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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장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세 비유들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전장인 제 24장에서 시작되어 본장까지 계속된 감람산 강화(講話)의 연속 부분이다. 즉 우리 주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 수난 삼 일 전에 감람산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에 있을 여러 징조와 주요 사건 및 그에 대한 자세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감람산 강화의 연속 부분이다. 본장 전체는 특히 전장 초반부(24:1-44)가 종말의 징조와 주요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인 것과는 달리 전장 말미(24:45-51)의 두 종의 비유와 더불어 종말을 맞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와 그 결과에 대하여 교훈하는 세 비유에 대한 보도이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의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3절은 열 처녀의 비유이다. 이는 전장 말미의 두 종의 비유와 함께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위임되어 있어 그 누구도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종말(終末)의 도래시기에 대하여 평상시에 각각 상반된 자세를 견지하는 두 종류의 집단과 그들이 당할 상반된 운명을 대조시켜 보여 준다. 이는 종말 도래의 확실성 그리고 이를 늘 기억하여 평상시의 생활에서 근신할 것 등 종말에 대한 성도의 가장 기본적 자세를 교훈하는 비유라 하겠다.
14-30절은 종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주신 소명(召命)을 각각 상반된 자세로 수행하는 자들의 모습과, 고난에 임했을 때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그 소명의 수행 자세에 따라 각각 다르게 심판 받을 것을 보여 주는 유명한 달란트(the talent) 비유이다. 이 비유는 특히 종말을 전제했을 떼 결국 종말로 가는 중간 과정기라 할 수 있는 현실에서 무엇을 그리고 어떠한 자세로 행할 것인지를 교훈하는 비유이다. 이 달란트 비유는 종말이 있다고 해서 성도가 수동적으로 현실 도피식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무사안일식으로 종말의 도래를 무시하거나 하는 극단적인 논리가 성립할 수 없음을 잘 보여 준다. 즉 이후 종말이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당신의 섭리에 따라 다양하게 소명을 주시고 또 이에 따라 각자에게 재능과 능력까지 주셨으므로 이를 이 세상에서 건실하게 수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라 훗날 영벌과 영생의 심판이 나아가 상급의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생활이 현실부정이나 무사안일식의 방종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한 주의 명령을 건실하고 적극적인 소명실천의 기간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31-46절은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는 세상 끝날 인간이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로 확연히 구분될 것을 엄숙히 경고해 주는 비유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기준은 사람이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주의 사랑과 계명을 실천 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는 인간 구원의 조건이 선행(善行)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는 이웃에 대하여 주의 사랑과 계명을 실천할 의무가 있고 또 믿음을 갖고 주를 섬기는 자는 자연히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서의 모습을 갖게 되는 바 결과적으로 이런 자들이 구원 받을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비유이다.
즉 인간 구원의 내적, 근본적 조건이나 원리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가 외면적으로 드러내 갖는 특징만을 지적 강조한 비유이다. 특히 이 비유는 문맥상 종말을 대비하여 성도가 현실 도피적이고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빠지는 위험과 어리석음을 경고한 것이다.
이상을 종합할 때 주님은 우리 성도가 종말을 대비하여 그 종말이 분명히 임할 것을 믿고 늘 대비하면서도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의 소명과 능력을 살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영광을 돌리며, 특히 하나님의 사랑과 계명을 실천하는 신실하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것을 원하신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받을 수 있다. 한편 전장 말미의 두 종의 비유 및 본장의 세 비유 등 종말을 맞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비유의 말씀 각각에 나타난 개별적인 의의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약하기로 하고, 주님이 이처럼 세상 종말에 대한 강화(講話)를 주신 사실의 전반적인 의의에 대해서는 전장 구속사적 개관 란에 상술하였으므로 이를 참조하라.
외울 말씀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열 처녀 비유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달란트 비유
14 ○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양과 염소의 비유
31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25:1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
본문의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로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혼인절차(본서 1권 할 24장 자료노트 참조) 중에는 신부의 들러리들이 신랑을 기다렸다가 혼인 잔치 장으로 신랑과 그 일행을 인도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신랑이 저녁 무렵에 올 경우가 있었으므로 신부의 들러리들은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해야 했다.
한편 예수님은 이와 같은 당시 히브리인의 결혼 풍습을 비유로 들어 예수 재림 시에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앙 자세를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그리고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비유적인 표현들이 있다. 이에 성경에서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들을 한데 모아 보았다.
풍습-25:1-10, 결혼 절차
창 24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25:13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막 1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 25:1-13
열 처녀 비유의 이해 예수님은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열 처녀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이 단순히 주님이 오실 것을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림과 재림 후에 받을 상급에 대하여 열심으로 준비하는 것이 보다 중요함을 알게 한다. 다음에 주님으로 비유된 신랑을 맞는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주님을 맞는 성도의 자세를 알아보자.
1. 공통점
1) 다 신랑을 기다림(1절)
2) 다 등을 들고 나감(3,4절)
3) 다 졸며 잤음(5절)
4) 다 신랑이 온다는 소식 들음(6절)
5) 다 신랑을 맞으러 등을 준비함(7절)
2. 차이점
1) 슬기로움과 미련함(2절)
2) 기름을 예비함과 하지 않음(3,4절)
3) 신랑을 맞음과 맞지 못함(9-12절)
4) 혼인 잔치에 참예함과 못함(10-12절)
3. 교훈
1) 항상 깨어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함(마 24:42)
2)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삶을 삼(마 24:42-51)
3) 재림의 때가 더딘 것 같아도 늘 예비하고 있어야 함(마 24:44)
보감-25:1-13 본서에만 나오는 비유와 핵심 주제
1. 가라지의 비유(13:24-30) 의인과 악인의 상이한 종말
2. 감추인 보화의 비유(13:44) 천국의 절대적 가치
3. 값진 진주의 비유(13:45,46) 천국을 얻기 위한 노력
4. 그물의 비유(13:47-50)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 날의 모습
5. 사람을 더럽히는 것의 비유(15:11) 내적인 정결의 중요성
6. 무자비한 종의 비유(18:23 -35) 용서받은 자의 용서의 중요성
7. 포도원 품꾼의 비유(20:1-16)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에 의한 구원
8. 두 아들의 비유(21:28-32) 회개와 말씀의 실천
9. 혼인 잔치의 비유(22:2-14) 주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중요성
10. 열 처녀의 비유(25:1-13)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
11. 달란트 비유(25:14-30) 은사의 활용
12.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 선인과 악인에 대한 최후의 분리
보감-25:14-30 하나님의 종된 자의 사역 자세
1. 지체 없이 일함(마 21:28)
2. 각각 맡겨진 대로 일함(막 13:34)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함(요 4:34)
4. 일할 때를 놓치지 않고 일함(요 9:4)
5. 충성을 다함(고전 4:1,2)
6. 회계할 날이 있음을 기억함(고전 4:5)
7. 흔들리지 않고 항상 힘써 일함(고전 15:58)
8. 모든 일에 근신하여 직무를 다함(딤후 4:5)
9. 먼저 선한 일에 본을 보임(딛 2:7)
10. 은사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함(벧전 4:10)
보감-25:14-30 '달란트 비유'를 통한 10대 교훈
이 비유는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남은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대해 성도들이 충성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한편 헬라어로 '달란트'는 '재능', '은사' 등의 의미로서 본 비유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충성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에 본 비유의 교훈을 요약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달란트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임(14절)
2. 하나님은 각기 다른 달란트를 모든 사람에게 주심(15절)
3. 자신의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야 함(16,17절)
4. 자신의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며 감사해야 함(16-18절)
5. 맡겨진 달란트로 성실히 봉사해야 함(20-23절)
6. 자신의 달란트에 충성하면 하나님의 칭찬 받음(20-23절)
7. 자신의 달란트에 충성하면 더 많은 재능을 받음(23절)
8. 자신의 달란트의 목적을 인식해야 함(27절)
9. 달란트를 활용지 않으면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됨(28,29절)
10.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달란트를 값지게 사용해야 함(30절)
원어연구-25:13, 깨어 있으라
'죄 사함'에 쓰인 헬라어 '그레고레이테'는 '그레고레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 복수 2인칭이다. 이 동사는 원래 '일으키다', '자극하다'라는 뜻의 '에게이로'의 완료시제 '에그레고라'의 2인칭 복수명령형이다. 여기서 '에그레고라'의 일차적인 의미는 '잠에서 깨어 일어서다'이다. 그런데 이것이 70인 역본(LXX) 느 7:3에서 '파수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마드역어(譯語)로 쓰였다. 따라서 '에그레고라'는 파수꾼이 파수하기 위해서 잠을 자지 않고 밤새 깨어 서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비유적으로 '주의 하다' 특별히 '태만과 부주의함으로 파괴적인 재난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지적 각성만이 아니고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세대의 모든 일들을 엄밀히 살펴 분별하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파수꾼들이다. 즉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 스스로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막14:38), 잘못된 행위를 자각하여 회개함으로써 주님 맞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계 3:2,3). 이 세대가 마지막 때에 왔음을 인식하고 그 때에 대한 징조들을 잘 분별하고 깨달아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깨우쳐야 한다(겔 3:17).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 곧 파수꾼의 자세이다.
보감-25:14-30 봉사자의 축복
주 안에서 봉사하는 것은 사실 앞으로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이 너무 감사해서 하는 것이고 또 봉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그 어떤 봉사로도 갚을 길 없는 구원을 주셨으면서도 새로이 봉사에 대한 상급도 예비해 주셨다. 이에 대해 다음 도표에서 알아보자.
1. 하나님의 귀히 여김을 받음(요 12:26)
2.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음(롬 14:18)
3. 사람의 칭찬도 받음(롬 14:18)
4. 더 큰 일이 맡겨짐(마 25:23)
5. 하나님의 상을 받음(고전 3:7,8)
6. 유업의 상을 받음(골 3:24)
7.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함(마 25:23)
8. 천국에서 큰 자로 여겨짐(마 5:19)
9. 영광의 면류관 받음(벧전 5:4)
도표-25:29, 성경의 역설들
마 16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25:31 인자(人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25:1-46 예수님의 비유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이즈' 참조
보감-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한 교훈
이 비유는 예수의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서 마지막 심판 날에 의인과 악인이 각각 받을 상급의 심판과 영벌의 심판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는 것에 따라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심판을 받지만 그 심판의 기준은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인은 어차피 영벌이 작정되었기에 차치하고서라도 의인은 큰 상급을 받기 위해 더욱 의를 행하는 일에 전력해야 한다.
1. 세상 끝 날에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반드시 있음(31-33절)
2. 예수의 최후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임함(32절)
3. 주는 의인의 잘못과 악인의 선행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으심(34'41절)
4. 예수의 재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임(35-40절)
5. 의인은 상급의 심판, 악인은 영벌의 심판을 받음(40,45절)
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주님께 상달되지 않음(41-45절)
7. 예수의 최후 심판으로 의인과 악인의 내세의 구별이 시작됨(46절)
25:1-13 열 처녀 비유
본장은 앞장(24장)과 마찬가지로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종말에 대한 비유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일명 '열 처녀 비유'라 부르는 부분으로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열 처녀 비유는 유대 사회의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창 24장 자료 노트, '결혼 절차' 참조), 이 비유에 나타나는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을 맞으러 나간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는 성도들을,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기름'은 이를 유지시켜 주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리고 본 비유애서 열 처녀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눈 것은 성도라 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계 19:7,8)에 들어갈 자와 버림받은 자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한편 여기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음을 뜻한다(딤후 3:5).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도로서의 신앙의 겉모습은 있으나 정작 이러한 참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성령'의 역사는 없는 신앙을 가진 자들을 가리킨다.
하여튼 이 열 처녀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열' 또는 '다섯'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그 준비 상태에 따라 둘로 양분되었다는 것이며, 신랑이 더디 올 때에 신랑 맞을 준비를 철저히 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반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본 비유는 앞장의 후반부에 언급된바 있는 집주인의 비유(마 24:42-44)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므로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되, 예수께서 언제 오시든지 간에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보석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성도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재림하신다(계 19:9). 그런데 미리 준비하고 있는 자만이 주님과 더불어 잔치에 참예할 수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과 삶의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거룩하고 의로운 믿음과 삶의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기름이 떨어진 등을 지니고 있다가 혼인 잔치에 참예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여러 가지 징조들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마치 밤중의 도적처럼 불시에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살전 5:2; 벧후 3:10). 성도들은 단 한 순간이라도 영적인 잠에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만약 우리가 세상 종말이 가까와 옴을 느낄수록 더욱 열심을 내어 주님을 사랑하고 결코 영적인 게으름과 잠에 빠지지 앓는다면, 마침내 지극히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롬 12:11; 히 10:25; 약 5:8; 벧전 4:7).
25:1 그 때에. - 이는 본서에서 많이 사용되는 접속사로(약 90회)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과 관련이 없이 대략적인 때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그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장은 마 24:51에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교훈임을 알 수 있다.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시의 결혼 풍습을 비유로 들어 비록 심판적 경고와 더불어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천국의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는 본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되어 있다.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이다(단 2:44; 7:13,14,27). 물론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이란 표현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해당하는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출 15:18; 민 23:21; 시 29:10; 사 6:5; 렘 46:18) 영원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 )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마 18:4)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마 3:2 주석과 눅 서론 특별자료,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등을 들고. - 본 천국 비유에 등장하는 '등'(람파다스)은 일종의 '횃불'(Torche)이었다. 왜냐하면 집 안에서 사용하는 작은 등은 바람에 약하여 결혼식 행사에는 부적당하기 때문이다. 이 횃불은 꼭대기에 기름을 듬뿍 묻힐 수 있는 솜뭉치를 가지고 있는 장대로 만들어 졌으며, 신랑 행렬이 지날 때는 높이 들어 그 행렬이 지나는 길을 비추었다. 그러나 불꽃이 밝게 타오르면 곧 기름이 고갈되어 버린다. 계속 횃불이 타오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솜뭉치에 15분마다 감람유를 공급해야 했다(Jeremias). 따라서 횃불 장대를 가지고 오는 자들은 횃불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만 한다. 특별히 신부 들러리로서 신랑 집에 가서 횃불 춤을 추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Kistemaer). 물론 들러리들이 등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으로 만일 등을 준비하지 않고 결혼 행렬에 참가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자로 취급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 본절을 보면 합동결혼식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신랑을 맞을 처녀가 열이나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합동결혼식도 아니며 일부다처제적인 것도 아니다. 분명히 시집가는 처녀는 하나이다. 즉 여기서 열 처녀는 신부들이 아니 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들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의 일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결혼은 보통 해가 진 후에 진행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루가 해질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로 계산되었던 관습 때문이었다. 하여튼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들러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손에는 신랑 행렬을 비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데, 신부 들러리들이 보통 열 명으로 구성되었다(Findlay). 그리고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 들러리들은 신랑을 신부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그 이후로 문은 닫혀 출입이 금지된다. 그것은 당시 강도들이 결혼식장을 자주 침입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열 처녀 비유를 살펴보면 보다 그 내용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한편 '1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보통 완전을 상징하는 수이다. 그러므로 신랑이 종말의 때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열 처녀'는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기다리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당시의 결혼 풍습에 대해서는 창 24장 자료노트, '결혼 절차'를 보다 참조하라.
25:2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 '미련하다'(모라이)는 말은 태만하고 별 생각 없이 생활하는 상태를 말하며, '슬기롭다'(포로니모이)는 말은 생각이 깊고 준비성이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본절은 '열 처녀' 가운데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각각 다섯 명씩 둘로 양분하고 있는데, 본절에서 주목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처녀들이 둘로 양분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교회 공동체 내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25:3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본절에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전혀 기름을 준비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하지만 당시의 등이 횃불 모양이었고 기름을 약 15분 간격으로 계속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여튼 본 비유에서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상징하며, '기름'은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해 주는 성령을 상징한다(사 61:1-3; 히 1:9; 요일 2:20,27). 그렇다면 본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등은 가지되 기름은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신자가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 곧 성령을 받지 못한 성도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의 신앙은 처음에는 뜨거운 열심히 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기름이 부족한 등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이 그 신앙의 불꽃이 꺼져 마침내는 신랑 되신 예수를 맞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만다.
25:4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는 달리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혹시 늦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여분의 기름을 더 준비했다. 이는 신앙인이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끊임없는 영적 교제를 나눔으로써 생명력 있는 신앙을 유지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의 신앙인들은 항시 그들의 생활 속에서 믿음을 보이기 때문에 언제 신랑 되신 예수께서 오신다 해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다.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신랑의 행렬이 이처럼 지체되는 이유는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에는 결혼식이 주로 밤에 진행된 까닭에 신랑의 행렬이 종종 늦어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이며,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에게 큰 악화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처럼 지체되는 주의 재림은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악화로 작용하여 결국에는 주를 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할 것이다. 따라서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알곡과 가라지를 확실히 구별하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한편 신랑이 더디 온다는 말은 예수의 재림이 제자들이 기대한 것(눅 19:11) 보다 훨씬 지연될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준다(Trench). 그러나 신자들은 항시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마 24:63) 주의 재림은 마치 도적이 임함과 같이 돌연히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5:21; 벧후 3:10; 계 3:3; 16:15).
졸며 잘새. - 본문의 '졸며 잘새'(에뉘스탁산 파사이 카이 에카듀돈)란 말에서 '졸며'는 부정 과거형으로, 일시적으로 조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잘새'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적으로 자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신랑을 기다리던 처녀들이 졸며 잤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만큼 오래 지연되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기 졸며 잤던 것에 대한 책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닌 듯하다. 따라서 처녀들이 졸며 잔 행위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다만 본절의 핵심은 신랑을 기다리다 졸며 잘 정도로 신랑이 더디왔다는 것이며' 그에 따라 기름을 예비하지 않은 처녀들에게 그것이 악화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25:6 밤중에. - 여기서 '밤중에'(메세스 뉙토스)라는 것은 '한 밤중'(at midnight)을 말한다. 즉 신랑의 행렬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다 지쳐 잠에 골아 떨어질 정도로 늦어 진 밤중에 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가 예기하지 않은 시간에 돌발적으로 임할 것을 다시 한 번 시사해 준다(마 24:42,44).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 신랑을 결혼식장으로 인도하는 행렬의 돌발적인 외침이다. 이러한 갑작스런 외침은 마지막 때에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Parousia)을 알리는 천사장의 외침(살전 4:16)을 연상케 한다.
25:7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 여기서 '준비할 새'(에코스메산)는 '정돈하다', '가지런히 하다', '손질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열 처녀가 신랑 행렬의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등의 심지를 손질하고 기름을 다시 채우는 등 일련의 준비를 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미련한 자나 슬기 있는 자나 신랑 행렬의 외침을 듣고 일어나 신랑 맞을 준비를 했다는 사실은 주의 재림이 완전히 이르러 심판이 진행되기까지는 교회 내에 가라지와 알곡이 구분 없이 존재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마 13:24-30).
25:8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기름을 예비치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시하는 말로, 성령과의 긴밀한 교제 없이 신앙생활을 한 자의 영적 생명력이 상실되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기름을 예비치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줄 것을 호소하는 장면이다. 즉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 행렬의 외침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준비가 미흡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모습은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외치는 천사장의 소리를 듣고 당황해 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하게 해준다. 하여튼 미련한 다섯 처녀들의 기름을 나눠 달라는 요구는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자기가 쓸 만큼만 준비한 까닭에 여분이 있을 수 없고 만일 자신의 것을 나눠 준다면 자기도 부족하여 신랑을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마지막 때의 심판은 개개인의 준비 여부에 따라 결정되며 개인의 의는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다.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너 쓸 것을 사라. - 기름을 나눠 달라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에 대한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의 대답은 냉혹하리만큼 단호하다. 하지만 이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슬기 있는 자들이 기름을 예비한 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으며, 신랑을 맞는 들러리들이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은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신자 각자가 받는 것이다(요 14:16). 결코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슬기 있는 자들의 대답은 오히려 합당한 것이었다. 다만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처럼 준비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가 그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그는 결단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25:10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아펠코메논 데 아우톤)라는 말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라는 의미이다. 즉 신랑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채 사기도 전에 온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인 너무 늦은 일임을 시사한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여기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등과 함께 신랑이 더디 올 것을 대비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그들은 비록 신랑이 더디 왔지만 여분의 기름을 더 준비한 까닭에 신랑이 왔을 때 그를 맞이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주의 재림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성령으로 더불어 세상 끝 날까지 친밀한 영적 교제를 나누는 자들이다.
문은 닫힌지라. - 유대 혼인 풍습에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잔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잔치 집 문은 굳게 닫히고 잔치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문이 닫힌 후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특별히 여기서 '닫힌지라'(에클레이스데)는 부정과거 수동태로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데 더 이상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본절은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기까지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심판만이 존재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혼인 예식 때 '잔치집의 문을 닫았던 것은 당시 강도와 도둑의 잦은 습격으로부터 신랑 신부와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 였다.
25:11 남은 처녀들이‥‥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본절의 '남은 처녀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름을 예비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기름을 사러 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이들은 이미 잔치 집 문이 닫힌 뒤에야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즉 그들은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잔치에 참여할 만한 준비를 미처하지 못한 까닭에 마치 강도와 도둑과 같이 취급받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믿음도 때가 있는 법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요 12:36)고 했고,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고 했다. 그러므로 때를 놓치는 자들은 영영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천국은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믿음과 인내로 기다리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마 7:21,22).
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문을 열어 주기를 간청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의 호소에 대한 주인의 답변으로, 이는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한 성격을 나타낸다. 특별히 여기서 '알지 못하노라'는 말은 지식적으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만한 이유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결코 닫힌 문을 열어 줄 수 없다는 선언적인 말로 사용된바 심판의 엄정성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 열 처녀 비유(1-12절)의 결론으로, 이는 한 마디로 영적 각성을 촉구한 말이다. 즉 본절은 잠을 자지 말고 항시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언제 주님께서 오신다 할지라도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을 것을 촉구한 말씀인 것이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성도들이 항시 깨어 있어야 할 이유이다.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언제 불현듯 재림하실 지 알 수 없으므로 항시 긴장된 상태로 깨어 경성해야 하는 것이다(마 24:37-51).
25:14-20 달란트 비유
본문 역시 종말에 관한 비유로, 일명 '달란트 비유'라 부르는 부분이다. 앞 단락에 언급된 열 처녀 비유(1-13절)가 성도들에게 늘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교훈하고 있다면, 본문에 소개되는 달란트 비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맡은바 사명에 충성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이미 앞장에서 소개된 두 종의 비유(마 24:45-51)와 동일한 주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눅 19:11-27에 소개되는 므나의 비유와 종종 비교되는데' 이 두 비유는 여러 가지 유사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다른 비유이다. 왜냐하면 므나의 비유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재림하시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의 기대보다는 의외로 늦게 완성되리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하여튼 본문에 언급되는 '달란트'는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시간과 재능, 은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되 각각 재능대로 주었다(14,15절).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에 맞게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은사를 주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달란트를 맡기신 후에 이것을 가지고 예수의 재림 때까지 지혜롭고 충성되게 잘 사용할 것을 요청하고 계시다. 물론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달란트 곧 은사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둘, 한 달란트를 주고 오랜 후에 돌아와서 회계할 때 충성되었던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동등한 대우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22,23절). 다시 말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각각 양은 달랐지만 그것을 가지고 열심으로 가서 충성하여 이윤을 남긴 면에서는 같았고(16,17절), 따라서 주인은 충성스러운 두 종을 동등하게 대우하신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받은 은사의 대소에 관계없이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성도에게 동일한 하늘의 상급을 베푸실 것이다. 반면 완악하고 게을렀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가 받은 한 달란트마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고 말았다(30절). 이는 그가 능력이 없었던 까닭이 아니라 게을러 주인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으나 그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불신자와 동일하게 심판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각자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자들이 됐어야 할 것을 교훈해 준다. 실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재능과 은사가 다르며, 또한 맡겨진 사명이 다르다 할지라도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뿐이다(고전 4:2). 만일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서 하늘만 쳐다보며 허송세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마치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무익한 종이라 일컬음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여김을 받아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비극을 맛보게 될 것이다.
25:14 또. - '또'(가르)라는 등위 접속사는 본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14-30절)가 바로 전의 열 처녀 비유(1-13절)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계속되는 비유가 같은 배경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절이다. 즉 예수께서는 마 24장에서는 재림의 징조와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재림 때의 징조에 관해 말씀하시고, 본장에서는 재림의 시기 대신에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계신 것이다. 그 가운데 열 처녀 비유에서는 재림을 맞이할 성도의 준비성을 강조했다. 이제 달란트 비유에서는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달란트 비유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특별히 천국을 위하여 일하는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열 처녀 비유가 주로 성도의 영적이고, 정적인 생활을 교훈하고 있다면, 달란트 비유는 성도의 실제적이고 동적인 생활을 교훈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열 처녀 비유는 모든 제자들에 요구되는 일반적인 책임을 다룬 반면, 달란트 비유는 개개인에게 맡겨진 특수한 책임을 다루고 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 여기서 '어떤 사람'은 병행 구절인 눅 19:12에 의하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간 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 분봉왕들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듯하다. 물론 여기서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타국에 갈제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부재와 그 동안의 주의 일, 곧 복음 전도 사역을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에게, 이차적으로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 개개인에게 부탁하신 사실을 가리킨다.
종들을 불러. - 여기서 '종들'은 주께서 승천하신 이래로 교회를 책임질 사역자들과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소유'(휘팔콘타)란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와 모든 성도들에게 맡기신 천국 복음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 본절에서는 주인이 그 종들의 '재능에 따라' 차별을 두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특별히 '그 재능대로'(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란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의미로' 이는 곧 주인이 종들을 잘 알았고 그들의 능력을 바르게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이 그 종들에게 재능대로 자기 소유를 맡겼다는 것은 매우 공평하게 맡겼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 '달란트'(탈란타)는 원래 무게 단위였는데 금속의 무게를 통화의 수단으로 삼던 고대 유대 지방에서는 화폐의 단위로도 사용되었다. 보통 1달란트의 가치는 6천 데나리온 가량 되며(마 18:24), 따라서 1달란트를 벌기 위해서는 일반 노동자가 거의 20 년 동안 일을 해야 했다(Hendriksen). '달란트'에 대해서는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달란트'라는 말을 영어의 의미에서 보면 '재주' 특별히 선천적 재능이나 특별한 소질을 말한다. 본 비유에서는 1차적으로는 화폐 단위로 사용되었고, 2차적으로는 천국을 위하여 쓰여져야 할 '은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역사요 말씀의 역사이며,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기회를 말한다.
25:16,17 바로 가서‥‥남겼으되.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가서 그 돈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으며, 두 달란트 받은 종도 그와 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다. 여기서 '바로'(유데오스)는 주인이 떠나자마자 즉시는 아니더라도 종이 재빨리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가지고 어떤 일에 착수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그것으로 장사하여'(에르가사토 엔 아우토이스)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발휘하여
청지기로서의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Willams). 따라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신속하고 적극적이며 또한 창의적인 자세로 임했음을 말해 준다.
25:18 땅을 탁고‥‥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 돈이나 보물을 땅에 묻어두는 것은 그 당시에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었다(마 13:44). 따라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이렇게 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아마도 그것이 주인이 맡긴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즉 주인은 그것으로 장사하여 이윤을 얻게 하려는 의도로 종들에게 맡긴 것인데,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만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준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묻어 두고 불충성한 자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25:19 오랜 후에. - 종말론적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말로' 이 때가 '오랜 후'로 묘사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금방 이루어질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 여기서 '주인이 돌아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한 말이며, 또한 '저희와 회계할 새'(쉬나이레이 로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종말적 심판을 상업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Deissmann). 이와 같이 마지막 때의 심판 장면이 종들과 주인 사이에 회계를 하는 일로 비유되는 것은 성경에서 종종 나타난다(마 18:23; 21:34; 눅 19:15; 고후 5:10; 계 20:11-15).
25:20 주여 내게‥‥주셨는데‥‥남겼나이다. -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결국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단지 주인이 맡긴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성실성을 주인에게 펼쳐 놓았다. 특히 종은 주인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주민 앞에서 종으로서의 겸손한 자세이며, 여기에는 주인이 자신의 한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맡은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자는 마지막 때에 있을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고, 그 얻을 바 상급에 대해 믿음을 잃지 않는다(레 26:1-13; 신 28:1-14).
25:21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의 보고에 주인의 기쁨과 만족이 컸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주인에게 있어서 충성된 종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얼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잘 하였도다'라는 말은 '우수하다' 또는 '훌륭하다'라는 말로서 지난날 종의 노력에 대한 주인의 만족과 인정의 표시이다. 또한 '착하다'(아가도스)라는 말은 올바름을, '충성되다'(피스티스)라는 말은 '신실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로보아 주인은 자기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한 종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한다면 최고의 칭찬과 함께 최고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 주인이 다섯 달란트 맡은 자를 칭찬한 것은 그가 많은 이윤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가 자기의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섯 달란트가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주인에게는 큰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자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리라고 약속하였다. 다섯 달란트가 적은 것이라면 많은 것은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주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다면 장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을 맡기실 것이며 더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의 준비기요 시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 여기서 '주인의 즐거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말하기란 어렵다. 다만 그것은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와서 벌이는 잔치를 의미하거나(De Wette, Trench), 아니면 주인의 일에 대한 보다 폭넓은 참여를 의미할 것이다(Meyer, Bruce). 만약 전자를 취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베푸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일 것이고(계 19:9), 후자를 취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에의 참여를 의미할 것이다.
25:22,23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참예할지어다. - 두 달란트 받은 종의 보고(22절)나 그 종에 대한 주인의 칭찬(23절)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의 경우와 문자적으로 동일하다. 이와 같이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각각 다른 은사를 가지고 일했을지라도 천국에서는 동등하게 영생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아울러서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은 양에 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충성을 다하였는가에 관심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25:24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한 달란트 받았던 종도 역시 회계의 현장에 나왔다. 그런데 그 종은 주인을 향해 '굳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굳은'(스클레로스)이라는 말은 '완고하며 거칠다'는 뜻이다. 병행 구절인 눅 19:21은 '엄한 사람'(아우스테로스)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종의 이 같은 표현은 주인을 노동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완고한 수전노 같은 사람으로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그가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결국 자신의 불성실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찾으려 했음을 보여 준다. 즉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선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신에 주인을 자기 자신의 질투심과 이기적인 본성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의 나태함을 변명하기 위해 주인을 여전히 인색하고 탐욕 많은 구두쇠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는 주인을 꺼도 뿌리지 않고 거두려 하며 타작도 하지 않고 알곡을 거두려는 자, 다시 말해서 투자에는 매우 인색하고 또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노동력과 재산을 착취하려는 파렴치한 인물로 매도한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장사하며 이익을 남기면 그것은 주인의 소유가 될 것이 뻔하고 또한 만일 장사하여 실패하면 자신이 그것을 배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Stier). 실로 그는 주인에 대한 시기와 이기적 본성으로 인하여 주인의 선한 의도를 매도하고 불충성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25:25 두려워하여‥‥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주인이 너무 인색하거나 엄격하여 혹시 장사하다 실패라도 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고 믿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위하거나, 인간의 능력과 자력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 또한 인간 마음대로이며 아무도 그 용도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절의 표현 속에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주인의 원금에는 손해를 끼치지 않고 잘 보관해 왔다는 말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도리를 다 했다는 원망 섞인 불평이 내포되어 있다.
25:26 악하고 게으른 종아. -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다섯 달란트 및 두 달란트 받은 자들에 대한 평가(21'23절)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인의 평가에서 '게으르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악하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맡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절을 그와 같이 피상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익을 남기지 않고 한 달란트만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준 것은 그 중심이 완악하여 그 주인의 선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과 반항심이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그에 대해 '악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나는‥‥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게으른 종이 한 말에 대한 반문으로 게으른 종의 악함을 지적하기 위해 제기되었다.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받게 할 것이니라. - 본 구절은 앞서 게으른 종이 한 변명이 모순됨을 지적하고 있다. 즉 주인이 과연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과욕한 사람인 줄로 알았다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 최소한의 변리라도 받을 수 있게 했어야 올았다는 말이다. 한편 '취리하는 자들'(토이스 트라폐지타이스)은 문자적으로 볼 때 '환전상'이라는 의미이나, 실제적으로는 오늘날의 은행이나 사채업자와 같이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거나 돈을 다른 사람에게서 맡아서 돈놀이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동족끼리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출 22:25; 레 25:35-37) 이방인들에게는 허용하고 있다(신 23:20).
25:28 그에게서‥‥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르다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맡았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소유한 자에게 주게 했다. 이는 주인이 한 달란트 맡은 자를 더 이상 자신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종을 자신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곳으로 팔리게 될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쫓겨나게 될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그 종의 파멸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아니하고 불충성하는 자들에게 임할 비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준다. 하여튼 한 달란트 맡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겼고, 본래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가 남긴 다섯 달란트 외에 또 한 달란트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의 복음 사역을 위해 주신 은사로 이를 사용할수록 더욱 커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되고 결국은 없어지고 말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에게 있는 건강, 지혜, 물질, 재능 등을 하나라도 소홀히 다루거나 묻어 두지 말고 항상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선용하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 본절은 당시 빈익빈 부익부를 비꼬는 일종의 격언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이 말은 본절 이외에도 다른 비유에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마 13:12; 막 4:25; 눅 19:26). 하지만 여기서 예수에서는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의 것을 탈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계신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성도들이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매진한다면 그는 그 일로 인해 은사에 있어 더 부유하게 될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지 못해 영적으로 가난하게 된 자는 더욱 가난해지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그에게 주신 은사마저 빼앗아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 본절은 주인과 한 달란트 맡은 종과의 영원한 관계 단절을 보여 주는 말로' 불충성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분명한 죄이며, 아울러 하나님이 주신 것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치 않는 불충성 또한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충성스런 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영광스러움이 있지만, 게으르고 불충성스런 무익한 자들은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종말의 심판 때에 멸망 받을 자들의 최후 모습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8:12; 13:4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할 것을 교훈한 '열 처녀의 비유'(1-13절)와 주의 재림 때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할 것을 교훈한 '달란트 비유'(14-30절)에 이어 본문은 종말 비유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일명 '양과 염소의 비유'라 부르는 부분이다. 이러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재림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재림을 가장 훌륭하게 대비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혹자는 이 비유를 오해하여 마치 최후 심판 날 구원의 기준이 행위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인간 구원의 조건이 선행(善行)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이웃에 대하여 주의 사랑과 계명을 실천할 의무가 있고 또 믿음을 갖고 주를 섬기는 자는 자연히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서의 모습을 갖게 되는 바 결과적으로 이런 자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비유이다. 즉 인간 구원의 내적 근본적 조건이나 원리가 아니라 구원받을 자가 외면적으로 드러내 갖는 특징만을 지적 강조한 비유이다. 특히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가 현실 도피적이고 이기적인 기복 신앙에 빠지는 위험과 어리석음을 경고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비유는 앞 단락에 언급된 '달란트 비유'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재능과 은사들이란 성도들의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진정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들의 충성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입증되고 성취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이웃에 대한 성도의 사람은 복잡한 이론이나 시끄러운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과 배려를 의미한다. 만약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이웃을 사랑하노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약 2:15,16; 요일 4:20).
② 결코 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에 이를 만한 믿음을 지닌 자는 반드시 선한 행실이 수반되는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본문의 비유가 마치 각자의 선행 여부에 따라 구원과 상급이 결정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행함이 얼마나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는지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마 7:21).
25:31 본장에는 모두 종말과 관련하여 모두 세 종류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열 처녀 비유로 그 내용은 재림을 예비하라는 것이었으며(1-13절), 두 번째는 달란트 비유로 그 내용은 주께서 오시기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었다(14-30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유는 본절에서부터 본장 마지막 절까지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일명 '양과 염소의 비유'라 부르는데 그 내용은 최후 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본장의 세 비유는 점층적으로 배열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예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초림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영광의 심판 주로 오시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 '모든 민족'(판타타 에드네)이라는 것은 '모든 족속들'(all peoples)이란 뜻으로 유대민족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의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마 28:19; 행 17:26). 이것은 곧 예수의 재림과 그가 수행하실 인류의 심판이 국소적 현상이 아닌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심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종말에 관한 설교에서 이미 종말의 사건들이 우주적이요 전 인류에 미치는 사건임을 분명히 하셨다(마 24장). 마찬 가지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심판의 대상이 전 인류라는 우주적 심판임을 나타내 준다(Kistmeker).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친숙한 생활 풍습을 들어서 최후 심판의 모습을 예시하시는 장면이다. 당시 목자들은 양을 키우면서 반드시 몇 가지 다른 종류의 짐승을 함께 키웠는데 개와, 나귀와 말, 그리고 염소 등이 해당되었다. 개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 나귀와 말은 넓은 곳에서 많은 양을 돌아 보아야하는 경우에 기동성을 위해 필요하였다. 특별히 양과 같이 염소를 키우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아 1:8에도 나와 있지만 우선 먹이를 먹일 때가 문제이다. 들에서 방목 시는 상관이 없지만 겨울에 먹이를 공급할 때 양들은 미련하여 한꺼번에 물려드는 바람에 잘못하면 앞에 있는 몇 마리가 치어 죽게 된다. 그런데 양과 염소를 함께 키우면 성질이 난폭하고 이기적인 염소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양들을 이리저리 흩어 놓음으로써 양들이 서로 치어 죽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리가 올 때는 끝까지 반항하는 염소의 성질 때문에 다소간 양들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키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녁에 우리로 들어 갈 때는 언제나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여 아무 곳에서나 재워도 되지만 염소들은 추위에 약하여 따뜻한 곳에서 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배경으로 하여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마지막 종말에 가서는 자신이 심판주로서 의인과 악인,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엄격히 구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Cansdale).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성경에서 오른편은 항상 선과 영광, 생명의 자리로 이해된 반면(출 15:6; 왕상 2:19 ; 시 45:4)' 왼편은 항상 불길하고' 어둡고, 저주와 사망의 자리로 이해되고 있다(삿 3:15; 삼하 20:9'10; 전 10:2). 따라서 최후 심판 때에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좌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과 형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 비유에서 왜 하필이면 양이 의인으로, 염소가 악인으로 비유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양이 염소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Dalman).
② 양의 흰 털은 의를 상징하고 염소의 검은 털은 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Jeremias). ③ 성격상 양은 온순하고, 염소는 난폭하며 거칠기 때문이다.
④ 성경에서 양은 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된 반면, 염소는 악한 자로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겔 34:17). 이상의 이유들은 양이 의인에 비유되고 염소가 악인에 비유된 충분한 이유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양이 의인에 비유되고 염소가 악인에 비유된 이유가 아니라 최후 심판 날에는 의인과 악인이 분리되어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25:34 임금이. - 여기서 임금은 물론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런데 심판의 주님이 31절에서는 '인자'였는데 본절에서는 '임금'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서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행사하실 것을 예시한다. 즉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권적으로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 여기 나오는 '복 받을 자들'(호이 율로게메노이)이란 종말의 심판 때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 선 자들에 대한 호칭이다. 한편 '복 받을 자들'이란 말의 헬라어 원문은 완료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보좌 우편에 선 자들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의해 이미 오랜 과거, 창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창세로부터. - 직역하면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절의 '~로부터'(아포)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전부터'(프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한 당신의 백성들이 상속할 영원한 나라를 세우사 구원의 날에 상속할 수 있도록 예비하셨던 것이다(엡 1:11).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여기서 '예비된 나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의 택한 자들에게 물려주시기 위해 이미 창세전에 준비하셨던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예비된'이라는 말은 완료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나라가 오래 전에 준비되어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서 '상속하라'(클레로노메사테)는 단순과거 명령시제로 '지체 말고 조상의 유산처럼 네 분깃을 취하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하늘나라를 상속할 당연한 권리가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이들이 선택된 이유나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 실로 의인들을 위한 구원은 그들의 선한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근거하며, 따라서 의인들이 성취하는 선한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열매임을 알아야 한다.
25:35,36 내가 주릴 때에‥‥와서 보았느니라. - 본문에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 상속권을 소유하게 된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는 여섯 가지의 선한 행위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율법에서 선민의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며(창 19:1,2; 삿 19:18,19) 뒤의 세 가지는 보다 능동적인 봉사 활동이다. 그러나 의무 사항이든 능동적인 봉사 행위이든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들의 행위는 사랑의 봉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이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 이유는 사랑의 봉사 행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성경의 기본 사상과 모순된다고 볼 필요는 없다(엡 2:8,9). 이미 앞절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다만 본절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낸 선한 행실이 구원의 표식이 된다는 말이다. 사실 행위가 없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며(약 2:26), 그러한 죽은 믿음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함을 힘입어 반드시 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5:37-39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뵈었나이까. -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된 자들의 반문이다. 즉 그들은 언제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 행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선행이 직접적으로 주를 위해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선행이 결코 내 세울 것이 없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겸손이 내포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들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습은 의인들의 한 특징이 된다. 반면에 외식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하며 하나님 보다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 여기서 '내 형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란 지극히 미미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말한다. 결국 예수께서는 지금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자기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내게 한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여기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소외와 고통을 당하셨으며 언제나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그들을 위해 내어 주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다. 따라서 그는 진정 그들과 '하나'라고 선언하실 수 있으셨으며' 의인들이 고난 받는 자에게 도움을 준 것을 바로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시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다.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 본절은 저주받은 자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떠나 필연적으로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말씀하는 것으로, 34절의 축복받은 자가 종말에 처하게 될 영광스런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Bengel). 우선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는 것은 34절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나라를 상속하라'와 '불에 들어가라',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그리고 '창세로부터'와 '영영한'이 대조를 이루어 결국 그리스도와 그의 왼편에 처한 저주받은 자들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천국이 의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듯이 지옥과 형벌 또한 악인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5:42,43 본 두 구절은 35,36절에서 복 받을 자들이 복을 받게 된 이유를 나열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빌어 저주받을 자들이 정죄 받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는 '아니하였고'(우)라는 부정어구가 다섯 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정죄 받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이웃과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정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Carr).
25:44 우리가 어느 때에‥‥아니하더니까. - 종말의 심판의 때에 재판장되신 그리스도의 왼편에 있게 된 자들은 37-39절의 의인들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하여 놀라 의문을 제기한다. 오른편에 있던 의인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생각하지 않았던 반면, 왼편에 있던 악인들은 저들의 악한 행위를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의인은 그의 의무를 다 하고도 그것을 잊어버렸고, 악인은 그의 의무를 행치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과오조차 몰랐던 것이다(Bengel). 어쨌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조차 회개할 줄 모르는 악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시사한다.
25:45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 본절은 40절과 근본적으로 대칭되는 구절이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무관심한 것을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의미이다. 42,43절 주석 참조.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 본절의 '영벌'(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악한 자를 징치하기 위해 내리는 영원한 형벌을 뜻하며, 또한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은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Trench, Thayer). 따라서 영벌과 영생은 종말의 심판 때 처할 두 신분의 극히 대조되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두 신분의 사람들이 처할 모습이 똑같이 모두 '영원'이란 개념으로 묘사된 것은 그 상태가 끝이 없음을 나타낸다 할 것이다. 즉 이는 의인과 악인의 지속적인 분리가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영벌과 생명이 영원하며, 거기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Groshe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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