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章 기 인 상 봉 (奇 人 相 逢)
유복(儒服)차림에 두툼하고 묵직해 보이는 팔척장신(八尺長身)의 청년.
부리부리한 호안(虎眼)과 태산준봉(泰山俊峰) 같이 툭 튀어나온 코며…… 그야말로 기개(氣槪)가 헌앙(軒昻)한 장부(丈夫)였다.
다만 입가에 어린 얄팍한 미소가 그의 성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예시하고 있었다.
이 청년의 곁에는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두 소녀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녀들 중 우측의 소녀는 노란 비단 옷에 금빛찬란한 명화대(明花帶)를 두르고 발에는 당혜(唐鞋)를 신고 있었다.
화사한 차림새에 상냥한 느낌을 주는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채에 화월잠(花月簪)을 꽂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좌측 소녀의 서늘한 봉목(鳳目)에 움푹패인 보조개 등 귀엽고 시원스런 아름다움은 꽉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이들은 부영폭포 입구에서 낙양일색 팽지연을 기다리는 북일월문(江北日月門)의 하충, 하미미 남매와 천수공녀(千手公女) 유화영(兪華英)이었다.
지나치던 유람객들이 이 수려한 일남이녀에게 자주 시선을 던졌다.
개중에는 추파를 던지는 몰염치한 남녀들도 있었다.
이때 강북월녀(江北月女) 하미미(河美美)가 섬섬옥수를 치켜들었다.
저기…… 연언니가 오고 있어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는 하충의 눈빛이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태검장의 팽낭자가 틀림없군.
사뿐히 걸어오는 팽지연의 용모는 주위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일남일녀에 다가온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먼저 인사했다.
소매(小妹)가 제일 늦었군요.
유화영이 재빨리 양손을 그녀의 겨드랑이에 끼워 넣어 간지럽혔다.
지연이는 갈수록 더 예뻐지네. 이러다간 삼 년 후에 개최되는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에선 적수가 없어지는 거 아닐까?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
무림에 몸 담은 여협(女俠)들 중 미색(美色)과 기예(技藝)가 가장 출중한 이를 뽑는 이색적인 군웅대회다.
이 대회는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항주에서 열리는데 초기에는 단순히 용모의 아름다움만을 겨루는 것이었고 규모도 작았다.
이것이 대규모로 시행케 된 것은 이십 여 년 전이다.
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강호…….
사소한 시비에도 목숨을 거는 무림인의 이목을 집중하기 위해서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모여 짜낸 묘안이 천하군웅대회 (天下群雄大會)!
당시 이 대회에는 강호 대소문파(大小門派)의 장문인 및 제자들과 무림세가(武林世家)의 고수들 등 수만 명을 헤아리는 군웅이 참석하였다.
몇 십 년간 은거하던 이인들까지도 관심을 가졌으며 정(正), 사(邪)의 구분이 없이 대결을 벌이던 이 대회에서 논의된 것 중 하나가 항주성의 미녀 선출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강호 평화를 지향하는 대회의 목적에 걸맞는 의식이 아닐 수 없었다.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그 명칭을 정하길 강호명화대회(江湖名花大會)…….
대회를 주관하는 이들로는 당금 무림을 이끌고 있는 정사 양파의 수뇌들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이 년 후에 정파(正派)인 구파일방의 장문인 열명, 사파(邪派)와 녹림(綠林)의 거두 일곱 명, 중원의 남칠북육(南七北六) 십삼 개 성에서 추대된 무림명숙 십삼 명이 주관하는 첫 번째 대회가 치루어졌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뽑힌 네 명의 재녀에게 각기 호칭 주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강호제일화(江湖第一花).
중원명화(中原名花).
강북화(江北花).
강남화(江南花).
이 대회는 천하군웅대회의 압권을 이루었다.
강호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세인들의 지대한 호응과 관심까지 끌어모았으니 그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겠는가!
이후 오 년마다 강호명화대회가 개최되었고 지난 네 번의 대회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었으나 매번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 오차 강호명화대회는 삼 년 후에 개최되며 그 장소는 동정호(洞庭湖)을 끼고있는 하남성(河南省)의 악양(岳陽)! 그러나…….
팽지연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표정이 묘했다.
천수공녀의 지혜와 아름다움은 천하가 알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욕심을……킥…킥….
이때 하미미가 향음(香音)을 토해냈다.
두 언니 모두 양보할 생각이신 모양인데 그렇다면 강호제일화의 영예는 욕심 많은 소매 차지가 되겠네요.
그녀의 치기어린 말투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호호… 호호호…….
세상의 어떤 시름도 섞이지 않은 밝고 명랑한 웃음들…… 듣는 이들의 마음마저 청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한 소년만에게 그렇지 못했으니, 비지땀을 흘리며 겨우 뒤따라 온 냉한웅이었다.
강북일남 하충은 거만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너는 누구냐?
…….
냉한웅은 묵묵히 팽지연을 응시하였다.
팽지연은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외쳤다.
어서 대국사에 다녀오지 않고 왜 자꾸만 냄새 맡은 강아지마냥 따라 오느냐?
그녀의 가시 돋힌 말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듣더라도 절로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으나 무심(無心)…….
냉한웅의 표정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곁에 있던 천수공녀 유화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연이 답지가 않군. 어째서 저 소년을 저리도 가혹하게 대하는 걸까?
유화영은 천중사기 중 지혜가 뛰어나기로 이름난 천수제갈의 여식이다. 따라서 총명이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의혹을 품었으나 하충의 냉랭한 음성이 이런 생각마저 깨버렸다.
이놈아, 팽낭자의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대국사로 떠나거라.
냉한웅은 지쳐 쓰러질지경이었으나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등에 진 음식물이 무거운 듯 휘청거리자 유화영은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무거운 모양인데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떠냐?
냉한웅의 발길이 즉시 멈추었다.
자신이 지고있는 보퉁이의 음식물은 그들 남녀가 먹을 것인데 뭐하러 대국사로 가져 가는가?
그는 서둘러 음식물을 꺼내 놓으려 했다. 하지만 팽지연의 음성은 또 그를 괴롭혔다.
우리 더러 대신 그것을 지키란 말이냐? 네가 그걸 갖고 대국사에 들려다가 오너라.
팽지연은 냉한웅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로 옮겨지자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저 애는 꽤나 어리벙벙하네요.
하미미가 까르르 교소를 터뜨리자 하충도 거들었다.
보아하니 저 놈은 몸이 매우 허약한데다 머리까지 모자란 것 같군. 꼴에 오기는 있어 갖고…….
냉한웅의 표정은 변함없었으나 꽉 깨문 아랫 입술에서 피가 났다.
몸을 돌려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냉한웅.
그의 뒷모습을 아프게 바라보는 팽지연의 눈빛을 유화영은 놓치지 않았다.
음식물인 것 같은데 그 안에 고기도 있겠지?
그녀의 물음에 뼈가 있음을 눈치 챈 팽지연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 그뿐인가. 술도 있는 걸.
다음 순간 유화영의 이맛살이 찌프려졌다.
그렇다면 그 소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하충이 박장대소(拍掌大笑)했다.
사찰 내에선 육식(肉食)과 술(酒)을 금하니 보퉁이를 풀었다간…… 푸하하하
하미미와 팽지연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유화영은 멀어져가는 냉한웅의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팽지연도 웃음소리를 내었으나 시선은 냉한웅의 모습에 꽂혀 있었다.
허나 이런 미묘한 심사를 그 누가 알아챌 것인가?
* * * * *
불지대국사(不知大國寺)
알길 없어라 대국사 가는 길은
수리입운봉(數里入雲峯)
몇 리를 들어가도 구름 덮인 산이로고
고목무인경(古木無人徑)
나무는 길이 넘고 인적도 끊겼는데
심산하처종(深山何處鍾)
깊은 산 어드메쯤 들려 오는 종소린가
천성인위석(泉聲咽危石)
흐르는 물 소리는 돌에 걸려 흐느끼고
일색냉청송(日色冷靑松)
산 깊어 푸른 솔에 햇볕도 서늘하다
박모출담곡(薄暮出潭曲)
해설피 여울 물 소리만 들려 오는데
안록제독룡(安祿制毒龍)
선정에 들으니 알 길 없어라.
냉한웅은 대국사로 향하는 비탈진 산길을 헐떡이며 오르고 있었다.
빈 몸으로도 힘든 산행인데 무거운 음식 보퉁이까지 등에 지었으니…….
홀연 그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토해졌다.
휴- 악독한 것들, 그렇지만 냉한웅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냉한웅은 평탄하지 않은 산길을 빨리 오르려 애썼지만 그것은 마음 뿐이었다.
이때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잠시 쉬었다가노라면 수월할 일을 왜그리 서둘러 고통을 자초하느냐?
모습이 너무도 딱해 보여 동정 어린 충고해 준 모양이었으나 냉한웅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끈덕지게 발걸음을 계속하자 예의 그 음성이 또 들려왔다.
네놈은 귀가 먹었느냐? 아니면 그 물건이 네 목숨보다도 소중한 거냐?
이번에는 조금 화가 난 듯 억양이 거칠었으나 냉한웅은 못 들은 척 멈춰서지 않았다.
휘릭-
옷자락이 바람을 스치는 경미한 음향과 함께 회의노인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네놈은 사는데 염증을 느낀 모양이구나!
회의노인은 예리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노성(怒聲)을 터뜨렸다.
허나 그는 곧 자신의 눈빛이 냉한웅의 무심한 눈동자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묵직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으음-
공포……!
말없는 두려움이 일순 회의노인의 전신을 엄습했다.
생애 두 번 째로 만나는 괴인이로다. 저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 속에 숨겨진 고통을 노부 말고 천하 그 누구가 알아 볼 수 있을까?
냉한웅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회의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켜 주십시오.
그러나 회의노인을 바위처럼 꿈쩍않은 채 물었다.
너는 무슨 연유로 그리 기를 쓰고 산을 오르느냐?
…….
네놈이 노부에게 이토록 대담하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회의노인의 오른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빠르게 냉한웅의 완맥을 거머 쥐었다.
으…윽…….
냉한웅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아내자 회의노인은 으시시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린 놈이 불경하기 짝이 없어 버릇을 고치려는 것이다. 네놈은 혹 공문건(孔文建)이란 함자(銜字)를 들어 봤느냐?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
정사(正邪)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은 기인으로 무공의 높음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보다 공문건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괴팍한 성격 때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아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는 이유만으로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중원일괴는 중원광인(中原狂人)으로 별호(別號)가 바뀌었다.
그것이 벌써 삼십 년 전의 일…….
그동안 천하를 떠돌며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해 온 중원광인 공문건이 부영산에 홀연히 나타날 줄이야.
강호 소식에 관한한 귀머거리나 다름없는 냉한웅이 그를 알 리 없었다.
설사 목전(目前)의 그가 당금 무림의 맹주라 하더라도 모를 것이다.
…….
냉한웅을 무표정한 얼굴을 노려보던 그가 냉랭한 곳방귀를 뀌었다.
흥, 네놈에겐 받들어 올리는 경주(敬酒)보다 벌주(罰酒)가 제격이겠구나.
그는 허리춤에 매단 조그만 술호로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냉한웅의 서른 여섯 군데 요혈을 빠르게 짚었다.
냉한웅은 전신에서 은근한 아픔이 스물스물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순식간에 뭐라 표현할 수 없을만큼 지독한 고통으로 변했다.
일신의 뼈마디마디가 튕겨져나가고 피가꺼꾸로 흐르는 듯…… 혈맥이 토막토막 절단 되어 나가는 듯……!
냉한웅은 인상을 무섭게 일그러 뜨리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노인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성격이 괴이악랄(怪異惡辣)한 노인을 원망할 뿐이었다.
고통은 갈수록 커져 이젠 원망할 여유조차 없었다.
입이 떡-떡- 벌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한웅은 초절하기 짝이 없는 인내력을 보였다.
신음이나 비명을 삼켜 단 한 마디도 입밖에 흘리지 않은 것이다.
공문건의 냉랭한 표정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짐작했던 것 이상의 물건이군.
* * * * *
냉한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끝없는 어둠의 나락(奈落) 속에 빠져든 순간, 이들의 곁에 한 줄기 신형이 표연히 날아내렸다.
학창의(鶴?衣)를 걸친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중원광인 공문건에 비해 추호도 손색없는 예리한 눈빛을 지녔으나 표정은 부드러웠고 행동 또한 유유했다.
공가(孔哥)야-
그가 매우 친숙한 말투로 부르자 공문건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또 무슨 참견을 하고 싶어 그러는가?
네 나이가 몇인데 저런 어린애를 상대로…… 설마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는 않았겠지?
공문건의 입가에 의미있는 미소가 번졌다.
어찌 잊었겠느냐. 나는 다만 요 어린 놈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그제서야 청수한 노인도 혼절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냉한웅에게 시선을 돌려 자세히 살폈다.
정신 나간 자네의 마음에 들었다면 이 애 역시 정상은 아니겠군.
으흐흐흐 바로 맞혔네. 하늘이 공모(孔某)를 가엾이 여겨 보내주신 선물이지. 요 어린놈에게 분근착골(分筋?骨)의 맛을 보여 주었는데 인내력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어.
청수한 노인은 공문건이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자 더욱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자네가 저 애를 제자로 삼겠다면 가만 있을 수 없지. 나도 저 애에게 한 가지 절기를 전수해 주겠네.
…그게 진심인가?
내가 허언(虛言)하는 걸 본 적 있는가? 뿐만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네.
역시…… 여가(呂哥), 자네야말로 진정한 친구야!
공문건은 기쁨을 금치못해 그를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슬쩍 피한 후 냉한웅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 애의 골격을 살핀 후에 기뻐해도 늦지 않아.
하긴…… 성수마의(聖手魔醫)보다 이 방면에 더 뛰어난 이는 천하에 없으니…… 세세히 좀 살펴 주게.
아! 청수한 노인이 바로 팽지연이 그토록 찾기를 바라던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이었단 말인가?
더구나 상대를 치료해 주는 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그가 스스로 나서다니! 그러나…….
여소량의 표정이 차츰 굳어가기 시작했다.
일다경(一茶頃)쯤 흘렀을까? 그의 입에서 돌연 경악에 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음양태령절맥(陰陽太靈絶脈)-
얼마나 놀랐던지 그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여소량의 이런 모습에 덩달아 놀란 공문건의 두 눈도 볼만하게 휩떠졌다.
음양…태령절…맥이 뭐길래……?
…….
여소량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직접 보기는 처음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의술로도 못 고치는 절증(絶症)인 것만은 확실하네.
순간 공문건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럼 치료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성수마의가 못 고치는 병을 천하 그 누구가 고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반문에 공문건의 양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이나 해주게.
여소량 역시 김 빠진 음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외부로 드러난 증상은 오음절맥(五陰絶脈)이지.
오음절맥이라면 천만 명 중에 한 명이 걸린다는 희귀한 병 아닌가?
공문건의 표정에서 혹시나하는 기색마저 사라지자 여소량은 불쾌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자넨 성수마의의 의술을 지나치게 과소평과하는군. 까짓 오음절맥증을 치료하는 거야 누워 식은 죽 먹기라구.
그런데 왜……?
혹시 태양신맥(太陽神脈)이나 태음신맥(太陰神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음, 그것은 오음절맥이나 구양신맥(九陽絶脈)보다도 더욱 희귀한 병이지.
그렇다네. 태양신맥이나 태음신맥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는 천하를 통털어 백 년에 한 명이나 될까.
…….
만일 이러한 신맥을 지닌 사람이 병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아마 그 무공의 성취도는 끝이 없을 걸세. 절대지존(絶代至尊)의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지.
열통터지게스리 빙빙 돌리지말고 말해. 대체 그 신맥과 음양태령절맥이 무슨 관계가 있어?
공문건이 언성을 높였으나 여소량은 차분한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다.
음양태령절맥은 바로 태양신맥(太陽神脈)이나 태음신맥(太陰神脈)이 합쳐진 상태로 전설로만 알려진 절증인데…….
뭐가 어째- 어떻게 한 사람 몸에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이야?
나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걸세.
여소량이 고개를 내젓자 공문건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기랄- 어째서 하늘은 공모(孔某)를 이다지도 희롱하지. 완전히 미쳐버리기를 바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의 외침은 기묘한 여운을 남기며 퍼져나갔다.
지은 죄 없이 죄 지은 느낌에 휩싸인 여소량은 기어가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여모(呂某)는 태양신맥과 태음신맥 중 그 어느 것조차도 치료 못하네. 그러니 어찌 치료할 엄두인들 내겠나.
화풀이할 상대가 없는 공문건은 표정을 잔뜩 우그러뜨린 채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태양신맥이나 태음신맥을 지닌 무림인을 알고 있나?
여소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 여 년 전, 중원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을 차례로 굴복시켜 그 위명을 천하에 떨친 동해무성(東海武星)이 태양신맥을 지녔다더군.
공문건은 금시초문(今始初聞)이라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사실이 무림에 왜 안 알려졌을까? 그렇다면 태음신맥은 혹시…….
그의 심중을 짐작한 여소량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이백 여 년 사이에 나타난 절대지존(絶代至尊)은 단 두 명 뿐, 또 누가 있겠는가.
아- 천마존(天魔尊)!
그렇다. 마종지주(魔宗之主)라고도 불리우던…….
하지만 그 역시 어느날 갑자기 강호상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았던가?
여소량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냉한웅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음양태령절맥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무림 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불세지존(不世至尊)의 위치에 오를 수도 있을텐데…… 안타깝군.
이때 영준한 용모에 기개 비범한 청년이 산길 아래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쓰러져 있는 냉한웅을 보자 움찔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심이가 왜 저기에……?
이 무슨 악운(惡運)인가?
그는 바로 팽지연을 찾아 대국사로 향하던 비룡서생 남궁진악이었다.
남궁진악의 좋지않은 눈빛을 발견한 여소량은 그를 주시하였다.
자네는 이 애를 잘 아는가?
그의 반말에 기분이 상한 남궁진악은 떫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노인은 뉘십니까?
순간 공문건이 불호령을 터뜨렸다.
이놈아, 어르신들이 묻는 말에 공손히 대답이나 하거라.
심기가 몹시 상해 있던 그는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강호에서 비룡서생이라면 선배들도 한 수 접어주는 터인데 이 늙은 것들이…….
남궁진악도 은근히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매우 영악한 위인이라 상대를 모르고는 먼저 손을 쓴 적이 없었다.
소생은 태검장의 남궁진악이라 하오이다. 강호 친구들이 비룡서생이란 과분한 명호를 지어 주었지요.
그는 우선 자신의 신분부터 밝혀 상대의 반응을 탐지하려 했다.
네놈이 비룡인지 비사(飛蛇)인지 노부가 알 바 아니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공문건이 닭 잡듯 계속 몰아세웠지만 남궁진악은 오히려 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지요. 이 아이는 본 장의 하인인데 노선배님들께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그를 자세히 훓어본 여소량은 내심 탄식했다.
애석하게도…… 보기드믄 기재이긴하나 소인배로다. 바르지 못한 심기를 숨기는 재주 또한 뛰어나니 차후 강호에 큰 해악을 끼칠 자로다.
공문건 또한 풍진이인(風塵異人)이 아니던가. 그 역시 남궁진악의 사람됨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태검신노의 맏제자가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더니 헛소문이었군. 겨우 뱀새끼를 가지고…….
남궁진악이 머리에 털 난 이후 언제 이런 모욕을 당해봤던가?
그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삼키느라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 늙은 것들의 사지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들개 먹이로 던져주리라.
그는 살심(殺心)을 품었지만 그런 기색을 추호도 드러내지 않았다.
소생 따위가 어찌 용의 흉내인들 낼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의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두고두고 반성하겠습니다.
공문건도 더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속마음을 통채로 까발겼다.
속만 더 뒤집어질 뿐이니 간살 그만 떨어라! 네놈이 강호의 소문대로 정인군자(正人君子)였다면 쓰러져 있는 저 애의 상세부터 먼저 살펴보았을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이 말엔 영악하기 짝이없는 남궁진악도 당황치 않을 수 없었다.
남궁진악은 엉거주춤의 자세로 냉한웅을 훓어보았다.
이때 돌연 우측 숲에서 한 줄기 흑영(黑影)이 쏘아지듯 날아올라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경공의 조예로 미루어 절정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엇?
이토록 빠른 신법을 전에 본 적이 없는 남궁진악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순간 공문건이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여가(呂哥)야, 여기서 더 꾸물대다간 냉수 한 방울 못 얻어 먹겠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냄새 맡고 몰려든 것 같은데…… 빨리 가자.
공문건은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듯 냉한웅을 바라봤다.
그럼 이 애는 어쩌지?
여소량은 흑영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어차피 반 년을 넘기지 못할 목숨이니 포기하게.
공문건은 남궁진악에게로 고개를 돌린 후 외쳤다.
노부가 반 년 안으로 태검장을 방문할 테니 그때까지 이 애를 잘 보살펴 주거라!
말이 떨어진 순간 그의 몸은 여소량과 간발의 차이를 두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궁진악은 아연한 눈빛으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노괴(老怪)들의 무공은 좀전에 본 흑영보다도 한 수 위인 듯 싶군. 오음절맥은 십 팔세까지는 괜찮다고 하던데…… 얼마나 의술에 자신 있기에 한심이가 겨우 반년 밖엔 못 살거라 단언한 걸까?
이때 그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미친 개처럼 날뛰던 늙은이가 다른 친구를 여가(呂哥)가 불렀지? 무공이 절정에 달한데다 뛰어난 의술을 지닌 강호인으로 여가 성을 가졌다면…….
그는 힐끗 냉한웅을 바라보았다.
천중사기 중 일인인 성수마의(聖手魔醫) 여소량(呂紹梁)이 틀림없다. 삼십 여 년간이나 종적을 감추었던 그 노괴가 무슨 일로 이곳에……?
호기심이 인 남궁진악은 냉한웅을 그냥 내버려 둔채 그들이 떠나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마저 떠나자 냉한웅의 주위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잠시 후,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냉한웅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냉한웅은 서늘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부시시 상체를 일으킨 그는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앙칼지게 호통칠 팽지연의 모습이 떠오르자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서둘러 갔다와도 이만저만 늦지않을텐데…… 큰일났군.
그는 기를 쓰고 산 길을 올라갔다.
대국사(大國寺).
대문짝만한 현판의 글씨가 읽혀질만큼 가까이 도달했을 때, 또랑또랑한 눈빛의 사미승(沙彌僧)이 다가왔다.
시주께선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가 예의바르게 합장하며 허리를 굽히자 냉한웅을 크게 당황했다.
주지…스…님을…….
지난 오 년동안 밥만 축 내는 식충이! 멍청한 놈!이란 욕설에 매질까지 당해온 그로서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사미승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주지스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그럼 소승(小僧)을 따라 오십시오.
겨우 팔,구 세쯤 되었을까? 소사미(少沙彌)였지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불문제자답게 으젓하였다.
냉한웅은 그의 뒤를 따르며 내심 한탄하였다.
한웅아, 너는 어찌 그리도 못 났는냐. 이처럼 어린 아이도 제 앞가림을 손색없이 하거늘……
이때 갑자기 앞서가던 소사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십여 장가량 떨어져 있는 대웅전(大雄殿)을 가리켰다.
소승은 지객헌(知客軒)에 볼 일이 있어 함께 가질 못하니 시주께선 양해해 주십시오. 저기 대웅전을 끼고 돌면 주지스님이 거처하는 죽영원(竹領院)이 보일 겁니다.
냉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법명(法名)을 가르쳐 줄 수 있겠소?
이것은 그가 타인에게 묻는 최초의 말이었다. 그만큼 소사미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이다.
소사미는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다시 합장을 했다.
소승에게는 아직 법호가 없습니다. 그럼 이만…….
냉한웅은 총총히 걸어가는 소사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자신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조차 잊은 듯…….
돌연 사방이 웅성거리며 일련의 소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냉한웅은 넋나간 듯 소사미가 걸어가는 방향을 지켜 볼 뿐이었다.
이때 거친 음성이 그의 고막을 후려쳤다.
넌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냐?
냉한웅은 흠칫 놀랐으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려움 깃든 음성이 들려왔다.
이보게, 경치기 전에 어서 그 자리에 부복(?伏)하게.
냉한웅은 직감적으로 지체 높은 이의 행차가 있는 것을 알아챘으나 못들은 척 꼼짝 안했다.
얼마 남지않은 목숨 이렇게 비참하게 이어 가느니 차라리 맞아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저 애 귀머거리 아냐?
꼼짝없이 목숨을 잃게 생겼군. 쯧…쯧…….
주위의 쑥덕거림 속에 위엄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늙스그레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시주는 어찌 이리도 무례하오. 어서 등을 돌리시오.
냉한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갔다.
귀에 익은 음성…… 태검장에 몇 번 들른 적 있는 법운대사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혼마저 앗아가 버릴듯한 교성(嬌聲)이 뒤따랐다.
보아하니 귀머거리인 듯 한데 그냥 내버려 두세요.
첫댓글 냉한웅이 주인공 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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