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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최고 절대 근본 은사인 사랑의 찬가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위 사랑(the Love)의 찬가이다. 바울은 이 사랑을 다른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은사들과 달리 성도 모두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 궁극적 은사라는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그가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할 기회와 힘을 보장해 주시고자 선물로 주신 특별한 자질과 능력인 여러 개별적 은사는 모두 다 수단에 불과한 상대적 은사들이나 오직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이것 없이는 그 어떤 은사도 소용이 없는 절대적 은사로서, 결국 사랑은 성도가 구속사의 노정에서 가져야 할 그리고 발휘해야 할 절대 최고의 은사라는 관점에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사랑의 찬가가 나오게 된 문맥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한바 이것을 위해 앞의 제 12장 구속사적 개관 전반부를 필히 참조하라.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3절은 그 어떤 신앙의 능력과 덕목도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무가치하다는 사실, 곧 사랑의 필수성을 밝힌다. 다음 4-7절은 그처럼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랑을 이론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 사랑이 드러났을 때의 특성을 밝힘으로써 쉽고도 명확히 정의한다. 끝으로 8-13절은 사랑 자체가 영원하고 또 절대적인 사실 자체를 선포함으로써 결국 이런 사랑을 성도가 갖고 또 실천해야 마땅함을 묵시적으로 촉구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종료하고 있다.
본장은 무슨 현학적인 신학 이론(神學理論)이나 특별한 수사법(修辭法)을 요란스레 구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매일 접하는 친근한 사물과 정 감을 동원하여 사랑의 본질을 쉽고도 친근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욱 사랑 자체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이를 실천하겠다는 진한 공감을 만민으로부터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편 바울의 사랑의 찬가는 문맥상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은사로서의 사랑 자체의 본질 규명에 집중하고 있으나 우리는 시야를 더욱 넓혀서 이 사랑이야말로 구속사(救贖史)의 원동력 그 자체임을 깨달아야 한다. 돌이켜 보라! 당신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이 전 우주와 역사의 창조자요 주권자이신 당신과 맺은 선악과 언약을 어겼을 때 만약 하나님이 다만 공의(justice)로써 인간을 그 언약의 법대로 심판하셨다면 과연 그후 태초부터 종말까지 진행된 구속사가 존재할 수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 직후 당신의 사랑으로 예수를 통한 택한 죄인의 구속의 법을 세우시고 그 역시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구속 수난을 감당하신 예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하여 태초부터 종말까지 택한 백성의 구속을 위하여 역사를 전개하시니 그것이 바로 구속사(救蹟史)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울이 강조하는 바대로 구속사의 노정에서 인간이 갖고 실천해야 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은사이기 전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품성의 본질로서 구속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바울의 사랑의 찬가의 본문 앞에서 사랑의 실체를 재발견하면서 먼저 하나님과 성도가 그리고 성도와 성도가 나누는 사랑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나아가 나의 구원의 원동력이었던 동시에 구원받은 내가 가져야 할 궁극적 은사로 요청되는 이 사랑을 나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구현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되는 것이다.
외울 말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사랑의 필수성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의 본질적 특성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영원성과 절대성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13:1,2 은사의 이해
고전 12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13:1 방언의 이해
고전 14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 연구 -13:7, 참다, 견디다
본문에서 '참다'와 '견디다'는 단순한 반복적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이 각각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참다'에 쓰인 헬라어 '스테고'( )는 '지붕'을 뜻하는 '스테게'( )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일차적인 의미는 '(지붕 따위를 덮다)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잘못된 것을 들춰내지 않고 덮어서 '조용히 넘어가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불의한 행동에 대해 눈감아 주고 모른체 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에게 해를 끼친 것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잠 10:12).
한편 '견디다'에 쓰인 헬라어는 '휘포메노'( )인데, 이것은 '아래에'라는 뜻의 접두어 '휘포'( )와 '머무르다' 또는 '남다'라는 뜻의 '메노'( )가 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휘포메노'의 일차적인 의미는 '아래에 머무르다'가 된다. 이것은 어떤 시련이나 역경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 뒤에도 자신은 주를 부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본연의 자리를 지키며 주님이 그러한 환난 속에서 구원하여 영광을 얻게 하시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견딤이 성도가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참 사랑의 모습임을 보여준다.
도표-고전 13:4-13 사랑에 대한 성경의 묘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미덕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도 죄인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랑은 구원 종교인 기독교의 근본이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랑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 내용들이 요약이며,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복음의 법으로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마 22:37-40; 요 13:34,35).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본문은 추상적 개념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구체적 실생활에서 사랑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결과를 다음과 같이 열거함으로써 듣는 이가 자연스럽게 사랑의 원리를 깨닫는 동시에 또 사랑을 생활 현장에서 실천해야겠다는 감동을 얻도록 하고 있다.
1. 오래 참는 것(4절)
2. 온유한 것(4절)
3. 투기 하지 않는 것(4절)
4. 자랑하지 않는 것(4절)
5. 교만하지 않는 것(4절)
6. 무례히 행치 않는 것(5절)
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5절)
8. 성내지 않는 것(5절)
9.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5전)
10.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6절)
11.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6절)
12.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는 것(7절)
13.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는 것(8절)
14. 믿음과 소망보다 더 우선하는 것(13절)
15. 우애하고 존경하는 것(롬 12:10)
16. 율법의 완성(롬 13:10)
17. 근심을 덜어주는 것(롬 14:15)
18. 허다한 죄를 덮는 것(벧전 4:8)
19. 행동으로써 나타내는 것(요일 3:17)
20. 계명을 행하는 것(요이 1:6)
13:1-3 사랑의 필수성과 특성
본장은 그 유명한 '사랑 장'으로 모든 은사 가운데 최고의 은사이자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은사인 '사랑'의 본질과 실체 등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12장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한 최종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즉 앞장에서(12장)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남용함으로써 반목과 질시를 일삼아 분열을 빚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은사의 목적과 다양성 및 통일성을 언급하며 더 큰 은사를 사모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제 본장에서 성도가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가장 큰 은사가 '사랑'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모든 은사의 근본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시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외적 은사만을 최고로 여기며 자랑하고 교만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매우 필연적인 권면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은사들은 아무 유익이 없는 외적인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본문은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모든 행위는 무익하다는 '사랑의 필수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방언하며 예언하는 능력(1,2절)과 이적을 행하는 믿음(2절 하반절). 그리고 구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순교하는 행위(3절)를 구체적인 예로 제시하고 있다. 사실 그 어떤 능력과 선행도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준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이러한 모든 행위들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능력이 없는 외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항상 이타적인 사랑을 먼저 가짐으로써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13:1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곧 외국어를 지칭한다(Thiersch, Alford, Godet, Hodge). 혹자는 이것이 외국어가 아니라 타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고 하나(De Wette, Meyer, Findlay)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이 각 사람의 방언, 곧 외국어를 말한 점으로 보아(행 2:8) 이것은 다른 나라 말임 이 확실하다.
그리고 '천사의 말'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이 말이 어떤 종류의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바울은 이 말이 무엇인가를 알리려고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처럼 고상한 말을 인간이 할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대조시키기 위해 천사의 말을 언급한 것이다(Clarke). 즉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외국어나 천사의 말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최고의 경지에 오른 방언을 말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본절의 말을 도입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칭하는 헌신적이고 지고한 사랑인 '아가페'( )이다. 헬라어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는 모두 세 가지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이며, 나머지 둘은 부자, 형제, 친구 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필리아'( )와 남녀 간의 육정적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 )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일 3장 자료노트, '원어로 살펴본 사랑의 개념'을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사람은 사랑을 하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곧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여야 한다.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어서 하는 사랑이나(눅 6:32), 육욕을
좇는 탐심의 사랑은 하나님이 열납 하시는 참된 사랑이 아니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 '소리 나는 구리'는 구리로 만든 각종의 악기를 말한다. 그리고 '울리는 꽹과리'란 우리나라의 타악기처럼 때리거나 맞부딪치면 소리가 나는 기구를 지칭한다. 이 기구들은 여기서 생명력 없이 소리만 내는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바울의 요지는 사랑 없는 방언은 생명력 없는 기구처럼 소음만 생기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13:2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 '예언하는 능'이란 하나님의 뜻과 깊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대언하고 알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고전 12:10 주석 참조. 따라서 예언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능력도 지식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한편 '모든 지식을 안다'는 것은 전지(全知)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본문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한 하나의 과장법이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하늘의 모든 비밀과 지식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에 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 여기서의 '모든'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과장법이다. 또한 본문의 '믿음'은 고전 12:9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그 믿음이 아니라 이적을 행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고전 12:9 주석 참조.
아무 것도 아니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덴 에이미'( )로, 이를 직역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I am nothing)이다(RSV, KJV).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無)라는 사실을 깊이 있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지식도 믿음도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지식과 믿음 따위를 행하는 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자이며 그것으로 그는 무가치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의미한 존재가 무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죄악이다(마 25:25-30).
13:3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 '구제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소미소'( )는 '먹이다' , '양육하다'는 뜻의 동사 '프소미조'( )의 제 1부정과거 가정법으로 이것은 '음식 조각'을 지칭하는 '프소모스'( )에서 온 말이다. 즉 이 낱말은 어린 아이나 새에게 작은 음식 조각을 입에 넣어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유익이 없느니라. - 권위 있는 시내 사본(H)이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등에는 본문의 '불사르게'가 '자랑하기 위하여'라는 뜻의 헬라어 '카우데소마이'( )로 되어 있어 본문 해석에 논란이 있어 왔다. 만일 이들 사본에 기록된 대로 해석한다면 그 뜻은 구제와 몸을 내어줌에 모두 적용되어 '내가 자랑하기 위하여 나의 전 재산을 내어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전체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이들 사본 이후에 기록된 후대 사본들이(에브라임, 베자, 보엘네리안, 모스코 사본 등) 본문을 지금의 내용으로 기록해 놓았던 것이며 대부분의 학자들도 후대 사본의 표기가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Chrysostom, Tertullian, Lightfoot, Meyer, Moffatt, Craig). 따라서 본문은 에브라임 사본(C)이나 베자 사본(D)을 따라 번역된 본문 그대로가 옳은 것으로 인정한다. 한편 이처럼 본문이 '자랑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불사르게'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혹자는 이것을 순교로 해석하며(Hodge), 혹자는 순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극한 회 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CaIvin, Morris). 본문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다.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순교뿐만 아니라 인간의 극한 희생 행위를 망라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여하튼 어떠한 인간의 극한 희생일지라도 사랑이 없는 행위는 무익할 수밖에 없다.
13:4-13 사랑의 본질과 영원성
은사 문제와 관련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의 은사를 사모할 것(고전 12:31)을 권면한 후 그 사랑의 필수성을 논한 앞 단락에(1-3절) 이어 본 단락에서는 사랑의 본질(4-7절)과 영원성 및 우월성(8-13절)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본문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바울은 사람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4-7절).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단정 짓고 있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심으로 보여 주신 절대적 사랑이요(요 3:16),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의 실체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창 1:7) 우리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이기도 하다(요일 4:8,16)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사랑을 그런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구체적 덕성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사랑은 ① 오래 참음, ② 온유함, ③ 투기하지 않음, ④ 겸손함, ⑤ 성내지 않음, ⑥ 진리 편에 서는 것, ⑦ 소망 등의 모습으로 삶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내용은 죄로 물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심으로써 모범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는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지향해야 하는 성도들은 단순히 앎에서 끝나는 지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요 13:35).
둘째로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을 논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토록 사랑의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면한 이유로서 사랑 이외의 다른 모든 은사는 부분적 이 고 일시적인 것이라 영원히 존재하지 않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없어질 것들이다(9-10절). 그렇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요일 4:8)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8절).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로 유익한 것이다. 바울의 요지는 다만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인 사랑을 제외한 모든 다른 은사들은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것들이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과 우월성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예로 들고 있다(11,12절). 즉 어린아이가 장성한 후에는 어렸을 때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듯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각종 은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전혀 소용없는 것들이 되는 대신에,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생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만이 영원한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설명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바울은,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도 훨씬 탁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데 바울이 이처럼 말하는 것은 비록 믿음과 소망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의 자세인 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인
동시에 믿음과 소망의 내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13절 주석 참조.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복음의 핵심적 요소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상호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아무튼 성도들은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되, 반드시 그것에 앞서 넘치는 사랑의 소유자가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13:4 오래 참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마크로뒤메이'( )로, 이 낱말은 '오래'라는 의미의 '마크로스'( )와 '열정' 또는 '노여움'이란 뜻의 '뒤모스'( )가 합성된 단어이다. 즉 이 낱말은 어원상 '상대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에 대해 오래 견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사 이와 같이 오래 참으시는 중에 구원을 베푸셨거니와(롬 2:4), 우리 인간 역시 그 사랑을 본받아 상대의 잘못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는 상황 하에서도 격한 감정을 견디고 인내하며 그 마음 속에 사랑을 심어 주어야 한다(약 1:3).
온유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튜에타이'( )는 '유용한', '은혜로운', '친절한'이 란 뜻을 가진 '크레스토스' ( )에서 파생된 말로, 이 단어가 주는 느낌 그대로 실천적인 선행을 가리킨다. 부드럽고 인자하며 친절하면서도 상대에게 유익이 되는 행동, 이것이 온유이다.
투기‥‥아니하며. - '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이'( )는 '끓는다'는 뜻의 동사 '제오'( )에서 온 말로 '열심'이란 의미가 있는데, 이 단어는 좋은 의미로도(롬 10:2; 고후 9:2)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나 여기서는 상대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끓는다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투기는 상대를 낮추고 자기를 높이려는 이기심과 자만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탐심의 일종이며, 이러한 탐심은 심각한 죄이다(골 3:5). 자랑하지 아니하며. - '자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르페류에타이'( )는 '자만하는', '허세부리는'이라는 뜻을 가진 '페르페로스'( )에서 온 말로, '실제보다 부풀리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은 거짓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떠벌리는 것을 의미한다.
교만하지 아니하며. - '교만'(푸시우타이)은 '자랑'과 의미에 있어서는 비슷하나 겉으로 떠벌리는 것과는 달리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 '무례히 행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케모네이'( )는 본래 '맵시가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낱말은 '교양이 없다', '오만불손하다', '예를 갖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그 마음속에 투기와 자랑과 교만이 있다면(4절) 그 사람은 당연히 온당치 못한 행동거지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온당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바로 참된 사랑은 바른 마음과 바른 몸가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그리스도께서 자기 유익을 구하셨다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 하시사(빌 2:5-7)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아니 하셨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인류 구원이라는 우주 최대의 사랑의 대역사를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주의는 공존의 삶을 가로 막는 동시에 타인의 생명을 희생으로 살아가는 기생적 형태이기 때문에 사랑과 배치된다.
성내지 아니하며. - '성 '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로크쉬네타이'( )는 '성마르고 쉽게 예민해지는 기질'을 지칭한다. 사람이 이기적인 상태에 있게 되면 남에게서 해를 받지 않으려고 항상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되어 예민해지며, 그러한 상태는 악순환을 거듭해 급기야 방어적 예민 상태를 넘어서 공격적 포악 상태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쉽게 격분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격정으로부터 제어하지 못하여 악의 포로로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이런 마음속에 사랑이 거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 로기제타이 토 카콘'( )인데 이 중 우리말 성경에 '생각지'로 번역된 '로기제타이'( )는 본래 '로고스'( )에서 파생된 말인데, 이 '로고스'라는 말은 고대 헬라어에서는 동사로서 '세다', '계산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낱말이었다. 따라서 '악한 것을 생각 한다'는 것은 남에게서 받은 해를 복수하기 위해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하듯이 헤아리면서 원망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뜻한다. 그런데 사랑의 한 측면은 '용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는 사랑과 배치되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은 대조되는 두 개의 태도이다. 헬라어 본문은 이 대조되는 두 개의 구를 '도리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 )로 연결시켜 놓고 있어 하나의 문장으로 완전히 대비시키고 있다. '불의'는 악이며, '진리'는 선이다. 따라서 마귀의 자녀는 불의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진리의 당위 개념이므로(13절) 진리를 기뻐하는 자는 사랑이 있는 자이다.
13:7 모든 것을 참으며‥‥믿으며‥‥바라며‥‥견디느니라. - '참는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고'( )는 '지붕'이라는 뜻의 '스테게'( )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낱말은 상대방의 모든 허물을 덮고 가리워 준다는 뜻의 단어이다(고전 9:12; 살전 3:1). 그러나 이는 상대방의 모든 불의한 행동을 그대로 묵과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다만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까지 관용으로 용서한다는 의미로 변함없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이다. 즉 사랑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치 않고 상대를 신뢰해 주는 것이다. 또 '바란다'(엘피제이)는 것은 소망을 잃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끝까지 바라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견딘다'(휘포메네이)는 것은 단순히 참는 것을 넘어 용감한 군인처럼 담대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미래를 향해 진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말은 참음과 바람이 합쳐진 형태로 적극적인 인내 행위를 뜻한다. 이러한 인내는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될 뿐 아니라 상대를 감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편 본절에는 모든 동사에 '모든 것을'(판타)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언급된 모든 사랑의 의미들이 불변적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일관된 것이지 도중에 변질되는 것이 아니다.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 베자 사본(D) 등에는 '떨어지다'가 '에크피프테이'( )로 되어 있어 '떨어져 나간다'로 강조되고 있으나, 시내 사본(H)과 같은 권위 있는 사본들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보통형인 '피프테이'( )로 되어 있다. 후자의 표기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본래 '피프테이'라는 이 낱말은 나뭇잎이나 꽃이 떨어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약 1:11; 벧 1:24). 따라서 본절은 '사랑'이란 변하거나 없어질 수 없는 영원한 특징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로(요일 4:8)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사랑 역시 영원하다. 사랑이 다른 모든 은사보다 귀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예언도‥‥방언도‥‥지식도 페하리라. - '폐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르게데손타이'( )는 '카타르게오'( )의 제 1미래 수동태로 '쓸모없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사실 은사들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위대한 능력이라 할지라도 천국에 가기까지만 소용되는 한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존재가 함께 누릴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의 상위 개념으로 모든 은사들을 포괄한다.
13:9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 본절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행사하고 있는 은사가 왜 한시적인 것인지, 그리고 왜 사람 앞에서 폐하여지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은사들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비록 완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고, 또한 그 은사가 본래 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행사할 때는 부분적 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한시적이기 때문에 더불어 그 은사도 한시적이라 할 수 있다.
13:10 온전한 것이 을 때에는‥‥페하리라. - '온전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델레이온'( )은 '완전한 것', '성숙한 것', '최후의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최후의 것', 곧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Calvin). 그때가 되면 이 세상 것과 이 세상에 관계된 것은 다 지나가고 오직 영원하고 거룩한 것만 남게 된다. 즉 은사들은 그것이 악한 것이거나 세상의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활동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세상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로 영원한 사랑을 제외한 모든 은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필요 없게 되어 폐하여 진다.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버렸노라. - 본절은 9,10 전반적과 싸움에 있었다. 10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미숙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의 경우를 예화로 들고 있다. 어린아이 시절에는 누구나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말하는 데 있어서나 생각하고 깨닫는 데 있어서 편협하고 서툴며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성장하면 할수록 사물과 사리를 제대로 인지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유아적인 가치 기준과 말투를 버리고 어른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뒤 날마다 성장하여 성화되고 드디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과거 세상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생활을 하던 때에 가졌던 낮은 것들을 버리고 어른답게 천국의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은사들을 사모하는 것이 결코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그것을 받으려고 집착하거나 은사에 비교 우위를 정하는 따위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한편 '버렸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게카'( )는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내가 완전히 버렸다'는 의미이다. 이 낱말은 8,10절의 '폐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르게데세타이'( )와 같이 '쓸모없게 만들다'는 의미의 동사 '카타르케오'( )에서 파생된 말로(8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그것이 확정적임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설명은 현세에서의 은사가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유치한 것인가를 더욱 잘 드러내 준다. 한편 학자들 중에는 말하는 것을 방언으로, 깨닫는 것을 지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예언으로 보기도 한다(Theophylact, Bengel, Olshausen).
13:12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볼 것이요. - 여기서 '희미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이니그마티'( )는 직역하면 '수수께끼 속에 있는' 이다. 이 낱말은 '모호하게 표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아이닛소마이'( )에서 유래한 단어로, 그 유래가 밝혀 주듯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 준다. 당시 거울은 오늘날과 같이 유리에 수은을 입혀서 만든 것이 아니라 구리나 금속판의 표면을 연마시켜셔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선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이나 사물을 명확하게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와 하나님 나라를 보기는 보되 명확하게 보지는 못한다.
부분적으로 아나‥‥온전히 알리라. - 두 개의 구(句)로 구성되어 있는 본 문장은 한글개역 성경에는 동일하게 '안다'는 동사로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다른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어 있다. 즉 앞 구의 '아나'에는 일반적으로 안다는 것을 통칭해서 표현하는 '기노스코'( )가, 뒷 구의 '알리라'에는 전체적이고 완전하게 안다는 의미의 '에피기노스코'( )가 사용되었다. 희미하게 보고 얻은 지식은 부분적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맞대고 보아 알게된 지식은 실체 그 자체를 보고 믿은 지식이기 때문에 완벽한 지식이 된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보고 얻은 신앙의 지식은 불완전하나 하나님의 나라에 직접 가서 보고 얻게 될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13:1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 복음의 세 덕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세 덕목은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세 덕목은 서로에게 근거가 되고 서로를 보충하기 때문이다. 셋 중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그 나머지 둘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믿음이 없으면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소망이 없으면 믿음이 공허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세 덕목은 상호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복음의 핵심 요소이다.
항상 있을 것인데. - 사랑이 영원한 천국의 덕목이라는 데에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이 영원한 천국의 덕목이라는 데 있어서는 이견들이 있다. 만일 믿음이 구원을 얻는 믿음으로 국한되며, 소망이 천국을 들어가는 것에 한정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믿음과 소망은 성취되고 나면 소용없을 것이므로 영원하다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항상 있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Bengel). 그러나 믿음과 소망이 구원과 천국에의 소망을 넘어서 하나님께 대한 불변하는 신뢰와 영원히 하나님의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것에로의 소망을 의미한다면 믿음과 소망은 사랑과 함께 영원한 덕목이
될 것이다(Calvin, Meyer, De Wette).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학자들은 바울이 복음의 세 덕목 중 사랑을 가장 큰 덕목으로 보는 이유를 ① 다른 두 덕목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De Wette), ② 그 영속성이 다른 두 덕목보다 매우 현저하기 때문에(calvin), ③ 다른 두 덕목은 자기를 위한 것이나 사랑은 남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Meyer), ④ 다른 두 가지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모든 존재에게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Godet) 등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 견해들은 모두 받아들일 만한 설득력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해서 의견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치 있게 하고 가능케 하는 근원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도 크고 고귀하며 우선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보게 하는 것이며(고후 5:7; 히 11:1), 소망은 그것을 가지게 하는 것이나(롬 8:24),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로(요일 4:8) 그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며 또 만물을 존귀케 한다(Go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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