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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성화의 방법과 국가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 및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그 내용상 1-10절, 11-12절, 13-25절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 1-10절은 성도의 개인 신앙생활 자세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을 기록한 본론 전반부1:13-2:10까지의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앞에서(1:13-25) 성도의 성결한 삶과 하나님 말씀 곧 진리 안에서의 형제 사랑에 대해 권면한 베드로는 이어 본문에서 성도 개개인이 죄악된 옛 생활을 버리고 믿음에서 자라가기 위한 성화의 방법과 그러한 개개 성도의 성화의 결과로 이룩하게 될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신령한 집 곧 교회 공동체(敎會 共同體)의 성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2절은 성화의 방법으로 소극적으로는 죄악된 옛 생활을 버릴 것과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신령한 것을 사모할 것에 대해 기록한다. 그리고 3-10절은 건축의 비유를 들어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서 버림 받으셨으나 결국 건축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 곧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처럼 성도 개개인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산돌로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나 성화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결국 하나님의 신령한 집, 곧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인 교회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성숙을 이루게 됨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성도(Saint)가 이 세상에 속한 불신자들의 죄악된 삶과 다른 성화의 삶을 살고자 할 때 그 삶의 양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불신자들로부터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난이 때로 믿지 않는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로부터 오게 될 때 그 고통은 실로 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성도가 성화(Sanctification)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바로 구속사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까지 확장시켜 나가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의 구속사적 사명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서 우리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중반부 11,12절은 넓게는 성도의 대 사회 관계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을 기록한 본론 중반부 2:11-3:7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이러한 본론 중반부에 대한 일종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성도의 대 사회 관계에 있어 가져야 할 기본자세에 대한 원론적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상술하면 11절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것을, 12절은 모든 이방인들을 선한 행실로 대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중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대 사회 관계에서 불화(不和)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큰 요인 중의하나가 타락한 죄 성에서 비롯되는 인간 자신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들이 아직 성화의 과정 중에 있으며 여전히 죄 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공중 권세자 사단(엡 2:2)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이용하여 인간 사회를 무질서하게 하고 결국 죄악 중에 멸망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할 성도(마 5:13-16)가 대사회 관계에 있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정욕이 사단(Satan)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모든 일에 대하여 정욕을 절제하고 모든 사람을 선으로 대하는 것이다.
후반부 13-25절은 천국 시민인 성도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성도의 대 사회 관계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을 기록한 본론 중반부 2:11-3:7까지의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으로서 국가 위정자(國家爲政者)에 대한 성도의 자세와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상술해 보면 13-17절은 국가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순종을, 18-20절은 상전에 대한 성도의 순종을, 끝으로 21-25절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수난까지 받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가 대 사회 관계에서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받는 고난들을 인내(忍耐)로 극복하도록 권면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후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 13-17절에서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의 순종은 이 우주와 역사가 절대 유일의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모두 하나님의 주권(主權)하에 있다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란 인간 타락 후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를 통한 구속(救)의 법을 세우시고 이를 세상 끝 날까지 진행시키는 동안 인간의 죄성으로 오염된 이 세상 역사를 당신의 일반 은총적 섭리에 의해 통제하시고 악을 제도적으로 제어하시기 위하여 국가(國家)라는 제도를 세우시고 그 국가의 운영을 위하여 당신의 대리자들로 세우신 자들이다. 따라서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의 복종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역사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인 것이다. 한편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복종은 위정자들이 금하고 있는 악에 대해서 만이다. 만일 위정자들이 악행을 요구한다면 성도는 삶 전체에 있어 선을 행해야 하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 수행의 우선순위로 인하여 마땅히 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위정자에 대한 의무가 서로 상충될 때의 성도의 위정자에 대한 복종은 분명 한계를 갖는다. 이에 대한 세부 설명은 롬 13장 연구자료, '국가 권력에 대한 성도 및 교회의 자세' 를 보다 참조하라.
둘째, 18-25절에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떤 신분과 지위에 처하든지 거기에 구속되어서가 아니라 그 위치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창조자(Creator)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회생활 영위를 위해 허락하신 국가, 가정, 교회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제도(社會 制度)이외의 여타 사회 제도들은 대부분 인간들이 필요에 따라 만든 것들로서 역사상 수없이 많은 사회 제도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 같은 사회 제도들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만든 것이기에 반드시 그 폐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어느 시대 어떤 사회 제도 속에 속하여 있든 지간에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입각하며 그 속에 있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힘쓰되 그것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확장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이기심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구원(救援)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하여 성도들은 일단 자신이 사회생활 중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자신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야 한다(딤전 2:1-4; 딛 2:11). 그리고 이 때에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도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수난까지 받으셨음을 기억하고(21-25절) 인내로 견뎌야한다. 이로써 성도 자신은 천국에서 큰 기쁨을 누릴 것이며, 또 자신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써 이 땅에 많은 복음의 결실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요 12:24).
외울 말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성화의 방법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이루어야 할 신령한 집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성도의 사회생활 자세에 대한 원론적 교훈
11 〇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국가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
13 〇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
18 〇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2:4,5만인 제사장론(萬人祭司長論)
1. 정의
'만인 제사장론'(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인간 중보자(人間仲保者)인 제사장과 희생제물을 요구하였던 것과는 달리 신약 시대에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절대 완전한 유일한 중보자이자 절대 완전한 제물로서 구약 중보자들과 구약 희생제물이 예표하는 궁극적 실체였던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최종 성취됨에 따라(히 7:27,28)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인간 중보자나 제물이 필요 없이 모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새로운 어떤 사실을 천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한 성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말미암아(마 27:51)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의지하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증거한다(히 10:19,20). 그러므로 이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섬길 수 있는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만인 제사장 논쟁의 역사적 배경
만인 제사장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1517년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M.Luther)였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중보 사역의 성취로 말미암아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인간 중보자가 필요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구약 시대와 동일하게 소위 카톨릭 사제들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사제들에게 고해성사에 의한 사죄권, 축성권, 독점적 성경 해석권 등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평신도에게는 회개도,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도 심지어는 온전한 예배도 허용치 않았다.
이에 루터를 필두로 한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유일성과 완전성 및 최종성을 부인하는 행위임을 지적하고 모든 성도 개개인이다 유일하고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제사장 직분을 가진다는 만인 제사장론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사제들에게만 허용하였던 성경 해석권 역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물론 신약 성경이 분명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의 감독과 치리를 위하여 성직자들은 반드시 요청되지만 그들은 결코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서 근본적으로 평신도보다 우월한 지위와 신분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다만 일반 평신도를 지도 교훈하는 직분과 직무를 가진 것뿐임도 분명히 하였다.
3. 의의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고 완전한 그리고 궁극적인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며 더 이상 어떠한 인간 중보자도 요구치 않는다는 성경의 진리(딤전 2:5)를 재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1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지속된 중세 암흑시대 동안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 교권주의(敎權主義)에 의하여 왜곡되고 감추어졌던 성경의 진리를 새롭게 조명해 준 것으로 교회 사상 그 의의가 실로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주지함으로써 보다 담대하게, 또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눔에 큰 유익을 주었다. 실로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제사장 신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한편으로는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의롭고 거룩한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힘써야 할 것이다(벧전 2:9; 계 1:6).
도표-2:2-25 성도에 대한 본장의 12가지 표현
1. 갓난 아이(2절)
2. 산돌(5절)
3. 신령한 집(5절)
4. 거룩한 제사상(5절)
5. 택하신 족속(9절)
6. 왕 같은 제사장(9절)
7. 거룩한 나라(9절)
8.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9절)
9. 긍휼을 얻은 자(10절)
10. 나그네와 행인(11절)
11. 하나님의 종(15절)
12. 길 잃은 양(25절)
보감-2:2, 성화의 방편
살전 3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2:4-8,25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은유적 묘사
1. 흠 없는 어린 양(1:19)
2. 보배로운 산 돌(2:4)
3. 요긴한 모퉁이 돌(2:6)
4. 보배(2:7)
5. 머릿돌(2:7)
6. 믿지 않는 자에게 거치는 반석(2:8)
7. 믿지 않는 자에게 부딪히는 돌(2:8)
8. 영혼의 목자(2:25)
9. 감독되신 이(2:25)
10. 목자장(5:4)
도표-2:4-8,25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V항 참조
보감-2:9,10 하나님의 소명의 목적
고전 1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 -2:9, 선전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상겔로'이다. 이 단어는 어떤 소속에서 이탈하여 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밖으로'라는 뜻의 동사 전치사 '에크'와 소식을 '알리다', '전하다'라는 뜻을 가진 '앙겔로'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엑상겔로'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어 '보고하다', '폭로하다', '발표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로 보건대 '엑상겔로'는 감추어져 있던 어떤 사건의 진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소식을 세상 사람들이 잘 알도록 공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앙겔로'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보냄을 받은 자인 '사신' 또는 '천사'를 가리키는 '앙겔로스'에서 나온 것이다. '사신'이란 자신을 파송하여 보낸 주인의 뜻에 따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거나 보탬이 없이 온전히 전하는 것을 그 본령(本領)으로 하는 자이다. 따라서 '앙겔로'는 보내는 자의 의도에 따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전하다'(헬, 엑상겔로)는 이전까지 감추어져 있던 어떤 사실을 과장하거나 꾸며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의미대로 세상 사람들이 잘 알도록 정확하게 드러내 주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전해야 할 자들로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임을 말하고 있다. 과연 우리들이 이 같은 직분에 충실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올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할 것이다.
2:1-10 성화의 방법과 이유
본 단락은 본론 전반부(1:13-2:10)의 종결 부분으로 성도 개개인의 성결한 삶에 대한 권면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로서 성도 간에 나누어야 할 진리 안에서의 순종과 사랑의 교제에 대한 권면(1:13-25)에 이어 이제 성도 개개인이 성화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모든 성도들이 각각 성화를 이루어야 할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베드로는 갓난아이의 비유를 들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거듭난 성도 개개인은 갓난아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령한 젖을 먹고 성장하면서 점차 과거의 죄악된 행위를 버리게 되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 중에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1,2절). 여기서 그는 '버리라'(1절)와 '사모하라'(2절)는 두 개의 명령어를 사용하여 영적으로 갓난아이의 상태에 있는 성도가 성화를 위하여 소극적으로 버려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받아먹어야 할 것에 대하여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건물의 비유를 들어 예수께서 산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 개개인 성도들도 산돌로서 함께 연합하여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敎會)를 이루어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3-8절). 이렇게 신령한 집을 이루기 위해 성도 개개인은 성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이 사람들에게서 버린 바 되셨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하나님에 의해 귀하게 여김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 개개인의 성도들도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멸시천대를 받는 고난에 처하게 되지만 결국 성화의 과정을 통해 거룩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베드로는 다시 구원 전의 상태와 구원 이후의 상태를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의 신분과 사명(使命)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9,10절). 즉 성도의 신분에 대하여는 택하신 족속(사 43:20), 왕 같은 제사장(출 19:6), 거룩한 나라(출 19:6),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출 19:5)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신분을 가진 성도에게 부여된 사명은 하나님의 구원을 널리 선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① 갓난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젖이 필요하듯이 영적 갓난아이가 된 거듭난 성도의 성화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받지 않고 성도가 거듭나기 이전의 옛 생활에 머물러 있을 때 성도의 신앙의 성숙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또 그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수 1:8; 시 1:2; 19:9,10; 119:105; 딤전 3:16,17; 히 4:12).
② 성도 개개인의 성장은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령한 집인 교회 공동체 전체의 성장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바 이에 각 성도들은 자신의 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한다는 것이다(엡 4:16). 이는 신앙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현대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된다.
③ 성도는 성화의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여야 한다는 것이다(마 5:16). 즉 성도의 성화는 결국 그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개개인이 더욱 성화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얼마나 성화에 힘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 앞에서(1:23-25) 성도들의 거듭남이 영원토록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밝힌 저자는 이제 그들이 거듭났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머무를 것이 아니라 믿음이 계속적으로 성장해야 할 것을 주지시킨다. 본절은 성도들이 거짓 없이 형제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1:22)대로 살기 위해 먼저 소극적으로 버려야할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본절에 기록된 다섯 가지의 악덕들은 모두 '형제에 대한 거짓이 없는 사랑'에 거스르는 것들로, '악독'은 남을 해치려는 심사를 말하며 '궤휼'은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행위를 말하며 '시기'는 타인의 행복을 원치 않는 마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비방'은 악의에 찬 중상모략을 의미한다. 한편 동사 '버리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티데미'의 문자적 의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주로 '죄를 버리다'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13:12; 엡 4:22,25; 골 3:8; 약 1:21). 이는 초대 교회 당시 죄 씻음을 상징하는 세례 의식을 행할 때 옷을 벗고 물 속에 잠기는 침례의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절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버려야 할 항목들은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그려낼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강 분류해서 살펴볼 때 '악독'과 '궤휼', '외식', '시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악으로, 이 가운데 악독은 마음에, 나머지 세 가지는 행동에 나타나는 악을 가리키고 그중에 특별히 '비방'은 대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악을 가리키는 점을 보아 당시 소아시아 교회 안에는 신앙의 미성숙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2 갓난 아이. - '아이'에 해당하는 '브레포스'는 본래 태어나지 않은 애기(눅 1:41, 44)를 뜻하지만, 본절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유아'(네피오이, 눅 2:12)를 가리킨다. 벧전 1:3,23절에서 '거듭난 자'들에 대한 묘사가 이제는 한 단계 진전되어 '갓난 아이'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그의 육신적 나이와 상관 없이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갓난아이들은 단순히 젖을 원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본능적인 충동에 이끌리어 젖을 찾는다. 여기에 '사모하다'(에피포데인)라는 강한 어감의 동사를 사용하여 '갈망'하는 모습을 잘 표현해주었다. 갓난아이는 사모하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른다(Bengel). 그와 같이 거듭난 성도들은 오직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과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한다. 한편 여기서 '젖'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순전한'과 '신령한' 둘인데, '순전한'에 해당하는 '아돌로스'는 문자적으로는 '악의 없는', '속임 없는'의 뜻으로 1절의 '궤휼'(돌로스)에 대조하여 쓴 것이다. 그리고 '신령한'에 해당하는 '로기코스'은 보통 '말씀'으로 번역되는 '로고스'에서 온 말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칼빈(Calvin)이나 벵겔(Bengel) 등은 '말씀의 젖'으로, 알포드(Alford) 등은 '신령한 젖'으로, 그리고 홀트(Hort)등은 '이치에 합당한 젖'으로 번역한다. 전장 23절에 비추어 볼 때 '말씀의 젖'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자라게 하려 함이라. - 영양이 풍부한 좋은 젖을 공급받은 아기의 육체가 날마다 건강하게 자라가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도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공급받을 때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마지막 때에 나타내시기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에 이르기까지 자라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데는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만이 필요하다. 한편 '이로 말미암아'(엔 아우토)는 문자적으로 '그 안에서'라고 번역되는데, 저자가 '그것을 통하여'(디 아우투)라고 하지 않고 '엔 아우토'라고 한 것은 아마 그가 신령한 젖인 말씀과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Kelly).
2:3 너희가…맛보았으면 그리하라. - 본절은 시 34:8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성도들이 어디에서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는지, 또한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강렬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으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인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만일 …이라면'이다. 그런데 이 말은 조건이나 의심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이유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으면'을 '…때문에' 또는 '…한즉'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하늘의 은사를 받았은즉 그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라'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한 번 맛본 사람은 그것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 이 구절은 시 118:22을 다소 변형하여 인용한 것으로 저자는 아마예수께서 시 118:20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막 12:10; 눅 20:17)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즉 시편에서 '버린 돌'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영광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권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여 쓸모없는 것으로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켜 자칭 건축자들이라 일컫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실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에 버린 바 된 돌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배척당하심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수신자들이 고난을 당할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산 돌. - 저자는 '젖'의 비유에서 이제는 '산 돌'의 비유로 넘어간다. 아마도 베드로는 안드레가 자기를 주님에게 데려갔을 때 예수께서 자기에게 지어 주신 새로운 이름을 생각하였을 것이다(요 1:42). 물론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베드로의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트로스'는 견고한 자연석이나 다듬지 않은 돌인 바위 조각을 뜻하지만, 본절의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스'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택해져서 잘 다듬어지고 손질된 돌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것에 '산'(존타)이란 형용사를 덧붙여 의도적인 모순을 일으킴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있다.
2:5 너희도 산 돌 같이. - 그리스도를 '산 돌'에 비유했던(4절) 저자는 이제 산 돌이신 분과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산 돌'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돌'이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는 단수 '리돈'이었으나 본절에서 성도들을 가리킬 때는 복수 '리도이'가 쓰였다. 이는 성도 홀로는 거룩한 집을 지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즉 성도는 신령한 집의 기초이자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성도들과 연합할 때 비로소 아름답고 신령한 집인 교회를 세워나가게 되는 것이다(엡 2:20-22).
신령한 집. - 그리스도인을 '산 돌'에 비유한 데 이어 다시금 '산돌'을 '신령한 집', 즉 '성전'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본서만의 독특한 사상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된다(고전 3:10-17; 고후 6:16; 엡 2:20-22; 딤전 3:15; 히 3:2-6). 저자는 이러한 비유를 통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성전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려주며, 이 새로운 성전은 구약에서 보이는 한 지방에 국한된 물질적인 성전과 대조적인 신령한 성전임을 주장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시온에 있는 성전을 대신하여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일으키실 것을 말씀하셨다(막 14:58). 이 비유에 대해 알포드 (Alfor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돌은 산 것이라 하고 그 집은 신령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단지 그들이 죽은 돌이 아니며 그 집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을 말할 뿐더러 산 돌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성령이 내주하시는 몸으로 드리는 제사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저자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 부르는 데서 진일보하여 이제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9절). 이러한 주장은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의 인식에 있어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열방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성취되지 못했던 이 이상(理想)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되었다. 여기서 성도들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영적 산 제사이다(요 4:20-24; 롬 12:1). 한편 여기에 논거된 만인 제사주의의 관념은 카톨릭의 특정 제사주의 교리를 거부한다(Meyer). 이러한 '만인 제사주의'는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높이 들었던 기치들 중의 하나였다. 본장 자료 노트 참조.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의 내용에 구약에서 세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돌'에 대한 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절은 사 28:16을 약간 변형하여 인용한 것이다. '기록하였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페리에케이'는 '기록하다'보다는 '내포하다'는 의미가 강하며 이러한 본절의 용례는 신약에서 유일하다(Robertson).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메 카타이스퀸데'는 문자적으로는 '급한 일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이 말씀이 현재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Bengel), 문법으로 또는 구약적 배경으로 볼 때 이것은 미래의 돌연한 환난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Meyer).
2:7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 본절과 8절은 심한 대조들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본절은 그리스도 자신이 '보배'이자 '장애물'로서 대조되고 있으며,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도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다.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이와 비슷한 대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성역이신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논하지만(고전 1:18-25)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신분 자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한편 '보배'( 헤 티메)를 형용사로 보아 '보배로우나'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는데(Luther, Bengel), 관사 '헤'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명사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따라 구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영광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 이 구절은 시편 118:2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께서도 인용하셨으며(마 21:42), 베드로 자신도 예루살렘 성전 미문(Beautiful Gate)에서 행한 설교 중에서 인용한 바 있다(행 4:11). 자칭 건축자들이라 일컫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지만 그러한 배척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여 그를 믿는 자들의 머릿돌이 되셨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 특히 아시아 지역 성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큰 경고가 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버림받은 것같이 보였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 것같이, 지금 박해를 당하고 있는 아시아 지역의 성도들도 영광을 받으므로 그들을 박해하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굴욕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비록 지금 견디기 힘든 고난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장차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오히려 기쁨으로 이기고 나아가야 한다.
2:8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 이 구절은 사 8:14에서 인용한 것으로 앞절에서 인용한 시 118:22과 함께 '머릿돌'과 '부딪히는 돌'을 대조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양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부딪히는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콤마'는 '사람이 우연히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란 뜻이며, '거치는 반석'(스칸달론)은 '사람을 빠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해 놓은 함정'이란 뜻이다. 전는 그리스도에 대적함으로써 파멸하는 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며 후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회의를 일으켜 그 생애에 지장을 받는 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여하튼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겐 심각한 방해물이 된다.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 '순종치 않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페이둔테스'는 직역하면 '믿지 않는'이란 뜻이지만 주로 '불순종', 즉 '고의적인 반대'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복음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반항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그리스도, 즉 복음은 이들의 전진을 방해하는 부딪히는 돌이 될 수밖에 없다. 참 신앙은 순종으로 나타나지만(벧전 1:2 참조) 불신앙은 불순종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 '정하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테데산'은 '규정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티데미'의 부정과거형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적용되는 말이다. 여기서 저자는 성도인 수신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처럼(벧전 1:2),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들은 멸망을 위해 예정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들의 넘어짐은 사람들 편에서 볼 때 말씀에 불순종하여 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는 이미 예정된 것이라는 것이다(잠 16:4; 유 1:4). 이처럼 불순종하는 자들이 불순종으로 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기'(遺棄)라 부른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신론' 중 '예정의 두 요소' 부분을 참조하라.
2:9 앞에서(7,8절) 불신자의 운명을 기록한 저자는 이제 그들의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분을 감격적으로 기술한다. 본절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족속'( 게노스), '나라'(에드노스), '백성'(라오스)이란 말들은 구약 70인역(LXX)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특수한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나 여기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인(갈 6:16)의 특권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들은 모두 성격상 단체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개인으로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the Church)를 지칭하고 있다.
택하신 족속. - 이것은 사 43:20을 인용한 것으로 저자는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옮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으나 그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언약의 땅인 가나안에서 쫓겨났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 대신에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택하신 족속'으로 삼으셨다. 이 족속은 더 이상 육적인 혈통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바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성도들을 한 족속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들. - 이 구절은 출 19:6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앞서 5절에서는 '제사장'이란 말에 '거룩한'이란 형용사로 수식하였으나 여기서는 '왕 같은'이란 형용사로 수식한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Bengel) 왕이요 제사장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 왕이요 제사장의 모델은 살렘 왕 멜기세덱(히 7:1)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한 왕과 제사장을 겸한 자로서 영원한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제 이러한 특권이 성도들에게 부여되었는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와 하나님을 중보할 어떤 제사장도 필요치 않으며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를 능가할 어떤 사람도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만인 제사장론'을 보다 참조하라.
거룩한 나라요. - 역시 출 19:6에서 인용하였다. 이것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 위해 구별된 거룩한 나라였으나, 그들의 내적인 불결함 때문에 거룩함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씻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나라'이다. 따라서 거룩한 나라인 성도들, 즉 교회는 내적인 정결을 유지해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 거룩함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출 19:5에서 인용한 것으로 신 7:6과 말 3:17에서도 동일한 구절이 나타난다. 그런데 70인역(LXX)은 이 말을 신명기에서는 '특별한 백성'으로 말라기에서는 '특별한 소유'로 번역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하고 소중히 간직된 소유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교회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사심으로(고전 6:20; 7:23)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것이다.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사 43:21의 인용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이상과 같은 세 가지의 특수한 신분을 주신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역할을 감당케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특권 의식에 빠져 복음의 배타주의로 흐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된 성도들에게 이 특권들을 다시 주심으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을 복주시기 위함이나 궁극적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하셨으며, 바울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2)고 하였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는지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나그네란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어두움에서 이끌어 빛으로 인도하셨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이 기이한 사명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라.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2개의 극단적이고 대조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택함 받은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절은 호 1:6-10; 2:23을 결합하여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호세아는 부정한 여인 고멜에게서 낳은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가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보았다. 본서의 저자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수신자들에게 적용하여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중생하여 이제는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로써 그들이 전에는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던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긍휼을 입어지금 가해지고 있는 박해자들의 박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며 마지막 때의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박해에 처한 수신자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며 또한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커다란 교훈을 준다. 성도들이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마지막까지 어떠한 악의 세력으로부터도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는 비록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소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야 할 것이다.
2:11,12 성도의 사회생활 자세에 대한 원론적 교훈
본 단락은 성도의 대사회 관계에 있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일련의 교훈들을 주고 있는 본론 중반부 2:11-37의 개시 부분이다. 즉 앞의 1:13-2:10에서 성도 개개인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한 원론적 교훈들을 주었다면 본론 중반부에서는 그러한 거룩한 삶을 사회생활의 여러 영역 속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맥락의 본론 중반부에 대한 일종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성도가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져야 하는 기본자세에 대한 원론적인 교훈을 하고 있다.
먼저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이 세상 속에서 갖는 성도의 신분을 가리켜 '나그네요 행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성도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며 (빌 3:20), 이 땅은 우리가 영주할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히 11:8-10). 이는 결국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태도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천국시민 다운 것이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천국 시민된 성도는 마땅히 이방인들의 삶과는 달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과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이로써 성도를 비방하고 핍박하는 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것이다(12절). 이것은 산상수훈에 나타난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사회생활 중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극적으로는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는 것과, 적극적으로는 선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대부분의 불화가 개개인의 정욕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세상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경우 이외에 선을 행치 않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가 허다함을 생각해 볼 때 선을 행하는 삶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다.
2:11 사랑하는 자들아. - 앞의 1:13-2:10까지에서 대체적으로 개인 생활에 관한 권면을 준 저자는 이제 본절부터 3:17까지에서는 성도들이 사회인으로서 처신해야 할 바를 교훈한다. 특히 본절과 12절은 그에 대한 원론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시작하는 말인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이)는 수신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애정 섞인 용어이다. 베드로는 이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의 서신에 8번에 걸쳐 나타난다(벧전 4:12; 벧후 1:17; 3:1,8,14,15,17). 바울 서신과 요한과 야고보 서신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주로 주의를 환기시킬 때나 간곡한 권면을 시작할 때 사용되었다(롬 12:19; 고전 10:14; 고후 7:1; 살전 2:8; 약 1:16,19; 2:5).
나그네와 행인. - 그리스도인들의 위치와 삶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나그네'(파로이코스)는 '이국에 정착해 사는 사람' 또는 '낯선 땅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행인'(파레피데모스)은 외국 땅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만 체류하는 '방문객'을 의미한다. 두 단어가 조금 다른 의미를 갖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가지이다. 즉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빌 3:20), 이 땅에서는 나그네들이며 영원한 시민권이 없는 행인이라는 것이다(히 11: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전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현실 도피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사실이 성도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 힘들지라도 일상생활을 힘 있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육체'(사륵스)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이 존재하는 영역으로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으나, 이 단어가 '육체의 정욕'이라는 형태로 사용될 때는 구속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전체적인 본능과 죄의 좌소 그리고 매개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육체의 정욕'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욕구들을 말한다(갈 5:16-21). 이것들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영혼의 거룩성을 파괴시키는 데 앞장선다. 또한 이것들을 절제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적극적인 절제를 통하여 육체의 정욕이 발붙일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2:12 행실을 선하게 가져. - 앞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소극적으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을 했던 저자는 이제 적극적으로 선행을 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본절은 마 5:16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믿지 않는 자들의 행실은 벧전 1:18절에 나와 있듯이 망령되다. 반면 그리도인의 행실은 '선'(善)해야 한다. 여기서 '선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는 겉모양의 선하고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안의 성격조차도 옳고 정의로운 것을 말한다. 이런 '선함'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난다.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 이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위험한 상황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미신이라는 오해를 받았는데 로마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판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추행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추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이 애매한 오해와 비난을 받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성경 안에도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다'(행 17:6,7)거나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며 여신을 훼방한다'(행 19:37)는 등의 고소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권고하시는 날에. - 저자는 그러나 그러한 오해의 눈길이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결과를 맺기 바라고 있다. '권고하시는 날'(엔 헤메라 에피스코페스)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날에 대하여는 ① 최후의 심판의 날(Von Zoden, Schott, Hart), ②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 서는 날(Moffatt), ③ 성도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의해 변화를 받아 회개하는 날(Calvin, Kühl, Huther) 등의 주장이 있는데 뒤에 따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세 번째 견해로 보는 것이 좋다.
2:13-17 국가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
앞 단락에서 성도가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져야 할 기본자세에 대한 원론적인 교훈(2:11,12)을 한 베드로는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사회의 여러 영역 속에서의 성도의 생활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 첫 번째로 본 단락에서는 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베드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사회생활 영위를 위하여 여러 사회 제도들을 허락하신 바 이러한 사회 제도들에 대해 순순히 따를 때에 모든 인간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한 후(13절), 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을 권면하고 있다. 즉 국가 제도(國家制度)는 상선 징벌(賞善徵罰)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 제도이므로 성도는 선행을 요구하는 위정자에 대해서는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복종이 국가나 위정자의 권세 때문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도의 복종이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주께 순복하듯 능동적인 것이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베드로의 이 권면이 국가 위정자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위정자들의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세 역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며(롬 13:1-3) 따라서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에만 순종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롬 13장 연구 자료, '국가 권력에 대한 성도 및 교회의 자세'를 참조하라. 그리고 베드로는 성도들이 국가 위정자에 대해 능동적으로 복종함으로써만 그들을 비방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15절). 이것은 당시의 성도들이 신앙을 핑계삼아 국가에 충성치 않는다는 이방인들의 비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한편 베드로는 국가에 대한 복종을 위하여, 또 모든 사람들 앞에 선을 행하기 위하여 성도는 비록 자유를 얻은 자이나 때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듯 그 자유를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교훈하고 있다(16,17절).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사회생활을 올바로 영위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사회 제도를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하나님께서 국가로 하여금 상선 징벌을 통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토록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 사회는 극도의 무질서 상태에서 금방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둘째, 이렇게 하나님이 국가 제도를 주사 사회 질서를 유지케 하지 않으셨다면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평안히 이루어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지상 대명(the Great Commission)을 수행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딤전 2:1-7). 따라서 성도들의 국가에 대한 순종은 직접적으로는 평안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다.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 - 저자는 '선행'(12절)에 대한 실례를 들기 위해 일반인, 아내, 노예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각각의 처지에서 지켜야 할 규범(規範)들을 길게 설명한다(2:13-3:7). 그 첫째 권고가 '국가 내에서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할 것인가'이다(13-17절). '제도'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는 도시 같은 것의 '토대'를 의미했으나 신약에서는 주로 '창조' 혹은 '창조물'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역사(役事)에만 사용되었다(막 13:19; 골 1:15). 그러므로 여기의 '제도'를 '사람이 세운 모든 제도'(Bigg, Caffin)라고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세우신 제도'(Meyer, Zahn, Hart)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모든 인간 제도들은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으로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롬 13:1 주석을 참조하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여기서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불복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고소당하였던 일을 상기하고 있는지 모른다(행 17:7). 이에 베드로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인간적인 동기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동기를 가지고 세상 제도들에 복종하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이기에 그것들에 순복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순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주님 자신도 인간으로서 인간제도에 순복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복함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주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를 창조주로서 믿고 따른다면 그분의 창조물인 인간과 그 모든 제도들에 대하여 겸손하게 순복하여야 한다.
위에 있는 왕. - 당시는 로마 황제를 가리킨 것이나 오늘날은 각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를 가리킨다. 한편 본서가 기록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악명 높은 폭군이었던 '네로'(Nero, A.D. 54-68)였던 바 이러한 자에게까지 복종하라는 베드로의 권고는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철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14 혹은…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 '방백'(헤게몬)은 지방 총독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받고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본절에 나와 있듯이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포장하다'(에파이로)라는 말은 '들어 올리다', '높이다'는 뜻으로 선행한 자에 대하여 포상을 한다든지 칭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본절의 '그'를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왕을 통해 보낸 방백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로 본절을 해석하기도 하는데(Calvin, Hort, Hart), 헬라어 본문의 문법상 타당성이 없지 않으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단순히 황제에 의해 파견된 방백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Clarke, Bigg, Caffin).
2:15 선행으로…막으시는 것이라. - 베드로는 13,14절에서 권세자들에게 순복할 것을 권고한 데 이어 본절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죄명을 뒤집어 씌워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12절)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제도와 세상 권력자들에게 순복함으로 선행을 하는 것이 그들의 입을 막는 최선의 길임을 교훈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 -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로'은 아주 강한 표현으로 '몰지각한'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의(義)와 진리(眞理)에 대항하여 자신을 세우는 교만한 불신자들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쓰였다. 본절에서는 관사 '톤'( )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12절에 기록된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옳다. 이들은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나 하나님의 진리에는 무식한 자들로서 이성이나 지식이 없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비방을 일삼는 터무니 없는 말쟁이들이다. 이들의 입을 잠잠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에 맞서 변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선행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온갖 비방과 험담 그리고 박해 가운데서도 묵묵히 기독교 진리를 실천하며 행동으로 선행을 보여 주는 자세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가져야 할 자세임에 틀림없다.
2:16 자유하나…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자신의 '자유'에 대해 자부심과 확신을 갖고 있었다(갈 2:4). 그런데 전절에서 저자는 '복종'을 강조했다. 이에 따른 혼동을 이해시키기 위해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과 실현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해방되어 '진리'에 의해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요 8:32,36).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권세자들에게 대항하거나 자기의 악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자유를 방종과 혼동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세력과 죄,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단순히 복종해야만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누리는 참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복종할 때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역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가진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의 종된 자들이다(롬 6:17,22; 7:1-4).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으로가 아니라 세워진 권위들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타내져야 한다. 합법적인 제도에 순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법들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자유로이 준수되어야 한다.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 이제까지(13-16절)의 권면의 내용이 묶여지며 결론지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 물론 이방인은 '무식한'(15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고귀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고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느 누구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비록 죄로 인하여 일그러지며 심각한 손상을 입은 자들이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며 심지어 더할 수 없이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경하며'(티메사테)는 확증적 의미의 부정과거 명령법이 사용되어 단호하고도 결정적 원칙으로 세워놓는 듯하다(Robertson).
형제를 사랑하며. - 여기서 '형제'는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성도들은 먼저 주 안에서 한 식구된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갈 6:10). 특별히 여기서 '사랑하며'(아가파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여기서 '두려워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베이스데'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순종에로 이끌어주는 경외심과 존경심을 의미한다(고후 7:11; 벧전 1:17; 3:6).
왕을 공경하라. - 존경 혹은 공경은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부여한 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13절). 특히 그 대상이 네로와 같이 악한 사람일 경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 공경의 동기로서 강조되는 것이 특별히 필요하다.
2:18-25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
본 단락은 국가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한 앞 단락에 이어 가정 속에서의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2:18-37까지의 일련 기사의 전반부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 첫 번째 언급으로 가정 속에서의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한다. 이러한 언급은 바울 서신에도 나타나는데 바울 서신에서는 주로 종과 주인 모두를 향한 교훈이 주어진 반면(엡 6:5-9; 골 3:22-4:1), 본 단락에서는 종의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만 교훈되어지고 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서의 수신자들 중 상당수가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이러한 본문의 교훈은 좁게는 가정에서의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나, 넓게는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하여 고용주에 대한 피고용인의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이러한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인에 대하여 순종할 것을 권면하는데 그 순종의 동기는 주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야 하고 순종의 대상도 선한 주인만이 아닌 까다로운 주인까지도 포함함을 말한다(18절). 까다로운 주인과의 관계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인 바 이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인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2:19,20).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권면은 일방적으로 상전의 입장에서 상전들의 횡포를 옹호하며 하인들에게만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노예 제도가 사회의 제도로 인정되고 있는 당시 사회에서 노예 신분을 가진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최선의 것은 주인께 항의하고 당시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예 생활 중의 고난을 성도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는 계기로 삼음으로써 성숙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함을 교훈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신 목적이라고 말한다(21절).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죄가 전혀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의 고난까지 받으셨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구속을 위한 것이거니와 또 달리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인내함으로써 신앙이 성숙되어 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21-25절).
한편 가정에서의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본 단락은 오늘의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피고용인의 입장에 있는 성도들은 고용인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아첨하거나 비굴하게 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용인의 요구에 대해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순종을 통해 고용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순종하라는 것이다(12절; 마 5:16; 롬 15:1-6).
② 때로 사회생활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순간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억울함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함으로써 그러한 고난을 자신의 신앙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사 52:13-53:12; 마 5:18-48). 이는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행위로 보일지 모르나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함으로 이러한 억울한 핍박까지도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2:18 사환들아…주인들에게 순복하되. - 앞에서(13-17절) 성도가 사회 속에서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하여 권면한 저자는 이제 가정 문제에 대한 권면을 한다(2:18-3:7). 저자는 먼저 종들을 향한 권면을 하는데(18-25절) 이러한 권면은 바울 서신들에서도 많이 나타난다(엡 6:5-8; 골 3:22-25; 딤전 6:1,2). 이처럼 서신서들에 종에 대한 권면이 많이 나오는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 중 많은 사람이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과 종의 구별이 없이 한 형제라고 가르침으로 해서 많은 종들이 교회에 들어 왔고 이들 중에 자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해 가정과 사회의 문제가 야기될 뿐 아니라 교회가 박해를 받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저자는 종의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듯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한다. 한편 '사환들'로 번역한 헬라어 '오이케타이’( )는 일반적으로 종을 의미하는 '둘로스'보다는 제한적인 의미를 가진 말로 한 집안에서 주인의 권위 아래 있으며 집안 일을 돌보아 주는 몸종과 같은 신분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두려움'(포보스)은 인간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도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 - '관용하는'(에피에이케스)은 '공평하고 온유한', '이치에 맞는'이라는 뜻으로 70인역(LXX)에서는 이 말이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종들을 대하는 너그러운 사람들로 아마 그리스도인인 주인들이 이 부류에 속하였을 것이다.
까다로운 자들. - '까다로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콜리오스'는 문자적으로는 '구부러진', '비뚤어진'의 뜻으로 완고하고, 악하고, 불공평하며,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인 노예들은 이러한 주인에 대하여도 불평하거나 불순종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런 주인에게 순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 이제 베드로는 좀 더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 종의 자세를 교육한다. '애매히'(아디코스)는 '부당하게'라는 뜻으로 전절에서 나타나는 '까다로운 주인에 의한 고난'을 말하며, '받아도'는 '용납한다'라는 뜻으로 '~에 대하여 반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당시 사회에서는 노예에 대한 부당한 취급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 직역하면 '하나님의 양심을 통하여' 이다. 여기서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종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행위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자각 때문에 참는다면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행위임을 알려 준다.
이는 아름다우나.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투토 카리스'는 문자적으로 '은혜이다' 라는 뜻을 갖는다. 이것은 성도들이 애매한 고난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도 애매한 고난을 당하실 때 묵묵히 참으셨으며 이러한 행동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여기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였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우리는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지체 없이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맞서 싸우지는 않는가?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의 행동을 지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칭찬이 있으리요. - 전절의 내용과는 전혀 반대로 죄가 있어 그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죄를 짓고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때 그것 역시 참기 힘든 것이지만 그러나 참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신앙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칭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오스'는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단어로 '풍문', '보고', '영광'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벌 받을 짓을 하고서 매를 맞는 것은 '칭찬거리'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아름다우니라. - 다시 한 번 19절의 내용을 반복함으로 두 가지 고난을 뚜렷이 대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아야 할 고난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아름다우니라'로 번역된 말은 19절의 '아름다우나'와 같은 단어이다.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여기서의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에의 부르심이다.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또한 애매한 고통도 참고 견디는 인내로 훈련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하셨느니라. -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그람모스'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로 문자적 의미는 '사람이 모방하는 글씨 본'이다. 즉 서예나 그림의 대가가 보고 흉내내도록 제시하는 표본을 의미하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그와 똑같이 복제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은 인간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였다(마 20:28; 26:28). 동시에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하기 위한 모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고난당할 것을 내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분노와 수치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벧전 4:13,16). 왜냐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길이기 때문이다(롬 8:17).
2:22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 애매히 고난을 받는 삶의 표본(標本)이 되신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본절은 사 53:9의 70인역(LXX)을 인용한 것으로 '불법'을 뜻하는 헬라어 '아노미아'를 베드로가 '죄'를 뜻하는 '하마르티아' 로 대치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고통을 당할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다만 온당치 못한 처벌을 받는 종의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 원문에서는 '여호와의 종'이 다른 인간들에 대하여 무죄한 것으로 묘사된다.
궤사도 없으시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 휴레데 돌로스'를 직역하면 '궤사가 발견되지 않으며'라는 의미로, 여기서 '발견되다'란 의미의 헬라어 '휴레데'는 때로 '이다' 혹은 '되다'라는 단순한 동사로 쓰여진다. 그러나 이 단어는 비슷한 단어 '에이나이'와 가벼운 구분이 있다. 그것은 '에이나이'는 그 자체 안에 남긴 특질, 즉 본질을 나타내는 반면, '휴레데'는 그 본질이 시험을 통하여 입증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고난을 당할 만한 어떠한 거짓이나 잘못을 찾을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2:23 욕을 받으시되…위협하지 아니하시고. - 본절은 고난 받으시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사 53:7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두 번의 '아니 하시고'는 모두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계속 자극과 도전을 받으시면서도 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고 침묵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주어진 어떤 비난에도 되돌려 비난하지 않았으며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그들에 대하여 공격하지 않으셨다(마 26:65-68; 27:27-31).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 동사 '부탁하시며'(파레디두)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래서 무엇을 부탁하셨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자신을'부탁하셨다(Bigg). 또는 '그 사건의 재판'을 부탁하셨다(Bengel, Vincent, Hart)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Alford, Caffin). 셋째 의견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첫째나 둘째 의견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받았고 또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계셨지만 그는 오직 공평으로 심판하실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2:24 나무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쉴론'은 누가복음 23:31에서 볼 수 있듯이, 생나무가 아니라 본래 단순한 목재, 즉 나무로 만들어진 '교수대'나 '십자가 형틀'을 말한다. 베드로는 행 5:30과 10:39에서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십자가'의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Robertson).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신 21:23과 사 53:12을 결합하여 인용한 구절로서, 골 2:14와 같이 법률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Kühl) 대체적으로 제사적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드리시고 또한 제사장으로서 그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신 것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동사는 성경에서는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제사장과 죄를 담당하는 혹은 희생 제물에 대해 다같이 쓰이고 있다(히 7:27; 9:28; 13:15).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같이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갈 2:20). 여기서 '죽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게노메노이'는 '사라지다', '제거되다', '떠나다', '옮겨지다'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더 이상 옛 죄, 즉 범죄의 생활과 관계가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 사 53:5의 인용이다. '채찍'에 해당하는 헬라어 '몰롭스'는 매질로 인하여 육체에 남겨진 흔적 혹은 채찍 자국을 말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노예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육체의 흔적이다. 저자가 이 구절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죄인된 우리들의 영적인 상처가 나음을 받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의 이러한 표현은 노예로서 채찍을 맞은 경험이 있던 수신자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을 기록할 때 베드로의 눈에는 그 참혹한 취급을 받던 그의 주님의 몸이 눈앞에 보였을 것이다(Lumby).
2:25 전에는…잃었더니 이제는…돌아왔느니라. - 본절에서 저자는 '전에는…이제는', '잃었더니…돌아왔느니라'라는 2개의 대조적인 어구들을 사용함으로써 수신자들의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구원받은 후의 상태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이는 그들이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목자. - 성도들을 '양'에 비유한 것에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를 '목자'에 비유하고 있다. 많은 곳에서 예수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른다(요 10:11; 히 13:20). 본절에서 만은 독특하게 그리스도께서 '감독'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이 단어와는 다르게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목자'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진다(시 23:1; 사 40:11; 겔 34:23; 마 25:32; 벧전 5:4).
감독.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포스'는 목자와 거의 동의어로서 목자의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용어는 후에 교회의 주요 성직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으며, 바울의 서신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행 20:17,28; 빌 1:1).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가 장로들에 관하여 '목자장'(벧전 5:4)으로 불리운 것과 연관하여 볼 때 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감독은 지상의 교황이나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감독과 관련해서는 딤전 3장 연구자료, '교회 직분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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