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망(不忘)의 그리운 인연들
월당 조경희 선생님과의 교감
* 월당 선생님과의 은혜로운 교감
아무래도 그의 아호 월당(月堂)보다는 조경희 선생님이 정겹게 들린다. 1987년, 어언 20십여 년이 지나버린 시간의 무게 앞에서 조경희 선생님과의 은혜로운 교감이 나에게는 또 다른 삶의 연속을 채근하고 활력을 주입해주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예총에서 맺게 되는 인연의 끈은 이 세상과 인간과 거기에서 부수적으로 파생하는 삶과 문학과 내가 살아나가는 전체의 여건이 동승해 있었다. 그는 예총회장으로서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책임지는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사 밥벌이나 좀 할까 해서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벌써 4주기를 맞는다. 이는 그가 한생을 수필문학에 바친 철학과 열정이 동시에 인생관으로 승화했다는 점과 한국의 예술 혹은 한국의 여성계에서 사라질 수 없는 거물로 존재한다는 우리 후학들 추모의 담론이 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고려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 숙 수필가의 연락을 받고 문병을 갔다. 영양가 높다는 죽이며 과일과 음료수를 사들고 병실을 들어갔으나 이미 문병객을 알아보지 못하는 병상의 노문학가는 어쩐지 슬프기까지 했다.
나는 그와의 은혜로운 교감 몇 대목을 잊지 못한다. 예총에서 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그의 더 넓은 지향적 대국민의 봉사를 위해서 국가의 부름을 받아서 영전함으로써 그 시간이 그리 길지 못했었음에도 불구하고(정확히 말하자면, 긴 시간을 업무수행 능력과 문학성 혹은 인간성을 확인받을 기회가 없었음) 한국수필가협회 시상식과 심포지엄 등 행사에 나를 불러서 진행 사회를 맡겼다는 것은 업무적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인정을 획득했다는 증거였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어떤 사람과 집단이 나를 흠집내기 시작했다. 왜, 수필가 중에서 사회를 맡기지 않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이 계기가 되어 나는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으로 입회 등록을 마쳤다. 입회자격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생성되었다.
1998년 1월에 나는 수필과 칼럼들을 사보와 잡지에 연재한 것들을 모아서 수필집 『지성이냐, 감천이냐』를 발간했다. 물론 이전에도 시집 이외에 수상집 형태의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대학로에 나가면 진실과 교감할 수 있는 문사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언제나 예의 바르고 순수한 정감의 시인 김송배(金松培)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그와 만난 것은 벌써 10년이 지났다. 내가 예총회장을 맡고 있을 때 그가 사무직원으로 들어와서 함께 일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문단의 중견으로서 많은 시를 발표하는, 말하자면 잘 나가는 시인이었으며 시집도 여러 권 상재한 재원이었다. -중략-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다니,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그는 이와 같이 그 책의 ‘서문’을 하사했다. 이를 탐독한 그가 수필가협회 회원으로 추천하는 영광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정식 수필가로 등단하지 않았기에 수락할 수 없다는 의견에서 그는 시인들도 시집을 2권만 출간하면 한국문협에 입회 자격을 주는 것과 같이 산문집 3권이면 충분한 자격이 구비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배려의 정감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인간과 문학 모두를 신뢰하는 문단의 큰 어른이었다. 2005년 8월 5일 영면하신 그를 다시 되새겨보는 일은 의미가 깊다. 더구나 올해는 ‘조경희수필문학상’이 제정되어 후학들에게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그의 문학성과 명예를 기리는 한국문학사를 정리하여 그의 업적을 상찬하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한 회고담을 많이 들려주거나 집필을 한다. 2005년 11/12월호 『한국수필』에 「회장님, 장관님, 이사장님」이란 글을 통해서 그와의 인연과 생활단면을 들려주었고 2008년 7월호 『문학공간』에서 ‘김송배 시인인 만난 문인들’이란 기획으로「월당 조경희 수필가」라는 글에서 그를 조명한 바가 있다.
대체로 그의 문학적 공헌을 새기면서도 나와의 개인적 친분에서 오는 존경심과 그 주변(특히 한국수필가협회)의 잊지 못할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가 평소에 나에게 격려하는 일은 험난한 이 세상과 충돌하면서 극복하는 메시지로 받아 들여졌다.
그는 나의 직무수행 능력과 그 와중에서도 문단의 다양한 활동성을 항상 격려해주었다. 이러한 직관력과 근면성이 복합적으로 체질화했다는 그의 듣기 좋은 말씀은 이제 명계(冥界)를 지나서 영혼의 안식처에서도 들리는 듯하다. 그의 문학적 성과와 업적은 우리 문학사에서 영원히 꽃피울 것을 기원한다. ( 2009. 8. <한국수필>)
*회장님, 장관님, 이사장님
1987년 2월 하순 어느 날, 대학로에 있는 예총회관 2층 예총회장실에서 조경희 선생님과 가장 가깝게 마주 앉았다. 선생님이 예총회장에 재선되고 새롭게 예총 발전을 위한 사업을 담당할 신입 직원을 뽑는 면담의 자리였다.
우리 문단에서는 너무 높은 어른이라 문단행사장에서나 글을 통해 멀리서 볼 수 있었지만, 평소에 가깝게 뵐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날 특유의 화술로 몇 가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시를 쓰는 같은 문인이라는 점에 흡족해 하면서 즉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우선 기뻤다. 당시 나는 관공서에 주로 납품을 하는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시를 쓸 수 있는 여건과 시간 등이 만만치 않아 통시적인 생활인으로 전락하는데 대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였기에, 예술과 접할 수 있는 단체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조경희 선생님에 대한 호칭은 자연스럽게 회장님이었다. 회장님을 모시고 예총의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이때 회장님에게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행사라도 개회할 때는 ‘회장 인사’나 ‘개회사’가 순서에 있게 되는데 이 인사말이나 개회사를 따로 원고로 작성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구수하고 재미있게 참석자들을 매료시키는 즉석 스피치였다. 행사 명칭과 주요 참석자들만 메모를 해드리면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나의 일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국무총리나 관계 장관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 꼭 전해야할 문화예술 정책의 건의나 발전 방향의 제안 등을 별도의 인사말로 작성해 드리면 대단히 만족해하고 애썼다는 치하를 아끼지 않던 점도 그 후 다른 예총회장들에 비하면 특이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예총에서 18년을 근속하고 명예퇴임하기까지 총 여섯 분을 회장으로 모시면서 일일이 인사말을 써서 행사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했지만, 무슨 내용이 담겨지고 문화예술의 당면문제가 어떤 것이지도 모르고 그냥 읽는데도 힘든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조경희 회장님은 예총회장 재임시절에『예술계』를 창간하여 문화예술계의 비평지로서 우리 예술발전에 기여한 점과 ‘예총예술문화상’을 제정하여 한해 동안 공헌이 많은 예술인들에게 포상하여 예술인들의 창작과 공연에 대한 노고를 기리는 큰 업적은 예총의 중대 사업으로 정착되어 지금까지 그 면면을 이어가고 있다.
그 후 정무장관으로 피임되면서 나의 호칭은 장관님으로 바뀌었다. 그때 나는 두 권의 산문집을 펴내고 나서 세 권째『지성이냐 감천이냐』를 발간하기 위해 장관님께 서문을 부탁했더니 왜 수필집이 아니고 산문집이냐고 해서 나는 정식으로 수필 작품으로 등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했다. 그러나 장관님은 나의 어줍잖은 글들을 다 읽어보고는 ‘좋은 수필’이라고 평하면서 기꺼이 서문을 써주고 세 권의 산문집이면 한국수필가협회 가입자격이 있으므로 즉시 입회원서를 제출하라는 엄명에 의해 입회하고 그 후로는 회원으로서 협회의 행사나 모임에 나를 불러 진행 사회를 맡겼던 일들은 모두가 문인으로서의 신뢰를 우선적으로 챙겼던 것이다.
다시 선생님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역임하고 1971년에 설립된 한국수필가협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되면서 이사장으로 호칭되었다. 그 많은 호칭 중에서 나는 ‘회장님’이 익숙해져서 좋다. 선생님이 떠나버린 문단이나 문화예술계에서는 잊지못할 ‘조경희 회장님’의 호칭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시인)
* 『한국수필』2006. 8. <조경희 선생 추모특집>
상남(尙南) 성춘복 선생님의 은혜
1980년대 초반, 열사의 <심상해변시인학교>에서 선생님은 초대시인으로, 나는 담임시인으로 처음 만났다. 그때 지방 초등학교 전체를 빌려서 개설한 여름 시인학교는 박동규 서울대 교수가 이사장, 황금찬 시인이 교장, 김광림 시인이 교감, 이명수 시인이 교무주임을 맡고 『심상』 출신들이 각반 담임시인으로 200여명의 독자들과 여름 해변의 낭만을 만끽하면서 시와 인생을 교감하는 축제에서 선생님을 우리반 초대시인으로 모셔서 문학강의를 들었던 것이 끈끈한 우정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에 『월간문학』 출신들의 모임인 <미래시인회>가 주최하는 전국 투어의 시낭송회와 문학강연회, 문학기행에 선생님과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래시인들과도 교감하게 되었고 특히 조병화, 박태진, 김영태 선생님을 비롯한 감태준(당시 『현대문학』 주간), 유한근(문협 사무국장), 윤석산(제주대 교수), 허형만(목포대 교수), 차한수(동아대 교수), 정성수, 김남환, 김현숙, 장 렬, 박종철 시인들과도 친분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 문단의 초년병으로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시인협회 그리고 국제펜한국본부에 입회를 주선해주어서 전국 문학행사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특히 대만에서 개최된 <아시아시인대회>에 동행하여 처음으로 외국여행의 행운도 열어주셨다. 박태진 선생님과 우리 일행은 일본 동경까지 동행하여 난생 처음으로 일본의 풍광도 만끽하였으며 그 후에도 선생님과 문협 해외세미나로 중국 상해, 북경, 백두산을 거쳐서 카자흐스탄 알마타와 러시아 쌍트베르테부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자동차로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베스트, 독일의 베를린 등을 여행하면서 나를 극진히 챙겨주셨다.
또한 그후에 어느 단체에서 <금강산 뱃길 시낭송회>에 선생님과 함께 초청되어 최초로 방문하는 북한땅 금강산행에 동승한 선실에서 지내면서 온정각, 구룡연과 만물상을 돌아보고 곳곳마다 붉은 글씨로 새겨놓은 그들의 구호에 쓴웃음을 삼킨 일 도 있었다.
나는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내가 어느 개인 출판사에서 힘들게 근무하는 것을 보고 당시 예총회장 조경희 선생에게 소개하여 직원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자상함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으로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님은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과 부이사장, 이사장, 예총부회장을 재임하면서 예총회관 한 건물에서 매일 뵙게 되어 자연스럽게 교분을 더욱 공고하게 교감하게 되었고 당시 문단의 대 어른들 김동리, 조병화, 김시철, 황명, 전숙희, 허영자 선생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작품을 심취하게 되었다. 첫시집 『奧地行』은 절판이 되어 선생님 보관본을 빌려서 복사를 해서 탐독하면서 「奧地에 켜진 등불-시인 尙南」 제하에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썼다.
오랜 가뭄을 적시는 / 보슬비는 향그럽다 / 시든 풀꽃 쓰다듬는 / 따사로운 손 끝에 / 한 권의 복음서가 펼쳐지면 / 멀리서 혹은 곁에서 들리는 / 둔탁한 음절도 녹아 흐르고 / 오지에 비 젖는 날 / 숨 막히는 어린 자벌레들 / 그의 부드러운 정원에서 / 넉넉한 사랑을 손질하고 / 젖은 마음들을 말린다 // 순백의 깃 드리운 찻잔 속에 / 일렁이는 멋 가득 채우고 / 아, 내 마음 끝간 데를 몰라 / 더듬어 보는 언어들 / 저만큼 앞서 걷는 / 그림자만 따라 가느니 / 쌓인 어둠 속 우리들 사랑을 위해 / 시를 위해 / 오지를 밝힌 저 등불.
그 후에 발간한 시집(현재, 내가 보관하고 있음) 『공원 파고다』 『산조』 『복사꽃제』 『네가 없는 이 하루는』 『혼자 부르는 노래』 『해적이기 해작이기』 『혼자 사는 집』 『마음의 등불』 『봉선화 꽃물』 『내 안 뜨거워』 『길 밖에서』 『반백년 나들이』 『십삼월의 뜰』 『여든의 하루를 사는 법』 등 20여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 수필집도 많이 펴내어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상남 선생님은 항상 외모를 잘 단장하는 멋쟁이 시인으로 문단에 정평이 나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눌러쓴 베레모 시인모자와 안경, Y셔츠, 목도리와 신발에 이르기까지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외형과 더불어 해박한 지식으로 문학적인 가르침에 심취한 우리 후학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면서 “성춘복 사단”이란 별칭이 있을 만큼의 한국문단의 거목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후배나 제자들과 동료들의 생일이나 집안일까지도 챙겨주는 자상한 정감이 넘치는 문단 어른으로 공경의 존재로서 각인되기도 했다. 나의 딸이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소문을 듣고 예쁜 책가방을 사주면서 축하해주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편 선생님은 그림에도 일가견을 넘쳐 화가의 경지에 도달하여 틈틈이 스케치한 것들을 모아 몇 차례의 시화전도 개최하여 문단의 관심을 모은바 있다. 나는 표구된 시화를 몇 점 구입하여 지금도 집에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는 어떤 문학단체에의 <성춘복 시인의 밤>에서 선생님의 시집 『혼자 부르는 노래』 에 대하여 “선생님의 순정적인 체취는 자아에서 파생되는 인식(주관)과 행위(주체)를 합쳐서 우리는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는 대상에 대하여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사유를 포괄함으로써 자아에 대응하는 객관성을 질감 높게 승화하고 있는 점이다.”라는 어줍잖은 논평을 해서 청중들의 박수는 물론이거니와 선생님께도 칭찬을 들은 일도 있었다.
이런 발표문은 그 이후에 발행된 <김송배 시론집> 『화해의 시학』에도 「自我와 對我의 주정적 화해」라는 제하(題下)로 수록하여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린 바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성춘복 시학”을 새롭게 정리해서 우리 후학들이 그를 기리고 탐구하는 한편 우리 한국문학사에 금자탑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전언으로 글을 마쳤는데 얼마 전에 마침 박영배 시인이 평론집 『성춘복 시세계』를 발간하여 선생님의 작품세계의 전체를 자상하게 정리하여 조명하고 있어서 우리 후학들의 필독서로 남을 것으로 반가운 업적이다.
문인과 찍은 사진 한 장--바이칼호수 문학기행
지난 6월 어느 날, 시전문지 『계간시원』 잡지사에서 시행한 연례해외문학기행이 이르쿠츠크와 바이칼호수에서 열렸다. 전국의 문인 30여명이 바이칼호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우선 레닌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좌로부터)과 같이 정순영 시인과 본인 그리고 광주의 김 종 시인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여기에 동행한 미강(未江) 정순영(鄭珣永) 시인은 경남 하동을 고향으로 하면서 부산에서 동명대학교 총장을 끝으로 학계를 떠나 이제는 서울에서 조용히 시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김 종 시인은 시를 쓰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호남에서는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두 분 모두 우리가 문단에서 서로 작품은 자주 대해서 이름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서로가 직장에 매이다보니까 그렇고 또한 부산과 광주라는 거리감때문에 서로 교감할 기회가 없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모두가 약간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자유롭게 글도 쓰고 시인협회나 펜클럽행사에서 자주 만나면서 서로의 문학과 인생을 정감으로 소통하게 되어 지금은 아주 가깝게 아끼는 문우로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정순영 시인은 고향 하동에서도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와 동행해서 하동에 가면 초등 동창창들이 몰려와서 하동 명물인 채첩국은 기본이고 참게가리장과 참게 간장게장 등과 하동포구에서 건져올린 도다리, 전어 등 수산물을 마음껏 대접받고 오는 영광이 나에게도 제공되는 행운이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고향이 합천이라서 서로의 풍습이나 생활 방식이 유사하니까 사유의 지향점이나 시적 진실의 탐색이 서로 동일한 습성으로 나타나는 좋은 소통의 시간들을 많이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광주의 김 종 시인도 풍속화 계열의 화풍이 더욱 향토적인 정감으로 수용하는 탁월한 화가로서 유명한데 그는 먼저 정순영 시인과 통하면서 본인과도 친교적인 문우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부산으로 광주로 자주 나들이를 하면서 정의를 두텁게 쌓아올리고 있다. 마침내 우리 한국 시단의 발전을 위해서 서로가 편집위원을 맡아서 창간한 시전문지『계간시원』의 발간에 서로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표지화를 그리고 광고를 수집하고 편집을 담당하는 등 함께 소기의 목적을 향해서 불철주야 매진하고 있다. 우리들들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다.
[경남문학관, 2017 하반기 기획전]
=======사진 ========별도
*이르쿠츠크 시내 스탈린 동상 앞에서-좌로부터 정순영, 김송배, 김 종 시인
다정다감한 호인의 대학 총장
--미강(未江) 정순영(鄭珣永) 시인에게
정 총장!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글을 써 보는군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묻거나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는 첨단시대를 살아가면서 이처럼 정답게 근황을 글로 전해보는 것은 <문학의 집 . 서울>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지인들은 당신에게 부르는 호칭이 정 시인보다는 정 총장이 더욱 정감이 가는 것도 정 총장이 평소에 우리 지인들뿐만 아니라 특히 나에게서는 더욱 돈독한 우정을 베풀고 있기 때문일 것이요.
몇 십 년 전 피맛골 철거로 새로 이사한 ‘소문난 집’ 주점에서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우리면서 시국에 대한 분노를 토하다가 시를 논하던 시간들이 주마등으로 지나가고 이제 우리는 생존을 초월한 한인(閑人)으로서 자적(自適)의 여유로움을 즐기면서 여행과 시를 병행하는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네요.
참, 오래전에 초정 김상옥 선생님이 작호(作號)해서 하사했다는 아호가 ‘未江’이라는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는데 진작부터 ‘미강’, ‘미강’하고 아호를 불러서 널리 알리고 기려야 하는 것이 마땅할 일인데도 늦게 눈치 채서 죄송할 따름이지요.
그후 일년에 서너 번씩은 하동에 동행해서 그곳 죽마고우들 김재석 리장과 강경춘, 황호억씨 등과 만나서 회포를 푸는 자리에 나와 임병호 시인을 초청해서 함께 어우러지는 고향의 멋을 느낄 때가 많아 친분을 더욱 두텁게 하고 있어서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있어요.
섬진강 휘감는 지리산 자락 경남 하동 산촌 횡천에서 태어나 산수 서정을 먹고 자라다가 중앙대에서 백철 교수님과의 인연으로 석사학위까지 받고 시전문지 『풀과별』로 등단하여 첫 시집 『시는 꽃인가』로부터 일곱 번째 시집 『사랑』을 발간하면서 문학의 진수를 터득하고 이제 시하는 재미로 지내는 전업시인의 풍모를 흡인하게 하지요.
이 시집『사랑』은 270여편의 작품과 한국의 명사 150인이 함께 읽고 간단하게 감상멘트를 붙여 우리 시단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문학업적으로 봉생문화상, 부산문학상, 부산시협상, 여산문학상, 한국시학상과 현대문학 100주년 기념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네요. 그리고 제6대 부산시인협회 회장, 국제펜부산지역 회장과 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을 역임하는 공적이 등단 45 여년만에 세운 쾌거였지요.
그리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부산과학기술대 총장과 동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서 한국 대학교육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항상 내면심정에는 전업시인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 문학청년의 기질을 져버리지 못하는 전형적인 시인이었지요.
섬진강 / 오백리 / 하동골에는 // 산새가 울어서 꽃을 피운다 // 보고픈 / 고향 친구 / 누이동생이 // 세상 사람 / 시샘 끝에 / 산에 들어서 // 꽆 피우는 / 산새가 / 되었나 보다 // 짚신자락 / 고달픈 / 나는 나그네 // 전설처럼 / 밤 지새는 / 산짐승되어 // 소매 끝에 / 눈물을 / 적시다 보면 // 어느새 / 하동골에 / 꽃은 지리라.
--『하동골에서』 전문
또 하나 즐거운 일은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참전기념공원에 죽마고우들과 경향각지의 지인들이 뜻을 모아 위의 작품이 각자된 ‘정순영시비’가 세워졌음에 기쁨을 금치 못하고 직접 방문했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우리의 정감은 시전문지 『계간시원』을 공동으로 발행하는 문단사적 업적을 이행하는 노력을 함께 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불변의 우정으로 영원할 것이네요. 부디 건강 유념하시고 언제 짬을 내어 피맛골 [소문난집]에서 맥주나 한 잔 합시다.(시인)
* [문학의 집 . 서울] 5월호에「 문학인이 띄우는 편지」로 수록하였는데 6월호에 정순영 총장의 답신 글이 게재되었다.
*샘 깊은 시인
--청송(聽松) 김송배金松培시인님께
정 순 영鄭珣永
만나 뵙고 헤어져 하루만 지나도 보고 싶은 송배형님, 문학청년 시절부터 청아하고 준수한 시적인상을 새기고 있는 존경하는 김후란 시인님께서 제게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다. “김송배 시인이 삶의 여백을 채워주는 <문학의 집-서울>소식지 2017년 5월호에 정순영 시인에게 편지를 쓰셨다”며 “정시인의 답장 원고를 청탁한다”는 말씀에 황송스럽게 감동하여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틀 후, 언제나 그렇듯이 자상하고 배려 깊은 송배형님의 편지가 실려 있는 <문학의 집-서울> 187호와 원고청탁서를 받았습니다.
송배형님, 참 고맙습니다. 그 고마움의 첫째는 우리 문단에서 드물게 온 인생을 오직 문학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문학창작을 하는 일이건, 문단사무를 하는 일이건, 문학교실을 열어 문학강좌를 하는 일이건, 초지일관 청년 같은 열정으로 매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학정신이 저와 같이 출중치 못한 시인의 가슴에 불을 지피어 전업시인으로 신들메를 고쳐 매게 하셨습니다.
굳이 한국예총의 월간“예술세계”주간,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 시분과회장, 부이사장 등으로 봉사하신 일과 후학들을 위하여 『여백의 시학』 등 14권이 넘는 시창작의 길잡이 저서를 발간한 것, 한국문단에서 그 권위로 우뚝한 “조연현문학상”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신 업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선후배 문인들뿐만 아니라 <청시(聽詩)>모임 등 숱한 제자들과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형님의 문학인생이 귀감이 됨은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 공직을 하는 동안 문학의 언저리를 떠돌며 시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제 퇴직하여 세상일 뒤로하고 고향인 시림詩林으로 돌아와 시심을 새삼 갈고 닦을 때, 변방을 드리운 시원한 그늘과 진한 솔향기를 퍼뜨리는 문단의 큰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습니다. 그 소나무 그늘의 솔바람은 맑기도 청명하여 세월에 찌든 마음을 깨끗하고 온화하게 헹구어 줍니다. 세상풍파 모진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뿌리 깊은 문학인생을 살아 온 늘 푸른 소나무 청송 김송배 시인이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다음의 졸시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거친 바람에 흔들린 나무는 뿌리가 깊다.// 언제나 소박한 정情을 새겨 손을 잡는/김송배 시인의 샘 깊은 시엔/생애生涯의 진한 향기가 감돈다.//뿌리 깊은/삶을 반짝거리는 거목巨木이기에/그 가지에/봄/여름/가을/겨울/꽃 피어도 좋으리.
--졸시‘샘이 깊은 시’(한국시학, 2017 여름호)
송배형님, 참 고맙습니다. 이토록 혼잡한 문단의 현실 속에서 후학들을 위해 버팀목으로 굳건하게 서 계셔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많은 문인들이 세상의 모진 바람을 피해 형님을 찾는 이유가 언제나 의지해서 토로할 수 있는 문단의 큰 소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형님도 저도 경상도 사내라 면전에서는 멋쩍어 드리지 못한 말씀을 이렇게 드릴 수 있는 공개편지의 지면도 참 고맙습니다. 이 기회에 평소 우리에게 잔잔한 진정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는 <계간 시원>편집국장 강명숙 시인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제자의 행실과 그 마음가짐을 보면 그 스승의 가르침을 알 수 있지요.
얼마 전 저의 서재 오두막이 있는 고향 하동 걸음 때는 봄이 무르익어 섬진강의 푸른 물에 싱그러운 건너 산이 빠져 초록 물감이 번져 흐르고 잿두루미 몇 마리가 흰 모래밭을 성큼성큼 걷고 있었지요. 다음 가까운 날 형님께서 좋아하시는 하동의 참게장을 곁들인 들깨가리장집에 갈 때는 꼭 강명숙시인도 동행 합시다. 아하, 이 편지를 임병호 시인도 보시면서 침을 삼키시겠지요. 당연히 모셔야지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 창간한 『계간 시원』 매호마다 명작의 표지화와 간단한 그림해설까지 기꺼이 주시는 광주의 김종 시인님께 고맙다는 예의 한번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고 늘 미안해 하셨지요? 전들 오죽 하겠습니까, 언제 한번 피맛골 소문난 집에라도 모셔다가 맛있는 보쌈 안주에 고마운 마음 가득 넘치도록 소맥 잔을 드립시다.
송배형님, 형님의 덕담을 듣는 술자리 말석에 끼어들어 일 년쯤 되어서야 생각 깊은 제자사랑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가끔 쏘가리처럼 톡 쏘는 제자를 아끼는 훈계를 보았습니다. 그 넓고 따뜻한 가슴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을 가까이 만난 지 10년 조금 지났지만 70년쯤 되는 피를 나눈 친형제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리산 북쪽 계곡 합천이 형님의 고향이고 남쪽 계곡 하동이 저의 고향이라 그 뿌리가 같은 연유이기도 하겠지요. 합천 소나무나 하동 소나무나 매 한가지 청송이지요.
존경하는 송배형님, 이제는 좀 늙은 청년이시니 약주 적절히 즐기시고 늘 이 봄날처럼 싱그럽게 정담의 꽃을 사철 피우며 건필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다음 주에는 오랜만에 소문난 집 서형兄 누님 만나러 가시지요.(시인 . 전 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
문학과 동행한 절망의 시대
--내 삶에서 만난 문학
“詩여! 위대한 진실이여, 나를 구원하는 인생의 등불이여. 죽는 날까지 그의 품 안에서 영원히 ‘나’를 인식하고 성찰하며 또한 정립하리라”-지난 가을에 펴낸 제11시집 『나와 너의 장법』 ‘시인의 말’ 끝부분에 적어놓은 말이다.
빈한(貧寒)한 아버지의 고달픈 삶을 눈물겹게 고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과 어머니의 가족 살리기 위한 고행(苦行)은 어린 나의 마음을 쓰리게 하고 있어서 시가 과연 나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아하, 이것이 바로 내가 성취해야 할 일생의 해법이라는 그 마력에 이끌려서 헤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 어렵게 책을 구해서 독서에 몰입했다. 『새벗』, 『소년세계』를 읽었다. 그리고 『학원』과 『학생시대』를 대하면서 시와 소설에 매료되었다. 한 여학생이 써놓은 ‘노벨 문학상은 나의 것’이라는 야무진 장래의 희망에 감동했었다.
나에게서 문학적 영향은 아마도 천자문을 읽고 명심보감과 논어를 읽으면서 크게 감응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불학시면 무이언(不學詩 無以言)이라는 논어의 글에서 공자님이 아들 백어(伯魚)에게 한 말은 잊을 수가 없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것이 없다는 시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었다. 결국 시를 공부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준엄한 교시(敎示)에 흡인되어 아, 이것이 내가 살아갈 지표라는 굳건한 인생의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 용케도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인생, 그 오묘한 상관성의 해법을 탐구하는데 나의 일생을 건다는 각오가 넘쳤다. 누구는 그것이 쌀 한 됫박도, 연탄 한 장 값도 안 되는, 그 고상하면서도 고행인 그 길을 왜 가느냐고 핀잔을 던졌다. 그러나 인내로 감수해야 했다. 시가 인생과 동행해야만이 어떤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전신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촌에 지천으로 널린 만물에게서도 어떤 감상주의에 젖어서 감동하고 질펀한 산촌 풍경과 별에서도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징징 짜는 시절도 지나 이제는 어엿한 군인이 되어 외출나간 원주시내 서점에서 『詩文學』 창간호(1965년 4월-청운출판사.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를 대하고부터 습작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문학과를 진학한 것도 아니어서 문학의 선배나 지인이 없었다. 막연하게 청록파의 박목월 시인을 사모하게 되고 그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모작과 베끼기로 시법을 공부하게 되어 박목월 선생님 사후에 『心象』지로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시란 무엇인가를 명징하게 해답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리에서 작품을 쓰고 시집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문학적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시적 진실은 우리 인간의 삶에 관한 스토리라는 것이었다. 휴머니즘이라고 도 하지만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면서 새로운 인생관을 탐구하는 것이 시의 주제가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려운 체험이 너무나 많았다. 좌절과 절망으로 혹은 고뇌와 갈등으로 심지어 자살까지 위험한 심리적인 결단까지도 생각해본 적인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를 끄적였다. 나의 암울했던 체험에서 창출한 이미지가 새롭게 재생되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시를 통해서 심적인 안온과 활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되고 외적으로는 나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약 시가 없었고 시가 아니었다면 내 생애는 어떠했을까 적이 걱정되기도 했었다.
일찍리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면서 무지(無知)의 자각을 외쳤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혹시 영육 (靈肉)을 동시에 학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러한 위급한 현실에서 초연(超然)으로 가는 정도를 찾아서 아직도 방황은 지속되고 있으니 아아, 시여 나를 구원하라.
거기엔 만유(萬有)의 자연과 대화할 수 있으며 골돌한 나와의 탐색을 통해서 새로운 시간과 경지를 개척하는 활달한 삶이 다시 생성하고 있을지니. 아, 지금도 어설프지만 이 잡다한 인간세를 탈각(脫殼)하고 형이상적인 세계, 우주로 지향할지어다.(문학의 집.서울)
내가 당부한 주례사
만물이 생기에 넘치는 화창한 계절에
우리 인생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성스러운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하였습니다.
오늘 신랑 000군과 신부 000양이 맺는 백년가약은
두 사람의 슬기로운 은총으로 사랑을 굳게 약속하는 인륜의 대사입니다.
이 행복한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서 공사다망한 가운데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신
양가 친척과 친지 동료들을 비롯하한 하객 여러분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신랑 000군과 신부 000양은 그동안 엄격한 가정교육과
사회적인 인성수양을 통해서 수준 높은 인격도야에 매진해온 엘리트들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인생 성숙을 위하여 꾸준히 갈고 닦아온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부터 독립된 가장과 아내로서
이 사회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 달콤한 사랑이 더욱 알차게 영글어서
가정과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격체로 발전하는데
서로의 믿음과 열정을 쏟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영광된 축복 속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이 부부에게
나는 간곡하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자 합니다.
이제 부모님들의 온화한 품을 떠나서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루지만
우리가 그동안 소흘하게 여겼던
부모님들의 애틋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은혜로 보답하는 효도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소중함을 알고
건강에 각별하게 유의하면서
부모님들로부터 익혀온 교양과 지식을 근본으로 하여
윤리와 도덕을 귀중하게 실천해 나가는 것을
가정생활의 덕목으로 간직하고
행복한 가정을 설계하는데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진실한 사랑으로 감싸고 이해하면서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찾는데 서로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미래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이 발전을 향한 전진입니다.
인생의 앞날에는 생각처럼 평탄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두터운 서로의 사랑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인내와 극복은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양가 부모님께도 당부드립니다.
이제 부모님의 품을 떠나서 독립된 가정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첫 걸음마에 불과합니다.
오늘 새로이 출발하는 이들이 물질적, 정신적인 성숙과 함께
가정이나 인생이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그동안 보살피고 이끌어 주셨던 정성으로
더욱 그윽한 애정으로 인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오늘 이 자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오신
하객 여러분께서도
이 부부가 한 가정의 인격체로서 백년해로할 때까지
이들이 올바른 삶과 훌륭한 인생을 위해서
평소에 베풀어 주셨던 따뜻한 정성으로
항상 변함없는 지도 편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신혼부부는
행운의 광명이 비치는 새길을 힘차게 걸어갑니다.
즐거움과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보람과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 과정에서
밝고 활기찬 서광이 비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부디 새 가정에 진실된 사랑과 지순한 믿음의 충만으로
슬기롭게 행복을 창조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주례의 말로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20회 이상 결혼식 주례로 축복했다)
시와 예를 공부했느냐?
언제나 시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인용하는 명언이 하나 있다. 논어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문장인데 내용인즉슨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와 함께 공부하는 친구 진항(陳亢)의 영특한 감응에 놀라는 고사이다. 아들 백어는 어쩐지 공부하는 진도나 성적이 여느 학동보다는 우위에 있음을 진항이 감지하고 필시 이는 그의 아버지(공자)가 선생이므로 집에서 따로 교습(요즘으로 말하면 과외)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의구심이 생겼다.
어느 날 진항이 백어에게 ‘당신은 선생님에게 특별히 다른 말씀을 들은 것이 있느냐?(子亦有異聞乎)’하고 물었다. 백어는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번은 내가 종종 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시를 배웠느냐?(學詩乎아)’ 하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고 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이야기(말)할 것이 없느니라(不學詩면 無以言이라)’고 해서 그날부터 시(‘시경’을 말함)를 배우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다른 날에 또 ‘예를 배웠느냐?(學禮乎아)’ 하시기에 이것도 ‘아직 배우지 않았나이다’고 했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가 없느니라(不學禮면 無以立이라)’고 해서 예를 배우고 공부했다는 이 두 가지의 말만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난 진항은 ‘옳다. 한 가지를 물어 보았다가 세 가지를 배웠도다. 시를 듣고, 예를 듣고, 또 군자는 그 자식이라 해서 특별히 애써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고 기뻐하면서 자신도 시와 예를 공부해서 백어처럼 실력이 우위에 이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진항의 그 명민한 감응이 늘 부럽다.
공자는 시와 예를 인간 교육에서 근본으로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시와 예를 왜 배워야 하는지 위의 이야기를 통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담론)할 것이 없다는 것과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왜 시를 배우고 예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까. 잘 아는 바와 같이 시는 인간을 성찰하는 마력을 가지고 온갖 갈등과 고뇌를 여과하는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은 다시 존재란 무엇인가 혹은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나에게 부과된 인생을 다양하게 분석하고 정리하는 가치관을 지향적으로 유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인들은 백어나 진항과 같이 학시(學詩)나 학례(學禮)에는 정성과 심혈을 투자하지 않고 명함에 ‘시인’이라 명칭만 찍어 남에게 과시하면서 자신의 독백이나 사물의 스케치 등 주제가 함축되지 못한 낙서 따위를 시랍시고 긁적이는 경우를 더러 대하게 된다. 이는 시에서 인생의 표현을 배우고 예에서 인생의 도리를 배우려는 노력을 쏟지 않아서 진정한 시인의 정신이 결여된 채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예의마저 갖추지 못하는 인성부재가 만연하고 있는 세상을 엉터리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거나 쓰면서 한 시인의 인격 속에서 분출하는 진실이 우리 인간들의 휴머니즘을 탐색하게 되고 만유(萬有)의 자연 섭리와 교감하는 깊은 사유와 정서를 통해서 새로운 인생관을 투영하는 혜안과 지혜가 충만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따라 ‘너는 시와 예를 배웠느냐’는 공자의 말씀이 가슴을 섬짓하게 후비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공자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왜 『시경』을 배우지 않았느냐? 『시경』의 시는 감흥을 일으키며, 사물을 살필 수 있게 하고, 무리와 어울릴 수 있게 하며, 불의를 나무랄 수 있게 하고,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
게 하느니라’ ([문학의 집 . 서울] 118호(2011.9)
고전을 통한 지혜 일깨우기
우리는 오늘을 알기 위해서 과거를 알아야 하고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서 오늘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일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현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온고지신은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으로 “오래된 것을 배워 새것을 알면 가히 스승일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고 한데서 유래되었는데 고(故)는 과거의 사상 즉 역사라는 뜻이며 온(溫)은 고기를 모닥불에 끓여 국물을 만든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거 역사의 깊은 통찰은 난세(亂世)를 극복하는 교훈이 될 수 있고 치세(治世)나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큰 바탕으로 삼을 수도 있게 한다. 대체로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려면 고대와 신라, 백제, 고구려 이른바 삼국시대 역사의 전반을 응집시킨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있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있다. 그리고 조선조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어서 우리의 과거를 일별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본기, 세가, 열전 등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 방법)으로 씌어진 삼국시대의 정사(正史)인 반면,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사건의 원인과 결과 중심의 실증적 기술)에 가가운 설화중심의 야사(野史)라고 할 수 있다.
일연 스님이 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는 고려가 최씨 무신정권의 전성기에서 몽고 침입과 강화 천도(遷都), 몽고에 굴복한 국난(國難)의 시기였는데도 사라져가는 고문서와 설화 등을 모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잠시 깊은 사유(思惟)가 필요한 대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 제21데 소지왕이 어느날 천전정이란 곳으로 소풍을 나갔다. 난데 없이 까마귀와 지가 몰려와서 울부짖었다. 그 가운데 쥐가 사람의 말을 하면서 이르기를 까마귀 날아가는 곳을 놓치지 말고 쫓아가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왕은 이상히 여겨서 용감한 기사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였으나 어느 지점에 다달았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운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겉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개견이인사 불개일인사(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이 편지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만약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게 된다.)
우리는 잠시 사유가 필요하다. 아니 망설임이 지나쳐서 당황하게 된다. 열어봐야 할 곳인지, 열지 말아야 하는지, 그러나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말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리고 불개(不開)하기로 했으나 옆에서 보고만 있던 점치는 관원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을 말함이요, 한 사람이란 곧 왕을 마랗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편지를 개봉하였는데 “射琴匣-사금갑”(거문고 집을 쏘아라)라고 적혀 잇었다.
왕은 즉시 소풍을 취소하고 內宮으로 돌아와서 왕실에 비치된 거문고집을 화살로 쏘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거문고집 속에는 내전(內殿)의 범수승과 궁주가 은밀하게 간통을 하면서 반란을 모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화살을 맞고 즉사하였다.
그 후로 매년 정월 첫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에는 모든 일을 꺼리며 조심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보름날에는 까미귀의 제삿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하는 정성도 보엿다. 이런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하고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편지를 전했다고 해서 그 연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고 지금도 경주에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고전을 통해서 많은 지혜를 일깨우는 활력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데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나 하는 것은 비록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판단하기 쉬운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현상들을 현실에서 많이 부닥치게 된다. 해결방법은 온고이지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1997. 4. 『월간당뇨』)
나의 가상 유언장
--“詩人”이라 새긴 빗돌(碑石) 하나만
(나의 마지막에 대한 행복한 상상) 가상 유언장이라? 약간 황당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에 대한 행복한 상상’이라는 부제에서 안도감을 갖는다. 아직 마지막이라는 말을 떠올려본 바도 없고 더구나 유언을 글로 남겨서 전해야 할 위치도 아닌 것 같아서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직 팔순(八旬)도 안지난 사람이 아무리 가상이라지만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상상 이외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몇 도래가 간혹 모여서 한담(閑談)하면서 술을 마실 때면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찌끌이고 있으나 누구 하나 실제로 깨끗이 정돈했다는 말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체험을 천천히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축적했던 지식과 지혜를 남김없이 후진들에게 물려주고 이젠 홀가분하게 개인의 취미에 심취하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순리를 따르는 일을 실행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흔한 말로 그동안 흔적으로 남아 있던 사진들도 유품(遺品)으로 남길 것 몇 장만 제외하고 모두 버리고 나에게 모든 지식을 제공했던 서적들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는 반농담으로 나누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실제로 한생을 마감하면서 준비해야 할 일과 사후(死後)에 자식들에게 당부해야 할 몇 가지의 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 미완성인 인생 80년에서 성과로 간직한 13권의 시집 외에 산문집, 평론집 등을 전집(全集)으로 묶어서 발간하는 일이 아직도 진행중인데 이를 완성해서 각 도서관이나 동행했던 문인들과 공유하는 일이 남아있다.
이 외에는 따로 남길만한 것이 없다. 막대한 유산이나 웅대한 명예 그리고 후대에 물려줄 지적재산 등 하나도 관심과 영향력을 미칠 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단히 홀가분하면서도 명예롭다는 평소의 신념을 지울 수가 없다.
다만, 하나뿐인 아들에게 부탁이 있다면 너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부모의 사진과 가계(家系)를 알 수 있는 족보(族譜)는 반드시 간직하면서 조상들의 위의(威儀)와 그들의 행장에서 다양한 교훈을 습득하고 승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서적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분배하고 그래도 남으면 시골 도서관에 기증하여 독서하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권한다. 그것이 역경(逆境)을 극복하면서 시인의 길을 일생동안 고수한 아버지의 진실이 깃든 교훈임을 명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승을 영원히 하직한 후에는 조그마한 자연석에 <시인 김송배 여기 잠들다>라고 새긴 빗돌(碑石) 하나 세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옛 시인을 떠올리게 하면 더 없는 영광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유언장을 써놓고 보니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들이 얼마만큼 남아 있을까 다시 유추해보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가상이니까 실상과는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지만 과장되거나 허구가 아닌 현재의 심경, 너무나 연약했던 일생에서 그래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인간들의 생태를 교감하면서 나름대로의 인생관 탐구를 위해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열정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에는 눈물겹도록 스스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승 훌쩍 떠난 영혼도 가난과 절망의 고행을 이제 훌훌 벗어버리고 영계(靈界)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또 다른 혼불을 영원히 지피시라.
(2021. 12. 한국문인)
아빠, 별탈 없으시죠
-여보세요. 아빠, 별탈 없으시죠/ 딸에게서 오랜만에 문안전화가 왔다/ 코로나로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까/ 많이 걱정스러운가 보다/ -그래. 너희들도 괜찮지/ 서로 오가지도 못하고 불안해서/ 전화로,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 받는다// 동네 작은 볼일도 마스크를 챙기고/ 거리두기로 쉬엄쉬엄 걸아가야 한다/이 무슨 위난인가, 환란인가/ 지구촌이 팬대믹 현상으로/ 친구 만남도 가족 행사도 없어졌다// 삭막한 거리에도 춘삼월은 왔지만/ 오늘도 확진자들을 돌보는 천사들은/ 가슴이 차가웁다, 시간이 무겁다/ 주어진 삶의 넓이는 오로지 기도뿐이다.--「시간이 무겁다」 전문
한자말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봄 같지 않다는 말로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지난날에도 봄날 같지 않은 계절의 횡포가 있었지만 올해의 봄은 유난히도 우리들 가슴을 조이게 하는 역질(疫疾)이 횡행(橫行)하고 있어서 더욱 어려운 봄을 살아가도 있다.
작년부터 우리들의 생활과 마음을 뒤죽박죽해 놓은 코로나19는 지구촌 인류를 위난으로 몰아넣고 있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에 위협을 야기시키고 있다. 우선 마스크를 착용해라.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해라. 손을 자주 씻으라. 몇 명 이상 모임을 자제해라. 9시 넘으면 영업을 중지해라는 등등의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도록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일상생활에도 여간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지난 설날, 우리 고유의 명절인데도 자식들과 일가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새해를 기원하는 세배를 위한 모임이 없었다. 아들 내외는 오전에, 딸 내외는 오후에 시차별로 시간을 정해서 겨우 세배를 마치고 덕담을 나눈다거나 서로의 새해 설계를 토론하는 일도 없이 그냥 돌아가는 현상이 벌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배돈은 다음 뵈올 때 주세요” 손자, 손녀 녀석들의 개구쟁이적 소망을 전화로 들으면서 한바탕 웃기도 했었다. 가족도 4인 이상 모이면 위법이라서 아이들은 집에 두고 왔단다. 사실은 손자손녀들이 더 보고 싶은데 말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역병은 지구촌 전체를 팬데믹 현상으로 몰아 전 인류와 자연을 파괴 또는 해체의 수준으로 위협하고 있다. 뉴스마다 오늘의 확진자가 얼마. 사망자가 얼마, 격리수용자가 얼마라는 통계로 슬픈 소식을 전하고 있어서 집안 친척 결혼식에도 불참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대 환란의 시대에 우리들은 다시 봄을 맞이하였다.
먼 산에는 아직도 눈바람이 몰아쳐도 산천에는 꽃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는 봄노래 가락은 멈춘지 오래다. 삭막하기만 세상, 지구의 이 대재앙은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모두가 측은한 표정으로 극복의 의지로 인내하고 있다.
오늘도 병원 일선에서 희생정신으로 치료에 염념이 없는 간호사와 의사들의 정성과 용기와 노력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곧 예방접종이 활성화하면 감염 확진자는 없어지겠지. 그날의 환희를 기원할 뿐이다.
“그래, 아빠는 별탈 없으니 너희들도 조심하거라” 전화로만 안부를 묻는 세상에서 올봄도 무거운 햇살은 무표정하고 어눌한 심정으로 차갑게 내려 쪼이고 있다.-시인 이야기-[2021. 4. 심상]
아찔했던 나의 병치레기
인간이 살아가면서 신체적인 고장으로 아픔을 견디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신세를 많이 지게 되는데 이 상처는 외적으로 어떤 사고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와 평소의 부주의로 내적인 신체의 손상으로 병을 앓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워낙 약골(弱骨)인 신체조건도 있지만 자주 병치례를 겪었다. 어릴 때 이웃에는 마마가 만연해서 또래의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많이 보았으나 나는 무사히 지내왔다. 그러나 가끔 이질에 걸려서 설사를 하거나 학질을 앓아서 온몸을 오돌오돌 떨었던 기억은 지금도 떠올려진다.
그때 “엄마 손은 약손이다” 엄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거나 배를 만지면서 사랑으로 아픔을 다시리던 일들은 이러한 효험으로 말끔하게 나았던 기억도 새롭다. 어느 날 동네 쪼무래기들과 우리 집 마루에서 뒹굴면서 놀다가 옆 담장 밑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라는 누구의 말에 뒤돌아보면서 마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내 이마에는 피기 낭자하여 두 손으로 움켜쥐고 떨고 있을 때 재빨리 엄마가 나타나서 헝겁으로 감싸고 지혈을 했다. 하마터면 눈을 다칠뻔 했으나 다행이라고 했다.
이튿날 시골 골짝까지 방문하면서 약을 파는 돌팔이 영감님이 전해준 가루약을 바르고 약 15일만에 나았는데 이게 왠 일? 왼쪽 이마에 약 2Cm 정도의 흉터가 보기 싫게 남아 있었으나 성인이 되도록 그대로 살았다. 긴 머리칼로 덮거나 모자를 쓰고 이를 감추고 다니던 어느날 한국연극협회 작가, 연출가인 강유정 선생이 내 이마의 흉터로 좋은 인상을 나쁘게 하고 있으니 당장 수술하라는 권유였다.
그는 서울대 어느 지인 의사에게 전화를 걸고 이튿날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 의사의 진료실로 찾아가서 바로 집도를 하고 흉터를 도려내고 약물로 치료하였다. 집안에 갑자,을축하는 형님이 계셨는뎊 나의 인상을 보고는 상둥하 세 군데에 상처를 입을 일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인데 그의 말대로 발목에, 손바닥에 몇 바늘씩 꿰매는 상처를 치료한 일이 있었다.
그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직장의 스트레스와 문학한다는 핑계로 그들과 어우려져서 매일 술마시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외쪽 가슴을 치미는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부정맥과 위장에 탈이 났으니 좀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처방이었다. 대학로 근무처 바로 건너 서울대 병원 내과과장에게 특진을 받으리라 마음 먹고 기다리는 중에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났다. 예총회원 단체인 한국연예인협회 가수분과 회원이며서 서울대병원 비상계획실장으로 가수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라서 서슴없이 병을 자랑하고 내과과장 특진 예약을 부탁하였다.
거긴 특진 예약을 해도 그렇게 빨리 진찰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어디에 전화를 해서 다화를 나누더니 며칟날 부천시 어디로 내과병원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즉시 위 내시경을 하고 면담을 하는데 이외로 위에 조그마한 점이 보인다면서 콩알보다도 작은 약을 2주일분 처방해주고 2주후 며칠에 오라는 것이었다.
왠 일일까. 약 복용 이틀만에 통증은 사라지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나는 그 의사에게 기적이라고 말했다. 다시 2주 후에는 헤리코박트까지 잡아야 한다면서 이제는 파란색 약을 처방받아 모두 복용한 후에는 지금까지 위장병에는 아무 이상 없이 지내오고 있다.
그후 오랜 기긴이 흐른 후에는 또다시 내 육신에 큰 변고(變故)가 일어났다. 어느날 문학기념회에 참석하고 과음을 했나보다. 귀가해서 잠들었으나 평소의 습관대로 새벽 4시에 일어나 밀린 원고를 마저 썼다. 조반식사 시간까지 재떨이에 쌓인 담배꽁초가 무려18개비. 놀라지 마시라. 하루에 세 갑의 담배를 피웠으니 골초에다, 과음에다, 과로가 겹쳐서 발병한 것 같다. 잠간 쉬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담배개비가 손끝에서 저절로 마루에 떨어졌으나 옆에서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는데 말문이 막혀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5월5일 어린이날이라 아들이 집에서 쉬고 있어서 급히 동내 병원을 찾았으나 큰병원으로 빨리 가보라는 말에 강북삼성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더니 바로 MRI, CT, X-ray 등 검사를 마치고 입원을 했다. 1주일간 정밀검사 후 처방전을 들고 퇴원해서(2009, 5. 5.~13. 신경과) 지금까지 그 약을 복용하면서 3개월마다 재진(再診)을 받으면서 무탈(無頉)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확인해본 일이 있는가? 몇 년전부터 두 달에 한번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강북삼성병원 신경과를 찾는다. 혈압도 정상, 혈당도 정상- 그런데 왜 병원에 와서 상담을 하고 혈압약, 당뇨약 등 약처방을 받아서 매일 복용해야 하는지? 담당의사는 말한다. 예방을 해야 큰 병이 침노하지 않아요- 아아, 그렇구나. 넘어질 뻔 했던 육신이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부족하거나 혹은 넘치는 혈류(血流)의 향방을 잔잔하게 간추리는 생명 존재의 잠언(箴言). 신경과 병동에는 뇌졸중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너는 어떠냐. 반신이 마비되어 보행(步行)이 불편한 환자들과 섞여있으면 아직 나의 존재는 건재(健在)함을 느끼지.- 담배를 끊으세요. 술을 줄이세요. 설탕커피는 나빠요. 운동을 하세요- 귀에 쟁쟁한 훈시(訓示)가 나의 존재를 실감나게 흡인(吸引)하고 있다. --「나와 너의 장법(章法) . 50」 전문
이렇게 환시(患詩)를 몇 편 써서 그동안의 경위를 메모해 두었다. 다시 나에게는 노환(老患)인 알 수 없지만 신체에 이상이 발견되고 있다. 정기건강검진에서 나타난 폐와 위에 조그마한 점이 보여서 4일간 입원(2023.12.18.~22.)해서 정밀검사를 한 결과 폐에 종양 초기로 판정되어 지금도 치료 중에 있는 것이디.
나의 병치례는 다양하다. 병들고 나서 육신의 소중함을 느낀다. 평소에 유해한 음식 조심과 적당한 운동 그리고 무욕(無慾)의 건전한 정신이 건강유지에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장수(長壽)에도 영향을 미치니 모두들 유념해야 하겠다.*
주유소를 찾는 시인들
여름 열사(熱沙)의 바닷가 모래밭에서 벌어진 심상해변시인학교에 시인들만 무려 100여명이 참가하였다. 진행요원과 담임시인으로 차출된 시인들을 제외하고는 무료한 시간을 나무 그늘에 모여서 시담(詩談)을 하거나 몇몇은 벌써 근처 주점(酒店)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일배일배 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선배가 말했듯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시인될 자격이 없다는 교훈(?)을 철저하게 실천이라도 하는 양 시인들은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저녁때 모든 일과가 끝나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학교 근처의 술집을 찾아 헤맨다. 누가 외친다. “주유소가 없어.” 그 주유소는 바로 이 <酒有所>, 술이 있는 곳, 술집, 대폿집, 주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교문 밖에는 누군가가 큼직한 글씨로 [酒有所 ⬈] 라고 친절하게 술집 가는 길 방향을 표시해 놓고 주객(酒客)들을 유인하고 있어서 누구나 쉽게 술집을 찾아가서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자동차 기름 넣는 주유소를 해학적으로 표기한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라서 모두들 화살표 쪽으로 찾아간 술집에는 이미 만원사례였다.
우리 문단에는 오래전부터 주류(酒類) 3인방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문학 행사에 모이면 의례히 주점부터 찾아나서는 술 애호가들이다. 수원의 임병호, 양평의 정성수, 그리고 서울의 나였다. 우리들은 행사 있는 날만이 아니고 가끔 통화해서 서로 주회(酒會)를 부정기적으로 갖는다. 그러나 요즘은 정성수가 늑막염인가 앓아서 금주했다가 청하 1병은 거뜬하고 임병호도 심장병을 앓아서 완전 금주상태라서 그후에 동참한 정순영 총장과 자주 만나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말아서?) 홀짝이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밥상을 받을 때마다 술 주전가 함께 등장하고 반주(飯酒)를 즐기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나도 자연 술 시중을 들면서 홀짝홀짝 한 잔씩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렇게 한 음주연습으로 술을 배우고 애주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술 마시고 주정(酒酊)을 부리거나 누구와 시비를 하거나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거나 또는 실수를 한 바는 없었다.
가끔 나를 모함하는 자들이 나를 알콜 중독자라느니 술주정뱅이라느니 술만 마시면 추태를 부린다느니 등의 온갖 비하(卑下)로 모욕(侮辱)하는 유언비어를 문단에 퍼뜨린 일도 있으나 나는 전혀 무관하기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술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 이를 칭(稱)해서 「술 詩」라고 시제(詩題)를 붙여서 약 20여편을 써서 제13시집에 “참새 방앗간을 그냥”이란 소제(小題)로 수록한 바 있다.
별 다른 행사가 없는 날에는/ 혼술(혼자 술마심)을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마시지 않는다, 집에서 먹지 않는다/ 옛날 자주 찌끌이던 음주 작심(作心)이/ 울적하다, 답답하다는 핑계로/ 지금 서서히 무너지면서 혼자서도 즐긴다/ 그대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면/ 주저하지 않고 내 심정을 경청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사랑이란 무엇이냐는 등/ 결론적으로 시는 무엇이다라는/ 나름대로의 정의가 모아지면/ 스산하던 영혼도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인다/ 어쩌면 그대의 비밀스런 마법이/ 나의 서글픈 심중의 고통을/ 한 잔 한 잔속에 풀어 희석시키는가 / 어제는 친구가 죽어 슬퍼서 한 잔/ 오늘은 옛 여인 전화가 와서 또 한 잔/ 내일도 비틀거리던 허무가 사라져서. 일배 일배 부일배(一杯一杯 復一杯).(「혼술에 대한 미련」 전문)
사람들은 간혹 술을 왜 마시나, 마시면 무슨 효과가 있나는 등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나름대로 술 철학이 있다. 술을 마시면 우선 기분이 솔직해지고 대담한 용기가 생기고 교우(交友)관계가 원만해고 혈액순환이 잘된다는 점을 술 마시는 변(辯)으로 토하고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터득한 주법(酒法)이 있어서 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편이다.
遠近不問(원근불문)-멀거나 가깝거나 불문임
淸濁不問(청탁불문)-청주나 탁주나 구분치 않음
外現不問(외현불문)-외상이냐 현찰이냐 따지지 않음
晝夜不問(주야불문)-밤낮을 가리지 않음
老少不問(노소불문)-노인이나 젊은이나 상관없음
이를 5대 주법이라고 한다. 이런 주법을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생기』나 변영로 선생의 『명정 40년』, 조지훈 시인의 『주도유단』, 김진섭 선생의 『주중교유록』, 신동한 평론가의 『문단주유가』 등의 문헌에도 없는 누가 교묘하게 만들어 낸 주법이지만 나는 이를 헌법처럼 준수하는 편이다.
또한 이태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꽃 아래 한 독 술을 놓고/ 홀로 앉아서 마시노라/ 잔 들자 이윽고 달이 떠올라/ 그림자와 세 사람일세(花下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라는 구절처럼 혼술도 좋고 몇 주당(酒黨)이 모여서 회포(懷抱)를 푸는 주석(酒席)도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이다.
한편 주당들이 술잔을 높이 들고 외치는 건배(乾杯)제의가 있다. 대체로 “위하여”를 외치는데 여기에는 건강과 성공 등을 기원하는 함의(含意)가 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누구의 성공을 위하여”를 언급하면서 술잔을 부딪는다. 어떤 주우(酒友)는 진달래(진짜로 달래면 줄래?)를 외쳐서 웃음과 핀잔을 함께 받은 적도 있었다.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해가 뜨도 술, 밤이 되도 술술/ 술 한 잔이 최고야/ 아니야, 아니야 연대(延大)가 최고야” 연고전(延高戰)이 벌어진 날 밤 신촌 로타리에서 응원가가 높이 울려 퍼진다.
금강산 문학체험, 두 갈래 체함
우리가 무엇인가 그리움을 지닌다는 것은 동시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반세기 가 넘도록 북녘땅 고향을 꿈에서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눈물로 삭여온 통일에 대한 희망은 금강산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쪽 땅을 한 번 밟아보는 짧은 기대가 멀지 않아 남북통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의 큰 계기가 될 것을 진심으로 소망하는 한(恨)일지라도 이;러한 비극적인 그리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기약없이 기다려보는 인내가 어쩌면 우리의 현실적 정서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금강산 문학체험>이란 배부른(?) 대열에 어찌하여 나도 끼이게 되어 동해항에서 금강호 뱃길에 올랐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관광객들 중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쓰라린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서 이미 수차례의 또 다른 금강산 여행이 있었지만 초입에 참가하지 못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모습도 더러 보였다. 모두가 설레임과 흥분으로 가슴 뛰는 시간이었지만 이분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동해 바다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검푸른 파도가 달려오고 있었다. 선상 구빈식당에서는 시인들이 모여 통일에 대한 문학강연과 시낭속, 시화전이 함께 열렸지만 갑판에서 바라보는 밤바다의 정취는 야릇한 상념에 젖게 했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남과 북을 갈라놓은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는 괜히 이국땅에 들어가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는 것도 그 동안 너무나 많은 단절의 벽을 이제사 넘어간다는 당혹감에서 이리라.
철책선 너머/ 얼어붙은 땅에는 지금도/ 한풍(寒風)이 불어 넘고/ 단절된 폐허의 지평선엔/ 탄흔(彈痕)도 지워졌지만/ 반세기 지나도록 피눈물의 수수께끼/ 오, 해동(解凍)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옭아맨/ 붉은 의식의 깃발은/ 고성능 스피커에서 두렵기만 한데/ 산야가 얼룩진 핏빛 한으로 남았느냐/ 북녘의 겨울은 언제나 갚다/ 전망 랜즈 속 다가오는 능선 저 멀리/ 푸르렀던 나무들은 아직도 빨갛게 얼어 있다.
언젠가 썼던 겨울 시 몇 편 중에서 <동토(凍土)>를 북한쪽 갑판에서 다시 읽어보는 감회는 왠일인지 소름을 돋게 했다. 육로로 가면 불과 한 시간의 거리를 무려 열 한 시간이나 걸려서 북한의 장전항으로 들어갈 수 있는 12해리 밖 도선구역에 도착했다. 북한의 시커먼 군함이 이끄는 대로 장전한 부두로 향했지만 아진 선착장이 마련되지 않아서 배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다. 다시 갑판에 바라보는 북한땅, 한 마디로 적막강산이다. 함구가 보이기는 하지만 새벽 전등불이 전혀 보이지 않고 사진을 찍지 말라, 쌍안경으로 조망하지 말라, 안내원의 엄격한 당부는 더욱 마음을 저미게 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려운 입국절차를 거쳐서 둘러본 만물상이나 구룡폭포도 절경이었지만 지금까지 가슴 뭉클하게 남아서 지원지지 않는 또 하나의 아픔 정경이 있다. 금강산 이야기는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을 모두 보고난 뒤에 하라는 어는 명언처럼 한 계절의 풍광만으로는 이러니저러니 할 것은 못되지만 저들의 모습은 너문 적막하고 삭막했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 현대건설이 새로 닦은 도로 양옆으로 산 입구까지 쳐진 철조망이며 50m 간격으로 부동자세의 경계근문 중인 나이 어린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며 철망너머 논에서 못자리 공동작업을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며 유령같은 회색콘크리트 건물이며 멀리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악네와 빨래를 개울바닥에 널어 말리는 모습이며, 꾀죄죄한 어린이들의 손 흔드는 모습들을 차창으로 응시하면서 어쩐지 측은해지기까지 했다. 더구나 산을 오르다 보면 붉은 글씨로 새겨서 곳곳에 세워져 있는 김일성 어록비나 그거 다녀갔다는 표지비는 또다시 마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미 어느 글에서 읽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서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런 표지석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남녀 감시원이 배치되어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유념해야 할 일은 저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손발로 만지거나 짚으면 안되고 어떤 물건을 얹어도 안된다. 만약 실수로 이와같은 행위가 있으면 즉각 관광증을 압수 당하고 규격화한 반성문을 써야 하며 몇 백 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해결되었다. 우리의 일행중에는 실제로 우비를 벗어 이 빗돌위에 얹졌다가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금강산은 아직도 무공해지대였다. 지금 막 산색은 연초록이 들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만물상 오르는 계곡, 저마다의 전설을 간직한 기암괴석의 대자연은 탄성을 자아낸다. 쌍촉대바위, 삼형제바위, 삼선암, 귀선암, 절부암 등 그 자태는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천하절경에 틀림없다. 가파른 철제사다리를 기어올라 천일문 좁은 바위문을 지나 드디어 천선대 정상에 도착하면 금강 최고의 걸작인 만물상이 한 눈에 들어와 천태만상의 바위와 천년신비의 언어를 전해주는 물소리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온정리에서 신계사 절터까지 자동차로 이동해서 목란관을 지나 금강문, 옥류동, 연주담, 비룡폭포, 구룡폭포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로 비경이었지만, 그 넓은 바위마다 붉게 새겨진 주체사상 운운의 글씨는 분단의 민족적 비극을 흐느끼는 폭포수로 남아 있는 듯하다.
아, 그리운 금강산,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금강산을 다녀온 지금, 그 신비의 절경보다는 북녘 동포들의 가슴 아린 기억들만 가득한 것은 어쩐 일일까. 문학체험, 분명한 것은 신선들이나 유유자적하던 발자취도 중요하고 천하비경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도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빙산의 일각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지나쳐 보았지만 한민족, 우리의 동포가 어쩌다가 서로 원수 대하듯 얼어붙어 실로 오랜 세월 만에 그 땅을 밟아보고 그들의 생활상을 그냥 담아둘 수가 있을까 싶다. 언젠가는 자유로운 왕래가 되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도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변함이 없지만 글쎄, 우리 문학이 감당해야 할 진정한 몫이 무엇인지 자선해보는 이번 금강산 문학기행은 그 의비다 자못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가서 보고 싶을 뿐이다.(1999. 3. 25.~26. 금강산 다녀옴)
개성 박연폭포에서 황진이를 찾다
나는 북한땅을 밟을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가슴 설레는 일이다. 지난 1999년에 금강산 문학기행 후에도 <남북문학교류>라는 명목(名目)으로 그야말로 남북의 문학인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문학을 통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그 첫 모색작업으로 서로 만나기로 극적인 합의가 있어서 1차로 서울에 북한 문인들을 초청하여 역사적인 문학교류사업을 실행하였다.
그후에 평양에서 2차 방문행사의 일정과 참가범위, 방법 등을 확정하고 방북교육까지 완료하고 출발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왠 일?. 북한땅이 온통 홍수를 입서 교통이 단절되고 마비가 되어 지정된 날짜에는 래북(來北)이 불가하다는 통보가 왔다는 것이다. 방북경비는 반환받았지만 무엇인가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연기하다가 북측에서 금강산에서 제2차 문학교류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이 오고 우리 정부가 수락하였으나 나는 불참하기로 했다. 평양 방문의 꿈이 사라졌고 금강산은 한번 가봤던 곳이기도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문인협회가 관계기관과 협의해서 개성을 방문((2008. 4. 30.)하게 되었다. 개성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서화담, 황진이, 박연폭포)과 선죽교 그리고 개성공단으로 연결하는 관광과 동시에 고려의 역사적인 유적이 사유(思惟)의 확장으로 자리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상념(想念)에 사로 잡혔다.
우리는 국립인천공항검역소 김포지소 도라산사무소에 도착하여 장황한 주의사항을 듣고 분단경계선을 통과하는 간단한 절차를 거쳐서 버스는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개성이다. 민둥산뿐이고 건물들은 회색이거나 빛바랜 채 서 있었지만 거리에는 통행하는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다만, 창문 커텐을 비스듬히 열고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 모습을 숨어서 내다보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북측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서 먼저 박연폭포를 찾았다. 내 고향 황계폭포와 별반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우선 송도삼절 중에서 박연폭포에 대한 안부를 물은 것이다.
분단 몇 년 만에 나선 개성 여행길/ 우리 공장 들어와서 북한 동포 도움 주고/ 이젠 통일로 가는 길이 빠르겠구나/ 민둥산을 돌아돌아/ 마주한 박연폭포/ 송도(松都)삼절(三絶)은 어디 갔나/ 몇백년을 한으로 펑펑 쏟은 눈물/ 그 흐르는 화음은 예대로인 채/ 불변의 강산에 전설로 남아있다/ 황진이 누님이여,/ 서화담 선생을 모셔와 그날의 흥취를/ 노래하소서. 사랑을 나누소서./ 폭포여,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개성 박연폭포에 와서」 전문
수천 년을 무슨 원한의 분노를 분출하듯 펑펑 쏟아지는 폭포수에 멍하게 시선을 뺏긴 것은 그 예날 황진이 누님과 화담 서경덕 선생이 시주(詩酒)와 가무(歌舞)의 낭만을 즐기면서 교유(交遊)했을 현인들의 낭만에 대하여 잠시 유추해본다. 그들은 가고 없는 빈 산골에서 낯선 관광객이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 시조 한 수를 외우고 돌아 섰다.
우리는 다시 개성시내에 나와서 선죽교에 왔다.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서 돌아가신 핏자국이 지금 남아 있다는 전설 같은 다리. 여기에서 이방원이 포은을 회유하기 위해서 「하여가(何如歌)」를 선창(先唱)하였으나 포은은 「단심가(丹心歌)」로 답창을 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 같은 역적인 현장을 돌아보면서 고려의 멸망과 이씨조선의 건국에 대한 비화(悲話)를 다시 새겨보았다.
이방원의 철퇴소리와 포은 선생의 비명이 아직도 들린다. 검붉은 혈흔(血痕)이 길손을 붙들고 한이 맺힌 충절의 노래 ‘단심가(丹心歌)’를 들려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황해북도 개성시 선죽동-한석봉의 글씨로 새긴 빗돌 ‘善竹橋’-어머니의 말씀대로 까마귀 싸우는 골에는 백로가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또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리’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도 아예 듣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아아, 이젠 전설로, 역사로 남았으나 분단선 저 너머로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슬픔만 풀풀 날리는데.--「개성 선죽교에 와서」 전문
나는 돌아와서 시 두 편을 완성했다. 지금도 북측 안내원이나 경비원들의 매서운 눈초리만 어른거리면서 우리 땅, 같은 민족이면서 분단의 고통을 지금까지 해소 못하는 우울한 개성 관광이었다. 더욱이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남북연락사무소마저 저들이 폭파시키는 만행에 다시 분노보다는 암울한 현실의 대한민국을 안타깝게 하고 있어서 우리의 소원인 통일의 꿈은 허상(虛想)인가, 요원하기만 하다.(2023. 3. 심상)
백두산 등정(登頂) 유감
나는 꿈에 그리던 백두산을 세 번이나 올랐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고 한국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해외심포지엄에 참가한 것이다. 1991년 7월 24일 중국 북경에서 한국문협 해외심포지엄에 참가하면서 지금까지도 중국과 정식 수교가 되지 않아서 무역대표부 준비요원 몇 명이 겨우 한국과 국가적인 정보만 교환하는 처지라서 우리 일행은 일본 동경 나리따공항으로 가서 다시 중국 상해행 비행기로 바꿔 탔다. 다음날 북경 심포지엄 장소에 도착해서 행사를 마쳤다.
처음 대하는 공산주의 중국은 어쩐지 삭막했으나 식당과 술집 등은 경제활동이 활성화 되는 양상이었다. 북경시내 자금성 등을 관광하고 연길로 향했다. 연길에서 백두산 정문에서는 군용 찦차에 분승(分乘)해서 백두산 꼭대기 천지(天池)까지 올랐다. 입구 입산환영 간판에는 <장백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어리둥절했으나 중국에서는 자기의 영토 표시로 장백산이라고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지만 조금은 어쩐지 씁쓸했다.
이 날은 안개가 짙어서 천지를 보는 것이 어려웠다. 일년에 약 15일 정도만 화창한 천지를 감상할 수 있다는 말에 한 시간을 기다려도 개이지 않아서 부득이 하게 하산하였다.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시 「백두산」을 두 편이나 썼다.
누가 이 영봉에 오르는 길을/ 막았는가, 소망을 막았는가/ 허리 짤린 몸둥아리의 한스런 날들이/ 안개비에 젖은 채 삭여지고 있다/ 누군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다/ 조심스럽게 응답하는 천지의 물결/ 그 장관이 지워져 간 역사 위에/ 불현 듯 다가오는 한반도// 내 다시는 이 길로 당신을 찾지 않으리라 / 우리 땅/ 우리 길/ 우리 산을 올라/ 환하게 영린 창조의 햇살을 맞으리라// 신비로움만 내 작은 온몸을 감싸 안고/ 안개 속을 떠간다/ 반만년 신화가 내 앞에 꿈틀대는 순간/ 천지여, 푸른 물 깊이 잠긴 어둔 한 자락 한이여/ 다시 대한민국 만세를 몰래 부르고/ 큰절을 올린다, 누군가-침묵뿐이었다/ 골 깊은 인욕(忍辱) 한 조각 둥둥 떠가는데.(「백두산 . 2」 전문)
다음은 2007년 9월에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연길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이번에는 서파쪽으로 백두산을 올랐다. 여기서는 1,442개의 계단을 올라야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천지 주변에는 관광객 사이로 중국 경비병들이 서있었다. 특이한 것은 <中朝境界線> 표말로 중국과 북한을 나누고 북쪽으로는 출입금지였다. 이 경계선에서 천지를 바라보면 수면 정중앙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경계선 아니 국경선으로 삼았다.
그 다음은 2015년 6월에 한국통일문인협회 문학기행에 참가하여 이 때에도 서파쪽 계단을 올라서 천지의 푸른 물결을 조망(眺望)하였다. 날씨도 화창하여 우리 땅 백두산 천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날이 오기만를 두 손 모아 기원하고 있었다.
서파 1442계단을 올라/ 백두산 천지와 교감한다./ 몇 년전 안개에 가려진 이곳에서/ 다시는 중국의 장백산을 오르지 않겠다는/ 다짐도 무용으로 바람에 날려가고/ 조선과 중국의 경계비 앞에서 / 다시 사진을 찌고 있다/ 통일이 되면 우리 땅으로/ 백두산을 오른다는 소망은/ 언제까지 요원한가/ 구름 한 떼가 중국에서 북한쪽으로 넘어간다/ 다시 백두산 천지 앞에서/ 중국 공안원의 눈길을 피하면서/ 한민족 소원 그 묵언의 기도만 / 바람으로 날리고 있는데/ 아아, 들리지도 않을 애잔한 함성을/ 장엄한 저 푸른 물결이 찰랑찰랑/ 분단의 비극 역사를 잊은 채/ 한가롭게 음미하고 있었다.(「다시 백두산에서」 전문)
세 번째 백두산을 오르면서 왜 우리 땅으로 백두산을 오르지 못하고 남의 땅 장백산을 올라서도 아아, 감격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가. 분단의 비극, 이산(離散)의 애통함 이러한 민족적인 비극의 현장에서 분통터지는 하소연만 남기고 돌아선다. 중국 공안이 경계선 저쪽으로 넘어가지 말라, 사진도 찍지 말라, 그쪽 경비병(북한군)을 노려보지 말라 등등의 금지조항만 듣고 계단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