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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과부의 성전 헌금과 세상 종말에 대한 인자의 예언과 교훈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19:28-23:56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 즉 죄인들을 위한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주께서 평화의 황으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신 후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까지의 소위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여러 사건을 보도하는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본장은 성 고난 주간의 제 3일 후반부에 있었던 주의 교훈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본장을 크게 구분하자면 일단 다음처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이와 관련된 교훈을 주신 1-4절과 주께서 당신이 이제 곧 십자가 죽음을 당하심으로 일단 성취될 구속사역이 최종 실현될 천국이 도래되는 날로서 당신의 재림의 날인 동시에 이 세상의 끝 날이기도 한 세상 종말에 대한 교훈을 남기신 5-36절, 그리고 고난주간의 주의 사역을 요약하는 37-諸절 등으로 크게 나된다.
1-4절의 과부의 헌금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참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준다. 이미 전 우주의 창조자(創造者)요, 주권자(主權者)인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간을 무슨 공적(功績)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하시고 이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soul)의 중심 자체를 전적으로 당신께 바칠 것만을 원하시며 또한 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실 것임을 보여 준다(삼상 16:7).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부모가 제 자식을 그 어떤 능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람을 당신의 피조물(被造物)로서 무조건 사랑하시며 또한 사람도 당신을 향하여 그 무슨 일시적, 부분적 행위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당신을 창조주요 구속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사랑할 것을 원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하겠다.
한편 본장의 핵심부인 5-36절은 전장에서 기록되었듯이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여 이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한 살해 음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주님은 결국 세상 만인을 위한 구속사역의 결정적 성취가 될 다가오는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예견한 상황에서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를, 궁극적으로는 당신이 곧 성취하실 구속사역의 은총이 최종 실현될 시점인 세상 끝 날에 대한 예언과 그에 관련된 교훈을 오묘하게 복합하여 주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본 개관에서는 이런 세상 종말(終末)에 대한 주의 예언과 교훈의 전반적인 구속사의 의의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개관하기로 하고 각 개별 문단의 개관은 해당 문단강해에서 다루기로 하면서 다만 개략적으로 본문단의 내용 전개를 일단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5-7절은 주께서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을 주시자 그 시기를 제자들이 물은 것을 계기로하여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함락을,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과 재림에 대한 예언과 교훈인 소위 감람산 강화가 시작되게 된 배경 또는 과정을 보여 준다. 다음 8-11절은 세상 끝 날에 선행 (先行)될 여러 징조들을 12-19절은 세상 끝 날이 있기 전에 교회에 대한 핍박이 있을 것을, 그리고 20-28절은 더욱 오묘하게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 날의 주의 재림을 복합시켜 세상 끝 날에 있을 최후의 대환난과 주의 재림 자체를 예언하고 있다. 끝으로 29-36절은 먼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자연의 변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계절의 변화를 깨닫듯이, 이상 밝힌 주님의 가르침을 잘 되새겨 시대의 변화를 보면서 세상 끝 날의 도래를 깨달을 것과 평소 매순간이 곧 주의 재림의 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늘 근신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종말에 대한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를 교훈하신 내용이다.
이제 감람산 강화를 대할 때 기억해야 할 기본사항인 성경 예언의 복합성에 대한 설명 및 감람산 강화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갖는 구속사적 의의(救續史的 意義)에 대해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감람산 강화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예언을 대할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복합성(複合性)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예언은 대부분 그 예언이 발해지던 동시대 또는 그것이 1차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유대 역사의 한 특정시기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동일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특히 세상 끝 날에 대해서도 예언하는 내용을 한 예언 안에 동시에 오묘하게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예언의 각 부분을 대할 때 그 예언의 세부 내용이 복합적으로 지칭하는 각 대상에 대하여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장의 예수님의 예언의 경우도 1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사후(死後) 얼마되지 않아 발생할 A.D.70년 로마제국(Roman Empire)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대인 학살 사건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한편 이제 감람산 강화의 내용 자체를 전체적으로 개괄할 때에 먼저 우리는 이제 곧 자신이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당할 것을 이미 예언해 놓은 상태에서 주님이 다시금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을 주셨던 사실과 그 내용이 향후 그대로 이뤄졌고 또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어느 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에 대한 예언이 있었고 이것이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이루어진 그 사건에는 분명히 신적 개입이 있는 것으로, 먼저는 그 예언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성취된 사건은 신적 경륜(經淪)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그 예언을 주신 분은 신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이 예언을 주신 주님은 신적 능력을 가지셨으며 우리의 절대적 구주이신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 세상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God's Providence)가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역사는 실로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주권에 의하여 그분의 뜻과 섭리대로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역사의 창조자(創造者)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이야 말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할 제 1의 근거이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 역사가 지금 당장 보기에는 아무리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아도 이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궁극적으로는 의와 평강이 회복될 천국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구속의 역사임을 깨닫고 역사에 대하여 희망(Hope)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아니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전 역사에 대한 구속사적 비전은 기독교만이 보여 주는 진정한 역사의 비전(Vision)이다.
둘째 우리는 주님의 감람산 강화에서 세상 역사에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다시금 깨닫고 주목하게 된다. 지금 이 땅위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옛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이 폐쇄된 이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새 낙원 곧 천국을 향하여 진행되는 것으로서 그 종말이 분명한 중간기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 평화와 축복이 있는 영원한 거처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일 뿐이며 지금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런 역사적 종말관(終末觀)이 현실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능력을 맹신하여 무분별한 낙관을 일삼는 세속 사상과 기독교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금석(試金石)이다. 실로 종말에 대한 비전은 기독교의 역동성과 초월성의 진정한 근거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밝고도 분명하게 세상 끝 날에 이르러 새 천국이 도래하는 과정에서 이를 중오 시기하는 이 현재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탄(Satan)의 광란으로 인하여 혼돈과 미혹과 환난으로 요약될 수 있는 각종 종말의 징조들이 있을 것을 예언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the saint)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진리를 기억하고 또 주님께서 주신 종말의 각종 징조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눈앞의 현실에 흔들림 없이 그 징조를 잘 살펴서 세상의 일시적인 유혹과 환난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결론으로 얻게 된다.
실로 종말은 매 순간 우리에게 가까워 오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참다운 시작이다. 따라서 이 순간 나는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다만 이 세상 역사의 종점이요 새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한 그 날에 재림하여 다시 오실 주님으로부터 영생과 영벌 중 무엇을 받기 원하는지를 점검하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눈에 보이는 현실 뒤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구속사적 종말(救贖史的 終末)을 향하여 역사는 도도히 전진하고 있음을 다시금 기억하며 종말을 경건히 맞이하자(벧후 3:8-13).
한편 이상의 감람산 강화를 마태는 보다 상세히 다루고 있는바 그 포괄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마 제 24-25장의 성경 본문을 보라.
본장의 마지막 단락인 37-38절의 주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요약은 며칠 후로 다가올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예언하시면 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의 실체를 교훈하고 예언하시는 데에 진력하시는 구속주 예수의 노고와 의연한 자세를 새삼 목도하게 하여 준다. 또한 자신이야 말로 참 성전(聖殿) 이신 예수께서 또한 이제 곧 무너질 것으로 당신 자신이 예언하신 성전에서 이처럼 구속의 진리를 가르치신 기사를 대하면서 우리가 진정 의뢰할 참 구주는 성전 건물이나 나아가 그 어떤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예수 자체밖에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외울 말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한 과부의 성전 헌금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고후 8:12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성전 멸망 예언
5 ○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눅 19:44
종말의 징조
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0 ○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계 2:10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빌 1:28; 살후 1:5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행 6:10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행 7:59 12:2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마 10:22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마 10:30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의 예언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단 9:26,27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단 9:27; 롬 11:25
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단 7:13; 계 1:7; 14:4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무화과나무의 교훈
29 〇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종말을 맞는 성도의 자세
34 〇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의 고난 주간 사역
37 〇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눅 2:39; 요 8:1,2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본문 & 자료 노트
보감-21:1-4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의 신앙
1. 타인들의 이목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신앙(1-4절)
2. 자신이 소유한 것 전부를 주께 바친 신앙(4절)
3. 자신의 마음 전부를 주께 바친 신앙(4절)
4. 가난해도 주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바친 신앙(4절)
5. 자원하는 심령으로 바친 신앙(4절)
6. 예수께 인정받은 진실된 신앙(3,4절)
삽화-21:2, 렙돈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21:3,4 성도의 예물 봉헌 자세
민 7 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 - 21:14 미리 연구치 않기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메 프로멜레탄'으로 나와 있다. 여기서 '메'는 부정사(不定詞)로서 영어의 not 에 해당되며, '프로멜레탄'은 동사원형인 '프로멜레타오'의 부정사(infinitive)이다.
그리고 '프로멜레타오'는 장소나 시간 따위의 '전에' 또는 '~앞에'(before)를 뜻하는 전치사 '프로'와 '염려하다'(막 13:11), '경영하다'(행 4:25), 어떤 일에 전심전력하다'(딤전 4:15)등의 의미를 지닌 '멜레타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는 '미리 어떤 일을 염려하여 준비하느라고 애쓰지 말라'가 된다.
한편 본절에 대한 공동 번역과 몇몇 영역본들을 살펴보면 미리 걱정하지 말라'(공동 번역)와 염려하지 말라'(NIV: not to worry beforehand; Living Bible: don't be concerned about)로 나와 있다. 이것은 '프로멜레타오'의 다양한 의미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글 개역 성경의 '미리 연구치 않기로'라는 말은 표현상 조금 어색한 면이 있으나 원문의 뜻을 충분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면이 역력히 보인다. 즉 원문의 '메 프로멜레탄'은 단순히 마음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전에 어떤 일을 대비하여 애써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환난 날에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는 핍박을 당할지라도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말라하신 것은 첫째는 예수께서 보내실 보혜사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요(행 2:4), 둘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궁리해낸 것으로는 대적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배경-21:5,6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과 그 성취
본문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예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지 약 40년 만인 A.D. 70년경에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에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이 성취된 당시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 배경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A.D. 66년에 발발했던 유대 전쟁 당시의 배경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네로(Nero, A.D. 54-68)였다. 그는 로마 제국 전체에 황제 숭배 정책(Emperor Worship Policy)을 크게 강화하였고 이는 유일 여호와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 정책에 반대하는 거대한 유대인의 반란이 애국적 비밀당파였던 열심당(Zealots)을 주축으로 하여 일어났는데,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당시 네로 치하의 장군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유대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유대 전쟁 (Judea War)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유대 전쟁은 A.D. 66-70년까지 약 4년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우세한 듯한 때도 있었으나 로마군의 집중 공격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성전도 함께 파괴 되었다. 이 전쟁은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그는 네로의 사망과 함께 일어난 국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로마로 돌아가 황제가 되고 그의 아들 디도가 대신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는 결국 디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편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잔존 세력이 남아 유대 전쟁은 A.D. 74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유대 전쟁은 A.D. 70년에 종결된 것으로 본다.
2.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B.C. 19년경 헤롯 대왕 (the Great Herod)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으며 약 9년 동안에 기초 골격은 완성되어 그곳에서 제사는 드릴 수 있었으나 성전의 완공은 A.D. 63년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런데 A.D. 70년 8월 10일, 그러니까 완공된지 불과 7년만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장군 디도(Titus)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만 것이다.
그런데 로마 장군 디도가 성전을 파괴할 당시 헤롯이 처음 성전을 건축할 때 성전의 돌 사이에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숨겼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았다. 이로 인해 로마 군인들은 그 금과 은을 찾아내기 위해 성전의 돌 하나하나를 다 파헤쳤으며 이는 결국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성전 파괴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의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은 세상 종말에 관한 예언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A.D. 70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모든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므로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처한 우리 성도들은 말세에 관한 주님의 말씀과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들을 가슴 깊이 새겨 그날을 깨어 경성함으로 예비하는 신앙의 각오를 날로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눅 21:36).
도표-21:7-28말세의 징조마 24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21:27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삽화-21:29,30 무화과나무 가지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결실하는 것처럼 보여 '무화과'라 이름 붙여졌는데, 팔레스틴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과수의 하나이다. 그리고 무화과는 보통 1년에 2회 수확하게 된다. 즉 지난해의 가지에서 결실한 열매는 6월에, 그해 봄에 난 가지에서 결실한 열매는 8월에 수확하게 된다. 한편 지난해의 가지에서 결실되는 열매는 잎이 나기 전인 4월 이전부터 맺히기 시작하는데, 4월경에 맺힌 푸른 열매는 먹기에는 적합지 않으나 그 시기에 다른 과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먹기도 한다.
도표 -21:5-28 예수께서 주신 예언들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주요주제-21:31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주요주제-21:34-36 다가오는 종말과 성도의 현실 생활
눅 17장 연구 자료 참조
난제해설-21:32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마 24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21:34-36 말세에 성도가 기도해야 할 것 10가지
마 24장 자료 노트 참조
21:1-4 칭찬받는 과부의 헌금
앞장 마지막 난락(눅 20:45-47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서기관들의 탐욕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마음과 중심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위선적인 종교 생활이라고 지적하셨다. 이제 본문에서는 한 가난한 과부의 온전한 헌금을 통해 외식적인 신앙에 빠져있던 종교 지도자들을 간접적으로 책망하시면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에 대해 교훈하신다(막 12:41-44).
외면상으로 볼 때 부자들이 드린 헌금은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최소 단위의 화폐로 하루 품삯의 5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히 적은 양의 돈이었다. 그러나 질적으로 볼 때는 풍족한 중에 있는 부자가 드린 많은 헌금은 그 일부를 드린 것인데 비해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은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이었다. 즉,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과부의 헌금이 상당히 적은 돈이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값으로 따질 수 얼는 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부자가 많은 돈을 헌금한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자신의 소유 전체를 바치거나 가난한 중에 헌금을 바쳐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바치는 자의 정성과 진실된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과부가 생활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일백 퍼센트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과부의 신실한 신앙을 칭찬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행동 하나까지도 그냥 간과하시지 않았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잠 15:3).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면전의식(Coram Deo)을 가지고 그가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기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을 지녀야한다.
② 모든 소유와 존재가 하나님의 것임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대상
29:3,4; 말 3:10; 고후 8:3,12).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 막 12:41을 보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오랜 논쟁을 마치시고 휴식을 취하는 약간의 가벼운 마음으로 성전의 뜰에 있는 연보궤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것으로 보인다.
연보궤. - '연보궤'는 성전 구내의 여인의 뜰에 있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을 가리킨다. 이 헌금함은 당시 13개가 있었는데, 각 헌금함에는 그 헌금의 사용 용도에 대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었다.
21:2 가난한 과부. - '가난한'(페니크란)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유일한 단어로, 이 말은 매우 궁핍하게 지내는 사람을 나타내는 속담적 표현이다. 누가는 이 말을 통해 과부가 도저히 헌금을 바칠만한 여력이 없는 극빈자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바로 앞절의 부자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렙돈(렙타)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서, 두 렙돈은 법적으로 연보궤에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금액이었다(Morris). 이로 보아 과부의 헌금이 지극히 적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3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많이 넣었도라. - 그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사회 여건 속에서 과부들이 돈을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란 백성들 중에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자로서, 그들은 항상 구제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록 과부가 적은 헌금을 하였으나 그 정성을 귀하게 보신 것이며, 그 과부의 헌금이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의 헌금보다도 많은 것을 바쳤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바로 조금 전에 이스라엘의 대표적 종교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경고하신 반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 중의 가장 연약한 자라할 수 있는 과부의 신실함을 칭찬하시면서 과연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전부를 넣었느니라. -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들 보다 많이 바친 것이라는 예수님의 평가는 과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풍족한 생활 중에 극히 적은 일부분을 헌금한 것이지만, 과부는 힘들고 궁핍한 생활 여건 속에서 자신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생활비 일체를 바쳤다는 산실에 의해 입증된다. 그리고 여기서 '생활비'(비온)는 구체적으로 '먹고 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생활비 전부를' (판타 톤 비온)이란 표현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과부가 가진 전 소유를 바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가난한 과부들은 거의 재산이 없는 관계로 하루하루 어렵게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던 상황들을 고려할 때, 이는 과부가 매일의 수입 가운데 그날 하루의 수입 전부를 바쳤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Ryle).
21:5,6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예언
본문은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를 교훈하시며 논쟁을 벌이시던 예수께서(눅 19:47-21:4) 성전을 나와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 어떤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을 계기로 장차 예루살렘 성전이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내용이다.
사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B.C. 19년에 착공되어 A.D. 63년에 완공될 정도로 방대하고도 화려했으며 아름다웠다(본장 연구자료, '헤롯 성전의 이해' 참조). 그러나 당시 성전에서는 온갖 비리가 성행했고 인간의 위선과 가증한 종교 형식만이 조장되었다. 따라서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리가 없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장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성전의 파멸을 선언하심으로써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된 지 불과 7년여 만인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기초까지 파헤쳐져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담고 있지 못하는 종교 및 교회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한괸 이러한 본문은 본문 이하에 언급되는 종말 예언의 서론적 역할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7-19절 강해를 참조하라.
21: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 누가는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으나 마태와 마가의 기록(마 24:1; 막 13:1)에 의하면 예수께서 헌금에 대한 교훈을 마치시고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러한 말을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미석. - '미석'(리도이스 칼로이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되었던 거대하고 화려한 횐 대리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돌은 주로 성전의 기둥과 하부 구조의 건축에 사용되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헤롯 성전 건축에 사용된 미석은 가로 11.4m, 세로 3.7m, 높이 5.5m가 되는 엄청난 규모의 크기였으며. 특별히 성전 입구에 세워진 대리석 기둥들의 높이는 무려 12m나 되었다고 한다.
헌물. - 이것은 성전 건축에 봉헌된 물건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헌물들은 주로 보석과 귀중품으로서 성전의 기등과 현관에 장식되었다. 그리고 이 성전에 봉헌된 헌물들 중에서 헤롯이 B.C. 19년에 성전을 개축한 것을 기념하여 그가 헌정한 금으로 만든 포도나무에는 사람 키만한 황금 포도 송이가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Josephus).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무너뜨리우리라. -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던 말씀(눅 19:44)과 같은 표현으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이 말씀은 A.D. 70년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디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의 부하 중 한 병사가 성전을 완전히 전소시킴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차에 걸친 성전 파괴로 인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나중에는 성전의 기초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결국 제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 도리어 인간의 위선과 가증한 종교 형식만을 조장하는 장소로 전락할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본절과 관련해서는 마 24:2 주석과 본장 자료노트,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과 그 성취'를 보다 참조하라.
21:7-19 종말의 징조
본장의 본문 이후에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예언(5,6절)을 듣고 질문한 것을 계기로 예수께서 세상 종말의 때와 관련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자들의 질문의 내용은 성전 파괴가 언제 있을 것이며, 또한 그때의 징조는 무엇이냐는 것이었다(7절).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란 오직 세상의 종말에만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결국 지금 종말의 때와 징조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24:3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이에 예수께서는 그에 대하여 답변하고 계시는데 본문에서는 종말의 징조들을 몇 가지로 말씀하고 계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제자들의 질문이 성전 파괴 또는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이 라는 두 문제가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듯이 예수의 답변 역시 성전 파괴 또는 예루살렘 멸망의 때의 징조 및 세상 종말의 때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 세상 종말의 때를 투과하여 보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성전 파괴는 세상 종말을 예표한다. 이처럼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사건과 먼 미래의 사건을 동시에 투시하여 이중으로 예언하는 것을 소위 '예언적 원근법'(prophetic foreshortening)이라 부른다. 하여튼 예수께서 종말의 징조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면 종말의 때에는 ① 적그리스도의 출현(8절), ② 난리와 소란(9, 10절), ③ 자연 재해(11절), ④ 성도에 대한 세상의 박해(12-19절) 등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영을 잘 분별하여 악한 영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그리스도라 자처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거짓교사들이 많은바 그들을 경계하여 그들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요일 2:18,19).
② 시대가 악할수록 종말의 때가 가까워옴을 알고 그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는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종말의 징조임에는 분명하다.
③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소망 중에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죄악이 극심해질수록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이 극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종말의 때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딤후 1:3: 유 1:3).
21: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징조가 있사오리니까. - 막 13:3에 의하면 이 질문은 예루살렘 성 전체의 모습이 잘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안드레, 요한 등이 질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여튼 제자들은 본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질문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 파괴의 구체적인 시기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전 파괴 전에 있을 징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는 세상 종말에만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 질문은 세상의 종말의 시기와 그 징조를 묻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병행을 이루는 마 24:3에 보다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21:8 본절에서부터 36절까지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예언의 복합성이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또는 세상의 종말을 같은 때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A.D. 70년에 있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답변을 통해 가까이는 예루살렘 멸망을, 멀리는 종말적인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종말 예언에는 제자들의 질문과는 달리 현 세대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과 장차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종말의 예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아니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의 때라면, 세상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때인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예수의 예언을 해석하면서 어느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종말의 징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반면, 종말의 구체적 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종말의 때를 '이때다' 혹은 '저 때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여기서 '미혹'(플라네데테)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는 약간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근본적인 진리를 떠나는 오류를 가리킨다. 아울러 예수님이 주신 이 경고는 매우 중요한 교훈으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교회 역사의 각 시대마다 잘못된 신학적 교훈과 거짓된 이단의 유혹을 경계하는 시금석이 되어 왔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 예수께서 제시하신 종말의 첫째 징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예루살렘의 함락 이전과 이후로부터 시작하여(행 5:36,37; 8:9; 21:38)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곳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마 24:5 주석 참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 '때가 가까왔다'(호 카이로스 엥기켄)는 표현은 세례인 요한이 메시야의 오심을 예고할 때(마 3:2)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가르치실 때(막 1:15) 말씀하셨던 것으로, 이는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임박한 종말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적 태도를 유지해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적그리스도의 거짓 주장과 유혹을 구별하고 경계함으로써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21: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난리와 소란'은 종말의 두 번째 징조로서 '난리(폴레무스)는 '큰 전쟁'을 가리키며, '소란'(아카타스타시아스)은 '작은 소요와 끊임없는 분쟁'을 나타낸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전쟁과 소요가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징조가 되겠지만 이것과 함께 세상의 종말이 즉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어려운 때를 만날수록 때를 잘 분별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21:10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 9절의 '난리'와 '소란'의 부연 설명으로 종말에 가까이 이르러서는 민족 또는 국가 간에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사실 전쟁이 종말을 나타내는 하나의 중요한 징조라는 것은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던 통념이었다(욥 38:7: 사 2:4; 단 9:26).
21:11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 이제 종말을 알리는 세 번째 징조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적인 재해가 뒤따를 것을 말씀하시는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은 구약 성경에서도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형벌 중의 하나였다( 민 16:32; 삼하 24:13), 또한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예루살렘은 기근과 온역이 심해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으며 로마, 라오디기아(Laodicea),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골로새(Colosse) 등의 도시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후로 해서 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Jose phus, Tacitus).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 여기서 '무서운 일'(포베트라테)이란 구체적으로 천체의 이변을 포함하여 나타나는 심각한 일들을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이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절에만 나타나는 말이다. 그리고 '하늘로서 큰 징조들'(아프 우라누 세메이아 메갈라 에스타이)이란 말의 보다 정확한 번역은 '하늘로부터의 큰 징조들'로서 이는 별들 사이의 이변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징조들은 종말 때의 상황을 묘사하는 신약 성경의 계시 문학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벧후 3:10; 계 6:13; 8:12).
21: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끌어가려니와. - 종말의 네 번째 징조는 성도에 대한 핍박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징조는 시간적으로 지금까지 열거한 징조들보다 앞서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한편 여기서 '회당'(쉬나고가스)은 유대인을 통한 종교적 핍박을 의미하며, '임금들과 관장들'(바실레이스 카이 헤게모나스)이란 표현은 세속 권력자를 통한 정치적 박해를 의미한다.
21: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 성도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그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에 신자가 되는 것은 곧 전도자가 되는 것이었고, 전도자가 되는 것은 곧 순교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성도의 고난이 복음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여기서 '증거' (마르튀리온)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충성을 나타내는 표시'를 가리킨다.
21:14 너희는 변명할 것을‥‥결심하라. - 이는 핍박자 앞에서 변명할 말을 준비하지 말라는 뜻으로서 핍박받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위로와 힘을 주실 것이라는 격려의 말씀인 동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너희에게 주리라. -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재판정 에 끌려 나갔을 때 변명할 것을 미리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구절로.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가 친히 대적에게 변박할 수 있는 구재(ㅁ才)와 지혜를 성도들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서 '구재'(스토마)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출 4:11, 12; 렘 1:7), '지혜'는 성도들을 대신해 변호하실 성령을 가리키는 듯하다(마 10:20; 막 13:11).
21: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죽이게 하겠고. - 전반적으로 미 7:4,6에 나타난 사상을 반영한 말씀으로 성도에 대한 핍박이 가족이나 친지 및 친구에 의해서도 자행될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에 대한 핍박의 심각성을 잘 보여 준다. 사실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정에서 신앙으로 인해 반목과 적대가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실례로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창 4:8).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혈육의 관계를 초월해야 하며, 그에 따른 그 어떤 고통도 능히 감당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엄격히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눅 14:26,27). 특히 본절에서 누가는 가족만을 언급하고 있는 마가(막 13:12)와는 달리 친척과 친구들도 핍박에 있어 앞장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난 인간관계의 허무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1:17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미움을 받을 것이나.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악한 자들이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똑같이 증오하고 대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여기서 '내 이름을 위하여'(디아 토 오노마 무)라는 말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도들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모든 사람'(휘포 판톤)이란 표현은 '인종, 신분, 국적, 성별, 연령 등을 초월한 총체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는 죄로 오염된 모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게 될 것을 시사한다.
21: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절대적 안전을 뜻하는 격언적 표현이다(삼상 14:45; 삼하 14:11; 왕상 1:52). 그런데 본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앞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분명히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16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모순되는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말씀이다. 아울러 이 말씀은 마 10:29,30의 교훈과 같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하나님의 섭리에 벗어나 있지 않지만 우리에게 만일 어떤 고난과 핍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한 섭리의 결과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 여기서 '얻으리라'(크테세스데)는 말은 '보존하다', '지키다'를 의미하고, '영혼'(프쉬카스)이라는 말은 '생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에게 주어진 환난과 핍박을 참고 인내하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보존한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와 은혜가 요구됨은 물론, 우리에게도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롬 5:3; 살전 5:14; 히 10:36; 약 1:4).
21:20-24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
지난 단락(7-19절)에서는 종말의 징조를 네 가지로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의 종말 이전에 있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하신 내용이다. 이러한 본문은 동일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마태와 마가의 병행구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다니엘의 예언인 멸망의 가중한 것(단 9:27; 11:31; 12:11)을 생략하고 좀더 긴박한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여튼 본문을 보면 먼저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면 멸망이 가까운 줄로 알 것을 경고하고 있다(20절).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이 가까울 때의 행동 지침(21,22절)과 예루살렘 멸망 때에 유대인들에게 미치게 될 화(23,24절)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예언은 실제로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장군 디도의 포위 공격을 받아 멸망 받음으로 성취되는데. 이때 약 110만 명이 학살되고 97,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갔다고 한다. 이러한 처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의 전조로서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종내에는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도들을 박해한 모든 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멸망 당시 예수의 경고의 말씀을 기억한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포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모두 요단 동편의 펠라(Pella) 지역으로 피신함으로써 한 사람도 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시대를 잘 분별하석 마지막 환난의 때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21:20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 이 구절에서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전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이다. 특히 본절에서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9절). '큰 전쟁'(10절), '큰 지진, 기근, 온역, 하늘의 징조'(11절)들과는 달리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려 주는 즉각적인 징조로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경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성경 비평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본절의 정확한 묘사는 이 부분이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기록되어 첨부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논리는 누가복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Morris).
21:21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들어가지 말지어다. - 당시 전쟁이 일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성으로 피신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징조를 깨닫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피신할 것을 새롭게 권고하시는데, 그 이유는 패역한 예루살렘 성읍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와 그 당시 많은 역사적 자료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 모두 요단 동편의 펠라(Pella) 지역으로 피신함으로써 A.D.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무참한 살상을 감행했을 때, 성 안에서 죽은 그리스도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Hendriksen, Morris, Spence).
21:22 기록된 모든 것. - 여기서 기록된 '모든 것' 이란 하나님께서 행악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의 말씀을 가리킨다(레 26:31-33; 왕상 9:6-9; 사 29:2-4; 단 9:26,27; 미 3:12 등).
21: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이는 임부와 젖먹이는 어머니는 환난 중에 빨리 피신하지 못하는 처지이므로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여기에는 ① 형벌의 처절함과 ② 심판의 돌발성이 암시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땅에'(에피 테스 게스)란 말의 해석을 놓고. 이 땅이 팔레스틴 지역에 국한되는 것인지(Farrar) 아니면 전 세계적인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지(Alford, Bengel)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논란이 된다. 그러나 본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환난을 당할 백성은 예루살렘 멸망 때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 땅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이 위치하고 있는 팔레스틴 지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1: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사로잡혀 가겠고. -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보낸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이 유월절 순례자로 가득 차 있을 때인 A.D. 70년 4월부터 시작하여 약 5개월 동안 성을 포위한 결과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수 있었는데, 이 때 살해된 유대인은 약 110만 명이었고 포로로 잡혀간 수는 97,000명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예수의 예언은 정확히 성취되었는데, 이는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의 전조로서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종내에는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와 같이 종말에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성도들을 박해한 모든 자들에게 더 큰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다(계 11:3,11; 12:6,14).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 여기서 '이방인의 때'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 직전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의 지위에서 떨어진 유대인들 대신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구원받는 은혜의 때를 가리킨다(롬 11:ll),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는 말은 이방인이 구원받은 수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로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인 유대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과 그로 인해 이방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롬 11:25).
21:25-28 세상의 멸망 예언
세상 종말의 예표인 예루살렘 멸망 예언을 언급한데(20-24절) 이어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을 세상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언급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천체와 자연계의 이변이 있게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25,26절).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있게 될 제현상에 대해서는 계시록에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이때를 보통 '7년 대환난기'라 부른다. 이때에는 실로 예루살렘 멸망 때 유대인들이 겪었던 환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환난이 온 세상에 임하게 될 것이다. 하여튼 예루살렘의 멸망이 한 민족과 국가에 국한된 심판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림(27,28절)은 온 세상과 모든 인류에게 임하는 역사적 종말이다. 그러나 이때에 성도들은 영광중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불신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다는 점에서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구원의 날이요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 끝이 가까울수록 구원과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환난의 때에 인내하며 기쁨과 소망을 지녀야 할 것이다(롬 8:17; 12:12; 히 10:36; 벧후 1:6).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재림을 모든 이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재림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시사하셨는데, 이는 오늘날 갑자기 나타나 자칭 재림주라 하는 자들의 허구성을 잘 드러내 준다.
21: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 본절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던 지엽적인 문제와는 달리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따른 세상의 종말과 그 구체적인 징조들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징조' (세메이아)는 흔히 '표적' 또는 '이적'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신약 성경에서 기적적인 징조를 나타낸다(요 4:48; 행 2:22). 아울러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천체와 자연계의 징조는 예수님께서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는 또한 구약 성경에서 빈번히 예고된 징조이다(사 13:10; 겔 32:7; 욜 2:10; 암 8:9).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 종말을 예고하는 자연계의 이변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 매우 당황하게 되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혼란한 중에'(엔 아포리아)라는 말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며. '곤고하리라' (쉬노케)라는 말은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알고 고민하며 낙심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를 부각시켜 주는 표현이다.
21:26 기절하리니. - '기절하리니'(아포프쉬콘톤)란 말은 흔히 호흡이 멈춘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이는 종말에 임할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마치 죽은 것처럼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늘의 권능들. - 히브리적 사고에서 '하늘의 권능'은 천사, 마귀, 천체 등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25절과 연관시켜 천체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다는 것은 종말에 우주가 총체적인 대이변을 일으킬 것을 의미한다. 마 24:29 주석 참조.
21: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오는 것을 보리라. - 이것은 공관복음서에서 똑같이 표현되고 있는 말씀으로서 전반적으로 단 7:13,14에 기록된 예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는 또한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다(마 26:64; 살전 4:16,17; 계 1:7).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영광중에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데, 이는 '능력과 큰 권능'(뒤나메오스 카이독세스)을 가지고 오신다는 말씀 속에서 입증된다. 그리고 여기서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 온 세계를 소멸하시며(벧후 3:7,10),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고전 15:57), 살아있는 자들의 육체를 부활한 자들의 육체와 같이 변화시키실 뿐만 아니라(살전 4:17; 고전 15:52). 악한 자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강할지라도 마침내 그들을 정복하실 것(마 25:41; 계 18:1-3)을 가리킨다. 또한 '영광'이란 표현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이후 위엄과 권능을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굴복시키고 통치하실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한다.
21: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 이 말씀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먼저 이것을 알리는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여기서 '이런 일'이란 25,2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할 일이다. 일어나 머리를 들라. - 사실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고하신 징조들이 발생할 때, 주님의 말씀을 성실히 기억하는 성도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 말씀은 재림의 징조들이 나타날 때 성도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대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권고하는 말씀이다.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따른 영광스러운 소망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대가를 치루고 이룩한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사상인데, 여기서 '구속'(아폴뤼트로시스)은 단순한 영적 구속의 차원을 넘어 육체까지 변화를 받는 완전한 구속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구속은 오늘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성도들에게 준비된 생명의 면류관인 것이다.
21:29-38 종말을 맞는 성도의 자세
본문은 이미 언급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대한 교훈(5-28절)의 결론으로 여기서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나누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29-33절로, 여기서는 무화과나무나 모든 나무의 자연적 성장을 통해 계절을 알 수 있듯이 마지막 때에 있을 여러 징조를 보고 종말의 때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히 언급하신 반면 종말의 시기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성도들로 하여금 항시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여기서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나 종말의 때가 이때다 저때다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알고 종말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며 미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둘째 부분은 34-36절로, 여기서는 종말에 성도들이 주의하여 조심할 태도를 교훈하고 있다. 즉 언제 임할지 알 수 없는 종말의 때를 생각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염려로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이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심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눅17:22-35).
세 번째 부분은 37,38절로, 이 부분은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결론짓는 것으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복음 전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이 시작되기 전까지 낮에는 성전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저녁에는 감람원에서 쉬셨는데, 이른 아침이 되면 백성들이 그의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이 나아왔다. 이것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다음 장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되는 배경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종말에 관한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므로(시 102:26; 사 51:6; 히 1:11,12; 벧후 3:7) 성도들은 예민한 영적 안목을 가지고 이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② 주님의 재림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늘 깨어서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살전 5:5, 6; 벧후 3:9-13; 계 3:11).
21:29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 같은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 마 24:32과 막 13:28에서는 '무화과나무'만을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누가는 '모든 나무'를 첨가시키고 있는데, 이는 '무화과나무'에 적용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나무에도 기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30,31 싹이 나면‥‥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 - 부분의 나무는 봄에 싹이 나고 여름에 잎이 무성해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보고 계절을 감지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는 시대의 징조를 보고 종말의 때를 분별하도록 교훈하고 계시다. 특히 누가는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고 한 마태와 마가의 기록(마 24:33; 막 13:29)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칭의 사용은 누가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을 매우 포괄적이고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아울러 '가까운'(엥귀스)이란 말의 본절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완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Robertson).
21:32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뿐 아니라 임박한 세상의 종말을 강조하는 공관복음서의 공통적인 표현으로, 여기서 '이 세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24장 자료노트.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를 참조하라.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 한글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앞의 문장과 연결되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 성경의 보다 바른 번역은 '모든 일이 다 이루기까지는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다(Robertson). 그리고 여기서 '모든 일'(안 판타)이란 표현은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루어지기까지 전 기간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6-28절)을 가리킨다(Hendriksen).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 그의 예언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천지가 없어질 때는 최후 심판의 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 천지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심판자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천지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그의 말씀은 항상 살아서 역사하며(시 102:26; 벧후 3:7),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 이와 같은 경고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 또는 사두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고 그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특히 여기서 '조심하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적인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탄의 세력과 맞서기 위해 경건의 모습으로 무장하라는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딤전 6:11).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 이 모든 것들은 성도들의 생활에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죄의 유혹으로서 이러한 모습은 그 당시의 사회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만연되고 있는 인간의 잘못된 모습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유혹에 굴복함으로써 그들 삶을 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파멸당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이것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함으로써 주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게 하는 치명적 장애물인 것이다.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 마태는 심판의 날이 노아 시대의 홍수처럼 갑자기 다가올 것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덫과 같이'(호스 파기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 역시 심판의 두려움과 임박성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다. 즉 종말은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예기치 못한 덫에 빠지듯 돌연히 임하여 큰 낭패를 안겨다 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항시 종말의 때를 준비하고 있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임하리라. - 본절은 예수의 재림에 따른 심판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임할 것이라는 심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21:36 인자 앞에 서도록. - 이에 대해서는 크게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견해(Farrar, Ellicott)와 '영광의 주 앞에 선다'는 견해(Alford)로 나뉜다.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즉 이 말씀은 종말 때의 환난을 피하고 구원에 이르러 영광의 주를 맞도록 준비하라'는 권고이다. 깨어 있으라. - 여기서 '깨어 있으라'(아그뤼프네이테)는 말은 단지 문자적으로 '자지 말라'는 뜻의 차원을 넘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신앙의 통찰력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는 주님의 명령이다.
21:37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는가를 설명해 주는 말씀으로, 특히 본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주일과 월요일, 화요일 등 3일간의 행적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요 13장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화요일로 끝났고, 수요일 이후는 제자들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시며 마지막 사역을 준비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 여기서 '쉬시니'(율리제토)란 말은 신약 성경에서 본절과 마 21:17에만 나오는 단어로 마태복음에서는 '유하시니라'고 번역되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쉬셨다'는 말은 노숙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계속적인 노숙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마 21:17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고난주간이 시작되고. 예루살렘 입성이 있었던 주일날 베다니에서 유하신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감람산에 대해서는 막 1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21:38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 당시 예루살렘에는 그곳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문들을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는데, '이른 아침에 백성들이 모였다'는 것은 청중들의 이러한 열심을 잘 나타낸다.
연구자료
헤롯 성전의 이해
헤롯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세 번 건축된 성전 중 그 마지막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Temple, 聖殿)이란 다른 이방 종교에서처럼 여러 예배의 처소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절대 초월자이신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 백성 중에 임재하심 또는 임재하여 계시는 곳을 상징하는 유일한 처소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각 성전은 항상 그 시대의 종교적, 정치 ․ 사회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므로 각 성전에 대한 전반적 이해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헤롯 성전은 B.C. 19년경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그 기초 골격은 완성되었지만 그것이 최종 완공된 것은 A.D. 63년경이었다. 따라서 예수 당시에는 헤롯 성전이 아직 미완성인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 성전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의 구심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공생애 사역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였다. 이에 헤롯 성전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서의 배경으로서의 신약 시대 이스라엘의 종교, 사회, 정치적 배경들을 이해하는 데 큰 보탬이 되고자 한다.
1. 헤롯 성전의 건축 동기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C. 37-4)이 성전 건축을 개시할 당시 이스라엘에 성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B.C. 516년에 건축된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스 6:16-22)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기존에 있던 제 2성전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재건하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방 이두매 왕가 출신으로서 로마제국의 임명에 의해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된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헤롯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통치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헤롯이 로마 황제에게 유능한 통치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새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이다.
또 사실 당시에 있었던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과거 제 1성전인 솔로몬 성전(B.C. 959년,왕상 6:1-38)에 비해 매우 초라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의해 수차례 모독을 당함으로써 대부분의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또 이 때문에 성전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세부 설명은 스 6장 스룹바벨 성전에 관한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이에 헤롯은 새로운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자신과 정치적으로 결탁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다시 성전을 중심으로 일반 민중들에게 더욱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랬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팔레스틴 통치가 수월해지기를 바랬다. 물론 이 같은 동기에서 헤롯이 성전 재건 사업을 추진하기는 했으나 스룹바벨 성전 시대 이후 가견적 건물로서의 성전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빌미로 새삼스럽게 획기적인 종교 ․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헤롯 성전은 다만 헤롯 왕가의 통치를 지지했던 헤롯당과 헤롯에 의해 임명되었던 대제사장과 그 수하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의 주관에 의해 정규적인 동물 회생 제사가 드려진 종교 의식적인 측면에서만 그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2. 헤롯 성전 관련 역사
헤롯 성전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통치 18년째인 B.C. 19년이었다.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의 본체와 성전 뜰은 착공한 지 약 10년만인 B.C. 10년경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 공사는 성전 건축 개시 46년만인 A.D. 26년경, 곧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실 무럽(요 2:20)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마침내 성전 수비 요새인 안토니아 망대를 비롯하여 성전 외벽과 각 모퉁이의 망대들까지 모두 완공된 것은 성전 건축개시 83년만인 A.D. 63년경이었다.
한편 A.D. 49년경 유대 주재 로마 총독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A.D. 48-52년) 때에 로마 병사가 유월절에 성전을 모독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큰 충돌이 있었는데 많은 유대인들의 참사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또 A.D. 65년경 유대 주재 로마 총독인 플로루스(G.Florus, A.D. 65-70년)가 헤롯 성전의 창고에서 보물 몇 개를 가져갔다가 유대인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것이 비록 식민지 체제로나마 국가로서의 유대의 최종 멸망을 초래한 유대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A.D. 70년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아들 디도(Titus)의 예루살렘 함락에 의해 헤롯 성전은 전소되었다. 그러니까 결국 헤롯 성전은 완공된 형태로는 불과 7년 밖에 존립하지 않은 셈이 된다. 한편 디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 로마 군병들 사이에 헤롯이 이 성전을 건축할 때 성전의 돌과 돌 사이에 막대한 양의 은 . 금을 넣어 두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 병사들은 그 금과 은을 찾아내기 위해 성전의 돌하나 하나를 나 파헤쳤는데, 이로써 결국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눅 21:6).
3. 성경에 나타난 성전 관련 사건들
사 건 | 장 소 | 관 련 성 구 | |
1 | 주의 부모에 의해 아기 예수가 성전에 봉헌되고 할례 받음 | 여인의 뜰(?) | 눅 2:27 |
2 | 예수가 12세 되던 해 유월절에 성전을 방문함 | 성전 구내 | 눅 2:41-52 |
3 | 사탄이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데려감 | 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주랑의 뾰족 지붕 | 마 4:5 눅 4:9 |
4 | 예수의 제 1차 성전 숙정 | 이방인의 뜰 | 요 2:20 |
5 | 예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심 | 솔로몬 행각을 비롯한 여러 곳 | 마 26:55 마 12:35; 요 10:23 |
6 |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 | 여인의 뜰 | 막 12:41-44 눅 21:1-4 |
7 | 예수의 제 2차 성전 숙정 | 이방인의 뜰 | 마 21:12 |
8 | 예수의 성전 파괴 예언 | 성전 | 마 24:1,2 막 13:1,2; 눅 19:44 |
9 | 예수 운명시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이 찢어짐 | 마 27:51 | |
10 | 예수 부활 승천 후 12제자들이 매일 예배드림 | 성전 구내 | 눅 24:53 행 2:46 |
11 |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침 | 동쪽 성벽에 위치한 미문(秀門) | 행 3:1-10 |
12 |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함 | 북쪽 성벽에 위치한 안토니아 망대 | 행 21:32-35 |
4. 헤롯 성전의 규모와 구조
1) 규모
헤롯 성전의 전체 규모는 솔로몬 성전보다 오히려 크고 웅장했다. 먼저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 본체에 있어서 솔로몬 성전은 성소의 높이가 30규빗(1규빗= 45.6cm), 지성소의 높이가 20 규빗인 데 반해 헤롯 성전이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는 각각 60규빗이나 되었다. 물론 성전 본체 전체의 길이와 넓이는 둘 다 동일했다. 특히 헤릇 성전의 현관의 높이는 100규빗에 이르며 현관 정면과 동편이 금판으로 꾸며져 그 화려하기가 다른 어떤 성전에 비할 바 아니었다.
성전 본체를 비롯하여 성전 뜰을 다 포함하는 성전 외벽에 둘러싸인 헤롯 성전 지대 전체의 총면적은 141,638제곱 m였다. 그리고 서쪽 성벽의 총길이는 479m, 북쪽은 306m, 동쪽은 469m, 남쪽은 276m로서 전체 모양은 약간 비뚤어진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벽의 높이는 약 29m가 되었다. 한편 과거의 솔로몬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에서도 성전을 둘러싼 성벽이 있었으나 그 크기나 규모에 관해서는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으며 헤롯 성전의 외벽보다는 휠씬 작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 구조
헤롯 성전의 본체의 기본 구조는 솔로몬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의 구조와 동일했다. 다만 그 크기나 웅장함에 있어서 헤롯 성전은 다른 성전들에 비해 월등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성전 건물 전체는 6구획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구획마다 그 높이가 각각 달랐다. 이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에 각 단계별로 접근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 함으로써 죄인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계 단절을 상징하며 나아가 죄인이 그 속죄를 구하러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과 그에 요구되는 자세의 엄정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는 이 헤롯 성전의 원형인 모세 시대의 성막(Tabemacle)과 솔로몬 성전의 건축 양식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직접 규정하신 규례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규정의 참 정신은 도외시하고 이런 성전에서 종교 의식을 집전하는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과 배타성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하였었다.
① 성전 본체-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 본체는 성전 전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② 제사장의 뜰-성전 본체에서 12계단, 약 2.5m를 내려가면 이르는 곳이다. 제사장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곳이며 이곳에서 주로 동물 희생 제사가 이루어졌다.
③ 이스라엘의 뜰-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 사이에는 약 2규빗(90cm) 높이의 분리대가 세워져 있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곳에서 제사장들이 집행하는 동물 회생 제사를 지켜보았다.
④ 여인의 뜰-이스라엘의 뜰에서 15계단, 약 3rn 아래에 위치해 있다. 유대 여인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⑤ 이방인의 뜰-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약 3규빗(약 1.2m)높이의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으며, 울타리 꼭대기에는 이방인들이 이 울타리를 넘을 경우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적힌 팻말이 달려 있었다. 한편 환전상들과 희생 제물을 매매하는 장사꾼들이 위치했었던 곳도 바로 이곳 이방인의 뜰이며 두 번에 걸쳐 예수께서 이곳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셨다(요 2:14-16;마 21:12-17).
⑥ 성전 외벽-이 외벽의 동, 서, 남쪽에는 각각 2개의 성문이 있었고 북쪽에는 1개의 성문만 있었다. 혹자는 남쪽에는 3개, 서쪽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성전 수비 요새의 역할을 하던 안토니아 망대는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에, 그리고 감람산으로 통하는 솔로몬의 보좌라고도 불리어지는 금문(Golden Gate)은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솔로몬의 행각도 동쪽 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날 가장 많이 보존되어 남아있는 벽은 서쪽벽으로서 소위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 불리우는 곳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5. 의의
포로시대 이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단일 중앙 성소(신 12장. 연구자료 참조)로서의 성전의 중요성은 상당히 격감되었다. 그 근본적 이유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이 대부분 회당(Synagogue)을 중심으로 한 각 마을 단위의 공동체 또는 디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회생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헤롯 성전의 경우는 이방인 출신인 헤롯이 그 성전을 건축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에세네파 사람들까지 성전에서의 제사를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들 나름대로의 제사를 성전이 아닌 자신들의 예배처에서 드리기도 했다.
더욱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성취로 주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희생 제사의 유일한 장소로서의 성전의 의의는 종결되었고 더욱이 헤롯 성전 파괴 예언(막 13 : 2)에 의해 가견적 건물로서의 성전의 중요성은 결정적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심 또는 임재하여 계시는 처소의 상징으로서의 성전의 의의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성령이 각 성도에게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단순히 상징의 차원을 넘어 실제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신약 시대에는 각 성도의 전 인격이 곧 성전이 되게 되었다(고전 3:16,17; 엡 2:19-22).
따라서 헤롯 성전이 갖는 신학적 의의는 이전 솔로몬 성전시대의 그 성전이 갖는 의의에 결코 비할 바 못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 성전은 여전히 그 시대 유대인들의 종교, 정치 중심지로서 그리고 신약 성경의 한 무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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