향 등산로 모두 급경사를 이루는데 등산로의 폭이 좁다. 특별한 이정표도 없고 갈길도 멀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신선이 산다는 봉우리'인데 '신선만 오를 수 있는 산'인 양 오르는 사람에게 구슬땀을 요구한다.
경주 손씨 묘가 있다.
[차돌배기]
지나는 행락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옛날 이 자리에 차돌이 박혀있었다 하여 차돌배기라 전하여 오고 있다.
[깃대배기봉] 1368m
예전 신라시대에는 채백산과 부소산 그리고 깃대배기봉을 연결하는 대간길을 하늘고개라는 뜻의 '천령(天嶺)'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시했다고 한다. '깃대처럼 높은 봉우리'로 해석된다. '~배기'는 명사형 어미다. 따라서 '깃대봉'이다. 이 능선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었고, 신라 사람들이 이곳을 '천령'이라 불렀고, 산이름이 '깃대봉'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 신라 중 한 나라가 국기를 내걸었던 봉우리는 아니었을까?
일제가 측량을 하면서 깃대를 꽂아 놓아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부소봉] 1547m
천제단 남동쪽에서 1Km 지점에 위치한 준봉이다. 장군봉, 천제단과 비슷한 높이다. 그러나 두 봉우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봉우리다. 대간의 중요한 봉우리인데도 기존의 대간로가 옆으로 비껴 우회할 정도로 구박덩이다. 남진해오던 대간이 부소봉을 지나면서 차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경상북도 지경으로 처음 진입한다. 북족은 여전히 태백시다. 솥두껑(釜)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단군의 아들 부소왕의 이름이다.
- 환단고기의 단군팔가(檀君八加)
단군의 여덟 아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맡긴 것. 부루(虎加), 신지(馬加), 고시(牛加), 치우(熊加), 부소(鷹加), 부우(鷺加), 주인(鶴加), 여수기(狗加).
이중 둘째 아들 부소는 응가로 삼아 형벌을 주관케 했다 전한다.
-> <환단고기> 자체에 대해서는 위서 논쟁이 많으니 참고 하십시오.
[태백산] 1567m
태백산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산이라면 그것이 어떤 산이든 일단 민족의 영산이라 할 수 있다. 일명 태백산이라는 이름도 있는 백두산이 그렇고 태백산이 그렇다."동국여지승람"에 태백산은 신라의 오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되어 일찍부터 명산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산이다.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령의 상징인 태백산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청옥-두타산을 거쳐 흘러온 맥이 한번 웅장하게 용트림한 산이다. 금강, 설악, 오대, 두타산이 대부분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깊은 협곡을 거느려 명산에 걸맞는 경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태백산은 주능선일대에 국한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연상시키듯 크고 거대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육산일 뿐 아기자기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산이다. 함백산이나 정암사로 빠지는 고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활등 모양으로 휘어든 평탄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둔중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상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덩어리로 다가온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이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천제단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위치한 천제단은 높이 2.5m 정도의 사각형 제단이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1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온다. 이곳에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태우'라고 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단으로 태백산 정상에 있다. 산꼭대기에 이와 같은 큰 제단이 있는 곳은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다.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300년 기림이사금 3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 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하는데,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 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며, 녹니편암의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러한 구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 천기(天旗)와 28수기(宿 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다.
태백산에 천제를 올린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逸聖尼師今 五年十月 北巡親祀太白山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
基臨尼師今 三年三月 至牛頭州望祭太白山樂浪帶方兩國歸服
(기림왕 3년3월에 왕이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올렸으니 낙랑과 대방이 항복하여 왔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太伯山載府西南新羅擬五岳爲北岳有祠名曰太伯天王堂諸郡人民春秋祀之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신라때 오악 가운데 북악이라 하였다. 산 꼭대기에는 신사가 있는데 이름하여 태백천왕당이라 한다. 여러고을 백성들이 봄 가을로 천제를 올린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太白山 新羅時北岳載中祀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繫牛於神座前狼狼不顧而走曰如顧之神如不恭而罪之過三日府收其牛而用之名之曰退牛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리던 곳이다. 산꼭대기에는 세간에서 말하는 천왕당이 있어 강원도와 경상도의 인접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제사를 할 때에는 신좌 앞에 소를 매어놓고 3일이 지난 후에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가 쓰는데 이름하여 퇴우라 한다)
太白山祠 在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이르기를 천왕당이라 한다. 강원도(본도)와 경상도의 인근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 척주지(陟州誌)
太白山在府西百二十里神羅北岳載中祀風俗信鬼其絶頂作天王祠春秋大祀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쪽 120리에 있는데 신라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린 곳이다. 세간에 신을 믿는 풍습이 있어 산꼭대기에 천왕사를 짓고 봄 가을로 크게 제사한다)
- 특정 종교인들에 의해 '수난'
"거룩하신 하느님과 국조 단군성조님이시여 반만년을 지켜 온 문화유산의 훼손을 막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박종기 강원 태백시장이 6월 12일 오전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 신라시대 때부터 민족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려 온 천제단의 훼손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비는 고유제를 지냈다. 박 시장은 '고유제 축문'을 통해 "천제단의 훼손을 미처 막지 못했으나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그동안 보살펴 주신 배달민족에게 앞으로도 광명과 번영을 내려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용서를 빌었다.
신라시대 때부터 하늘에 제를 올려 온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태백산 천제단(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28호)은 5월 27일 오전 특정 종교인들에 의해 제단의 일부가 훼손됐다. 박 시장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한 심정을 하늘에 고하고 앞으로 다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는 뜻으로 고유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 장군봉 將軍峰 1566.7m
춘양(春陽) 남동쪽 17km 지점에 위치한다. 태백산 최고봉으로 주목과 고사목이 많아 겨울에 흰 눈이 덮히면 장관을 이룬다. 장군봉과 태백산 천제단 사이의 능선에 자란 나무들가지에는 상고대가 피가 마치 흰 꽃밭을 연상하게 한다. 북쪽의 죽미산(竹嵋山:917m), 남쪽의 일월산(日月山:1,219m)으로 이어진다. 낙동강의 여러 지류가 여기서 발원하며, 남쪽 기슭의 장군광산에서는 납·아연·망간을 채광한다.
백두대간 상의 선달산 동쪽 도래기재에서 매봉산(천의봉·1,303.1m) 동북쪽 피재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인 태백산(太白山·1,56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이루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제일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는 명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옛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만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단군 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 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은 고대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 주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태백산 이외에 고대시절에 '太白山'으로 불리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과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과 큰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운위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과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위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祠堂)이 지금도 있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삼위 · 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 잡은 자산(子山)·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국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
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 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 차서 산을 가린 것을 볼 때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 남쪽 백령면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사의 태백산도 곧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대동지지 문화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 산 기슭 옛성당리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환웅·환검(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태백산의 봉우리들과 문화유적
태백산 최고봉은 현재 장군봉(1,566.7m)이라 일컫고 있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1,560.6m), 그리고 남쪽의 부소봉(1,546.5m)과 부소봉 동쪽의 문수봉(1,517m)이
대표적인 봉우리들이다. 그런데 태백산 북쪽의 함백산(1,572.9m) 등 더 높은 봉우들이 태백산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제단이 있는 현재의 산봉이 태백산 주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선인들은 지금과 같이 정밀하게 산 높이를 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태백산의 산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수(文殊)·대박(大朴)·삼태(三台)·우보(牛甫)·우검(虞檢)·마라읍(摩羅邑)의 봉우리들 이 6, 7백리를 울창하게 서리어 있다.' 위의 대박봉 곧 대박산(大朴山)은 '한밝달'의 차용표기로, 전음되어 현재는 함백산으로 불리고 있다.
함백산 북서쪽 기슭에는 오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다. 이 절로 인해 함백산은 동국여지승람 정선군조에 의하면, 정암산(淨岩山)으로도 불리었고,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의하면, 묘범산(妙梵山)으로도 불리었으며,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조에 의하면 작약봉(芍葯峯)으로도 불리었다. 또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함박봉 곧 함박산(含朴山) 속칭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리어졌다.
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가 있었던 각화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각화산(覺華山·1,176.7m)이고,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부석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리어졌다.
태백산은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정암사사적기에 의하면 그 일명으로서 '대여산(黛輿山)'이라 일컬은 예도 있다.
- 태백산 자연환경과 문화
민족의 영산으로 알려진 태백산(1,567m)은 주목군락지로 유명한데, 봄이면 주목과 어우러져 피는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태백산철쭉제는 철쭉이 만개하는 시기에 맞추어 1985년부터 열리고 있다. 태백시가 주최하고, 태백산철쭉제위원회가 주관한다.
태백산 정상 천제단 일대와 장군봉, 부쇠봉 일대에 이르는 화려한 철쭉과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생대 초기 화석, 구문소(천연기념물 417) 등과 연계하여 열려 해마다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주요 행사로 산신제, 태백산등반대회, 철쭉제 태백주부가요제, 산악인 장기자랑대회, 태백 캠포트제닉, 팔도 사투리 경연대회, 철쭉제 사생대회가 열리고, 대중클래식 경음악연주회, 마임페스티벌, 대북공연(소릿길), 사물놀이 공연, 가두놀이(카지노, 칵테일), 칵테일쇼, 세미 클래식콘서트, 퓨전 국악공연, 어린이 스포츠댄스 공연, 남사당패 공연, 전통 풍물놀이 등이 펼쳐진다.
고생대 화석 명품전, 맑은 물 사진전시, 태백풍물 사진전이 행사 기간 동안 열리며, 화석모형 만들기, 현지 화석캐기를 체험할 수 있고, 화석영화를 상영한다. 그외 불꽃 퍼포먼스, 산악인의 밤이 열리고, 향토 음식장터, 옛날 태백식당, 태백특산물 판매코너(산나물, 특산품)를 통해 지역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사길령 산령각(산신각)]
사길령의 본래 이름은 새길령. 고려시대에 새로 개척한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했지만 가장 가까운 길인 만큼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 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의 인솔 하에 넘어 다녔다. 산이 험해 맹수와 산적들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에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를 올린다. 현재 태백산사길령산령각계회에 보존 중인 천금록은 200여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화방재] 939m
태백과 영월을 연결하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허리를 넘어간다. 마루금에는 어평휴게소 겸 주유소가 자리한다. 내륙쪽 200m 거리에 만항재에서 내려온 414번 지방도로가 합류한다. '화방'은 '꽃밭'이라는 뜻이다. 진달래 피는 계절에 이곳을 여행해본 종주자에게는 쉽게 납득된다. 봄이 되면 도로변의 밭을 제외하고는 온 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드는 장관이 연출되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어평재라고 부른다. 서쪽 기슭의 어평이라는 마을에서 유래했다 한다. 어평이란,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御坪)이다."라고 해서 '어평리'라는 이름이 붙었고 '재'를 어평재라 불렀다는 유래도 있고, <태백의 지명유래>에는 봄이면 고갯마루 부근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타올라 꽃방석 같다 하여 화방재(花房嶺)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방화선(防火線)을 설치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으며,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수리봉]
함백산 구간의 가장 남쪽 봉우리다. 남쪽 건너편으로 태백산이 올려다 보인다. '독수리의 일종인 수리가 살던 봉우리'다. 일견 '솔(松)'이 '수리'로 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제 아름드리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는 지역이다. 그 중에는 수백 년쯤은 족히 먹어 보이는 것도 많다.
[만항재] 1330m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포장도로로 고도가 무려 1,330m이다. 그래서 국가대표선수들의 고산 적응 훈련 장소가 있다. 만항재는 정선, 태백, 영월의 경계에 위치한 재로 함백산 줄기가 태백산으로 흘러내리면서 잠시 쉬었다 가는 곳으로, 1980년대까지 일대에서 캐낸 석탄을 옮기던 운탄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암사 입구를 지나 고개에 오르는 동안 만나게 되는 만항마을은 본래 주변 탄광의 근로자들이 살던 마을이다. 그러나 인근 탄광들 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주민들이 밭농사에 손을 대 삶을 이어 간다.
만항재의 북쪽 일대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이어져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는 봄부터 야생화 천국을 이룬다. 정제된 느낌이나 향기는 덜하지만 자유와 생명력 만큼은 오히려 정원을 장식하는 관상용 꽃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晩學재의 뜻이라고 하며, 늦은목이재도 비슷한 뜻이라고 한다.
[꼴두바위]
광산마을 상동의 꼴두바위.
상동은 지금이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산촌마을이지만, 한때 우리나라를 먹여살릴 정도였다는 엄청난 규모의 중석(텅스텐) 광산인 대한중석이 있던 곳이다. 대한중석은 아시아 최대의 중석광산으로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다. 중석을 캐던 광부들은 석탄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보다 월급이 50% 정도 높았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설명. 그래서 매일 밤 상동의 술집이며 유흥업소들은 하루 일을 끝낸 광부들로 흥청거렸다고 했다. 광산이 문을 닫은 뒤, 상동은 빈집이 훨씬 더 많다.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 마치 시간이 20여년 전에 멈춰진 것처럼 쓸쓸하다.
꼴두바위는 마을 한복판에 불쑥 솟아있는 거대하고 기괴한 바위. 금강산 만물상의 일부처럼 보이는데, 흙 한 줌 없어 보이는 바위벼랑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조선시대 송강 정철이 강원감사로 있을 당시, 이 바위를 보고는 목욕재계한 뒤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주변 사람들이 '왜 바위에 절을 하냐'고 물었더니 '몇백년 후에 세상사람들의 숭배를 받을 바위'라고 예언했단다. 마을 사람들은 1923년 이곳에서 중석광산이 개광된 것이 바로 '예언의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정암사]
대한 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자장(慈藏)이 636년(선덕여왕 5)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인 산시성[山西省] 운제사(雲際寺)에서 21일 동안 치성을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의 신보(神寶)를 얻어 귀국한 후 전국 각지 5곳에 이를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한 곳이 이 절이었다고 한다. 신보는 석가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가사·염주 등인데, 지금도 사찰 뒷편 함백산에 남아 있는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水瑪瑙塔)에 봉안되어 있다고 하여, 법당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두산백과)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1713년(숙종 39) 중수했는데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중건하였고, 최근에 새로 두세 차례 중건하였다. 신라시대 때 절을 창건한 자장법사가 탑을 쌓기 전 정성껏 기도를 하니 용왕이 감복해 빛이 고운 수마노(석영의 일종)를 하사했고, 이를 받아와서 탑을 쌓았다 한다.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 법흥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원래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데, '사리'라는 진신이 모셔졌기 때문이다. 정암사에는 그 사리가 산의 위 중턱인 수마노탑에 모셔져 있다. 수마노탑은 용왕이 보내준 마노석을 쌓은 탑으로 알려져 있다.
-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熱目魚 捿息地)
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하천에서 가장 상류의 시원한 곳에서 살고, 겨울에는 중류지역까지 내려와서 월동한다. 정암사의 열목어서식지는 세계에서 열목어가 살 수 있는 가장 남쪽지역이며, 숲이 잘 발달하여 열목어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지닌 지역 가운데 하나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창옥봉]
특이한 점 없는 흙길의 능선봉우리와 이어지는 안부 능선 길. 표지석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옥봉'이란 걸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함백산] 1572.9m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는 산.
강원 동부의 최고봉으로 정상에서 태백산, 백운산 등 지역 전체와 동해 일출 전망이 가능하며, 전국 최고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삼척탄좌 등이 소재하고 있어 석탄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산업선인 태백선 철도가 산의 북쪽 경사면을 지난다.
함백산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동·서·남·북으로 뻗친 대간과 지맥의 분포를 살펴 저술한 산경표에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선총쇄록에는 상함박, 중함박, 하함박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왜 함백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태백(太白), 대박(大朴)과 함백(咸白)이라는 말은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측량기술을 통해 밝혀낸 높이는 함백산(1,572.9m)이 태백산(1,566m)보다 높지만 옛날에는 두 산 모두 '크게 밝은 산'의 봉우리였음이 틀림없다.
함백산 북서쪽 사면에는 서기 636년 신라 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정암사(淨岩寺)가 있으며, 함백산 등산로 중 하나인 만항재는 해발 1,313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도로이며 싸리재는 1,268m로 만항재와 버금간다. 이곳에선 매년 8월이면 함백산 야생화축제가 열린다.
[중함백]
중함백 정상엔 인공으로 깍은 듯 자연스레 깎인 넓은 돌 판 쉼터가 있다. 이정표나 표지석이 없으나 동남쪽으로 시야가 열려 있어 황지 시가지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함백산 방송 중계탑과 함백산 스키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함백에서 함백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유명한 주목군락지가 있다.
[은대봉] 1442.3m
함백산의 봉우리인 상함백산, 중함백산(1,505m), 하함백산(1,527.9m), 창옥봉(1,380m) 중 상함백산을 가리킨다. 정암사를 세울 때 조성된 금탑, 은탑에서 금대봉과 은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두문동재(예전 이름 싸리재)를 통해 바로 이웃에 있는 금대봉과 이어진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금대봉·비단봉·천의봉, 동쪽으로 태백시와 백병산·면산·묘봉으로 이어진 낙동정맥, 남쪽으로 중함백산, 서쪽으로 백운산·두위봉 등이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아래로는 죽령터널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긴 정암터널(4,505m)이 지나간다.
낙동강의 원류 발생지는 이곳에서 가까운 천의봉의 동쪽계곡에 자리한 너덜계곡으로 공식 인정되었지만, 은대봉의 은대샘에서 태백시 화전동쪽으로 흘러내리는 황지천(黃池川)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산자락에는 태백광업소와 한국 기차역 중 제일 높은 곳(855m)에 위치한 추전역이 있다. 부근에 정암사, 용연동굴이 있다.
- 낙동강의 발원샘 은대샘(너덜샘)
낙동강의 첫 물방울은,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황지보다 상류에 있는 은대봉의 너덜샘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전문가나 향토사학자들은 너덜샘은 낙동강의 발원샘,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황지의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문동재] 싸리재 1268m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를 들추어보니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 한다. 전설을 따르자면, 회유에 지친 조선의 태조는 끝내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신하들이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정선 두문동으로 숨어들어 마지막 공양왕을 그리며 읊은 시가 정선아리랑의 시원이라고 한다.
-> 흔히 두문동재의 옛 이름을 싸리재라고도 하지만,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싸리재는 또다른 고개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참고 산행기
누리사랑 산행기
https://cafe.daum.net/single-mt/YEt2/36?svc=cafeapi
https://cafe.daum.net/single-mt/YEt2/37?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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