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隆)과 양(陽)...금단의 비밀(태을금화종지) 3/4
한 농부가 망상에 사로잡혀 채소밭에서 오이를 훔치게 되었다. 그의 생각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 오이 자루를 내다 팔아서 그 돈으로 암탉을 사야지. 암탉은 알을 낳아 품어 병아리를 깔거고 그러면 나는 그 놈들이 자랄 때까지 모이를 주어야지. 그런 다음에 녀석들을 팔아 새끼돼지를 사야지. 그 놈도 자라 새끼를 낳으면 팔아서 정원이 있는 집을 사야지. 그리고 정원에는 오이를 심고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지. 힘이 센 파수꾼도 고용하고 나는 때때로 정원에 나가 '이 봐 잘 감시해'하고 주의도 줘야지." 그 농부는 너무 꿈에 부푼 나머지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감시하던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는 농부를 붙잡아 단단히 혼을 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꿈과 상상과 투영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완전한 낭비이다. 그대는 순간과 현재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그대의 의식이 모아져야 한다. 의식은 그대의 보물이다. 수세기를 흘러내려 오면서 고안되고 발견된 영적인 방법들이란 그대 가운데 보다 많은 의식을, 보다 많은 불을 창조하여 그대의 삶이 열정으로 타오르는 하나의 불꽃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흐리멍텅한 삶을 살고 있다.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그냥 되는대로 살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부주의는 어둠이요, 깨어있음은 빛이다. 이제 이 책은 그대 속에 보다 많은 빛을 창조하는 비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황금꽃이
두 정신병 의사가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한 사람이 말했다.
"자네는 잘 있군. 그런데 나는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가?"
사람들은 서로 묻는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그렇게 중요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에게 바보라고 하면 그대는 화가 난다. 왜인가? 때로는 슬퍼지기도 하는데 왜인가? 그대는 부서진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현명하다고 했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처럼 그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다. 이제 다른 누군가가 그대를 바보라고 한다.
그는 쉽게 아주 쉽게 그대의 현명함을 부셔버릴 수 있다. 그대의 카드놀이 장소에 그는 돌을 집어 던졌다. 이제 모든 것이 부셔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화를 내고 발끈하고 그토록 근심 걱정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그대에 대한 생각들만 알고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자 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바깥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 수 없다. 그런 방식이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바깥에서는 내 몸만이 보일 뿐이다. 안으로부터라야 나의 의식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거울 앞에 섰을 때조차도 그대가 보는 것은 몸 뿐이다. 거울 속에서 그대의 의식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거울에 비치지 않으며 반사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볼 수 없다. 그대는 눈을 감고 그것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살아간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은 언제든지 그것을 거두어 가버릴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지가 되어 버린다.
그대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아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빌지 않고 그대 자신과 직접 조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그대는 아직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자신과의 조우로, 자신을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보는 것으로써 시작된다.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론 안된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그대의 행동은 볼 수 있지만 그대는 볼 수 없다.
그대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대 뿐이다. 다른 누가 아니다. 그대의 하인에 의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누구에게 양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도 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의 내부에는 깨어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도 다른 사람의 의견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깊은 잠, 그야말로 우리의 내부는 깊이 코를 골고 있다.
한 정신 나간 교수가 이발을 하러 갔다. 그는 이발소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모자를 벗을 줄 몰랐다.
이발사가 말했다. "모자 좀 벗어주시겠습니까?"
"아이고, 이거 실례했습니다. 여기에 숙녀가 있는 걸 몰랐습니다. "
자신의 얼빠진 마음을 들여다 보라. 보는 행위가 주의력을 창출시킬 것이다. 그대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주시하라. 지나가는 생각들, 되살아나는 기억들, 분노의 구름, 슬픔의 깊은 밤, 기쁨의 즐거운 아침. 내면을 스쳐가는 모든 것을 주시하라. 더욱더 정신을 차려라. 서서히 그대는 전체적인 깨어 있음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태을금화종지」가 가르쳐 주는 바는 바로 내면의 빛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이다.
경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책에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이 책은 중국에 있는 신비주의 단체에서 생겨났다. 이 신비주의 단체의 창설자는 잘 알려져 있는 도교 조사(祖師) 여동빈(呂洞賓)이다. 여동빈은 어디서 이 비전을 전수받았는가? 여동빈 자신은 그것을 스승 관윤자에게로 돌리고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관윤자는 바로 노자(老子)가 도덕경을 써 준 인물이다. 노자는 평생 한 마디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글을 쓰라는 요청을 거듭거듭 거절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전수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쓸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참된 도(道)는 말하여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표현될 수 있는 도라면 이미 가짜이다. 그것은 오직 스승과의 내밀한 접촉을 통해서만 배워질 수 있다. 그 외에 전달될 방법이란 없다. 오직 스승과 제자가 일체를 이루는 깊은 곳, 제자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곳, 스승과 제자의 벽이 무너지고 그들의 의식이 서로에게 용해되는 그런 곳에서만 배워질 수 있다. 오직 그런 만남 속에서만, 그런 하나됨 속에서만 도는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거듭 거절했던 것이다. 그는 매우 오래 살았다. 그가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물소를 타고 중국을 떠났다. 하필이면 왜 물소인가? 그의 모든 가르침은 물 흐름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말했다. 물과 같아야 한다. 그 흐름, 유동성, 신선함, 항상 바다를 향해 움직이는 것과 같이‥‥‥ 그리고 물처럼 되어야 한다.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수용적이고 사랑스러우며 맹렬하지 않게‥‥‥ 바위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위는 강한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 물은 약한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결코 겉모습에 속지 말라. 결국 승리는 물의 것이며 바위는 찢겨 모래가 되어 바다로 떠내려 간다. 부드러운 물에 의해 결국 바위는 사라진다. 바위는 남성적이다. 그것은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이다. 물은 여성적임과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은 것이 승리한다. 물은 언제든지 굴복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굴복당함으로써 승리한다. 그것이 바로 여성적인 길이다. 여성은 언제나 굴복을 통해 승리한다. 남성은 정복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궁극적 결실은 패배이다. 그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물소를 타고 중국을 떠났던 것이다.
어디로 갔는가?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아 히말라야로 갔던 것이다. 참사람(眞人)은 사는 법과 죽는 법을 안다. 그는 완전하게 살다가 완전하게 죽는다. 그는 축복 속에서 살다 축복 속에서 죽는다. 완전히 홀로 있기 위해 그는 히말라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경에서 붙들렸다. 국경에서 그를 붙든 사람은 윤희(尹喜)라는 관령(關令)이었다. 그는 중국 국경의 최변방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노자는 그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윤희는 노자를 설득했다. "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떠나면 곧 몸도 버리시겠죠 제발 몇 자만이라도 남겨 주십시오 만약 거절하신다면 저는 선생님을 보내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생님께서 지불해야할 통과 비용입니다. " 그리하여 노자는 윤희의 집에 사흘을 머물면서 『도덕경』을 썼던 것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태을금화종지』는 여동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은 그것을 노자가 『도덕경』을 써 주었다는 스승 윤희에게 돌리고 있다. 윤희는 제자들에 의해서 관윤자(關尹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는데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노자를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노자는 평생에 걸쳐 거절해 왔는데 이 사람의 요청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사람에게는 노자조차도 거절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태을금화종지』가 노자와 관련되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노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다. 노자 자신은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전에 있던 것이며 이후에도 또 다시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에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을 가져왔을 따름이다. 항상 그렇다. 진리는 동일한데 표현만 달라진다. 노자가 말한 것은 그 이전에 크리슈나가 말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크리슈나가 말했던 것은 나중에 붓다가 말한 것과 똑같았다. 붓다가 말했던 것은 그들의 표현방식이 너무 달라 그 핵심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지성이 요청되겠지만 마호메트나 예수나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던 것과 동일하다. 그 형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표현 수법이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요, 다른 개인들이며 그들의 독특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새롭지도 낡지도 않다. 진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것은 영원하다.
이 책, 『태을금화종지』는 다시 살아나 신성(神性)으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는 영원한 원천들 중의 하나다. 경문으로 들어가자.
여조사(呂祖師)께서 말씀하셨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
도( Tao )라고 하는 말은 본질적으로 길을 의미한다. 목적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여질 수 없다. 목적지는 알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으며 형언할 수도 없는 채로 남는다. 그러나 그 길에 관해서는 무언가가 말해질 수 있다. 그래서 도가( Taoist)들은 신( God )이니, 진리니, 니르바나( Nirvana)니 하는 말들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붓다는 말한다. 붓다들만이 길을 볼 수 있으며 그 길을 따를 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진리는 그대 자신의 경험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규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길은 규정지을 수 있다. 확실해질 수 있다. 스승이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순 없다. 그러나 길은 줄 수 있다. 일단 길이 있게 되면 필요한 것은 그 위를 걷는 일뿐이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내가 그대 대신 걸을 수 없고 그대 대신 먹을 수 없다. 그대 대신 살 수 없고 그대 대신 죽을 수 없다. 이 일들은 각자가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이미 그 길을 걸은 자이다. 도란 단순히 길을 의미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
멋진 정의이다. 조사께서는 말한다. 홀로 존재하는 것, 어느 누구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늣 것, 그대가 그 위를 걷든 걷지 않든 간에 항상 존재하는 것. 누가 걷고 걷지 않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전존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따른다. 알고서 그것을 따를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무한한 기쁨이 될 것이다. 모르는 채 따른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넘어질 것이며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정원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지만 그는 얼이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해있거나 혼수 상태에 있거나 마취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정원에 데리고 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적이다. 새소리가 들리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꽃내음이 바람결을 타고 와 그의 코를 간지렵혀도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태양이 그의 위에 빛나고 빛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도 그는 모를 것이며 산들 바람이 그를 어루만져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를 나무 아래 시원한 곳에 눕혀도 그는 모를 것이다. 사람이란게 이렇다.
우리는 도 속에 있다. 다른 있을 만한 곳이 있겠는가? 사는 것은 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은 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숨 쉬는 것은 신 속에서 숨쉬는 것이다. 다른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듯이 도 속에 사는 우리도 완전히 도를 망각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너무도 명백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도를 잊는 이유이다. 물고기는 바다를 너무도 잘 안다. 그 속에서 태어나 결코 그 곳을 떠나지 않는다. 물고기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도 속에 있고 신 가운데 있으며 도 속에서 도를 통하여 산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도는 존재한다. 도가 없이는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별이 뜰 수 없으며 피가 흐를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탱해 주는 기본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 때에야 생명은 존재한다. 존재 속의 광대한 질서를 보라. 그것은 혼돈이 아니다. 질서다. 왜 거기에 그렇게도 많은 조화가 존재하는가? 조화를 이루어 유지시켜 주고 만물을 일치시키는 법칙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우리 존재를 통하여 도와 어울린다.
도에는 이름도 형상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본성이요,
하나의 근본정신(primal spilt)이다.
생명의 바다가 우리를 포용하고 있다. 순수한 본질은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그것은 존재요, 근본정신이다. 어떤 이름도 그것을 담을 수 없다. 모든 이름이 그것의 이름이다. 그리고 어떤 형상도 도에 대하여 특별한 것이 될 수 없다. 모든 형상이 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도는 수백만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나무와 함께라면 푸르고 꽃과 함께라면 붉다. 사람과 함께라면 사람이요, 물고기와 함께라면 물고기다. 그것은 동일한 법칙이다. 도라는 말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넣어도 무방하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도가들은 도(道)라고 부른다. 불교도는 그것을 다르마( Dharma )라고 부르며 유태인들은 로고스( Logos )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두 같은 의미이다. 어떤 이름도 그것을 주워 담을 수 없으며 혹은 아무 이름으로도 표현이 가능하다.
본성과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의 빛(天光) 속에 들어 있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있다.
그대는 형상을 볼 수 있고 그대의 몸을 볼 수 있다. 몸은 형상이요, 본질을 싸고 있는 실체이다. 그러나 본질은 볼 수 없다. 그것은 눈에는 안보이며 감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매개체도 없이 즉각 느껴져야 한다. 그대는 내 몸을 보고 나는 그대의 몸을 본다. 이것은 매개체를 통해서이다. 내 눈이 그대가 여기 있는 걸 알려준다. 그대의 눈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눈이 혹시 속이고 있지나 않은지. 그들은 때로 정말 속인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대는 새끼줄을 뱀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이 뱀처럼 보일 때 그것은 정말 뱀처럼 위협을 준다. 그대는 두려워 뛰기 시작한다. 그대는 또 사막에서 그곳에 있는 오아시스를 보기도 한다. 그것은 그대가 너무 목이 말라 그것이 이곳에 있기를 바란 나머지 스스로 만든 착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눈은 종종 속인다. 그러므로 누가 알겠는가. 만약 진리가 매개체를 통해서 알려진다면 거기엔 항상 의심이 남게 된다. 거기에는 확실성이 없다. 절대적인 확실성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해야 한다. 대강 확실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한 길밖에 없다. 즉 매개체가 없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감각을 통하지 않고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가 알려지는 방식이다. 그대는 생명을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경험이 아닌 주관적인 경험이다.
본성과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의 빛 속에 들어있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 있다.
그대는 이 양 눈을 가지고 있다. 양 눈은 도가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 현대 과학만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눈은 단지 보이는 대로의 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 눈은 그대 속에 있는 음과 양을 대표한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뇌가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대의 오른쪽 뇌는 여성적이요, 왼쪽 뇌는 남성적이다. 그래서 그대의 한쪽 눈은 양(남성)을 대표하고, 다른쪽 눈은 음(여성)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대 속에서 음과 양이 만날 때 그 만남은 하늘'이라고 불려진다. 그대의 음과 양이 합일을 이루는 바로 그 내적 만남.
예수는 말했다. "양 눈이 하나가 될 때 빛이 생길 것이다. "
그는 도교의 연금술사처럼 말하고 있다. 양 눈이 하나가 되면 빛이 생길 것이다. 양 눈이 하나가 될 때, 음과 양이 서로의 속으로 사라질 때, 그것은 궁극적인 오르가즘의 체험이 된다. 그대가 연인과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것은 그 체험의 일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순간적이라서 그대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지나가고 난 후라야 그대는 알아차린다. 그것은 찰나에 사라진다.
그러나 맛은 보았다. 음과 양이 합일될 때의 맛을 조금이나마 본 것이다. 이것은 내적인 만남이다. 순간이지만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탄트라(tantra)와 도( Tao )와 요가( Yoga )와 세계의 모든 위대한 가르침들의 사명이었다. 내부의 남성과 여성을 인식시키는 일, 탄트리카( Tankika)들은 그것을 쉬바( Shiva)와 샤크티( Shakti )라고 불렀고, 도교도들은 그것을 음과 양이라고 불렀다. 그대 속에 있는 음과 양의 극, 그대 속에 있는 밤과 낮, 그들은 서로 만나야 한다.
하늘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양 눈 속에 들어있다. 양 눈이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을 볼 수 없다. 하나가·될 때 그것이 일어난다. 엄청난 빛의 폭발이 있게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그것을 화염의 폭발이라고 불렀다. 노자는 그것을 빛의 폭발이라고 불렀다. 똑같은 것이다.
그대는 세례 요한의 진술과 조우해야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내 뒤에 불로 세례를 주러 오시리라고 그가 말했던 바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물세례는 외적인 세례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물은 외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기억하라. 외적인 흐름은 하향식 흐름과 같은 의미며, 내적인 흐름은 상향식 흐름과 같은 의미다. 아래로 흐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밖으로 흐르며 안으로 흐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위로 흐른다. 물은 항상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물은 외적인 흐름을 대표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 여행은 외적 여행이다. 불은 언제나 위로 향한다.
그리고 '위'는 '안'과 동의어이다. 그 여행은 항상 내면으로이다. 세례 요한은 말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나는 종교의 겉모습을 주고 있다. 내 뒤에 구세주가 오면 너희에게 내적인 세례, 즉 불의 세례를 줄 것이다. 예수 자신은 계속해서 외쳤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그러나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그 의미는 완전히 왜곡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그것을 잘못된 행위에 대한 뉘우침으로 해석하였다. 그것은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회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되돌아감과 복귀와·들어감이다. 그것은 되돌아가 본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 repent )라는 낱말은 돌이킴( metanoia )을 의미한다. 돌이키는 것, 180도 돌아서는 것, 계속 밖으로만 흐른다면 그대는 물로 남는다. 안으로 돌아설 때 그대는 불이 된다. 그리고 양 눈, 양 불꽃, 의식의 양쪽이 교합하여 완전히 연결되어 하나의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을 가리켜 플라톤은 '홀로를 향한 흘로의 비상( flight of 沆e alone to the alone )'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