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星) 이야기
어둠을 밀어내고 별은 매일 태어난다. 평화로운 세상이든 전쟁터든 별은 공평하게 어디에나 뜨고 진다. 별을 딸 수는 없지만 마음에 담을 수는 있다. 옛 사람들이 별(星)이란 빛의 의미가 아니라 매일 살아나는 뜻으로 만든 지혜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별은 언제나 있을 곳에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침판 역할을 한다. 사람은 한평생 어쩌면 별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밤하늘별을 보면 멀어진 시간을 찾아가게 된다. 흐드러지게 별빛이 쏟아지는 산골의 여름밤은 더욱 그렇다. 옅은 쑥 향이 아늑한 느낌을 선사하는 모깃불을 우물가 마당 옆에 피워놓고, 풀이 타다가 말라 불꽃이 오르면 우물물을 길어 잔물을 뿌려가며 은하수 흐르는 작은 하늘 아래 평상에서 할머니 옛날이야기 삼매경(三昧境)에 빠졌다. 부엉이 울고 멀리 숲 위로 인(燐)불이라도 나르는 눅눅한 여름밤은 도깨비 이야기가 재밌고 무서웠다.
할머니 옛날이야기는 몇 번을 듣다보니 한 구절 넘어가기도 전에 다음이 떠오를 정도로 항상 같은 이야기였지만 느릿하면서도 가끔씩 이어지는 감탄과 강조는 언제나 색다른 맛을 냈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분위기 도우미였다. 돌담 둘러싸인 대나무는 까닭 없이 흔들리고 감나무 잎은 무성하여 산골의 밤은 쉬이 깊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달빛마저 밀어내면 별똥별이 창날처럼 떨어지고 높은 하늘은 바람이라도 부는 지 잔물결에 휩쓸리듯 별들이 깜빡깜빡 얼굴을 씻었다.
몰려오는 옅은 초저녁잠에 눈을 몇 번 문지르신 할머니는 곧 비님이 오시겠구나 하면서 말똥말똥 잠들지 못하는 아이들 등을 거친 손바닥으로 쓰다듬으셨다. 매캐한 모깃불은 눈을 감겼지만 부엉이 울음에 긴 이야기가 끝나도록 잠은 오지 않았다.
세상을 모르던 어린 시절 하늘이 맑은 날 밤이면 언제나 별들은 떠있었고 그 별들은 작은 반짝임으로 가슴 속에 들어왔다. 어스름 밤하늘 산골의 아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마음에 별 하나씩을 담고 살았다. 별은 때로는 빛나고 때로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아프고 외로울 때면 마음 속 별은 가라앉았지만 시집간 큰누나가 친정에 다니러 오기라도하면 한낮에도 별은 떠오르고 빛났다.
별은 깨어진 유리조각이고 영롱한 구슬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별일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목걸이로 만들어 달 수 있을 것 같아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밤새 떨어진 별똥별을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곤 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해질 때쯤 별은 스테파네트와 뤼블롱산 양치기목동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빛나는 소품으로 마음 한 곁에 자리했다.
도시를 떠돌기 시작하면서부터 별은 쓸쓸함과 그리움, 고향 숲의 느티나무, 잊혀져간 친구의 이름이 되어 입가를 맴돌았다. 사막에 버려진 느낌이 들 정도로 세상에 지쳐갈 때 쯤 별은 장미나 여우로, 그들과 이야기하는 어린왕자가 되어 주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은 고향 냇가 나무 평상에 함께 모여 앉아 무리 진 별들을 쳐다보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음을 헛헛한 웃음과 옅은 한숨으로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저 많은 별 어딘가는 우리가 사는 지구와 같은 별이 있을 꺼라했고 또 어떤 친구는 삶이 모여 있는 별, 죽음이 모여 사는 별이 있을 거라며 밤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이미 죽음으로 변한 젊은이의 이야기와 아직도 삶을 이어가고 있는 늙은이의 이야기도 어우러졌다. 어떤 삶은 의미가 있었고 어떤 죽음은 허무한 기억으로만 떠돌았다. 그들의 삶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과 같이 그려지면서 곧 우리들의 삶이 되어 있었다. 삶의 이야기를 하다가 죽음의 이야기를 하고 마침내 삶과 죽음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며 헤어졌다.
지금도 여전히 별똥별이 떨어질 텐데 이젠 만나도 말하는 이가 없다. 별똥별을 볼 수 있는 나이도 정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신기함이 없어진 나이가 되면 가까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멀리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게 되나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많아짐은 순수의 연못에 허욕만 가득 채워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하늘에서 별이 보이지 않고 점점 사라지더니 이제는 눈을 감아야 별이 보인다. 별은 가슴을 떠났고 별이 없는 하늘을 무심히 보면서 도심의 골목길을 그냥저냥 걷는다. 고향의 작은 언덕 너머에는 지금도 해가 세상을 두루 감싸 안으면 별은 자취를 감추고 달이 뜨면 큰 별들만 별이 되지만 달도 없으면 하늘의 별들이 다 함께 반짝이는 것은 여전할 것이다.
별이 바람에 씻길 때는 마냥 반짝거리고 하늘과 산이 흠뻑 젖도록 비 내린 뒷날 밤은 강기슭에 쌓인 모래톱보다 더 많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던 날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부엉이도 울고 소쩍새도 우는 냇가에서 오래전 한여름 밤 이야기들을 나누어보고 싶다. 다시 별을 가슴에 담아보고 싶다. 고향의 밤하늘에는 지금도 수많은 별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게다. (끝)
첫댓글 언제부턴가 별이 보이지 않았고
품었던 별도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가끔 한대 얻어맞으면 별이 반짝이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예전에 바라보았던 별들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습니다.
별들이 다 사막으로 갔다네요
사람이 살지 못하는 사막으로
별들도 사람들이 스스로 별을 만들어 사는 인간세상에서 할 일이 없음을 알아챘나 봅니다
이제 별을 찾아 어린왕자처럼 사막으로 떠나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