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 명의 방문객(訪問客)
여인은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긴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하고 나자 별 뜻 없는 눈물이 아물아물 시야를 가렸다.
"아……겨울이야. 겨울…… 십일월의 날씨가 이렇게 추워질 수 있다니……."
창틈엔 뽀얀 성에가 끼었다.
들판을 휘몰아가던 삭풍이 그 들판 끝부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초라한 주막의 창을 마구 두드려댔다.
휘이잉―
쌔앵―
여인은 손에 든 부젓가락으로 꺼져가는 화로의 불씨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제길, 이놈을 그냥 꺼버려? 손님도 없는데 아까운 숯덩이만 자꾸 들어가네."
그때 돌연, 여인은 한 따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옆을 향해 시선을 돌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문가에는 어느새 두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어깨와 머리 위로 수북이 쌓인 눈이 차라리 소담스럽다.
그들은 각기 백의와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흑의사내는 머리에 인 눈처럼 차고 냉막해 보였고, 흑의사내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백의사내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찌르르 떨려오는 장대한 위엄의 구레나룻 사내였다.
여인은 일순, 놀란 눈을 껌벅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호…… 어서 오세요. 저희 집엔 강남(江南)의 명주(名酒)인 옥호춘(玉壺春)이 있답니다. 손님들께선 만족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장대한 백의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가에 위치한 탁자로 걸어가 털썩 몸을 앉혔다.
"옥호춘 한 병과 적당한 안주"
그는 품에 비단포대기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무척 소중한 물건인 듯했다.
흑의사내는 백의사내의 어깨에 쌓인 눈을 공손하게 털어주고는 자신은 그의 뒤에 우뚝 시립해 섰다.
여인은 이 기이한 일행과 포대기를 힐끗 일견한 후,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쟁반에다 술과 안주를 담아 들고와 그것을 탁자에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백의사내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의 앞 옷섶은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으며 그곳으로 풍만한 유방이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여인은 얼굴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며 자신의 가슴을 싸안고 다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 손님은……."
그녀의 놀란 외침에 백의사내는 나직한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이가 배고플 것이오. 부인은……."
여인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사내의 옆으로 다가와 그가 안고 있던 포대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포대기를 들쳐보다가 그녀는 끌끌 혀를 찼다.
"쯧쯧…… 가엾기도 해라. 이토록 예쁜 아기가 새파랗게 얼었군요. 염려 마세요. 저도 아기 젖뗀 지 얼마 안 된지라 젖을 그냥 버리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부인께선 어디 먼 곳으로 출타라도 하셨나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예쁜 아기를 두고……."
단숨에 여기까지 말하고 난 여인은 화롯가로 다가가더니 백의사내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백의사내는 우울한 시선으로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술을 병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타닥―탁탁!
화로의 숯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기름때 묻은 반질반질한 탁자 몇 개와 천장에 매달린 유등(油燈)이 흐릿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실내.
그곳은 숯불이 타는 소리와 이따금씩 백의사내가 따르는 술병이 잔에 부딪히는 미미한 파음(破音)이 고요한 실내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돌연, 여인의 청아한 음성이 실내의 나른한 정적을 깨뜨렸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름이 뭔가요?"
"그건……."
백의사내는 여인의 말에 대답하려다가 문득, 두 눈에 특이한 광채를 발하며 창가를 주시했다.
뒤에 서 있던 흑의사내 또한 귀를 쫑긋하더니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리!
두두두두―
무슨 소리인가?
마치 거센 바람에 대숲이 흔들리는 듯한 이 소리는 아득한 황야 저편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추적대입니다. 벌써 이곳까지 왔군요."
흑의사내가 냉막한 표정으로 검자루에 손을 대자 백의사내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에게서 아기를 받아 가슴 앞 옷섶에 포대기째 감싸 넣었다.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으리다."
그의 시선이 흑의사내를 향했다.
"일 장 간격을 두고 바짝 따라오게. 뽑으라고 할 때까진 무기를 손에 들지 말게."
짤막한 한 마디를 던지듯이 말하고 난 백의사내는 이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나갔다.
* * *
일만(一萬).
아니, 이만은 족히 되겠다.
하늘도 땅도, 그 사이의 공간도 온통 흰빛 일색인 백야(白夜)에 한여름 폭풍구름처럼 모여든 무리.
빛나는 금창에 붉은 수실의 은검(銀劍)을 허리에 두른 수천의 백의무사(白衣武士)들은 바로 대봉황천(大鳳凰天)의 정예인 역수라군단(逆修羅軍團)이요, 철갑(鐵甲)을 두른 흑마(黑馬) 위에 앉은
은방패에 동철갑의(銅鐵甲衣)를 걸친 늠름한 수천의 기사는 염라도 울고 간다는 철기대군단(鐵騎大軍團)이다.
뿐만 아니라 주의녹대(朱衣綠帶)에 금수교검(金穗嬌劍)을 양 어깨에 멘 일만의 고수들은 특수공격, 대외첩보의 검군단(劍軍團)이었다.
휘하 구개군단(九個軍團) 중 삼개군단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대봉황천의 이러한 위용이야말로 실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장관이 아닌가!
황야에 아득히 펼쳐진 검은 띠 같은 대군(大軍)과 삼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위지중걸(慰遲中傑)은 우뚝 몸을 세웠다.
사위에는 솜 같은 함박눈이 괴괴한 유적(幽寂)과 함께 소리없이 쌓이고 있었다.
위지중걸은 오연히 그 하늘을 마주 올려다본다.
조용하다. 만장(萬丈)의 해일이 몰아쳐 오다 갑자기 멈춰선 듯, 일대거인(一代巨人)은 그대로 산(山)이 되고 이만대군은 그 산을 우러르는 삼라만상이 되어 차례로 숨을 죽인 듯…….
허공을 날던 바람조차 깃을 접고 도사린 듯한 숨막히는 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돌연 시선은 그대로 하늘에 둔 채 위지중걸의 굳게 다물려져
있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천종(天鍾)인가?"
순간 한소리 장탄식이 무리 속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이만대군의 가운데 부분이 물결 갈라지듯 쫙 갈라지고, 그 사이로 네 명의 홍의무장(紅衣武將)의 호위를 받으며 금포중년인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다.
나이는 사십대 초반.
하나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백발.
마치 서릿발을 한 겹 드리운 맹호를 연상케 하는 백발호안(白髮虎眼)의 위인이었다.
그는 한 필의 백마를 타고 있었으나 이내 그 말에서 내렸고, 내리자마자 의관을 정제한 후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학천종( 天鍾)이 삼가 대교두를 뵈오!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위지중걸은 묵묵히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노성주(老城主)께선 무슨 말씀이 계시던가?"
순간 학천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살(追殺)!
그가 받은 명령은 추살, 그것이다.
하나, 바로 삼 년 전까지 모시던 윗사람이요, 평생을 통해 존경하고 있는 진정한 대무인(大武人)을 향해 어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대답 대신 한줄기 가슴을 저미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제라도 발길을 거두시면…… 그리하여 봉황천의 형제들을 이끌어 주시면……."
위지중걸의 입가로 한줄기 씁쓸한 고소(苦笑)가 스쳐 지나갔다.
'어찌 모르랴…… 알면서도 묻는 이 마음은 아직도 속세에 미련이 있기 때문인가?'
하나 그 웃음이 채 다 입가로 번지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다시 서릿발처럼 냉혹해졌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계율이 하나 있다. 너는 그것을 기억하는가?"
학천종은 태연히 내뱉었다.
"주군(主君)의 명(命)을 받으매 목숨을 바쳐 행한다."
"되었다."
순간 위지중걸은 좌수(左手)를 칼끝같이 세우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자신의 우측 어깨를 맹렬히 내려쳤다.
파악!
피[血].
그리고 어깻죽지부터 칼로 벤 듯 잘려나간 우수(右手).
학천종은 흰 눈밭 위로 떨어져 꿈틀거리는 팔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대교두……."
"명을 받았으니 네 어찌 그것을 지키지 않으랴? 다만 위지중걸은 평생 무예를 닦은 오른손과 이 품에 안긴 아기의 목숨을 바꾸고자 하니 그대는 이것을 이해해 주겠는가?"
팔!
무인에게 있어 무예를 익힌 팔이란 목숨과도 같다.
그 팔을 바라보는 학천종의 안색이 거듭 변하고 있었다.
아아…… 도대체 언제이던가.
갓 입문(入門)하여 모든 것이 어리벙벙하고 눈부셨던 입문무사(入門武士) 시절, 거대한 연무장 한복판에 우뚝 서서 십만 무인을 호령하던 당신의 모습은 그저 눈부신 경이(驚異)였고 놀람이었으며…….
서투른 초식으로 검을 놓친 애송이 무사의 등을 토닥이며 씩 웃던 그 웃음은 그때부터 애송이 무사의 마음속에서 우상이 되었건만…….
이제 그 빛나던 당신은 도망자!
나는 또 서투른 추적자…….
"서툰 추적을 토닥여야 할 그 손을 당신께선 어찌 스스로 버리시는가? 그 빛나던 명망, 무예, 그 전부를…… 도대체 그 어떤 것이 당신을 그토록 잡아끌고 있는가?"
학천종은 고개를 떨구었다.
한 줄기 젖은 눈물이 엎드린 그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 시대(時代)가 간다.
영웅은 늙고 꽃잎은 진다.
그러나 몇천 번의 시대가 흐르고 또 흘러도 눈앞에 선 이 거인(巨人)처럼 완벽한 대교두를 우리는 다시는 모시지 못할 것…….
학천종은 품속에서 하나의 패(牌)를 꺼내어 정중히 눈밭에 놓았다.
그것은 사면패(赦免牌)였다.
대봉황천의 초일류고수만이 지닐 수 있는 이것은 그 어떤 순간, 그 어떤 경우에라도 한 번 죄를 사면받을 수 있는 구명패(救命牌)였다.
패를 가만히 눈밭에 올려놓고 난 학천종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위지중걸과 시선이 마주친 것도 잠깐.
그는 위지중걸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퇴군한다."
두두두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한 폭의 비장한 상면도(相面圖)를 보고 있던 무사들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고삐를 돌렸다.
두두두두―
뽀얀 설진(雪塵)…….
내리는 눈…….
그리고 바람…….
휘이잉―
휘이―
* * *
흑의사내 냉혼(冷魂)은 이 모든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학천종이 내려놓고 간 사면패의 뜻을 그는 모른다.
하나 그는 그 패로 하여 위지중걸과 자신의 소주인(小主人)이 한 줄기 구명(救命)의 끈을 잡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패의 주인인 학천종은 어찌 되나?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사면패를 남에게 준 그는 돌아가 무사할 수 있을까?
냉혼의 냉막한 얼굴에 흐릿한 한줄기 웃음이 번졌다.
남을 위해 팔 하나를 선뜻 내던질 수 있는 사람과, 또 남을 위해 목숨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들.
그는 이런 것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단 하나라도 눈앞에 있는 한, 그는 무인(武人)의 길로 들어선 자신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묵묵히 위지중걸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어 자신의 옷 안자락을 찢어내어 위지중걸의 어깻죽지 부분을 싸매기 시작했다.
피는 이미 멎었으나 혈관과 속살 등은 시퍼렇게 얼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퍽!
무얼까?
냉혼은 한 줄기 피의 막(幕)이 눈앞으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 냉막한 사내의 얼굴을 경악으로 홱 돌변시켰으며, 그의 몸을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도록 만들었다.
보라! 막 천으로 싸맨 위지중걸의 어깻죽지에 박힌 한 자루의 호접표(蝴蝶 )를…….
나비 모양의 이 비수는 끝부분까지 위지중걸의 어깨로 박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모가 죽고 형제가 살상당했다 해도 이토록 놀랄까.
냉혼은 놀랐으며, 그 놀람은 이내 무서운 분노로 돌변했다.
발작적으로 몸을 돌린 그의 시선 속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혈의(血衣).
설원에 붉은 꽃이 피어난 것 같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핏빛 일색인 괴인(怪人)들.
한둘도 아니다.
어림잡아도 그 수는 일흔두셋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은 십 장 밖에서 숨결이나 호흡의 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냉혼은 검자루에 화급히 손을 갖다댔다.
순간 그는 엉뚱하게도 손등 어림으로 발작적인 통증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억!"
그의 회의에 찬 시선 속으로 한 자루의 영롱한 호접표가 검을 잡으려는 자신의 손등에 박혀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위지중걸의 어깨에 박힌 것과 똑같은 모양의 것!
그러고 보니, 혈의인들의 머리 위 허공에는 수없이 많은 호접표들이 춤추듯 나부끼고 있었다.
내리는 눈과 같은 색이어서 언뜻 구분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들은 먹이를 노리는 금수처럼 천천히 나부끼다가 조종자가 마음먹은 곳으로 자유자재로 날아가 박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냉혼은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이들은 도대체 누군가?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절대암기…… 나는 이런 것을 들어보기는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이때 위지중걸의 부리부리한 음성이 설원을 메아리쳤다.
"도남강(屠南江)의 휘하인가?"
순간 혈의인들의 선두에 서 있는, 가슴에 한 송이 국화 문양이 수놓여 있는 자가 냉혹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대황야(大皇爺) 휘하 칠십이마령비인(七十二魔靈匕人)이오. 황야의 명을 받들어 대교두를 모시고자 왔소."
칠십이마령비인!
이는 바로 대봉황천의 제이인자인 도남강이 비밀리에 키운다는 희대의 살수(殺手)들이 아닌가?
이름도 없고, 성(姓)도 없으며, 명(命)을 받으면 염라의 목이라도 따온다는 저주(咀呪)의 살수들.
도남강의 휘하에는 이러한 살수집단이 칠십이마령비인 외에도 네 무리나 더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봉황무색오살(鳳凰無色五殺)!
하나 그것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지, 그들의 지닌 바 무예가 어떤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는 공포의 집단들.
하나 위지중걸은 송충이 같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을 뿐,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말했다.
"들은 적이 있다. 도남강이 비밀리에 키운 오살(五殺)의 하나로군. 그럼 긴말은 필요없지 않은가?"
수뇌혈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정중히 맞잡아 보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대교두."
이어 그의 손이 뒤쪽을 향해 한차례 휘저어진 것과 위지중걸의 몸이 땅을 박찬 것은 거의 동시였다.
슈파팍!
일순 눈송이처럼 허공을 나부끼던 수백의 호접표들이 벌떼처럼 위지중걸을 향해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좌로, 우로, 또는 위, 아래로!
방향도, 속도도 틀리며 일체의 소리조차 없는 공포의 암기!
팍!
위지중걸의 목덜미 아래 기사혈(氣舍穴)에 하나의 호접표가 박혔다.
찰나의 틈도 없이 다시 두 자루의 호접표가 양구(梁丘), 비관(卑關)의 양혈로 모습을 감추었다.
파팍!
그런데도 비등하는 위지중걸의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또다시 세 자루의 호접표가 그의 삼대혈(三大穴)로 파고들었을 때, 그의 좌수는 한 혈의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우두둑―
"끄윽……."
그는 연이어 다섯 자루의 호접표를 몸에 맞고도 우람한 다리를
또 다른 혈의인의 복부에 쇠몽둥이처럼 박아버렸다.
번갯불이 휘몰아치듯 뻗어나간 이 이수삼퇴(二手三腿)에 네 명의 혈의인이 손써 볼 사이도 없이 나뒹굴었다.
실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저돌적인 공격이었다.
순간 냉혼의 두 눈에 한줄기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지나치게 서둔다. 몸에 이상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것은 수뇌혈의인도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개의 주맥(主脈)이 단숨에 끊어졌고…… 대거(大巨), 충양(衝陽), 기호(氣戶)의 삼중혈(三重穴)이 꿰뚫려 진기가 이어지지 않을 텐데도 저런 위력인가? 그러나, 상, 중, 하완(下脘)의 삼연혈(三連穴)이 끊어져 공력이 흩어지고 나면 아무리 용맹스런 호랑이라도 어쩔 수 없겠지.'
팍! 팍! 팍!
위지중걸이 여섯 번째 혈의인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스러뜨렸을 때, 그의 몸에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복부 어림에 나란히 꽂힌 세 자루의 호접표가 떨리는 걸음을 쫓아 파르르 도미(刀尾)를 떨고 있었다.
하나 그의 손이 움켜잡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옷섶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포대기 하나.
수뇌혈의인은 두 눈으로 냉혹한 광망을 토해냈다.
'좌삼변(左三變) 후에 우오변(右五變)…… 호접표의 서른두 번째 변화는 하늘의 대라신선이라 해도 피할 수 없다. 아까운 사람이 가는구나…… 최후!'
슈슈슉!
십여 자루의 호접표가 일제히 위지중걸의 이마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아니, 날아든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그것들은 이미 위지중걸의 이마 표피(表皮)를 거의 뚫어가고 있었다.
실로 필사절명의 순간,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오!"
냉혼의 입에서 날벼락 같은 대갈이 터져나왔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던 수뇌혈의인의 몸이 순간 부르르 떨렸다.
패(牌)!
냉혼이 두 손으로 움켜잡고 내민 하나의 붉은 혈옥패! 수뇌혈의인은 수하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시간도 없다는 듯 날카로운 어조로 외쳤다.
"그만!"
순간 놀랍게도 허공을 날던 수백의 호접표들이 일시에 그 동작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막 위지중걸의 이마를 꿰뚫으려던 열두 자루의 호접표 또한 뚝 멈추어지더니 이내 힘을 잃고 그의 발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위지중걸의 충혈된 두 눈에 처음으로 한줄기 놀람이 스쳐 지났다.
공력이란 뻗기는 쉬워도 거두기는 어려운 법!
장중(掌中)의 무기도 아니고 손을 떠난 암기는 더더욱 그렇다.
한데 말 한마디가 터지는 찰나 공력이 거두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 칠십이마령비인의 무예수준을 능히 짐작케 하는 것이 아닌가?
'도남강은 좋은 수하들을 키웠구나.'
그때 수뇌혈의인의 색깔없는 음성이 위지중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왜 진작 사면패가 있음을 말하지 않았소?"
하나 대답 대신 터져나온 것은 한 줌의 시뻘건 핏덩이였다.
"욱!"
위지중걸은 피묻은 수염을 쓰윽 문지르며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마지막 가는 마당에 대황야가 주는 선물을 어찌 받지 않고 가랴! 또한 그 패는 나의 지인(知人)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준 소중한 것이니, 그런 것을 어찌 나를 위해 쓰겠는가!"
한마디 한마디에 서려 있는 힘찬 영웅의 풍도!
그 몸이 멀쩡하든, 부상을 당했든,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러한 위엄일색의 기풍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위지중걸, 오직 이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수뇌혈의인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스쳐 지났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오랫동안 위지중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 줄기 미미한 탄식을 터뜨렸다.
"대교두…… 당신은 바보구려……."
그는 주위에 흩어진 여섯 수하의 시신을 빙 둘러본 후, 빙글 몸을 돌렸다.
"사면패는 성주께서 직접 만드신 구명(救命)의 패…… 우리는 그 패를 가진 사람을 어쩔 수 없다. 퇴각한다!"
슈슈슉!
구름이 흩어지듯 일흔 명의 붉은 옷자락이 일시에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위지중걸은 꼿꼿이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칠십이마령비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 고목이 무너지듯 쓰러져 내렸다.
"대교두!"
냉혼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위지중걸은 핏기없는 얼굴에 담담한 웃음을 떠올리며, 한쪽밖에 없는 손으로 품속의 아기를 눈 어림까지 받쳐 올렸다.
아기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치우천인의 신비스러운 맥(脈)을 이어받은 그 얼굴은 비록 잠들었지만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위지중걸은 껄껄 웃었다.
"네놈의 아비는 과연 평생의 호적수였다. 나는 네 아비와 싸울 당시 이미 내장이 흔들렸다. 그 몸으로 마령비인을 여섯이나 때려 죽였으니 고맙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잠을 자? 이놈!"
냉혼이 물었다.
"왜 진작 사면패를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랬을 것 같나?"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도남강은 이 아이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야 할 상대야. 하지만 그가 지닌 힘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나는 마령비인으로써 그가 지닌 힘을 조금 시험해 본 걸세."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당신은 또 팔까지 잘라 원기가 상했습니다. 그 몸으로 마령비인과 무모한 대결을 하셨소.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을 안 하십니까?"
위지중걸은 냉혼을 힐끗 바라보더니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 나이 이미 지천명(至天命)에 이르렀다. 우리의 시대는 갔어……."
문득 그의 두 눈에서 중상을 입은 이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혜광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 시간을 두고 맹세하겠네. 나 위지중걸은 진천우도의 손자요, 화천상의 아들인 화운룡(華雲龍)에게 다음 대(代)의 무림을 주고 말 테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여겨 주게."
절대자 진천우도.
그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일으킨 역부(逆父)의 소용돌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치우천인의 맥(脈).
하나 눈보라치는 설원에서 벌어진 이 한 토막의 비사(秘事)를 세상은 알지 못했다.
내일도 해는 무사히 떠오를 것이고, 강은 그저 그렇게 억겁의 세월을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흐를 것이다.
또한 남자들은 일어나 하루의 일터로 나갈 것이고, 여인들은 공들여 화장을 할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가는 것이다.
이제 불과 십팔 년 후로 성큼 다가선 천 년 전의 약속.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
제기랄! 인세(人世)에는 또다시 무슨 일이고 벌어지려나 보다.
* * *
桃花流水香然去
別有天地非人間
問余何事碧楢山
笑而不答心自閑
복숭아꽃은 물에 흘러 사라져 가고, 여기는 천지 밖 인간 세상이 아닐세.
그대는 내게 묻는가, 왜 푸른 산에 깃들어 사느냐고…….
고요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는 내 마음은 그저 한가로울 뿐일세.
세월은 유수(流水)라 했던가?
꽃이 피는 화춘(花春)인가 싶더니 태양의 열하(熱夏), 낙엽의 풍추(風秋)에 이어 흰빛 일색의 설동(雪冬)이 수십 차례 지나갔다.
태고의 자연에 다시 열여섯 개의 빗금을 더한 십육 년의 세월동안 대륙은 몹시 어수선했다.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
그것이 불과 이 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오오…… 천 년 전의 약속이라네!
검회의 승자가 바로 천하무림의 영원한 종주(宗主)가 된다네.
대봉황천은 바로 그 십사연방의 하나인 만룡가의 후예라는 거야!
그렇다면 중원의 다른 세 계파인 화남(華南) 광무천(廣武天), 한북(漢北) 용권풍(龍卷風), 중주(中州) 신선도(神仙道)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룡가와 버금가는 무학이 과연 열세 개나 더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새외(塞外)에서 이동하는 대군의 행렬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남해의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천사 같은 소녀를 보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천축(天竺)의 수만 법승(法僧)들이 서천을 망라한 대집회를 벌였다고도 하고, 대사막에 미증유의 모래바람이 벌써 삼 년째 불고 있다고도 했다.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런 와중에서 사람들을 또 한차례 경악 속으로 휘몰아넣은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었다.
―대봉황천에서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라는 미증유의 비무대회를 개최한다.
이는 바로 이 년 후에 있을 십사연방천하검회를 대비한 자체검회이다.
또한 어쩌면 만룡무학의 마땅한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십 인 이상의 문파라면 어디에라도 초청장이 발송된, 전무후무한 큰 대회이다.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
무림에 적(籍)을 둔 무사라면 누구든 참가할 수 있고 참관할 수 있다는 일대의 대검회.
아무튼 대륙은 이 대회로 인해 떠들썩했다.
벌써부터 대봉황천으로 향하는 서른두 개의 관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초청장을 발송하기 위해 성을 떠난 대봉황천의 무사들만 해도 무려 오천여 명이 넘었다.
가을바람도 소슬한 영락십이년(永樂十二年) 추시월(秋十月)의 일이었다.
* * *
대륙의 중앙, 호북(湖北)땅.
남으로는 동정호(洞庭湖), 동으론 파양호( 陽湖)를 끼고 복우(伏牛), 대홍(大洪), 형산(衡山) 등의 명승지가 가득한 곳.
무릉지도원(武陵之桃源)이 따로 있을까 싶은 방원 오만 리의 수려지지(秀麗之地).
이 호북에는 세칭 무릉칠절(武陵七絶)이라 불리는 절세경승(絶世景勝) 일곱 곳이 있다.
백만 그루의 배꽃이 일제히 그 꽃잎을 떨구는 형산이화(荊山梨花)가 그 첫째요, 이수낙조(二水落照), 삼상거루(三湘巨樓), 대홍혈택(大洪血澤), 민산만위(悶山滿葦), 조북천마(朝北天馬)의 육경이 제각기 여섯 번째까지의 서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산(山).
그 하나의 산은 도화유수향연거(桃花流水香然去)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두 절 시구에 말할 수 없이 합당하게 무릉칠절의 마지막 경승을 뽐내고 있었다.
이것을 이름하여 청연무당(靑然武當)이라 한다.
무당산(武當山).
가히 뉘라서 이 이름을 모른다 할까?
호북 악성(鄂城) 서북 방향의 균현(均縣)에 해발 일만육천오백 척(尺)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산.
웅휘한 자태는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그 수려한 경치 위로 예순세 개의 봉우리에 걸쳐 팔궁구원이십사당칠십이관(八宮九院二十四當七十二關)이 있으며, 하남의 소림사(少林寺)와 더불어 남북쟁휘(南北爭輝)라 일컬어지던 대무당파(大武當派)가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 아닌가!
하나 일백 성상(星霜) 전에 이 땅 위의 도가(道家)에 휘몰아쳤던 대혈풍.
도가혈사(道家血死)!
전 중원의 도가가 아예 뿌리 뽑히다시피 했던 그 엄청난 혈풍이 지나간 후, 오 보(五步)에 일각(一閣)이요, 십 보에 일루(一樓)를 자랑하던 무당도가(武當道家)의 영화 또한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삼청(三淸)의 영화도, 삼원(三元)의 괘효(卦爻)도 한낱 희망없이 벽천 뜬구름처럼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저 멀리, 무당산 육십삼봉 잔그늘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낡은 도관(道觀)의 처마가 햇살 아래 무심히 빛나는 어느 가을날 오후.
해량평(解亮坪)에서부터 휘몰아온 한 줄기 바람을 안고 두 사람의 무사(武士)가 양지바른 무당산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다.
"쯧쯧…… 천하도가의 성지(聖地)였던 무당성산(武當聖山)이 이게 무슨 꼴인고? 황혼에 까마귀 날아들고 처마 위엔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는 이백(李白)의 시(詩) 구절 그대로구먼."
"연화(煙火)를 끊고 솔잎만 먹으며 벽곡(酸穀)하는 도행(道行)에 피바람이라니…… 백 년 전의 그 도마(道魔)란 작자는 십팔층에 십팔층을 더한 삼십육층 지옥에 떨어질 놈이 아닌가?"
무성한 수풀뿐인 이리저리 갈라진 산길에는 오랫동안 손길이 가지 않아 거의 썩어가는 푯말들만이 황량하게 서 있었다.
전진도관(全進道關)과 무량도장(無亮道場) 등의, 일견해 보기에도 과거에는 천하에 그 이름을 쩌렁하게 드날렸을 듯 싶은 명문도장(名門道場)들의 이름이 적힌 푯말들.
그것들을 스쳐 지나가는 삼십대 중반의 두 사람.
일신에는 현의무복(玄衣武服)을 걸쳤으며 어깨에 휘두른 청강장검 위로 금색 수실이 드날렸다.
일견하기에도 명문의 무사들이 분명한 이들은 문득 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부터 길은 거의 관도(官道)에 버금갈 정도로 넓혀져 있었다.
길의 우측에는 넓은 분지가 있었고, 그 분지의 가운데에는 미풍에 찰랑이는 벽수가 가득한 사방 백여 장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또한 연못의 북쪽 끝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 중턱에는 그 하나의 크기가 사람 열을 포개 놓은 것만큼 커다란 세 자의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해검지(解劍池)>
"해검지? 오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해검지로군."
해검지(解劍池).
숭산 소림의 백 리 밖에서는 모든 무림인들이 말에서 내리고 칼을 감춘다.
이것은 무림의 최고문파에 대한 백리하마은검(百里下馬隱劍)의 예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림과 더불어 무림 양대거목인 무당파에도 해검지란 곳이 있다.
어떤 신분의 무림인이건 무당파를 방문할 때에는 이 해검지에서 지니고 있던 무기를 풀어 놓아야만 한다.
만약 쇠붙이 한 조각이라도 숨겨 들어가는 날엔 무당파에 대한 불경죄로 크게 곤욕을 치르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한 줄기 미풍이 연못 옆에 놓여진 거대한 철궤를 무심히 휩쓸어 갔다. 문파의 영욕을 그대로 말해주듯…….
과거에는 푸른 도복을 입은 수십 명의 도사들이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주위에 서 있고, 수백 수천 자루의 무기들이 놓여졌을 이 철궤도 이제는 녹슬어 바람에 무심히 휩쓸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 무사는 녹슨 철궤를 어루만지며 잠시 가슴을 적시는 우울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문득 좌측무사가 손을 들어 연못의 우측으로 난 길을 가리켜 보았다.
"저쪽이 아마도 무당파 삼청관(三淸關)으로 통하는 길인 듯한데……."
우측무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할 수 없군. 무당파가 백 년 전 혈겁 이래 인재는 뿔뿔이 흩어지고 명성이 쇠락하여 사실상 멸문(滅門)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구 말구…… 요 백 년째 어떤 무림의 중요한 행사에서도 무당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네."
"한데 이번에 본 천(本天)에서 여는 사해대검회(四海大劍會)에 이들을 부르기 위해 초청장을 띄우는 이유가 뭘까? 듣자 하니 이 초청장은 외빈당주(外賓當主)의 직인도 아니고 사황야(四皇爺)의 직인이라는데……."
좌측무사의 얼굴에 크게 놀란 빛이 떠올랐다.
"서열로는 사위(四位)이나 사실 백 년 이래 제일 큰 행사라는 이번 대회를 총주관하고 있는 사황야의 직인이란 말인가? 그럴 수가……."
"내성(內城)의 정산(鄭産)이 전해준 말이니 틀림없네. 하지만 이 길을 보아하니 인적조차 없는 것 같으니…… 우리는 지금 유령을 향해 초청장을 보내러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그때 돌연, 한쪽의 나무 그늘에서 느닷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나무꾼 차림의 노인 하나가 무심히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검자루에 손을 갖다댔던 두 무사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좌측무사가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귀하는 이 산에 사는가?"
십 년을 가도 사람 하나 마주치기 어려운 벽산에서 살아온 나무꾼.
온통 휘황한 차림의 두 무사를 보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 물러났다.
"그, 그렇소만……."
"흐음…… 그렇다면 무당파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있는가?"
"무…… 당파요?"
"도사들 말이다!"
우측무사의 신경질적인 어투에 나무꾼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산너머 삼청관의 도사님들을 말씀하시는구려."
"그곳에 사람이 있긴 있는가?"
"있다마다요."
"그곳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아라."
나무꾼은 지고 있던 나뭇단을 땅에 내려놓더니 땀을 훔치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제일 높은 도사님 한 분과 그의 세 제자가 있지요."
"세 제자라……?"
"현청(玄淸)이라는 도명의 장문도사(掌門道師)는 그 윗대의 가람도인(伽藍道人)으로부터 오십 년 전 홀로 문파를 이어받았다 하더이다. 그 현청도인이 지금은 각각 운룡(雲龍), 벽뢰(霹雷), 여의(如意)라는 세 제자를 데리고 있지요."
두 무사는 힐끗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가람이건 현청이건 간에 도무지 생소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가람의 내력은 무엇이고 현청은 어떻게 문파를 이어 받았는가?"
"그, 그것이……."
그의 머리로는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었던 것일까?
늙은 나무꾼은 머리만 긁적였다.
바로 그때, 저 아랫길로 사냥꾼 차림을 한 소년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늙은 나무꾼은 얼굴에 온통 희색을 띠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당파에 대해서라면 저 소궁(少穹)놈보다 더 잘 아는 놈은 없지요. 저놈은 바로 현청의 세 제자 중 여의도인과 친구입죠."
어린 사냥꾼 소궁은 늙은 나무꾼의 말을 듣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도사는 무슨 도삽니까? 그 사람들은 한마디로 웃겨요. 솔잎에 돼지고기를 말아먹고 도경(道經)의 이치는커녕 선(仙)자도 모르는 돌팔이 도사들이지요. 현청도인이란 늙은이는 본래 거지였어요. 그러다 가람도인을 만나 도복을 입었죠. 그 가람도인은 또 누군고 하니 옛날 이 산에 진짜 도사님들이 계실 때, 마당을 쓸고 낙엽을 치우던 청지기 영감이랍니다. 그러다 도사님들이 모조리 산을 떠나자 텅 빈 도관을 지킨 것에 불과해요. 자칭 장문인(掌門人)이었던 그 직위를 현청 늙은이가 물려받은 것이지요. 상청하청(上靑下靑)이라 하듯 청지기에서 거지로 이어 내려온 사부를 모시는 제자들은 또 어떻겠어요? 벽뢰(霹雷)는 천하의 바보예요. 그는 자기의 도명을 외우는 데만 꼬박 일 년이 걸렸어요. 여의(如意)는 천하의 얼뜨기지요. 나는 그가 빗자루를 똑바로 들고 마당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들은 모두 똥을 누면 밑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그 손으로 또 음식을 먹는, 멍청하고 무지막지한 자들이에요.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과연 저런 것들도 사내랍시고 내질러 놓고 그 어미가 아랫목에 앉아 횃대잡고 미역국을 처먹었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지요. 그래도 그들 무리 중에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면 첫째 제자인 운룡도인(雲龍道人)이에요. 그는 비단 고기를 먹지 않는 진짜 채식도인(菜食道人)일 뿐 아니라 멍청하지도, 얼뜨기 같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지요. 그는 아침에 채석장(採石場)에 나가 하루종일 일해 번 돈으로 자신의 사부와 두 명의 사제를 먹여 살려요.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십 년째 시주라곤 쌀 한 톨도 없었던 무당파의 도사 아닌 도사들은 모조리 굶어죽고 말았을 거예요. 뿐인가요? 그는 무당파의 모든 식사와 빨래를 혼자서 도맡아 하며, 심지어는 측간의 똥까지 스스로 내다푸죠. 나는 운룡도인을 존경해요. 왜냐하면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어디에 가도 대우받고 살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왜 도복을 벗지 않고 그곳에 눌러있는가 하는 것은 무당산의 가장 큰 불가사의(不可思議)랍니다."
* * *
상(像).
그것은 실물의 두 배 크기쯤 되는 하나의 목각상(木刻像)이었다.
상은 도사(道師)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목각도인상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픔과 분노, 애통과 회한이 한데 어우러진…….
꾸부정한 등에 박힌 부러진 칼, 그리고 피묻은 도복의 형상을 한 이 목각상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목각도인상은 넓은 도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져 있었고, 상의 앞에 세워진 하나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잊지 말라, 이 한(恨)을!
도가(道家)의 혈한(血恨)을…….
무당의 일편지혼(一片之魂)은 영원히 남아 이 사무친 한을 풀고야 말리라.>
네 줄도 안 되는 문구 속에 들어간 한(恨)이라는 글자는 무려 세 개.
피흘리는 목각도인상과 더불어 섬뜩한 전율을 안겨다 주는 글귀였다.
"조각도, 글도…… 모두 다 명가(名家)의 솜씨로군."
"백 년 전 멸문 당시의 최후 생존자들이 세워 놓은 것일 게다. 과연 그들은 다 죽고만 것일까?"
도관의 산문(山門)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무당파라는 세 글자가 장엄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나 그것이 금색이라는 것조차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낡디낡은 현판이었다.
본래 무당파는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관(三淸關)과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의 삼원관(三元關) 등 도합 삼청삼원(三淸三元)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방파였다.
각 원과 청에는 최소한 오십여 개의 부속 전각, 대전, 사당 등이 딸려 있었고, 전성기 때는 그 소속인원이 도합 일만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두 무사의 시선으로 들어온 무당파라는 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문 안으로 한 채의 조그만 전각(殿閣)이 있었는데 그곳이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의 전부였다.
안쪽으로 수십 채의 건물들이 보이긴 했으나 모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썼고, 일 장도 넘는 잡초로 가려져 있었다.
전각의 앞에는 이제 막 싹이 돋은 채소류가 심어진 밭과 네 개의 푯말이 서 있었다.
그 푯말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 두 무사는 순간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거창한 문구(文句)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大武當派 第三十六代掌門眞人玄淸之處所>
대무당파 제삼십육대장문진인 현청의 처소.
<擅入本居者餓>
함부로 본 거에 들어오는 자는 굶는다.
<無香錢者不入居>
향전(香錢:시주돈)이 없는 자는 들어오지 못한다.
<不逆守本居一切規定則時行不祥事責無>
본 거의 모든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불상사는 일체 책임지지 않는다.
협박인지, 공갈인지 푯말의 옆에는 높이 두 자의 도인상과 함께 시주함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두 무사는 서로 마주보고 한차례 쓴웃음을 흘린 뒤 제각기 몇 냥의 동전을 시주함에 넣었다.
이어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본 후,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고 있는 뒷마당 어림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