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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두 짐승의 멸망
구속사적 개관
이제 본장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제 4-18장에 걸쳐 보도되 었던 현 우주와 역사의 결정적 종말이 최종 도래하기 직전에 범 우주적으로 상당 기간 진행될 말세의 대환난(大患難)에 대한 묵시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제 주의 재림과 사탄의 세력들의 멸망, 그리고 현 우주의 완전한 붕괴와 전인류의 부활 및 최후 백보좌 심판 그리고 마침내 현 우주의 완전한 갱신으로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일련의 폭발적 사건을 통하여 현 우주와 역사가 최종적으로 종말을 맞는 일련의 소위 대종말 사건, 즉 직접적인 역사 종말 사건이 새로이 개시된다. 즉 본장은 19:1-22:5에 걸쳐 전개되는 소위 '대종말 사건'에 대한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때로 표면적으로는 사탄의 세력과 사탄의 죄성에 물든 인간들이 야기시킨 무의미한 환난에 불과한 것 같았으나 기실은 이를 통하여 신천 신지(新天新地)를 도래시키시기 위한 일관된 섭리로 하나님이 주도해 오신 말세의 환난에 대한 묵시 기록을 마침내 일단락하고, 이제 결정적인 종말 사건 자체인 소위 '대종말 사건' 중의 첫 사건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장면에 대한 묵시를 보도한다.
먼저 전반부 1-10절은 지금 막 끝난 말세의 대환난을 통해 일단 현 세속 질서를 붕괴시키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천상의 찬양(1-5절)과 이제 곧 개시될 주의 재림과 그에 이어지는 일련의 대종말 사건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여 찬양 및 선포(6-10절)하는 묵시를 보도한다. 다음 중반부 11-16절은 주께서 마침내 천상의 군대를 이끌고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장대한 묵시를 보도한다. 끝으로 후반부 17-21절은 이제 한 천사의 선포처럼 재림하신 주께서 온 세상의 오염과 질고를 가져온 원흉이요 동시에 말세의 소위 7년 대환난 동안의 갖은 재앙도 원초적으로 야기시킨 사탄의 세력들 곧 두 짐승과 그의 추 종자들을 징 멸하시는 장면을 보도한다. 이 후반부 기사는 앞서 여섯째 대접 재앙으로 사탄의 영들에 의하여 일단 아마겟돈에 모여있던 사탄의 세력들과의 전쟁의 발호인 동시에 다음 제 20장 후반부인 7-10절에 기록된 곡과 마곡의 전쟁과 동일한 전쟁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즉 '아마겟돈 전쟁'이 곧 '곡과 마곡의 전쟁'인데 그것이 각각 16:12-16; 19:17-21; 20:7-10에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누어 묘사된 것이다.
이제 비록 묵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이라는 제한된 양식을 통해서나마 예수 재림의 전후 사건과 그 양상에 대하여 가장 선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본장이 주는 구속사적 의의는 크게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 재림 사건이 전구속사적 관점에서 갖는 의의이고, 둘째는 재림 사건 자체에 국한된 관점에서의 구속사적 의의이다.
그러면 먼저 이제 구속사의 종점인 역사 대종말의 결정적 개시인 주의 재림 기사 앞에서 다시금 구속사의 전개의 기본 구조를 요약하고 이런 기사가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교훈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나님은 전피조물의 대표로서 자유 의지(自由意志)를 가진 첫 사람 아담과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를 어길 경우 필히 죽을 것이고 이를 지킬 때에만 생명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하셨다(창 2:17). 그런데 인간은 이를 어겼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다(창 3:19). 또한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분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언약의 법(法)도 절대적으로 준수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절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였다(시 89:14; 요일 4:8,16). 이에 하나님은 그 법 자체는 일단 지켜서 인간의 죄의 대가는 치러지게 하시면서도 그 죄를 범한 인간 자체만은 죄를 회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서 다시금 영생을 얻을 새 기회를 주시기 원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른 존재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 언약의 법에 따라 요구되던 죄의 대가를 치르는 대신 인간은 회개하면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구속의 원리를 인간의 범죄 이후 새로 세우셨다.
그런데 그 대속 희생(代贖犠牲)을 할 자는, 즉 사람의 죄를 대신 질 회생자의 자격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흠이 없어서 전적으로 타인의 죄를 담당할수 있도록 완전한 인간이어야 했고, 또 반대로 인류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보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셔야만 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게 완전한 중보자(仲保者)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먼저 인간인 자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먼저 하나님이신 분이 완전한 인간이 되사 중보자로서 구속 사역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삼위 하나님 중 제 2위이신 성자 곧 우리 주 예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사 하나님(신성)인 동시에 인간(인성)이 되어 대속 희생을 치르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바로 이러한 인간 중 택한 백성 곧 성도(Saint)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사 그들의 구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시어 성도들이 당신을 믿고 회개하면 당신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게 하시고자 우리의 새 대표로서 성육신하시고 또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성도의 죄값이 대신해 치러지는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시고 마침내 하늘 나라에 승천하심으로써 먼저는 자신이 부활의 능력있는 절대자임을 보여 주시고 나아가 당신이 사랑하는 성도도 훗날 당신처럼 부활하여 천국에 임할 수 있다는 사실, 즉 구속의 결과 주어질 구원에 대해서까지 확중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구속 사역의 결과인 천국 구원이 곧 이루어질 것은 아니었다. 이제 오고오는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성도가 회개하고 중생하여 구속의 공로를 실제로 힘입어 천국 백성이 최종 확정될 그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보다 장구한 구속사가 다시 더 계속 전개되도록 섭리하셨기 때문이었다(합 2:3; 롬 2:4; 벧후 3:9). 즉 하나님은 과거에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한 주님의 초림을 약속한 구약(Old testament)을 주사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구약 구속사가 전개되게 하셨듯이(신 18:18,19; 시 40:6-8) 이제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초림하사 구속 사역을 일단 성취하심으로 결국 구약을 성취하신 후 다시금 주님이 재림하여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을 세상 끝날에 새 하늘과 새 땅에 개설된 천국을 통해 개시할 것을 약속한 신약(New testament)을 새로 주시고 이것을 중심으로 예수의 때로부터 세상 말일까지 신약 구속사가 전개되게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주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셨던 것이다(행 1:9).
이것은 장구한 구속사의 중간에 주께서 오시고 구속의 약속을 일단 성취하심으로 구속사의 최종 실현에 대하여 보다 뚜렷한 증거를 주심으로 죄에 오염되어 의심에 찬 인간이 구속사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 구원을 더욱 확고히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이었다. 따라서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매 현재는 주님의 구속 사역은 이미 성취되었으나 그 실제적 효력의 완전한 발효는 유보된 상태, 즉 천국이 이미 영적으로는 임했으나 아직 그 영육간에 온전히 실현된 것은 아닌 긴장의 상태인 일종의 과도기적 중간기라 하겠다.
한편 본문은 마침내 하나님이 구속사의 종점으로 정하신 때가 이르매 우리 주 예수께서 택한 백성의 구원과 새 세상의 도래를 위하여 역 동적으로 재림하사 실로 일거에 사탄의 악한 세력을 징멸하시고 전우주적 심쥰 법정을 개설하실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본문 말씀 앞에서 본문은 물론 성경 기사 전체를 동시에 조망할 때에 우리는 성경(the Bible)은 상호 한치의 모순없이 구속사의 전개 구조를 명료하고도 한결같이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먼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진리만을 보여 주는 증거의 하나인 동시에 역으로는 그처럼 성경이 신적 통일성을 가지고 제시하는 구속사의 진정성 곧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구속사가 전역사 속에서 도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계시에 근거한 전구속사적 소망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도 눈에 보이는 역사의 이면에서 현 역사의 종말과 새 역사의 도래를 지향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는 구속사의 실체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다. 오직 그럴 때만이 이 땅의 상황에 구애되지도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우리의 영원한 븐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임을 깨닫고 우리가 구원을 얻되 영생 복락의 절대 구원을 얻을 것을 확신하며 이 나그네 인생길을 실로 억누를 수 없는 환회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제 우리가 본문이 제시하는 재림(Parousia)의 양상 자체에 대해서만 집중해 볶 때에도 우리는 이에 곧 이어질 백보좌 심판과 구속사의 결정적 종점인 현 역사와 우주의 종결 및 신천신지와 새 역사로의 갱신과 직결된 주의 재림이 갖는 다음의 세 가지 중대한 구속사적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재림의 종말성을 제시한다. 즉 본장은 주의 재림은 그것이 일단 실시되면 더 이상의 지체없이 직선적으로 최후의 대심판과 현 우주의 종말과 갱신으로 직결될 것을 보여 준다. 둘째는 재림의 우주성을 보여 준다. 즉 주의 재림은 특정 지역 또는 이 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우주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고 또 전우주 만물 중의 피조물이 이에 동원되거나 아니면 재림 후 주님 앞에 노출될 것이다. 재림하시는 주 앞에는 피하여 숨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셋째는 재림은 그 목적상 이중성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즉 말세에 사탄의 핍박과 세상의 질고에 얽매어 허덕이던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는 최종 구원을, 사탄과 그의 악한 추종 세력에게는 최종 형벌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이상의 세 가지 재림 자체에 대한 본문의 교훈은 결국 우리에게 주의 재림에 대하여 이를 잊지 않고 근신하며 경건해야 하나 동시에 적극적으로 기대하며 소망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외울 말씀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9)
하늘의 기쁨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 준비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그리스도의 재림
11 ○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짐승의 멸망
17 ○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19:2,15 최후 심판의 10대 특징
1. 피할 수 없는 심판(암 9:1-4)
2. 영원한 심판(마 25:41)
3. 의인은 영생, 악인은 영벌을 받는 심판(마 25:46)
4. 이미 작정되어 있던 심판(행 17:31; 롬 2:16)
5. 선악간의 행위대로 행하는 심판(고후 5:10; 계 20:12,13)
6. 지체됨이 없는 심판(계 10:6)
7. 전인류에게 공평한 심판(계 16:5)
8. 참되고 거짓이 없는 심판(계 19:2)
9. 두렵고 맹렬한 심판(계 19:15)
10. 성부 하나님에 의한 심판(계 20:11-15)
원어연구-19:2, 더럽게 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프데이렌'( )으로서 '프데이로'( )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여기서 '프데이로'는 어떤 사물을 '못쓰게 하다', '파괴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살아있는 생 명체나 만들어져 있는 사물에 대해 외부적 영향을 가함으로 본래의 모습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에 대해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려서 생명을 없애는 것을 말하고(고전 3:17) 사물은 어떤 물리적인 힘을 가함으로 못쓰게끔 만드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단어가 도덕적인 측면에서 쓰일 때는 사람의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바른 가치들과 규범들을 허물어뜨려 본래의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잘못된 상태로 빠지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타락시키다'(고전 15:33). '부패시키다'(고후 11:3)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유적으로는 마치 나무 뿌리가 죽으면 그 나무 전체가 썩어지고 더러워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게 되면 그의 전인격도 파괴된다는 의미에서 '더러워지다'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롬 1:24; 고전 9:25). 또한 신앙적인 측면에서 거룩함을 상실하고 불의를 행한다는 의미도 가진다(갈 6:8).
한편 헬라어 문법에서 미완료 과거형은 어떤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에서 '프데이로'의 미완료 과거형인 '에프데이렌'은 도덕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계속해서 더럽게 하였다'가 된다. 즉 이는 본문에서 큰 음녀 곧 악한 사탄의 세력이 세상 사람들을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부패케 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신학용어-19:6-21 아마겟돈(Armageddon)
본문에는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단의 세력 사이에 있을 최후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곧 16:16에서 언급한 바 '아마겟돈 전쟁'이다. 그러면 이 최후 전쟁의 장소 '아마겟돈'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가?
1. 아마겟돈의 위처
본문에는 '아마겟돈'이 히브리 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 말이 히브리어로 비어져 있는 경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때문에 학자들은 이에 대해 매우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해석 두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므깃도와 관련시켜 므깃도 언덕(히, 하르 므깃돈), 또는 므깃도 땅(히, 아르아 므깃돈). 또는 므깃도 성읍(이르 므깃돈)을 가리킨다는 견해 이며 둘째는 집회의 산(히, 하르 모에드)이라는 뜻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먼저 므깃도(Megiddo)는 나사렛 남서쪽 161km 지점의 갈멜산 근처의 므깃도 멸 원에 위치한 성읍이었다. 이곳은 갈릴리 샤론 평야 남부와 이스르엘 계곡 사이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까닭에 드보라와 바락이 이곳에서 가나안 황을 죽인 사건 이 후(삿 5:19) 약 200회 이상 전쟁이 일어났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므깃도가 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장소였던 까닭에 이곳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사탄의 세력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있을 전쟁터의 상징으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편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지리학자도 므깃도 산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즉 므깃도 산 자체는 평원지대에 위한 고대 므깃도 성읍 근경의 한 평범한 야산이 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마겟돈'이란 말이 단순히 상징적으로 '집회의 산'이란 뜻을 갖는다는 견해는 사 14:13에 따른 것이다. 그곳에서 '북극 집회의 산'이 '아침의 아들 계명성' 곧 사탄의 세력이 집결할 장소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요한이 이에 근거하여 요엘서에서 언급한 바 구원받은 성도들이 피할 성산(聖山)이며 악의 세력을 쳐부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는 산인 '시온산'(욜 2:32; 3:16,17,21)과 대비하여 악의 세력이 집결하는 장소로 '아마겟돈'을 언급했다는 견해이다. 이는 사도 요한이 본서에서 사용한 많은 표현이나 이미지를 요엘서에서 따오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교적 견실한 지지를 받는 견해이다(계 9:13-11:14; 14:14-20; 16: 12-16).
어쨌든 '아마겟돈'은 어떤 특정 지역이나 장소를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탄의 세력을 패망시킬 최후의 전쟁터에 대한 상징적인 장소로 봄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마겟돈 전쟁의 결전 장면이 직접 기록되고 있는 본문에서 아마겟돈의 위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2. 아마겟돈 전쟁 예언의 의의
말세에 사탄의 세력들이 일단 아마겟돈에 집합하였다가 예수의 재림 직후에 그리스도의 군사들과 대적하여 이를 통해 마침내 사탄과 그의 온 세력이 멸망되게 되는 이 아마겟돈 전쟁은 곧 곡과 마곡의 전쟁이기도 하다. 어쨌든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묵시 기록들은 실로 말세에 범세계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여 지배하게 될 거대한 사탄의 세력의 등장과 이를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능력으로 쳐부수실 것이라는 사실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는 곧 말세의 범우주적 최후 대전쟁에 대한 성도들의 구속사적 각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그 최후 대전쟁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최종 승리로 귀결될 것을 확신케 하여 만세대의 성도들에게 궁극적 위로와 소망을 주는 역 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주요주제-19:11-16 그리스도 재림의 목적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 '재림의 목적' 참조
19:1-10 하늘의 기쁨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준비
제 4-18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처종 도래할 대종말 직전에 이 세상에 있을 소위 말세의 대환난, 곧 인(印) 나팔 대접이라는 삼대 칠중 재앙 기사가 종결되었고, 그 삼대 칠중 재앙 사이 사이에 삼대 칠중 재앙과 같이 일어나는 제반 사건들을 일곱 개의 삽경(橋景)으로 병행 설명하는 것도 종결되었다. 따라서 최종적인 대종말 직전에 있을 사건들에 관한 기록이 종결되었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재림. 악의 세력의 멸망, 현우주와 역사의 붕괴, 전인류의 부활, 최후의 심판 등과 같은 마지막 때에 폭발적으로 일어날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들에 관한 기록이 언급될 차례이다.
그런데 그러한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들이 언급된 19:11-20:15을 기술하기에 앞서 저자는 그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들이 기록되는 시점 앞에 그 서곡(序摘)에 해당하는 찬송을 배치시켜 놓는다. 즉 저자는 모든 불신자들이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대심판으로 말미암아 있게 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의 찬란한 승리를 언급하기에 앞서 그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그 앞에 서곡의 팡파르를 울려 놓음으로써 최후의 승리의 장(章)을 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문은 이후로 있을 그리스도의 대승리에 대한 서곡일 뿐만 아니라 앞서 17:1-18:24에서 언급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성도의 즐거운 노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초반부에 큰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에 대한 찬양의 내용이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절). 게다가 본문은 이런 내용 외에도 형식적으로는 18:20에 상응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어 있는 마지막 일곱 번째 삽경 17:1-18:24에 연결된 것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 찬송은 동일한 무리에 의해 시작하여(1,6절)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에(5,10절) 하나의 통일된 찬송으로 보아야 하고, 하나의 찬송으로 된 본문은 전체적으로 볼 때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찬송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에 대한 찬송의 의미를 더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본문을 일곱번째 삽경의 말미(末尾)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본문은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심판인 바벨론 심판을 찬미하는 동시에, 그 사실을 통해 이제 있을 그리스도의 영광된 승리를 찬송하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서곡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대심판을 언급하는 부분인 본서의 세번째 본론부, 곧 19:1-22:5의 첫 단락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본서에서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본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처음 내용은 일곱번째 삼경에서 언급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것을 받아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모든 성도들은 그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말하고 있고(1-5절). 두번째 내용은 하나님에서 심판을 성취하시고 만국을 통치하시는 때가 왔으므로 성도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그러한 기쁨과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말한다(6-10절). 이렇게 볼 때 본문은 결국 재차 이야기하지만 최종적인 대종말이 있기 직전에 이 세상에 내린 삼대 칠중 재앙 심판이 성취되어 이제 마지막 최후의 승리가 눈 앞에 다가왔으므로 오는 그 최후의 승리를 송축하는 동시에 모든 성도들은 그 최후의 승리를 기러하고. 승리의 잔치를 준비하며, 승리를 성취케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또 강조해야 할 중요한 사항인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배이다. 온 우주에서 피조물된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은 오직 그만이 창조주되시며 전능자되시고 심판자되시며, 영원하시며 승리자되시는 한 분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이다. 모든 성경 말씀이 증거하듯이 그 외의 길은 모두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출 20:3-6; 신 5:7-11).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 -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정체가 본문에는 밝혀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4절)을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5:11)의 무리일 것으로 추정한다(Greijdanus, Ladd, Walvoord). 이 추측이 옳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6-16장)이 시작될 무렵에 하나님을 찬미하였듯이 이제 그 재앙이 종료되는 시점에 다시금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본절의 무리를 7:9와 연관시켜 성도들의 무리로 본다(PIUmmer). 그리고 이 견해는 18:20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매우 타당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곳에 보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성도들이 즐거워하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 바로 뒤에 언급되고 있는 승리에의 찬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양 견해는 나름대로 모두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한 견해만을 취하기 보다는 양 견해를 종합하여 본문의 무리를 천사와 성도의 무리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그렇다면 본문은 음녀 바벨론을 멸망시킨 하나님의 심판의 승리에 대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찬양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할렐루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할렐루이아'( )는 히브리어의 '할렐루야'( )를 음역한 것으로, 이 낱말의 뜻은 '주를 찬송하라', 또는 '여호와를 찬송하라'이다(시 111:1). 그리고 이 낱말이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곳은 오직 본장뿐이다(1,3,4,6절). 그러나 유대인들이 구약 시대부터 회중 예배시나 개인적인 찬양시 이 '할렐루야'를 외쳤듯이(시 104-106, 111-13, 115-117, 135, 146-150편) 초대 교회 성도들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찬양의 환호인 '할렐루야'를 즐겨 외쳤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말은 '아멘'(Amen)과 더불어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사실상의 공통어가 되어 있다. 이 낱말에 관한 자세한 것은 시편 146-150편의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세상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며 악인을 심판하시는 일이 완전 성취될 것인데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실로 삼위 하나님 이외의 그 누구도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일차적으로는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악에 대한 심판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참되고 의롭다'는 것은 거짓과 불의가 없다는 의미로서 한마디로 정당하고 공의롭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악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하고 공의롭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계 15:3 참조.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 '는 모든 세속 도시의 어미인 바벨론을 지칭한다(17:1). 이 바벨론이 하나님께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과는 계 17:5-7; 18:3,23,24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 계 18:24 참조.
19: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 '그 연기'란 바벨론이 불타 멸망당할 때 나는 연기를 지칭한다(17:16; 18:9,18). 이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바벨론이 끝없이 불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히 멸망한다는 의미이다. 즉 본문은 음녀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하여 지옥불에서 영원히 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하나님께 경배히여. -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광경에서 천사의 무리와 더불어 자주 나타나는 존재들이다(7:9-12; 11:15-18; 15:3,4). 이 중 '이십사 장로'는 신구약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계 4:4 주석 참조. 그리고 '네 생물'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계 4:6 주석 참조. 이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은 천사들과 성도들의 찬미(1-3절)에 화답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
아멘 할렐루야. - '아멘'(Amen)에 관해서는 계 1:6의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할렐루야'(Hallelujah)에 대해서는 1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아멘과 할렐루야가 결합된 형태로 사용된 것은 신구약 성경에서 본절이 유일한 곳이다.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 '보좌'는 하나님이 앉아 계신 곳이므로(4:2) 이 음성의 주인공이 하나님(Rist)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음성의 주인공이 본절 끝에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말했다고 보기에는 어색하기 때문이다(Lenski). 그러므로 학자들에 따라선 이 음성의 주인공을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둘러서 있던 24장로 중의 하나거나(Plummer) 네 생물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Ladd).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 -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이란 선지자와 전도자와 같은 하나님 의 특별한 일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론대소하고. - 문자적 의미는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누구든지'라는 의미이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 이 말은 '할렐루야'라는 낱말을 풀이한 것에 해당한다. 1절 주석 참조. 본문은 하늘 보좌에서 난 음성의 주인공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찬양할 것을 노래로서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허다한 무리‥‥많은 물 소리‥‥큰 뇌성도 같아서. - 본절 이하 8절까지의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는 명을 받은 성도들(5절)이 행한 찬송이다. 성도들은 보좌로부터 들리는 음성에 의해 찬양하라는 말을 듣자(5절) 아주 큰 음성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편 본절 이하가 이와 같이 전절에 이어서 계속되는 성도의 찬양인데도 불구하고 '또 내가 들으니'라는 문구로 본 찬양을 앞의 찬양과 구분시킨 것은 두 찬양을 부른 이들은 같으나 그 내용이 앞의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그 승리에 관한 것이고 뒤에 것은 승리로 인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관한 것으로서 서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 사탄의 결박,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과 그 영원한 통치를 내다보면서 그것에 관해 노래한 것이다(Ladd, Greijdanus). 즉 성도들은 세상에서 잠시나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나(18:24) 이제 곧 그러한 일순간의 사탄의 지배는 지나가고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므로 본문은 그러한 하나님과 궁극적 통치를 미리 내다보고 노래한 것이다.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 본문은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 의하면 남녀가 약혼을 한 후에 일정한 기간을 보내고 나서야 혼인 예식을 거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약혼 기간 중이라도 두 남녀는 부부로서의 합법적인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이렇게 지내고 난뒤 마침내 혼인 예식을 올리는 날이 되면 신랑은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식을 치르고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마 9:15 주석 참조. 따라서 '어린양되신 그리스도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말은 이미 자신의 피로써 성도들을 값주고 사서 자신의 영적 약혼녀로 삼은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약흔녀인 성도들을 신부로 맞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들일 때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Hendriksen). 한편 선지자들은 일찍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표현하였거니와(사 54:5,6; 62:5; 렘 3:9; 5:7; 23:14; 겔 16:6-14; 호 2:19) 예수께서도 친히 자신을 영적 신부인 성도들의 신랑으로 비유하셨고(막 2:19),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하고 있는데(고후 11:2; 엡 5:22-27) 그 이유는 부부 관계가 가지는 하나됨, 독점적 사랑, 책임과 의무 등을 통해 하나님과 성도간의 하나됨, 사랑, 책임과 의무 등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신부가 몸단장을 하듯이 성도들도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정절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행실의 열매를 예비하여야만 한다(8절). 본절은 그러한 신부의 예비가 끝난 것으로 모사해 주고 있다.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에게 허락하사. - 본절에는 '허락하신' 주체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주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믿고 힘입는 성도들에게 의롭다 칭하시사 '의의 옷'을 입게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롬 3:23, 24). 한편 이처럼 성도들이 의의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그같은 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22:1-14).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 세마포는 고운 삼으로 잔 옷감으로 희고 빛이나 고급 의복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계 18:12 주석 참조. 본서에는 이 세마포를 하늘의 24장로들과(4:4) 천사들과(15:6) 하늘의 군대들이 입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14절). 즉 이 옷은 의롭고 정결한 하늘 시민들만이 입는 옷을 상징한다. 따라서 어린양의 신부인 성도들이 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성도들이 완전한 하늘의 시민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 옷은 음녀 바벨론이 입고 있던 자주 빛과 붉은 색 옷과 대조된다(17:4). 음녀는 각종 죄악과 사치로 물들인 붉은 옷을 입었으나 하늘의 시민인 성도들은 깨끗하고 영광스러운 의의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이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 세마포에 대한 요한의 이 부연 설명은 성도들이 자기의 착한 행실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게 되는 것은 본절 초두에 언급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통해 성도들에게 입도록 허락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 부연 설명을 첨부한 것은 성도들이 자기의 착한 행실의 구원을 성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롬다 인정받은 성도들이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결하게 살았다는 뜻이며, 그렇게 산 삶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았다는 의미이다.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 본절의 천사 역시 그 정체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이 천사는 요한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었던 그 천사(17:1) 이거나 제 10장에서 책을 들고 나타났던 그 천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천사가 누구인지 하는 것은 본문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천사가 요한에게 기록하기를 명함으로써 그 기록할 내용이 매우 중요한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불변하고 참된 말씀이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Ladd), 실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구원을 입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이 복은 '본서에 언급되고 있는 일곱 번의 복 중에서 네번째 복이다(16:15). 한편 여기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란 주를 영접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고도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그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는다는 것은 그러한 축복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입어 구원에 참예한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에게는 복이 있는 것이다. 혼인 잔치가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리이듯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할 성도들의 천국 생활은 실로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21:4) 기쁨의 나날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 천사가 요한에게 한 이 말은 일차적으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참되다는 뜻이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본서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따라서 반드시 그 모든 예언의 말씀들은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재차 선언하는 것이다(1:2; 17:17; 21:5).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내가‥‥경배하려 하니‥‥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 요한이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을 들려준 천사(9절)에게 경배하려다 제지당한 이 사건은 22:8,9에서도 반복된다. 이 사건에 대하여 일부 신학자들은 요한의 이 행위를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 유행하던 천사 숭배 행위와 결부시키기도 하고(Lighooot, Rist), 요한이 천사를 그리스도로 오인하여 경배하려 했거나 아니면 당시의 상황이 너무 장엄하고 주어진 계시의 말씀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요한이 거기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경배하려 했다고도 한다(Afford, Bengel, Vitringa, Wordswoth, Plummer).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요한은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한 경고를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14:9-12)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를 경배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죄를 범하기 쉬운 존재인가를 분명히 일깨워 준다. 사실 고넬료도 베드로를 경배하려는 실수를 범했고(행 10:25,26),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제사를 드리려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행 14:13-15).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고 있는 요한마저도 그러한 잘못을 범할 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대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 한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아니라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스스로가 영적으로 깨어 경성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계시를 직접 받은 사도도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자들이야 얼마나 쉽게 미혹되어 넘어지기 쉽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깨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지혜와 눈과 굳은 의지를 길러야 할 것이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 본절을 풀이하면 '예수에 대한 증거가 성령을 통해 증거된다'는 의미이다. 천사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천사 자신은 단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예수를 증거하는 요한과 동일한 하나님의 종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2:9). 즉 천사는 자기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든 자들과 동일한 역할을 맡은 자이므로 자신을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요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Plummer).
19:11-16 그리스도의 재림
최종적인 대종말 직전에 이 세상에 있을 소위 말세의 대환난에 관한 모든 기록을 제 4-18장에서 언급한 뒤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을 기록하기에 앞서 앞단락인 1-10절에서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찬송과 및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준비에 관한 찬송을 통해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가 반드시 있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동시에 그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가 보다 더 영광된 승리가 되도록 멋진 서곡(序曲)을 울려준 저자는, 이제 본단락에서는 본격적으로 최후의 승리를 실제로 획득하기 위해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다.
본문에 나타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탔다. ②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다. ③ 공의로서 악의 세력과 싸운다(이상 11절). ④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 ⑤ 머리에 여러 면류관을 쓰셨는데 그 중 하나에는 자기만이 아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이상 12절). ⑥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적을 무찔러 그 옷에 적의 피가 묻어있다(1,7절). ⑦ 진리의 말씀으로 악인을 심판하신다. ⑧ 친히 악인들을 징벌하신다(이상 15절). ⑨ 왕중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16절). ⑩ 그 뒤에 자기와 같이 승리를 상징하는 백마를 탄 거룩한 하늘 군대들을 거느리고 계신다(14절).
이상의 모습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악의 세력을 완전히 박멸하시기 위해 권능과 군대와 명분을 가지고 오셔서 철저하게 악인을 심판하시는 심판주(審判主)시라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재림의 주님은 심판의 주님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한편 재림의 주님께서 이처럼 악인을 멸하신다는 내용은 이미 12:5에서 예고된 것으로 최후의 추수(14:14-20) 및 아마겟돈 전쟁(16:14,16)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한편 본문은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막 16:19; 행 1:9) 반드시 다시 오셔서 자기를 따르지 아니한 악인들을 멸하시고 자기를 따른 자들을 하늘 나라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우리는 딴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구주되신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그가 하신 가르침을 따라 그의 구원하심을 믿고(요 11:25,26) 의롭게 살므로 말미암아(요 14:21,23) 주께서 재림하실 때 주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구원의 대상이 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도록 하자(마 25:14-30)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 '또 내가‥‥보니'란 다시금 환상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됨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전에 하늘의 문이 열린 것(4:1)과 하늘의 성전이 열린 것을 보았었다(11:19; 15:5). 그에 이어 이번에는 하늘이 열린 가운데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군대를 이끌고서 재림하실 채비를 갖추고 계신 광경을 보게 된다(Clarke). 그리고 이것은 바야흐로 사탄의 세력이 패망하고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대주재로 군림하실 하나님의 최후 심판날이 드디어 도래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말하자면 이제 소위 말세의 대환난은 완전히 끝나고 이 세상이 멸망할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들이 일어날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세상의 최후를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 본서에서 '흰말'은 싸움에서의 승리자, 곧 정복자가 타는 말을 상징한다. 계 6:2 주석 참조. 그러나 계 6:2의 정복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반면 본문이 말하는 이 정복자는 일전에 죽임을 당했던 어린 양이요(5:6), 만국을 다스리며 그들을 질그룻 깨듯이 심판하실(2:26,27)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사탄의 세력을 멸하시고 불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고 계심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충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피스토스'( )로 이 말은 '신실한 자', '충성된 자'란 뜻이다. 그리고 '진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레디노스'( )로 '참된 자', '진정한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신실되이 행하는 자로 모든 인간에게 참된 구주가 되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백마를 탄 자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이처럼 그분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며 온갖 불의에 맞서 싸운다는 본문의 설명이 잘 뒷받침해 준다. 왜냐하면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가운데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자격과 능력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5:1-7). 한편 본문은 재림하시는 주님이 어떠한 목적에서 오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주님이 재림하시는 목적은 바로 악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그 눈이 불꽃 같고. - 1:14에 묘사된 주님의 모습과 동일하다. 이는 곧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전지성과 통찰력을 나타내주는 표현으로,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실 주님이 이러한 모습으로 재림하시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 이 면류관은 왕들이 쓰는 면류관이다. 주께서 이처럼 많은 왕의 면류관을 쓰신 것은 그가 왕중의 왕임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모든 만유의 지배자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 이 이름은 그리스도의 새 이름으로(2:17; 3:12; 14:1)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절대적 주권자 되심과 관계된 이름인 것같다. 계 3:12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이름을 그리스도 외에 알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말은 그 이름이 감추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이름의 의미는 감추어진 비밀로서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사람들에게 밝혀질 것으로 여겨진다(Johnson).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 몇몇 학자들은 이 피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이해한다(Origen, Hippitus, Andreas, Mounce). 그러나 사 63:3에 보면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되어 있다. 만일 본서 저자가 이 이사야의 글을 염두에 두고 '피 뿌린 옷'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본문의 '피'는 그리스도 자신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진멸할 때 옷에 묻은 원수들의 피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Clarke, Ladd, Moffatt).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때 전자보다는 후자의 견해가 매우 타당성을 가지고 있고 전체 문맥과도 어울린다. 따라서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뿌린 옷에 묻은 그 피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가 아니라 악인들을 진멸할 때 묻은 피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리라. -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호 로고스 투 데우)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의 이름에 적용시킨 것은 사도 요한의 저작에서만 보인다(요 1:1,14; 요일 1:1).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본서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확신한다(친ford, Plummer, Vincent, Barclay). 한편 이 이름은 12절에 언급된 그리스도밖에 아는 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비밀스런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 '만유의 주'(행 10:36), '교회의 머리'(엡 4:15) 등과 같은 그리스도의 여러 칭호 중 하나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구속 계획을 구현하실 자이 심을 나타내 주는 칭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成肉身)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또한 본장이 묘사해 주고 있는 것처럼 세상 끝날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인데 이와 같은 모든 하나님의 섭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될 것이라는 의미가 이 이름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Hendriksen). 그러나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이 이름을 고찰한 것이고 본절은 이러한 의미들 중 특별히 요 12:48에 비추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심판하실 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그를 따르더라. - 일단의 학자들은 이 군대가 천사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군대라고 주장한다(Rist, Barclay), 그러나 그보다는 천사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포함하는 군대라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Alford, Plummier, Charles). 왜냐하면 이들이 입은 '깨끗한 세마포' 옷 차림이 성도들의 옷 차림(8절)과 부합되며, 17:14에 의하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 본문이 말하는 이한 검이란 악인을 심판하시는 말씀을 지칭한다(사 11:4; 요 12:48; 살후 2:8).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거니와, 끝날에는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만국을 치겠고‥‥철장으로 다스리며‥‥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 본문에 열거되고 있는 세 가지 내용은 모두 악인을 멸하시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이 세 가지가 반복된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철저성과 완정성을 나타내 주기 위함이다. 한편 '만국을 치는 일'은 사 11:3 이하를. '철장으로 다스리는 것'은 시 2:9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일'은 사 63:1-6을 각기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것에 대해서는 계 2:27 주석을,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에 대해서는 계 14:19의 주석을 각기 참조하라.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바 있는 어린 양의 이름이다(17:14). 그런데 이 이름이 옷과 다리에 쓰여 있다는 본절의 표현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승마하는 자가 입는 승마복이 외투와 다리를 덮는 덮개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Alford). 다시 말하면 주님은 백마를 타고 계시므로(11절), 주님이 입고 계신 옷은 전투용 승마복일 것이며, 따라서 그 옷은 외투와 다리를 덮는 덮개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그 외투와 다리 덮개에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Ladd).
19:17-21 짐승의 멸망
본문은 소위 말세에 이 세상에 임할 삼대 칠중 재앙이 집행된 후, 그 뒤에 올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들을 설명하는 본서의 본론 제 3부인 19:1-22:5 안에서 그리
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아마겟돈 전쟁에서 멸망할 짐승과 및 그의 추종 자들의 파멸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대와 짐승의 군대의 싸움에 관한 묘사는 그 싸움의 과정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결과만이 언급되어 있다. 즉 본문은 싸움의 과정은 전혀 묘사하지 않은 채 곧바로 하늘의 새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한 악인들의 시체를 먹으라고 하는 천사의 선언으로 그리스도의 군대가 일방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암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17,18절). 아마도 사탄의 군대는 그리스도의 군대와 비교할 때 적수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군대의 승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저자는 의도적으로 기록하기에 무의미한 전쟁의 과정에 관한 묘사를 생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이렇게 악의 세력의 대패가 묘사된 뒤에 악의 세력의 대장들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16:13,14)가 잡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19,20절), 그들을 따르던 불신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뒤이어 묘사되면서 본문은 마감된다(21절).
한편 이러한 내용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악의 세력은 그들이 이 땅에서 아무리 강한 권세와 무기를 가지고 세상을 지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종국적으로 패망할 것이며 또한 그 권세와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뭉쳐지고 무장된 거룩한 군대 와 비교하면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군사된 우리는(딤후 2:3,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탄과 그의 세력은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현재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인내로써 극복하며 믿음을 굳게 지켜 나가자.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실 그리스도의 승리에 우리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참예하게 될 것이다(2:26,27; 요 16:33).
19: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한 천사가 해에 서서. - 이 천사가 어느 천사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해에 섰다'는 것은 해가 떠 있는 자리, 곧 공중에 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큰 잔치. - 이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9절)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하늘 군대 및 사탄의 세력이 대결한 전쟁(19절)에서 사탄의 세력이 패망하고 그 시체가 널려 새들의 밥이 되는 잔치이다(18절). 천사는 공중 한 가운데 서서 이 잔치에 새들을 큰 소리로 초청한다(18절). 그러나 이 내용은 문자 그대로 그럴 것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악인들이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악인들이 철저히 패망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비유이다.
19: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왕들‥‥장군들‥‥장사들‥‥자유한 자들‥‥종들. - 6:15의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도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와 같은 표현으로 땅에 사는 모든 계층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다 일컫는 표현이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서 사단의 편에 섰다가 그리스도와의 전쟁에서 죽임 당한 모든 불신자들을 지 칭한다.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말탄 자와‥‥전쟁을 일으키다가. - 본절의 '짐승'은 13:1-10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으로 묘사된 그 짐승이다. 그리고 땅의 임금들은 세상의 왕들로 그 짐승을 추종하는 세력들이다. 계 17:12,13 주석 참조. 우리는 이미 앞에서 여섯째 나팔 재앙이 부어질 때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어린 양과의 최후의 결전을 위해 세상의 모든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는 광경을 보았다(16:12-16). 그때 우리는 또한 그 전쟁이 준비만 되었을 뿐 종결되지 아니한 것도 보았다. 그 종결이 이제 일어나고 있다. 즉 본문이 말하고 있는 전쟁이 바로 그 아마겟돈 전쟁인 것이다. 이 아마겟돈 전쟁에 대하여서는 본장 자료노트, '아마겟돈 전쟁'을 참조하라. 한편 말탄 자와 그의 군대는 11절과 14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와 하늘의 군대를 말한다.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짐승‥‥거짓 선지자‥‥이적으로 미혹하던 자. - 여기서의 '짐승'은 19절의 '짐승'과 동일한 짐승으로서 적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는 13:11-18에서 두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 두번째 짐승은 첫번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받은 이적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고 그 우상을 섬기도록 하였으며 또 자기의 표를 사람들에게 새겨 세상을 통제하였다(13:14-17). 그러므로 결국 본절이 말하고 있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제 13장의 두 짐승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이 두 짐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권세를 빼앗길 위험을 느끼고 세상의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도와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16:12-16). 그러나 정작 그 결전의 날이 되자 이들은 그리스도께 패 망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불는 못에 던지우고. - '유황불 붙는 못'은 지옥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지옥은 종종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으며(마 5:22; 18:9; 막 9:43). 유황불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14:10). 따라서 이 '유황불 붙는 못'은 악한 영들이 일시적으로 갇혀 있는 장소인 무저갱(9:1,2,11; 11:17; 17:8; 20:1,3)과는 다른 영원한 형벌의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 '최후의 심판' 참조. 그러므로 두 짐승이 산 채로 그 못에 던지움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 완전한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뜻한다(Lenski).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 '그 나머지'란 두 짐승을 제외한 짐승의 추종 세력, 곧 땅의 임금들과 땅의 백성들이다(19절). 이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15절)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새들의 밥이 되는 처참한 형벌을 받는다.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에 의해 죽임 당했다는 말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불신자들이 주님의 공의의 말씀에 의해 그 행위대로 보응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처해지게 된 것(20:11-15)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15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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