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장 세상 끝 날에 대한 주의 예언과 교훈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제 11-16장까지 이어지는 주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에 대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제 11-15장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본래 제 2위 성자이셨으나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성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 의 구속 사역의 결정적 성취인 십자가 수난 사건을 다루는 수난 주간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은 제 11장 개관을 보라.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은 전장에서 기록되었듯이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여 이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한 살해 음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이제 주님은 결국 세상만인을 위한 구속사역의 결정적 성취가 될 다가올 십자가 수난을 예견한 상황에서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를,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에 대한 예언과 그에 관련된 교훈을 주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의 평행기사인 소위 감람산 강화를 마태는 보다 본격적으로 상세히 다루고 있는바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마 24-25장을 보라. 이제 본 개관에서는 이런 세상 종말(終末)에 대한 주의 예언과 교훈의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개관하기로 하고 각 개별 문단의 개관은 해당 문단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면서 다만 개략적으로 본장의 내용 전개를 일단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절은 주께서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을 주시자 그 시기를 제자들이 물은 것을 계기로 하여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함락을,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과 재림에 대한 예언과 교훈인 감람산 강화가 시작되게 된 배경 또는 과정을 보여 준다.
다음 5-23절은 세상 끝 날의 징조로서 거짓 선지자의 등장, 전쟁, 기근, 지진 등이 있은 후에 성도에 대한 대 박해 내지 대 환란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세상 끝날의 징조 내지는 선행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24-27절은 세상 끝 날을 마감하는 결정적 사건인 주의 재림의 양상과 그에 이어지는 심판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다음 28-31절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서 자연의 변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계절의 변화를 깨닫듯이, 이상 밝힌 주님의 가르침을 잘 되새겨 시대의 변화를 보면서 세상 끝날의 도래를 깨달을 것을 교훈한 말씀을 기록한다.
마지막 단락인 32-37절은 주의 재림으로 인한 세상 끝 날의 도래는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으므로 이를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재림 이후에는 영생과 영벌을 가름하는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평소 늘 미리 예비할 것을 교훈하신 말씀의 기록이다. 특히 본 교훈에서는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먼저 세상 종말과 심판을 전제할 때 현재 우리의 삶을 그야말로 내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도 되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출타한 주인으로부터 일정기간 일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청지기들의 생활에 비유하여 늘 깨어 온전할 것을 교훈한 사실이다. 이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나 그것을 남용 내지 오용할 권리까지는 없으며 모든 행위는 주 앞에서 심판될 것이다. 그 심판의 시기인 세상 끝 날은 매 순간이 될 수 있으며 끝없이 가까와 오고 있으므로 그 역시 매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신전 의식으로 행동하는 역동적 종말관(終末觀)을 가질 것을 교훈한 것이다. 둘째는 지금까지 주신 교훈의 말씀이 당시의 제자들 꽐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임을 주께서 직접 언급한 사실이다. 이는 결국 세상 역사는 곧 구속사이므로 세상 끝 날과 심판이란 구속사 최후의 사건은 전시대 만민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전 구속사적 비젼(Vision)을 가지신 주께서 시대에 앞서 분명히 선언한 것이었다.
이제 감람산 강화를 대할 때 기억해야 할 기본사항인 성경 예언의 복합성에 대한 설명 및 감람산강화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갖는 구속사적 의의(救類史的 意義)에 대해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감람산 강화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예언을 대할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복합성(複合性)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예언은 대부분 그 예언이 발해지던 동시대 또는 그것이 1차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후대 역사의 한 특정시기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동일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특히 세상 끝 날에 대해서도 예언하는 내용을 한 애언 안에 동시에 오묘하게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각 부분을 대할 때 그 예언의 세부 내용이 복합적으로 지칭하는 각 대상에 대하여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장의 예수님의 예언의 경우도 1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할 A.D. 70년 로마 제국(Roman Empire)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인 학살 사건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한편 이제 감람산 강화의 내용 자체를 전체적으로 개관할 때에 먼저, 우리는 이제 곧 자신이 십자가 수난을 당할 것을 이미 예언해 놓은 상태에서 주님이 다시금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을 주셨던 사실과 그 내용이 향후 그대로 이뤄졌고 또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어느 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에 대한 예언이 있었고 그것이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이루어진 그 사건에는 분명히 신적 개입이 있는 것으로, 먼저는 그 예언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성취된 사건은 신적 경륜(經淪)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그 예언을 주신 분은 신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이 예언을 주신 주님은 신적능력을 가지셨으며 우리의 절대적 구주이신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 세상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역사는 실로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주권에 의하여 그분의 뜻과 섭리대로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역사의 창조자(創造者)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할 제 1의 근거이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 역사가 지금 당장 보기에는 아무리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아도 이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궁극적으로는 의와 평강이 회복될 천국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구속의 역사임을 깨닫고 역사에 대하여 희망(Hope)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주님의 감람산 강화에서 세상 역사에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다시금 깨닫고 주목하게 된다. 지금 이 땅위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옛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이 폐쇄된 이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새 낙원 곧 천국을 향하여 진행되는 것으로서 그 종말이 분명한 중간기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 평화와 축복이 있는 영원한 거처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일 뿐이며 지금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런 역사적 종말관(終末觀)이 현실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능력을 맹신하여 무분별한 낙관을 일삼는 세속 사상과 기독교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금석(試金石)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밝고도 분명하게 세상 끝 날에 이르러 새 천국이 도래하는 과정에서 이를 증오 시기하는 이 현재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탄의 광란으로 인하여 혼돈과 미혹과 환난으로 요약될 수 있는 각종 징조들이 있을 것을 예언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진리를 기억하고 또 주님에서 주신 종말의 각종 징조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눈 앞의 현실에 흔들림 엄이 그 징조를 잘 살피고 세상의 일시적인 유혹과 환난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결론으로 얻게 된다.
실로 종말은 매 순간 우리에게 가까워오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참다운 시작이다. 따라서 이 순간 나는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다만 이 세상 역사의 종점이요 새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한 그 날에 재림하여 다시 오실 주님으로부터 영생과 영벌 중 무엇을 받기 원하는지를 점검하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눈에 보이는 현실 뒤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구속사적 종말(救贖史的 終末)을 향하여 역사는 도도히 전진하고 있음을 다시금 기억하며 종말을 경건히 맞이하자(벧후 3:8-13).
외울 말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막 13:13
성전의 멸망 예언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감람산 강화 시작
3 ○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말세의 징조와 대 박해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예수의 재림과 심판
24 ○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
28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종말을 맞는 제자의 자세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지리 배경 - 13:3-27, 감람산
1. 명칭
'감람산'이라는 명칭은 산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감람나무(올리브 나무) 숲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하지만 오늘날 감람나무 숲은 옛날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산허리는 황량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군데군데 들어설 유대인의 공동묘지가 이 산의 원래의 명칭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황량함을 주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편 감람산에 대한 다른 명칭으로는 '예루살렘 앞산', '멸망산' '성읍 동편산', '감람원이라는 산' 그리고 단순히 '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2. 위치 및 지형
감람산은 당시 로마 행정 구역 편성상 유대 지방에 속했던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지형적으로는 중부 및 남부 팔레스틴을 꿰뚫고 남북으로 뻗어있는 주요 산맥의 일부로서, 길이 약 4km의 산등성이를 이룬다.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또한 감람산 동쪽으로는 여리고와 요단 골짜기로 비탈져 있다.
그리고 감람산은 메마른 구릉 위로 세 개의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첫째봉우리는 '라스 아부 카르눕'(Ras Abukharnub)인데. 종종 '스코푸스'(Scopus) 산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 봉우리는 해발 약 905m로서. 세 봉우리 중 가장 높다. 유대인의 절기에 참석하기 위해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던 순례자들이 이 봉우리에서 머무르곤 했다고 전해진다. 둘째 봉우리는 하람 에쉬 세러프(Haram esh-sherif). 즉 성전 구역의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봉우리는 '예벨바튼 앨 하와' (Jebel Batn el-Hawa)라고 불리며, 세 봉우리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고 그 높이도 가장 낮다. 한편 이 감람산 서목 기슭에는 그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께서 자주 제자들과 모여 기도하고 대화하던 곳으로, 통칭 '그곳' 또는 그냥 '동산'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바로 이 동산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고 또 이곳에서 가룟 유다에게 스스로 잡히셨다(마 26 :36). 또한 감람산 주변에 베다니와 벳바게가 있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당시 안식일 날 감람산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들을 경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대략 1km정도로서 장로들의 유전에서 '안식일에 허용된 거리' 내에 있기 때문이다.
3. 관련 기사
감람산이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윈이 이 산길을 이용해 도피했다는 기록에서 이다. 또한 선지자 스가랴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면서 이 산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산은 신약 시대에 와서, 특히 예수시대에 와서는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즉 이 산은 예수께서 즐겨 찾으시던 휴식처였으며(눅 21:37), 얘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눈물 흘리셨던 장소이다(눅 19:37-41). 특히 본문의 종말에 관한 교훈이 베풀어진 곳도 바로 이 감람산이며, 최후의 만찬 후 예수께서 스스로 잡히신 곳이기도(마 26:30)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도 이 산의 봉우리 중의 하나이며, 다시 재림하실 장소로 암시된 곳이기도 하다(슥 14:4; 행 1:11).
4. 유적지로서의 중요성
많은 교회들이 이 산 위에 세워졌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엘레오나(Eleona) 대 성당이다. 이는 A.D. 325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한 승천하신 날 아침 제자들과 만났다고 전해지는 작은 동굴 위에 지어졌다. 그러나 이는 A.D. 614년에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또한 A.D. 375년경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팔각형의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 교회 역시 지금은 팔각형의 기초와 중앙 성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겟세마네 남쪽에 A.D. 14C 이후에 세워진 자그마한 교회가 있는데, 그곳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5. 의의
이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생애 말기에 주요 배경이 되었었던 감람산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리해 보건대, 감람산은 예수에게 있어 휴식의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다. 또한 아픈 배반의 장소이자 영광된 승천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감람산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한편 성경에 언급된 감람산에 대해 성경 외적인 여러 자료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진정성과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됨을 시사한다.
원어 연구 - 13:8, 재난
'재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오딘'( )이다. 이는 '오뒤네'( )와 동일한 의미의 단어이다. 또한 이는 성경에서 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번역이 되는 단어로서 '사망의 고통'( ) 뿐만 아니라 '해산의 고통'(살전 5:3)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그리고 이 단어의 동사형인 '오디노'( )는 대부분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그때의 고통하는 행위와 관련되어 '해산하다'(계 12:2). 구로(劬勞)하다'(갈 4:27) 및 해산하는 '수고를 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은유적으로 영적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또 영적으로 성숙케 하기 위해 돕는 행위를 가리키는 때도 사용된다(갈 4:19).
한편 본절에서 '오딘'이 종말에 있을 여러 징조(徵兆)들을 가리키는 말들, 곧 민족 간의 전쟁과 지진 및 기근으로 인하여 육체적 ․ 정신적으로 겪게 될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이 세상의 마지막 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로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악한 자들 편에서 보면 무서운 심판의 날의 전조이다. 하지만 성도들 편에서 보면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스러운 도래의 전조로서 마치 아기를 낳기 위해 산모가 겪어야 할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해산의 고퉁 후에 산모가 그 품에 안은 아기를 보며 기뻐하듯이, 이 세상의 종말의 여러 징조로 고통이 하나 둘 다 지나 간 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같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표-13:3-37 성경상 성도가 생각해야 할 15가지
1 | 하나님이 행하신 일(삼상 12:24) |
2 | 자신의 행위(시 119:59) |
3 | 의인에 대한 주의 약속(시 119:95) |
4 | 지혜롭고 선한 말(잠 15:28) |
5 | 장래의 일과 계획(단 2:29) |
6 | 하나님의 거죽하신 이름(말 3:16) |
7 | 하나님의 일(마 16:23) |
8 | 주의 재 림(막 13:3-37) |
9 | 영적인 일(롬 8:5) |
10 | 자신의 영적 생할(빌 4:8) |
11 | 위엣 것(골 3:2) |
12 | 거짓이 없는 믿음(딤후 1:15) |
13 | 하나님의 법(히 8:10) |
14 | 성령을 모독하는 자의 벌(히 10:29) |
15 |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히 12:3) |
보감-13:28-37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성경이 종말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분명하다. ②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새생명의 출발이다. ③ 따라서 적어도 성도는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할 필요가 없다. ④ 그러나 말세만 기다리고 현세를 기피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⑤ 현세는 종말에 상급 받기 위한 준비를 할 기회이며 동시에 이 땅에서의 생명조차도 단 1회 밖에 없는 축복인바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이 세상의 기쁨도 감사히 누려야 한다. ⑥ 그러나 성도의 최종 고향과 지향점은 천국임을 깨달아 세상에 집착하거나 반대로 세상일로 좌절하지 말고 오직 굳건한 신앙으로 전진해야 한다. ⑦ 그 날은 죄인에게는 도적같이 임한다. ⑧ 종말은 사탄의 횡행과 성도의 환난 등 뚜렷한 징조와 함께 온다. ⑨ 종말의 결정적 시각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따라서 이제다 저제다 하는 것은 모두 다 거짓이다. 이상은 성경적 종말관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면 직접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들을 살펴보자.
1. 주의 재림을 확신할 것(욥 19:25,26)
2. 미혹받지 말 것(마 24:5)
3. 복음을 전파할 것(마 24:14)
4.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마 24:18)
5. 예비하며 기다릴 것(마 24:44)
6. 깨어 있을 것(마 25:13)
7. 충성된 삶을 살 것(마 25:18-30)
8. 환난을 참을 것(눅 21:19)
9. 항상 주를 생각하며 살 것(롬 3:11,12)
10. 정결하게 살 것(롬 13:12-14)
11. 두려워하지 말 것(살후 2:1-3)
12. 모이기를 힘쓸 것(히 10:25)
13. 근신하여 기도할 것(벧전 4:7)
14. 회개하며 기다릴 것(벧후 3:9,15)
15. 주의 재림을 사모할 것(계 22:50)
주요 주제-13:29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13:1-13 성전 파괴 예언과 말세의 징조
감람산 강화로 일컬어지는 본장의 내용 역시 고난 주간 중에서 셋째 날(화요일)에 주어진 예수의 교훈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면서 그 아름다움을 감탄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서 주어진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여 감람산에서 주신 종말에 대한 예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이 부분은 종말론적 사건을 집중적으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계시록(the Little Apocalypse)이라고도 불리우며 마 24장 및 눅 21장 내용과 병행된다.
한편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주신 예루살렘 성전 멸망 예언과(1-2절) 말세의 조짐(3-8절) 및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9-13절) 소개하고 있다. 즉 제자들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유대교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아름다움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을 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바 있는 유대 종교의 내면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감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심으로써, 재자들로 하여금 이미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사건(막 11:12-19)를 통하여 강조된 바 있는 유대 종교의 형식주의에 대한 심판을 다시 한 번 깨닫도록 만드시고 계신다.
그리고 이 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각종 징조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계시는데, 거짓 선지자의 출현과 미혹 ․ 전쟁과 지진과 기근의 빈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가중됨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A.D. 77년에 이미 이루어졌고 그 밖의 예언은 로마의 기독교 박해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앞으로 말세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 의한 대 박해 때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오늘날의 교회 역시 화려하고 웅장한 외양만 가진 채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같은 철저한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② 성도들은 세상 종말의 징조들이 결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빠지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와 소망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비록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가중될지라도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다만 성도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마땅하다.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 예수께서는 막 11:27 이후 계속 성전에 계시면서 그의 적대자들이 제기한 어려운 질문에 답하시며 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교훈을 계속 하시다가 이제 성전에서 감람산으로 자리를 옮기시려 하셨다. 이때는 화요일 저녁으로서 떠나실 때 성전의 동쪽 문을 이용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성전을 떠나신 후 다시 성전에 오시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셨다. 즉 이 순간은 그리스도와 인간이 지은 성전과의 완전한 결별이다.
제자 중 하나. - 성전에서 나가는 동안에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한 제자가 성전의 외형이 웅장하고 거대한 것을 보고 예수께 소감이 어떠한가를 묻고 있다. 그런데 이 제』대해 마태는 '제자들'(마 24:1)이라 하였고, 누가는 '어떤 사람들'(눅 21:5)이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예수의 소감을 물은 제자는 비록 한 명일지 모르나 제자들과 당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웅장한 성전에 대한 자부심과 경외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돌들이‥‥이 건물들이. - 여기서 '돌'과 '건물'은 성전 지칭하는 말로서 마태(마 24:1)는 이를 '성전 건물'이라 하였고, 누가는(눅 21:5) '미석'(美石)으로 각기 표현하였다. 한편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 성전은 헤롯대왕에 의해 B.C. 19년경 건축을 시작하여 9년 만에 성전 본체 건축은 마쳤으나 그 이후에도 계속 건물을 짓고 있었으므로 예수 당시로(A.D. 30년) 보아서는 50년 성전 건축이 계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성전터는 예루살렘 전체 면적의 1/6정도에 이르고 황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자재들이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많이 모이는 성전의 건축 기간은 80년 이상(B. C. 19-AD. 63) 걸렸으며, 뜰은 360×460m 정도나 되었고 당시 건축에 사용된 주춧돌 하나의 길이와 높이가 각각 7.3m 1.2m 정도 되었으니 그 크기가 얼마나 웅장했는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Josephus). '헤롯 성전'에 대해서는 눅 19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3:2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 성전이 지닌 객관적인 화려함과 웅장함에 대해서는 예수께서도 인정을 하셨다. 한편 본절에서 '보다'(블레포)라는 단어는 단순히 '바라보다'란 의미 뿐 아니라 '생각하다', '주의하다'(마 24:4) 등의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이 온갖 부정적 요인이 들끓는 성전을 바라보며 흠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질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성전의 외형에 마음이 집중되어 그것만 중시하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외형적인 성전보다 각자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성전(고전 3:16)이 더 중요하며 그 성전이 항상 정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셨던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예수께서는 눈에 보이는 현재의 성전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성전 모습을 보시고 그 내용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이 교권주의자들의 위선과 탐욕에 의해 도적의 소굴이 된 것에 대해 선지자 예레미야가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던 것처럼(렘 7:12-15) 예수께서도 속은 부패하고 겉만 화려한 건물의 처절한 파괴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행하신바 있는 '성전의 정화 사건'(막 11:15-17)과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막 11:14,20,21)가 지니는 상징성과도 일맥상통한다(마 21장 주석 참조). 한편 이 말씀은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Titus)가 항전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성전과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문자적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당시 디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심점을 없애기 위해서 성전 본체와 부속 건물들을 형체도 없이 파괴 하였고 병사들도 성전 건물 벽 사이에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는 헛소문을 듣고 모든 벽들을 철저히 허물어 나갔던 것이다(Josephus).
13:3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않으셨을 때. - 앞절은 성전을 나서면서 되어진 상황의 묘사이나 본절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베다니로 가던 도중 감람산에 오른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따라서 앞절은 성전을 보고 한 말임에 비해 본절은 예루살렘 전체를 내려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앉으셨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자랑으로 생각했던 성전보다 더 높으신 예수의 권위를 은연 중에 나타내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 병행구인 마 24:3과 눅 21:7에는 제자들만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마가는 좀 더 자세히 이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제자의 언급에 이어 안드레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세 제자만 주로 언급하였을 뿐(막 5:37; 9:2), 안드레까지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종용히'(카트 이디안)란 '은밀하게'(privately)란 뜻으로 제자들이 군중들과 격리된 장소에서 은밀하게 질문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말이 몇몇 제자들을 나머지 제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 제자들을 무리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된 말임을 생각할 때(마 17:19) 질문한 사람은 네 사람일지라도 청중은 모든 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자들이 예수께 은밀하게 물은 이유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파멸될 것이라는 예언이 너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13:4 우리에게 이르소서. - 예수의 충격적인 예언을 듣고 마음속에는 당황함과 이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나 감람산에 앉기까지는 자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요청한 것이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 여기서 '이런 일'은 '성전 파괴'를 가리킨다. 제자들의 일차적 관심은 가공할 만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시점에 관한 것이었다.
이 모든 일. - 이 말의 해석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즉 전자의 '이런 일'은 공통적으로 성전의 파괴로 보나 후자인 '이 모든 일'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문제이다. 혹자는 이를 세상의 종말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보며(Calvin), 또 다른 학자는 이것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성전의 파괴로 보고 있다(Meyer, Cranfield). 그러나 이와 병행 구절인 마 24:3에는 후자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날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로 표현함으로써 후자의 입장이 보다 타당한 것이란 암시를 준다. 즉 제자들이 예수께 물은 것은 성전 파괴의 '때'와 종말에 일어날 '징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제한적인 사고에 있어서 그들은 성전 파괴의 때가 곧 종말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3:5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미혹하다'(플라나오)란 '잘못 인도하다' 또는 '방황케 하다', '속이다'란 뜻으로서 소극적으로 과오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을 속이며 파멸에 빠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종말에 대한 문제를 그릇되게 가르침으로써 믿음 약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많을 것을 예견하신 예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교훈의 서두로 삼으시면서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한편 미혹하는 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일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바른 신앙을 버리게 하는 악한 자로서(요일 2:18,22; 4:3; 요삼 1:7). 사탄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악한 활동을 계속하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기 위해 최후의 시점까지 발악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날 그리스도에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정복당하게 될 것이다. 한편 본절의 '주의하라'(블레페테)는 표현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제자들은 종말에 대한 때와 징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호기심보다는 종말에 있을 큰 미혹을 조심하며 신앙적 각성을 하라는 의미를 더 크게 담고 있는 것이다.
13: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 종말의 첫 번째 징조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일이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자칭 그리스도라 하면서 예수의 권위와 능력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은 초대 교회시대로부터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있다(행 5:36,37; 21:38). 또한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멸망(A.D. 66-70년)을 전후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위기감이 고조될 때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은 특히 더 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시몬 마가스'(Simon Magus)와 '바르코흐바'(Barcochba)가 가장 두드러진 경우이다(Josephus).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도 거짓 그리스도들이 더욱 무서운 기세로 출현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미혹하는 자들의 활동이 심하면 심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움을 알고 결코 그들의 사악한 계략에 현혹되거나 위축됨이 없이 담대한 신앙생활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요 16:33).
내가 그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을 표현하시는데 자주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요 6:35; 8:12; 10:7,11, 25; 13:19; 18:5,6,8). 이는 '스스로 있는 자'란 뜻을 지닌 하나님의 명칭인 '여호와'의 헬라어식 해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표현은 거짓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비견하여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부분과 병행 구절인 마 24:5에는 '나는 그리스도라'로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 줄 왜곡된 메시야를 대망했다는 점에서 미래에도 왜곡된 메시야상을 표방하고 나을 거짓 그리스도가 많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13: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 - 종말의 두 번째 징조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뒤흔드는 분쟁과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의 '난리'는 곧 전쟁(KJV, War)을 의미하는 말로서 민족 간의, 그리고 국가 간의 큰 전쟁이 일어나 온 인류가 두려워할 현상과 세계적 종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를 메시야에 의해 이 땅에 실현되는 정치적인 현상으로 이해했으므로 전쟁은 종말의 필연적 현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로마와의 전쟁에 있어서도(A.D. 66-74년) 이때 메시야가 나타나서 유대인을 로마로부터 구하고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사상이 팽배했었다(Josephus). 예수께서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로써 이 같은 사고를 경계하고 계신다.
두려워 말라‥‥끝은 아직 아니니라. -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이 발발한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로서 당부하신다. 즉 원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근심하는 것은 신앙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라는 말은 종말에 전쟁은 필수적인 것이요 너무나 자명한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끝은 아직 아니니라'란 말은 전쟁이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종말의 징조임을 보여줄 뿐임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끝'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뿐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도 가리킨다. 만약 이를 예루살렘의 멸망만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면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이 있었음을 염두에 둘 때 전쟁은 하나의 끝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 해석은 취할 수 없는 것이다.
13: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 이러한 표현은 부강하던 애굽이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할 것을 예언한 사 19:2의 형식과 사상의 반영으로서 종말이 임하기 전애 있을 전쟁은 민족과 민족 간의 갈등의 표출이며 나라와 나라간의 정치적 분쟁의 결과로서 국지적(局地的) 분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전쟁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서 전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은 전대미문의 세계 대전이 1914년과 1939년 두 차례나 발생 하여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결국 예수 이후부터 역사에 나타난 전쟁들은 바로 인간의 계획은 이기적이어서 다른 세력과의 분쟁으로 나타나기 쉬우며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취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진‥‥기근이 있으리니. - 지진과 기근은 전쟁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따로 발생한 것이다. 즉 자연의 재난은 종말을 알리는 또 다른 징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진노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삿 5:41; 시 18:8; 사 24:19; 겔 5:17).
재난의 시작. - 이와 같은 표현은 전쟁, 지진, 기근 등의 현상은 말세의 징조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끝남이 아니라 이에 이어 또 다른 유형의 재난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는 항상 새로운 재난이 첨가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편 '재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딘'( )의 일차적 의미는 해산의 고통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약에서도 역시 새 시대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처야 하는 고통이란 상징성을 지녔다. 즉 한 나라의 탄생은 고난의 시대를 거쳐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사 66:8; 렘 22:23; 호 13:13; 미 4:9). 또한 유대교에서도 이러한 구절을 해석하여 메시야 왕국 역시 환난을 통해서 탄생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과 연관지어 본절을 이해할 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은 전쟁이나 기근, 지진 자체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 여러 재난이 임한다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된다.
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에 접속사 '데'( )가 포함되어 있어 앞절과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다. 즉 앞절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은 재난이 있으나 '그러나'(but), '도리어' 조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본절에서 쓰지 않아도 의미가 전달되는 '너희는'(휘메이스)과 '스스로(헤아우투스)라는 말을 첨가하여 지극히 주의력을 가지고 조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조심하라'는 이 말은 5절에 이어 또 나타나는 것으로서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즉 종말의 징조로서의 재난을 경고하는 서두에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조심하여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거듭 강조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공회에 넘겨주겠고. - '공회'란 산헤드린(Sanhedrin)을 지칭하는데 당시 이 공회는 유대 전역에 걸쳐 강력한 행정권과 사법권을 지님은 물론 종교적 실력 행사 기관으로 군림하면서 범법자의 사형을 논할 수 있을 만큼 그 세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으므로 유대의 지배국인 로마의 총독에게 사형수의 사형 집행을일임해야만 했다.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서는 신약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산헤드린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동족과 이방인(로마)의 위협 및 종교와 정치적인 폭행을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이것은 종말에 발생할 교회 및 신앙 공동체에 소속된 개개인에게 미치는 또 하나의 고난을 말하는 것이다.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 여기서의 '회당'( )은 중 ․ 근동은 물론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 지역까지 퍼져 있던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집회 장소로 이용한 곳으로 종교적 행사를 행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제반 문제, 즉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권한을 가지고 있던 준 사법 기관이었다. '유대 회당'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본문의 상황은 유대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회당의 판결에 따라 그들의 신앙과 다른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을 다시 개종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개인적인 고난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매질'(데로)이란 원래 '발가벗기다', '가죽을 벗기다'의 뜻인데 매질로 인해 피부가 터지는 심한 채찍질을 표현한다. 결국 본절은 종말의 때가 되면 진리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다방면에서 어려운 시련이 닥치게 됨을 예언한 것이다.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증거되려함이라. - '관장들과 임금들'이란 일차적으로 당시의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나 보다 넓게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모든 세상의 통치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즉 성도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종교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이방의 정치권력에 의해서도 박해를 받게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의 원인은 세속의 통치자들이 반 진리적 태도로 진리를 박해함에서 찾을 수 있으나, 긍정적 차원에서는 그들에게도 복음 전파 기회를 갖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는 이처럼 고난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로 승화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행 4:3; 5:17-41; 16:39-35).
13:10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 마가는 마 24:14에 있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종말이 오는 시기에 대한 가장 명백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세상의 종말은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난 이후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모든 택한 자들이 복음을 온전히 믿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질 것이며(롬 10:12-15), 택한 자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역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롬 11:25, 26). 이러한 사실은 이 복음이 결코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거나 어떤 세력에 의해 그 파급이 멈춰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동역자들을 택하시고, 교회를 세워서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벧전 2:9,10). 한편 본절에 언급된 '먼저 만국에'라는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먼저'라는 말을 예루살렘 멸망 전으로 해석하며 '만국'은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셨던 로마 제국으로 해석하여 이 구절은 이미 성취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A.D. 60년경에 이미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되었고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권이 로마에 국한된 것으로 보는 것은 성경 전체의 사상이나 본절의 문맥과도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본절의 '만국'은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마 24:14; 롬 11:25-27). 이러한 사실은 본절에서 사용된 '데이'( )라는 동사가 '반드시~ 해야한다'(must)라는 의무를 규정하는 용어란 점에서도 명백하다. 즉 로마 제국 내에서의 복음 전락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의 복음 전파가 성도의 의무이며 이 의무가 완료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이 임하는 것이다.
13:11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 ‥‥ 염려치 말고. -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전락 과정에서 관장들이나 임금들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된다는 것과 아울러 그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를 미리 교훈하고 계신다. 한편 병행구인 눅 21:14에는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로 되어 있다. 즉 이는 복음 전파자들이 이교의 세력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지식과 지혜에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성령의 도움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같은 약속이 실현된 예는 스데반의 설교와(행 7장), 로마 총독 벨릭스(행 25장), 아그립바 왕 앞에서(행 26장) 행한 사도 바울의 변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말씀은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신중하게 준비하며 현명한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미리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이방인의 박해에 대하여 미리부터 근심하지 말라는 말이지 무책임하고 게을러도 좋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13:12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죽게 하리라. - 성도에게 임하는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고난은 바로 가정의 파탄이다. 본절의 말씀은 사 9:2과 미 7:6을 반영한 것으로 국가나 사회에 말기적 현상으로 임하는 도덕적 가치관의 타락으로 인한 가정 파괴의 일반적인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 현상을 넘어선 종교적 원인을 지닌다. 즉 부모 형제까지도 서로 믿지 못하고 배척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음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관습과 비진리에 대항하기 때문에 비진리에 속한 사람을 긴장케 하며 이러한 현상은 가족 간에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려움 없이 극복해야 한다. 이것만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가족의 구원을 가능케 한다.
13:13 내 이름을 인하여‥‥미움을 받을 것이나. - 본절에 언급된 '이름'은 '예수'란 호칭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계시와 동일한 의미로서 이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비롯하여 이것을 지키는 행위 등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이 세상에 만연된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는 빛되신 예수의 이름과 복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성도가 받게 될 고난은 이미 예수께서 애견하신 것이며 성경 여러 곳에서 중명되고 있다(마 5:11; 24:9; 눅 6:22; 21:17; 요 15:15-20).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나중'(텔로스)이란 세상의 끝을 가리키기 보다는 한 개인의 생애의 끝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결국'(마 26:58),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등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 말은 신앙을 지키려는 의지가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정도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견디는'이란 말은 '큰 시련 중에서 잘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즉 영생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한두 번 이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딜 때 비로소 영생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계 2:10). 그러나 이러한 인내는 구원을 이루는 조건이 라기 보다는 오히려 구원받은 자가
지니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롬 8:29-39).
13:14-23 대환난에 관한 예언
앞 단락에서 세상 종말의 징조에 대해 예언하신 바 있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말에 있을 대환난에 관해 예언하고 계신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언은 1차적으로 A.D. 70년에 발생할 예루살렘 함락과 파괴 시에 이스라엘이 겪게될 어려움을 가리키는 것임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세상 종말에 발생할 7년 대환난(계 6-19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는 엄청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께닫게 되는데. 시험당할 때에 마땅히 피할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능히 시험을 감당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고전 10:13). 또한 이때에는 외형적인 환난만이 아니라 거짓 그리스도의 활동 등으로 야기되는 종교적인 어려움도 극심하게 된다. 이때 성도는 믿음에서 떠나 미혹받지 않도록 각성하여야한다. 이런 자만이 구원에 동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풍성하신 상급을 받게 된다.
한편 이러한 본문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열심이다. 만약 성도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지지 못한다면(창 19:17,26)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②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 놀랄 만한 이적을 행한다고 해서 맹종하기 보다. 참으로 그가 하나님께 속한 영(雲)인지 분별하는 신중함을 지녀야 한다(요일 4 1-6). 왜냐하면 거짓선지자들도 사탄의 권세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이적을 행할 수가 있으며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 병행구인 마 24:15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본서는 이 구절의 출처를 모호하게 언급했으나, 마태는 다니엘에게서 나왔음을 밝혔으며 '서지 못할 곳'도 마태는 '거룩한 곳', 즉 '성전'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한편 유대인의 관점에서 '가증한 것'(브델뤼그마)은 숭배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숭배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제작한 우상을 가리킨다. 한편 성경 가운데서 이러한 표현은 다니엘서에만 네 번 사용된 독특한 말이다(단 8:13; 9:27; 11:31; 12:11). 그중 단 11:31은 분명히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B. C. 175-164) 통치 시대에 성전이 이방인의 가증한 우상으로 더렵혀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실제로 B.C. 168년 헬라주의자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없애는 일환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의 중심지였던 성전의 번제단을 헐고 그곳에 헬라의 최고신인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혐오하던 돼지를 제물로 바침으로 인해 본절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외경마카비1서 1:54-64).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인용하여 앞으로 발생될 미래의 종말론적인 사건을 예언하는 데 사용하셨다. 한편 누가 복음에는 이 구절과 같은 내용이 없으며 대신 눅 21:20에서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인 것을 보거든'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본 구절의 예언을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사건과 이때 이루어진 황제 초상과 독수리가 그려진 군기(軍旗)의 예루살렘 성 반입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 어떤 형상을 지닌 우상이 서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강단에서 당연히 외쳐져야 할 진리가 왜곡되어 말씀이 잘못 전달되는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 이는 유대의 계시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따라서 혹자는 원문에는 없는 것을 후대의 편집자가 본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첨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마가가 원래 복음서를 쓸 때 포함한 것이며 마 24:15에도 역시 동일한 어구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도 직접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 이 예언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교훈이나(3절 주석 참조) 결국은 모든 유대에 사는 자에게 적용되는 경고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이 교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항하며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적용된다.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유대의 산지에는 많은 자연 동굴이 있어서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아주 적절한 피난처가 되었다(창 14:10; 19:17; 삼하 17:9; 렘 16:16). 그러나 예루살렘 성도 해발 800m에 위치한 지점으로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틴 점령 시에도 계속 여부스 족속에게 남아 있다가(삿 1:21) 다윗의 시대에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을 만큼(삼하 5:6-8)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매우 안전한 지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라 한 것을 볼 때 본절은 매우 급박하고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둔 경고이었을 것이다. 한편 실제로 A.D. 66년 세스티우스 갤러스(Cestius Gallus)가 예루살렘 성을 공략할 때 이 말씀을 기억한 사람들은 매우 신속히 벧스안 남동쪽 요단 계곡의 펠라(Pella) 지역으로 피신하여 4년 후에 발생한 예루살렘 멸망 사건 (A.D. 70년)의 참변을 피하였다(Eusebius).
13: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 당시 유대의 가옥은 대부분 평평한 옥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기도를 하거나(행 10:9), 휴식을 취하기에 알맞은 장소였으며(삼하 11:2) 거기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었다(막 2장 연구자료, '신약시대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 참조). 결국 본문은 아주 급박한 상황을 당하여서 집안으로 들어가 중요한 물건을 가져올 틈조차 없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본문은 환난의 급박성과 더불어 환난 시 이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13: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 말지어다. - 팔레스틴은 밤낮의 일교차(日較差)가 심해 농부들이 낮 동안 일을 할 때는 더위 때문에 겉옷을 입지 않고 집에 두고 오거나 가까운 곳에 벗어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본절은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여 추위가 엄습하는 밤에는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겉옷조차 가지러갈 여유도 없이 도망해야 하는 상황을 보여 준다. 종말의 때도 이와 같이 급박하게 임할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이때를 준비해야 한다.
13:17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 - 유대인에게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으며 큰 불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5,16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임신한 여인이나 젖먹이를 키우는 여인들은 신속히 도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으로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고난의 상황에서도 임신하지 못한 자와 젖먹이가 없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눅 23:29).
화가 있으리로다. - 이 말은 성경 가운데서는 흔히 저주의 선언으로 쓰인다(사 5:8; 렘 22:13; 암 6:1; 마 11:21; 눅 11:42).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저주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부득이 하게 피신하지 못하고 불행한 사태를 당하게 된 것에 대한 동정의 감탄사로 '슬프도다'라는 뜻을 지녔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임산부나 유모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그들이 환난에 대비하도록 특별한 각성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13:18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 병행구인 마 24:20에는 겨울과 더불어 안식일이란 말도 나와 있다. 당시 유대 지방에서의 겨울은 우기(雨期) 이므로 통행이 불편하고 양식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안식일은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여 5리 이상 여행이 허용되지 않으며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짐승을 부릴 수도 없는 날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볼 때 B.C. 168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바로 이러한 규례를 알고 안식일에 유대를 침공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때 유대인들은 방어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육을 당하였다. 따라서 본절은 재난이 없을 수는 없으나 비교적 견디기 힘들지 않도록 계절적으로 좋은 때가 되도록 기도하라는 권고의 말이다. 즉 기도의 능력을 믿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 그와 같은 일들이 있게 됨을 암시하는 것이다.
13:19 창조부터 지금까지…후에도 없으리라. - 역사상 전무후무한 환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러한 수사적인 표현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전제된 징벌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출 11:6; 단 12:1). 한편 이와 같은 일은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하여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사가(Josephus)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 성내에는 굶어 죽은 남녀노소의 시체가 너무 많아 장사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여인도 있었다고 한다(신 28:53; 왕하 6:28,29). 또한 이때에 사망자가 110만 명, 포로되어 잡혀간 자가 9만7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당시의 이러한 재난의 궁극적 원인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데에 있었다(마 23:37-39). 이에 대해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도시와 성전의 파괴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왔으며, 저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배웠다'고 하였다. 물론 이런 일은 역사적으로 이미 이루어졌으나 이와 같은 사건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에 대한 예표일 뿐이다. 이때에도 역시 사람들이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하여 과거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 때보다 더욱 심각한 환난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13:20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 19절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이 암시된 반면, 본절에는 선택자되신 하나님의 자비가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본절 역시 병행구인 마 24:22에 비하여 '주'라는 말을 첨가하여 구원의 주체되신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은 환난의 날들을 단축시키신다는 뜻인데 만일 그날들이 단축되지 않는다면 환난에서 벗어나 생존할 자가 지상에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대환난기는 혹독한 고통의 날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환난기를 단축하셔서 다시금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시게 된다.
모든 육체가 구원을. - 본절의 문맥으로 볼 때 구원이란 '영적인 면'만 아니라 곤경으로부터의 육체적 해방도 포함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지상사역 기간 동안에 병자들을 낫게 해 준 것과 아울러 A.D. 70년 로마의 디도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기간을 감하지 아니하셨다면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 교민을 포함하여 택하신 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환난의 날을 감하여 주신 것처럼 마지막 대환난의 혹독함 가운데서도 이러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13:21 그리스도가 여기…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미혹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5절의 교훈에 이어 다시 유사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므로 종말의 때에 있을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즉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위기 의식이 고조된 나머지 거짓된 소문에 미혹되기 쉬운 것에 대한 경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초림 때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범주 속에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살후 1:7,8)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계 1:7) 임하시므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란 소문은 그 자체가 거짓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러한 교훈이 반복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은 마지막 환난의 때에 육체적 고통에 못지 않게 거짓된 유혹의 시험을 극복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 종말에 나타날 또 하나의 시련들로서 성도의 귀와 눈을 마비시킬 적그리스도 세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세분하자면 전자는 6절에서 말한 그리스도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를 말하고 후자는 앞절에서 말한 '그리스도가 여기…저기 있다'하는 거짓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는 거짓 그리스도의 하수인을 말한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 여기서의 '이적'(세메이아)은 '폭력'(마 12:38), '징조'(눅 21:7) 등의 의미도 인간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가리키며, '기사'(테라타)는 자연계에 일어나는 놀랍고 획기적인 일을 가리킨다(신 4:34; 마 24:14; 요 4:48; 행 2:19; 롬 15:18). 성경에서 이 두 낱말은 대부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개입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그리스도인 척하는 거짓 그리스도와 이를 돕는 거짓 선지자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하나의 과시적 수단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출 7:11-22; 8:18,19; 신 13:1-5; 삼상 28:9-12; 마 7:22,23; 24:24). 이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초자연적 이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나 인간의 미련함으로 이를 구분치 못하고 미혹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오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택한 백성(눅 18:7; 롬 8:33; 골 3:12; 벧전 1:2)까지 그릇된 궤계를 사용하여 신앙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려고 할 것이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이다. 특히 '미혹케 하려'의 문자적 의미는 '길을 잃게 만든다'인데 말세가 가까울수록 이러한 그릇된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제롬(Jerome)은 이를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불신앙 또는 회의주의적 철학의 광야에서나, 이단의 은밀한 골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당신을 설득하면 너희는 저들의 말을 믿지 말라'. 한편 본문에 나오는 '할 수만 있으면' 이란 말은 거짓 그리스도 세력의 미혹이 집요할 것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면 이러한 유혹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13:23 너희는 삼가라…미리 말하였노라. - 4절에서 제자들이 종말에 일어날 '모든 일'을 질문한데 대해 예수는 '모든 일'을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예수님은 5절과 9절에 이어 세 번째로 '삼가라'(블레페테)라고 강조하신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교훈이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는 심히 견디기 어려운 환난이 있음을 충분히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잘 이겨 내도록 항상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특히 본문에서 '너희는…너희에게'(휘메이스…휘민)라는 말을 반복하여 씀으로써 이 교훈을 받아들이는 자의 경각심을 자극하고 있다. 결국 예수의 이 같은 권고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13:24-37 그리스도의 재림 및 종말을 맞는 제자의 자세
지금까지 세상 종말의 각종 징조(1-13절)와 마지막 대환난의 양상(14-23절)에 관하여 예언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대하여 예언 하시면서 (24-27절)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늘 깨어 있도록 교훈하고 계신다(28-37절). 정녕 우리 성도들이 세상 종말에 있을 핍박과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견디면, 반드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와 같은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더라도 즉시 영접할 수 있는 영적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한편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구체적인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초림 때와는 달리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지극한 권능과 영광으로 이 땅에 임하실 것이다. 심지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자들도 예수님의 재림 광경을 목격하게 되며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② 재림의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오직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세상 종말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재림의 임박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병행 구절에서 마태는 이를 무화과나무, 노아의 날, 충성된 종의 비유를 통해(마 24:32-51), 누가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눅 21:29-36), 그리고 본문은 무화과나무와 충성된 종의 비유를 통해 항상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한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재림의 정확한 일시를 아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그저 주님의 재림만 기다리는 자들에게 결코 성도는 미혹당하지 말아야 함과 동시에 또한 주님의 재림이나 세상 종말 따위는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재림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세상 일에만 탐닉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본받지도 말아야 한다(마 24:36-39).
13:24 그 때에 그 환난 후. - 원문에 의하면 본절은 '그러나'(알라)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 말은 연결사로서 앞의 내용(5-23절), 즉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동시에 말한 것에 반해 24-27절에서는 그 내용이 바뀌어 오로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어지는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그 때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가 내포된 표현으로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렘 3:18; 31:29; 욜 3:1).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결정적인 순간까지 와 있음을 암시하는 의미로 쓰였다. 한편 병행구인 마 24:29에는 본구절 뒤에 '즉시'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환난이 발생한 후 바로 이어서 즉시 예수님의 재림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해가… 달이… 아니하며. - 세상의 종말이 임할 때는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세상은 어두움에 휩싸이게 됨이 예언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지 상징적으로 해석할 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견해가 없다. 단자 성정이 이러한 천체적인 변화와 종말의 때를 자주 연관시키는 것으로 보아(사 13:10; 암 3:15; 계 8:12) 정확히 어떠한 양상이 발생할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기존의 우주적 질서가 뒤바뀌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벧후 3:10).
13:25 별들이…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별들이 떨어진다'의 표현은 앞 구절에서 나오는 해와 달의 변화와 더불어 종말에 되어질 우주적 혼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사 34:9). 한편 권능이 흔들린다는 표현에서 '권능'은 하늘에 있는 선한 천사(Farrar)나, 악한 마귀(Meyer)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엡 3:10; 6:12). 그러나 앞부분의 묘사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우주를 유지하고 있는 인력과 같이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따라서 이것이 흔들린다는 것은 천체들이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즉 태양, 달, 별들이 제 위치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대변동이 오는 원인을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13:26 그 때에. - 공관복음 모두(마 24:30; 눅 21:27) '그 때에'(카이 토테)라는 말을 사용하여 앞절과의 연관성은 물론 이하의 내용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기교적 표현을 하고 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권능과 영광으로…보리라. - 여기서의 '인자'(人子)는 원래 하나님이시나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주로서 가시적인 모습을 띠고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의 신분을 강조하는 용어로 쓰였다(마 26:64). 또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의 신적 위치를 나타내 주고 있다(단 7: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신적인 존재로서 영광스런 위엄을 갖추고 오신다는 말이다(출 13:21; 왕상 8:10). 또한 '큰 권능과 영광'은 고난당한 예수의 초림 때의 모습을 탈피하여 본래 지니셨던 신적 권능과 영광스러운 속성을 갖고 임재하심을 가리킨다(행 1:11; 살후 1:7-10; 2:8; 계 1:7; 19:11-16). 한편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가 예수의 임재하시는 모습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신적인 능력을 소유하신 예수께서 초림 때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이나(눅 2:8-20) 동방 박사와(마 2:1-12), 같은 소수의 특정한 사람에게만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재림을 모든 인류가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이루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슥 12:10; 계 1:7).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영적인 잠을 떨쳐 버리고 늘 깨어서 그날을 준비하는 성실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마 24:12).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 중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다 참조하라.
13:27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 본절의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실 세상 끝 날의 큰 추수를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천사들'은 세상 끝에 예수님의 뜻에 따라 추수꾼의 사명을 수행할 권능의 사자들을 의미한다. 이처럼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수종들며(마 4:11) 의인의 영혼을 보도하던(유 1:9) 천사가 이제는 신적 섭리를 대행하여(단 10:21) 심판의 수종자로 등장하는 것이다(마 13:41,42).
땅 끝으로부터…사방에서 모으리라. - 본 구절은 택한 자만이 마지막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때 택한 자들이 거하는 곳으로 묘사된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란 표현이 병행구인 마 24:31에는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어디에 있던지 모든 곳으로부터'란 의미로서 신 4:32(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와 렘 12:12(땅 이 끝에서 땅 저 끝까지)의 결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한편 '사방에서'(에크 톤 테사론 아네몬)란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네 바람으로부터'(out of the four winds)이다. 이 말은 문학적인 표현으로 '세계 모든 곳으로부터'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복음이 이 세상 모든 곳에 확산되는 그날에 이르러서야 그리스도 재림이 이루어지며(10절) 이 때 그리스도를 택한 자가 어디에 있을 지라도 한명의 누락됨도 없이 불러 모으심을 보여 준다.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 종말의 시기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질 것을 교훈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는 모든 공관 복음에(마 24:32-35; 눅 21:29-33) 나온다.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와 옴을 알듯이 이미 앞에서 언급한 여러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이 임할 것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에는 주로 상록수들이 자라지만 무화과나무처럼 계절에 따른 민감한 변화를 보여 주는 낙엽수들도 있었다. 무화과나무는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고 봄에는 잎을 내기 시작하는데 이때가 되면 봄이 짧은 팔레스틴에서는 여름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한편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자들 뿐 아니라 헬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인 누가복음에는 무화과나무 뿐 아니라 '모든 나무'란 말도 이 비유 가운데 첨가되어 있다.
13:29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 종말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는 제자들의 질문(4절)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종말에 있을 '모든 일'(5-23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서 '이런 일'은 바로 그 모든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본절의 표현은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암지한다.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 예수의 재림(Parusia)이 임박했음을 '가까이'와 '문 앞에'란 이중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즉 28절에서 말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처럼 많은 재난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과 택하신 자들에 이르기까지 미혹하려는 현상을 보면 재림이 가까워 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13: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 말하는 주체와(내) 이를 듣는 청중(너희), 그리고 그 사이에 '진실'만이 개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이러한 표현은 이하의 내용에 대한 신빙성을 신적 권위로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예언적 어투이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 여기서 이 '세대'( yeved , 게네아)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①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생존하는 기간(Cranfield, Wessel)② 유대 민족이 존속하는 기간(Alford, Jerome) ③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이 지상에 머무는 기간(Bengel, Calvin) 등이다. 이 중에서 '세대'란 말의 일반적 용례가 한 인간의 생존 기간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③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5-23절의 말씀은 이 지상의 모든 일상적인 현상이 끝나는 역사적 종말의 때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므로 '이 세대'를 예루살렘 멸망 당시의 세대로만 규정하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 종말의 모형적 사건이란 점에서 볼 때 이 견해는 일단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Burdick). 그러나 이미 위에서 인식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예언하신 환난이 A.D. 70년에 완전히 성취된다는 의미는 아니며 단지 '이 모든 일이'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도 발생한다는 점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종말론적 예언이 1차적으로 분명히 성취된 것같이 이제 마지막 날 대 환난을 통하여 궁극적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 나오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절)는 말씀 가운데서도 확인된다.
이 일이 다 이루리라. - 29절에 나오는 '이런 일'이 5-23절에 나오는 종말 직전의 환난을 말한 것이라면, 본절에 나오는 '이 일'은 29절에 묘사된 주의 재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편 본 구절의 주동사(主動詞)는 '이루리라' 이므로 본절은 이 일이 일어나는 시점보다는 이루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3: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30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란 표현처럼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천지'는 온 우주, 곧 모든 피조물을 포괄한다. 수천 년을 두고 변치 않는 우주조차 궁극적으로는 무(無)에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언젠가는 사라질 날이 올 것이지만 창조주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서 역사할 것이다(시 102:25-27; 사 51:6). 그런데 본절에서 예수는 이 창조주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 인해 하나님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를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요 1:1,14)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고 또한 그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사 40:8; 벧전 1:24,25).
13:32 그 날과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 '그날과 그 때'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심판자 예수 재림의 날과 때이다. 그런데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날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사와 징조가 나타나게 되지만 막상 재림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그 날과 그 시점에 대해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심지어 이 교훈을 주시는 예수 자신도 모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 재림의 때를 미리 말하는 행위는 이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서 스스로 거짓 선지자임을 입증하는데 불과하다. 그런데 예수 조차 그 날의 시기를 모른다고 하는 구절은 자칫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의 전지성(全知性) 곧 신성과 모순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일으켰다(Ariusiaus).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은 삼위일체의 직무상 원리에 의해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성부는 예정하시고, 성자는 구속하시고, 성령은 보존하시는 '직무적 차이가 있기에' 그 날과 그 때는 오직 예정하시는 성부만이 아시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그랜드 종합교리 신론 '삼위일체'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삼위일체하나님의 직무를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며 인성을 지니신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가지고 계시는 신적 전지성을 잠시 제한하는 겸손을 보이신 것으로 해석할 때 그리스도의 신성과 전지성에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 '주의하라'는 말이 종말에 대한 교훈 가운데에서 네 번씩이나 나온 것은(5,19,23절) 종말은 역사상 한번밖에 없으며 이때의 실수는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의 징조(sign)를 깨닫고 또한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 위해 항상 주의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여기서 '깨어 있으라'(아그뤼프네오)는 부정 불변사 '아'( )와 '수면'을 의미하는 '휩노스'( )의 합성어로서 '졸음을 쫓아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항상 자기 절제와 긴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재 사본(N)과 알렉산드리아 사본(A), 모스코 사본(K) 등 유수한 사본에는 '기도하라'란 말도 포함되어 있다. 즉 종말의 현상을 주의 깊게 살피며 스스로 경성하여 기도함으로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절의 두 명문은 현재 시제가 사용되어 항상 '주의하며',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성도는 본문의 교훈대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유도하는 거짓 소문과 거짓 교훈에 대해 끊임없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미혹케 되어 파멸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13:34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이 부여하신 지상에서의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는 것을 비유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히 떠나가심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그의 집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의 승천과 더불어 재림도 나타내 준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서 '사람'은 '그리스도'를, '집'은 신약의 '교회'를 비유한다.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 여기서 '종'이라 함은 주인의 집을 위임받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신약의 '성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사무' 역시 복음 전파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신 각자의 달란트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종말에 임한 성도들은 이러한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한편 '깨어 있으라'는 명령이 특히 문지기에게 명해졌는데 이 문지기가 해야 할 일은 집, 즉 교회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지켜야 하며, 또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여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항상 긴장하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13:35 저물 때에는지… 새벽에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나누었던 반면, 로마에서는 4경으로 나누었다. 본절의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등은 바로 로마가 나눈 밤의 4경을 유대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저물 때'는 오후 6시부터 19시까지 '밤중'은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 닭 울 때는 자정에서 오전 3시까지, '새벽'은 오전 3시부터 6시까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처럼 밤 시간을 세분하여 나열하며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재림의 불예측성을 강조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주께서 언제 재림하신다 할지라도 영접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교훈하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예수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결코 잠을 자지 말고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영적인 나태와 게으름에서 일어나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세를 갖출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13:36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 '홀연히'(엑사이프네스)는 전치사 '엑크'( )와 그 자체로서 '갑자기'란 뜻이 있는 '아이프니디오스'( )의 합성어로서 '예기치 못하게', '뜻밖의'라는 뜻을 지닌다. 이는 앞에서 누차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하는 시점에 이루어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방심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맡긴 권한과 사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13:37 깨어 있으라. - 종말장(終末章)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교훈으로 이미 여러 번 주어진 '깨어 있으라'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주신 여러 가지 교훈이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주어졌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비록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의 질문에(3절) 대한 대답이며 일차적으로는 당시 자리를 같이 했던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이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미래에 두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말씀이다. 즉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성도들은 재림과 종말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임을 알며 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종말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된 상급을 바라보며 경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