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춘 밀라레빠의 일생...제 2 장. 고통의 나날
밀라레빠2 고통의 나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척들은 어머니 가르모 겐에게 살림을 맡기고, 그들은 필요할 때만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이를 반대하고 모든 살림권과 재산 관리를 장악해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름에는 큰아버지의 소작인으로 겨울에는 큰어머니를 위해 양털로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하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대가로 우리는 가축 먹이로나 알맞은 음식을 받아먹는 처지가 되었으며 몸에는 넝마 조각을 둘러야만 하였다.
심한 노동으로 손발은 부르트고 갈라졌으며 물집이 잡혔다. 급기야 영양실조에 걸린 우리는 비참할 정도로 야위고 쇠약해졌고, 금과 유리 장식으로 꾸미던 윤기 흐르는 머리는 거칠어지고 이 투성이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며 큰아버지 큰어머니의 사악한 처사에 분개했으나 그들은 이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동생과 나는 어머니가 큰어머니에 대해 "저 여자는 균 쯔바 빠르딘(귀족 자손의 고상한 사람)이라는 이름이 맞지 않고 두모 다꾸딘(막 굴러먹는 사악한 귀신)이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 우리는 큰어머니를 "잔인한 귀신"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우리는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마을 사람들조차 이제는 오히려 우리를 깔보고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부자 남편에 양순한 아내? 부드러운 양모에 좋은 모포? 그건 다 옛날이야기예요. 부자 남편이 죽으니 현모양처라는 것도 다 소용없잖아요?" 그들은 이렇게 수근 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혼녀 제세의 부모님은 우리의 처지를 동정하고 철 따라 나에게 옷과 신발을 대어 주셨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격려해 주셨다. "재산이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풀잎의 이슬과도 같다네. 재산을 잃은 것에 너무 상심 말게. 그 재산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자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노력과 근면으로 얻은 것이 아닌가? 때가 되면 자네도 그렇게 노력해서 그만한 재산을 모을 수 있을 걸세."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외가로부터 결혼지참금조로 작은 밭을 하나 얻게 되셨다. 외삼촌은 이 땅을 잘 경작하여 그 소득을 저축해 주셨다. 어느 날 외삼촌은 그 돈으로 많은 고기를 사고 술을 빚으셨다. 바야흐로 어머니 갸르모 겐과 우리들이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을 돌려 받기 위해 큰 연회를 베풀 것이라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졌다. 많은 친척들, 그 중에도 아버지의 임종시 함께 그의 유언을 들었던 사람들과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는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일어나 인사 말씀을 하셨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제가 이 연회를 열게된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자리의 여러 어르신네와 아이들의 큰아버님 큰어머님은, 저희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 밀라 세라뿌 갸르짼의 마지막 말씀을 잘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이제부터 읽어 올릴 유언장의 내용을 다시 한번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외삼촌은 사람들을 향해 유언장을 크게 읽으셨다. 그것이 끝나자 어머니는 다시 말씀하셨다. "우리 모자는 지금까지 큰아버님과 큰어머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제 데빠가는 살림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재산에 대한 권리를 돌려주시고 제세와 결혼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큰아버지가 돌연 고함을 치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재산이란 무얼 두고 하는 말이오? 밀라 세라뿌 갸르짼이 생전에 내게 빌렸던 재산들을 죽으면서 우리에게 반환했던 것인데 그것을 말하는 것이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야. 물에 빠진 자
를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격이구먼."
큰아버지는 난폭하게 상을 걷어차고 옷자락을 펼치며 큰어머니를 비롯한 그의 일행과 함께 나가 버리셨다. "오 밀라 세라뿌 갸르짼이여! 당신은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을 보시나요. 당신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후의 세계에서라도 우리들을 보고 있겠다고 그것이 정말이라면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어머니는 통곡하며 쓰러지셨다. 나와 여동생은 함께 흐느껴 울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외삼촌과 제세의 부모님, 그리고 우리의 처지를 동정한 몇몇 마을 사람들이 남아서 어머니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울지 마세요. 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차라리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에게 부조금을 걷는 게 어떻겠어요. 그걸 알게 되면 저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사람이라면 조금은 내놓을 게 아닙니까."
외삼촌도 같은 제안을 하셨다. "말씀하신 대로 따르렴. 그리고 데빠가는 기술을 배우러 보내고 너와 딸아이는 내 집에서 함께 살며 밭일을 돌보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큰아버지 큰어머니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스스로 알도록 하는 게 어떻겠느냐?" 어머니는 이런 제안을 울면서 거절하셨다.
"저는 저의 재산을 다 빼앗겼으면서도 이제껏 단 한번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구걸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로부터는 우리 땅을 한자도 되돌려 받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들의 학대를 받을지라도 새벽부터 밤중까지 뛰며 일하여 그들을 수치스럽게 히겠습니다. 저는 제 보잘것없는 밭만을 일구며 살겠습니다."
쨔의 미도께라는 마을에는 루 가든 간[入龍]이라는 그 지방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닝마파의 스승이 계셨다. 어머니는 읽고 쓰기를 가르치기 위해 나를 그리로 보내셨다. 친척들은 우리에게 약간의 원조를 해 주셨고, 특히 제세의 부모님은 내게 일용품을 보내주곤 하셨으며, 때로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제세를 보내기도 하셨다. 외삼촌 또한 어머니와 누이가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일거리를 갖다 주었고 누이는 누이대로 품팔이를 하여 자기 앞가림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가난은 나로 하여금 우울함과 참담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다. 따라서 당시 나에게 기쁨이란 전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스승을 모시고 아랫마을에서 베풀어진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게 되었다. 스승은 그 만찬의 주빈으로 윗자리에 앉으셔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술을 권유받고 계셨다. 나도 오랜만에 이러한 스스럼없는 분위기에 모든 시름을 잊고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가 완전히 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스승에게 올려진 헌물을 갖고 먼저 귀가하게 되었다. 나는 퍽 취해서 사람들이 만찬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것을 마음에 떠올리며 스스로 상당히 자만하고 있던 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길을 걸으며 나는 계속 노래를 불렀는데, 스승의 집으로 가는 길은 우리 집 앞을 지나야만 했었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보리를 볶고 계시던 어머니가 그러한 아름다운 음성의 소유자는 당신 아들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셨다. 어머니는 아연실색해서 보리를 내던지고 오른손에는 막대기를 왼손에는 재를 움켜쥐고 달려 나오셨다.
어머니는 내 얼굴에 재를 뿌리고 막대기로 후려갈기셨다. "오, 밀라 세라뿌 갸르짼이여, 이 소갈머리 없는 당신의 아들 녀석을 보십시오!" 라고 외치더니 어머니는 기절하셨다. 그때 누이가 달려 나왔다. 우리는 함께,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즐겁게 노래나 하고 있을 기분이더냐? 이 세상의 어떤 불행한 사람이라도 우리보다 더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애와 한탄에 젖어 우는 것뿐이다." 우리는 함께 목놓아 울었다.
내가 말했다. "어머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맹세코 저는 어머니의 원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흑마술을 익혀 우리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흑마술의 달인이 되어 우리에게 이러한 참혹한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저 사악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없애고 구대(九代)에 이르기까지 그 자손의 씨를 말리는 것이 나의 뼈저린 소망이다.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어머니에게 흑마술 스승께 바칠 수업료와 노잣돈을 마련해 주신다면 기필코 소원을 성취시켜 드리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유일한 재산인 조그만 밭뙈기의 절반을 팔아 얼마간의 노잣돈을 준비하고 흑마술의 스승께 선물할 공물 및 그 밖에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셨다.
나는 나대로 읍에 나가 여관에 며칠 동안을 머물며 동행자를 찾아보았다. 이윽고 위(중앙주)와 짱 주로 종교의 이것저것과 흑마술을 배우러 간다는 인상 좋은 청년 다섯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가리 돌 지방에서 왔다는 이들은 나와 함께 동행할 것을 허락하였고, 나는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며칠간을 묵게 했다. 극진한 대접을 하며 어머니는 몰래 그들에게 나에 대한 당부를 하셨다.
"젊은 양반들, 내 아들아이는 의지력이 약하다오. 그러니 댁들이 친구로서 좀 야단도 치고 격려도 해 주어서 그 애로 하여금 마술의 달인이 되도록 도와주시겠소. 그리만 된다면 내 꼭 그 은혜를 갚으리다." 이별의 날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별주를 권하며 단 하나뿐인 아들과의 헤어짐에 가슴이 찢기는 듯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흐느끼시고 또 흐느끼셨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어머니는 비통한 어조로 그러나 단호히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그 먼 곳까지 마술을 익히려 가는 목적을 잠시도 잊지 말도록 해라. 너는 저 젊은이들과는 처지가 같지 않다는 것도 명심하여라. 저 사람들이야 부잣집 도령들로 마술을 그저 재미나 유희로 배우러 가지만 우리의 경우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이다. 네가 만일 우리 적에게 철저히 복수할 만큼 충분한 마술을 익히지 못하고 돌아와 버린다면 내 정녕 네가 보는 앞에서 내 목숨을 끊으리라."
그것은 참으로 기약 없는 작별이었다. 나는 이제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 뵈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통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눈물로 어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흑마술의 스승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