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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사도권에 근거한 권징의 경고와 고린도 교회로 인한 사도로서의 자랑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고린도후서의 본론 후반부로서 10:1-13:10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 즉 바울이 동일한 주제를 비교적 소극적 입장에서 다룬 전반부와 달리, 자신의 사도직 곧 사도권의 정통성과 그에 임하는 자신의 바른 자세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근거하여 자신의 사도권에 부당하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강한 경고를 발하는 내용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또한 본장은 좁게는 10:1-13:10까지의 일련 기사 중에서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구체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일단 자신의 사도권을 공고히 하는 10:1-12:13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일련 기사 전반의 내용 전개를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0:1-11은 정통성을 가진 바을 자신의 사도권을 악의적으로 곡해하여 끝까지 바울을 불신하며 그의 훈계를 거부하는 일부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바울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그들을 향한 권징(勸懲)의 의지를 밝힌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이제 다시금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 내지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일련 기사를 시작하는 간접적인 도입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 10:12-18은 바울의 사도권의 정통성 또는 사도로서의 성실한 자세의 증거요 또는 자랑으로서 바울이 제시한 첫번째 사실인 고린도 교회 성도 각자가 바울 자신의 사역으로 성도가 되고 또 성도로서 계속 성숙해 가고 있는 사실 자체를 보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11:1-15은 바울이 그 두번째 증거요 자랑으로 거짓 사도들과 비교할 때 자신은 오직 주의 복음만을 그것도 당연히 고린도 교우들로부터 영육 간의 대접을 받을 권리까지 포기하며 순전히 전한 사실과 사도로서 자신은 그 지식과 열정에 있어서 그 어떤 사도에도 뒤지지 않음을 제시한 사실을 보도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런 순전함과 열정을 악의적으로 호도하는 일부 고린도 교우들은 어리석고 완악하며 더욱이 바울을 배후에서 모함하고 있던 거짓 사도들은 악한 자로서 영원한 심판의 대상임을 밝힌 바울의 경고도 함께 보도한다. 한편 11:16-21은 삽입 기사로서 지금 자기가 이처럼 자신의 사도된 중거이자 동시에 사도로서의 자랑거리를 말하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해명을 보도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대다수의 고린도 교우는 그간 자기들 교회 내에서 발생하였던 몇몇 오류에 대한 바울의 견책을 듣고 들이켰으나 일부의 교우가 이제는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조차 불신하는 상황에서 부득이 자신의 사도직의 증거와 자랑을 말해야 하는 자신의 복합적 심경을 피력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불가피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11:22-33은 바울이 세번째의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의 증거요 사도로서의 자랑으로 제시한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그가 겪고 또 극복해낸 극한 수고와 고난을 보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12:1-10은 바울이 밝힌 그 네 번째 증거요/, 자랑으로서 놀라운 신비 체험과 특별 계시를 받았는데 그 체험의 위대함은 심지어 그로 인하여 바울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까지 주실 정도였다는 바울의 진술을 보도한다. 끝으로 마지막 12:11-13은 일단 사도권의 정통성에 대한 변론을 최종 마무리하는 단락이다. 바울은 여기서 새삼스러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의 사도권은 그 자체가 자명 하나 다만 일부 고린도 교우들로 인하여 부득이 긴 변론을 행하였음을 다시 한번 밝힘으로써 오히려 더 확고하게 사도권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처럼 10:1-12:13의 일련 기사는 전체적으로 바울의 사도권 주장을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세부 단락별 의의는 해당 강해주석에서,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 변호에 대한 전반적 이해는 제 11장 자료노트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 개관에서는 다만 바울의 사도권 주장 관련 기사 모두가 전반적으로 보여 주는 구속사적 의의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 전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바울이 자신의 직접 체험한 특별 계시(特別 啓示)나 신비 체험(신비(神祕 體驗)에 대한 회고 등 여러 부분에서 직 ․ 간접으로 밝혔듯이 바을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소명의 본질에 대하여 확고한 인식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바울이 거듭 밝히고 있는 바 평안 중에는 교만과 나태의 유혹을, 반대로 극한 고통 중에는 배교와 소명 포기의 유혹을 물리치고 추호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소명에 일관된 자세로 헌신하였던 사실에도 주목하게 된다.
기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즉 사도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기에 바울은 그 어떤 한계 상황에도 굽힘 없이 사도로서 바른 자세로 일관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뿐 아니라 무룻 모든 인간이란 창조주 하나님처럼 스스로 무한한 초월자가 아니라 피조된 유한자인 바 그가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인식과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그 인생의 모든 차원이 결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우리는 바울이 이제 구속사(救贖史)의 시대(時代)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전되는 비상한 시기에 예수님 이후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유일한 공동체가 될 교회의 모체인 초대 교회의 설립자로서의 자신의 소명과 그에 따르는 구속사적 상급을 사모하며 위대한 삶을 살았듯이 우리 각자도 태초부터 종말까지, 아니 하나님의 경륜으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실체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을 때만이 이 잠시의 나그네 인생길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구속사의 노정에서 하나님은 성도 모두에게 각각 그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케 하기 위한 크고 작은 소명을 주셨는 바 날마다 더욱 성숙해지는 신앙을 따라 더욱더 명료한 소명 의식을 가질 때, 우리도 바울처럼 나 자신에게 부여된 구속사적 소명에 꿋꿋이 헌신하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다시금 새로이 절대 무오하게 하나님과 인간, 우주와 역사 곧 구속사의 총체적 진리를 보여 주는 유일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聖經, the Bible)의 소리를 경청해 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나는 성경을 통하여 구속사의 실체와 그 구속사의 노정에서 나에게 부여된 소명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아 천국을 지향하며 이 땅에서 내 소명을 다하는 역동적 삶을 살고 있는가?
외울 말씀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사도권의 근거한 권징의 의지
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고린도 교회로 인한 바울의 자랑
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0:1, 겸비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타페이노스'( )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지면'(地面)의 높이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낮은'(눅 1:52)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 신분이나 어떤 조건들에 있어서 남보다 못한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지위가 낮은', '가난한'. '하층의', '초라한'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또한 이것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는데 그 마음 상태가 긍정적임을 나타낼 때는 '온유한'(마 11:29), '겸허한'(롬 12:16)으로 해석된다. 반면 그 마음 상태가 부정적임을 나타낼 때는 '비굴하게 처신하는'. '남을 비굴하게 따르는', '수치스러운', '초라한'으로 해석 된다.
이중 본문에서의 '타페이노스'는 바울이 성도들을 직접 대면함에 있어서 외양상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욱 낮추어 섬김의 자세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겸허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쓰인 말이다.
이처럼 비록 다른 성도들을 교훈하고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성도들을 직접 대함에 있어서는 철저히 섬기는 자의 자세로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바울의 모습은 실로 자신이 처한 위치나 신분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참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기 쉬운 오늘날의 교역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보감-10:1 겸손하게 하는 요인
대하 12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0:1-18 바울과 바울의 적대자들 비교
바울 바울의 적대자들
1. 권위: 하나님의 인정(갈 1:1) 인간들의 추천서(고후 3:1) 병기
2. 병기: 하나님의 병기 육체에 속한 병기
. 하나님의 말씀 ․ 세상적 학문'
․ 믿음 . 인간의 이성
․ 온유함과 관대함 . 교만
․ 십자가의 도 전달(고후 10:1-5) . 세련된 웅변술(고후 11:20
3. 관심거리:
성도의 구원(고후 112,3) 자기 권력과 명예(고후 11:20)
그리스도의 칭찬(고후 10:17,18) 사람들의 칭찬(고후 10:12,15)
보감-10:3,4 성도의 영적 무기
성도들은 이 땅에서 갖는 많은 신분 중 사탄 및 그의 세력들과 영적인 씩옴을
하는 영적 군사로서의 신분도 가진다.
이에 마땅히 영적 군사는 영적 싸움을 할 때 그 방법과 수단도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성도들이 이 세상의 영적 군사로서 영적 싸움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들을 살펴보자,
1. 의로움(고후 6:7)
2. 하나님의 능력(고후 10:4)
3. 하나님의 전신 갑주(엡 6:11)
4. 기도(엡 6:18)
5. 믿음(요일 5:4)
6. 주의 보혈(계 12:11)
7. 복음(계 12:11)
보감-10:1,2 직분 맡은 자들의 12대 자세
대상 1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0:12-18 주께 칭찬받을 자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잠 31:30,31)
2. 큰 믿음을 소유한 자(마 15:28)
3. 작은 일에도 맡은 바에 충성하는 자(마 25:21,23)
4. 원수라도 사랑하는 자(눅 6:35)
5. 주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눅 7:2-9)
6. 진정한 마음으로 헌금하는 자(눅 21:3,4)
7. 이웃을 많이 구제하는 자(행 10:2,22)
8. 가르침 받은 대로 행하는 자(고전 11:2)
9. 주 안에서만 자랑하는 자(고후 10:12-18)
10. 믿음의 시련을 이겨낸 자(벧전 1:7)
11.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아도 참는 자(벧전 2:20)
신학용어-10:17,18, 주
요 1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0:7,10 바울이 자신의 약한 것을 극복한 방법
고후 12장 자료노트 참조
10:1-11 사도권에 근거한 권징의 의지
본문에서부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이는 본서 본론의 세 번째 부분이 시작된다. 즉 제8. 9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관해 언급한 바 있는 바울이 10:1-13:10에서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서 본론의 첫 번째 부분(1:12-7:16)에서 이미 자신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사역 자세에 대해 변호했던 바울이 다시 동일한 주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거짓 사도에게 미혹되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적 측면에서 비교적 소극적으로 변호했던 본서 본론의 첫번째 부분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강력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끝까지 진리를 거스리는 적 대자들에 대해 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본문은 바울이 자신을 향한 대적들의 비난에 대하여 일일이 반박하면서 사도적 권위에 입각한 권징의 의지를 밝힌 사실을 보여 준다.
바울에 대한 대 적자들의 비난은 바울이 비겁하며 육체대로 행한다는 것이었다. 즉 대 적자들은 마을이 대면하면 비굴하게 행하고 떠나 있으면 용맹하여 편지로만 큰 소리칠 뿐 실제로는 지극히 우유 부단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음은(17절) 물론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우유부단하고 비겁해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본받아 가급적 인내하고 용서하려는 자세를 지닌 것일 뿐 결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님을 밝히고, 그의 싸우는 싸움 역시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임을 밝혀 대적자들의 비난을 일축하고 있다(1-4절). 사실 바울이 온유와 관용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한 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범죄한 자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린 까닭이다. 그러나 바울은 때가 되면 복종치 않는 자에 대해 징계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5, 6절).
한편 바울은 대적자들의 비난을 일축함과 아울러 그들의 비난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 어리석은 소치의 결과임을 지적하고(7절), 사도권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그가 참 사도임을 중거하고 있다(8절). 즉 주께서 사도를 세우시고 권세를 주신 것은 성도들을 멸망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를 잘 양육하여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 인내하며 온유와 관용으로 대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온유와 관용, 그리고 겸비함은 그가 참 사도된 표요, 비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태도가 계속해서 그에 대한 비난의 근거가 된다면 바울은 부득불 그들을 징계할 수밖에 얼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그의 계획이 제 3차 고린도 방문 때 그대로 실현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11절; 고후 13:2).
한편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성도들의 싸움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굳게 의지하는 영적인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엡 6:10-18).
②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 조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삼상 16:7; 마 22:16; 행 10:34; 롬 2:11).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잘못을 범한다면 외모로 판단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받을 징계가 클 것임을 명심하자.
10:1 너희를. - 본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헌금'에 대해 기록했던 앞부분(8장,9장)과는 어조를 달리하여 매우 위엄있고 엄격한 경고와 권고를 기술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거니와 본장 이하는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 파괴적 요소로 등장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절의 '너희'가 팔레스틴에서 고린도 교회로 침투한 바울의 적대자들인지, 혹은 그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순진한 성도들인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의 기둥으로서 굳건하게 신앙을 고수하던 성도들인지는 분명치 않다. 교회의 방해자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점차로 잠식해 가는 상황을 상정해 보면, 이말은 고린도 교회의 전체 성도들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 대구법(對句法)을 사용한 문학적 표현이다. 여기서 '겸비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노스'( )는 낮은 상태를 의미하여 비교적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인데, 특수한 경우에는 비천하고(고후 7:6) 비겁한, 용렬한 인간을 비웃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담대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달로'( )는 '타페이노스'와는 대조적으로 고결함, 용맹 등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본절은 '대면하면 비굴하고 떠나 있으면 용맹한'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바울 자신이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바울이 그의 대 적자들로부터 받은 비난의 말(10절)을 그대로 차용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정당치 못한
억지를 고발하는 동시에 반어적(反語的)으로 그들의 잘못을 간접적으로 꾸짖는 말인 것이다.
나 바울은. -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대필자를 시켜 기록하였는데 그래서인지 종종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대목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태를 사용하였다. 이는 디 모데와 자기 자신을 위시한 다른 동역자들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는 그러한 복수의 저자 형식을 버리고 자기의 개인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표현은 다른 서신에서도 발견되는데(갈 5:2; 살전 2:18) 그곳에서는 독자들에게 개인적인 호소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자기 자신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무리들의 공격에 개인적으로 맞서겠다는 바울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의 표현은 이제는 디모데와 그의 동역자들과 함께가 아니라 바울 스스로가 대적자들에게 경고한다는 다소간 격양된 어조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권하고. - 바울은 비록 그 마음이 다소 격양되기는 하였으나 자행 자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온유와 관용을 보여 주셨듯이(마 11:29; 요 8:1-11) 그 자신 역시도 온유와 관용으로 고린도 교회를 대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바울의 생 활의 모토였는 바(고전 11:1; 빌 2:5) 아마도 이러한 바울의 태도가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오히려 '아첨과 비겁'으로 굴절되어 비취었을 것으로 보인다.
10:2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 -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이같은 표현은 바을 자신도 종종 그의 서신에서 사용하곤 하였는데(롬 8:4-13; 갈 5:16-21) 그런 경우 '육체'는 '성령'과 대비되는 인간적 속성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를 비난했던 의미에서 '육체대로 행하는'이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이 사도권과 능력을 소유했다면 일상적인 평범한 모습을 보였을 까닭이 없기 때문에 그는 범상한 인간에 불과하다라는 것이다(Calvin). 둘째, 바울을 아주 나쁜 인간으로 평가하여 그는 타산적이고 비겁하며, 타락한 인간의 전형이라는 것이다(Hodge, Barrets). 전자의 견해는 바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여 주는 해석이고, 후자의 경우는 바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 자체를 혹평하고자 하는 적대자들의 의도를 강조한 해석이다. 이중 후자가 지지를 받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적대자들은 늘상 바울이 인간적인 술수와 타산적 이해, 그리고 세속적인 관심을 위주로 선교 활동을 한다고 비난했었다(고후 1:17; 3:5).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않게 하기를. -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바울은 은유와 관용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터무니 없는 악선전으로 그와 고린도 교인들 사이를 이간시킴으로써 교회를 분란에 빠뜨린 그의 대적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하고자 했다. 즉 바울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도권을 발동하여 그들을 징벌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희망했다. 이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동안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 진리를 거스려 행했던 사실에 대해 회개하기를 촉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담대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톨메사이'( )는 '결과를 예상치 않고 행동하다'라는 의미로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바울의 강경한 입장을 볼 수 있다.
구하노라. - 바울의 구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는 견해(Bengel, Ewald)와 '고린도 교인'이라는 견해(Hodge, Meyer)가 었다.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마이'( )가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 사용되는 특징적 단어라고 하나, 고후 5:20에서 사람에 대한 간구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를 취함이 좋다.
10:3 육체에 있어 행하나. - 2절에서는 '육체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본절에서는 '육체에 있어' 행한다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육체에 있어'(엔 사르키)는 '인간적인 속성대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육체를 지닌 자로서'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즉 바울은 자기 자신도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성향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임을 나타내고자한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 하노니. - 육을 가진 사람은 육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육체에서 오는 약점을 면치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는 바울이 싸움을 함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의지해서, 즉 자기 중심적인 동기나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실로 바울의 싸움은 육체의 원리대로가 아닌 성령을 따른 선한 것이었다(롬 8:5).
10:4 하나님 앞에서‥‥강력이라. - 바울이 싸우는 싸움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의 궤계와 싸우는 영적인 것이었다(엡 6:11-18). 이러한 영적인 전투에서 세상에 속한 무기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거스리는 마귀의 견고한 요새를 파괴하는 수단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무기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수단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이라 표현했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타 토 데오( )는 직역하면 '하나님께 능력있는'이다. 이처럼 뜻이 다소 모호한 직역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쓰여진 '여격'의 해석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첫째, 여격을 탈격(脫格)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이 경우 본구절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의미가 된다(Beza, Grotius), 둘째, 여격을 의해 강하게 된다'라는 의미가 된다. 셋째. 여격을 히브리어의 최상급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이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도로 강력한'(행 7:0)이란 의미가 된다. 이상의 세 견해는 모두 본절의 해석과 부합된다. 왜냐하면 세 가지 해석에 모두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기본적인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0:5 모든 이론. - 당시 문화적으로 발흥하여 융성하던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고린도에는 당연히 헬레니즘의 온갖 사조들이 유입되었다. 특히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철학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는데,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 철학사조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그는 당시의 사조에 통달해 있었는데(행 17장) 그런 사실을 가정해 보면, 바울은 고련도에 스며들어온 거짓 선지자들, 즉 자기의 반대파들의 거짓된 논리나 혹은 소규모이지만 이미 형성되었던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의 철학 체계를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 본절의 원문은 '카타테스그노세오스투 데우'( )이다. 여기서 '카타'는 전치사이고, '그노세오스'는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 )가 전치사의 영향으로 어의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본절을 직역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반대하여'가 된다. 여기서 우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정의할것 같으면,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야기한 바, 이러한 복음을 대적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부의 해석자들은 복음과 그리스 철학을 정면으로 대 립시켜서 기독교는 발생 초기부터 그리스 철학의 도전과 방해를 받아왔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은 그리스 철학을 '복음에 대적하는 것'이라 규정했다고 주장한다(Hodge, Morris). 그들은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것을 겸허히 수용하는 인간의 겸손함이 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의 활동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헬라 철학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로 인해 복음을 대적하게 되었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이와 유사한 논조를 전개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보인 해석자도 있는데(Barrett)그는 우선적으로 바울이 채택한 '지식'이란 단어에 주목한다. 지식이라는 단어는 당시 고린도에서 매우 유행하던 용어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유입된 사변적 성향의 사조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런 성향을 가진 자들은 사변에 심취한 나머지 그리스도교의 종말관을 부정하곤 하였는데(고전 4:8) 바울은 이들이 항상 걱정되었고 또 급기야는 팔레스틴의 일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스며들어와 바울 반대 파당을 형성해 나가자, 바울의 염려와 걱정이 실체화되어 그들을 상대로 이같은 발언을 했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십자가의 진리를 미련하다고 버렸기 때문이다(고전 1:18). 이같은 이유로 바레트(Barrett)는 복음을 대적하여 교만해진 사람들을 팔레스틴의 거짓 사도들과 고린도 교회에서 거짓 사도들과 작당해서 바울을 비난하는 사변적 지식인들이라고 규정한다. 이상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은 모두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전자는 당시의 전체적인 사상의 틀 속에서 복음과 철학, 계시와 이성의 갈등에 착안한 해석이고, 후자는 고린도 교회 내부의 정황 분석에 기초한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견해를 종합해보면 무신론적인 철학적 논리와 사변적인 사이비 신학, 그리고 바울에 대한 인간적인 비방 등을 사도 바울은 복음을 대적하는 교만한 요소들이라 규정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영적 싸움을 하는 최종 목적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며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고 그의 선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대적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영접하고 그 복음으로 교만한 마음이 깨어져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영적인 싸움을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따라 사는 바울의 삶의 태도가 잘 나타난다. 바울은 그의 대적자를 굴복시켜 그의 사도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나 대 적자들을 파멸로 몰아넣어 멸망시키기 위해서 싸운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이 싸움을 통해 상대방이 구원의 반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선한 싸움을 계속 하는 것이다.
10:6 복종이‥‥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 앞절(5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대적하는 교만한 세력들이 대부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여전히 불순종하며 대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예비 중에 있다고 공표하고 있다. 이러한 본절을 좀더 유의하여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징계에 대한 경고요, 둘째는 징계의 유보 조항이다. 전자는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에 해당하고, 후자는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에 해당된다. 먼저, 후자의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된다'라는 문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너희'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가 밝혀져야 한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① 팔레스틴에서 잠입한 거짓 사도들, ② 거짓 사도들의 죄임에 넘어가 동화된 자들, ③ 순수하게 복음을 지키던 성도들 등이다. 바울이 '너희'라는 어구로 ②의 부류를 지칭했다는 데 에는 모든 해석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여 복음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조속한 시간 내에 고린도 교회의 불안이 해소되어 고린도 교회가 정상화되기를 바랬다. 이것이 바울이 징계를 유보시키는 이유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연히 징계에 대한 경고도 용이하게 해명될 수 있다. 징계의 대상으로 지적된 '모든 복종치 않는' 자는 팔레스틴에서 고린도에 잠입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거짓 교사들일 것임이 자명해진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훼손시키는 언동을 하여 고린도 교회를 분란에 빠뜨린 장본인들로 끝내 복음에 복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징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출교 같은 것 일 것으로 추정된다(고전 5:13; 딤전 1:20).
10:7 논지의 급작스런 변화는 본서의 한 특징이다. 그러한 특징은 본절에서도 나타난다. 즉 지금까지 '비겁하다'는 그에 대한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해 매우 강한 어조로 변명을 해온 바울(1-6절)은 본절에서부터는 '약하다'는 비난에 대해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 '보는도다'의 헬라어 '블레페테'( )는 '보다'라는 동사 '블레포'( )가 어미변화한 형태이다. 여기서 '블레페테'는 2인칭 복수 명령법과 직설법의 두 가지 형태로 볼 수 있다. 명령법으로 보면 '너회는 보아라'가 되고, 직설법으로 보면
'너희는 본다' 혹은 질문 형식의 '너회는 보는가'가 된다. 많은 영어 역본들은 명령법으로 해석하고 있으며(RSV, NIV), 흠정역 성경(KJV)은 질문 형태의 직설법으로 본절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은 직설법 평서 문으로 해석하여 '보는도다'라고 번역하였다. 어쨌든 명령법으로 해석하면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미가 부각되고, 직설법 의문문으로 해석하면 '왜 인간적인 측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느냐'라는 뜻이 강조되는데 의미상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후자의 해석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Alford, Calvin, Chrysostom).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너무 인간적이고 육적인 시각으로 자기를 본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권위 있는 태도나 언변술(고후 11:6), 환상적인 신비한 체험들을 사도직의 기준으로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떠나서 자기를 진실하게 바라볼 것을 종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뜻으로 바울이 본절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전 1:12에 언급된 자기들만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그리스도파'라 불리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이유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말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부분에서 당연히 그의 '사도적 신분'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사도직의 자격 문제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유대 지방에서 고린도에 온 방해자들이 바울에 대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트집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사도직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대 지방에서 온 사람들 중 어떤 적대자들은 어떤 이유로 자신이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권위있는 사도라고 주장한 듯하다. 짐작컨대 이러한 발언은 상대적으로 바울의 권위를 점차 실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의 자격을 구차하게 변호하기 보다는 자기가 무엇에든지 그들보다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시키려 하는 것이다.
10:8 주께서 주신 권세. - 이는 다름 아닌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일컫는다. 사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했던 갈릴리 출신의 12사도처럼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사도로 임명된 것은 아니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계시를 통해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기에(갈 1:11-17) 12사도와 동등한 권위를 부여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고후 11장 자료노트, '바울의 사도권 변호 이해'를 참조하라.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임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다.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권세를 주신 목적이다. 즉 사도직의 권위는 성도들을 멸망케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잘 양육함으로써 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누가 사도라 자처 하면서 성도들을 잘못 인도하고 교회를 분란에 빠뜨림으로써 교회를 파괴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결단코 사도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을 위하여는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항상 진리만을 전할 뿐 아니라 정직하고 공평하게 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다(고후 1:67; 2:17; 7:5; 11:1-5). 이는 그가 참 사도임을 증거하는 분명한 증거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도직은 지나치게 자랑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한편 주께서 주신 사도직의 권위가 교회를 파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요 세우게 하도록 주어진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고린도 교회 내부에 압력과 갈등을 일으켜 교회를 넘어뜨리려 했던 거짓 사도들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폭로하는 말이기도 하다.
10:9 이는 내가 편지들로‥‥생각지 않게 함이니. - 본절은 선행절(8절)에 관한 부연 설명의 형식을 띠고 있다. 문장 초두의 '이는'은 8절 후반부의 '자기의 사도적 권능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이하의 설명은 8절에 대한 해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다소간 빈정거리는 어투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그 정당성, 능력 등을 위엄있게 제시할 수 있었으나 편지를 쓰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의 발언을 절제했다고 밝혔다. 이는 그가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는 적대자들의 억지 주장(1절)을 의식하고, 또다시 그런 비방에 대한 명분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아마도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가슴 아픈 방문을 한 이후 쓴 준엄한 편지를 받아보고 바울은 면전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편지로만 위협한다는 비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통해서 자기가 고린도 교회를 위협하려 한다는 또다른 비난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난은 결국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방해 요소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10:10 저희 말이. - 헬라어 원문에는 '페신'( )으로 기록되었다. '페신'은 '주장하다', '말하다'라는 동사 '페미'( )의 3인칭 단수형태로 본절을 직역하면 '그가 말하지만'이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들에 대해 적대적 비평을 제기한 특정한 인물이 과연 누구였는지는 불확실하고 또한 한 개인만이 적대적 감정을 표시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반 바울파의 공식적인 입장과 동일시하기도 하고(Betz), 또 다른 이는 '나의 적대자'라고 풀이하기도 한다(Denney). 이에 대해 핫지(Hodge)는 '비인칭 주어'라는 문법적 설명을 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본절은 '혹자는'으로 풀이된다.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바울은 그의 편지들, 즉 고린도전서, 준엄한 편지 등이 모두 무게가 실려 있고 너무 강경한 어조로 일관되어 있다는 악평과 비방을 받았다. 이는 1절과 관련된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바울이 재인용한 것이다.
그 몸으로‥‥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 이 구절에 근거해서 바울의 외모와 신체적인 상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왜냐하면 본절은 바울의 대 적자들이 그의 외모와 어눌한 말씨를 공격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은 만성적인 질병이 있기는 하였으나(고후 12:7; 갈 4:13,14) 복음 전도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하고 수많은 고난을 이겨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육체적으로 나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허메(웅변의 신)로 불린 것으로 보아(행 14:12) 바울이 어눌했다고 볼 수도 없다. 또 바울이 물론 그렇다고 바울의 풍채가 좋았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여기서 바울의 경쟁자들은 그의 일상적인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사실 바울은 환상적이고 기묘한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의 사도됨을 증거하지 않았고, 권위적인 발언이나 행동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섬기는 자의 자세로 겸허하게 행동했는데 그런 이유로 바울은 약하다고 오해를 받아 일부 사람들에 의해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는 상황을 고려컨대 바울의 겸비한 태도가 오히려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어 진다.
10:11 이런 사람은‥‥그와 같은 자인줄 알라. - 본절은 자기를 대적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결코 묵인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결단을 여실히 보여 준다. 바울이 편지에서는 엄하게 이야기하고 직접 대면해서는 온유와 관용으로 행동한 까닭은 고린도 교인들이 상처받을 것을 우려한 배려였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온유한 태도를 보일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은유한 바울의 태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비 겁한 행동으로 오해를 받았고 바울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제 3차 고린도 방문을 목전에 두고 앞에서 언급했던 경고들이 그대로 실행될 것임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10:2-18 고린도 교회로 인한 바울의 자랑
앞 단락(1-11절)에서 자신을 향한 대적들의 공연한 비난에 대해 일일이 반박함과 아울러 그래도 계속해서 비난할 경우 징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도권에 근거한 권징의 의지를 표명한 바울은 이제 본문부터 12:13까지에서는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중하는 구체적 중거이자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을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첫번째 사실로서 바울 자신의 사역으로 성도가 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한다.
먼저 바울은 적대자들의 자화자찬(自晝自讚)이 '분량 밖의 자랑'임을 언급한다(12절). 즉 남이 수고한 일을 마치 자기 공로인 것처럼 속이는 처사라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복음 전파에 의해 설립되었고 또한 그의 헌신적인 수고에 의해 성장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팔레스틴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잠입해 들어온 유대주의자들과 거짓 사도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업적으로 자랑하면서 바울을 모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과 거짓 사도들이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자랑을 늘어 놓게 된 저의(底意)는 단순한 공명심(功名心) 때문만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실권을 자신들이 장악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바울을 가리켜서 이중적 이고 세속적이며 이기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지만(1-11절). 정작 자신들이야 말로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진 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미 앞서 지적한 대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복음 전파의 수고로 거둔 열매였다. 일적이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이방선교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식 인정된 것으로(행 15:1-39). 이때 예루살렘의 원 사도들은 주로 유대인을 상대로, 바울은 주로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로 합의했다(갈 2:9). 이러한 원칙에 따라 바울은 복음을 들고 고린도에까지 나아간 것이며 결국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분명 바울의 고유 영역이요 그의 자랑거리였다(13-15절). 물론 바울의 이러한 자랑은 거짓 사도들과 같이 자기 행위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의 사역의 결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고린도 교회를 와해하려는 완악한 저의가 담긴 거짓 사도들의 교만된 자랑을 폭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실로 바울은 남의 한계 안에 예비된 것으로 자기의 자랑을 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린도 교회가 믿음이 성숙되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선교의 영역을 넓혀 다른 지역에까지 복음을 중거하기를 소원했다(16절).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모든 이방 지역으로 선교 영역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롬 15:24-28). 이러한 그의 태도는 남의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이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려는 거짓 사도들의 태도와 명백히 구분되는 것으로 그가 참 사도임을 여실히 중명한다 할 것이다.
한편 이상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중대시키기 위해 자기 공로를 과시하거나 터무니없이 자신의 업적을 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더 귀중한 것은 세상적인 칭찬보다 주님께로부터 받을 칭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자랑을 늘어 놓는 자가 되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히 고백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과 영생의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특권들과 복음의 증인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이야말로 성도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언제, 어디에서든지 자랑할 수만 있다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10:12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 바울은 여기서 거짓 사도들의 교만된 자랑을 역설적인 어조로 폭로한다. 그들은 실제로 아무런 권위 나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으면서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서 온갖 겉치레를 동원하여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한편, 이러한 경쟁으로 교회를 병들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처럼 그렇게 자기를 내세우거나 그들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신만만함과 용기에 비교하면 바울은 정말 소심한 겁장이처럼 보일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갖지 못한 주님이 주신 권세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그러한 거짓 교사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풍자적 표현을 통해서 거짓 사도들의 자랑이 정당치 못하고 근거가 없는 것임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다.
저희가‥‥지혜가 없도다. -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대적자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그들은 헤아리고 비교하는 기준을 객체에 두지 않고 주체에 둠으로써 어떤 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함은 물론 자신들에 대해서도 자화자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만 것이다.
10: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 - 본절에서 바울은 '한계'라는 단어를 채택하여 자기의 선교 사역의 범위를 밝힘과 아울러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팔레스틴의 거짓 사도들의 행동이 결국 정당치 못한 월권 행위임을 지적한다. '한계'로 번역된 헬라어 '카논( )'은 본래 '곧은 갈대'를 뜻하는 보통 명사인데 그 의미가 추상화되면서 ① 무엇인가를 측량하는 기준, ② 백성들의 건전한 생활을 위해서 통치자가 제정하는 제반 규칙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본절에서는 이 용어가 ②의
정의에 가깝게 사용이 되었는데 '바울에게 부여된 영역'이라해도 무방하다. 바울은 애초부터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 지칭했으며 또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사역의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갈 2:9). 이러한 전제 하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분량의 한계, 즉 이방 선교의 사명에 포함되는 지역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정당한 영역임을 밝힌다. 바울이 이런 식으로 영역의 한계를 밝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처음 바울이 사도로 세우심을 입었을 때에 예루살렘의 원사도들과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졌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고(행 9:15), 둘째는 바울은 순수한 개척자로서 기존 교회와는 무관하게 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롬 15:20). 이러한 협약은 원 사도들과 바울의 선교 영역에 대한 합의로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합의에 근거하여 바울은 자기가 개척해서 교회를 설립한 고린도 교회가 바을 자신의 고유 영역임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만일 고린도 지역에 팔레스틴의 거짓 사도들이 침입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했다면, 이는 분명 바울과 원사도들 간의 합의 사항에 위배 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기의 분량임을 밝힐 수밖에 얼었던 것이다. 물론 바울과 원사도들간의 합의(갈 2:1-10)가 공식적인 법률적 효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팔레스틴에서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간의 합의를 몰랐을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이같은 가능성을 인정한다해도 그들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개척 교회라는 사실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의 행위는 어디에서도 정당화할 근거를 얻지 못한다.
10:14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 본절은 바울이 고린도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한 것이 그가 나아가지 못할 데까지 멋대로 지나치게 뻗어나간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고린도가 하나님이 바울에게 정해 주신 선교의 한계의 밖이 아니라 한계 범위 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바울 자신은 주께서 고린도로 보내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고린도까지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주의 명령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에 나아갔다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절에는 바울의 경쟁자들이 주제넘게 한계선을 넘어 무리하게 교회를 향해 마수를 뻗친다는 진한 암시가 담겨 있다.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 '이른 것이라'의 원어는 '에프다사멘'( )으로 '앞서오다'라는 뜻의 동사 '프다노'( )의 부정과거 1인칭 복수형태이다. 직역하면 '이미 와_있다'가 된다. 여기서 '이미'라는 어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살전 4:15). 바울이 본문을 기록할
때 대적자들은 고린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앞서서 자기가 고린도에서 사역을 시작했음을 인식시키려 한다. 즉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바울 자신이 우선적인 관할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중에 거짓된 논리를 내세워 교회에 침입한 자들은 고린도 교회에 개입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10:15 남의 수고. - 이 어구 역시 거짓 사도들의 탈선 행위를 빗대어 꾸짖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룩한 과업과 결실을 자기들의 공로인 양 위장했으며 고린도 지역의 많은 성도들에게 자기들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청하였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그들에 의해 동요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기를 권고한다.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 '위대하여지기를'의 원어는 '메갈륀데나이'( )인데 이 말은 '풍성하게 하다' 또는 '찬양받는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행 5:13; 빌 1:20). 본절의 문맥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이 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믿음의 성장으로 찬양과 영광을 받기를 원한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믿음이 성숙되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해 낼 수 있는 수준이 되어 더욱 선교 영역을 넓히기를 원했다. 즉 바울은 아시아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교 대상으로 부여하신 이방 지역 전체로 선교 영역을 확대, 확장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와 스페인에 이르는 선교 영역을 구상했었다(롬 15:24-28).
10:16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 장차 자신이 선교의 영역을 확장한다면 현재 팔레스틴의 거짓 사도들의 행동과 같은 부도덕하고 비윤리적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사실 바울은 이전에도 다른 사림이 개척한 곳에 들어가 그들의 수고의 열매를 가로채는 비열한 행위를 한 적이 없었는데, 이것은 그의 선교의 대원칙이기도 했다(롬 15:20).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 렘 9:23,24의 인용으로 고전 1:31에도 동일한 문구가 나온다. 따라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일견 바울은 본절에서 '자랑'을 권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바울은 자랑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거짓 사도들의 위선된 자랑에 직면하여 그들의 잘못을 꾸짖는 차원에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와 명예 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본절은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자랑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 즉 성도들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녀라. - 본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냐 하는 자못 궁극적인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와 거짓 사도들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그들은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자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사도로 인정되느냐 라는 것이 바울의 논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자랑하는 자를 인정하시고 그를 칭찬하신다(롬 1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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