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형제는 6남매 아들 2명 딸 4명 그 중에 제가 둘째로 자랐습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서 그런지 좋은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식구)가 많았습니다. 할머님 고모님 삼촌 우리 부모님 우리 형제 제 생각에는 4대가 살고 있었는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밥상위에 숟가락을 먼저 들면 안됩니다. 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드셔야만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밥그릇은 상위에 올려 놓지도 못했습니다. 밥상 밑에 놓고 먹어야 했습니다. 밥상위에 젖가락이 있어서 쥐어봤더니 여자가 어디 젖가락을 만지노 하시면서 꾸중을 많이 했습니다.
먹을것도 주지도 않으면서 동생 업고 댕기라고 합니다. 여덞살때 얼라 업고 댕긴다고 학교에 가지도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학교 댕긴다고 자랑하면 저는 멍하니 쳐다만 보았습니다. "엄마 나도 학교 가면 안돼? 앞집 옥이는 학교 가던데... " 엄마를 졸랐습니다. 여자는 공부하는게 아니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루는 동생 업고 엄마한테 동생 젖 먹이로 가는데 산에서 '엄메~' 하고 우는 소리에 산을 쳐다보니 시커먼 짐승이 나를 보고 울었습니다. 나는 늑대라고 논두렁에서 꼼짝도 못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무서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업은 동생은 배가 고파서 울고, 나는 무서워서 울고 한참 울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왜 우노?" 하셔서 "저기 늑대 있어요."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저거는 늑대가 아니고 염소다. 어서 지나가거라." 하셨습니다. 논에서 일하시는 엄마가 꾸중을 했습니다. "동생 배고픈데 왜 인제오노?" 하셨습니다. "오는데 늑대 있어서 못왔지" 하니 '늑대가가 어데 있더노?' 했습니다. '저쪽 산에 그게 염소지 늑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생 젖먹어 주셨습니다. 동생 업고 오는데 염소가 무서워서 지나가는 할머니 만나서 "할매 나 저기까지 델다 주이소 늑대는 무섭다." 하니까 할매가 "그래 날 따라온나" 하시면서 염소 안보이는데 까지 델따 주셨습니다. "딴 아이들은 학교 가는데 니는 학교 안나가?" 물었습니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케요 할매" 우리 엄마는 '니는 동생이나 잘봐라' 몇날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엄마 나 공책하나 사주세요"하면서 졸랐습니다. " 머슨 소리하노 오늘은 얼라 보면서 물도 들고와야한다.(집안에 샘물이 없으니) 또랑물 단지에 가득 채워놔라." 말씀하시고 들에 나갑니다. 언니 보고 언니 옴마가 단지에 물 가득 채우라고 하셨는데 언니랑 둘이하자 언니는 도망가고 없습니다. 언니는 꾀가 많아서 요리 조리 빠져나갑니다. 나는 동생 업고 단지 반쯤 물을 갖다 부었놨습니다. "엄마 언니는 왜 일안하노?" "쓸데없는 소리한다. 니가 하면 되지" 말씀 했습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나만 동생봐야 되고 일도 해야 되고 엄마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짐승을 좋아했습니다. 돼지, 개(강아지) 많이 길렀습니다. 하루는 돼지새끼가 틈사이로 밖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개가 물어 죽었습니다. 돼지새끼 잘못봤다고 얼마나 맞았는지 모릅니다. 잠도 집안에서 못자고 밖에서 떨면서 몇일 보냈습니다. 낮에는 산에가서 나무(뗄깜) 해오라고 하십니다. 소나무 가지 낫으로 찍어서 새끼로 묶음 한다발씩 해다 날랐씁니다. 돼지새끼 죽는다고 잠은 방에서 못자고 소죽 끓이는 정지에서 자야 했습니다. 몇일이 지나니까 화가 조금 풀린것 같아서 살그머니 방에 들어가서 잤습니다. 할매보고 졸랐습니다. "할매 나 공책 한권 사주면 안되요? 나도 공부하고 싶다." 말씀 드렸는데 딸년이 무슨 공부하노 시끄럽다고 말씀 합니다.
겨울이 되었는데 찬물에 빨래 해오라고 했습니다. 또랑에 빨래하러 가니까 동네 사람이 "아이고~ 어린것이 찬물에 빨 수 있나. 어구~ 니는 주워서 온 딸이다." 놀렸습니다. 그래도 그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겨울 날씨에 옷도 얇지 먹을것도 배불리 먹지 못하지 그때는 서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내가 이름도 못쓰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어른이 시키는데로 일만하고 지냈습니다. 하루는 손등에 때가 끼어서 손등에 피가 나기 시작합니다. 또랑에 가서 돌로 손등을 밀었는데 상처가 커졌습니다. 때가 덕지 덕지 붙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동네 할매가 보고 손에 때가 많이 끼어서 상처가 난네 하면서 할매 집으로 델고 가더니 소죽 끓이는데 짚 삶은걸 대야에 담아서 짚으로 손등을 씻어 주셨습니다. 따갑고 아프지만 참고 깨끗이는 못 씻어도 조금 이삐게 씻어주셔서 할매 고맙다 손을 씻어줘서 그래 얼렁 집에 가거라. 니거 오마 찾을라 말씀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0살때쯤 엄마 동네 아이들 마카다 학교 가던데 나도 가면 안되나 했더니 몰라 한번 가보고 온너라 하락을 했습니다. 나는 책가방도 없이 친구들 따라 학교에 가니 친구들은 책이랑 연습 공책에 글씨를 쓰고 하는데 나는 멍 하니 앉아 있으니 선생님께서 니는 누구고 학교 입학 했나 말씀하셨습니다. 몰라예 친구들 따라 왔어예 하니까 올해 입학했는 교실에 가봐라고 말씀했습니다. 입학했는 친구들도 책가방 책이랑 모두 갖고 있더군요. 나는 책이 없이 앉아만 있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 저도 책 한권 주이소 했더니 책은 주시면서 내일 엄마 모시고 온나 말씀했습니다. 집에와서 엄마 선생님이 엄마 모시고 오라카데 엄마 내일 학교 같이 가자 응 지랄한다 학교 갈 여가 없다 딸년이 무슨 공부하노 동생보고 물이나 길러다 부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내 고집대로 학교에 매일 갔습니다. 이름도 쓰고 공부도 하니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마치고 집에가면 책보따리는 엄마 몰래 숨겨놔야 했습니다. 학교를 못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목이 기다란기 머하고 인제 학교 왔노 놀렸습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해라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체육도 열심히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계속 학교에 다녔습니다. 모르는 것은 선생님께 무조건 물어서 배웠습니다. 학교 마치고 집에가면 부모님 시키는 일 부지런히 하고, 동생도 잘 업어주고, 물도 잘 기러다 붓고, 산에 나무도 한다발해서 집으로 굴렸습니다. 나무를 해서 차곡 차곡 쌓았습니다. 나무를 쌓았는데 보기 좋았습니다.
밤에 호롱불에 공부할려고 하면 못하게 했습니다. 호롱불 기름 없다고 속상해서 이불 덮어 쓰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친구들은 이름도 잘 쓰고 공부도 잘 합니다. 그래도 친구들이 몽땅 연필 주면서 니 이름 한번 써봐 놀렸지만 저는 천천히 내 이름 석자 이두용이라 썼습니다. 학교 마치고 친구들은 고무줄 놀이 하고 놀다가 ㅏ집에 가는데 나는 놀지 못했습니다. 늦게 가면 다음날 학교 못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할매 오늘 내 이름 쓰는 거 배워서 이름 썼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 잘한다 그렇게라도 해봐라 딴 아들은 2,3학년이 되었는데 니는 인제 1학년인데 자꾸하면 된다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저는 엄마 밥하는데 불도 때주고 정지 바닦도 쓸고 엄마를 도와 드렸습니다. 엄마 나 오늘 저녁에 호롱불 켜놓고 공부해도 되나 물었습니다. 그래 해봐라 말씀했습니다. 저 혼자서 공부를 했습니다. 다음날 학교가서 받아쓰기 10점 만점에 7점 맞았습니다. 삼촌이 물어보았습니다. 공부하니 좋더나 예 재미있어예 하고는 저 나름대로 학교 댕기고, 동생 돌보기, 소 꼴 베오기 등등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4,5학년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운동화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체육대회에서는 넓이뛰기 , 악기불기 선수로 제가 나가게 되었씁니다. 넓이 뛰기, 악기 불기 연습을 매일 연습해야 하는데 소먹이 풀은 제가 담당이라서 늦게 마쳐도 무조건 꼴은 한망태 베야하니 그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넓이 뛰기, 악기 불기 연습을 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소 꼴은 책임지고 베다가 날랐습니다. 어느날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악기불기, 넓이 뛰기 선수로 성주 국민학교에서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성주군 국민학교 전체가 몰렸습니다. 넓이 뛰기는 3등 했습니다. 악기 불기는 여러명(단체)로 했는데 이것도 3등 친구들 모두가 기쁜 마음 이였습니다.
체육으로 연습을 해서 다름 기회를 한번 더 할려고 해도 어려운 시절이라 공부하기도 힘들고 가난하니까 모든 것이 정말 힘이 듭니다. 학교가면 공부도 중요하지만 학교생활 친구와 관계, 학년이 높이 올라갈 수록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집안이 넉넉해서 내가 하고 싶은거 할 수 있음 모르지만 집안이 어렵다보니 할 수가 없으니 더욱 마음만 아팠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체육 연습함 해보자고 말씀 했습니다. 친구들은 찬성을 합니다. 저는 집에와서 엄마한테 얘기 해보니 안된다고 합니다. 엄마 내가 집안일 열심히 하고 엄마 도와주면 안되겠나 하면서 졸랐습니다. 엄마가 무슨 연습하노 달리기, 넓이 뛰기 등등 연습해서 선수 나갈라 칸다 그라마 소 꼴하고 소 죽 끓이는 것 집안 청소 (식구가 대가족이니까) 옷 세탁하는 것, 정지 설겆이 하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집안일하고 엄마 일 많이 도와 드린다고 약속하고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농구연습, 달리기, 넓이 뒤기 등등 후배, 선배들이랑 같이 연습해서 군체육대회 나가기로 결정해서 연습을 한달 보름 하고 가을 군 체육대회에 나갔습니다. 달리기 100m 9초, 넓이 뛰기 2m40으로 결과는 좋았습니다. 학교에서 체육(육상선수)로 연습을 권유했지만 할수가 없었습니다.
6학년때 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동네 정미소가 두군데 있는데 한군데는 개인꺼 한군데는 농협 조합원꺼 개인꺼 월세로 얻어서 정미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없는 개인이 있는 조합원하고 경쟁이 붙어가 됩니까 조합원에서 공짜로 나락 보리를 찧어 주기도 하는데 우리는 월세로 세을 띄니까 누가 방아 찧어도 옵니까 동네사람 친척 아님 모두 공짜로 찧어 주는데로 갔습니다. 우리는 찧어주고 세를 띄니까 친척 분만 왔습니다. 하루 하루 지내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조합원 방앗간은 매일 팡팡 기계 소리가 나는데 우리는 방앗간 문만 열어놓고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고 있으니 누가 방아 찧으로 옵니까 아버지께서 막거리 한말 받아놓고 방아찧으러 오는 분은 막걸리 실컷 드시게 하고 점심도 해드리고 오만짓을 하다가 나중에 아버지께서 날 보고 소구루마 끌고 가서 나락 보리 실고 오라고 했습니다. 안 할수도 없고 제가 소구루마 몰고 동네 댕기면서 나락 보리 가마니 실고 아버지 방앗간에 실어다 날랐습니다. 친구들은 공부학다고 학교 가는데 나는 학교에 안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린 내가 소구루마 몰고 댕기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가정 형편이 안 할수가 없었습니다. 보리나 나락이나 작다고 안실고 오면 안됩니다. 한가마니도 실고 두가마니도 실고 동네 사람 원하는데로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참고 나락보리 가마니 실고 다녀야 했습니다. 보리 타작때 되면 남의 집에 보리 타작하러 댕겨야 했고, 가을 되면 나락(벼) 타작 하러 집집마다 댕겨야 했습니다. 방앗간에 방아 찧을 것 실고와서 방아 짛은것 집안에 실어다 주고 엄마 아버지 방앗간에 계시니까 집에 오면 살림(밥) 살아야 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세월이 흘러서 조합원 방앗간은 기사 월급줘야 되고 하니까 결국은 우리 쪽으로 넘어왔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것 같았습니다. 조합원 방앗간은 없어지고 우리가 월세 얻었는것 한곳에만 있게 되었는데 방앗간 주인이 우리보고 방앗간을 사라고 했습니다. 본인은 기술 부족으로 방앗간을 못한다고 얘기 해서 아버지께서 살아가면서 돈주기로 결정하고 방앗간을 사셨습니다. 한편은 좋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나락 보리 가마니 실어다 날라야 하니까 앞으로가 캄캄했습니다. 남동생이 어리니까 내가 남자, 여자 하는 모든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첫댓글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어려웠던시절을 담담하게 잘 쓰셨네요.틈틈히 생각나는 대로 쓰시다 보면 작품이 됩니다.
시작이 좋습니다.좋은 책이 만들어 질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좀 더 분발하셔서 내가 부모에게 바라는 기대나 부모가 나에게 거는 기대, 또는 처녀 때 이야기, 사랑 이야기, 남편과 만난 이야기. 자녀 아야기도 쓰시면 좋겠습니다 .홧팅 이야요!!!