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민경이 옆에서 왕가위의 해피투게더를 다시 보았다.
세 번째로 보는 영화인데,
볼 때마다 와닿는 포인트가 다른 것을 실감한다.
첫 감상 땐 괴강이와 나와의 관계에 있어, 나는 극중 아휘와 보영 중 누구였나를 생각하고 더 마음이 가는 쪽을 골랐다. 그리고 나 자신보단 이 두 인물에 대해 깊게 분석하려고 했다.
두 번째엔 나의 모습에 아휘와 보영, 두 가지가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이 둘보다는 건강한 생각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리고 장첸의 존재를 그저 새로운 사랑을 하려고 하는, 그러나 보영이 보다는 좀 더 안정적인 어느 한 인간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둘 사이의 관계에 장첸은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별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6개월만에 영화를 보았다. 세 번째 감상이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다시 아휘에 이입하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새남친에게 돈을 뜯으며 살다가 매번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보영이를 보았다. 나는 아휘를 통해 나와 너무 가까워져버린 빌런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한편으로 이 빌런이 내 곁에 계속 남아있을지 없을지 예측되지 않는 불안을 보았다.
보영의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태도에 누적되어온, 그러나 위로 인한 감정들로 인해 터지지 못한 아휘의 분노는 현상유지를 하려는 에너지로 간신히 전환된다. 아휘는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보영에게 소파 대신 침대를 내어주고, 고열에 걸렸음에도 보영에게 밥을 해준다. 아휘는 그래도 보영이 자신의 옆에 있길 바랐다.
그러나 새로 옮긴 일터에서 장첸이라는 사람은, 눈이 잘 안 보여서 남의 목소리에 집중함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듣는다. 내용 뿐만 아니라 아휘의 목소리에서 들려오는 감정의 울림을 알아봐주고 생각해준다. "때론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물론 장첸 또한 해외로 도피해 돈이 있는대로 다 써버렸던, 정처없이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아휘와 동료들과 함께 축구를 하고 친해지면서 자신의 여행의 목적을 다시 세운다. 녹음기에 녹음된 아휘의 슬픔을 던져버리고 그의 새 삶을 응원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세상 끝으로 가기로 한다. 장첸을 통해 마음의 위로를 받은 아휘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보영 없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아휘는 장첸을 통해, 장첸은 아휘를 통해, 각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삶의 의미를 정립한다.
나 또한 삶의 아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상처와 무기력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다. 그동안 오랫동안 지내왔던 사람을 통해 강렬히 느끼지 못했던 여자들간의 사랑을 느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서로를 아끼는 법을 배웠다. 각자의 아픔을 지고서도 사랑할 줄 알고 앞으로의 미래를 소망을 나누며 서로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벅찬 나는 비행기에서 펑펑 울었다.
나는 나의 약한 점과 못난 점을 어느정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을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 취급을 하는 타인에게 내던지고 싶진 않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마음과 행동,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소심)의 마음으로 나 자신과 주변 여성들부터 주의 깊게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살고자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 있어 사랑은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일지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은 고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사랑은 예측하지 못한 모습으로 날 변하게 만들지만, 사랑만 있다면 어느 순간 그 변화 또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무언가를 이해한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그 순간부터 다시 처음과 같은 느낌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래서 사랑은 삶과 같이 굴러갈 수밖에 없다.
그 친구와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 상처와 나쁜 기억이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이를 평생 지고 살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도 괜찮다. 난 나와 여기 사람들 그리고 여자들을 믿으니까. 남은 여정에서 내가 흔들리는 일이 있어도, 날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털어놓는 용기와 믿음이 굳건히 자리잡길 바란다.
첫댓글 힘들때마다 보러 와야지.. 너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