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스아바바 협정>
[ 출처 :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존 리더, 남경태 역, 휴머니스트, 2013) ]
: (p730) …(생략)… 여러 차례 전초전이 치러진 뒤 1896년 3월 1일 아두와 외곽에서 최종 결전이 벌어졌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참패를 안겨주었다. 3179명의 이탈리아 장교와 병사들이 전사했고, 지역 충원군도 2000여 명이나 죽었다. 부상자와 실종자는 더 많았따. 전부 합쳐 이탈리아군은 40퍼센트의 전투 병력을 잃었으며, 대포와 소총 1만 1000정을 비롯해 많은 장비들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 승리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에티오피아의 전사자는 7000명, 부상자는 1만 명에 달했다. 메넬리크는 이참에 기선을 제압해 에리트레아를 되찾으려 했으나 이미 보급선이 너무 넓어져 식량 확보가 어려웠고 물 보급도 원활치 않았다. 게다가 병사들도 전투에 지쳐있었다. 메넬리크는 군대를 아디스아바바로 복귀시키고, 1896년 10월에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독립과 황제의 주권을 승인하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
[ 출처 : “현대 아프리카의 역사” (리처드 J. 리드, 이석호 역, 삼천리, 2013) ]
: (p454~455) …(생략)… 국력이 약한 유럽의 작은 나라들조차 좀 더 보편적인 인류의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희생을 강요당하던 시절이었다.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혹은 어느 정도 드러내 놓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복속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탈리아는 마침내 에티오피아가 소말리 국경 근처의 수도관을 공격했다는 주장을 펴며 1935년 10월에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더 이상 1896년의 상황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군사 기술이나 조직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항공기는 물론이고 불법적이긴 하지만 간헐적으로 사용되던 독가스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의 무장 병력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하일레 셀라시에의 군대는 40년 전의 메넬리크가 이끌던 군대와 병력의 차이가 없었던 만큼 애절한 영웅주의적 분투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신식 군대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36년 초에 에티오피아군은 완전히 괴멸되고, 무솔리니 군대가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끝내 영국과 프랑스가 지원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멀리 망명을 떠났다.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