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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장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의 유대인들의 고소와 바울의 변론 및 헤롯 아그립바의 등장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21:17-28:31에 이르는 일련기사 곧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Rome)에 이르게 되는 소위 바을의 로마 여행 과정을 기록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바울이 소위 유대교(Judaism)의 오류에 빠진 광신적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무고히 체포된 때부터 마침내 가이사(Caesar)에게 직접 판결받기 위하여 미결수(未決囚)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B.C. 58-60년까지의 대략 2년간의 과정을 기록한 21:17-26:32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즉 본의 아니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충돌하여 소요를 일으켜서 유대 율법 모독 및 사회 소요죄로 기소된 바울이 체포 직후부터 유대 군중 전체와 유대 공회 및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을 대리 통치하던 헤롯 가문의 분봉왕(分封王)과 로마 총독들 앞에서 수차 예수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자신의 사역 의 정 당성과 합법성을 변론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가진 로마 시민권(Roman Citizenship)의 특권의 하나인 가이사 곧 로마 황제에게 직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결과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21:17-26:32까지의 일련 기사는 사소한 세부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유대교의 오류에 빠져 주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초대 교회를 곡해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율법모독자 및 로마 식민 사회의 파괴자로 무고히 기소당한 바울이 수차에 걸쳐 주의 복음과 자신의 사역을 변론하다가 마침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결과 로마로 이송되게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그 전체적 맥을 같이한다. 이에 본고(本積)에서는 먼저 이 일련기사의 전반적 내용전개를 요약하고 그 전체적 배경과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만 요약하기로 한다. 따라서 본장 자체의 내용과 그 세부적 의의에 대해서는 본장의 해당 강해주석을 보라.
이제 21:17-26:32까지의 내용 전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21:17-40은 이제 마지막 선교 여행이었던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바울이 본의 아니게 소동에 휘말렸던 사실을 보도한다. 즉 바울은 우리 주 예수 안에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바펀 상똥에서 구약을 성취 확장한 신약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구약의 일부 내용에 인본주의적 전숭(tradition)까지 가미하여 유대인들만의 지상구원을 주장했던 유대교의 오류에 라져 곡해한 나머지 하나님과 구약 율법을 모독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핍박하고자 하는 일부 광신적 유대인들의 오해를 구약 율법에 규정된 결례(潔禮)를 행함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본문은 바로 그런 결례의 과정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이 이 방인을 성전 경내로 끌어들여 성전을 모독한 것으로 속단한 유대 군중들에 의하여 큰 소요(騷麗)에 휩싸임으로해서 본의 아니게 소요의 주역으로 로마 천부장에 의하여 체포된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22:1-21은 바울이 체포직후 유대 군중들 앞에서 행한 변론을 보도한다. 다음 22:22-23:11까지는 군중들이 계속 소요하자 바울의 문제를 유대 민족내의 종교 문제로 파악한 천부장이 유대 공회(Sanhedrin)의 소집을 요청하여 일단 바울을 유대 공회 앞에 세우자 이에 바울이 다시 한번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중에 특히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리적 견해 차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앙 곧 복음의 도를 교묘히 변론하고 나아가 유대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를 더욱 노출시킨 사실이 보도된다. 다음 23.7-35은 일부 광신적 유대인이 바을 살해를 결심하자 로마 천부장이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울을 당시 관할 총독이 거주하던 가이사랴(Caesarea)로 이송한 과정을 보도한다. 그리고 24:1-21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당시 유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벌어진 변사(辯士) 더둘로의 바을 고소와 이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소개한다. 다음 24: 22-27은 일단 바울에 대한 선고가 유예되고 마침 이때에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이 교체되었음을 보도한다. 다음 25:1-12은 바울이 재차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을 거듭 고소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변론을 행하였음을 보도한다. 25:13-26:29까지는 신임 총독 베스도가 헤롯 가문의 잔존 분봉왕으로 당시 갈릴리 북부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lba Ⅱ, A.D. 48-70)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 결과 다시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길게 예수의 도(道)와 자신의 사역이 종교적으로도 순수하며 더욱이 정치적으로도 로마 식민 정부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님을 변론하였던 사실을 보도한다. 끝으로 26:30-32은 베스도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가 바울의 무죄를 판정하였으나 바울이 기왕에 자신의 로마 시민권상의 특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직접 상소(上訴)하였고 또한 바울을 석방하는 것보다는 로마로 이송하는 것이 당시 바울을 강력히 고소하는 유대주의자들과의 충돌을 피하는 길도 될 수 있을 것이어서 바울의 로마 이송을 최종 결정하였음을 보도한다.
이상의 문맥으로 전개되는 이 21:17-26:32까지의 일련 기사의 배경 또는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막 구속사(救贖史)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된 과도기적 상황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 ․ 구약을 온전히 계승한 초대 교회 기독교와 당시 선민(選民) 유대인의 종교였으면서도 구약의 일부 내용에 인본주의적 요소까지 가미하여 정통 구약 신앙을 변질시킨 유대교(Judaism)와의 갈등을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본문을 보면 바울을 직접 체포한 것은 로마군이었으나 이는 그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유대 율법의 모독자로 규정함으로써 유대 땅을 소란케 한 바울은 로마 정부의 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또한 정황상으로도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바울은 분명히 정치범으로 보다는 종교범으로 기소(起訴)되었었다. 사실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종교범인 동시에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의 경우보다 더 종교범의 비중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도행전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에 다른 사도들보다도 더욱 이방선교에 힘썼던 바울(롬 11:13; 갈 2:8; 딤전 2:7)의 체포는 초대 교회와 유대교간의 갈등의 일환이요 그 결정적 사건으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의 체포 사건 전 ․ 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초대 교회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 21장 구속사적 개관에 약술(略述)하였는바 이를 꼭 참조하라.
한편 우리는 이상의 바울의 체포 이후 로마 이송까지의 기사를 전반적으로 고찰할 때 다음 두 가지의 구속사적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예수의 복음(福音)과 이방 선교 사역으로 인하여 대략 2년여에 걸친 투옥생활중에 수차의 심문을 당하였지만 바울은 내내 추호의 흔들림없는 확신을 피력하며 오히려 그런 기회를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행 16:25-34; 26: 27-29; 28:23-31). 이 짧지 않은 기간 중에 바울은 수차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하였었다. 더욱이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하였던 바울은 선민의 후손인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사회로부터 축출되는 것이 곧 최고의 영원한 저주라고 생각되었던 그 시기에 전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규탄을 당해야만 하었었다. 그러나 바울은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 이후 성령의 인도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섭리를 응축(離縮)한 복음의 절대성과 진정성을 확신하였는바 인간이 가하는 그 어떠한 육체적 사회적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천국 구원이라는 절대 영원의 진리와 은혜를 확신한 자는 잠시 동안 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동요됨 없이 천국(天國)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롬 8:31-39).
둘째, 사도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곡해 내지 핍박하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무고히 갇혀 고통받은 것은 이 당시만으로는 다만 패배와 굴욕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전체와 나아가 초대 교회 역사 전체와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바울의 고난은 먼저는 초대 교회 복음의 정당성을 전교회를 대표하여 변증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아가 바울이 미결수 신분으로나마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이르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교회(Church of Rome)의 기틀이 공고해지는 결과를 가걱왔다. 이는 우리에게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구속사를 더욱 확장케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깨닫게 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복음과 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속사는 세상의 핍박을 능히 이기고 극복할 힘이 있다는 구속사의 생명력을 실증해 준다. 실로 바을 사건 이후에도 더욱 격화되어 갔던 전로마 제국의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관점에서는 비천하고 유약한 무리에 불과하였던 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믿었던 신앙 곧 기독교(Christianity)는 단순히 살아남은 것은 물른 궁극적으로는 로마 제국 전체를 복음화 시킴으로써 결국 박해를 이겨내었었다. 이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저 단순한 신앙의 힘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만다. 그러나 바로 그처럼 엄청난 핍박을 이겨낸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우리에게 이는 그 이면(裏面)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의 실체를 확립시켜 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외울 말씀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행 25:25)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재차 송사하는 유대인들
1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바울의 베스도 앞에서의 변론
6 ○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헤롯 아그립바에게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13 ○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다 앞에 서게 된 바울
23 ○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26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27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25:1-12 악재를 이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7대 경우
사례와 결과
1. 요셉(창 37:3-4145; 45:8):
1) 형제들의 시기로 애굽으로 팔리고,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힘
2)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온 가족을 초청케 됨
2. 출애굽 성도들(출 14:10-25)
1) 홍해와 추격해 오는 애굽군에 둘러싸여 진멸의 위기에 처함
2) 바다가 갈라져 무사히 건넘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함
3. 삼손(삿 16:18-31)
1) 이방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지경에 이름
2)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살아서 보다 더 많은 적을 죽임
4. 욥(욥 1:1-2:10; 42장)
1) 재산과 열자녀의 건강을 잃는 고난을 당함
2)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음으로 갑절의 축복받음
5. 다니엘(단 6:1-28)
1) 음모에 빠져 사자굴에서 죽음 위기에 처함
2)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으로 다리오 왕이 하나님을 찬양케 됨
6. 예수(마 27:27-56)
1)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
2) 십자가 희생으로 인간을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
7. 바울(행 25:1-12)
1) 유대인들에게 고소 당해 체포된 상태로 로마로 호송됨
2) 평사 계획했던 바 로마에서의 복음 전파 사역의 계기가 됨
지리배경-25:1, 가이사랴
행 10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25:6-22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 비교
베드로와 바울은 초대 교회의 양대 기둥이었다. 초대 교회의 급팽창을 보여주는 사도행전 전체도 이들 두 인물을 중심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누가 던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각각 자기 영역의 사역을 담당한 것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나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양자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베드로 바울
1. 중심장: 1-12장 13-28장
2. 출 신: 가난한 어부 출신 바리새파의 부유층 자제
3. 소 명: 주께서 땅에 계셨을 때 부름받음 주께서 하늘에서 부르심
4. 사역기: AD. 27-26년 경 AD. 30-67년 경
5. 중심사역지: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6. 사역 특성: 유대인 중심 사역 이방인 중심 사역
개인 구원 중심 교회 설립 중심
독자적인 선교 팀을 구성한 선교
인물연구-헤롯 아그립바 2세(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1. 인적 사항
① 아그립바는 '독자'라는 뜻.
②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 헤롯 대왕의 증손.
③ 로마 황실에서 교육 받음.
④ 누나 버니게와 근친 상간함.
2. 시대적 배경
A.D. 1c 중후반경에 주로 활동함. 이 시기의 유대에는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거센 반발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이에 대한 로마 제국의 대처도 만만치 않아 로마 총독들의 강압적인 반란 진압이 계속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 지역은 매우 혼란하였다. 결국 A.D. 70년 유대는 로마 장군 디도(Titus)에 의해 완전 멸망하였다.
3. 주요 생애
1) 통치 이전
(1) 출생 A.D. 27 -
(2) 로마 교육받음 - -
(3) 부친 별세 A.D. 44년 -
(4) 갈리스 왕으로 임명됨 A.D. 50년 -
2) 통치 이후
(1) 아비레네 지역을 통치함 A.D. 50년 -
(2) 헤롯 빌립의 영토를 통치함 A.D. 54년 -
(3) 누나와 근친상간 범함 - -
(4) 예루살렘 성전 관할권 획득 - -
(5) 가이사랴 방문시 바울을 심문함 A.D. 60년 -
(6) 바울의 무죄 인정 A.D. 60년 -
(7) 로마 행정관으로 임명됨 A.D. 75년 -
(8) 죽음 A.D. 100년 -
4. 성품
① 로마의 하수인으로서 맹충성한 자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간교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자.
② 누나와 근친상간 등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못받을 정도로 행실이 방종했던 자
③ 유대의 직접 통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고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 권한 등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아 정치적 술수가 뛰어난 자.
④ 복음에 대한 바울의 확신있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아 매우 굳은 마음을 소유한 자(행 26:27,28).
5. 구속사적 지위
① 구약 선민 이스라엘의 마지막 통치자.
②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의 부귀 영화를 위해 로마제국에 아부한 자.
6. 평가 및 교훈
①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 메시야에 관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실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되었음을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적 편견 때문에 또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인정하기를 거부했다(행 26:1-29). 이처럼 남의 시선에 급급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편견은 자신의 구원의 길까지 막는 무서운 것인 바 우리 자신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요 9:24-33).
② 아그립바 왕은 자신의 일신상의 안일과 명예 및 권세 획득을 위해 로마제국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없이 행하였던 인물로 전하여지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들도 이기적인 만족과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없이 행하여 혹 우리 주님까지도 섭섭하게 하는 그런 일은 범하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③ 아그립바는 유대 왕으로서 세상에서의 부진 영화는 누렸을지 모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의 영혼의 결국은 어떠하겠는가(요 3:18,19)? 반면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는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천국에서의 영생은 보장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7. 핵심 성구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원어연구-25:23 위의를 베풀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판타시아'이다. 이 단어는 '빛나다', '빛을 발하다', '나타나다' 또는 '눈에 띄다'라는 뜻의 동사 '파이노'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판타시아'는 '파이노'에서 파생된 '가시화하다', 또는 '보여주다'라는 뜻의 '판타조'에서 다시 파생된 것으로서 '보이기' 또는 '과시', '전시', '화려한 행렬', '자랑삼아 보임' 등의 뜻을 갖는다.
본문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게 차려입고 신문소에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아그립바는 허영심으로 가득차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 하였다. 이는 그의 부친이 자기 자신을 신(神)처럼 높이다가 충이 먹어 죽은 사실(행 12:21-23)에 비추어 볼 때 아비의 죄의 전철을 계속해서 밟고 있는 그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역사배경-25:11,21 신약에 반영된 로마법
행 27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25:6-12 사도 바울의 전 6차에 걸친 변론
행 22장 자료노트 참조
25:1-12 베스도 앞에서의 바울의 변론
본문에는 바울이 벨릭스의 후임으로 온 베스도(Porcius Festus) 총독(행 24:27)에게 다시 재판을 받게 되는 배경과 재판받는 장면이 소개된다. 그런데 이 베스도의 재판은 바울이 로마 전도를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면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본서 전체에서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복음의 전파가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들어갔으며 이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베스도가 바울을 재판하게 되는 배경이다(1-5절).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예루살렘 지역을 시찰하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바울을 죽이기 위한 음모로 바울을 호송하는 도중에 길에서 암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베스도는 공정한 사람으로 바울 사건을 잘 알지 못하였고 또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므로 오히려 저들에게 가이사랴에 와서 상소할 것을 명하였다. 아이러니컬(ironical)하게도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은 온갖 권모 술수를 이용하여 바울을 죽이려 한 반면, 천부장 루시아(행 23:22-30)를 비롯한 베스도같은 이방인들은 비교적 공정한 모습을 취할 뿐 아니라 위기 때마다 바울을 구해 준다. 따라서 주의 복음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배척하였으므로 이방인에게 옳기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베스도의 재판과 바울의 변론이다(6-12절).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는 도중에 암살하고자 한 계획이 베스도의 거부로 또 다시 무산되자 이제 유대인들은 벨릭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이사랴로 직접 내려와 바울을 송사한다.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 앞에서 다시 재판을 받게 된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이전과 같이 여러 가지 죄목으로 고수하였지만 확실한 중거를 내세우지 못했고 바울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므로 베스도는 그 죄목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베스도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이에 바울은 로마 시민의 권리를 내세워 로마에 가서 가이사(Caesar)에게 재판받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베스도도 정당한 요구로 받아들여 허락하였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오히려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복음은 이방인들 앞에서 더욱 전파되었으며, 급기야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허락해 주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 전도를 위한 주님의 섭리는 계속 성취되어 갔다(행 23:11). 이러한 사실은 성령께서는 인간들의 마음을 주장하사 악한 자의 생각은 물리치시고(시 33:10) 당신의 선한 역사만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롬 8:28).
한편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바울은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에 대한 헌신적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즉 그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전도를 이루려는 열심으로 가이사의 재판을 내세워 로마행을 결심한 얼마나 온전한 헌신을 드려야 하는지 교훈해 준다(고전 9:16; 고후 5:8; 빌 1:27; 골 1:19).
25:1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 베스도(Porcius Festus)의 행적에 대해서는 특별히 두드러지게 알려진 사항이 없다. 다만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벨릭스보다는 다소 뛰어난 행정력을 보였다고 한다. 행 24:27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도임한 지 삼 일 후'(에피바스 테 에파르케이오 메타 트레이스 헤메라스)란 '영지(province)에 들어온 지 삼 일 후'라는 말이다. 곧 베스도는 유대 총독으로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이로 보아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및 기타 유대의 지도급 인사들과 한시 바삐 유대 관계를 맺기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총독으로서 그의 성실성 탓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교 내에서는 파벌 문제가 심각했고 또 전임 총독 벨릭스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행 24:27 주석 참조) 이를 개선하고자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벨릭스의 후임자로 온 베스도를 환영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25:2 대제사장들. - 당시의 유대 대제사장은 벨릭스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해서 임명된 파비(Phabi)의 아들인 이스마엘(Ishmael)이었다(Josethus). 이렇게 전임 대제사장인 아나니아(행 24:1)가 공식적으로 퇴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 누가가 '대제사장들'(호이 아르키에레이스)이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한 이유에 대 해서는 마 2:4 주석과 행 4:6 주석을 참조하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 본문의 '높은 사람들'(호이 프로토이)이 15절에서는 '장로들'(호이 프레스뷔테로이)이라고 달리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들을 가리켜 '유대인 중 유력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들을 산헤드린의 회원이 아닌 유대인 중 지도급 인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Mepeer).
바울을 고소할새. -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2년 이상의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행 24:27) 변함이 없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벨릭스를 이어 베스도가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한 그때를 다시금 바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대개 새로 부임한 지방 행정관들은 주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유대인들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어떻게 든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이다(Bruce). 당시에 '바울을 죽여라'는 외침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래 광신적 유대교도들의 일상 구호가 되어 있었다(행 21:27-31; 22:22; 23:12-15). 하지만 신임 베스도 총독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25:3 베스도의 호의로…죽이고자 함이러라. - 유대인들은 2년 전에 바울을 암살하려는 방법과 마찬가지로(행 23:15) 바울을 죽이려고 다시금 음모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베스도의 호의에 힘입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해 오고자 획책하였다. 여기서 '베스도의 호의로'라는 것은 베스도가 신임 총독이라는 점을 이용해 앞으로 유대인들과 모든 일을 원만히 통치하려면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야 된다는 압력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베스도에게 압력을 가하여 바울에 대한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열게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였다. 물론 이러한 계획의 배후에는 예루살렘 상경길에 자객들을 매복시켜 바울을 죽이려는 음흉한 저의가 있었다. 더욱이 저들은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저를 죽이는 암살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정치적 선동죄가 아닌 성전을 더럽혔다는 종교적인 죄목으로도 산헤드린 법정에서 바울에게 합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이처럼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바울의 생명을 저해하려는 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행악 무도함을 보게 된다.
25:4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본절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 운)란 구절이 나와 있다. 이는 곧 전후 상황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누가의 특징적인 표현 기법 중 하나이다. 즉 유대인들의 여러 음흉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자신의 직임에 충실하여 유대인들이 자신의 법정이 있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송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실로 하나님께서 베스도를 통해 악인들의 생각과 계획을 흐트러뜨리신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시 33:10). 구류된 것과.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본문의 '구류된 것'(테레이스 다이)이란 '구류되어야 할 것'(should be kept at, KJV)이라는 의미로 마땅히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예루살렘이 아닌 자신의 관할하에 있는 가이사랴 법정에서 재판받아야 함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구에'(엔 타케이)라는 말은 '빨리', '속도를 내어'라는 의미로 눅 18:8; 행 12:7; 22:18에서도 사용되었다. 즉 이는 베스도가 조만간 다시금 가이사랴로 돌아갈 것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베스도는 자신이 업무상 예루살렘에 왔으며 또 오래 지체할 이유도 없음을 밝힌다. 그리고 굳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재판받게 할 하등의 이유도 없음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유대인들의 요청을 일축하고 있다. 베스도 총독의 이러한 결정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제 아무리 좋은 계획을 마음에 세운다 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잠 16:19; 19:21). 즉 베스도의 생각을 주장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바울을 살해하려 한 유대인들의 계략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 것이다.
25:5 유력한 자들은…송사하라. - 본문의 '유력한 자들'이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2절)을 가리킨다. 사실 로마의 법정은 가이사랴에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는 것은 적법하지 못한 조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베스도는 바울의 사건에 대해서 진상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의 가이사랴 법정에서 재판을 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바울을 송사할 것이 있으면 그들이 직접 가이사랴에 내려와 송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로써 바울을 죽이기 위한 유대인들의 음흉한 저의는 무산되고 만다.
25:6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에 대해서 이처럼 한글 개역 성경이 '팔 일 혹십 일'로 번역하고 있는 이유는 각 사본들에 따라 '팔일'로도, '십 일'로도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네슬-알렌드역(Nestle-Aland)에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팔일 또는 십일 이상을 지내지 않고'로 번역되어 있다. 아마도 8일은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체류한 순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고 10일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을 오고간 여행 기간을 포함한 일수였을 수 있다. 혹자는 베스도가 공식적으로 8일간의 체류를 한 후 개인적인 용무로 10일을 더 머물렀다고도 주장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어쨌든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짧은 기간 동안 머문 뒤 가이사랴로 되돌아왔다. 그리고서 이틀이 지난 뒤 재판을 열게 되었다.
재판 자리에 앉고. - 베스도가 약속한 대로(4,5절) 유대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바울에 대한 공식적인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본절은 이 재판이 공식 재판일뿐 아니라 총독이 위엄 있는 자세로 이 재판을 주재(主宰)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이로써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었으나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 받게 되었다(행 22:30-23:10; 24:1-22).
25:7 유대인들이…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 누가는 세 번째 재판장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고소한 내용을 상세히 언급하는 대신 단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라고만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중대한 사건이란 1차, 2차 때의 고소 내용을 포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행 21:27-30; 24:5,6). 8절 주석 참조. 그런데 저들은 이같은 혐의에 대하여 증인해 줄 증인을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 역시 어디까지나 모함일 뿐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광경은 과거 주님에 대한 송사 때에도 그러했다(마 26:59-60). 유대인들은 위압적인 자세로써 예수를 둘러싸고선 심리적 협박을 내세우며 여러 가지 중대한 죄목을 나열하였으나 실제로 그같은 혐의를 입증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25: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 본문의 '변명하여'(아폴로구메누)라는 말은 원래 법정적인 용어로 '항변'(아폴로기아)을 뜻하는 말이다. 본서에서는 이 말이 특별히 바울에게 많이 사용되었는데(행 22:1; 24:10; 26:1,2,24), 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것을 가리키는 통상 용어로 사용되었다.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 유대인들이 바울을 송사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7절)이 어떠한 것들이었는지를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그것은 곧 바울이 율법과, 성전과, 가이사와 관련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소 내용은 2년 전의 더둘로의 송사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행 24:5-7),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송사에 대하여 바울은 이미 변론을 했었으니(행 24:12) 곧 그러한 고소건에 대하여 증인으로 나선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단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증거하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소동이 있었음을 주장했었다(행 24:21). 그리고 그 부활에 관한 믿음도 실상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이미 밝혔다(행 24:11-21). 따라서 바울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율법을 범하였다는 것은 곧 바울이 율법의 규례들을 무시하였다는 비난일 뿐 아니라(행 21:21) 유대교도들의 편에서 볼 때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를 전한 것에 대한 정죄이다(행 24:5). 그리고 성전과 관련된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곧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서 이방인이 들어갈 수 없는 성전 경내에 들어가므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을 뜻한다(행 21:27-29; 24:6). 그리고 가이사에게 범죄하였다는 것은 곧 유대인 사회에서 로마 정부를 반대하는 폭동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말한다(행 24:5). 그러나 이 모든 고소 내용들은 모두 사실 무근한 중상 모략임을 앞에서 수차 살펴본 바이다. 한편 '가이사'(Caesar)는 본래 로마의 원로 공화 정치를 제 1차 삼두 정치로 바꾼 율리우스 씨이저(Gaius Julius Caesar, B.C. 101-44)의 성(姓)이었다. 그러나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 27-A.D. 14)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이래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바울이 가이사의 법정에 상소했을 때(10-12절) 로마 황제는 네로(Nero, A.D. 54-68) 있다.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 바울의 결백함을 나타내는 확신에 찬 말로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는 그의 고백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바울이 거듭 로마의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유대인이나 로마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한 모함 때문이었다.
25:9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심문을 받으려느냐. - 베스도는 변론이 진행되는 동안에 바울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삼스럽게도 유대인들의 청원(3절)을 의식했던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의 유대 종교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베스도의 이와 같은 처사는 그가 로마의 국법을 준수하면서도 새로운 총독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 악화를 피해 보려는 방안이었다. 2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나 권력자들이 진실을 외면한 채 저들의 이익과 개인적 장래를 위해 여하한 수단 방법도 개의치 않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25:10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 이 말은 바울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지금 가이사의 대리자인 베스도 총독이 주재하는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받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 자신이 자신을 재판할 권리가 없는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법정에 설 이유가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베스도 총독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지닌 로마의 시민권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 로마인의 경우, 재판관은 피고의 동의 없이는 사건을 다른 법정으로 옮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본문은 문자적으로 '내가 여기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이처럼 유대의 산헤드린 종교 법정에 서기를 단호히 거부한 이유는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바울은 자기가 가야 할 목적지가 로마이지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행 23:11). 이러한 사실은 다음절에서 바울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송사한 사실로 보아 더욱 분명해진다. 둘째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욕망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바울은 부득불 로마의 법적 보호를 입으려 했는데, 이는 그가 예루살렘에서는 결단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Toussaint).
25:11 만일 내가…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 본문의 '내가…사양치 아니할 것이나'라는 표현은 본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14장에서 3회, 바울의 목회서신들에서 4회, 히브리서에서 2회나 언급되고 있다. 이는 만일 고소 내용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말이다.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 역사 기록에도 종종 피고의 입장을 변호하는 구절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이런 표현은 곧 자신의 무죄가 너무도 분명함을 나타내는 확신에 찬 의지 표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절은 바울이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 이처럼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고자 한 것은 바울이 로마의 시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비록 미결수의 신분으로라도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계획과 소명(행 19:21; 23:11) 때문이었다. 한편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는 것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예전부터 누려왔던 특권으로서(Bruce) 주로 두 가지의 상소권을 말한다. 하나는 바울이 지금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과 같이 로마시민으로서 보통 하급심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정관의 행동에 대해 같은 직위에 있는 다른 행정관에게 행동을 금하도록(veto)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렇게 양분된 상소권은 하나로 통합되었다(Bruce). 본문에서 바울의 탄원은 양자 가운데 첫 번째 경우에 해당했다. 한편 바울은 이미 고린도에서 갈리오 앞에서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했을 때 로마 법정의 비교적 공정한 판결을 받는 고무적인 경험을 한 바 있다(행 18:12 이하).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상소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재판의 공정성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 당시 가이사는 네로(Nero, A.D. 54-68)로서 처음 5년간은 철인(哲人) 세네카(Seneca B.C. 5-A.D. 56)의 도움을 받아 선정(善政)을 베풀었었다(Longeneker).
25:12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 본절의 '배석자들'(쉼불리온)이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7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총독의 주요관리들과 개인적인 수행원들, 혹은 보좌관(assessoresconsiliaril)을 가리킨다(Robertson). 그런데 베스도가 이들과 논의한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대체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에 대한 허락 여부 자체를 논의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로마법은 로마 시민이 특수한 죄목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하면 반드시 들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Longeneker). 이런 점에서 볼 때 베스도는 바울의 상소건이 그처럼 중대한 사안인가를 놓고서 배심원들과 상의했을 것이다. 즉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당한 죄목은 크게 로마법에 의하면 정치적인 선동죄요, 유대의 종교법에 따르면 성전 모독죄로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아마 바울의 상소건이 일반적인 행정관의 권한으로 해결할 수있는 문제인가 아니면 보다 상급 기관의 특별한 사법권이 요청되는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5:13-27 아그립바에게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지난 단락(1-12절)에서는 바울이 베스도에게 로마의 가이사 앞에 재판받기를 상소하여 그의 로마행이 결정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부문에는 아그립바 왕(Herral Arippa 11. A.D. 48-70)이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 인사를 왔을 때에 베스도가 바울의 문제에 대하여 사문을 구하고 조건을 받으려는 장면이 소개된다.
그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자문 요청을 하게 된 배경이다. 베스도는 바울을 로마의 가이사에게 보내기 위해서는 상소할 죄목을 공소장에 써서 같이 보내어야 하는데(26절) 바울의 죄목을 마땅하게 정할 수 없었다. 또한 유대의 사정을 잘 모르므로 섣불리 바울을 석방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거느릴 수도 없었다. 이때에 아그립바왕이 방문하자 베스도는 유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그에게 자문을 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과 바울의 수난을 대비시켜 예수님의 고난을 연상시키고 바울의 고난이 복음을 위한 같은 고난임을 보여 준다. 즉 유대인들의 고소, 그리고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의 재판 문제로 인해 친해진 것처럼(눅 23:12)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친분을 나타내고 있다.
베스도의 바울에 대한 태도이다. 아그립바 왕에게 조언을 구하는 베스도의 태도로 보아 베스도는 복음을 긍정적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지만 공정한 재판을 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의 고소와 압력에도(15절) 바울의 죄에 대하여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18,19절). 즉 유대인들은 바울을 정치적인 내란 음모와 성전 모독죄 등으로 뒤집어 씌웠지만 베스도는 이것이 누명이며 단지 종교적인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공정한 태도는 모든 것을 철저히 법대로 적용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16절). 그러나 베스도도 유대인의 불만을 의식하였던 까닭에 바울을 석방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하여튼 누가가 여기서 베스도와 아그립바에 대한 내용을 첨가한 것은 베스도의 고백을 통해서 바울이 온전히 무죄이며 오로지 복음의 열정으로 인하여 유대인에게 고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바울이 전한 복음은 베스도의 말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었다(19절). 이것은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복음의 전파와 변론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는데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하여 그를 영접하게 하는 데에 온 생애를 기울인 것이다. 이것은 다음장에 나올 아그립바 앞에서의 변론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행 26:23). 그와 같이 우리의 전할 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25:13 아그립바 왕. - 본절의 아그립바 왕은 행 12:20-22에 등장하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 A.D. 48-70)로서 베스도총독의 전임자였던 벨릭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와는남매간이다(행 24:24). 그는 A.D. 48년경에 오늘날의레바논 지방에 위치한 갈기스(Chalcis)를 다스리던 헤롯빌립이 죽자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로부터 그곳의 왕좌(王座)는 물론 회당의 통치권과 대제사장직을 위임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A.D. 53년경에는 빌립의 분봉(Tetrarchy - 한 주의 1/4되는 영토)과 루시아니아 분봉을 포함한 더 큰 영토를 받았고 3년 후에는 다시 네로로부터 갈릴리 호수 주변의 도시들과 고을들을 받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아그립바 2세는 로마 왕실의 비호를 받는 가운데 팔레스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그가 유대 지방에 부임한 로마의 새 총독인 베스도를 방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버니게. - 버니게(Bernice)는 아그립바 2세의 누이로서 그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녀는 일찌기 철학자 필로(Philo)의 조카인 마르쿠스(Marcus)와 약혼하였고, 후에 갈기스의 왕이며 그녀의 삼촌인 헤롯 빌립과 결흔했다. 그러다가 헤롯 빌립이 A. D. 48년에 죽자 그녀는 헤롯 아그립바 2세의 궁전에서 기거하였다. 이처럼 아그립바와 베니게 남매가 같은 궁전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의혹을 샀다. 왜냐하면 율법은 근친 상간을 분명히 정죄하였는데 이들이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기 때문이다(레 18:1-18; 20:11-21). 어쨌든 버니게는 이후(A.D. 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아들 티투스(Titus)의 정부(情婦)가 될 정도로 친로마적인 성향을 보였다. 때문에 그녀는 오빠 아그립바 2세가 베스도의 부임을 축하하고자 했을 때 기꺼이 동행했을 것이다.
25:14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들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소송 문제에 대해 도움을 받고자 그와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실 비록 아그립바 2세는 유대 지방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으나 글라우디오에 의해 대제사장의 파면 및 임명,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었다(Josephus). 때문에 베스도는 유대인이자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정통한 아그립바와 협의하는 가운데 바울의 소송 문제에 관한 많은 도움을 얻으려 했음이 분명하다(Longeneker).
25:15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즉 자신이 가이사랴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유대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문제를 들고나와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베스도 총독의 이야기 내용 가운데 주목할 사항은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억지고소할 뿐만 아니라(2절) 재판도 받기 전에 유죄 판결을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는 점이다. 즉 베스도 역시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억지스러우며 적법치 못함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바울을 즉각 석방하지 않은 것은 베스도 역시 벨릭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9절 주석 참조.
25:16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 비록 유대 지도자들이 재판이 있기 전에 바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요구했으나 베스도 총독 자신은 로마의 법, 즉 반드시 피고에 대한 판결이 있기 전에 피고가 고소 내용을 듣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로마의 법을 준수함으로 사사로이 그 문제를 처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Field). 물론 이러한 베스도의 얘기는 건적으로 틀린 맡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너무나 지나치게 정당화, 합리화시킨 측면이 있다. 즉 그는 로마법을 의식하면서도(5절) 또한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바울에게 넌지시 산헤드린 법정에서 재판받을 것을 좋용했있다(9절).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사실(20절)보다는 자신이 본분에 충실하였음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5:17 지체하지 아니하고…재판 자리에 앉아. - 계속하여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고소 문제에 대해 지체하지 않고 곧 재판을 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곧 자신이 유대인들이나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기 위하여 짐짓 재판을 미루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베스도가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 온 다음 날에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재판을 연 것은 사실이다(6절).
25:18 원고들이 서서. - 여기서 '원고'는 예루살렘에서부터 가이사랴에 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15절). 이들은 베스도가 주재한 법정에 서서 바울을 고소한 것이다. 이러한 광경은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아'(6,17절)라는 표현과 함께 모두 재판의 진행 모습을 나타내 준다.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 제출치 아니하고. -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자마자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정죄 판결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베스도는 바울이 무슨 어마어마한 죄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소 내용을 들어보니 로마법상으로 별다른 문제가 아닌 것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로마 총독에게는 로마법에 저촉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지 유대인들 자신의 종교 문제를 놓고서 왈가왈부할 것은 못되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법에 의해 바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7절). 한편 본문의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이라는 말은 재판을 열기 전의 베스도 총독이 가졌던 심중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미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짓된 유죄 판결의 요구가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잘 알려 준다. 즉 이와 같은 사실은 유대인들이 당시에 널리 팽배해 있었던 선동, 폭동, 살인 등과 같은 죄목으로 바울을 모함하였음을 뜻한다(Hervey).
25:19 오직…뿐이라. - 베스도 총독의 이와 같은 표현은(데 에이콘) 바울에게서 그 어떤 죄목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자기들의 종교. - 베스도 총독은 재판을 진행하는 가운데서 로마법상의 어떤 문제가 아닌 유대 종교내의 견해 차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그것은 로마 법정에서 취급할 성질의 것이 아닌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임을 밝힘으로 베스도 자신이 관여할 사항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로마 정치가들은 식민지인들의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대개 무관심하거나 밀시적이있다. 이같은 사실은 베스도의 '자기들의 종교'(테스 이디아스 데이시다이모니아스)라는 말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은 좀 저급한 차원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러 번역본들에서는 '자기들의 미신'(their own supersti-tion; KJV, RSV, Vulgate)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베스도 총독의 이와 같은 표현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왕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 그로 하여금 바울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 사실을 믿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핵심으로서 (행 23:6; 24:21), 이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성전을 더럽게 하려 했다는'(행 24:6) 고소 내용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즉 바울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예수의 부활을 강조했고 또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순수하게 전하는 것만이 그의 선교 목표였다(고전 2:2). 그런데 특별히 주목할 사항은 실제로 유대인과 바울이 똑같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금 살아난다는 유대 전통적 부활 신앙을 믿었음에 비해,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여 증거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본문에서 베스도 역시 바울이 일반적인 의미의 부활 그 이상의 것을 증거하였음을 언급하고 있음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본서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항목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행 23:6 주석에서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25:20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의 문자적인 의미는 '이런 일들에 관한 조사로서'(텐 페리 투톤 제테신)이다(Robertson). 따라서 본절은 베스도가 로마의 관리로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아주 곤란했었음을 시사한다. 베스도는 그래서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종교 재판을 받을 것을 제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종교 재판을 받을 것을 제의한 것이(9절) 자신이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 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바울에게 예루살렘 재판을 제의한 처음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베스도는 그같은 무지 때문이었기도 하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바울에게 산헤드린에서의 재판을 제의했기 때문이다(9절).
25:21 황제의 판결을…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종교 재판받을 것을 제안했으나(9절) 바울이 그것을 거절하고 로마 시민권자로서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를 상소함으로(10절) 자신이 바울의 요구를 받아들여 로마에 가기까지 구금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편 이때의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8절 주석 참조.
25:22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 부분의 '나도…고자 하노라'(에불로멘 카이 아우토스)는 표현은 문자석으로 '나 자신도(I was minded also myself) '바라건대'라는 의미이다(Longeneker).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바울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친히 자신도 직접 바울로부터 사건의 내용을 듣고자 한다는 강조적인 표현이다. 이로 보아 아그립바는 자신도 유대인이었으므로 바울의 주요한 문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많은 호기심을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부활을 믿고 있었고 또한 베스도의 보고대로 그것은 로마와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리하여 베스도는 아그립바왕의 청을 받아들여 즉시 조치를 취하였으니 이에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또 변론을 하게 되었다(행 26장). 한편 본서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헤롯 대왕의 아들이자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디바(Antipas)가 예수를 보고자(눅 9:9; 23:8)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저들이 예수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수란 인물에 대하여 흥미가 있었던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저들은 참된 복음에 대한 열정에서가 아닌 단순한 흥미 때문에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다.
25:23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 본문의 '위의'(판타시아)란 '드러내 보이다'(판타조)란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과시', '나타냄' 혹은 '외관'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곧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자기들의 지위와 화려한 의복과 장엄한 의식을 통해 위세를 나타내려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속은 부도덕하고 불륜으로 가득찼음에도 불구하고(13절)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민 것은 실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그립바 2세의 아버지인 아그립바 1세도 가이사랴에서 이와 똑같이 위의를 베풀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죽었다(행 12:21-23).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 본문의 '천부장'(킬리아르코스)은 본서에 빈번히 언급되고 있는 말로 천명 이상의 군사들을 거느린 군지휘관을 의미한다(행 21:31 주석 참조). 가이사랴에는 5개의 보병 부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5명의 천부장들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Meyer). 그리고 '성중의 높은 사람들'은 가이사랴의 시의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문소'(아크로아테리온)란 '심문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 혹은 '판결을 위한 장소'를 말한다. 그런데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바울의 사건에 대해서 그 경위를 듣기 위해 일종의 공청회를 소집한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베스도가 주재한 바울에 대한 재판은 이미 끝이 났고(6-12절) 지금은 바울이 로마 새의 법정에 상소를 제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11,12절).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그립바 왕이 치안 판사나 행정 장관을 대동한 가운데 청문회 형식으로 바울을 심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아그립바 왕과 죄수된 바울의 모습을 역력히 대비됨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리야 말로 주께서 허락하시고 섭리하신 역사의 현장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미 바울에게 '이방인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행 9:15).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이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실로 여호와의 계획은 변함 없으시며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즉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성도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얼마만한 힘이 되는 것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25:24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 베스도는 '유대의 모든 무리가' 바울을 성토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가졌던 악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밝혀준다. 실제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이미 7,11절에서 암시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 저들의 눈에는 바울이 유대인의 유대인됨을 증명해 주는 율법의 규례를 무시함은 물론 이방인들과의 구별을 철폐함으로 유대인의 선민(選民)됨을 부정하는 자로 비쳤을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보기에 바울은 정통 유대교 신앙에서 떠난 배교자 또한 민족을 저버린 배신자였을 것이다. 게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바울이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도, 즉 기독교 신앙에로 개심시킴으로 자신들의 지위 기반을 약화시키는 위험 인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모두의 적개심이 한데 어울려 어떻게든 바울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유대인들이 바울 죽이기를 주장하고 있음을 밝힌다(22절). 이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바울에 대한 악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다 생생하게 증거해 주는 대목이다. 한편 이 때문에 아그립바 왕 뿐만이 아니라, 청문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더 진지하게 바울을 향해 주목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제 바울은 더욱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이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일례가 아닐 수 없다.
25:25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 본문은 베스도가 바울에게서 죄목을 발견할 수 없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첫 번째 재판인 산헤드린 종교 재판 때에도 천부장 루시아가 확인한 바(행 23:29) 였으며, 또한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2차 재판 때에도 확인된 일이었다(행 24:2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계속되는 재판과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미 오래 전에 석방되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행 23:21-24; 24:22) 풀리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이런 환경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는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고자 하는(행 23:11)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 베스도 황제가 바울에게서 죄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도 바울을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보내기로 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바울의 상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지 않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생명 유지를 든든히 꾀하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 사실 바울은 로마법상 아무런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의 종교적 죄목은 고소 조건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베스도는 바울을 정죄함으로 로마법을 집행하는 자로서의 불법을 저지르기도, 그렇다고 바울을 석방함으로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기도 뭣하는 애매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떠넘겨 버리는 것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이 되는 것이었다.
25:26 황제께. - 본문의 '황제'(퀴리오스)는 21절의 '황제'(세바스토스)와는 다른 의미이다. '세바스토스'는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ts) 곧 '존경스러운'이란 의미로 '경외하다'(세바조마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은 옥타비 아누스가 최초로 로마 황제가 되었을 때(B.C. 27)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 '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의 역대 황제의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8절 주석 참조. 그러나 본문의 '황제'는 '주'(Lord)라는 의미이다. 옥타비아누스(0ctavianus)는 이 칭호를 몹시 싫어하여 누가 그를 '주'라고 부르면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 이를 거부하였다(Hervey). 그러다가 칼리굴라(Caligula) 때부터 공식적으로 용인되었고, 네로(Nero)를 거쳐 트라얀(Trojan) 황제 때에는 보편화되었으며(Longeneker)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는 자신의 동전에 이 칭호를 새겨 넣었다(Robertson). 따라서 이 칭호는 통치자의 권위와 존엄을 나타내게 되었고 황제 숭배와 관련하여 신성한 칭호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그리스도에게만 적용하여 사용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즉 예수 외에 누구에게든지 이 칭호를 붙이는 것은 곧 그 자를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므로 황제에게 사용하기를 거부하였다. 폴리갑(Polycap)은 죽음을 당할 줄 알면서도 '주 예수' 외에는 '황제'를 '주'라 부를 수 없다 하여 순교당한 인물이기도 하다(Robertson).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 베스도는 바울을 고소할 만한 확실한 내용이 없이 가이사 황제에게 보내는 것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로 생각했다(27절). 그런데 산헤드린의 모든 고소는 바울에 의해 거짓으로 판평되거나 바울에 의해 효력을 잃게 되었고. 또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제안한 자신의 제의도 바울에 의해 거부당하였다(9,10절). 이런 가운데서 바울은 이미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신청하였기 때문에 베스도 총독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11,12절). 왜냐하면 로마의 법정에서는 중차대한 정치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표명하는데 베스도로서는 바울을 황제에게 보낼 만한 분명한 명분을 아직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 난관에 봉착한 베스도 총독은 유대의 습관과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이 바울 사건에 대해 듣고 나면 로마의 네로 황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고소문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믿었다(Toussaint). 그래서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고, 또 한편으로는 로마 황제가 상소의 내용을 보아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 함으로 베스도 자신이 무능력한 총독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 무근한 것을 통해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며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리어 하나님은 이로 인해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과 임금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이는 곧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환경을 조성하시기도 하시며, 상황을 이용하시기도 하심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처하든지 그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그에 순복하려 고 노력해야 한다(고전 10:31; 벧전 3:13-17).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마련이다(롬 8:28).
25:27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 본문의 '베풀지'(가마나이)라는 말은 '표시를 하다'라는 의미로 베스도 총독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할 때 분명한 상소의 내용을 명기함으로 재판이 열릴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거에 천부장 루시아가 전임 벨릭스 총독에게 편지한 것과 같은(행 23:26-30) 모호한 상소를 올릴 경우 베스도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무리한 일. - 본문의 '무리한 일'(알로곤)이란 부정 접두어 '아'( )와 '이성' 혹은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 )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이성이 없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곧 분명한 고소의 내용도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은 타당치 않는 일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 베스도 총독이 처한 난처한 입장을 잘 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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